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아빠!
지쳐 잊혀진 이름!
유옹 송창재
“어허, 웬 눈이 이렇게 많이 왔어?”
“미끄러워서 어떻게내려가셔요?”
“새끼 있어?”
“연탄재도 있고, 새끼도 있긴 해요.”
“그럼, 새끼 묶고 나가지...”
이른 새벽, 아니 아직 밤이라고 해도 좋을 듯한 시간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누시는 대화이다.
그 때는 그렇게도 눈이 많이 왔었다.
요즘은 겨울이라지만 눈도 많이 오지를 않고 춥지도 않다.
어렸을 적에는 겨울에 눈도 엄청나게 많이 오고 춥기도 하여
지금 아이들은 보지도 못했을 나무가지 만한 처마 끝 고드름을 따서 칼싸움 놀이를 할 정도였다.
지금처럼 난방이 완벽하지 못하였기 때문이겠지만 밥상에 올려놓은 그릇들이 미끄럼을 타고..
부엌에서 세수를 하고 들어오며 잡은 문고리가 손에 쩍 쩍 들러붙기도 하는 겨울이었다.
이러한 한겨울 컴컴한 새벽에 출근하시기 위하여 일어나신 아버지와 배웅하시기 위해서 일어나신 어머니의 대화이다.
우리 집은 언덕배기 꼭대기의 쓰러져가는 초가집이었다.
세상 물정도 모르시고 책상물림이셨던 아버지는
자신도 많은 고생을 하셨을 뿐만 아니라 자식들도 어지간히 고생을 시키셨다.
가진 것 없는 집안에서 장남으로 태어나셔서 말썽들만 피우고 다니는 작은 아버지들때문에 자식들 건사하기가 더 어려우 셨을 것이다.
그러하신 분이 선창가에서 국밥집을 하셨던 이모할머니가 돈을모아 마련해주신 어선으로 모르시는 어업을 하신다고...
그래도 운이 따라 한때는 배를 두 척으로 키우셨다.
그래서 잠깐 동안은 경제적 어려움을 걱정 안하고 살 수도 있었지만 그 동생들 덕에 파산을 선고하고 배를 처분하여 빚잔치를 하셨다.
그리고 나서 그 자식들은 이집 저집에 나뉘어 얹혀 살면서 밥을 얻어먹는 처지가 되었다.
누나는 외가에, 나는 이모할머니 댁에...
이렇게 남의 셋집을 전전하며 살다 겨우 마련한 집이 언덕배기 여기였다.
그것도 한창 공부를 하여야 할 형이 학교대신 공장을 다니면서 마련한...
그래도 이곳에서는 식구들이 모두 모여 살수 있게 되었다.
물론 모두 모여서, 모두 먹고 살 수 있었다는 말은 아니다.
겨우 방 2개의 폐가보다 조금 나은 곳에서.
돈 버는데는 재주가 없이 사시다 어찌저찌 겨우 마련하신 직장이 예전에 어업을 하실때 안면이 있으신 분들이 모여 만든 어업중매인조합이었다.
완전한 책상물림이셨지만 한약에 대한 조예도 깊으시고, 특히 복식부기에 대하여 지식이 있으셔서 그 조합의 경리가 되셨던 것이다.
그런데 어업은 그 특성상 조업을 나간 배들이 생선을 가지고 입항하면 지금처럼 냉동시설이 있던 때가 아니라 그것들을 바로 경매에 붙여서 처리를 하여야 했다.
따라서 어선들이 들어오는 물때가 일정하지 않아 거의 새벽에 출근을 하여야 하셨다.
그래서 겨울은 큰 고역이셨다.
또 그때의 겨울은 춥고, 눈도 많고, 길어서...
한 밤중 같은 새벽에 언덕배기집에서 한길로 내려가는 곤욕을 치루고 계시는 것이다.
출근하시는 아버지와 배웅하시는 어머니가
미끄러워 내려가기가 어려워서 언덕에서 연탄재를 깔아가며, 신발에는 새끼줄을 동동 동여매고...
난, 이런 아버지가 싫었다.
그 당시에는 많은 가정들이 경제적으로 많이 곤궁하던 때인지라 하루에 겨우 한 끼만 먹어도 평균일 때였지만...
그 평균에도 못 미치는 경제력에..
그래도 양반이시고 선비이셨다고, 쓰러져가는 오두막에 혹시 손님이라도 오시면 그 더운 한여름에도 구멍 뚫려 기운 양말일망정 양말을 신고 옷을 입고 손님을 맞으시던 모습이 얼마나 위선적이고 형식적이었던지...
