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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은 아주 힘든 날이었습니다. 오전에 긴 시간 강의를 듣고 점심 후 예약되어 있는 서울 치과에 갔습니다. 예상한 대로 두 시간이 넘게 시달리고(?) 맥이 빠져 나왔습니다. 퇴근 시간이 시작되는 무렵이었기에 전철에는 승객이 꽤 많았습니다. 종로 3가에 와서 1호선으로 바꾸어 탔습니다. 집에 오니 저녁식사 시간이 되었습니다. 씻고 식탁에 앉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옆에 주저앉아 온몸에 식은땀을 흘리고 있습니다. 아내가 깜짝 놀라 119를 부른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괜찮아질 거라고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일어날 힘도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119를 불렀습니다. 그렇게 처음으로 구급차 신세를 져보았습니다. MRI 검사까지 마치고 결과를 보고는 외래진찰 예약하고 나오니 새벽 2시가 되어 갔습니다.
뇌혈관 중요부위에 꽈리가 생겨서 시술을 해야 할 거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요즘이야 머리를 분해하지 않고도 하니까 별 걱정은 하지 않았습니다. 이틀 후 신경외과를 찾아갔습니다. 전문의 판단에는 아직 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답니다. 그러면 그렇지, 내가 왜? 아무튼 때가 때인 만큼 온갖 검사 잘 받았습니다. 좀 허약해질 때가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아직은 쓸 만하지요. 감사함으로 응급실 사태를 끝냈습니다. 오랜 만에 큰 병원에 갔는데 정말 환자 많구나 싶습니다. 역시나 노인들이 반 이상입니다. 고령화 시대가 보입니다. 시간 가지요, 돈 들지요, 병원 갈 일은 아닙니다. 건강이 돈 버는 것이지요. ㅎㅎ 한 주가 말 그대로 쏜살같이 지나갔습니다.
2월도 중순, 봄이 멀리서 보입니다. 건강하게 행복한 주말을 보내십시오. ^)^ 2023년 2월 18일 김종우 목사 드림
“지혜가 병기보다 나으니라 그러나 한 죄인이 많은 선을 패궤케 하느니라”
(전도서 9 : 18)
<바빌론>
할리우드 하면 생각나는 것들이 있습니다. 스타, 고급 승용차, 호화 저택, 화려한 의상, 음악과 노래, 생기발랄한 춤 그리고 술과 마약, 그리고 자살입니다. 왜 그럴까요? 쾌락을 추구하려는 것보다는 견디기 힘든 고통을 잊으려 하는 의도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스타는 인기를 먹고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인기란 쉽게 없어질 수 있는 거품이기도 합니다. 물론 오래도록 그 복을 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배우들은 어느 날 하늘로 올랐는가 싶다가도 시간의 흐름 속에서 슬그머니 가라앉습니다. 배역을 얻지 못하거나 스스로 침체의 늪에 빠지기도 합니다. 인기를 누리다가 잃어버리면 그 상실감이 대단히 큽니다. 그 때를 잘 이기는 사람도 있지만 그대로 주저앉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칫 인생까지 포기합니다.
세월은 가고 시대는 변합니다. 그것을 빠르게 적응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뒤로 처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공의 비결 중 하나가 때의 흐름을 잘 타는 것이라 합니다. 시대를 읽는 혜안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성공하는 삶을 사는 것은 아니니까요. 아무튼 그 시대를 읽고 거기에 맞게 적응을 한다면 어렵지 않게 성공의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하기는 문제가 있기는 합니다. 나이가 들면 무엇이고 새로 적응해간다는 것이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아무리 애써도 몸이 따라주지 않으면 따라가기 벅찹니다. 단순히 어려운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상하게 하여 삶까지 내려놓으려 한다면 문제가 됩니다.
영화가 처음 세상에 등장했을 때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하였을까요? 직접 경험을 하지 못했으니 뭐라 답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짐작해봅니다. 흑백 영화만 보다가 총천연색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의 놀라움, 혹백 TV만 보다가 천연색 화면을 대했을 때의 감탄을 추억해봅니다. 아마도 그 정도를 훨씬 능가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정지된 그림만 보다가 움직이는 화면을 대했을 때의 놀라움은 정말 대단하지 않았을까요? 비록 아직 소리까지 나오지는 않았어도 정지된 화면 속에서 사람들과 사물들이 움직이고 있는 모습을 보며 얼마나 신기하고 놀라웠을까 말입니다. 서로 한번만이라도 보려고 밤을 새서라도 기다렸을 것입니다.
