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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랑스러운 7 사단 육군 병장이었다.
대한민국 국민은 누구든지 4대 의무를 가졌다. 근로, 납세, 국방, 교육의 의무이다.
그중 국방의 의무를 이야기하고자 이 글을 남긴다.
<나는 기피자였다>
나는 9살에 초등학교를 들어갔다. 해방 된 다음 해 1946년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가정 형편이 어려워 중학교, 대학교 입학 때 1 년씩 건너서 들어갔다.
그러다 보니 남들에 비해 4년이 늦어져 대학 1학년 때 징집 영장이 나왔다.
그러나 천재일우의 가정교사라는 자리를 얻어 겨우 대학을 다녔기 때문에 군에 가면 가정교사
자리가 끊기기 때문에 입대할 수 없었다.
가정교사를 동아 줄로 알고 쉼 없이 가르치며 대학 4학년이었던 여름 어느 날,
집에 가니 종로 경찰서 형사 두 명이 와 있었다. 기피자 단속을 한다며 잠시 종로 경찰서에 가서
조사만 받고 오면 된다며 동행을 하자고 해서 나는 그 말을 믿고 따라갔다.
당시 가정교사 주인도 종로에서 유지이셨기 때문에 가서 조사만 받고 오라 하시기에 별 걱정을
않고 1차 조사만 받고 귀가하는 줄 알았는데, 낮에 조사에 관여했던 형사가 바뀌고 다른 형사가
조사하더니 결국 구속이 된 것이다.
그간 내가 가정교사를 하게 된 사연부터 가정교사를 못하면 대학을 다닐 수 없어 부득이 했고.
졸업하면 자원 입대 하겠다며 울면서 사정 했으나 기피자 단속 실적을 올리려 구속한 것이었다.
결국 서대문 형무소에 구금되었고 거기에 구금되는 날 감방 장이 물었다. 신고식이었다.
“야 신입, 너 왜 여기에 왔어?”하고 묻기에 그간의 사정을 얘기했더니
“저 학생 나갈 때까지 잘 돌봐줘라. 얼마 있으면 나갈 것이다.” 감방 장 한마디에 열흘 간 있는
동안 대우 받으며 지낼 수 있었다.
거기에 있는 동안 한려 수도에서 해적을 하던 자기 이름도 쓰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름을
가르쳐 달라고 하여 방바닥에 물로 이름을 써주고 가르쳤다. 한 여름이라 금시 마르면 다시 써서
가르쳤다. 그러자 감사하단 말을 수없이 하며 극진히 나에게 잘 해주었다.
열흘 만에 귀가 조치 되었다. 그렇게 기피자로서의 벌은 면했다.
<나는 훈련만 4개월을 받았다>
1964년 2월 졸업을 하고 나는 약속대로 자원을 했으나 바로 나오지 않고 6월에야 영장이 나왔다.
나로서는 이미 다른 사람에 비해 4년이 늦은데 영장마저 늦게 나오니 마음이 탔지만 어쩌겠는가.
그렇게 해서 나는 4살이나 덜 먹은 내 동생과 함께 입대하였다. 1964년 6월 12 일이다.
논산 훈련소 28연대에 입대 훈련은 6월 17일부터 시작하였다.
훈련! 한 여름이니 훈련은 너무 힘들었다. 더구나 나보다 4살이나 어린 동생들하고 같이 훈련을 하니
참으로 힘들었지만 이를 악물고 해야 했다. 하루 속히 군 생활을 마치고 직장을 구해야 하니 마음은
한없이 조마조마했다. 6 주간의 훈련이었다.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훈련이었지만 참고 견뎌갔다.
4 주가 지나니 방첩 대에서 요원 차출이 있었는데 대학 졸업생이고 대학마저 좋은 대학이었기에 차출이
되었다. 다른 동료들이 모두 부러워하며 훈련만 마치면 군대 생활은 후방에서 한다며 잘 됐다고 위로하였다.
나도 훈련만 마치면 됐다는 심정으로 온 힘을 다해 훈련을 받고 끝나기 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훈련이 끝났는데도 소식이 없더니 후반기 훈련병으로 되어버렸다. 얼마나 기다리던 일이었는데
신원 조회에서 기피자로 판명되어 차출이 무효가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후반기 훈련에 배치되어 4 주간의
기관총 훈련이 시작되었다.
