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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해방
출 12: 21-36
내일은 제66주년 광복절이다. 오늘주일 예배를 '광복절 기념주일'로 지키면서, 우리민족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주일이 되기를 바란다. 36년 동안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온갖 억압과 착취와, 고통과 슬픔을 당하던 우리민족이었다.
국토만 빼앗긴 것이 아니라, 언어도 빼앗기고, 성과 이름도 빼앗기고, 우리의 고유한 문화도 모두 빼앗기고, 자유도 빼앗겨서, 일본제국주의의 노예가 된 민족이었다. 그런데 1945년 8월 15일, 해방시켜 주어서, 우리나라와 주권을 되찾는, 광복의 기쁨을 주셨다.
8.15광복은 우리가 힘이 있어서, 무력으로 일본과 전쟁을 해서, 승리로 얻은 해방이 아니다. 세계 제2차 대전에서, UN연합군에게 독일이 패전하고,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므로, 우리는 어부지리로 얻은 해방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얻은 해방이다.
힘이 없어 총칼 한 번, 제대로 들을 수 없던 우리가, 가만히 앉아서 해방되었다. 그러니 전적으로 하나님은 은혜로, 우리 민족이 해방을 얻게 되었다. 우리는 이 뜻깊은 광복절을 맞이하며,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해방시켜 주셨던 놀라운 사건을 통하여, 참된 해방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1. 죄로부터의 해방(21-23)
"모세가 이스라엘 모든 장로를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가서, 너희의 가족대로 어린양을 택하여, 유월절 양으로 잡고, 우슬초 묶음을 가져다가, 그릇에 담은 피에 적셔서,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뿌리고, 아침까지 한 사람도, 자기 집 문 밖에 나가지 말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재앙을 내리려고 지나가실 때에, 문 인방과 좌우 문설주의 피를 보시면, 여호와께서 그 문을 넘으시고, 멸하는 자에게 너희 집에 들어가서, 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실 것임이니라."
하나님은 어린양을 택하라고 했다. 그런데 어린양이 택해서 무엇 하느냐고 하는 자들이, 무신론자, 무종교주의자, 회의론 자들이다. 철저한 인본주의자들이다. 또 자기 멋대로, 나귀, 말, 낙타 등, 다른 짐승을 택한 사람들이 있다. 이들이 바로 타종교인들이다.
어린양을 죽여,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라고 했다. 그래서 이 양이, 이스라엘의 장자를 대신하여 죽었음을 공포한다. 모든 집들마다 공개적으로 드러내었다. 다시 말해, 자신 신앙을 고백하라는 말이다. 자기 집 문 밖으로 나가지 말라는 말은, 예수님과 교회를 떠나지 말라는 말이다.
(29-30) "밤중에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든 처음 난 것, 곧 왕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옥에 갇힌 사람의 장자까지와, 가축의 처음 난 것을 다 치시매, 그 밤에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모든 애굽 사람이 일어나고, 애굽에 큰 부르짖음이 있었으니,
이는 그 나라에 죽임을 당하지 아니한 집이, 하나도 없었음이었더라." 출애굽의 절정은, 여호와께서 애굽의 모든 장자를 죽이는, 열 번째 재앙, 마지막 밤에 이루어졌다. 하나님의 천사들이 내려와서, 불순종하는 모든 애굽인들을 죽이던 그 밤은, 선택받은 백성들에게는, 구원의 날이었다.
장자는 그 집을 대표하기에, 장자의 죽음은, 애굽사람들 모두가 죽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죽음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들의 죽음을 대신하는, 어린양의 피가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애굽인에게 죽음이 찾아왔던 그 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평온했고, 무서운 속박에서 해방된 날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지만, 유독 '피'라는 말은 좋아하지 않는다. 피는 너무 잔인하기에, 윤리나 도덕을 좋아한다. 이는 우리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19세기에 전 유럽에 만연된 사상이었다. 기독교는 피의 종교가 아니라, 도덕의 종교며, 진노의 하나님이 아니라,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했다.
그 당시에는 죄를 하나님께 대한 인격적인 반역이 아니라, 무엇인가 부족하고 모자라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그래서 이런 죄는 회개가 아니라, 교육과 선도에 의하여, 얼마든지 개선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 형무소를 교도소로 바꾸고, 많은 사회 사업 프로그램을 개발하였다.
그러나 19세기, 도덕적 기독교를, 완전히 박살낸 사건이 터졌다. 그것이 바로 1,2차 세계대전이다. 그렇게 교양 있고, 많이 배우고, 도덕적으로 훈련을 받았다는 사람들이, 자신의 이익 앞에서는 마치 피에 굶주린 짐승과도 같았다. 사람의 죄는 도덕적으로, 훈련받았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감춰져 있다가, 자기의 이익이 걸린 문제에서는, 언제 터져 나올지 모른다. 사람은 누구나 거기서 거기다. 똑같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망하고, 어떤 사람은 구원받는가? 바로 어린양의 피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우리 인간들이 어린양을 잡을 테니, 그냥 넘어가 달라고 하지 않았다.
유월절 어린양은, 오직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사이의 언약이다. 즉 성자 아들 되신 예수님의 순종의 죽음을 통하여, 이 아들을 믿는 자는 모두 구원하시기로 언약을 세우셨다. 그 언약의 피만이 우리를 죄로 인한,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할 수 있다.
모세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들은 당장 '바로'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린양의 피는, 바로의 진노에서 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바른 것이 아니다. 바로의 진노보다 더 무서운 것은, 하나님의 진노였다.
(시7:12) "사람이 회개하지 아니하면, 그가 그의 칼을 가심이여, 그의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경고한다. 죄를 대수롭지 않게 취급해서는 안 된다.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이며, 얼마나 불행한 것인지를 알고, 죄를 두려워해야 한다. 죄를 심판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죄를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것이 타락이다. 회개를 너무 쉽게 하니까, 그런 버릇이 생겨났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교회 목사님이, 주일설교에서 죄에 대하여, 아주 강력하게 설교했다.
이튿날 어느 성도가 목사님을 찾아와, 죄에 대하여 강하게 책망하면, 사람들이 교회 나오기 싫어하게 된다. 앞으로는 은혜와 축복에 대하여 설교하시고, 죄에 대한 책망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충고했다. 그러자 목사님은 일어나서, 약장에서 '극약'이라고 쓴 병을 가지고 와서, 이렇게 말했다.
자매님이 저에게 말씀하는 뜻을 잘 알겠다. 자매님의 말씀은, 이 약병에서 '극약'이라고 쓴 딱지를 바꾸라는 말이지요. 제가 이 독약이 든 병에서, '극약'이라고 쓴 딱지를 떼고, '꿀'이라고 써 붙이면 괜찮지요? 자매님 드시겠습니까? 그러면 위험하지 않겠는가?
자매님! 사람들이 듣기 좋은 말만 설교하면, 영혼이 죽이게 된다고 말해주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죄라는 말을 듣기 싫어한다. 아예 어떤 분은 교회에서 죄라는 말을 빼고, 축복에 대해서만 설교하면 좋겠다고 분들도 있다.
이것은 '극약'이라는 딱지를 떼버리고, 거기에다 '꿀'이라고 써 붙이라는 말과 같다. 죄를 해결하지 않고는, 축복은 없다. 죄를 회개하고 용서받을 때, 축복은 비로소 주어진다. 성도는 죄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한다. 죄는 불과 같다. 그의 인생을 태우고 망하게 한다.
죄는 녹과 같다. 그 사람을 아무 쓸모 없는 사람으로, 부패시킨다. 죄는 마취제와 같다. 그 사람의 양심을 무감각하게 만든다. 죄는 독과 같다. 그 사람을 병들어 죽게 만든다. 죄는 검은 구름 같다. 지금은 괜찮아 보여도 곧 비를 쏟는다. 죄는 함정과 같다. 한 번 밟으면 떨어져 붙잡힌다.
죄는 화산과 같다. 지금 폭발하지 않고 있지만,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산이다. 죄는 필름과 같다.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아도, 현상하면 샅샅이 드러난다. 죄는 마약과 같다. 습관이 되면 끊기 어렵다. 죄는 빙산의 일각과 같다. 드러난 부분보다 숨겨진 부분이 훨씬 크다.
죄에 일단 감염되면, 치료약이 없는 천벌에 해당하는 병이다. 그러니 이보다 더 무서운 병이 없다. 모든 병은 육체를 죽이고, 육체를 망가뜨리는 만들지만, 이 병은 육체만 아니라, 영혼까지도 죽이는 절망적인 병이 죄다. 이 죄는 유전성이 심하고, 전염성도 매우 강한 병이다.
