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7월 6일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낡은 가죽부대에 새 포도주를 넣는 사람도 없다.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서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둘 다 보존된다.” (마태오 9,14-17)
People do not put new wine into old wineskins. Otherwise the skins burst, the wine spills out, and the skins are ruined. Rather, they pour new wine into fresh wineskins, and both are preserved."
말씀의 초대
이사악에게는 쌍둥이 아들이 있었다. 이사악은 큰아들인 에사우에게 사냥을 해서 별미를 만들어 오면 축복하겠다고 약속한다. 이를 알아챈 작은아들 야곱은 이사악이 늙어서 눈이 어두워진 것을 이용하여 아버지의 축복을 가로챈다(제1독서). 요한의 제자들이 자신들과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어째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단식하지 않는지 예수님께 질문한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과 함께 있는 시간은 혼인 잔치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과 같다고 말씀하시며 지금은 단식할 때가 아니라 기뻐할 때라고 일러 주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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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보좌 신부 때 본당에서 열심히 활동하는 한 청년과 다툰 일이 있습니다. 여러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그가 제게 심한 모욕감을 안겨다 주었고, 저 또한 그에게 그러하였습니다. 처음에는 화가 나고 자존심도 많이 상했습니다. 그런데 며칠을 두고 기도하면서 그 친구를 잃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깊이 들었습니다. 결국 제 자존심을 꺾고 먼저 전화를 걸어 다음과 같이 화해를 청했습니다. “지난번 일 뒤로 내 마음이 너무나 불편했단다. 너도 나에게 잘못한 것이 있고, 나도 너에게 분명 잘못한 것이 있어. 그런데 네가 나 때문에 신앙을 잃어버릴지 걱정된단다. 네가 나를 미워해도 좋아. 그렇지만 이번 일로 예수님을 포기하지는 말아 줘. 나 때문에 너와 예수님이 갈라지는 일이 없길 바란다.” 그 본당을 떠난 몇 년 뒤 우연히 그 청년을 만났고, 다행스럽게도 그가 여전히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오늘 복음에는 이러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들이(제자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여기서 신랑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런데 저에게는 그 청년이 또 다른 예수님이었고, 저는 한때 그 신랑을 잃을 뻔했습니다. 제 자존심 때문에 그 신랑을 빼앗길 뻔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자존심을 버리면서 또 다른 저의 예수님인 그를 다시 찾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신랑이신 예수님께서는 여러분이 사랑해야 하는 사람들의 모습으로 다가오십니다. 자존심이나 교만 때문에 그들을 악의 세력에 빼앗기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 자존심과 교만을 과감히 ‘굶어야’ 하겠습니다.
성령께 주도권을
-성시자 수녀-
2001년 4월, 우이동 명상의 집에서 중년기 평생 양성 프로그램에 참석했을 때, 하느님 사랑의 태 안에서 새롭게 태어났던 은혜로운 순간이 떠오른다. 늘 사도직 소임에 분주했던 나한테 한 달간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은총이 주어졌다. 때는 춘 사월! 명상의 집에 도착했을 때 벚꽃이 몽우리를 맺고 있었다. 오랜만에 자신만을 위한 시간이 주어졌고, 나는 야무지게 계획을 세웠다. ‘성경을 다 읽고 나가리라.’ 그리하여 틈만 나면 방에 박혀 성경 읽기에 바빴다. 사흘이 지난 뒤 밖에 나갔을 때 벚꽃은 만개해 하느님을 찬미하고 있었고, 벚꽃 속에서 이런 소리를 들었다. ‘너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난 화들짝 놀라 둘러보았다. 하지만 만개한 벚꽃만이 있을 뿐 ….
그랬다. 그렇게 수도생활을 오래 했으면서도 난 아직 새 부대가 아닌 헌 부대에 묵은 자신을 채우고 있었던 것이다. 15개의 남녀 수도회에서 20여 명의 수도자들이 참여했고, 다양한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었으나, 난 나의 계획 속에 갇혀 새로움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벚꽃을 통해 나를 찾아와 주신 주님의 은총 덕분에 나 자신 밖으로 나올 수 있었고, 하느님 사랑의 태 안에서 ‘새로움’이란 이름으로 새롭게 태어났던 그 순간을 잊을 수 없다.
난 새 부대가 되었고, 새 포도주로 채우며, 주님의 성령께서 주도권을 가지고 나를 이끌어 가실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하듯, 성령께서 내적 영혼을 이끄시도록 주도권을 내어드릴 때, 날마다 혼인 잔치의 기쁨을 누리며 살 수 있음을 다시금 깊이 새기며, 새 포도주를 담고 내적 영혼이 나날이 새로워지는 은혜로 축복해 주시길 청한다.
기쁨과 설렘의 단식
-양승국신부-
철저한 자기 통제와 금욕주의로 유명했던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그의 의복은 낙타털로 만든 거적 대기 하나 걸친 것이 전부였기에 우스꽝스러울 정도였습니다. 그는 도통 먹는 것에 관심이 없었는데, 틈만 나면 단식이요, 수시로 쫄쫄 굶었는데, 가끔씩 메뚜기와 들 꿀로만 겨우겨우 허기를 채웠습니다. 이런 세례자 요한을 스승으로 모신 제자들 역시 단식은 일상이었습니다.
바리사이들 역시 ‘단식’의 선수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놀랍게도 일주일에 두 번씩이나 꼬박꼬박 단식을 실천했습니다.
그들은 단식과 성덕이 언제나 함께 가는 걸로 생각했습니다. 사실 일정 부분 맞는 생각이기도 합니다. 저도 요즘 몸무게가 급격히 늘고 나서부터 드는 느낌입니다. 뱃살이 접히기 시작하면서 그렇지 않을 때보다 기도나 묵상에 전념하기가 많이 힘들어졌습니다.
특히 유다교 여러 신심행위 안에서 단식은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단식은 영혼이 육체를 지배함을 의미했습니다. 또한 은총을 준비하는 사전 작업으로 단식을 활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큰 축제를 앞두고 철저하게도 단식을 실천하곤 했습니다. 단식 기간 동안 영혼이 맑아지고 하느님 은총 앞에 민감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또한 단식은 우리 영혼을 자유롭게 만들어주고 하늘나라의 문을 열어주기도 합니다.
이런 이유로 예수님께서도 본격적인 사목활동을 앞두고 광야로 나가셔서 일 동안이나 단식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본격적인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의 모습에서는 단식이 사라지고 맙니다. 사람들의 초대를 거절하지 않으시고 기쁘게 잔치자리에 앉으셨습니다. 맛나게 음식을 드셨고 포도주를 즐기셨습니다. 얼마나 흥겹게 그런 자리를 즐기셨던지 바리사이들은 볼멘 목소리로 이렇게까지 말했습니다.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 아닌가?”
이런 예수님의 모습이 꽤나 의아했던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질문을 던지는데, 질문의 뉘앙스가 꽤나 질책성입니다.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문제의 본질에 초점을 맞춥니다.
다시 말해서 당신이 이 지상에서 활동하는 공생활 기간은 하느님과 인류의 혼인 잔치 시기임을 선언하십니다.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신랑이신 예수님께서 신부인 교회와 혼인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음을 확증하십니다.
제자들을 포함한 인류 모두는 이제 신부인 교회와 함께 혼인잔치에 초대받은 손님들인 것입니다. 따라서 혼인잔치의 주관자이자 혼주이신 하느님, 혼인잔치와 주인공 격인 신랑인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 그리고 초대받은 손님들인 인류에게 주어진 과제는 즐기는 것입니다. 만끽하는 것입니다. 단식이 절대로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유쾌한 시기에 단식은 너무나도 안 어울리는 행위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은총의 시기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단식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단식은 고통과 슬픔의 단식이 아니라 기쁨과 설렘의 단식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신랑이신 그리스도, 신부인 교회와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의 지상 생활은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결론은 항상 축제와 기쁨이어야겠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이쁜 사람을 한 자로 줄이면 어떻게 될까요? 그 답은 ‘나’랍니다.