아주 어려서 동네 공터에서 활동사진을 보았을 때를 기억합니다. 바로 그 마음이었습니다. 광고가 되어 있는 날에는 낮 시간이 그렇게도 길었습니다. 당시는 인위적으로 어두운 공간을 만들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밤이 오기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활동사진을 보려면 밤이 오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또 하나 소리가 함께 나오지 않았으니 옆에서 설명해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를 가리켜 ‘변사’라고 했습니다. 목소리도 좋고 말 재주가 있어야 합니다. 그림만 보고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이 그의 언변으로 인하여 사람들 마음속에 감동으로 새겨집니다. 아무리 멋진 장면을 만든다 해도 그에 걸맞은 설명이 따라와 주지 않으면 그 좋은 것이 무색해집니다.
‘잭 콘래드’는 무성영화 시절 잘 나가던 배우입니다. 일단 영화 산업이 일어나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그 속에서 인기를 얻으면 그야말로 웬만한 정치인이나 전쟁 영웅에 비교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그는 대단한 인기 배우입니다. 그가 파티를 열면 그야말로 난장판이 됩니다. 어느 누구의 방해를 받지 않고 나름 원하는 대로 먹고 마시고 떠들고 춤을 추며 밤새도록 놉니다. 그곳에 눈도장을 찍어보려고 찾아오는 배우 지망생도 있고 영화산업에 일자리 하나 얻으려 찾아와서 껴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곳에서 배우지망생 ‘넬리 라로이’와 일자리를 노리고 찾아온 ‘매니 토레스’가 만납니다. 잠깐의 주고받은 도움을 통하여 인연을 만듭니다.
간절히 바라고 찾는 자에게 기회는 옵니다. 넬리는 그렇게 배우의 길에 들어섭니다. 매니도 영화 촬영장에서 일자리를 얻습니다. 같은 분야에서 일하게 되니 종종 만나게 됩니다. 인기를 얻고 유명해지면서 두 사람 사이가 멀어지는듯하면서도 만남의 기회는 생깁니다. 그러나 서로에게 끌리는 무엇이 있는듯하면서도 진전이 되지는 않습니다. 결국 사랑의 고백을 한 때는 시간이 많이 흐른 뒤였습니다. 더구나 그 때는 넬리의 형편이 예전 같지 않은 때입니다. 어쩌면 막다른 골목에서 마지막 살 길로 택한 상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랑을 확인하는 순간 넬리는 그의 미래를 붙잡지 않기로 합니다. 인생이란 어쩌면 아픔을 하나하나 딛고 일어서는 과정이기도 하지요.
배우는 물러갑니다. 인기에서 물러가고 시간이 흘러 세상을 떠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가 남겨둔 영화는 세상에 남아있습니다. 시간이 오래 지나도 영화 속에서 우리는 그 배우를 만납니다. 인기도 배우도 사라졌지만 영화는 영원히 남습니다. 대사 가운데 나오는 영화 칼럼니스트가 한 말이 마음에 새겨집니다. “당신의 시대는 갔지만, 영화는 천사의 영혼처럼 영원히 살아있을 테니.” 영화 한 편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봅니다. 우리가 화면에서는 배우만 보겠지만 그 배우가 인기인이 되는 일이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목숨을 걸고 수고하는 일꾼들이 있다는 것을 종종 잊고 봅니다. 영화 ‘바빌론’(Babylon)을 보았습니다.
섣불리 아멘 하지 마십시오
우리 눈에 세상은 복잡해 보여도 하나님께는 간단합니다. 하나님 앞에는 의와 불의만 있습니다. 선과 악이 분명하게 갈라집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마 25 : 31 - 33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주님 앞에는 양 또는 염소가 있을 뿐입니다. 양과 염소를 합작한 잡종은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편에 있지 않다면 그것은 마귀의 소속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마지막 때에 그 양단간에 결단할 것을 촉구하십니다. 계 3 : 15 - 16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어쩌면 두렵고 떨리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두려워할 일이 아닙니다. 마땅히 그래야 하는 일이니까요. 우리 자신인들 왔다갔다 자기 편한 대로 사는 사람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중요한 일을 맡길 수도 없고 그런 사람과 함께 일할 수도 없고 그런 사람하고는 사귀고 싶지도 않습니다. 행여 제가 이 집 저 집 왔다 갔다 한다면 제 처가 저를 믿고 사랑하겠습니까?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어떻게 사랑하셨나요? 당신의 아들을 주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냥 주셨습니까? 그 목숨을 주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요 10 : 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실제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요 15 : 13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말씀하셨듯이 당신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생명을 얻었다면 그 분은 우리에게 또한 그 사랑을 요구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 것을 빼앗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당신의 사랑을 더 크게 안겨주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하찮게 보입니까? 그렇게 보인다면 그것은 저주 받을 일입니다. 당신의 피로 우리의 죄를 씻어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영생의 소망과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세상 그 무엇으로도 얻을 수 없는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선물입니다. 주님의 핏값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그야말로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구원의 은총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히 2 : 3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피하리요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아멘!