사단은 이 병을 뱀을 통하여, 인간의 혈관 속에 전염시켰다. 아담가족에게 보균자가 되게 했다. 이 병원균의 특성은, 하나님을 싫어하게 만든다. 가인처럼 사람을 미워하게 하고, 살인을 하게 만든다. 전쟁을 하게 하고, 약육강식 하게 만드는 병이다.
이 죄의 병에 인류가 감염되어, 모두 죄인들이 되었다. 치료약도 없고, 고칠 수 있는, 의료기술도 없다. 아무리 신약을 개발해도, 죄의 병을 치료할 수 없다. 배아줄기세포를 배양하여, 세포와 조직을 바꿔치기 한대도, 죄의 병은 고칠 수가 없다. 방법도 없고, 길도 없다.
그런데 죄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한 길이 있다. (롬8:1-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바울 사도의 해방선언문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다. 그 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님은 전 인류가 감염되어 죽게된, 죄의 병의 면역항체가 되신다. 죄의 항체를 가지고 있는, 예수님의 피를 받으면, 모든 죄의 균은 소멸된다. 죄에서 해방되어 자유롭게 된다.
영혼과 육에 건강을 얻게된다. 예수님은 온 인류의 죄를 해결해 주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면역항체의 보혈을 흘려주셨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 예수님의 보혈의 피를 마시면, 구원을 얻게 된다. 그것이 믿음이다. 우리는 죄에서 해방 받아야, 진정한 자유인이 된다.
2. '바로'로부터의 해방(31-34)
"밤에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서 이르되, 너희와 이스라엘 자손은 일어나, 내 백성 가운데에서 떠나, 너희의 말대로 가서 여호와를 섬기며, 너희가 말한 대로,
너희 양과 너희 소도 몰아가고, 나를 위하여 축복하라 하며, 애굽 사람들은 말하기를, 우리가 다 죽은 자가 되도다 하고, 그 백성을 재촉하여, 그 땅에서 속히 내보내려 하므로, 그 백성이 발교되지 못한, 반죽 담은 그릇을 옷에 싸서, 어깨에 메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으로 이주한지 430년 만에, 애굽 왕 '바로'로부터 해방되어서, 출애굽 하는 장면이다.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 36년이 아니다. 요셉이 국무총리로 활동한 기간만 빼고, 약400년 동안 애굽사람들의 노예가 되어, 중노동을 하며, 갖은 고생을 다하였다.
모든 자유를 빼앗겨, 노예신분이 되어, 고통 당했다. 심지어는 자식을, 자유롭게 낳을 수도 없었다. 사내아들이 태어나면 죽여야 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했던, 억울함이 어떠했을까? 이렇게 억압을 받는 이스라엘 백성을 보시고, 이들을 불쌍하게 여기신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출3:7-10)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 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하나님은 선민들이, 이 세상에서 고난 당하고, 억압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고, 고통 당하여 부르짖는 소리를 결단코 외면하지 않는 분이라고 말씀하신다. 반드시 그 억압에서 건져내고, 해방시키는 하나님이다. 이처럼 우리민족에게, 일제로부터 해방을 주시고, 광복을 주셨다.
여기서 바로는 애굽의 왕, 파라오를 칭하는 말이다. 영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의 통치자, 마귀의 명칭이 '바로'이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왕과, 그의 나라들을 멸하고, 하나님이 친히 왕으로 다스리며, 사람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며, 모든 불의에서 건져내겠다고 했다.
(34)에 '발교 되지 않았다'는 말은, 누룩이 없다는 말인데, 죄가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고전5:7)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 준비된 어린양이 죽었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를 피할 수 없었던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유월절 양이신 그리스도가 죽으셨다. 그래서 죄 때문에, 마귀에게 눌려 사는 우리를 건져주셨다. 우리는 마귀에게서 해방되었다. 더 이상 속지 말기 바란다. 우리의 대적 마귀는, 눈에 보이는 사람이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악한 천사다. 마귀는 굉장히 강한 천사다. 천사장이었고, 그에게 속한 악령들도, 무수하게 많았다. 하나님은 아담이 범죄 했을 때 (창3:15下)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예언하셨다.
마귀가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처형함으로, 발꿈치를 물렸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사망의 독이 퍼져서, 사흘 동안 사망의 상태에 계셨다. 그러나 마귀는 예수님을, 영원한 멸망에 빠뜨리지 못했다. 왜냐면 예수님의 죽음은, 그의 죄로 인한 죽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의로운 제사였기에, 영원히 죽게 할 수 없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망에서 살아나심으로, 마귀를 영원히 저주하셨다. 마귀의 모든 권리들을 박탈하고, 그에게 영원한 지옥의 심판을 명하셨다. 성경은 여인의 후손 되신 예수님이, 원수의 머리를 깨셨다고 말씀한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해서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셨을 때, 사탄의 거대한 세력은 붕괴되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더 이상 합법적인 활동을, 할 수 없게 됐다. 그래서 우리가 진리를 선포하기만 하면, 마귀의 세력은 도망치게 되어 있다. 이것이 우리의 싸움이다. 우리는 진리를 선포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마귀의 세력은 힘을 잃게 된다. 그러나 진리를 조금이라도 어둡게 만들면, 마귀의 세력은 다시 힘을 얻어서, 온갖 거짓과 술수로, 교회를 지배하고 장악할 것이다. 마귀가 찾아와서, 왕 노릇 하려고 할 때, 예수님이 마귀의 머리통을 깨뜨림을 기억하시고, 손을 떼고 가라고 선포하기 바란다.
여호와 하나님이 친히 다스리시는, 행복에 대하여,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예언하였다. (사11:6-9) "그 때에 이리가 어린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우리가 누리게 될 참 해방은, 여호와가 통치하시는, 그때에 도래할 해방이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면, 무거운 세금을 내지 않아도 되고, 북한의 핵문제로, 6자 회담을 하지 않아도 된다. 미군이 우리나라에 주둔하지 않아도,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 노사분규도, 파업도 없고, 등록금 걱정도 없을 것이다.
병도 없고, 고통도, 눈물도 없다. 또 땅도 집도 없어서, 고통 당하는 그런 일이 없다. 하나님이 이 땅을 다스리시는, 정말 좋은 나라, 우리가 살기 좋은 세상, 정의로운 세상이 올 것이다. 이런 세상은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이 세상을 다스릴 때만 가능하다. 이 일을 위해 기도하시기 바란다.
3. 빈곤으로부터 해방(35-36)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하여, 애굽 사람에게, 은 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매,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하사, 그들이 구하는 대로 주게 하시므로,
그들이 애굽사람의 물품을 취하였더라." 노예였을 때는 물질적으로 빈곤했다. 그러나 해방될 때, 은 금 패물을 애굽 사람들에게 구하자, 그들이 구하는 대로 주어서, 가지고 나왔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야, 빈곤으로부터 해방된다.
빈곤은 이제 지역적인 문제가 아니고, 국제적인 문제다. 제32차 세계경제포럼 연례총회가, 2002년 미국 뉴욕에서 열렸다. 그 회에서 세계 각 국의 정계·재계 지도자 3000여명은, "세계화가 지구상의 빈곤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당시의 UN사무총장 '코피 아난'은, 뉴욕타임스 기고문을 통해 "살기 좋은 세계를 이루기 위해서, 선진국들은 개발도상국에 있는 국가들에게, 다양하고 전폭적인 지원을 해야만 한다."고 했다. 하루에 1달러 미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전 세계에 3억700만이나 되고,
2015년에는 최소 4억2000만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 아프리카 최빈국 주민 1인당 하루생활비는, 평균 0.86달러, 약1000원-정도이고, 아시아 최빈국의 경우, 1일 평균생활비가 1.42달러 약1500원이다. 반면 미국의 경우는, 1일 평균생활비가 41달러 약45.000원이라 한다.
그러니까 빈민국가 국민들이 매일 라면 정도의 음식으로 연명할 때에, 미국사람들은 매일 소고기스테이크를 먹고산다는 계산이 된다. 얼마나 빈부의 차이가 큽니까! '빌 게이츠 부부'가 300억 달러, 약33조 원을 내놓아, 지구촌빈민들을 위한, 세계 최대 규모의 자선재단을 설립하였다.
그렇게 많은 돈을 낸 동기는, 멜린다 여사가, 1993년 아프리카를 여행하는 중에, 흙 길을 맨발로 걸어가는 여성들의 모습을 보고서, 큰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눈을 씻고 둘러봐도, 신발을 신은 여성들을 한 명도 찾을 수가 없었다. 아프리카는 나를 완전히 변화시켰다."고 회고했다.