후반기 훈련이란 금마에서 시작되는 4 주간의 훈련이었다. 남들은 6주 훈련을 받고 부대 배치를 받는데
나는 또 이렇게 꼬인 것이다. 더구나 LMG 사수로 말이다. 그 기관총이 우리가 흔히 전쟁 영화에서나 보던
기다란 다발총이며. 전쟁이 나면 제 1 사격 대상인 주특기이다. 더구나 나의 신장이 다발총 길이와 맞먹는
크기이니 메고 훈련을 하면 땅에 끌리는 그런 총이었고 무거웠다. 또한 7월 중순 이후였으니 온몸에서는
땀으로 목욕하는 일을 4 주간 견뎌야 하니 내 몸은 처참히 변해갔다. 기진맥진하기 일쑤였고 어깨에서는
피가 흐르기도 하였다. 내 생애 그보다 고통스러운 때가 있었던가? 하루하루가 지옥 그대로였다.
어찌 내 삶은 무엇 하나 순탄한 것이 없나 속으로 많이 울었다.
그러나 같이 입대한 동생은 육본으로 배치되었는데 나는 그 어려운 훈련을 받은 것이다. 동생은 육군 본부에
배치되었기 때문에 내가 최전방에 근무할 때 가끔 전화를 해주어 위안을 받았다.
시간은 그래도 흘러 4주의 훈련이 끝나고 최전방 7 사단으로 발령이 났다. 최북단 북한 괴뢰와 얼굴을 맞대는
부대였다. 하늘이 캄캄했다. 빨리 제대하여 직장을 구해야 하는데 훈련만 계속되니 마음은 타 들어 갔다.
춘천 3 보충 대를 거쳐 7 사단으로 향하던 차 속에서 한없는 눈물을 흘렸다. 지금은 도로도 잘 정비되어 화천
이북까지 아스팔트 도로이지만 내가 7 사단을 가던 때는 도로도 정비가 안 되어 양구로 뺑뺑 돌아서 가던 시절
이다.
그렇게 7 사단에 배치된 나는 거기에서 또 기관총( LMG )훈련을 최전방 교육이라 해서 받았다.
그렇게 또 훈련만 4개월을 받다 보니 내 몸은 완전히 녹초가 되어 갔다. 생각해 보시라. 기관총 길이와 맞먹는
신장에 2개월을 훈련 받으니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정말 죽을 지경이었다. 또한 군대 가면 너는 배고프지는
않을 거다 하였던 내가 4개월을 훈련을 받다 보니 배가 고파서 잠시 쉬는 시간에는 떡을 몰래 사서 먹기까지
해야 했다.
50분 훈련을 받고 10분 쉬는 사이 식당에서 “ 야, 너희 두 명 이리 와” 하고 부르기에 지명 된 사병하고 식당으로
가니. “야, 너희들 배고프지. 이것 먹어라” 하며 먹다 남은 밥을 주는데, 우리는 그 짧은 10분 사이에 바께스 반이나
되는 밥에 반찬을 섞어 비비니 한 바께스가 되었다. 그것을 다 먹었다. 주방 사병이 깜짝 놀라며 천천히 먹으라고
걱정까지 했지만 아무렇지 안 했다. 내 평생 그 짧은 시간에 그렇게 많은 밥을 먹어보기는 처음이었다.
4주 훈련이 거의 끝날 무렵 기관총 훈련 성과를 점검하는 시간이 되었다. 중대장 님은 육사 출신 김 중위 님이었다.
시험은 기관총을 완전 분해했다가 다시 조립하여 50미터 전방에 뛰어가 사격 자세를 취하는 시간 체크인데 59초에
해냈다.
두 달을 훈련하고 얻은 결과였다. 중대장 님이 깜짝 놀라시며 “육사에서도 1분 30초에 마치는 훈련이다. 그런데 너는
59초에 해냈다. 장하다” 하시며 칭찬을 하셨다. 눈물이 핑 돌았다.
그걸로 해서 전방(前方) 훈련이 끝났고 훈련 마지막 날에는 완전 군장을 하고 산에 가서 하룻밤을 세우고 오는 훈련이다.
저녁에 출발하는 데 사방 거리라는 산 속의 마을을 지나는데 전기가 들어와 있는 것을 보고 세상에 이 산 중에 전기가 다
들어왔구나 하며 지났다. 그런데 막상 부대 배치를 받고 외출해 보니 전기가 아니고 촛불이었다.
4개월 훈련이 나의 머리를 돌려놓은 것을 알고 훈련이 얼마나 힘들었기에 그리 되었나 회상하였다.
하루 밤 훈련을 마치고 귀대 하여 그간의 훈련 결과 성적 순으로 2등까지 뽑아 보상 휴가를 받고 그렇게 그리던 집에
가서 부모님을 만나니 수척해진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시던 부모님 얼굴이 지금도 뚜렷하다.