때문에 하나님도 우리에게 우리의 전적인 사랑, 신뢰 믿음을 요구하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 또한 하나님께 거짓 없는 사랑과 믿음을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다른 것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오직 우리 자신을 찾으십니다. 우리가 전심으로 드리는 사랑과 믿음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경배하기를 원하십니다. 그 속에서 진정한 찬송과 감사가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나의 가진 것이 아니라 바로 ‘나’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가끔 부모가 자식에게 불평합니다. 도대체 이 아비가 못해준 것이 무엇인데 이 말썽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 어미가 너에게 안 해준 게 뭐야? 그것이 부모가 생각하는 자식 사랑입니다. 모든 것을 바쳐 키웠습니다. 그 자식이 자라서 어른이 됩니다. 그리고 자식은 부모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사다 드립니다. 사실 자기가 몸소 사다 드리는 것이 아니라 요즘은 택배로 보내드립니다. 자식은 보이지도 않습니다. 가끔 생각나면 전화나 하겠지요. 다들 먹고살기 바쁘잖아요. 오가며 시간 보낼 여유가 없습니다. 그나마 생각하고 물건 챙겨 보내드리는 것도 감지덕지한 일입니다. 그것이 자식이 생각하는 효도입니다. 이해합니까? 우리 속에 있는 부모가 생각하는 자식 사랑과 자식이 생각하는 부모에 대한 효도가 이 정도의 의식 속에 뿌리 내려져 있습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필요한 물건이 우리 생활을 편리하게 해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허전한 마음을 채워주지는 못합니다. 우리에게 물건도 필요하고 돈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과연 우리 사람은 밥만 먹고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따뜻한 만남이 필요합니다. 마음이 중요하지만 그 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몸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직접 보아야 하고, 옆에서 들어야 하고, 손으로 잡아야 하고, 만져야 하고, 쓰다듬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러하듯이 우리 아버지 하나님도 그런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우리의 필요만 채우고 마음을 돌이킨다면 하나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희생하면서까지 우리를 구원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그 다음에는 나 몰라라 해도 되겠습니까? 그런 배은망덕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 자식이 부모와 함께 하기를 원했던 것처럼, 우리 부모가 자식과 함께 하기를 원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은 우리로서는 한없는 은혜요 기쁨이고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무에 아쉬워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까? 그러나 우리 인생은 아쉬운 것이 참으로 많습니다. 무엇보다 인생의 허무함을 날려버리는 영원한 생명을 하나님이 주십니다. 구원과 영생이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그것을 얻기 위해서 우리가 한 것은 없습니다. 있어도 보잘 것 없습니다. 생명을 무엇으로 대체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 그 무엇으로도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생명을 주기 위해서 당신 아들의 생명을 희생하셨습니다. 생명은 생명으로만 대체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그 길 외에는 없었습니다.
구원과 영생, 우리 그리스도인의 소망입니다. 언제 완성됩니까? 주님 다시 오시는 그 날입니다. 예수님은 약속하셨습니다. 요 14 :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다시 온다고 하셨습니다. 주님 계신 곳에 함께 있으리라 말씀하십니다. 다시 주의합니다. 거기에 함께 있으려면 우리는 전적으로 하나님 편에 서야 합니다. 왔다 갔다 하면 안 됩니다. 거기에는 양들만 들어갑니다. 염소도 안 되고 양 비슷해도 안 됩니다. 다시 말해서 온전한 하나님의 자녀들만 들어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세상에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실제 하나님의 자녀들이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하나님의 자녀들만 들어가고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들어갈 수 없습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갑니까?