빈곤문제는 갈수록, 심각한 세계적 문제로 대두될 것이다. 사람들은 세월이 갈수록 현재보다 훨씬 더 풍요로운 세상이 올 것이라 했지만, 성경의 예언은 반대다. 예수님은 세상이 종말에 다가갈수록, 온 세상에 기근이 올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정말 그렇다면, 인류에게 직면한 빈곤문제는,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없는가? 빈곤문제는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자원을 적게 주셨기에, 일어나는 문제가 아니다. 많이 가진 자와, 적게 가진 자의 문제 즉 '빈익빈 부익부' 때문이다.
인류 20%의 사람들이, 80%의 사람들이 누려야 될 것을 소유하였기에, 빈곤이 온다. 빈곤문제는 소유의 문제지, 자원의 문제가 아니다. 나눔의 문제다. 분배의 문제다. 억지로 나눈다면 공산주의다. 자발적으로 나누어야 한다. 나누는 마음이 있으면, 인류는 다 잘 살수 있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어떻게 나눌 수 있는가? (36上)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은혜를 입히게 하사…" 이 말을 직역하면,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의 눈들에, 그 백성에게 은혜를 주셨다. 불쌍히 여기는 눈을 주셨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야만 불쌍하게 보이는 법이다.
우리는 나눔의 일을 실천해야 된다. 이 땅의 900만 명의 기독교인들이,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나눔을 실천하면, 빈곤문제는 끝나게 된다. 동물을 반려동물로 키우는 분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그 돈이면, 어려운 빈민을 건질 수 있다. 이들을 불쌍히 여기는, 은혜가 넘쳐나기 바란다.
결론이다. 내일은 우리민족의 해방절기 광복절이다. (1) 죄로부터의 해방 (2) 불의한 세상권력의 억압으로부터의 해방 (3) 빈곤으로부터의 해방, 이 3가지는 우리 기독교가 반드시 풀어야 될, 해방의 과제다. 주님은 이 3가지 행방을 위해 오늘도 일하신다. 이런 해방이 우리에게 있기를 바란다.
출애굽의 완성
출 12: 29
세계에서 가장 용맹스러운 군대로 정평이 나있는 영국의 특수 부대 중 하나인 거카 사단의 대원들은 모두 네팔 출신인 거카족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세계의 분쟁지역이라고 판단되는 그 순간에 즉각적으로 파견되어 맹위를 떨치기로 이름이 나있습니다. 이들이 제2차 세계대전시 미얀마에 파견되었을 때 한 병사가 행방불명이 된 적이 있었는데 모두 그가 어딘가에서 전사했거나 포로가 되었을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 병사는 행불(行不)된 지 4개월이 지난 어느 날 기적적으로 아군 진지로 돌아왔습니다. 더욱 놀란 것은 그가 아차 하는 순간 전열에서 낙오되어 그 순간부터 4개월 동안 무려 2천 킬로미터 이상 되는 거리를 혼자서 걸어왔다는 사실입니다.
놀라워하는 대원들에게 그는 정글을 헤매며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겼지만 한 순간도 놓치지 않은 것은 이 지도였다고 하면서 주머니에서 구겨진 지도 한 장을 꺼내놓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글의 지리를 그려놓은 정글지도가 아니라 런던시내의 관광지도였습니다. 병사를 구한 것은 살길을 그린 지도가 아니라 희망을 그린 지도였습니다. 희망에는 꿈이 있고 꿈에는 힘이 있습니다.
의미요법이라는 심리학적 요법을 개발한 세계적인 권위자인 빅터 프랭클은 이 꿈과 희망의 힘을 심리학화 한 학자인데 그가 이런 대단한 심리요법을 개발한 데는 사연이 있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그는 독일의 유대인 수용소에서 오랜 동안 수용소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그 곳에서 그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은 포기한 사람보다도 하루라도 더 오래, 강인하게 산다라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밥이라고 말할 수조차도 없으며 짐승들이 먹는 것보다 더 못한 보잘것없는 식사배급이 올 때에도 식사라는 희망 때문에 절망적이던 사람들이 밝아져 가는 모습을 발견하였고 누군가 탈옥이라는 말을 꺼내기만 하면 객관적으로 도무지 가능치 않다는 생각을 하게됨에도 불구하고 그 희망 때문에 사람들의 눈이 반짝거리고 얼굴 표정이 달라지는 것을 보게되었습니다.
이 때 프랭클은 희망이 주는 힘을 확인하게 되었고 아무리 수용소의 상황이 절망적이라고 할지라도 어떠한 경우에도 희망을 잃지 않고 꿈을 갖겠다는 한 가지 큰 결심을 하였습니다. 그의 회고록에서 이 일에 대해서 회고하기를 '나는 꿈을 갖기도 결심했다. 나는 죽지 않기로 작정했다. 어느 날 나는 반드시 여기서 나갈 것이다. 그래서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을 향하여 나의 위대한 희망의 철학을 말하게 될 것이다. 사람이 최악의 환경에 처할지라도 꿈과 희망을 가지면 이렇게 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음을 보여주면서 희망이 절망을 이긴다는 사실을 말할 것이다. 인생의 의미와 꿈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은 분명히 살아날 수 있다는 사실을 온 세계를 다니면서 강연할 것이다' 이렇게 구체적인 꿈을 가지면서 자기 머릿속에 이 나라 저 나라 전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모아놓고 희망을 강연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계속 그리고 또 그렸습니다. 그리고 스스로는 그것을 현실화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 자신의 그 꿈을 믿었습니다. 나중에 그는 '그래서 나는 그 처절한 수용서 속에서도 빙그레 웃을 수 있었다' 하고 추억하였습니다. 빅터 프랭클은 그의 꿈대로 기적적으로 살아남았고 전세계를 다니며 꿈의 철학을 강연하는 위대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에집트에서 430년간이나 노예생활을 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끊임없이 보여주신 것이 반드시 출애굽 할 것이라는 꿈이었습니다. 지금 저들이 고집을 부린다고 할지라도 내가 정녕 여러분들을 내어 보내줄 것이라고 계속해서 말씀하시면서 아홉가지 재앙을 에집트에 쏟아 부으셨습니다. 그러나 이 때에는 반드시 나갈 것이며 언젠가는 저들이 항복할 것이라는 추상적인 꿈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열 번째의 재앙을 주실 때 하나님께서는 이제는 저들이 견디지 못할 것이라고 아주 구체적으로 말씀하시면서 이것을 더 구체화하고 확인해주시는 한 방편으로 이제 이 달을 기념하여 한해의 첫 달로 삼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를 든다면 팔월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월로 정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각 집마다 어린 양 한 마리씩 잡게 하시되 가족 수가 적은 집은 이웃집과 함께 잡아서 그 양의 피를 출입문에다 다 바르라고 명령하셨습니다(2-7절).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계획하신 꿈을 그의 백성들에게 말씀해주셨던 것입니다. 이 달로 너희에게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되게 하고(2절) 너희는 이 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를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에 지킬지니라(14절).. 아직 아무 것도 이루어진 것은 없지만 틀림없이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에 미리 이 날짜를 잡으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혹 여러분들도 기념으로 삼으실 일이 있다면 하나님을 믿으시고 먼저 2000년 1월1일을 출발하는 날짜로 잡아 보십시오. 이것의 뜻은 그토록 기다리던 해방이 이제 분명하게 이루어 질 것이라는 것을 확인해주시기 위해서 이 명령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한가지 더 양의 피로 양을 먹을 집 문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7절) 내가 그 밤에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과 짐승을 무론하고 애굽 나라 가운데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애굽의 모든 신에게 벌을 내리리라 나는 여호와로라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지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12-13절)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출애굽의 영광과 감격을 허락하셨습니다. 밤중에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모든 처음 난 것 곧 위에 앉은 바로의 장자로부터 옥에 갇힌 사람의 장자까지와 생축의 처음 난 것을 다 치시매 그 밤에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모든 애굽 사람이 일어나고 애굽에 큰 호곡이 있었으니 이는 그 나라에 사망치 아니한 집이 하나도 없었음이었더라(29-30절).. 아들이든 딸이든 맏자식은 반드시 치게 되었고, 자식이 없는 집은 짐승이라도 처음 난 것은 다 치셨으므로 집집마다 곡하지 않는 집이 없었습니다.
