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대기자, 연암
열하에서 북경으로 돌아와 머물 때 융복사라는 절에서 열리는 시장을 구경했다. 매달 1일, 11일, 21일에 매달 3번 서는데, 시장에는 말과 수레가 꽉 메우고 있었다. “조정의 공경과 사대부들이 연달아 수레와 말을 타고 절 안에 이르러 직접 물건을 고르며 사고 있었다. 갖가지 물건이 절의 마당에 그득하고, 진주와 옥으로 된 값진 물건들이 쌓여 있었다. 물건이 발끝에 차일 정도여서, 마음을 쭈뼛쭈뼛하게 만들고 눈을 휘둥그렇게 한다. 장막을 설치하여 징을 두드리고 북을 치는 자는 재주를 부리거나 요술하며 돈벌이하는 사람들이다.”
정사가 건륭황제를 만난 날은 8월 11일, 만나기 전에 군기대신이 정사에게 황제의 예상 질문 두 가지를 알려준다. “너희 나라에는 사찰이 있느냐?”, “관운장 사당이 있느냐?”였다. 정작 황제 질문을 보면 먼저 회족 태자를 만나고 있었는데, 몇 마디 하지 않고 나가게 하고, 다음에 세 사신과 세 통사(통역관)을 들라 명했다. 모두 무릎을 꿇고 무릎걸음으로 들어갔다. 황제는 “조선 국왕은 평안하신가?”, “만주어를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자 상통사 윤갑종이 만주어로 “대략 이해합니다.” 답을 하자 황제가 기뻐했단다. 연암은 황제의 외모와 표정을 기록하고 기자로서 해야 할 역할을 했다. 자신의 수행 하인인 장복, 창대는 물론 역관들과 어의, 다른 일행의 마두와 하인들까지 이야기를 나누며 인간적인 친밀감을 느끼도록 노력했다. 연암은 큰 키에 얼굴이 수려하고 수염은 적어 옛날 사람 같은 풍채가 있다. 본성이 술을 좋아하고 잘 땐 코를 골았고, 서양 금을 타면서 노래하는 사람의 음악을 즐겨 듣고, 호탕한 이야기와 웅장한 변론으로 주위 사람을 놀라게 했다. 신령한 풍채가 늠름해 용과 호랑이를 잡고, 호랑이와 범을 치는 기상이 있었단다.
청의 건륭제 이후 서서히 기울어지는 계기가 된 원인이 간신의 득세였다. 대표적인 인물이 화신인데 그는 만주족 출신의 30세 초반의 젊은이였다. 외모가 준수하고 말을 막힘이 없었는데 더군다나 만주족이라 그를 총애하여 초고속 승진을 시킨다. 황제가 시키면 무엇이고 차질 없이 이행하여 신임을 얻는다. 그즈음 연암이 열하로 간 것이다. 연암이 대궐 주위에서 연희를 구경하는데 한 젊은 관원이 시종을 앞세우고 거들먹거리며 나타난다, 호부상서 화신이다. 정수리에 수정을 달고 눈매가 맑고 수려하고 얼굴은 준엄하고 날카로웠다. 그릇이 작아 보였고, 나이는 갓 서른하나란다. 최근 5~6년 사이에 벼락출세하여 그의 어린 아들이 황제의 6살 난 황녀와 약혼했단다. 황제가 예순다섯에 낳은 딸이라 끔찍이 사랑하여 황제가 화를 내면 내시들이 어린 공주를 안아다가 황제 앞에 내려놓으면 황제의 분노가 풀였단다. 그 황녀를 며느리로 삼았으니 그의 위세를 알만하다.
연암은 대 탐관오리 화신의 운명을 예언하였다. 호부상서 화신은 황성 수문 9개를 경비하는 금군 제독을 겸하여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화신이 황제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뇌물에 얼마나 공력을 들이는지 알 수 있다. 이부상서로 승진한 화신은 딸을 황제의 손자에 시집을 보냈다. 세력이 하늘을 찌르고 남았다. 부패는 부패를 낳기에 이미 그때 초강대국 청나라는 조정에서 부정부패, 탐욕과 안락으로 서서히 몰락의 길로 접어든다. 연암의 화신이 위태로울 수 있다는 연암의 예측은 정확하게 맞아서 건륭이 죽고 화신은 가경제의 대리청정을 맡았으나 곧바로 부정부패 혐의로 축출된다. 화신은 모든 가산을 몰수당하고 자진의 형벌을 받아 죽는다. 화신의 비극은 청나라의 험난한 운명의 예고편이었다.