예를 듭니다. 예수님과 유대인들 사이에 말씨름이 있었습니다. 요 8 : 31 - 33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그리고는 ‘아버지’ 싸움을 합니다. 41절 “너희는 너희 아비의 행사를 하는도다 대답하되 우리가 음란한 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는 한 분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 유대인들이 주장하기를 자기네 아버지는 하나님이시랍니다. 여태 그렇게 믿고 살아왔습니다. 그 사실을 의심해본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충격적인 대답을 해주십니다. 44절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앞서 말한 실제 하나님의 자녀와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하는 사람의 차이입니다. 유대인들은 분명 자기들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 점에 대하여는 일호의 의심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인정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히려 마귀의 자식들이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충격을 받았을까요?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그러나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예수님이 인정하지 않으면 그는 하나님께 속한 자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다는 것은 다른 말로 마귀의 소속이라는 뜻입니다. 양이 아니면 염소입니다. 중간은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자기네 아버지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아버지가 아니라 하십니다. 우리가 돈 많은 사람에게 가서 ‘아버지’라고 부르면 그 사람이 ‘오냐’하며 반가워하겠습니까? 우습지요? 어디서 거렁뱅이 하나가 나타나서 아버지 타령을 하는가, 쳐다보지 않겠습니까? 아무나 아버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나 자식이 되는 것도 아니지요.
여기에 하나님의 자녀들과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실제 하나님과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자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의 아버지는 바로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의 아버지는 다름 아닌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자입니다. 처음 하늘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그는 마귀가 되어 쫓겨났지요. 그리고는 이 세상을 장악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 세상을 구원하고 당신의 나라로 회복시키려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나라와 마귀 사단의 나라가 서로 전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일어났듯이 눈에 보이는 세계 속에서도 일어납니다. 영계에서 발생하였듯이 육계에서도 일어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영들이 육체에 들어와 활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편 아니면 마귀의 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연히 우리가 하나님께 쓰임받기를 원하십니다. 롬 6 : 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아멘! 그렇습니다. 우리는 마귀의 손에 잡히는 불의의 병기가 될 수도 있고 하나님 편에 사용되는 의의 병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가 악령이 아니라 성령과 함께 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시작하려 준비하실 때입니다. 마 4 : 1 - 2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육체적으로 심히 약해졌을 때입니다. 예수님은 마귀에게 세 번 시험을 받습니다. 마지막 시험이 무엇입니까? 8 - 9절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마귀가 유혹하려고 제시한 것은 천하만국과 그 영광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이 다 지금 마귀의 손아귀에 들어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그 천하만국을 마귀에게서 다시 찾아 하나님 나라로 회복시키려 하셨습니다. 죄에 빠진 세상을 구원하여 하나님 나라로 회복하고 온 세상이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처음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 하나님은 그러한 세상을 원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늘에서 마귀가 하나님을 대적하고 쫓겨나더니 땅에 내려와 세상을 장악하였습니다. 그 결과 이 땅은 악령이 지배하는 어둠의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흑암으로 덮인 세상에서 당신의 목자를 택하여 세우고 당신의 나라를 세우려 하셨습니다. 창 2 : 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마귀에게 사로잡힌 사람은 흙에 불과합니다. 살았다 하나 그 영은 죽은 것입니다. 계 3 : 1 “사데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의 코에 생기를 넣었습니다. 하나님의 생기가 무엇입니까? 생명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에게 들어가니 영이 죽었던 그 사람이 살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생령’ 즉 살아있는 영이 된 것이지요. 오늘날도 우리가 전도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사람을 살리려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무엇으로 살립니까?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히 4 :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운동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고 말씀이 곧 생명입니다.(요 1 : 1 - 4) 때문에 말씀이 들어가면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택함 받은 아담과 그 동역자였던 하와는 뱀의 미혹을 받게 됩니다. 그 뱀이 과연 우리가 눈으로 보는 뱀입니까? 계 12 : 9 “큰 용이 내어 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 마귀의 미혹을 받은 것이지요. 그런데 마귀가 어떻게 그들을 미혹하였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곡해하는 것입니다. 창 3 : 1 “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뭐라고 하셨습니까? 창 2 : 16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맘대로 먹어라 그 말이지요. 다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하셨습니다.(17절)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바꾸는지 유의해야 합니다.