그렇다면 세상에서 가장 이쁜 사람을 두 글자로 줄이면 어떻게 될까요? ‘또 나’랍니다.
그러면 세 자로 줄이면 어떻게 될까요? ‘역시 나’랍니다.
이번에는 네 자로 줄이면 무엇일까요? ‘그래도 나’입니다.
마지막으로 세상에서 가장 이쁜 사람을 다섯 자로 줄이면 무엇일까요? ‘다시 봐도 나’라고 하네요.
맞습니까? 자기 자신을 보았을 때 가장 이쁜 사람이 맞나요? 글쎄요. 거울을 비춰진 저를 보면 그렇게 이쁜 것 같지 않던데, 그래도 가장 귀하게 생각되는 사람은 누가 뭐라해도 바로 ‘나’겠지요. 이렇게 스스로를 귀하게 여기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의견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또한 자신의 판단을 기준 삼아, 그 기준에서 벗어날 경우에는 서슴지 않고 단죄하는 경우도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렇게 귀하고 이쁜 ‘나’이지만 꼭 옳게만 행동하는 것이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결국 진리 그 자체를 따르는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박박 우겨서 추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참된 진리의 길을 쫓는 지혜로운 우리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참된 진리보다는 눈에 보이는 감각적인 것들을 쫓고 있으며, 자기라는 틀 속에 갇혀서 중요하지 않은 것이 더 중요한 것인 듯 착각 속에 빠집니다.
요한의 제자들도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몰랐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질문을 던지지요.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단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음식을 절제함으로써 주님께로 마음을 향하게 하는 것이 바로 단식의 이유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단식 자체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요. 그래서 단식하지 않는 예수님과 그 제자들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습관적으로 무엇인가를 행할 때가 있습니다. 특히 자기라는 틀에 갇혀서 나는 옳고 남은 옳지 않다는 생각을 하면서 어떤 목적 없이 행동할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안에 담긴 정신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들은 넓은 마음으로 주님의 뜻을 이 세상에 펼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마음의 문을 여는 손잡이는 안쪽에만 달려 있다(스피노자).
새로운 복음 정신
- 홍금표 신부-
오늘 복음은 단식에 대한 논쟁과 새것과 헌것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단절어(토막 말씀)입니다. 당시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단식했고, 바리사이들은 매주 두 번 월요일과 목요일에 단식했는데, 예수님과 제자들은 속죄의 날을 제외하고는 단식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단식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혼인잔치를 예로 듭니다. 혼인잔치는 종말론적 구원을 상징하는데 예수님은 당신의 시대야말로 혼인잔치가 벌어지는 시기라 하십니다. 시대에 맞는 새로운 삶의 양식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후반부에는 새것과 헌것의 단절어가 나옵니다. 새것은 강하고 헌것은 약해서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새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라는 새로운 복음 정신을 뜻합니다. 그러기에 이 상징어의 뜻은 예수님의 복음은 새로운 것이므로 과거의 잣대를 가지고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복음을 이스라엘의 협소한 종교적 관념과 형식에다 맞추어 받아들일 수는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인간이 정보를 처리하는 방법은 기존의 개념에 맞는 것만을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새로운 정보에 적응하기 위해 기존의 개념을 변화시키는 방법이 있습니다. 후자가 훨씬 힘든 과정인데, 힘들지만 새로운 진리 앞에서 기존의 생각을 변화시키는 방법이 인격 성숙에 더 큰 도움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단식 논쟁 - 새것과 헌것
- 강석진 신부-
오늘 복음은 단식에 대한 물음에서 시작됩니다 . 단식이라 ! 그래요 , 구약에서 비롯하여 예수님 시대에서까지 단식은 하느님을 찾는 이들에게 종교적인 중요한 의식의 하나였고 , 교회 역사 안에서도 많은 수덕자가 단식으로 정신을 가다듬었으며 , 오늘날까지 우리 교회는 단식의 전통을 지켜오고 있습니다 .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단식을 그다지 강요하거나 강조하지 않으셨던 것 같습니다 . 그러기에 요한의 제자들까지도 예수님의 제자들이 단식하지 않는 것을 보고 걱정하며 찾아왔던 것입니다. 비록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왜 단식하지 않느냐고 묻지만, 결국은 제자들에게 단식 교육을 시키지 않는 예수님께 하고 싶은 말이기도 했을 겁니다.
아무튼 그들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이 단식하지 않는 이유로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 슬퍼할 수야 없지 않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단식이든 다른 그 어떤 주제든,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신랑’으로 비유하면서, ‘신랑’과 함께 있는 기쁨을 은유적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단식의 주체로서 ‘신랑’이신 예수님이 지금 나와 함께, 우리와 함께 있다는 그 현존 체험을 과연 일상 안에서 얼마나 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신자로서 지켜야 할 의무와 권리를 계산하기 전에 예수님이 나와 함께 있다는 그 기쁨이 가장 우선하고 있는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생동감 있는 신앙의 기쁨을 맛보고자 노력할 때, 우리는 나한테서 그 기쁨의 원천인 ‘신랑’을 빼앗아 가는 실체가 어떤 것인지 분명하게 인식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내 기쁨의 원천인 ‘신랑’이신 예수님을 진심으로 마음에 품고 살아간다면 그분과 나 사이를 가로막는 것에 분명한 경계를 할 수 있고 또 만일 그분을 내 삶에서 누군가에게 빼앗길 때, 그때는 단식, 그 이상의 것도 할 수 있을 정도로 적극적이며, 진지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말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그 사랑의 소중함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역할을 찾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자신에게 늘 이렇게 물어야 할 것입니다. “당신 삶의 기쁨이신 ‘신랑’ 예수님을 당신은 진심으로 사랑합니까?”
본질과 비본질
-전삼용신부-
얼마 전에 최윤영의 'W'란 프로그램을 보았습니다. 특별히 필리핀 여성들의 낙태 실태에 대해 자세하게 보여주었습니다.
필리핀은 가톨릭 신자가 대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에 피임을 하지 못합니다. 교회에서 피임과 낙태를 반대하고 법적으로도 낙태는 금지되어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다릅니다. 한 해에 약 50만 명에 달하는 여성들이 불법 시술소에서 낙태 수술을 하고 약 4,500명이 불건전한 시술로 사망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마닐라의 키아포 시장에선 우리나라 돈 7,000원이면 사는 검증되지 않은 정체불명의 낙태약이 유통되고 있었고 학생이나 가난한 여성들은 이 약을 목숨을 걸고 복용하여 낙태를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런 사회적 문제 때문에 국회는 국가 차원에서 피임약을 보급해야 한다는 법을 통과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종교 차원에서는 그것을 절대적으로 반대하고 있어 아직까지 결론이 나지 않고 있습니다.
교회입장에선 부부관계란 자녀출산의 의도가 있어야하는데 피임을 하면 부부관계가 그저 자신들의 육욕을 채우는 것으로 전락하기 때문에 그것을 용납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만약 누가 저에게 이런 상황에서 신부님은 어떤 답을 주실 건지 묻는다면, 저는 신부로서는 피임을 해서는 안 된다고 대답하겠지만, 한 인간으로서는 현실적으로 수많은 태아들과 여성들이 죽어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피임약을 공급하는 편이 죄를 덜 짓게 하는 것일 수 있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처음에 제사를 드리지 못하게 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박해를 받아 죽게 되었습니까? 그러나 박해가 끝난 지금은 다시 제사를 지내는 것을 허용하였습니다. 이런 전철을 되밟지 않도록 지금처럼 절제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일시적으로 교회가 한 발 물러서는 것도 필요할지 모르겠습니다.
교회는 작은 구멍 때문에 온 둑이 무너질 수 있다는 두려움으로 피임을 절대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필요악이란 것이 있듯이 현 상황에 맞게 유동적으로 대처할 수는 없는지에 대해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공격을 당하십니다. 아마 당시에 단식이란 것이 신앙생활의 커다란 일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단식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이것으로 예수님을 공박합니다.
예수님은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느냐?” 라고 하시며 당신이 영원한 신랑이심을 천명하는 동시에 모든 법이 모든 상황 속에서 똑 같이 적용될 수 없음을 일깨워주십니다.
