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란 어쩌면 추상명사인지도 모른다 .지금껏 누구도 그 본질을 들여다보지 못한 비밀한 나라인지도 모르고, 아무도 가 보지 못한 이상향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시에 대한 이야기나 평가는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것이요 자기중심적이기 마련이다.
정말로 시란 무엇인가? 어떤 글인가? 그것은 참으로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어떤 시가 좋은 시인가에 대해서 대답하는 일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렇지만 개인적인 입장임을 전제로 한번쯤 시에 대해서 정의해 보고 싶고 이야기해 보고 싶은 생각이 없는 건 아니다.
시를 두고 생각할 때 언뜻 떠오르는 생각은 시는 경전에 버금가는 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떠한 종교든지 필수적으로 경전이란 것을 가지고 있다. 신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 바로 경전이다. 불교의 『불경』과 기독교나 천주교의 『성경』이 바로 그것이다. 종교는 아니라 해도 인류에 대한 원대한 가르침을 담은 유교의 『논어』도 여기에 준한다고 할 것이다.
이러한 경전들의 특징은 그 표현이나 기술이 쉽고 단순하지만 내용은 심오하다는 데에 있다.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기 위해서이다. 그리하여 경전들은 세월이 아무리 지나가도 변함없이 인류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 바로 이것이다.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존재 가치를 잃지 않는다는 것. 항구적인 가치를 담았다는 것. 인류에게 도움을 준다는 것.
그런데 오늘의 시들은 어떤가? 그 반대의 현상이 아닌가? 내용은 가변적이고 평범한데 그 표현만 까다롭고 어려운 것은 아닌지. 오늘의 시인들은 이 점을 깊이 들여다보고 반성하는 일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한자(漢字)로 시(詩)란 글자를 파자(破字)해 보면 시에 대한 재미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시란 글자는 말씀언(言) 자와 절 사(寺) 자의 조합이다. ‘말씀의 절’이 바로 시라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절 안에는 무엇이 있나? 승려가 있고 부처님이 있고 경전이 있는 것이 절이다.
이를 시와 연결시켜보면 승려는 시인이 되고 부처님은 시정신이 되고 경전은 시가 된다. 그러할 때 경전이란 또 어떤 글인가? 글자 하나라도 더하거나 빼지 못할 정도로 완미한 문장으로 구성된 책이 바로 경전이다. 그러므로 시도 경전이 되도록 쓰여야 한다고 본다. 이 얼마나 엄숙한 주문인가!
다시금 시를 가리키는 서정시와 소설을 가리키는 서사시란 말을 한자로 써 보아도 시가 어떤 글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암시를 받을 수 있다. 서사시(敍事詩)라고 할 때의 서(敍) 자는 차례를 나타내는 서이다. 시간이나 일의 차례대로 쓰는 글이 서사시라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서정시(抒情詩)에서의 서(抒)는 물품 서이다. 마음속 깊이 고여 있는 감정의 샘물에서 감정의 물을 두레박으로 길어 올려 왈칵 쏟아 놓은 글이 바로 서정시, 우리가 말하는 시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서사시가 수평의 글이라면 서정시는 수직의 글이다.
예로부터 운문은 ‘호수’나 ‘무용’으로 비유되어 왔고, 산문은 ‘숲’이나 ‘도보’로 비유되어 왔다. 이에, 여러 사람들의 시에 대한 정의나 생각을 다시 한 번 들어보는 것도 시에 대한 생각을 보다 선명하게 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 폴 발레리(Paul Valery)
- 시는 무용이고 산문은 도보다.
※ 앙리 브레몽(Henry Bremond)
- 산문에서의 독자는 종장을 향해 줄달음치지만 시에서의 독자는 되도록 그 황홀한 쾌감을 오래 지속하기 위해 제자리걸음을 하면서 머뭇거린다.
※ 조이스 캐럴 오츠(Joyce Carol Oates)
- 시인은 거울을 보는 사람이고 소설가는 창밖을 보는 사람이다.
※ 오교(吳喬)
- 산문은 쌀로 밥을 짓는 것에 비유할 수 있고, 시는 쌀로 술을 빗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밥은 쌀의 형태가 변하지 않지만 술은 쌀의 형태와 성질이 완전히 변한다.
※ 소동파(蘇東坡)
- 시중유화(詩中有畵 ) 화중유시(畵中有詩), 시 속에 그림이 없으면 시가 아니고 그림 속에 시가 없으면 그림이 아니다.
어찌됐든 시와 산문은 언어의 질서부터가 다른 글이다. 효용에 있어서도 산문은 설득에 있다면 시는 감동에 있다. 그래서 나는 가끔 산문은 백 사람에게 한 번씩 읽히는 문장이지만, 시는 한 사람에게 백 번씩 읽히는 문장이란 말을 한다. 아닌 게 아니라 시를 읽을 때마다 다른 것이 그 소감이다. 사실을 다룬 글이 아니라 감정을 다룬 글이라서 그렇다.
더 나아가 나는 시인은 죽어도 죽지 않는 사람이란 말을 가끔 하기도 한다. 시인은 죽은 뒤에도 시가 살아남아 그 시인의 목숨을 대신해서 살아 주기 때문이다. 이것은 참 무서운 말이다. 그만큼 시인은 후세의 독자들, 미지의 독자들을 의식하며 시를 써야 한다는 교훈의 말이기도 할 것이다.
분명히 시에는 불립문자(不立文字)의 요소가 있다. 다시 말하면 언외지언(言外之言). 문자 밖의 문자. 차마 인간의 언어로는 모두 다 표현하지 못하는 그 무엇의 안타까운 세계. 이것은 시를 문자 자체의 의미로만 이해하지 말고 느낌으로 이해하자는 얘기다. 여백의 영역, 시의 끝, 그것은 독자의 몫이기도 하다.
< 함께 읽는 시 >
해인사/ 조병화
큰 절이나
작은 절이나
믿음은 하나
큰 집에 사나
작은 집에 사나
사람은 하나.
< ‘꿈꾸는 시인, 나태주의 시 이야기(나태주, 푸른길, 2017)’에서 옮겨 적음. (2019.09.04. 화룡이) >
첫댓글 "시도 경전이 되도록 쓰여야 한다고 본다. 이 얼마나 엄숙한 주문인가! " 나태주 시인의 시를 대하는 엄숙한 자세를 생각해 봅니다.
나태주 시인의 시의 정의를 이토록 선명하게 해 주심을 감사드린다. 그리고 시를 경전으로 비유한 말씀을 읽으며 우리가 쓰는 시가 어떤 것인가 되돌아 보는 중요한 기회가 된다. 지부장님 좋은 글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글을 우리 회원들이 꼭 일독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