이에 에집트에 난리가 났습니다. 밤에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서 이르되 너희와 이스라엘 자손은 일어나 내 백성 가운데서 떠나서 너희의 말대로 가서 여호와를 섬기며 너희의 말대로 너희의 양도 소도 몰아가고 나를 위하여 축복하라 하며(31-32).. 너희 말대로 너희 짐승까지 끌고 빨리 나가라고 부탁하게 됩니다. 이어지는 우리가 다 죽은 자가 되도다(33절) 하는 애굽 사람들의 말은 대단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급하게 서둘러서 에집트를 빠져 나오게 되는데 이것이 출애굽이고 영광의 탈출이 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이 라암셋에서 발행하여 숙곳에 이르니 유아 외에 보행하는 장정이 육십만 가량이요(37절) 하는 말씀에서 출애굽이 완전히 이루어졌음을 우리들에게 보여주시고 계십니다. 어떤 성경학자들은 출애굽한 어른들의 수가 250만 내지 450만명이 될 것이라고 추정하는데 이 많은 사람들이 드디어 에집트에서 자유로 출발하게 됩니다.
이제 그동안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약속하신 모든 일들이 이루어졌는데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는 한 마디로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지고야 만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아주 분명하게 보여주시고 계십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 인생이 자신이 결정한대로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여러분의 삶을 돌아보십시오. 여러분의 계획대로 된 일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알아야 할 사항은 하나님께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일정한 기간 동안은 마음대로 행동하도록 내버려두십니다. 정해 놓으신 울타리의 범위 내에서 자유를 주시지만 무한정 허락하시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정해주신 그 시간과 범주가 지나고 나면 하나님께서는 아무 것도 허락하시지 않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고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계획만이 이루어집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나 믿지 않는 믿음 밖의 있는 사람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믿음 안에 있었던 야곱의 경우를 보십시오. 외삼촌 집에 있었던 20년 동안 그는 네 번의 결혼에 적어도 아들과 딸을 열 셋을 낳고 사는 동안 한 번도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한 번도 그를 책망하시지 않으셨고 때때로 문제도 풀어주셨습니다. 그러나 형 에서와의 관계가 끝나는 순간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한계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이 이제는 벧엘로 돌아가야 된다고 결정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용납하시지 않으셨고 그를 기어이 벧엘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믿음 밖에 있었던 북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수르의 산헤립을 예로 들겠습니다. 당시 그의 권세로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없었으므로 남 유다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말을 서슴없이 하였습니다(왕하18:32-35). 이 말을 들으신 하나님께서 앗수르의 산헤립을 향하여 선포하신 대로 산헤립에 속해있던 엄청난 대군 십 팔만 오천명이 밤사이 싸늘한 시체로 변하고 말았으며 고국으로 돌아간 그는 부하에게 암살되고 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왕하19:35-37).
오늘 본문의 바로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아홉 번째까지는 버틸 수 있었지만 이제는 더 이상 아니 된다고 결정하신 순간에 바로가 고집부릴 수 있는 시간도 다 지나가고 말았습니다. 본문에서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우리가 다 죽게 되었으니 빨리 나가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바로가 보내고 싶어서 보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보낼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만드시므로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하고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할 수밖에 없는 바로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든 하나님 밖에 있는 사람이든 간에 하나님의 크신 뜻 가운데 고집부리고 완악했던 사람들이 한결같이 몰랐던 사실은 인생의 일이나 세상의 일 모든 문제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저들이 오만하고 방자하게 고집 세웠던 것이 증명한 중요한 원리는 아무리 해보아야 하나님 여호와의 뜻을 거스르지 못한다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여러분, 모든 사람들이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순종하지 않을 때에 남는 것은 하나님의 징계밖에 없습니다. 야곱에게 돌아온 것을 보면 엉치뼈가 부러지고 집안에 불행한 사건이 일어났으며, 앗수르왕 산헤립은 자신의 군사들이 싸늘한 시체로 돌아왔으며 자신도 부하의 손에 목숨을 잃는 일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의 바로 역시 기어이 자기 아들이 죽었으며 나라의 모든 가정에 통곡소리가 없는 집이 없었습니다. 마태복음 24장 35절에서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고 주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복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제 여기서 우리가 확인할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 야곱의 후손이기만 하면 무조건 구원의 대상이 되었던가? 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구태여 양을 잡아 그 피를 출입문에 바르게 하실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이스라엘 백성이라도 양을 잡아서 그 피를 출입문에 바른 사람만 죽음의 사자가 그 집을 넘어가는 것이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하면 누구든지 죽음의 손에서 벗어날 자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말하지 말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누3:8). 혈통으로, 겉모습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관건은 순종의 열매, 순종의 행위가 있어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구원을 얻을 수 있었다는 말씀을 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아울러 생각해 볼 것은 반대로 이스라엘 자손이 아닌 사람들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은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출애굽기 9장에서 하나님께서 그 종을 통해서 돌멩이 만한 우박을 애굽 전지역에 보낼 것이라고 말씀하실 때 바로의 신하 중 그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은 모두 살아날 수 있었던 사실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출9:20-21). 민수기 11장 4절에서 이것을 증거하고 있는데 출애굽 하여 광야에 사는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섞여 사는 야곱의 자손이 아닌 무리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닌 사람들 중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우박과 장자의 죽음을 피했던 사람들도 그들과 함께 출애굽하여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게 되었다는 말씀을 하시고 계십니다.
베드로는 그의 설교 중에 이 약속은 모든 먼데 있는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주시는 구원의 약속이라고 하였습니다(행2:39). 혈통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 나와서 죄를 회개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에게 구원을 줌은 물론 모든 것을 함께 줄 것이라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든지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께 나오기만 하면, 십자가에 피 흘리고 죽은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께 나오기만 하면 구원을 얻을 것이며 아울러 그 외에 풍성한 모든 것을 다 누리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희망이시고 소망이십니다. 세상의 희망과 소망과 꿈은 때로 심리요법에 그칠 수 있지만 하나님의 그것은 희망자체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가망으로 다시 현실로 이어집니다. 본문에서 이를 증언하는 것이 이스라엘 자손이 라암셋에서 발행하여 숙곳에 이르니 유아 외에 보행하는 장정이 육십만 가량이라 하는 말씀입니다(37절). 그들에게 주시는 것은 구원만 아니라 모세의 말대로 에집트 사람들에게 금은 패물과 의복을 요구하니 하나님께서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구한대로 주게 하셨다고 증언하고 있는데 정말로 꿈만 같았던 일들이 현실로 이루어 졌던 것입니다(35-36절).
여러분, 이것은 이스라엘 사람들만 가지고 있었던 희망이 아닙니다. 여러분들도 얼마든지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의 부르심에 언제든지 '예' 라고 대답할 수 있는 사람에게 얼마든지 이 은혜를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2000년 새해가 밝아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원하시는 바가 많습니다. 부디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구원의 은사와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시고자 하는 모든 풍요함과 풍성함을 다 받아 누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하나님께서 학수 기대하고 계십니다. ♥
10가지 재앙과 출애굽
출 12: 29-36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에게 "나는 여호와로라"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은 반드시 약속대로 이루실 것임을 다시 한 번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모세와 아론은 이런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다시 바로 앞에 섭니다. 그리
고 그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내 백성, 내 군대"라고 선언하도록 하셨습니다.
모세와 아론은 바로 앞에 이 사실을 선언했습니다.
7:8"모세와 아론이 여호와께서 자기들에게 명하신 대로 곧 그대로 행하였더라"
이것은 바로에게 너무나도 큰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바로는 그들을 자신의 노예, 자기 재산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세와 아론이 나타나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군대
로 말을 합니다.
바로는 마음이 더욱 더 강팍해 졌습니다. 누가 감히 내 재산을 빼앗을 수
있겠는가 하는 교만한 생각이 그의 마음을 차지했습니다. 그는 이런 강팍
한 마음 때문에 자기 눈 앞에 보이는 기적들도 믿을 수 없었습니다. 모세
가 지팡이로 뱀을 만들어 보였지만 그는 단지 애굽의 술사들이 하는 행위와
같은 것으로 밖에 평가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렇게 강팍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바로와 애굽 사람
들 위에 하나님의 진노가 부어지게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참으로 무서운 것들이었습니다.
10번의 재난이 임하였는 데 그 종류들은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첫 번째 재앙은 나일강이 피로 변하는 것이었습니다. 애굽인들의 부요
는 바로 이 나일강으로부터 나오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삶의 부요를 보장하여 줌으로 신으로 숭배를 받던 나일강이 피가 되
었습니다. 이것은 나일강이 죽어 버렸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그들은 나일강의 물줄기를 끌어들여 못도 만들고 호수도 만들어 생을 편
리하게 살아왔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사라지는 무서운 저주가 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거두어지기 시작하자 그 땅은 풍요의 땅에서
죽음의 땅으로 변하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두 번재 재앙은 개구리 재앙입니다. 온 나라 안에 개구리 때가 날뛰는
것입니다. 강변에나 있어야 할 개구리들이 온 도성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바로의 궁 안에 까지 개구리로 인한 고통이 있었습니다. 개구리는 무슨 공
격할 무기를 가진 짐승도 아니었지만 바로의 군대로도 이것들을 어찌할 수
는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로 그 자신의 보잘 것 없음을 보개 하셨지만
바로는 자신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여전히 강팍한 마음을 가질 뿐
이었습니다.