그리고 새로운 시대에는 새로운 법이 적용되어야 함을 일깨워주시며 이런 유명한 말씀을 남기십니다.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
혼인잔치에서 함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는 상황에서 단식을 하는 것이 우스운 것이 듯이 모든 법이 모든 상황에서 유익하게 적용되지는 않습니다.
제가 들은 바로는 사람은 4년이면 모든 세포들이 다 바뀐다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4년 전의 내 모습과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러나 어렸을 때의 내가 바로 지금의 나입니다. 비록 몸은 새롭게 태어나지만 바뀌지 않는 나의 무엇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2차 바티칸 공의회 때 시대에 맞게, 물론 그것도 너무 늦은 것이긴 하였지만, 미사의 언어를 각 나라말로 할 수 있게 결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라틴어 미사를 고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뀌어도 되는 것을 그것이 바뀌지 말아야 되는 무엇인양 고집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뀌어도 되는 것과 절대 바뀌지 말아야하는 것을 구별하지 못할 때 율법주의자가 되고 융통성 없는 사람이 됩니다. 세상 모든 것이 변하여도 변하지 않으시는 하느님이 존재하시는 것과 같이, 하느님과 관련된 것, 즉 사랑, 진리, 선 등은 변하지 말아야하는 것이고 그 변하지 말아야 하는 것 속에서 새 술은 새 부대에 담고 헌 옷은 헌 천 조각으로 깁듯이 해야 할 것입니다.
새 부대
-김찬선신부-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또한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개혁은 여간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성공을 하려면 혁명을 해야 된다고 합니다.
개혁, 쇄신은 기존의 인물을 가지고 제도를 바꾸려고 한다면 혁명은 새로운 제도에 반대되는 기존의 인물은 다 제거한 다음 제도를 바꾸는 것이라고 하면 될까요?
그러므로 개혁과 쇄신이 어렵다 함은 제도를 바꾸는 것보다 사람을 바꾸는 것이 어렵다는 뜻이고 사람을 그대로 두고 제도를 바꾸는 것은 어렵다는 뜻일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사실 길들여진 작은 것 하나 벗어나지 못합니다. 우리 인간은 맺어온 인간관계를 넘어서지 못합니다. 우리 인간은 편견과 선입관 하나 깨지 못합니다. 우리 인간은 습관 하나 고치지 못합니다. 그러니 이념은 더욱 깨기 어렵습니다. 과거 때문에 미래를 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개인이든 집단이든 새로운 것에 대한 저항이 큽니다. 새로운 것에 대한 머리의 저항도 크지만 머리로 새로움을 받아들여야 한다 생각해도 의지가 받아들이기 힘들고 의지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려 해도 몸이 거부하거나 습관이 거부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새 부대가 되라고 하십니다. 주님을 담으려면 기존의 것을 적당히 보수하는 것으로는 안 되고 완전히 새 부대가 되라고 하십니다.
"낡은 옷에다 새 천 조각을 대고 깁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하면 낡은 옷이 새 천 조각에 켕기어 더 찢어지게 된다. 또 낡은 가죽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는 사람도 없다.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서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둘 다 보존된다."
-양승국신부-
<책사>
얼마 전까지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KBS 대하드라마 "왕건"에 "책사"란 직책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이 사람이 주로 하는 일은 왕의 최측근에 머무르면서 왕의 정책을 보좌하는 일이었습니다. 군사 기밀이나 적국의 동향, 정보들을 입수해서 나름대로 종합한 다음 왕에게 전달하는가 하면, 왕이 곤란한 입장에 놓여있을 때 해결책을 제시해주는 아주 중요한 직분을 맡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왕건이 후삼국 통일의 위업을 완수하자마자 왕건의 책사는 이런 조언을 왕에게 전달하였습니다.
"폐하! 새로운 정권에 도움이 되고 협력할만한 사람들은 최대한 끌어안는 융화정책을 펴십시오. 그러나 반대로 제국 건설에 걸림돌이 될만한 인물들은 본인은 물론이고 그 일가친척까지 모조리 멸하십시오."
한 마디로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자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과 일맥상통하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너무나 큰 새로움이셨습니다. 그분의 가르침은 너무도 엄청난 진리, 색다른 의미였습니다. 예수님의 사상은 구약의 가르침을 몇 천 배나 능가하는 새로운 진리였기에 크게 비우지 않으면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그분을 보다 적극적이고도 전폭적으로 믿고 따르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항상 예수님과 세상 그 사이에서 끊임없이 방황하고 고뇌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 이유는 아마도 우리가 버려야 할 것들을 아쉽고 아까운 나머지 과감하게 내던지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간 우리가 지녀왔었던 빛 바랜 가치관들, 내 주관에 따른 행동양식, 내 위주의 사고방식, 이런 것들이 우리를 계속 지배하는 한 너무도 크나큰 새로움이신 예수님을 수용하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을 사는 삶
-상지종신부-
새벽 미사를 드리기 위해 제의를 입으면서 하느님을 생각했습니다. 하느님이 참 고마웠습니다. 새로운 하루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제대 위에서 믿음의 벗들을 바라보면서 인사를 합니다.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믿음의 벗들도 인사를 합니다. "또한 사제와 함께"
참으로 고마운 시간들입니다. 새로운 하루가 그렇고, 이 하루를 하느님과 함께, 그리고 믿음의 벗들과 함께 시작하는 미사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너무나도 소중한 이 시간들을 자주 아무 느낌없이 맞아들였습니다. 아쉽게도 말입니다.
오늘 아침, 그동안 마음 한 구석에 밀어놓았던 이 느낌을 다시 가져봅니다. 그래서 더욱 기분 좋은 출발을 할 수 있습니다.
새벽 미사를 마치고 성당 마당에서 하늘을 봅니다. 파란 하늘과 흰 구름, 마치도 가을 하늘과 같습니다. 며칠 동안 무더위에 지친 심신에 맑고 싱싱한 생기를 불어넣어줍니다.
방으로 돌아와 복음을 다시 읽어봅니다. 미사를 준비하면서 어제밤에 읽고 묵상할 때와는 또다른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오늘 아침 새 하루를 시작하면서 그 동안 잊어왔던 느낌을 되찾게 된 것은 바로 예수님의 말씀 때문이었음을 알게됩니다.
"잔치에 온 신랑의 친구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야 어떻게 슬퍼할 수 있겠느냐?"
"낡은 옷에다 새 천조각을 대고 깁는 사람은 없다."
"낡은 가죽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는 사람도 없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둘 다 보존된다."
하느님께서는 '오늘'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어제'도 '내일'도 아닌 '오늘'을 말이지요.
어찌보면 하느님은 선물은 바로 '오늘' 뿐입니다. '어제'도 '내일'도 아닌 '오늘' 뿐입니다.
어찌보면 제가 살고 있는 시간은 바로 '오늘' 뿐입니다. '어제'도 '내일'도 아닌 '오늘' 뿐입니다.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새 하루를 선물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을 멋지게 다듬고 가꾸는 것은 저의 몫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소중한 이 선물은 아직 하얀 종이입니다. 이 하얀 종이 위에 오늘 하루 저의 말과 생각과 행동으로 멋지게 수를 놓고 싶습니다. 하느님께서 보시고 좋아하실 그림으로, 사랑하는 이웃들이 함께 즐길 수 있는 그런 그림으로 오늘 하루를 채우고 싶습니다.
어제의 슬픔이 오늘의 기쁨을 가리지 못하도록, 순수하게 오늘을 살고 싶습니다.
내일의 어두움이 오늘의 밝음을 가리지 못하도록, 순수하게 오늘을 살고 싶습니다.
어제의 기쁨이 오늘의 슬픔을 가리지 못하도록, 순수하게 오늘을 살고 싶습니다.
내일의 밝음이 오늘의 어두움을 가리지 못하도록, 순수하게 오늘을 살고 싶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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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람들... 얄밉지 않을까요?
