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대한민국 육군의 총 8개 사단과 1개 특수연대(17연대) 중 4개 사단과 1개 연대가 전방을 지키고 있었고 수도방위에 1개 사단이, 3개 사단이 후방(대전, 광주, 대구)을 각각 담당하고 있었다. 6월 10일 파격적인 군 인사이동을 단행하여 지휘관을 교체하였고, 6월 13일~23일 간에 대대적인 전후방 부대교대를 실시하면서 정비명목으로 공용화기를 후방으로 집결시키는 파격적인 조치를 취했다. 적에게 안방을 고스란히 내어주는 과감한 조치들이 이루어진 셈이다.
이를 두고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당시 대전에 주둔하고 있던 국군 제2사단의 사단장이었으며, 휴전직후인 1956년에 육군 참모총장을 역임하였던 이형근 장군은 그의 자서전 『軍番 1번의 외길 人生』에서 6.25당시 "육군 지휘부에 통적(通敵)분자가 있었다."고 주장하며, "6.25 초기의 10대 불가사의(不可思議)"를 제기했다. 그는 당시 전방지휘관들이 북의 남침징후에 대한 보고서를 수없이 올렸으나 묵살되고 아무런 조치가 없었다는 점에서 그렇게 본다.
이와 다른 의견은 당시 국군통수권자인 이승만 대통령에게 아부하기를 좋아했던 당시 신 모 국방장관과 채 모 육군참모총창의 무능과 허풍이 빗어낸 우연한 비극이었으며 그 모든 책임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있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여전히 진실은 침묵중이다. 단지 역사적 교훈을 얻는다면 ‘자명고’(自鳴鼓)에 얽힌 고구려의 호동왕자와 낙랑국의 공주 최씨녀(崔氏女) 간의 비극적인 사랑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 안보 현실을 다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자명고라는 북이 나오지 않고, 자명(自鳴)이라는 단어만 나온다. 즉 “고각이 스스로 울린다고 기록되어 있다.(先是樂浪有鼓角若有敵兵則自鳴)”
고각(鼓角)은 반드시 북과 나팔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군사적인 조기 경보장치를 말한다고 보아야 한다. 낙랑에서는 정보기관의 특정 사람이 북과 나팔을 치고 분 것 같다. 이를 운영하는 인원과 장비를 관장하는 시스템이 공주에 의해 무력화 된 것이다.
66년 전 6월 이 땅에는 북한의 ‘호동왕자’를 위하여 대한민국의 ‘자명고각’(自鳴鼓角)을 무력화시킨 남쪽의 ‘낙랑공주’가 있었을 것이다. 1950년 3월 30일부터 4월 25일까지 모스크바를 방문한 기간 중에 김일성은 3차례에 걸친 스탈린과의 면담을 통하여 한국전쟁에 관한 최종적인 협의를 했다. 이 자리에서 김일성은 무력통일의 자신감을 보여주며 "남한의 군내부에 많은 동조자들이 활동하고 있다."고 자랑스럽게 말한 점을 유념해야 한다.
1997년 5월 26일자 북한 노동신문 2면에 '민족의 령수를 받들어 용감하게 싸운 통일혁명렬사'란 제하의 기사에서 6.25 직전에 대남공작원 ‘성시백‘에 의한 군 정치공작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때는 아무도 몰랐었다. 역사는 되풀이 된다는 점을 잊지 않는 오늘이기를 바란다.
첫댓글 북로당 소속 대남 공작원 '성시백'은 당시 애국지사 '정향명'이었다. 김일성과 직접 통하는 그는 오늘날 우파 재벌로 행세하면서 국회, 정부, 사법부, 외교가, 군부내에 자기 세력을 키워 관리하면서 군 와해공작(제주 4.3, 여순반란의 배후인물), 국회 프락치사건의 배후인물이다. 1997. 5. 26 북한 노동신문 2면에 상보 소개됨. 우리의 종북들은 이를 조작이라고 부인.
평양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있는 성시백의 묘 생몰년을 보면,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기 전날인 6월 27일 사망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젊은 시절 성시백의 얼굴이다. 사진이 아니라 북한작가의 그림이다. 왼쪽에 임정요인 조완구의 묘도 보인다. 북한은 망자의 활동에 따라 묘비명을 달리 적었는데, 성시백에게는 ‘동지’, 조완구에게는 ‘선생’이란 호칭을 새겨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