세 번재 재앙은 "이"가 득실대어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바로의 마
음이 변하지 않자 하나님은 아무 경고도 없이 이 재앙을 내리셨습니다.
여기서 "이"라고 말해지는 것은 아주 작은 것으로 한 번 파고들면 살갗까지
파고들는 무서운 것이라고 합니다.
얼마전 한 마을에 소위 "노내기"라고 하는 발 많이 달린 곤충들이 많이
생겨서 방송에까지 나온 것을 보았습니다. 온 마을의 담벼락에 덕지덕지 이
벌레들이 붙어 있는 장면은 충격적이었고 너무나도 징그러운 모습이었습니
다.그런데 하물며 사람의 몸에 자신의 살갗을 파먹는 벌레가 들어왔으니 이
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입니까?
이런 것들은 그저 가난한 자들이나 당하는 일이라고 그들은 여겨왔었습
니다. 이런 일들은 노예들의 일이지 주인된 자신들이 당할 일이라고 생각하
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이 무서운 재앙으로 인하여 온 나라 사람들이
마치 걸인과 같이 옷을 벗고 이 벌레를 잡아야 하는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
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을 자기 것인양 차지하고 부를 누리던 자들을
한 순간에 낮추어 버리신 것입니다.
더군다나 모세와 아론의 흉내를 내던 사단의 사자들, 곧 바로의 술사들은
이 재앙 앞에서 완전히 손을 들어 버립니다. 하나님은 지극히 작은 것으로
도 모든 것을 꼼짝하지 못하게 하시는 전능자 이심을 분명하게 드러내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의 강팍함을 버리지 않습니다.
네 번째 재앙은 파리재앙이었습니다. 수 많은 파리떼의 공격을 받은 애
굽은 그야말로 사람 살 곳이 아니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수 많은 파
리 떼가 온 나라 안을 가득히 채운 모습들을 말입니다.
다섯 번째로는 가축에게 전염병이 돌게 하시는 재앙이었습니다. 가축들
은 애굽인들의 귀중한 재산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 위에 전염병
이 돎으로 모두 죽고 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들에 있는 것만 칠 것이
니 그 모든 것들을 피하게 하라고 미리 경고해 주셨지만 바로와 그 백성은
이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토록 당하면서도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
치 않았던 것입니다.
여섯 번째로는 직접 애굽 사람들과 가축의 몸을 독종으로 치시는 재앙을
내리십니다. 이 재앙은 세 번째 것과 마찬가지로 경고가 없이 행하여진 재앙
입니다. 그리고 이 재앙부터는 지금까지의 것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훨씬 더
고통스러운 재앙들이 됩니다. 깨닫지 못하는 자들을 하나님은 점차로 더 무
서운 재앙으로 심판하기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애굽의 술사들도 이 재앙에서 예외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온 백성이 얼
굴과 온 몸에 종기가 나서 고통을 당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이것은
너무나 고통스런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깨닫지 못
했습니다.
일곱 번째로 주께서는 애굽 온 지역을 우박으로 치십니다. 밭에 남아
있는 채소와 곡식들을 치시는 것입니다.
여덟 번째로는 메뚜기 떼를 보내셔서 최소한의 남은 것 조차 다 먹어 치
우게 하심으로 재난을 더욱 더 심화시키십니다. 애굽인들은 이제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행하신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지식이 그들을 변화시키지는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더
욱 더 마음을 강팍하게 할 뿐이었습니다.
아홉번째로 하나님께서는 흑암을 보내 온 애굽 땅을 어둡게 하셨습니다.
빛이 없는 깜깜한 세상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하
심으로 모든 빛의 근원이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누리는 최소한의 은혜라도 다 감사의 조건이 되지 않을 수 없
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재앙에도 불구하고 바로는 문제가 해결되는 즉시로 다시 마음을 강
팍하게 할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도리어 이제 모세와 아론이 다시금 자기
앞에 나타난다면 그들을 죽이겠노라고 협박하기까지 할 뿐이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마침내 장자가 죽임을 당하는 마지막 심판이 임하게 됩니다.
사람의 장자뿐 아니라 짐승의 첫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죽임을 당하는
대 재난이 애굽 온 땅에 임하게 됩니다. 결국 바로는 이 재앙 앞에서야 비
로소 이스라엘 온 백성을 놓아주게 되는 것입니다.
이 10가지 재앙이 우리를 깨우쳐 주시는 중요한 진리들이 있습니다.
1.하나님만이 유일한 참 신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애굽인들은 수 많은 신들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애굽의 신들을 살펴 보
면 이렇습니다.
하피/나일강의 신 이시스/나일강의 여신
헤겟/개구리 머리를 한 출산의 여신 셑/광야의 신
레/태양신 우아치트/곤충의 신(파리가 대표)
하솔/소머리를 한 여신 아피스/풍요의 신(숫소의 신)
셋크메트/질병을 이기는 여신 이시스/치료의 신
눗/하늘의 여신 오시리스/풍요와 곡식의 신
세스/곡식의 보호자 민/재생의 신
10가지 재앙들은 자세히 살펴 보면 바로 애굽인들이 섬기던 이 신들 위
에 내린 것들이었음을 봅니다. 애굽인들은 자신들이 섬기는 이 신들이 자신
들을 보호하여 주고 지켜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것들을 결코 그들을 지
켜 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10가지 재앙을 통해 그들의 신앙이 얼
마나 허구에 불과한 것인가를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마지막 날 주께서는 다시 한 번 오직 하나님만이 참 신이심을 온 땅에
드러내게 되실 것입니다.
2.하나님만이 우주 만물의 주인이시며 통치자가 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작은 이로부터 사람과 태양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마음
대로 주장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가 미치지 않는 곳이 없
음을 선언하신 사건입니다.
모세와 아론 그리고 온 이스라엘은 바로와 애굽 사람들이 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 사실을 더욱 더 확신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3.하나님의 심판의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까지나 참으시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하나님의 것을 자기
것 처럼 소유하고 있던 바로에게 마침내 하나님의 심판에 내렸습니다. 자
신들의 노예가 아니었던 이스라엘을 노예로 삼고 탄압하던 바로에게 마침내
무서운 심판의 채찍이 내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하나님은 바로에게 모세를 통하여 계속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음을 강팍하게 하고 듣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로 그는 자신 뿐 아니라 자기 온 백성을 불행에 빠지게 하는 지도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와 모든 애굽 사람과 짐승의 첫 새끼가 다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앞에서 마음을 강팍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 앞에서
늘 겸손하십시오. 주님의 뜻을 따르십시오. 거기에 구원의 길이 있고 생
명의 길이 있는 것입니다.
4.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구별하여 보호하신다는 것입니다.
10가지 재앙에서 처음의 피재앙과 개구리 재앙 이 재앙은 애굽사람들과
함께 이스라엘 백성도 고통을 당했던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그러나 특별히
파리 재앙에서 부터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별하시는 것을 봅니다.
8:23"내가 내 백성과 네 백성 사이에 구별을 두리니...."
이스라엘 백성도 애굽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 그들 역시도 애굽
사람들의 고통을 같이 당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의 당하는
고난을 무한정 그대로 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을 구별하여 주신 것입
니다. 아마도 이스라엘은 이런 고통의 시간들을 통해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
셔서 자신들을 특별하게 다루고 계신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날도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의 모든 고통을 무한정 버려 둔체 보고만
계실 분이 아니십니다. 똑 같은 고난을 겪는 것 같이 보이지만 마침내 하나
님께서 나타나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문제로부터 우리를 건져 주
실 것입니다.
재앙이 임하자 바로는 타협을 하자고 모세에게 요청을 합니다. 그의 타
협안은 매우 교묘한 것이었습니다.
1.그는 애굽 땅에서 제사를 드리라고 합니다.
바로는 이스라엘이 제사를 드리는 것은 좋다고 동의를 하는 데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거기에 단서를 붙입니다. 그것은 애굽 땅에서 제
사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예수는 믿되 세상에서 분리되려고 하지는 말라"는 제안과
같은 것입니다. 주일은 지켜라 하지만 생활을 바꿀 필요는 없다는 식인 것
입니다.