1. 피골이 상접해 있는 환자 곁에서 육체미 운동을 해서 불어난 알통 자랑하는 문병자. 2. 열등감에 사로잡힌 삼수생 앞에서, 사진이 잘 나왔다면서 학생증을 보여주는 대학생. 3. 대머리에게 고성능 광택제를 선물하면서, 적합한 물건 고르느라 몇 시간을 고생했다면서 너스레 떠는 친구. 4. 상사가 이혼한 줄 뻔히 알면서 비아그라를 선물하며 효능을 설명하는 부하직원. 5. 초상집에서 들려오는 문상객의 ‘얼씨구 좋다, 절씨구 좋다, 지화자 좋다’라는 휴대전화 호출음. 6. 소극장에서 열심히 연기를 하고 있는데 외치는 꼬마의 목소리 “아빠, 쉬마려.”
생각해보면 얄미운 사람들이 이 세상에 참으로 많습니다. 그런데 정작 얄미운 그 사람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상대방에게 얼마나 큰 상처와 아픔을 주는지는 알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자신이 받은 상처와 아픔은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치유될 수 없는 것처럼 말하면서도,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준 상처와 아픔은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생각하는 경우를 얼마나 자주 볼 수 있습니까?
이렇게 얄미운 모습이 바로 내 모습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얄미운 모습이 일반적인 내 모습일 때가 종종 있습니다. 물론 스스로는 이렇게 되지 않겠다고 말하면서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으로 인해서 얄미운 모습으로 상대방에게 다가선다는 것이지요.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새 천 조각은 새 옷에’ 그리고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할 것을 말씀하시지요. 바로 자신의 틀에 박힌 일정한 방식이나 태도를 벗어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 고정관념에서 잘 벗어나지 못하면서 계속해서 얄미운 모습을 상대방에게 드러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마지막으로 어떤 책에서 읽은 글을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잊을 수 없는 사람이 되기 위한 충고’라는 글인데, 우리의 삶을 다시금 반성할 수 있는 것 같아요.
1. 한번 만난 상대방이라도 이름은 정확히 기억하라. 2. 상대방이 부담을 갖지 아나하도록 배려하라. 3.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자랑하지 말라. 4. 어떤 것에도 상처받지 않을 포근함을 가지고 상대를 대하라. 5. 당신을 만나면 늘 무언가 배울 것이 있는 사람이 되라. 6. 오해를 하지 말도록 또 풀지 않도록 하라. 7. 사람들을 좋아해라. 8. 축하의 말과 위로의 말을 놓치지 말라. 9. 친구들이 정신적으로 의지하는 사람이 되라. 10. 늘 섬기는 마음을 가지라.
다른 사람에게 잊을 수 없는 사람이 되기 위한 충고를 기억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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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사는 자세
-장경선 수사-
예수님은 우리에게 과거나 미래가 아닌 오늘을 사는 정신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내일 일은 내일에 맡겨두어라. 오늘 하루의 수고는 오늘로 족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삶이 낡아버린 상태로 전락하고 고통스럽게 되는 이유 중 하나는 과거에 대한 집착 때문입니다. 오늘 아무리 좋은 일이 생긴다 해도, 아무리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진 곳에 가 있다 할지라도 그 사람의 내면이 온갖 과거로 얽혀 있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마음이 무엇인가 옛 것으로 가득 차 있다면 새로운 것이 들어올 공간이 없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합니다”라는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모든 순간에 끊임없이 은총의 선물을 부어주시고 계시지만 우리는 대부분 그냥 흘려보냅니다. 이제, 살아가는 동안 날마다 별로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 것일지라도, 주님께서 지금 주시고자 하시는 은총의 선물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는 깨어 있는 영혼이 되어보세요. 그러할 때 분명 주님께서는 원하시는 모든 일을 손수 우리 안에서 이루어가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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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선입견, 신앙의 편견
-송동림 신부-
지난 겨울 방학 때 고향인 제주도에 갔다가 택시를 탄 적이 있습니다. 밤늦게 약 한 시간 거리를 가야 했는데, 기사의 첫인상이 매우 험하게 느껴졌습니다. 문을 열고 탈 때부터 친절을 느낄 수 없을 뿐더러 표정도 굳어 있고, 손님을 바라보지도 않았습니다. 말투도 편안하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괜히 긴장되고 불편했습니다. 그러나 택시를 탄 지 얼마 되지 않아 저의 오해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장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20대에 오토바이 사고로 머리를 크게 다쳐 혼수상태에서 40일 가까이 입원했으며 큰 수술을 여러 번 받았는데, 그 후유증으로 얼굴 근육이 마비되었다는 것입니다. 가난했지만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헌신하는 어머니의 도움으로 재활치료를 하면서 지금은 큰 불편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직 몸이 많이 불편해 보였고, 언어장애도 조금 있어 보였습니다. 그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순간적으로나마 선입견을 가졌던 제가 부끄러웠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라사이들은 단식을 하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을 하지 않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단식을 하는 날 단식도 하지 않고 음식을 먹는 예수님 제자들의 모습이 그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던 모양입니다. 종교 안에서 지켜야 할 여러 규범이 있는데, 전통적인 관습을 어기는 것에 대한 반발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신앙적인 편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신들과 같이 생각하지 않고, 자신들과 같이 믿지 않고, 자신들의 방식대로 살지 않기에 틀렸다며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질문은 신앙의 본질에 관한 질문이라기보다는 형식에 관한 질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형식은 전통을 만들고 전통은 종종 신앙을 풍요롭게 할 수도 있지만 자칫하면 형식적인 전통에 매여 신앙의 본질을 간과하는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있는데,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와 같은 전형적인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획일적인 형식을 갖추고 당신에게 예배하기를 바라는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은 전통이나 형식보다 그 사람의 마음에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본질적인 전통을 외면하지 않으면서도 다양성을 인정하는 분이시며 동시에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 지위가 낮은 사람과 높은 사람, 멸시받는 사람과 존경받는 사람 등 모두가 외형적 삶의 모습에 구애됨 없이 한 식탁에 둘러앉아 당신과 함께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므로 형식적인 전통이나 관습적인 태도는 사람들로 하여금 편견을 갖게 하는데, 편견 중에 가장 무서운 편견은 신앙적 편견이라고 봅니다.
새벽을 열며
2주 동안 계속되었던 갑곶성지 경당 공사가 이제 마무리 단계에 들어서고 있습니다. 천장 칠을 새롭게 했고, 경당 마루에는 보일러를 설치해서 겨울에도 따뜻하게 미사를 봉헌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바닥에는 타일을 깔아서 전보다 훨씬 깨끗한 경당으로 변신되었습니다. 그래서 어제는 밖으로 빼놓았던 짐들이 모두 다시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커다란 일들이 모두 끝났는데도 불구하고, 새롭게 단장한 경당에서 미사하기가 한동안은 힘들 것 같습니다. 즉, 일주일 이상은 요즘 계속해서 미사하는 장소인 야외 갑곶 쉼터를 이용해야 할 것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분명히 눈으로 보이는 커다란 공사가 다 끝났는데도 불구하고, 왜 경당을 이용하지 못하고 밖에서 미사를 해야 할까요?
바로 냄새 때문입니다. 지금 경당에 들어가면 페인트 냄새로 인해서 오랫동안 안에 있기가 힘들답니다. 물론 계속해서 냄새를 빼고 있지만, 이 냄새가 곧바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는 안에서 미사하기가 힘들 것 같더군요.
냄새라는 것이 눈에 보일까요? 분명히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보이지 않는 냄새를 맡기만 해도, 미사를 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나 알 수가 있습니다. 오랫동안 견디기 힘든 냄새, 그리고 눈까지 심하게 매우니까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이러한 몸의 변화를 통해서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참 재미있는 것은 눈으로 보이는 것만을 믿으려 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눈이 얼마나 부족한 것인지요? 하늘의 태양을 제대로 볼 수 있을까요? 또한 나의 뒷모습을 볼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어둠 속에서는 제대로 볼 수 있을까요? 모두가 아닙니다. 벌건 대낮에 떠있는 태양도 보지 못하고, 내 뒷모습도 보지 못하며, 깜깜한 어둠 속에서는 아무것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부족한 ‘본다’라는 것에 우리는 얼마나 많이 의지하고 있었는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들 마음의 벽을 열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라는 의도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복음 말씀을 우리들에게 전해주십니다.
