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시리도록 푸른 5월의 숲길
평창, <방황하는 칼날> 촬영지
'국민의 숲'은 모든 국민이 산림휴양을 즐길 수 있도록 개방한 국유림이다. 영화 <방황하는 칼날>은 횡계3리 국민의 숲길 등 평창에서 주로 촬영했다. 딸을 잃은 아비의 한 서린 겨울 장면이었다. 그 사이 계절은 바뀌었고 어느덧 봄날의 막바지다. 생기 넘치는 5월의 숲은 아랑곳없이 푸르다.
봄날의 푸름이 반짝이는 국민의 숲길[왼쪽/오른쪽]국민의 숲을 포함한 국민의 숲길은 바우길의 한 구간이다 / 5월의 햇볕을 머금은 방아다리약수 초록 풍경
대관령, 설원의 추격
평창군 대관령면에서 내린다. 자연스레 상현(정재영 분)의 시선이 떠오른다. 그는 막연한 단초만으로 겨울의 도시에 첫걸음을 디뎠던가. 대관령은 울릉도 나리분지와 더불어 우리나라 최대의 적설량을 기록하는 지역이다. 1년에 절반은 눈을 볼 수 있다. 지난 4월에도 때아닌 눈발이 날렸다. 대관령에서는 흔한 봄날의 풍경이다. 영화 <방황하는 칼날>은 일본의 추리소설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동명 원작을 영화화한 것이다. 주인공은 청소년들의 폭행으로 딸을 잃은 아버지 상현이다. 그는 형사 억관(이성민 분)에게 비통한 심정으로 묻는다.
"그렇게 멍하게 앉아 있는 게 최선의 방법이에요?"
결국 그는 우발적으로 살인범을 죽인 후 나머지 범인을 추적해나간다. 피해자에서 졸지에 가해자가 된 상혁을 쫓아야만 하는 형사 억관의 시선 또한 영화를 들여다보는 또 하나의 줄기다. 그 주된 배경이 눈 덮인 도시다. 대관령은 겨울 풍경을 담기에 더없이 좋은 촬영지다. 그 설원 위에서 상현은 범인을 쫓고, 억관은 또 다른 범인이 된 상현을 쫓는다. 대관령과 오대산 일대를 비롯해 평창의 곳곳을 넘나들었다. 문화마을과 방아다리약수, 오대천과 국민의 숲 등이다.
그 첫걸음은 횡계리 문화마을이다. 극중에서 상현이 조두식을 쫓아 무작정 찾아간 첫 번째 펜션이 있던 마을이다. 그리고 상현은 곧 차항리 펜션 일대로 옮겨간다. 현실의 마을은 영화의 흐름과는 무관하다. 평창 일대에서 마주하는 교외 전원주택의 풍모다. 닮은 듯 다른 건물들이 산뜻한 표정으로 각자 자리를 잡았다. 또 산기슭에 자리해 한적하고 조용하다. <방황하는 칼날>에는 여러 펜션이 등장한다. 원활한 촬영을 위해서 다채로운 형태의 펜션이 밀집해 있는 평창이 제격이었다. 원주민들은 무에 볼 게 있냐지만 외지에서 온 여행객들에게는 제법 인기 있는 펜션 타운이다.
[왼쪽/오른쪽]방아다리약수로 가는 입구의 표지석 / 탄산, 철분으로 인해 톡 쏘면서 텁텁한 맛이 나는 방아다리약수
방아다리약수 전나무 숲길
다만 극중 상현이 학원에서 나와 문자를 받고 찾아간 에메랄드펜션은 펜션이 아니라 방아다리약수터다. 숙종 때 발견된 약수터로 유서가 깊다. 화전민의 아낙이 바위 위에서 곡식을 찧다 바위가 갈라지며 발견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약수터 모양도 디딜방아를 닮았다 해 방아다리약수다. 탄산, 철분 등이 함유된 물로 톡 쏘는 맛이 특징이다. 대중교통은 대관령면보다 진부면에서 가깝다. 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15분쯤 이동한다. 오대천을 따라가다 방아다리약수와 오대산 월정사 방면으로 길이 갈린다. 억관이 상현을 추격하다 강을 건너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던 장면이 오대천 일원이었다. 쫓을 수도, 외면할 수도 없는 억관의 심정이 물길 위에 어렸다.
오대천에서 어느 쪽으로 향하든 전나무 숲이 반긴다. 월정사 전나무 숲이 더 유명하지만 방아다리약수의 전나무 산책로도 뒤지지 않는다. 전나무길 구간은 짧으나 산세가 깊어 추천할 만하다. 입구에서 약수터까지 200m 남짓한 구간인데, 적당한 경사에 좌우로 방향을 틀어 율동감을 더하는 길이다. 그 끝자락에 약수터와 산장들이 모였다. 공간들 사이로는 좁은 오솔길이 순환하는데 한적한 걸음을 내기에 적합하다. 하지만 <방황하는 칼날>에서는 가장 격렬했던 추격 장소다. 두식을 쫓는 상현과 상현을 쫓는 억관이 한자리에 모여 극의 긴장감을 한껏 끌어올렸다. 상현의 분노와 그를 바라보는 억관의 측은지심이 전나무와 전나무 사이에서도 교차했던가. 찬 공기와 눈 내린 숲길 역시 그 쓸쓸함을 더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5월의 방아다리약수는 지난겨울 영화의 풍경을 다독인다. 효험으로 이름난 약수뿐만 아니라 푸른 전나무, 숲에 스미는 따스한 햇살이 상처 난 마음들을 쓰다듬는다.