세상만사 모든 것이 달도 차면 기우듯이 “무엇이든 극도를 치달았다가는 무너지는 것은 사물의 필연적인 이치다. 지금 백성들이 오랫동안 전쟁을 치러보지 못했으니 만약 전쟁하면 흙이 무너지고 기와가 깨지듯 여지없이 허물어질 것이다. 참으로 염려되는구나. “1736년 옹정제를 이은 건륭은 60년 재위하고 70세 생일을 맞는 1780년은 등극 44년째였다. 연암은 탐관오리 화신의 황제에게 진상하는 뇌물을 본 적이 있다. 뇌물은 생명력이 강하여 한 번 생기면 반드시 새끼를 친다, 뇌물을 바친 화신이 뒤로는 온갖 뇌물을 챙기는 부패의 온상이 된 것이다. 화신에 압수한 재산은 청나라 정부의 12년 치 예산에 맞먹었다고 하니 부패의 실상을 알고도 남을 만하다.
청나라의 다른 실상은 아첨이다. 황제에 아첨하기 위해 조선의 사신이 올린 글을 고쳐서 보고까지 한다. 건륭은 할아버지 강희보다 오래 제위에 있을 수 없다고 1796년 재위를 가경제에게 물려준다. 이때 백련교도의 난이 발생한다. 연암의 경고가 있고 나서 16년 만이다. 연암이 만리장성 고북구에서 ‘환란’을 예측한 1780년부터 60년 후, 청나라는 영국과 아편전쟁에서 속수무책으로 무너진다. 사자들에 온몸이 찢기는 큰 사슴처럼 열강의 먹잇감이 되고 만다.
조선으로 돌아오는 길에 하인들의 비참한 실태에 장차 조선의 민란을 내다본다. 말몰이꾼은 의주부에서 공식적으로 급여가 한 사람당 백지 60권만 지급했다. 하인들이 먹는 밥과 술은 꾀를 동원해 적당히 사기를 처먹고 지나간 것이었다. 그러니 이런 행패가 수십 년 쌓였고 상호의 악감정은 깊었다. “만일에 병자호란 같은 환란이 다시 생긴다면 이들이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니 의주, 철산 서쪽은 우리의 땅이 아닐 것이다. 변방을 지키는 자도 몰라서는 안 될 것이다”. 예언한다. 그리고 연암은 “머리가 희끗희끗한 나이인지라 앞으로 30년이 지나지 않아서 천하의 근심거리를 근심할 줄 아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금일 하는 말을 의당 다시 생각하게 할 것이다.“
31년이 흘러 1811년 조선에서는 최대의 민란인 홍경래의 난이 일어난다. 홍경래의 난은 빈농, 돈을 번 상인, 광산업자, 유랑인 등이 가담한다. 봉기 자금을 댄자는 광산노동자를 이끈 이희저로 노비 출신이고, 봉기군 참모장 우군칙은 밀무역 상인이었다. 환란이 난 의주 서쪽의 고을, 박천, 가산, 정주, 곽산, 선천, 철산, 용천은 연암이 예측한 대로 우리 땅이 아니었다. 이용후생을 주장한 연암이 청나라에서 눈여겨보고 의욕을 보인 대상은 수레이다. 우리나라는 수레가 없었고, 사람들은 ”우리나라는 땅이 험준해서 수레를 사용할 수 없다. “말하니 이게 무슨 말인가? “국가에서 수레를 사용하지 않으니 길이 닦이지 않았을 뿐이다. 수레가 다니게 되면 길은 저절로 뚫리게 마련이니, 어찌 길거리가 좁다거나 고갯마루가 높음을 걱정하라?” 연암이 수레의 중요성을 역설한 이유는 물산의 유통 때문이었다. 중국은 수레를 이용해 풍부한 재화와 물건을 사방으로 실어 나르고 있었다.
“이 지방에서는 흔하지만, 저 지방은 귀하고, 이름만 들어본 물건을 볼 수 없는 까닭은 대체 무엇 때문인가? 곧 가져올 힘이 없는 까닭이다. 한양에서는 비싼 생선 창자가 바닷가에서는 밭의 거름으로 쓴다. 이쪽에서는 버리고 저쪽에서는 구하지 못하니 자연히 백성들의 삶이 궁핍해질 가난이 일상화된다는 연암의 한탄이다. 수레가 못 다니는 현실을 선비와 벼슬아치들의 잘못으로 규정하고 풍월만 건성으로 읊을 게 아니라 수레를 공부해 보급해야 한다는 게 경제 전문 대기자 연암의 고언이다.”라고 필자는 주장한다.
2022.12.05.~12.11
조선의 대 기자, 연암
강석훈 지음
니케북스 간행
첫댓글
좋은 글
감사합니다.
2022 한 해
꾸준한 열정
감사했습니다.
2023 새 해에도
더욱 건강하시고
행복한 한 해 되세요.
좋은 마음에 양식,항상 감사합니다.
그리고 지회장 취임을 축하드립니다.
청주지회 무궁한 발전을 기원드리며 응원합니다.
좋은 격려 말씀 주시고
칭찬 격려 댓글 주시어
큰 힘이 됩니다.
광진지회 발전을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