하지만 예수를 믿을 때 우리는 생활이 변화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애굽 땅을 떠나는 아품 없이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2.광야로 나가되 너무 멀리는 가지 말라고 합니다.
이것은 예수는 믿되 너무 깊이 빠지지 말라는 말과 같은 제안입니다. 이
세상의 세력들은 우리에게 하나님께 예배는 드리되 빨리 다시 이 벽돌을 찍
는 노예생활로 돌아오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이럴 때 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떠나지 않고는 참
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같이 옛 질서로부터 완전히 떠나는 결단이 있어야 참 믿음의
자리에 설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3.남자들만 가라고 합니다.(10:11)
여기서는 특별히 자녀들을 데리고 가지 말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
것은 "너는 예수를 믿어도 좋다 그러나 너의 자녀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길
이 있는 데 강요할 것이 무엇이냐? 너나 잘 믿어라"하는 말과 같은 것입니
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다음 세대에 대한 관심을 상실한다고 생각해 보
십시오, 이것은 교회의 미래를 잃어 버리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이 세상
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이렇게 도전해 오고 있습니다.
4.양과 소는 머물러 두고 가라고 합니다.(10:24)
이것은 그래 이제 예수를 믿어라! 온 가족이 믿어도 좋다! "그러나 헌신
은 하지 말아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물질적인 것은 전혀 동원되지 않고
정신적인 평안만을 누리고자 하는 것이 진정한 믿음 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 예수님 다음으로 돈이 좋아요!"라는 재목의 책을 본 적이 있습니다.
솔직해서 좋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돈은 얼마나 소중한 가치를
지니는지 모릅니다. 그러기에 이 물질로 인한 시험들이 그토록 많을 수 밖
에 없는 것입니다.
물질이 있는 그곳에 마음도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물질
을 어디에 드리는가가 우리 마음의 표현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선교를 위하여 물질을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구제와 선한 일을 위하여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바로의 타협안을 과감히 거절해야 합니다. 그럴 때 참된 신앙인의
모습을 드러내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밤
출 12: 29-42. 마태복음 27: 4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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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예수께서 생애의 마지막 한 주간을 보내시게 되는 예루살렘성에 들어가신 날입니다. 무리들이 종 려나무를 들고 환영하였기에 종려주일이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의 마지막 고난이 시작되는 날이라 고난주 일이라고도 합니다. 교회는 이 주간을 고난주간으로 지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죽음은 구약성서의 유월절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기간에 유월절 행사를 지킵니다. 유월절은 오랜 노예 생활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와 해방을 기념하는 절기 인데, 우리에게도 참 자유와 해방이 비로소 시작되는 역사적인 주간이기도 합니다.
이 유월절은 밤에 벌어지는 일입니다. 오늘날의 밤은 오히려 환한 경우가 많지만 밤은 캄캄함을 말합니다. 흔히 감당하기 어려운 순간을 만날 때,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을 때, 기대했던 것들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것을 경험할 때 우리는 '앞이 캄캄하다'라는 표현을 씁니다. 가까운 사람의 돌연한 사망 소식을 들을 때도 그런 표현을 합니다. 물론 이 캄캄함은 개인 뿐 아니라 역사에도 그런 경험을 합니다. 성경에도 암흑 또는 밤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출애굽 당시 애굽 왕 바로는, 노예였던 이스라엘 백성을 쉽게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허락하지 않다가 재앙 을 당하고, 허락하였다가 다시 번복하는 과정을 되풀이합니다. 아홉 번째의 재앙은 삼일 동안 애굽전역을 어 둡게 하십니다. 그래도 허락하지 않으니까 하나님은 마지막 열 번 째는 애굽의 처음 난 것들 곧 장자들이 죽이십니다. 이것도 밤에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그 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양을 잡아서 그 피를 좌우 설주와 상인방에 발랐고, 그것을 본 죽음 의 사자는 그 밤에 그곳을 그냥 통과한 것입니다. 바로 이 날이 유월절입니다. 그 밤에 심판의 사자가 그냥 지나갔다는 말씀입니다. 애굽에 온지 430년을 끝내는 밤이었습니다.
이 마지막 밤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날 밤에 주께서 그들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내시려고 밤을 세우면서 지켜주셨으므로, 그 밤은 '주의 밤'이 되었고, 이스라엘 자손이 대대로 밤새워 지켜야 하는 밤 이 되었다."(42절)
이스라엘은 유월절의 이 마지막 밤을 '주님의 밤'이라는 이름으로 지킵니다. 그래서 유월절은 그들의 달력 의 시작이 됩니다. "너희는 이 달을 한 해의 첫째 달로 삼아서, 한 해를 시작하는 달로 하여라(출 12:1)"고 하신 것입니다. 이 주님의 밤은 믿는 자들이 체험해야 할 중요한 밤인 것입니다.
1. 심판의 밤
"한밤중에 주께서 이집트 땅에 있는 처음 난 것들을 모두 치셨다."(29절) "바로와 그의 신하와 백성이 그 날 한밤중에 모두 깨어 일어났다. 이집트에 큰 통곡소리가 났는데, 초상을 당하지 않은 집이 한 집도 없 었다."(30절)고 출애굽기는 증언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밤은 심판의 밤이었습니다. 아홉 번째의 재앙은 흑암이었습니다. 이미 암흑으로 심판을 예고했음에 도 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암흑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선포합니다. 아모스 선지자는 이렇게 말합니 다. "나 주 하나님이 하는 말이다. 그 날에는 내가 대낮에 해가 지게하고, 한 낮에 땅을 캄캄하게 하겠다. 내 가 모든 사람에게 굵은 베옷을 입히고, 머리를 밀어서 대머리가 되게 하겠다. 그래서 모두들 외아들을 잃은 것처럼 통곡하게 하고, 그 마지막이 비통한 날이 되게 하겠다."(암 7:9-10) 외아들을 잃은 것처럼 통곡하는 밤은 바로 애굽의 장자를 치셨던 그 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세상 마지막에도 그렇게 될 것을 요한계시록도 증언합니다. "나는 큰 지진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해는 검은 머리털로 짠 천과 같이 검게 되고... "(계 6:12) 결국 캄캄함이 임한다고 표현하고 있습니 다. 이렇게 흑암은 하나님의 심판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아무도 일할 수 없는 밤이 곧 온다"(요 9:5)고 하시면서 밤이 오기 전에 일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누구에게나 피할 수 없는 심판의 날이 올 것입니다. 캄캄한 암흑의 밤이 올 것입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캄 캄한 순간에 하나님의 심판을 기억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 심판의 밤을 어떻게 예비하고 있습니까?
2. 구원의 밤
주님의 밤은 애굽 사람들에게는 심판의 밤이었지만 이스라엘에게는 잊을 수 없는 구원의 밤이었습니다. 흑암 가운데 저들은 장자가 죽는 심판을 받았지만, 이스라엘은 흑암 중에서 오히려 보호를 받았습니다. 어두 움은 세상이 받을 심판을 말하지만, 또한 이 심판의 한 가운데서 새로운 궁극적인 구원의 역사가 열리는 것 이기도 합니다.
밤도 하나님의 일하시는 시간입니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분은 졸지도 않으시고, 주무시지도 않으신다" (시 121:4)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일하시는 시간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특히 우리의 사고를 뛰어 넘어 밤에도 역사하고 계신다고 증언합니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앞서 가시며 길을 인도하시 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앞길을 비춰주셨다."(출 13:21)는 말씀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시간은 정오였습니다. 아주 밝은 시간이었습니다.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먹구 름도 몰려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서는 증언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시간은 정오였는데, "낮 열두 시부터 어둠이 온 땅을 덮어서,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되었다."(마 27:45)
낮인데도 캄캄한 밤이 된 것입니다. 이 어둠은 세상의 심판을 알리는 표시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새로운 자유와 해방이 벌어지는 것임을 표현한 것입니다. 심판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궁극적인 구 원의 역사가 열리고 있음을 나타내는 표적이었습니다. 이 어둠은 바로 유월절의 그 '주님의 밤'을 생각하게 합니다. 심판과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는 그 밤을 말합니다. 유월절의 그 밤 죽음의 사자는 애굽의 처음 난 것에 심판을 행하지만, 양의 피를 바른 이스라엘은 구원을 얻습니다.
