카라바지오,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있는 다윗〉, 1610, 125*101cm, 보르게세 미술관
“돌을 무릿매로 던져서” 소년 다윗이 거인 골리앗을 쓰러뜨리고, 골리앗의 칼로 그의 목을 베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이름을 능멸한 적장 골리앗을 제압한 공으로 왕의 사위가 될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였다는 명분과 왕의 사위가 되는 실리를 모두 챙겼다. 그런데 카라바지오(Michelangelo da Caravaggio; 1517-1610)가 그린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있는 다윗’의 얼굴은 슬프다. 득의만만한 표정은 찾을 수 없고 오히려 연민이 가득하다. 카라바지오는 왜 다윗의 얼굴 속에 슬픔과 연민을 담았을까.
목이 잘린 골리앗은 카라바지오의 자화상이다. 그는 자신이 죽던 해인 1610년에 이 기괴하고 충격적인 자화상을 남겼다. 바로크 시대를 연 화가답다. 바로크(Baroque)는 본디 그 말뜻이 ‘터무니없다’, ‘기괴하다’는 뜻이니까. 그는 자화상마저 왜 터무니없이 기괴하게 그렸을까. 카라바지오는 살인, 폭행, 기물파손 등으로 당국에 체포된 횟수만 15번, 감옥에 갇힌 건 7번이었다고 한다. 죽음이 두려웠던 걸까, 죽음을 예견했던 걸까. 자화상을 그린 후 ‘로마 남쪽의 해변에서 죽었’다는데 ‘암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골리앗으로 그려진 카라바지오는 목이 잘린 채 피를 줄줄 흘리고, 오른쪽 눈은 반쯤 감기고, 왼쪽 눈은 치 뜨인 채 여전히 무언가를 보고 있는 듯하다. 무언가를 응시한 채, 반쯤 열린 입으로 유언을 하고자 하나, 입만 달싹일 뿐 혀가 이미 말라버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골리앗으로 분한 카라바지오는 내 초상이 아닐까. 횡령과 스캔들, 욕망과 돈을 사랑함, 온갖 왜곡과 불신으로 일그러진 우리의 초상 아닌가. 보고자 하나 볼 수 없고, 말하고자 하나 말할 수 없는, 그렇게 죽어가는 혹은 죽어있는 우리 교회의 초상화를 카라바지오가 400년 전에 의뢰받아 내놓은 것만 같다.
다윗이 오른손에 쥐고 있는 칼에 핏자국이 없다. 화폭엔 보이지 않는 칼끝으로는 골리앗의 목을 자를 수 없을 것이다. 애초에 다윗에겐 칼이 없었다. 골리앗의 목을 자른 칼은 자신의 칼집에 있던 것이다(삼상 17:51). 그림 속 다윗 손에 들린 칼엔 피가 묻지 않았고, 성경 속 골리앗의 목을 벤 칼은 골리앗 자신의 칼이었다. 보고 싶어도 볼 수 없고 말하고 싶어도 말할 수 없다면, 내 허리에 찬 칼집을 살펴볼 일이다.
유난스런 일생을 살고, 비극적인 죽음 직전에 카라바지오는 목 잘린 골리앗으로 분한 자신을 슬픔과 연민으로 바라본다. 슬픔과 연민을 담은 다윗의 눈으로 마지막으로 자신을 응시하고 싶었던 걸까.
마태에 의하면, 예수가 다윗의 후손이다. 목 잘린 골리앗 같은 나를 우리를, 예수께서 슬픔과 연민으로 보아 주시는가. 소년 다윗의 슬픔과 연민 덕에 아직 우리에게 소망이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