[왼쪽]방아다리약수로 들어가는 전나무 숲길. 짧은 구간이지만 월정사 전나무 숲길에 견줄 만하다.[가운데]방아다리약수 주변 산장[오른쪽]<방황하는 칼날>에서 펜션 일원으로 등장한 방아다리약수터
자작나무 자작대는 국민의 숲길
문화마을과 방아다리약수를 나와서는 대관령휴게소로 걸음을 옮긴다. 바우길 1구간과 국민의 숲길 출발점이다. 국민의 숲길은 국민의 숲을 포함한 걷기 좋은 길로 바우길의 하나다. 대관령하행휴게소(신재생에너지전시관) 주차장에서 왼쪽 맞은편의 유아숲체험원 야생화길로 진입한다. 국민의 숲길을 가리키는 표지판은 따로 없다. 유아숲체험원은 언덕을 돌아 반대편 출구로 내려오는데 그 중간 즈음에서 길을 벗어나 능경동 쪽 오르막이다. 그 샛길로 접어들어 얼마 지나지 않자 국민의 숲길을 알리는 표지판이 나온다. 거기서부터는 임도를 따라 20분 가량 내려간다. 다소 심심한 구간이다. 하지만 자칫 길을 잃기도 싶다. 임도가 도로와 나란해지면 도로 건너편으로 표지판이 나타나는지 눈여겨봐야 한다. 길이 도로를 건너 다음 '길건너숲'으로 이어지는 까닭이다.
길건너숲은 왼쪽으로 자작나무들이 무리 지어 있다. 상현의 추격 장면을 찍은 현장이다. 국민의 숲길이 아니라 도로를 따라 거닐면 한층 무성한 자작나무 숲이 따른다. 자작나무 하얀 수피는 겨울에 더 두드러진다. 5월의 녹음 아래는 초록 잎들이 유난을 떤다. 다리를 절룩거리며 눈밭을 헤집던 상현의 추격이 떠오른다. "자식 잃은 부모에게 남은 인생이란 없습니다"라는 말이 영화를 보는 내내 관객들의 마음을 아리게 했다. 모두가 딸을 잃은 아비의 마음이었다. 자작나무는 불에 탈 때 자작자작 소리가 나 자작나무라 했던가. 딸을 잃은 아비의 걸음도, 눈가의 슬픔도 자작자작하는 마른 울음을 닮았다.
[왼쪽]대관령휴게소 옆에 거대한 장승처럼 서 있는 풍력발전기[가운데]대관령휴게소 상행과 하행 구간을 잇는 우회도로 위에서 바라본 풍경[오른쪽]국민의 숲길을 따라서는 들꽃들이 5월을 반긴다.
짧은 자작나무 숲을 지나 모퉁이를 돌자 본격적인 국민의 숲이다. 종비나무 조림지와 스트로브잣나무 조림지가 시작된다. 햇볕을 가릴 만큼 크고 푸른빛을 뽐낸다. 그 곁으로 난 길은 숲이 간직한 매혹을 숨기지 않는다. 독일가문비나무와 전나무 등도 무리를 이루며 3.95km의 길을 열고 닫는다. 겨울의 흔적을 말끔히 씻어낸 5월의 숲은 푸르러 눈부시다. 그 푸른 숲길에선 조금 더 헤매도 좋겠다.
바우길 국민의 숲길을 걸을 요량이라면 남경식당 방면으로 내려온다. 막국수와 꿩만두가 일품인 맛집이다. 허기를 달랜 후에는 잎갈나무 숲길과 재궁골로 오른다. 바우길 1, 2구간의 분기점이다. 내친김에 선자령까지 먼 걸음을 내도 무방하다. 반면, 국민의 숲길은 대관령양떼목장을 끼고 대관령상행휴게소로 향한다. 목장에는 봄맞이 나온 양떼들의 서성임이 눈에 띈다. 하염없이, 시름없이 풀을 뜯는다. 그 너머로 산세가 울렁댄다. 남은 길은 좁고 고우며 다정하다. 계곡을 지나다 기도하듯 손으로 물을 모아 목을 축인다. 숲의 초록이 어린다. 숲은 짙고 깊어 여린 사람의 마음을 다독인다. 눈물겹도록 시리고 푸른 5월의 숲길이다.
[왼쪽/오른쪽]<방황하는 칼날>의 추격전을 촬영한 자작나무 숲 / 국민의 숲길에는 간간이 숨을 돌려 쉬어가기 좋은 벤치가 있다.[왼쪽/오른쪽]대관령상행휴게소 쪽으로 내려오는 길. 작은 계곡들이 정겹다. / 국민의 숲길 끄트머리에 이르면 대관령양떼목장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글, 사진 : 박상준(여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