왜 그냥 있는 데로 하면 되지 저럴까? 난 이런 것이 정말 싫었다.
어린 마음에 밖에서 놀다가 늦게라도 들어오면 불호령이고, 아이들과 구슬치기하여 몽땅 따 가지고 들어오면 그것도 노름이라고 전부 변소에 쳐 넣어버리고..
나는 그것이 나의 용돈벌이였는데, 헌 구슬을 싸게 팔면 사탕 값이라도 생겼으니까..
아버지는 그런 것조차도 가까이하지 못하게 하시는...
그렇다고 딸각발이도 아니셨던 얼치기 양반이셨다.
난 그것이 너무나 싫었다.
무능하고 위선이라고 거칠게 반발하였다.
그렇게 마음속에 아버지를 미워하며 자라다
아버지와 크게 부딪히기 시작한 것이 중학교 입시원서를 쓸 때였다.
그 당시에는 중학교도 입학시험을 보고 들어갔던 때인지라.
각 지역에서 소위 제일이라는 명망있는 학교에 얼마나 합격하느냐에 따라 선생님들의 실력을 가늠하고, 학교의 명예를 말하던 때여서 중학교 입학시즌이 되면 지망학교의 원서작성부터 치열한 싸움이었다.
선생님들은 더 좋은 학교에 확실한 아이들을 합격시키기 위해 성적에 맞추어서 입학원서를 써 주셨기 때문이다.
성적이 미흡하다고 생각하면 희망하는 학교에 원서조차 낼 수가 없었던 시대였다.
나는 다행히 그런 걱정을 부모들께 끼치지는 않을 정도의 상당히 우수한 성적이었다.
그런데 마침 우리 집에서 가까운 곳에 어떤 중학교가 새로 건물을 지어 이사를 오게 되었다.
그런데.. 그 학교는 하필이면 이른바 3류 학교였다.
그것이 갈등의 원인이었다.
나는 일류학교에 가고 싶은데, 아버지는 새로 지은 가까운 학교에 특대생으로 입학을 하면 모든 학비가 면제되니 그리 가라하시고...
어머니가 그 학교 원서를 사가지고 학교에 갔더니 우리 담임선생님은 그 원서를 찢어 버리셨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조금 있으면 사춘기에 접어 들텐데,
그 때에 어떻게 감당 하실려고 이런 학교에 보내 실려고 하느냐고., 이 애의 성적이 너무 아깝지 않느냐고, 절대로 이 학교원서는 써 줄 수 없다고... 그래서 소위 일류학교에 가기로 결정을 하였다.
그런데... 아버지의 반대가 극심하셔서 어머니와 매일 다투시게 되었다.
원서 마감은 가까워지고..
결국은 어머니가 업고라도 다니시겠다는 선언이 있었고...
담임선생님이 집에까지 오셔서 아버지와 담판을 하신 후에 지망학교를 결정하게 되었다.
그때부터는 아버지를 극도로 더 싫어하게 되었다.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얼치기 양반.
자식들도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며 가장으로, 아버지로의 권위만 내세우는 얼치기 양반~` 그렇게 다투기 시작하고..
다행히 지망학교에 아주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하게 되었지만, 거리가 멀어 업고 다니시겠다던 어머니의 선언이 버거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학교 수위실에서 수위아저씨와 함께 기거를 하기 시작하였다.
밥은 수위아저씨 댁에서 먹고... 즉 학교 수위실에서 하숙을 하였던 것이다.
아마 이런 경우는 내가 처음이고 마지막이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집에 한 번씩 오면 아버지는, 항상 “좋은 학교에 우수하게 들어갔으니, 서울법대에 들어가서 판, 검사가 되어라. 그래서 집안을 일으켜라...” 그것은 격려라기보다는 명령이셨다.
이렇게 일 년 가까이를 학교수위실에서 기거하게 되었고, 그래서 한 캠퍼스에 있는 고등학교 선생님들도 많이 알게 되었다.
하지만 수위아저씨와 사이가 좋지 않은 어떤 선생님의 의견으로...
수위실에 학생을 둘 수 없다하여 결국은 집으로 철수하였고...
그 때부터 어머니의 업고 다니겠다던 고행이 시작되셨다. 이런 분이 나의 아버지셨다.
그렇게 고된 학창시절을 어머니와 함께하게 된 나는, 결국에 또 하나의 인생 갈림길이 내 생각이 아닌 다른 사람의 생각으로 결정되게 되었다.