만약 헌 부대 자루가 아깝다고, 새 포도주를 헌 부대에 넣었다가 터져 버릴 수도 있다고 하시지요. 이처럼 늘 새롭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나의 구태의연한 마음을 버리고 새로운 마음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따라서 이러한 기준으로 내 이웃과 주님을 판단했던 잘못은 모두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때 우리들은 새롭게 다가오는 새 포도주 같은 주님을, 새 부대와 같은 내 마음 안으로 잘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기준으로 남을 판단하지 맙시다.
빠다킹신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 -이정희 수녀-
◆오늘 복음은 단식에 대한 논쟁(14-15절)과 두 가지 비유 말씀(16-17절)으로 구성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믿음을 중심에 두고 말씀하신다. 성경에서 혼인잔치는 종말론적 구원을 상징하는 것으로, 예수님이야말로 구약의 약속이 실현되어 종말론적 구원을 이루는 분이심을 알려준다.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 제자들은 단식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분과 함께 있는 것이 구원을 경축하는 기쁨의 자리였기 때문이다. ‘새 천 조각’, ‘새 포도주’, ‘헌 옷, 헌 가죽부대’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함으로써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는 혁신적이고 위력적이므로 이에 맞갖은 ‘회개’ 역시 새롭고 힘차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결국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변화라는 것은 지금까지 익숙했던 생활 습성을 버리고 떠나는 것이라 하겠다. 새로운 것에 적응하려면 모험이 필요하다. 무마드 아마디네자드 이란 대통령이 부시 대통령에게 보낸 도전장을 한겨레신문(2006년 5월 6일)에서 읽었다. 어느 누구도 감히 도전하지 못했는데 그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왜 이렇게 속이 후련할까 생각해 보니 이란 대통령의 앞뒤 안 가리는 ‘모험심’이 부러웠던 것 같다.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데도 이런 모험심과 단순함이 필요하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매일매일의 삶에서 새롭게 태어나기를 바라신다. 우리는 주님의 초대에 열린 마음으로 응답하는가?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 -정호신부- 이천년 전, 하느님을 무서운 분으로 알던 이스라엘 사람들, 그래서 수없는 제사와 단식을 반복하며 하느님께 정성을 드리고 자신들의 처지를 하느님의 이끄심으로 바라보며 하느님을 믿던 이들에게 예수님은 너무도 달라보였습니다. 같은 하느님이시나 예수님의 하느님은 말에만 머물던 사랑이 눈 앞에 드러난 모습이었습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너무나 넓게 펼쳐지는 예수님의 사랑은 예수님을 따르던 부족해보이기만 하는 제자들에게도 자유로움을 주었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들에게 엄격한 규칙에서 벗어나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바쁜 삶에서 삶을 멈추고 단식으로 하느님께 정성을 드릴 때 예수님과 그 제자들은 삶을 계속하며 살면서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하느님 사랑을 가르쳤습니다. 그렇게 쉬지 않는 이들, 특히 자격없는 듯 보이는 단식하지 않는 제자들에게 사람들은 과연 저 사람들이 하느님께 마음이 있는지를 의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의심은 과연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것으로 화살을 돌리게 만듭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의 시선에 새술은 새부대에로 통하는 유명한 이야기를 꺼내십니다. 그리고 지금은 당신 제자들은 그 때가 아님을 이야기하십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단식하지 않는 것이 옳다는 이야기는 아니십니다. 단식은 자신의 생명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의미를 지닙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드릴 수 있는 사랑의 깊은 표현이고 그 단식을 통해 생긴 정성을 하느님께 드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당신의 생명을 제자들과 함께 이웃들과 나누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리고 함께 먹고 마시는 모습들 속에 단식에 깃들여 있는 의미를 보여주셨고 제자들로 하여금 체험하게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은 무엇이 옳다 그르다라는 식으로 표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의 결론은 둘 다 보존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느님께 정성을 드리는 일은 최선을 다했지만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에는 한결같이 부족함을 드러내었습니다. 우리가 아는대로 하느님의 사랑의 가르침은 하느님과 이웃 모두에 대한 한 없는 사랑을 말합니다. 그것은 하나도 손상됨 없이 지켜져야 하고 그래야 완전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드러냅니다. 이천년 후를 살아가는 우리, 곧 성령 안에 사는 교회의 모습은 하느님께 대한 정성과 이웃에 대한 사랑 모두를 고스란히 지켜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로 이어져 내려온 교회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데 정성을 다하는 묵은 술의 전통도 지켜왔고 그리스도에게서 배운 사랑의 실천이라는 새 술의 전통 또한 지켜옵니다. 그렇게 하느님 사랑의 가르침은 둘 다 훌륭히 보존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느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결론보다는 우리의 믿음에 부족했던 부분을 신랑이신 주님께서 우리 교회에 채워주셨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묵은 술과 새 술 모두를 잘 보존하십시오. 그 모든 것은 하느님과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보물입니다.
“혼인 잔치 손님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 슬퍼할 수야 없지 않느냐?”
-양승국신부-
<하느님께서 주신 휴가>
얼마 전 혼배성사를 집전하면서 정말 놀란 적이 있습니다. 나중에 따로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하는 것도 아닌데, 너무나 간소하고 소박했습니다. 양가부모와, 형제자매들, 그리고 증인들, 모두 합해봐야 스무 명도 채 안 되었습니다. 멋들어진 결혼식을 준비할 형편이 안 되서 그렇게 한 집안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주변 사람들에게 민폐 끼치고 싶지 않아서, 차분한 가운데, 보다 결혼식의 의미를 살리기 위해서 그랬답니다.
적어도 친구들이나 친척들에게 알려야 되지 않겠냐고 물었더니 그러더군요. 결혼식 끝난 후에 사진과 함께 결혼했노라고, 기도해달라는 내용이 적힌 안내장을 보낼 것이라고.
또 다른 결혼식에 갔었는데, 축의금을 받지 않더군요. 한 편에서는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죽어도 내야겠다고 떼를 쓰는데도 불구하고 죽어도 받지 않더군요. 대신 결혼식이 끝난 후 인도된 곳은 뷔페식당이 아니라 국물 맛이 ‘죽이는’ 잔치국수 한 그릇만 차려진 교실이었습니다. 참석한 모든 사람들, 한 목소리로 맛있다고, 정말 좋았다고, 말들을 했습니다.
결혼의 가장 본질적인 요소는 두 당사자의 마음, 결국 그들의 사랑임에도 불구하고 요즘 결혼식 너무 복잡해졌더군요. 결혼 당사자들뿐만 아니라 부모님들의 부담(과중한 혼수 준비)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허리가 휘청할 정도의, 격에 맞지 않는 지나친 결혼식 참으로 꼴불견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당사자나 가족, 하객들 모두에게 부담을 주는 결혼 문화, 안 그래도 좋지 않은 경제 상황인데, 뭔가 진단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결혼식에 이어지는 혼인잔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잘 차려진 5만 원 짜리 뷔페일까요? 수많은 하객들일까요? 좋은 주례사일까요?
보다 중요한 것이 분위기이겠지요. 새롭게 출발하는 두 사람의 앞날을 진심으로 축복해주고 축하해주는 ‘축제 분위기’일 것입니다. 함께 기뻐하고, 행복해하는, 그 가시적인 표현으로 술잔도 기울이고 음식도 함께 나누는 그런 가족적인 분위기일 것입니다.
축하해주러 온 사람이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축하연에서 큰 소리를 지른다면 예의가 아닐 것입니다. 불편한 일이 있다고 화를 낸다든지 갖은 불평불만을 늘어놓는다면 마치 찬물을 끼얹는 행위가 될 것입니다. 차려진 음식이 먹을 만한 게 하나도 없다고 잔뜩 인상 구기고 한 구석에 ‘찌그러져’ 있다면 그것도 할 짓이 아닐 것입니다.
