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을 깨달을 자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마11:25,26)
어떤 사람이
복음을 깨달을 수 있는가에 대한
예수의 말씀이다
세상에는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에
해당하는 부류와
어린 아이에 해당하는
부류가 있다
우리는 어떻게든
많은 사람이 믿고
구원을 받았으면 하는 마음이
앞서기에
누가 복음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에 그리 관심하지 않는다
그리고 예수를 믿고자 하면
누구나 믿는 자로 규정하기 때문에
굳이 본문에 대입한다면
어린 아이에 해당하다고
판단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복음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이다
만일 지혜로운 자나
어린 아이 같은 자나
아무나 믿을 수 있을 것이면
굳이 예수께서
어린 아이에게 복음을 나타내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말씀하실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일반적인 사람들의 생각은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일수록
더 잘 믿고
어린 아이같이 단순할수록
믿음이 더딜 것이라고 여길 것이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도
지혜롭고 슬기로우며
말 잘하고 자기 주장을 잘 펼치며
모든 것을 잘해내려는 사람이
믿음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거기에 심성마저 좋으면
신실한 사람으로 인정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런 뛰어난 자들이
목회자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매우 다르다
지혜롭고 슬기로운 사람과
어린 아이에 속한 사람은
전혀 다른 두 부류이다
전자는 육신의 기질과 능력을
앞세운 자요
후자는 스스로 살기를 거부하고
오직 은혜와 긍휼을
의존하는 자다
복음은 후자에게만 열리게 되어있다
후자에 해당하는 자세와 태도로
접근할 때에만 열리는 것이
복음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복음이 무엇임을 알리는 방식이다
다시 말해,
복음은 자기 지혜를 앞세워
성경을 연구하거나
자기 열심으로 기도하며
말씀의 의미를 깨달으려 하거나
자기 판단에 의존하여
말씀대로 행하려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열리지 않게 되어 있다
단언컨데
성경연구를 앞세워
참된 믿음에 접근하려는 것은
복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사용하는 방식이다
만일 그것으로 복음을 알 수 있으면
더 깊고 순수하며 참된 믿음에
이를 수 있다고 여긴다면
복음이 무엇임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것은 기껏해야
스스로 복음의 영광에 이르려는
사람의 시도 외에는 아무 것도 아니다
물론 사람의 시도에는
약간의 유익은 있다
스스로 경건하며 참된 마음을 품고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복음을 위해 헌신하려는 삶을
살 수 있다
그러나 그럴경우,
복음의 삶과는 매우 거리가 멀다
자기 영광을 위한 삶에
불과함을 알아야 할 것이다
사람이 자기 지혜와 슬기로
복음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위해 산다면
그것은 더 이상 복음이 될 수 없다
머리 좋고 기질이 우수하며
좋은 능력을 자원으로 타고난 사람이
믿음의 삶에 있어서도
앞서갈 수 있다면
그것은 매우 불공평한 일이다
감사하게도 복음이란
사람의 능력과 같은 타고난
자원과는 무관하다
오히려 가진 좋은 자원을
내려놓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의존해야만
하는 것이 복음이다
그러니 가진 소유나 능력이나
좋은 기질이나 훌륭한 성향이 없어도
접근할 수 있으니
복음인 셈이다
만일 본문을 이해한다면
자기 지혜와 슬기를 의존하며
살았던 사람은
삶의 방향과 방식이 매우 달라질 것이다
그것은 거의 개벽에 가까울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본성적 삶의 기반이
무너지고 새로운 삶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가히 개벽과 같다
삶이 송두리째 바뀌는 것이다
만일 복음을 받아들인 후
부도덕했던 삶이 변화되었거나
새로운 삶의 목표를 발견하고
그에 헌신하고자 했다면
그것은 개벽에 해당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복음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만일 누군가가 예수를 믿고서
보다 나은 삶을 원하거나
죄없이 거룩한 삶을 힘쓰며
오직 천국에 이를 마음으로
교회에 헌신하는 삶을 산다면
그것은 개벽과 상관없는
자기 영광을 위한 삶에 불과하다
곧, 여전한 육신의 삶이며
자기 지혜와 슬기에 의존하는 삶에
해당하는 것이다
나는 그런 사람에게
말해주고 싶다
당신은 믿음을 가진 적이
없었노라고...