훈련이 4개월이었으니 6월에 시작하여 10월에 끝났다. 그 해 10월에 전방에 눈이 내렸는데 신병들인 우리가 도로 눈
청소를 하러 나갔다. 그런데 마침 서울 행 버스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저 버스를 타면 집에 갈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하였다.
보상 휴가를 마치고 귀대 하였다. 부모님 걱정을 생각하여 4개월의 고된 훈련에 대해서는 일절 말하지 안 했다.
귀대 하니 본부 중대 서무 병으로 발령이 났다. 보상 휴가까지 간 사람이고 대학도 좋은 대학을 나왔으니 선임 병이
미리 찍어두었던 모양이다. 군대를 다녀 온 사람은 알 것이다. 본부 중대 서무 병이 얼마나 좋은 자리인가. 그간의
모든 고생이 보상 받은 기분이었다. 1개 대대를 총 관장하는 자리였다. 하루하루를 평온하게 근무하고 있었다.
주말이면 대대 사병들의 외출 증도 다 본부 중대에서 발행하기에 외출하려는 사병들은 대기를 해야 했다. 외출을
선호하는 이유는 주말에 부대에 있으면 선임 병들의 모든 심부름을 다 해야 하니까 외출을 학수고대 하였다. 외출
증의 대가로 그들은 산에 가서 다불 백 가득히 머루 다래 등을 따오면 맛있게 먹고 머루 주도 담기도 했다.
그렇게 좋은 여건에서 근무하였지만 최전방이라 자주 부대 훈련을 하였다. 부대는 4개 중대에 본부 중대 하여 5개
중대로 되어 있다. 그런데 훈련을 나가면 꼬박 한 달을 산에서 생활하는 훈련이다. 그럴 때에는 부대 내에 보초 한
명과 나 두 명만 남게 된다.
한 달을 그렇게 보내고 나서야 부대 원이 귀대 하니 말 그대로 편한 삶을 살았다. 또한 당시(1964년에서 1966년)는
월남 파병이 시작되었고 유격 훈련도 이수해야 제대하는 그런 시기였기에 매일이 긴장하고 사는 시기였다.
제대할 무렵 1966년에는 신발까지 신고 자기도 하는 시기였고 휴가는 1년에 딱 한 번 25 일이던 때이다.
부대 원 상당수가 나와 동시에 배치 받았던 동료였기에 많은 일에 협조가 잘 되었다. 그런데 한 가지 기억되는 일을
남겨야 하겠다.
본부 중대에는 1종계에서 4종계까지 있는데 각자 하는 역할이 다 다르다. 2종계가 정보 계인데 점호 시간이면 모든
병사가 점호를 받아야 하는 것이 정도라고 믿는 나였기에 점호 시간에는 누구 하나 불참을 허락하지 안 하였다.
정보 과장이 육사 출신 박 근 중위였는데 하루는 나를 보자 하더니 정보과 사병들의 점호를 면제해 달라는 것이었다.
허락하지 안 하였다. 상병이 중위의 말을 들어주지 안 한 것이다. 그러자 박 중위가 일직사령인 날 본부 중대에 비상을
걸고 완전 군장에 한 발은 군화 한 발은 고무신을 신고 연병 장 돌리기를 시키는 기합을 주었다. 내가 누구인가?
상의를 벗은 상태에서 완전군장을 하고 뛰니 등에 가방에 씻겨 심한 상처가 났다.
그러나 결코 지지 않고 끝까지 해 냈다. 그로 인해 내 등에는 커다란 상처 흉터가 있다. 하지만 그 뒤에도 정보 계
사병의 점호 훈련은 결코 면하지 안 하였다.
<1966년 4월 10일은 내 운명을 행, 불행으로 가름한 날이다>
1966년 4월 10일! 나의 운명을 바꿔 놓는 일이 생겼다.
고등학교 때 나는 어느 여학생과 사귀었었는데 여학생 아버님이 일찍 서거하시면서 모든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나마저도 가난으로 인해 대학을 포기하고 심한 우울증에 걸려 극단적 선택을 하다 살아났었고 그 사이 병원에서
그녀가 보고 싶어 만나게 해 달라고 하니 아버님이 내 자식 사정이 지금 이러한데 살리는 샘 치고 한 번 와 달라
하였으나 거절을 당하시기도 했다.