혼인잔치에 손님으로 왔다면 다른 것 없습니다. 진심으로 축하할 일입니다. 경사에 함께 기뻐할 일입니다. 차려진 음식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즐길 일입니다.
유다 문화 안에서 또 성경 안에서 찾아볼 수 있는 두드러진 흔적 하나가 있습니다. 하느님과 백성 사이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의 혼인관계로 자주 묘사한 것입니다.
어쩌면 예수님의 인간 세상 도래는 하느님과 인간이 혼인한 것과 유사합니다.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연인이자 신부(新婦)인 우리 각자와 혼인한 것이 메시아의 강생인 것입니다.
그 크신 하느님께서 자신을 극도로 낮추셔서 부족하고 덜 떨어진 인간과 한 몸 한 마음이 되셨다는 것, 생각만 해도 과분하고 송구스럽고 기쁘기 한량없는 일입니다. 한 마디로 기적입니다. 꿈같이 행복해서 펄쩍 펄쩍 뛸 일입니다.
우리 각자는 하느님께서 허락하셔서, 은총을 베푸셔서 이 아름다운 세상에 잠시 소풍을 나온 천사들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꿀맛 같은 첫 휴가를 나온 주님의 군사들입니다. 이런 우리가 우울하게 지낸다거나, 시무룩하게 지내서야 되겠습니까?
우리에게 너무나 과분한 선물로 주어진 지상이 축복의 시간, 좋아죽겠다는 얼굴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온 이유는 이토록 과분한 은총과 축복을 주님과 함께 마음껏 즐기기 위해서 온 것입니다.
하느님과 하나 됨, 하느님의 연인이 됨, 하느님의 신부(新婦)가 됨을 일생일대의 큰 기쁨으로 여기고, 평생토록 하느님을 찬미하며 살아가는 일,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은 같아지는 것 -강영구신부-
+ 낡은 가죽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는 사람도 없다.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서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둘 다 보존된다.
그대에게
창밖에 장대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기껏 사나흘 장맛비가 내렸는데도 벌써 지겹습니다. 눅눅한 습기가 몸과 마음까지도 눅눅하고 우울하게 만듭니다.
사도 바울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기뻐하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 기뻐해 주고 우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 울어주십시오. 서로 한 마음이 되십시오.”(로마12,15-16) 사랑은 같아지는 것입니다. 같아지기 위해서는 한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한 마음이 되면 기뻐하는 사람과 함께 기뻐할 수 있고, 우는 사람과 함께 울어줄 수 있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레위기 19,18)는 계명은 ‘너’와 ‘나’의 구별을 없애고 동체자비행(同體慈悲行)을 실천하라는 말씀입니다. ‘너’를 ‘나’라고 생각하면 너의 기쁨은 나의 기쁨이므로 함께 기뻐할 수 있고, 너의 고통은 나의 고통이므로 함께 아파할 수 있습니다. 하늘나라(天國)는 여기서 시작됩니다. 그러나 너의 기쁨을 시기(猜忌)하고 너의 고통을 고소해하며 즐긴다면 지옥이 따로 없습니다. ‘너’와 ‘나’를 구별하는 세계가 지옥입니다.
낡은 옷에 새 천 조각으로 다가가는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낡은 옷을 더 못쓰게 만듭니다. 낡은 가죽부대에 새 포도주로 다가가는 사람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부대를 터트려 못쓰게 만듭니다. 낡은 옷에 낡은 천 조각이 어울리고 새 부대에는 새 포도주가 어울립니다. 그러나 같아져서 동체일신(同體一身)이 되려면 스스로 죽어야 합니다. 나를 고집하고 나에게 집착하는 사람은 사랑의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당신의 오늘이 사랑하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一明)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주영 돈 신부-
오늘 복음에서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께 와서 ‘단식’에 관한 질문을 합니다. “우리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자주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왜 단식하지 않습니까 ?”
바리사이들은 매주 두 차례 월요일 과 목요일에 단식했습니다(디다케 8.1). 식사를 멀리한 세례자 요한의 영향으로 그의 제자들도 자주 단 식했습니다. 이와는 달리 먹보요 술꾼인 예수님의 영향을 받은 제자들은 평소에 자발적으로 단식하지 않았습니다.
단식은 모든 종교에서 중요시하는 신심행위입니다. 유대교에서도 단식은 초기부터 중요했습니다. 모세는 시나이 산에서 율법을 받기 전 40일 동안 단식했고(출애 34,28), 예언자 엘 리야도 호렙 산에서 하느님을 만나기 전에 40일 동안 단식하였습니다(1열왕 19,8). 예수님도 세례 받고 제자들을 가르치기 전 광야에서 40일 단식하셨다고 복음서는 말합니다. 바울로 사도는 다마스커스에서 그리스도 신앙으로 개종할 때 사흘 동안을 단식했습니다(사도 9,9). 단식은 유대교에서 대단히 중요한 자리를 차지합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사람들은 하느님과 일치하기 위해 자주 ‘단식’중에 하느님 께 ‘기도’하였고,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 이웃에게 ‘자선’을 베푸는 것으로 나옵니다(참조: 출애굽기 34,28; 이사야 58,3-7; 다니엘 9,3; 에스델 4,1-3; 토비트 12,8; 바룩 1,5 등등).
그래서 예수님의 산상 설교에 보면, 자선, 기도, 단식이 가장 중요한 유대인의 신심행위로 요약됩니다. 예수님 은 그 신심행위가 남에게 보이기 위한 위선으로 전락하지 않게 하라고 경고하십니다. "자선을 베풀 때 는 오른 손이 무엇을 하는지 왼손이 모르게"(마태 6,3), "기도할 때는 골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은 다 음"(6,6), 단식할 때는 "단식하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지 말고"(6,18) 하라는 말씀입니 다. 신심행위가 자기 과시용으로 전락하는 것을 비판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이든 남보 다 조금 나은 일을 하면 그것을 사람들 앞에 과시합니다. 신심행위도 사람들에게 자기 자신을 경건하게 보이는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기원전 6세기 유대아가 정치적 독립을 잃은 다음부터 유대 민족을 실제 로 통치한 것은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종교인들이 그 사회의 실세가 되면서, 그들이 사람들에 게 강요한 것은 종교 계명이었습니다. 종교 계명을 준수하는 경건한 사람은 사회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 았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에게는 계명을 잘 지킨다는 사실을 과시하려는 욕망이 있었습니다.
하느님과 일치하여 하느님의 뜻을 찾기 위해 수단으로 행해졌던 기도와 단식이, 이제는 자기 과 시와 형식으로 전락해 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모든 것이 형식에 젖어버린 유대인들을 향해 오 늘 새로운 의미의 말씀을 선포하고 계십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 야 한다(17절).”
이 말씀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중요한 말씀입니 다. 늘 우리가 하느님과의 관계를 맺었던 처음을 생각하고, 형식과 위선에서 벗어나 서 살아가야 함을 뜻하기도 합니다. 처음 내가 간직했던 하느님과 나와의 만 남을 생각하고, 단식과 기도로 더 깊은 만남의 경지를 만들어가야 하는데 형식과 위선에 빠져 버렸다면, 지금의 모든 것을 버려야 합니다. 내가 입고 있는 누더기 같은 옷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어야 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과거를 버린다 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신이 소유한 물건하나 빼앗기지 않으려고 발버둥치고 있는 오늘의 우리 들에게, 늘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찾아나서는 용기, 처음 내가 시작했던 원천으로 돌아가는 일은 사형 선고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혹시 지금 우리 자신에게서 유대인들처럼 위선과 자기 과시, 형식에 치우진 것이 있다면, 벗어버려야 합니다. 새것으로 갈아입어야 합니다. 그것만이 주 님께서 주시는 참된 정의와 평화, 한결같은 사랑과 뜨거운 애정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새 부대만이 새 포도주이신 주님을 모실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멘. ♡
† 단식이란 회개위 표징이며 용서와 자비의 기다림 † -박상대 신부-
지난 복음에서 침상의 중병병자와 세리 마태오와 관련한 주님의 모습에서 보듯이, 질병과 죄의 관념적 유대관계를 깨어버리고 죄인까지도 불러 제자로 삼으시며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공동체를 이루신 예수께서는 분명 이 땅위에 죄를 용서하시는 권한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죄의 용서는 갈라지고 깨어진 관계와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며, 공동체에로의 복귀를 의미합니다. 사실 이 땅위에서 예수 외에 어느 누구도 죄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외에 어느 누구도 사람의 죄를 사할 수 없다는 철칙을 알고 있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예수는 한낱 하느님을 사칭하고 그분을 모독하는 자로만 인식되겠지만, 세상에 대한 예수님의 자기계시는 오늘복음에서도 계속됩니다.