구원의 은총은 누군가의 희생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하여 가족 당 한 마리의 양을 요구하 셨습니다. 그 피가 그 대가였습니다. 오늘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서는 어떤 희생이 요구되었습니까? 요한은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 1:29)이라 했고, 바울은 "유월절의 어린 양"(고전 5:7)이라고 불렀습니다. 캄캄한 밤 유월절의 양의 피는 이스라엘을 구원시켰습니다. 이 어둠의 새로운 유월 절의 구원의 역사가 십자가 위에서 벌어지고 있음을 복음서는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심판이면서 구원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어리 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는 사람인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고전 1:18) 예수님은 이 유월절의 어 린 양이십니다. 주님의 밤은 새 출발입니다. 이 밤이 지나면 저들은 가나안을 향한 그 먼 첫 걸음이 시작이 됩니다. 그래서 이 날을 새해 첫 날로 지키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새 출발입니다. 십자가의 어둠이 그것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 놀라운 새 출발을 함께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3. 기다림의 밤
바로는 가능한 한 그들을 보내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노동력이 없어지는데 쉽게 보내려 하겠 습니까? 벌써 열 번이나 마음을 바꾸지 아니하였습니까? 또 마음이 바뀔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 성들은 바로가 마음을 바꿀까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 두려움 속에서 새 날을 기다렸습니다. 그래 서 그 마지막 밤을 잠들지 않고 새웠습니다. 지금까지 유대인들은 유월절 밤을 깨어서 지냅니다. 기다리는 자는 잠들 수 없는 것입니다. 잡히시던 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주님은 잠든 제자들을 향하여 "깨어 있어라"고 하셨습니다.
새로운 날은 그냥 맞이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다림으로 맞이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준비시키셨습니다. 이 밤이 지나면 이 애굽을 나갈 것이다. 새로운 역사가 너희들에게 펼쳐지게 될 것이다. 그러니 이 밤을 깨 어서 기다려라. 주님의 밤은 자포자기하는 밤이 아닙니다. 새로운 역사가 동터옴을 믿고 기다립니다.
우리 민족도 그믐날은 자지 않았습니다. 자면 눈썹이 하얗게 센다고 했습니다. 새날은 기다리는 것입니다. 잘 것 다 자고 할 것 다하고 맞이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을 간단하게 설명하였습니다. "우리는 소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눈 에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바라겠습니까? 우리가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면 참으 면서 기다려야 합니다."(롬 8:24-25)
그렇습니다. 밤은 새로운 시작이 열리는 신호입니다. 밤이란 캄캄하게 우리를 짓누르는 환경 앞에서, 주님 의 은총을 기다리는 시간입니다. 기다림이야말로 밤을 보내는 귀중한 신앙 자세임에 틀림없습니다.
보혈의 능력
(출 12:29-42)
오늘은 주님이 나귀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을 기념하는 종려주일입니다. 이번 주는 주님의 고난을 기념하는 고난주간입니다. 오늘 설교는 주님의 보혈의 능력에 대해서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양계장을 하는 장로님의 간증입니다. 그분이 섬기는 교회의 목사님은 언제부터인가 보혈의 능력을 강조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목사님은 보혈을 바르고, 뿌리고, 덮고, 마신다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그런 표현에 대해서 장로님은 거부감을 가진 듯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장로님도 보혈의 능력에 대해서 이해하게 되고 실제로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분은 닭장 속에 들어갈 때마다 “예수님 피! 예수님 피! 예수 보혈! 예수 보혈!”라고 외치며 보혈이 뿌려지는 상상을 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짧은 기간에, 적은 사료로, 병아리를 적게 죽이고, 좋은 상품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전국에서 2등의 판정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간증문을 읽으면서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생각났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강퍅한 바로 왕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내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애굽을 심판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켜 주시기 위해서 애굽에 10가지 재앙을 내렸습니다. 결국 바로왕은 하나님 앞에 무릎을 끓었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10가지 재앙 가운데 마지막 재앙인 10번째 재앙은 장자의 죽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애굽 전역의 장자를 치시기 전에 모세를 통해서 살길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와 문인방에 바르면 죽음의 천사가 그 피를 보고 피가 발라진 집을 넘어갈 것이라는 약속이었습니다. 모세를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와 문인방에 바른 집의 장자들은 죽음의 천사들로부터 보호를 받았습니다. 반대로 주님의 메시지를 믿지 않고 어린양의 피를 바르지 않은 집에는 바로의 집으로부터 모든 백성들의 집까지 죽음의 천사들이 들어가서 장자를 죽였습니다.
유월절 사건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문설주와 문인방에 바른 양의 피는 세례요한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이라고 가르쳐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보혈의 능력을 믿는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와 문인방에 발랐던 것처럼 자신에게 적용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보배로운 피는 대속의 핍니다. 벧전 1:18, 19을 보면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대속(atonement)"은 "누구 대신 피 흘려 죽어주셨다"는 뜻으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가 심판 받을 대신 심판 받으시고, 우리가 죽어야할 대신 죽어 주시고, 우리가 갚지 못할 죄의 빚을 대신 갚아 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막 10:45에 보면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대속물"이란 랜슴(ransom)인데 “몸값"이란 뜻입니다. 아이가 유괴되었을 때 몸값을 치루고 찾아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그의 피로 우리 몸값을 지불하시려고 대신 죽어 주셨습니다. 이사야 53장 5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예수님은 우리 대신 고난을 받으시고 우리 대신 피 흘려 죽으신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피를 흘리셨는데 그렇다면 주님의 보혈의 능력이 우리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무엇입니까? 주님의 보혈의 능력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1. 죄 사함의 능력이 있습니다.
엡 1:7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라고 했으며, 요일 1:7에서는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고 말씀합니다.
「응답 받은 기도」라는 책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인간은 누구나 한번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됩니다. 그 심판대 앞에서 하나님은 판사이시고 모세는 원고가 됩니다. 요 5:45에 보면 너희를 고소할 자는 모세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은 피고입니다. 의인은 한 사람도 없고 모두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고소장은 율법입니다. 율법에는 613가지가 있어서 조목조목 우리의 지었던 죄들이 나열하면서 고소당할 것입니다. 마귀는 검사입니다. 계12:10에 보면 마귀는 우리의 죄상을 낱낱이 따지면서 참소 합니다. 그 결과 판결은 저주와 지옥뿐입니다. 이 재판에서 승리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꼼짝없이 형벌을 받아 지옥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인생들입니다. 자, 그런데 보십시오. 이 때 예수님이 변호사로 나타나시는 것입니다. 피 묻은 옷을 입으시고 나타나서 말씀하시기를 “만군의 여호와여, 나는 아무개 피고를 위해서 변호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공의로우신 심판은 타당합니다. 율법 앞에 머리를 들 수 없는 죄를 진 그 사람은 영원한 지옥 불에 들어가도록 선고하신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얻을 자가 없으므로 내가 아무개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죽었다가 살아났습니다. 십자가의 피를 믿고 회개하면 무죄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 날 후로는 저희 죄와 불법을 기억치 않으신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므로 저 사람은 율법으로는 머리를 들 수 없는 죄인이지만, 십자가의 피의 구속을 믿으면 살 수 있습니다. 그것을 믿는지 안 믿는지 재심판결을 원합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재판관이신 하나님은 “재심하노라."고 선포하신 후, “아무개야, 너는 예수의 피를 확실히 믿는가?"라고 물으십니다. 그가 “예, 믿습니다."라고 대답하니 하나님께서 “이제 아무개에게 무죄를 선포하노라"라고 말씀하시는 순간에 그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이 지은 죄를 솔직하게고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면 고백된 모든 죄를 가져다가 가장 깊은 바다 가운데 던지십니다(미 7:19). 그리고는 거기에 ‘낚시금지’라고 써 놓으셨습니다. 여러분 깊은 바다에 던져진 죄를 낚시질 하지 마십시오. 마귀는 자꾸만 용서 받은 죄를 생각나게 합니다. 의심하게 만들고 자유 함을 잃게 만듭니다.
죄 사함의 확신을 가진 사람만이 참된 행복자입니다. 죄 사함의 확신이 없다면 자신의 죄로 양심은 더러워지고 늘 괴로운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후안 카를로스 목사님은 목사가 된 후에도 자신의 불완전성으로 인하여 범한 죄 때문에 괴로워하다가 심한 편두통으로 고통을 당했습니다. 어느 날은 편두통이 심해서 강단에서 설교를 하다가 기절해서 병원으로 실려 가기도 했습니다. 유명한 의사도, 좋은 약도,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성경을 읽다가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라는 말씀에 은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소리가 들리는 듯 했습니다. "너는 도대체 누구냐? 너 때문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 때문에 네가 네 자신을 알고 있는 것보다 더 자세히 너를 알고 있는 내가 너를 용서했다. 그런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너는 누구냐? 나보다 더 거룩한 자냐?" 자신의 불완전성 때문에 자신에 대하여 늘 불만족스럽게 생각하였던 목사님은 자신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자신의 행위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목사님은 더 이상 자신의 행위를 보지 않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대신 하나님께서 보시는 예수님의 피를 바라보았습니다. 목사님은 놀라운 평안과 신비스러운 행복감을 맛보았습니다. 3주일 후, 목사님의 편두통은 싹 사라졌습니다. 예수님의 피는 죄 사함의 능력이 있습니다.