그 후 그녀는 가정을 생각 어느 부잣집 자제와 결혼하고 말았다. 그게 그녀와의 마침이었다. 나는 대학을 나와 군대에
가면서 영영 남이 된 그녀였다. 그런데 상병 때 휴가 나와서 그녀가 이혼하려고 집에 와 있다는 소식을 친구에게서 듣고
다 잊었던 그녀를 만나 우리의 인연은 다시 이어지게 되었다. 이미 그녀에겐 5살의 여아도 있었다.
1966년 4월 10일. 부대 일로 연대에 다녀오던 나에게 초소에서 상상도 되지 않는 소식을 전하였다.
“최 상병 님! 누가 면회를 오셔서 평안 여관에 계십니다. 아이도 같이 왔습니다.” 초소 병들은 아내가 면회를 온 줄 알고
그렇게 말한 것이다. 나는 직감적으로 지향이구나 하고 가보니 지향이가 와 있었다. 지금처럼 통신이 제대로 된 때였다면
모든 것 다 조율하고 왔을 터인데, 모든 것이 편지로만 연락이 되던 때라 그런 일이 벌어졌다.
아 이 일을 어찌하면 되나 앞이 깜깜 했다. 육군 상병인 내가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하나 머리가 비어 왔다. 하지만
우리 삶은 그렇게 시작되었다.사방거리라는 산촌 마을에 빈 방을 얻어 임시 거처를 정했고 얼마 수습이 지난 후
부대 바로 옆에 방을 얻어 옮겼다. 일개 사병이 최전방에서 살림을 시작하다니 어떤 규정에도 없는 일이었다.
부대장 님의 묵인 없이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삶이 시작되었다. 그날이 1966년 4월 10일이다. 1966년 12월 말 내가 제대할
때까지반 년 넘게 그렇게 살다가 나는 제대를 앞두고 아내를 먼저 귀가 시키기로 하고 집으로 가 있으라고 하고, 1967년
1월 15일 향토사단 까지 마치고 귀가하였다.
상상해 보시라. 내가 죽음 앞에서 살려 달라고 아버지가 찾아 갔을 때 거절했던 며느리가 배가 불러서 거기에 5살 먹은
아기까지 데리고 집에 나타난 상황을 상상해 보시면 세상에 이런 일이 하고 혀를 차실지 모르겠다. 그때의 우리 부모님을
생각하면 불효지심을 덮을 길이 없다. 그렇게 나의 모진 군 생활은 마쳤다.
끝으로 이 이야기의 제목을 ‘나는 자랑스러운 7 사단 육군 병장 이였다“ 고 한 이유를 설명하며 마치려 합니다.
“아야 뛰지 마라 배 꺼질라. 주린 배 잡고 물 한 바가지 배 채우시던” 우리 부모님들이 겪으신 보리 고개를 물리치신
박 정희 대통령 님이 우리 7사단 사장님이셨고, 그를 보좌하여 함께하신 김 계원 장군 님, 참모총장 이셨던 정 승화
장군 님이 7 사단 사장님이셨습니다.
정 승화 장군 님부터 사단장으로 모셨습니다. 다 자랑스러운 장군 님이지 만 제가 마지막 모셨던 사단장 님 정 봉 욱
장군 님은 꼭 소개 드리고 싶습니다. 6.25 당시 북한 포병사령관이셨는데 귀순 하여 우리 사단장 님이 되신 분이신데
청렴 결백하기로 유명하신 분이셨습니다.
정 장군 님이 사단장으로 부임 하시자마자 군에 배급되는 모든 육식을 가루로 만들어 납품하도록 하셨습니다.
이유는 배급된 고기를 누구 하나 손을 대지 못하도록 조치하신 거였지요. 비로소 고른 배식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박 대통령께서도 신임을 받으셨다 합니다.
이 외에도 저의 부대에 인사 담당이셨던 이 대위 님, 7 중대장 님이셨던 정 중위 님이 북한 출신이셨는데, 그 분들은 결코
부정을 하시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참 군인이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7 사단의 병장으로 만기 제대를
사실에 긍지를 가지고 있음을 밝히며 마치려 합니다. 감사합니다.
<끝>
첫댓글 꿈 많은 이야기 잘보고 갑니다.
저는 상상할 일도 아니지만 어려운 시기에
고생이 이루 말할수 없는 것 같습니다.
둑배기 님! 고맙습니다. 저의 삶이 이래서 어디 내놓을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제는 다 내려 놓는 심정으로 옮기고 있습니다.
자랑스러운 7 사단 육군 병장님 오늘도 찾아 주심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그 삶을 이기며 살 때 도와주신 대대장 님은 제가 제대 후 수소문해서 찾아 모시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