예수께서 제자로 삼으신 세리 마태오의 집에서 다른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 음식을 나누었던 일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와서 단식에 관한 문제로 시비를 건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단식'은 일정 기간 동안 종교적 수행이나 의료의 목적으로 모든 음식섭취를 끊는 일입니다. 거의 모든 종교에서 단식은 그 종교의 기본적 수행에 속하는 덕목인데, 요즘은 자신이나 단체의 뜻을 관철시키려는 수단으로, 또는 건강이나 늘씬한 몸매를 가지기 위한 수단으로 단식이 널리 이용되며, 도교에서는 장생불사하기 위한 방법으로 쓰이기도 합니다.
단식의 가장 대표적인 예로는 이슬람교의 라마단(Ramadan)을 손꼽을 수 있는데, 라마단은 이슬람력의 9월에 해당하는 절기로서, 이 기간에 모든 무슬림은 일출에서 일몰까지 해가 떠 있는 동안에 한 방울의 물도 마시지 않는 철저한 단식규정을 지킵니다. 유다인들에게 있어서 단식은 율법이 규정하고 있는 바, 온 이스라엘이 죄를 벗는 제7월(티쉬리달, 현대력으로는 9월)의 10일에 모든 사람이 단식과 안식을 지켜야 했습니다.
(레위 16,29; 사도 27,9 참조) 유배생활 이후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메시아의 도래를 준비하는 뜻으로 일주일에 두 번(월요일과 목요일) 단식하였고, 신약시대의 직전에는 세례자 요한이 금욕생활을 하였고 그의 제자들도 스승을 본받아 자주 단식하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루가 18,12; 마르 1,6; 마태 11,19)
따라서 오늘복음에서 논쟁의 대상이 된 단식은 율법이 명하는 공식적인 행사로서가 아니라 사적이고 개인적인 수행으로서의 단식을 의미하는 것으로 봐야 합니다. 예수와 제자들이 왜 단식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예수께서는 자신을 혼인잔치에서의 신랑, 새 천 조각, 그리고 새 부대와 새 포도주에 비유하시는데, 혼인잔치가 벌어지는 동안에 신랑이 손님들과 단식을 하거나 곡을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술과 음식, 여흥과 춤, 기쁨과 웃음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공생활을 바로 혼인잔치가 벌어지는 기간으로 계시하신 것입니다. 이 때는 결국 새로운 시대의 개벽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예수님의 오심으로 시작된 하느님나라의 시대이며, 새로운 계약의 시대이며, 하느님께서 주시는 기쁨의 선물인 구원의 시대입니다. 이 때는 이사야가 예언한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리는(이사 65,17; 66,22) 시대이며, 에제키엘이 말하는 묵은 심장이 도려내 나가고 새로운 심장이 심겨지는(에제 36,26) 그런 시대입니다.
단식이란 회개의 표징으로서 용서와 자비의 기다림이며, 구약성서와 유다교에서 단식은 약속된 메시아의 도래와 불가분의 관계로 결합되어 있습니다. 메시아이신 예수께서 이미 도래하셨으니, 예수님의 제자들이 단식을 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ipso facto) 모순입니다. 제자들은 물론 세상이 온통 메시아 도래의 기쁨에 차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에 40일 주야를 단식하셨듯이(마태 4,2) 우리에게도 단식은 필요합니다. 단식은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며, 앞으로 올 것에 대한 준비로는 꼭 필요한 수행이기 때문입니다.
"새 옷 - 낡은 옷, 새 포도주 - 묵은 포도주, 새 부대 - 헌 부대"를 소재로 한 이중비유는 단식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을 한층 더 또렷하게 밝혀줍니다. 예수님의 메시아로서의 도래는 하느님나라의 도래를 말하는데, 이제 헌 것은 가고 새 것이 도래한 것입니다. 모든 것이 새로워졌고 새 하늘과 새 땅(2베드 3,13; 묵시 21,1)이 도래했습니다. 새로이 도래한 하느님나라를 헌 것을 가지고 맞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하느님나라를 향한 준비는 마음의 "어느 한 조각"으론 불가능하기에, 예수께서는 우리들에게 삶과 태도의 전적인 회개와 변화를 촉구하시는 것입니다..........◆
† 새 술은 새 부대에...우리의 가치관 변화를 요구 †
우리는 지난번 묵상에서 산상수훈을 통해 주시는 말씀의 주제를 크게 3갸로 구분하여 학습한 적이 있습니다. 모두들 기억하고 계시지요. 자선과 기도와 단식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앞의 복음에서 죄인에게 자선을 베푸시는 주님의 묵상했습니다. 그것도 일반의원에 가서 치료받으면 낫을 정도의 가벼운 환자가 아니고 평생 회복할 수 없는 중한 병자를 죄사함으로 치료하시는 주님, 그리고 평생 죄인의 올가미를 써야 하는 세리 등와 같은 중한 죄인 취급을 당하는 자들에 대한 자선....을 통해서 주님은 당시 율법사회의 자선에 대한 고정관념을 파괴시켜 버렸습니다.
주님의 행위는 폐기하는 파괴가 아니라 율법을 완성하는 창조적 파괴였습니다. 그러나 어느 사회에서든지 그렇듯이 기존의 수구세력, 즉 보수집단들은 그런 창조적 개혁에 대해 반기를 들고 거친 투쟁을 하기 마련입니다. 그 수구세력으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유럽학자들이 계속 주님 곁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또 한판의 격론이 벌어질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그들이 신앙생활에서 매우 중요시하며 지키는 단식문제입니다.
바라시아파 사람들은 단식의 프로선수들입니다. 그들은 회개와 속죄의 표시로서 단식을 최소한 일주일에 두 차례 이상은 했습니다. 그것도 '나 이렇게 단식하오'...라는 외관적 모습을 처참하고 슬프게 보이면서 말입니다. 그러면 그들의 속 마음도 모르는 일반사람들은 그런 단식자를 매우 성스러운 사람으로 특별히 봐 주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당시 사람들은 이런 모습을 보고서 존경을 보이기도 했답니다. 외식주의자들의 가증스러운 위선을 모른체.........
그런데 우리와 똑같은 모습이신데도 예수님만은 역시 다릅니다. 예수님은 그런 외석적 그들을 좋게 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위선자라고 하면서 꾸짖습니다. 왜요? 바로 자신의 본래 모습은 감추고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만을 중요시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가 행하는 단식과 이웃을 위한 희생, 그리고 나눔은 형식적이고 가식적이지 않습니까?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기 위해서 진정으로 내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행하고 있는 것입니까?
만일 우리가 행하는 단식과 희생과 나눔이 형식적이고 가식적이라면 우리의 마음은 이미 낡아버린 가죽 부대에 불과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낡아빠진 가죽 부대에 새롭게 오시는 예수님을 모실 수 없습니다. 새 가죽 부대를 장만해서 매 순간 주님을 따르는 것이 우리들의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이 될 때, 진정으로 주님의 사랑을 받는 제자가 될 것입니다. 잘못했으면 빨리 새옷으로 갈아 입읍시다. 주님께서 미워하기 전에....
바리사이들과 요한의 제자들과 같은 형식적인 단식으로 하느님 앞에 우리들의 죄에 대한 슬픔을 나타내면 안됩니다. 그들은 대부분 엄격한 종교 전통에만 매달린 것으로서, 하느님의 뜻에 따른 참된 회개와는 무관한 것입니다.