마귀 사단이 우리를 어떻게 미혹합니까? 사단 마귀가 스스로 ‘나는 마귀다,’ 하며 등장하지도 않고 ‘이 말씀은 사단의 말이다’ 라고 전하지도 않습니다. 실제 그런다면 누가 그런 교회에 나가겠습니까? 자기가 하는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디서 가장 활발히 활동하겠습니까? 당연히 교회입니다. 교회에서 하나님 말씀이라고 전합니다. 성도들은 아멘! 아멘! 하고 화답합니다. 교회에서 설교하는데 누가 의심하겠습니까? 처음 마귀가 하나님의 동산에 침범했던 것처럼 오늘날도 하나님이 계시다고, 예수님이 주인으로 계신다고 여겨지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하면서 하나님 뜻과는 다른 ‘사람의 계명’을, ‘장로들의 유전’을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이 전하는데 누가 의심하겠습니까?
지금 교회에서 누가 싸우고 있습니까? 마 15 : 1 - 3 “그 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 장로들의 유전과 하나님의 계명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사람의 계명이 서로 대적하는 것입니다. 누구를 통해서 이루어집니까? 하나님의 목자를 통해서입니다. 하나는 과연 하나님이 세우신 목자요 다른 하나는 스스로 하나님이 세웠다고 생각하는 목자입니다. 마치 하나님의 자녀와 하나님의 자녀라고 생각하는 자와의 관계와 같습니다. 그것은 누구로부터 일어나는 일입니까? 하나님과 하나님이라고 여기는 자입니다. 하나님이라고 여기는 자가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고 와서 차지합니다. 살후 2 : 4 “저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 그렇지요? 그는 소위 말하는 ‘자칭 하나님’입니다. 그가 어디에 있다고요?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있답니다. 오늘날 교회에 버티고 앉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전합니다. 성도들은 그것도 모르고 아멘! 아멘! 하며 따르고 존경해줍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기막힐 일입니까?
우리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스스로 계신 분’(출 3 : 14) 즉 자존자(自存者)이십니다. 그러나 마귀는 어떤 자입니까? ‘스스로 높이는 자’(살후 2 : 4) 즉 자존자(自尊者)입니다. 그 마귀가 마땅히 하나님이 계셔야 할 자리에 와서는 자기가 하나님인 양 앉아서 떠드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가 전하는 말이 과연 하나님의 말씀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는 말이지요. 우리가 이것을 분별하지 못하면 마귀를 따라가게 됩니다. 결과는 함께 망하는 것이지요. 생명과 영생은 하나님 말씀에 있는 것이지 마귀 사단의 말에는 없습니다. 사단의 말은 우리를 사망으로, 멸망으로 인도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로 생명을 받은 성도라면 이 구원을 끝까지 지키기 위해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물을 먹어야 생명을 유지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은 생명수 하나님의 말씀 즉 생명의 말씀을 꾸준히 먹어야 삽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마귀의 말을 먹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오늘날 우리가 물 하나도 매우 조심스럽게 먹습니다. 수돗물조차 잘 안마시잖아요? 왜요? 오염되었을까봐. 마찬가지로 하나님 말씀이 마귀의 말로 오염되었다면 그것은 이미 생수가 아니라 독수입니다. 우리를 죽이는 물이고 우리를 사망으로 인도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요 4 : 14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예수님이 주시는 물 곧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 영생수가 되는 것입니다. 어태 유대인들은 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들이 주는 물, 말씀을 먹었습니다. 예수님 오시기 전까지는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그러므로 ‘때를 따른 양식’도 바뀌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포도주로 비유하셨습니다. 마 9 : 17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그런데 유대인들은 부대를 바꿀 생각도 포도주를 바꿔 먹을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눅 5 : 39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이전 것이 좋다는 말입니다. 생소한 말씀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중에도 깨달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고백합니다. 마 7 : 28 - 29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당연히 다르지요. 여태 땅의 이야기만 듣다가 하늘 이야기를 들으니 다릅니다. 예수님이 선포하셨습니다. 마 11 : 13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니” 구약의 시대가 지나갔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대한민국 시대를 살면서 조선 시대의 법을 따라갈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보다 더 악한 일도 생깁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사람의 계명으로 바꿔서 백성에게 전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사야의 예언으로 꾸짖습니다. 마 15 : 7 - 9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게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그러니 제사장, 오늘날 목자들이 성전, 교회에서 설교한다고 무조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땅의 이야기인지 하늘의 이야기인지, 때를 따른 양식인지 분별하고 먹어야 합니다. 아멘 하기 전에 때를 따른 양식을 가진 목자를 찾아야 합니다.(마 24 :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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