나의 진로는 당연히 법대에 가는 것으로 결정을 하고
다른 아이들은 문과, 이과 결정에 고민할때 나는 아무런 갈등이 없었다.
서울 법대는 언감생심이었지만 당연히 문과 지망이었다.
그리고 나는 확실한 문과였다. 국어, 사회, 국사, 세계사등의 과목은 출중하여서…
완전한 문과였고 그래서 당연히 법대였다.
문과 학급배정을 받고 교과서까지 수령한 2`3일후 쯤..
갑자기 이과로 전과가 되었다. 그것도 나도 모르게...
알고 보니 아버지가 조합의 어느 분의 이야기를 들으시고
약대를 나오면 제약회사에서 약국을 차려준다고 ...
그래서 어머니에게, 지금으로 보면 수백만원짜리 조기를 머리에 이어서 담임의 집에....
그리고는 반을 바꿔버리신 것이다.
그렇게도 하기 싫은 수학을 물리를,.
그래서 고2의 학생이 방황하며 거리를 헤매다가 야간통행금지에 걸려 파출소에 들어가는 경우까지~~
어느 날 나는 내 인생은 내가 책임 질것이니까 간섭하지 말라고 크게 대들었고, 건너 방에 가신 아버지는 울고 계셨다.
난 내 잘못이 아닌, 내가 감내하여야할 아무런 이유도 없이, 내가 잘못을 빌어야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니까...
그렇게 약대를 면접에서만 계속 2년을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 후부터는 아버지는 내게 아무런 간섭도 못하였고
나는 완전히 망나니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나는 할수있는 거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5
그 후 지방 농대에 응시했다가 실습에 지장이 있다는 이유로 단과대 수석을 하고도 또 떨어지고
결국 친구들 졸업을 하던 무렵에 지방의 법대를 간 나는 많은 것을 찾으려 하지 않았고 많은 것을 버리기로 하였다.
목숨까지도..
제도와 빈부와 힘이라는 물리력에 맥없이 떼밀려 정의가 아닌 불평등에 의한 부정에 대항하는 자생적 심리적 사회주의자가 되어서 정의와 공정을 사는 목적의 길잡이로 선택하며 살았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렇게 졸업을 하고 지방 귀금속 공단의 연마보조공인 공돌이가 되었고, 그것도 위장취업이라고 쫓기고 길거리에서 빵장사를 하던 어느 날.
아버지는 병원에 입원을 하여 다리를 잘랐다. 골수암..
나는 가게를 정리하고 병원에서 아버지 간호를 하고 있었다.
그런 어느 날 내게 “미안하다. 내가 너를 못 믿어서 그랬던 것이 아니고, 너무 힘이 드는 길이라.. 그래도 조금이나마 너를 쉽게 살 수 있게 하기 위해서 그랬다. 결과는 이렇지만..”
내게 처음으로 아버지가 사과를 하셨다.
말씀을 자주 잇지를 못하시고 힘들어 하시며....
난 그때 알았다.
이분이 나의 아버지셨구나.
당신의 가슴에 이런 이야기를 담고 계셨었구나.
그러면서
이 분도 몰라서 세상을 모르셔서…
자기의 삶의 장이 이 넓이밖에 되지를 못해서,.. 그러셨구나!
최선이셨구나!
난 요즘도 눈이 오는 날이면, 마당에 나가 서 보기도 한다.
시장에 들를 때면, 산속에 계시던 아버지를 납골당으로 잘 모셨다 생각하며 엄마, 아버지께 자주 들러 오기도 한다.
아버지였다.
나는
그런 애비는 되기싫고 그렇다고
더 나은 애비는 될 자신이 없어서
아버지가 되기를 포기했었다.
아버지를 더 쓰고 싶은데...
이것 밖에는 내가 기억하고 가진 것이 없다.
그래서 나는 그분을 존경하고, 사랑한다.
사랑하는 방법을 모르시는 단순한 애비를....
그래도 성적표를 조작하며
제 새끼들을 편하게 살게하려고 남의 새끼 누군가를 잡아 끌어내리는 지극한 사랑의 권력과 힘을 가지시지 못하셨던 가난한 그분을
이제 존경과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볼수 있다.
그 곁에 우두커니 서있는 나도 볼줄 안다.
이제 거짓의 정의와 평등도 볼 줄 알게 되었고!
참정의와 참사랑도 조금은 알았고!
父生母育之恩을 나서 배웠다.
첫댓글 감사 합니다^^*
감사합니다
그 어려움 시절에
그때 아버지의 모습을
잠시 떠올려봤습니다. 감사합니다.
고생들 하셨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