2. 성결의 능력이 있습니다.
히 9:14에 보면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고 말씀합니다. 주님의 보혈을 의지하는 사람들은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죄악으로 더러워지는 것을 원하지 않지만 마치 늪 속에 빠져 들어가듯이 죄악 속에서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입니다. 자기의 능력으로 빠져나오려고 노력하지만 계속해서 죄악 가운데 머물러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입니다. 죄악을 이기고 승리하는 비결은 어린양의 피의 능력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 피의 능력을 깊이 깨닫고 그 피의 능력으로 죄악을 대적할 때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되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동양의 성자로 불리던 일본의 초지유태랑은 젊은 시절 방탕한 생활에 빠져 있었습니다. 어느 날 밤, 술에 만취된 채 집으로 귀가하다가 길 옆 작은 집에서 붉은 전등 빛이 새어나오는 것을 발견하고 창가로 가서 방안을 훔쳐보았습니다. 마침 젊은 여인이 하얀 속살이 다 비치는 엷은 잠옷을 입고 잠들어 있었습니다. 그는 순간적인 욕정을 참지 못하고 창문을 열고 들어가 여인을 강간했습니다. 그리고 그 죄를 감추기 위해 여인을 목 졸라 죽이고 그 죄를 감추기 위해서 그 집을 불태워 버렸습니다. 그러나 죄는 감추어지는 법이 아닙니다. 얼마 후 체포된 그는 강간, 살인, 방화의 극악한 죄로 사형언도를 받고 복역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감옥 안에서도 포악한 죄수로 소문이 났습니다. 그러던 그가 어머니가 보내준 성경을 읽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부딪혔습니다. 그는 뜨겁게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되었고 나중에는 얼마나 변화를 받았는지 특사로 사면 받고 출옥했으며 후에는 그의 삶이 완전히 변화되고 성결한 삶을 살다가 성자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보혈은 우리를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는 성결의 능력이 있습니다.
3. 헌신의 능력이 있습니다.
히 9:14에 보면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죄 사함만 받는 것만 아니라 새 생명, 새 능력까지 부여받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피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피가 모자라 창백하게 죽어가던 사람이 수혈을 하면 얼굴이 불그스레해지면서 살아납니다. 그리고 힘이 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내 속에 가득 차니 새 생명을 얻게 되고 새 생명 가운데서 살 수 있는 새 힘이 넘치게 됩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제대로 깨닫고 그 능력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는 헌신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변화되기 전에는 주님을 믿는 자들을 핍박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으뜸이 되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십자가의 비밀을 깨달았습니다. 복음의 능력을 바로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는 십자가만을 자랑한다고 했습니다. 전에는 핍박자였던 그가 주님을 위하여 헌신하는 일군이 되었습니다. 그가 깊은 헌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십자가의 비밀, 보혈의 능력에 대해서 깊은 깨달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독일의 진젠돌프 백작은 어느 날 박물관을 구경하다가 화가 스타인 백이 그린 십자가상에서 피 흘리시는 예수님의 그림을 보고 크게 감동을 받고 이제까지의 형식적인 신앙생활, 굳어진 신앙생활을 크게 회개했습니다. 그 때에 큰 능력이 임하면서 철저히 헌신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점점 큰 능력 있는 성도가 되었고, 나중에는 선교사를 100명이나 파송할 정도가 되었던 것입니다. 진젠돌프의 헌신은 보혈의 능력을 깨달으면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일에 헌신할 때 어떤 보상심리를 가지고 합니다. 그런데 저와 여러분은 십자가의 은혜, 보혈의 은혜를 깨달읍시다. 그리고 그 은혜에 감사해서 헌신합시다.
4. 승리의 능력이 있습니다.
계 12:11에 보면 “또 우리 형제들이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이 증언하는 말씀으로써 그를 이겼으니...”라고 말씀하시는데 여기서 그는 사단 마귀를 말하는 것입니다.
마귀에게 이기는 것은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영적 전쟁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마귀는 할 수만 있으면 택한 자 까지도 타락시키고 멸망하게 만들려고 합니다. 마귀는 우리의 영혼을 파괴하고 정신을 황폐하게 만들고 육체를 병들게 하고 생활을 무질서하게 만들고 경제적으로 궁핍하게 만들고 인간관계를 깨뜨리고 우리가 추구하는 일들을 가로막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마귀와의 영적 싸움에 승리하므로 우리의 영, 혼, 몸과 생활과 관계와 사역과 하는 일에 승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베니 힌(Benny Hinn) 목사님이 필리핀에서 큰 집회를 인도하고 있는데 귀신들린 한 젊은이가 단상으로 뛰어올라와 난동을 부리더랍니다. 사람들이 제지하려해도 말을 듣지 않더랍니다. 그래서 힌 목사님이 기도하기를 “주님, 저와 제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예수님의 보혈로 덮어 주옵소서."라고 기도하고 그 청년을 향해 “예수님의 보혈로 너를 대적한다.", “예수님의 보혈로 너를 대적한다."하고 명령했더니 그 사람이 겁에 질린 얼굴로 “그 말 하지마!", “그 말 하지마!"하더랍니다. 힌 목사님은 “예수님의 보혈로 너를 대적한다."라고 더욱 힘 있게 외쳤더니 또 비명 소리를 지르며 “그 말 하지마!"하며 난폭하게 행동하다가 결국 귀신은 떠나고 자유함을 얻었다고 합니다.
귀신들은 베니 힌의 사역에서처럼 사람이 감지하게도 역사하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우리의 오감으로 인식 할 수 없도록 은밀히 역사하며 믿는 자들을 괴롭힙니다. 우리가 인식을 하든 못하든 악한 영의 역사를 허용한다면 우리의 신앙과 생활과 관계에 어려움이 발생할 것입니다. 보혈의 능력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그 능력을 의지하여 사십시오. 자신과 가정과 교회를 어린양의 피로 덮으십시오. 보혈은 승리의 능력이 있습니다.
5. 천국입성의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아무리 대단한 삶을 살았어도 보혈의 능력을 믿지 못한다면 그 사람은 천국에 들어 갈 수 없습니다.
히 10:19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여기서 성소는 하나님 앞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성소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나주셨기 때문입니다.
계 22:14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 즉 행실을 깨끗하게 하는 자가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두루마기를 빨 수 있습니까? 무엇으로 빠는 것입니까? 계 7:14에 보면 “어린양의 피에 옷을 씻어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어린양의 피가 그 피를 믿는 사람들을 깨끗하게 하고, 어린양의 피로 깨끗함을 받은 사람들이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천국에 들어가는 기준을 행위에 두는 경향이 많습니다. 착한 일들을 많이 해야만 간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며 행위로 의롭다함을 받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19세기의 유명한 전도자 무디가 한번은 탄광촌을 방문했습니다. 탄광의 책임자에게 전도하면서 구원에 대해서 설명을 했습니다. 특히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구원의 도를 말하자 책임자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니 도무지 믿겨지지 않습니다. 구원이 너무나 값이 싸군요.” 그래서 무디가 책임자에게 물었습니다. “당신 오늘 갱에 들어갔었나요?”, “네” “얼마나 깊이 내려갔습니까?” “수백 피트 되지요.” “어떻게 내려갔습니까?” “그야 간단하지요. 단추만 누르면 승강기가 내려가고 다시 누르면 올라옵니다.” “그것밖에 하신 일이 없습니까?” “물론이지요. 석탄 회사가 이미 돈을 많이 들여서 설치해 놓았으니 저는 그저 승강기를 타고 버튼만 누르면 되지요.”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를 위해 그 아들을 십자가상에서 대신 죽게 하셨으니 우리는 그저 공로만 믿기만 하면 되는 것이지요. 이미 십자가의 승강기를 설치하여 놓으셨으니 주님의 보혈의 공로를 믿는 믿음의 단추만 누르시면 됩니다.”라고 하자, 그 때야 책임자가 고개를 끄덕이더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이 나를 대신한 희생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능력, 보혈의 능력을 확신하는 사람은 영원한 천국에 믿음만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보혈의 능력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죄사함의 능력이 있습니다.
2. 성결의 능력이 있습니다.
3. 헌신의 능력이 있습니다.
4. 승리의 능력이 있습니다.
5. 천국입성의 능력이 있습니다.
출처: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