그다음으로 오늘복음에서 보면, 주님은 제자들을 가리켜 '혼인집 신랑과 함께 있는 손님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잔치집에서 단식이라는 행위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바리사아파 사람들과 요한의 제자들은 엄격한 종교젙옹에 매달려 단식을 하지 않는다고 닥달을 합니다. 그들은 사회가 프루쿠스테스 침대의 논리와 같이 똑같은 붕어빵 사회를 만들려는 형식주의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형식보다는 마음을 중시하는 아메바성 지도자의 모습을 보입니다. 아메바는 상황에 따라 그 모습을 유연하게 변형시켜 이물질들을 전부 흡수합니다. 그러나 그 아메바가 모든 것을 다 수용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아베바가 가지는 고유한 세포막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경계선(경계지대, 또는 안전지대)라고 말합니다. 그 안전지대를 해하지 않는 범위내에서 수용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사랑의 법칙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오늘복음에서 주님의 말씀을 마치 단식 자체를 금지하신 것으로 오해하면 안됩니다. 주님도, 초대 교회도 금식을 선하게 사용했습니다. 주님이 금하신 것은 메마른 형식주의였습니다.
그다음으로는, 오늘복음에서 주님은 신자들의 삶을 새 가죽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은 것으로 비유하십니다. 새 포도주란, 주님이 주시는 구원의 은혜와 기쁨이며, 새 부대란 주님을 믿는 새로운 삶의 방식입니다. 낡은 부대란, 바라사이파 사람들과 같이 과거 전통에 얽매인 삶의 방식입니다. 따라서 메마른 형식주의적인 삶으로는 주님이 주시는 구원의 풍성한 은혜를 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기쁨과 자유를 맛보기 위해서는 '낡은 부대'를 버리고 주님을 믿고 순종하는 것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나의 삶은 구원의 은혜와 기쁨을 담을만한 '새 부대'입니까? 믿음이 있으면서도 메마른 율법주의에 매여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면 새부대의 새삶을 위한 방법을 묵상하면서 마무리 하겠습니다.
첫째로, 낡은 부대를 버리라
예수님께서는 "낡은 옷에다 새 천조각을 대고 깁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하면 낡은 옷이 새 천조각에 켕기어 더 찢어지게 된다. 또 낡은 가죽 부대에 새 포도주를 담는 사람도 없다.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서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둘 다 보존된다."(마9:16-17)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새천년기 새로운 희망과 꿈을 가지고 살아갈 우리들에게 '새 천조각의 비유'를 통해서 잘못된 과거의 것을 청산하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기서 새 천조각은 한번도 세탁된 적이 없는 천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이것을 물에다 빨아말리면 줄어듭니다. 따라서 이것을 가져다가 올이 낡은 옷에다 대고 함께 기을 경우, 새로운 천은 오그라들어 낡은 옷을 잡아당김으로써 트더져 버린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깁밤 옆구리 터지듯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낡은 옷, 즉 낡은 사고방식을 버려야 합니다. 지금까지 잘못 살아온 습관, 관습, 생활 등을 다 청산해야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새 포도주와 가죽 부대의 비유'를 통해서 '신사고'를 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가죽 부대'라고 하는 것은 양이나 염소 등의 가죽을 통째로 벗겨낸 후에 목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을 다시 기워 그 안에 액체를 담아 놓는데 사용된 용기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 가죽부대가 낡아 튼튼 하지 못할 경우, 거기다 새 술을 담아두면 새 술에는 생겨나는 발효력을 생성치 못해 신축성이 없는 이 낡은 가죽 부대는 반드시 터지고 맙니다. 따라서 급격한 발효과정을 거치지 않은 새 술을 담아 둘 경우에는 반드시 새로 만든 가죽부대를 사용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내용에서 잘못된 옛 습관을 과감하게 버려야 한다는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마태 23,39)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동안 일삼았던 개인과 집단의 이기주의적인 행동들이 공동체의 심리적 공황을 야기시겼습니다. 또한 우리는 국가가 나를 위해서 무엇을 해 줄것인가만을 기대했으며, 내가 국가를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책임을 회피하면서 살아왔습니다. 또 많은 공무원들과 근로자들이 복지부동의 자세로 자기의 편익만을 추구했으며, 소수의 부유층과 권력가들이 대부분의 국가 외화를 제멋대로 사용해왔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정치인들이 기업인들과 결탁하여 엄청난 액수의 정치 자금을 만드는 일에 관여해 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는 소수를 제외한 많은 신자들이 아무런 봉사도 없이 그저 교회의 마당만 밝고 가는 일이 허다했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과감히 청산함으로써 과거의 모든 잘못된 습관과 사고가 담긴 낡은 부대를 멀리 던져 버려야 하겠습니다.
둘째로, 새부대를 준비하라.
낡은 부대를 과감하게 단져 버렸다면, 그 다음에 해야 할 일은 새 부대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둘 다 보존된다," (마태 9,17)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새로운 사람이 되려면 먼저 우리의 가치관을 새롭게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새 부대는 우리 마음의 자리를 가리킵니다. 우리는 이 마음을 '새로운 사고', '새로운 가치관'으로 채워야 할 것입니다. 우리 마음의 중심을 '나'라는 자아로 채워넣을 때, 우리는 많은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요즈음 군사정부시절의 비사를 드라마화한 것을 보니, '나 중심의 욕심'으로 얼마나 많은 죄를 범했는지 잘 그려져 있더군요...마태 15,19에서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살인, 간음, 음란, 도둑질, 거짓 증언, 모독과 같은 여러 가지 악한 생각들이다."라고 했습니다. 바로 앞에서 소개한 드라마의 주역들에게 하는 말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의 중심에 예수님을 모신다면 이기적인 사람이 남을 사랑하게 되고, 내 것만 주장하는 사람이 남에게 나누어주는 사람이 됩니다. 또한 인본주의의 사람이 신본주의의 사람으로, 내 사업만 생각하고 자신의 권력만을 생각하던 사람이 소비자를 생각하고 국민을 생각하는 사람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리고 영혼의 가치를 존중하게 되어 예배 중심의 삶, 말씀 중심의 삶, 기도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습관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잘못된 과거의 습관을 그대로 간직하고 살아간다면 어떠한 새로운 결과도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하는 습관, 전도하는 습관, 봉사하는 습관, 나누어주는 습관 등을 점차 길러가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좋은 습관을 길러내는 방법 중의 하나는 날마다 하느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입니다(잠언 3,3).
셋째로, 새 포도주를 가득 채우라 우리가 새 부대를 준비했다면 이제 그것을 새 포도주로 가득 채워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돈, 명예, 향락 등 마음 속의 거짓된 우상을 과감히 제거하여 버리고, 성령의 총만함과 인도를 받으면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마음이 은총을 받을 준비가 되었을 때 마음의 그릇을 가득 채워주십니다.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돌같은 마음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변화됩니다(에제 36,25~27). 성령 안에서 최고의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자유를 나의 욕심을 위해서가 아니라, 교회와 가정과 나라를 위해서 사용한다면 우리 모두가 잘 살게 되는 축복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복음에 나오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으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만난 후 변화된 세리 마태오의 집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이처럼 동족의 세금을 강탈하여 로마에 바쳤던 세리 마태가 예수님을 만난 후 사도 마태오로 변화된 것처럼, 우리도 과거의 낡은 것을 과감하게 청산하여 새로은 삶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변화와 개혁이 가장 절실하게 요청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개인의 잘못된 삶의 습성, 민족의 잘못된 근성, 공무원과 정치인들의 잘못된 관행, 기업인들의 부정직한 행동, 신자들의 소극적인 신앙자세, 나만 아는 이기심 등... 이 모든 것을 개혁하고 청산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낡은 부대를 버리고 새 부대를 만들어서 거기서 새 포도주를 가득 채우면, 우리는 정말로 하느님 보시기에 아름답고, 경건하고, 깨끗한 사람으로 촉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두올묵상팀] |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