그렇다고 해서
지혜나 슬기가 부족하고
마음이 순수하고
착한 사람을 가리켜
어린 아이 같은 사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어린 아이에 해당하는 자는
육신에서 나는 것을 내려놓고
전적으로 그리스도를
의존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어린 아이가 전적으로
그 부모를 의존하듯이 말이다
그로써 타락한 아담의 생명에서
나는 삶을 내려놓고
오직 그리스도를 따를 수 있는 것이다
지금도 어떤 이들은
자신이 믿음을 위해
뭔가를 해야 할 것으로 아는 자가 있다
그런 삶의 태도는
여전히 자기 지혜와 슬기로써
살겠다는 육신의 의도에서 비롯된다
그러면 아무 것도 행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인가?
물론 그같은 의문도
육신에서 비롯된 것이어서
어린 아이 상태에 이르지 않았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어린 아이 상태가 되려면
육신으로 행하는 모든 일이
부질없음을 깨달아야 한다
그래야만 어린 아이같은 심성을 가지고
전적으로 그리스도만을 의존하는
믿음이 가져지는 것이다
타고난 육신의 사람이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에게서 난 지혜와 슬기,
좋은 기질과 자원을 모두 내려놓아야 할
정도이면
삶에서 어떤 일을 경험하고 당해야
하겠는가 생각해 보라
복음이란, 바로 그 말세에서
들려지는 것이다
곧 자기 세상의
끝에서 희망을 붙드는 것이다
그 때에만 복음이 진지하게 들리고
복음이 요구하는 것에
응할 수 있으며
자기 목숨이라도 내려놓을 자세나
태도를 갖게 되는 것이다
복음을 그런 자에게만
나타내신다 하니
감사하지 않는가?
자기를 과시하길 원하고
삶의 야망이 있으며
자기를 자랑하려는 사람에게는
철저히 감춰지는 것이 복음이라니,
감사하지 않는가?
자기 지혜와 열심과 능력을 믿고
주를 의지하여
품은 계획을 성취하려는
육신의 사람들에게는
복음이 감춰진다는 사실이
감사하지 않는가?
일평생 복음을 위해 헌신하며
잘 믿어왔다고 자부하는 사람이
오히려 복음을 모르는 사람으로
드러나는 것이 감사하지 않는가?
그보다
육신에 속한 자기 내면의
치부와 무능력과 죄성과
부패한 본성이 다 드러나 버려서
더 이상 감출 것도 없이
모든 수치를
다 당할 수 밖에 없었던 사람이
더 이상 나아갈 데가 없어
어린 아이와 같은 심정으로
그리스도를 붙들고
긍휼을 구할 때
복음이 알려지는 것이
어찌 감사치 아니한가?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처럼
모든 것이 넉넉하여
부족함이 없이 하나님을 섬기고
살았던 부자의 드러난 빈약함과
아무런 소유가 없어
비참해 보이는 삶을 살았던
나사로가 아브람의 품속에
있었던 것을 지나쳐서는 안될 것이다
자기 소유를 지키려 말라
자기 지혜와 슬기와 능력과 힘과
재물과 그 외의 자원을 의지하여
살려하는 삶의 자세를 내려놓으라
그렇지 않으면
복음은 들리지 않을 것이다
복음의 핵심을 파악한다 하더라도
머리 속에서만 맴돌 것이다
어린 아이가 되어라
당신보고 되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어린 아이로 만들어갈 때
거부하지 받아들이라는 의미이다
그로써 복음을 알아가는
길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 자기를 드리고
전적으로 그의 손 아래서 행하라
비록 더딘 것 같아도
복음을 깨닫게 되면
육신으로 행했던 삶의 껍질을 벗고
개벽과 함께
영원한 삶을 향해 갈 수 있으리라
23.10.05
#십자가복음 #인조에선교회
#김윤창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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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06 0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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