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120
5월9일 [부활 제4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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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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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xpJXLmLTGKk (손우성 미카엘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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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진정한 떠남은 그릇된 자아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요한 복음사가는 착한 목자는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착한 목자는 자신이 치는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기억하고, 불러주는 목자입니다.
착한 목자는 양들로부터 신뢰와 존경과 사랑을 받는 목자입니다. 양들을 먹거리 풍성한 초지로 인도하고 맹수들로부터 보호해주는 목자입니다. 양들에게 가장 좋은 것, 영원한 생명과 구원을 선물로 주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정작 항구하고 충실하게 착한 목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착한 목자가 되기 위해 무한 노력을 반복했던 헨리 나웬 신부님 역시 틈만 나면 그 어려움을 하소연했습니다.
요즘 많은 사목자들이 두드러지게 드러내는 경향이 하나 있는데, 분노랍니다. 선배 사목자들 중에 자신을 이끌어줄 모범이 되는 사람이 없다고 분노합니다. 교우들을 바라보면서 적극적으로 협력하지 않는다며 분노합니다. 쉬는 교우들이 점점 증가하며 미사 참석률이 현저히 떨어지는 것에 분노합니다. 교회에 정기적으로 나오는 교우들에게는 열정이나 헌신이 없다고 분노합니다. 기대에 못 미치는 한심한 자신의 모습에도 분노합니다.
그런데 사목자들은 이런 분노를 공공연하게, 혹은 노골적으로 터트리지 않는답니다. 많은 경우 분노는 부드러운 말과 웃는 얼굴, 예의 바른 인사 뒤에 숨어있답니다. 억압된 분노는 점점 굳어져 사목자들의 마음과 영혼을 마비시키고 무력화시킨답니다.
일찌감치 이러한 체험을 온몸으로 경험했던 사막의 교부들은 침몰하는 배 같은 자신의 삶에서 탈출하기 위해 몸부림쳤고, 가까스로 그곳을 빠져나왔으며, 결국 목숨을 건졌습니다. 그런데 그 구원의 자리는 바로 사막이라는 고독의 자리였습니다.
복잡다단한 이 시대 착한 목자로 살기가 참으로 어려운 시대입니다. 착한 목자로 올곧게 서기 위해서는 무한 반복의 정진과 구도가 필요합니다. 내공을 잘 닦아야 합니다. 작은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거목이 되어야 합니다.
사막의 교부 아르세니우스는 두 왕자의 후견인으로서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궁전에서 살았습니다. 어느 날 상류 사회의 위선적이고 오만한 삶의 행태에 신물이 난 아르세니우스는 간절히 주님께 기도를 올렸습니다.
“주님, 저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소서.”
그러자 이런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아르세니우스야, 세상을 벗어나면 구원을 얻을 것이다.”
아르세니우스는 즉시 로마를 떠나 알렉산드리아로 건너갔고, 깊숙한 사막 한가운데로 들어갔습니다. 아직도 뭔가 미진했던 그는 또 다시 기도를 올렸습니다.
“주님, 저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소서.”
그러자 다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아르세니우스야, 벗어나라. 침묵하라. 늘 기도하라. 이것이야말로 행복하고 죄 없는 삶의 원천이다.”
여기서 즉시 한 가지 장벽 앞에 부딪히게 되네요. 침묵하라! 네 좋습니다. 가능합니다. 늘 기도하라. 네, 이 역시 노력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벗어나라! 주어진 여건상 벗어날 수 없는 오늘 우리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담당하고 있는 본당이나 공동체 사도직을 두고 떠날 수 없습니다. 병들어 누워계신 ‘착한 신랑’을 두고 어딜 가겠습니까? 그건 진정한 벗어남이 아닐 것입니다.
진정한 떠남은 그릇된 자아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진정한 벗어남은 왜곡된 정체성에서 벗어나 본래의 나 자신을 찾는 것입니다. 진정한 벗어남은 객관적이고 영적인 시선으로 나 자신을 바라보고 수용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떠남은 사랑 아닌 사랑을 버리고 참된 사랑, 영원한 사랑, 불멸의 사랑을 찾아 나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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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나는 양들의 문이다>
낯선 사람의 목소리는 달콤하다 한 고등학교의 축구감독인 마이크 슬러터 감독은 2002년 시즌 때 그가 ‘평생 단 한 번뿐인 팀’이라고 부르던 축구 부원들을 데리고 주 우승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밤 주전 선수들을 비롯한 16명의 선수들이 미성년자로서 음주한 사실이 적발되어 체포되었습니다. 평소 슬러터 감독은 선수들에게 술이나 담배, 마약으로 문제를 일으키면 팀에서 제명시킬 것이라고 말해 왔기 때문에 결정을 내려야 했습니다.
결국 그는 선수들을 모두 제명시켰습니다. 슬러터 감독은 그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결국은 책임의 문제입니다. 선수들은 규칙을 어겼습니다.” 그리고 이들에게는 “나는 언제나 너희를 사랑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너희가 여기서 배워야 할 것이 있단다.” 그날 팀은 63대 0으로 패했습니다.
선수들은 슬러터 감독의 결정에 불만을 가졌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성장하고 나서는 감독을 참 고마워 할 것입니다. 더 많은 것을 배웠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슬러터 감독은 누가 봐도 참 좋은 수장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선택에서 자신의 명예가 아닌 선수들의 미래를 더 걱정하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정말 나를 위하는 목소리는 어떤 때는 듣기 싫거나 거북할 때도 있는 것 같습니다. 부모님의 잔소리가 짜증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소리를 하시는 분들이 오히려 나를 사랑하고 내가 믿을 분들인 것입니다. 반대로 달콤한 것부터 먼저 제시하는 사람들은 나를 속이거나 이용하려는 강도들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이솝우화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창고에 꿀이 흘려져 있었습니다. 이 꿀 냄새를 맡고 파리들이 몰려와 핥아 먹었습니다. 그런데 꿀맛이 어찌나 좋던지 파리들은 떠날 줄을 몰랐습니다. 그러다가 그만 날개며 발이 꿀이 묻게 되어 영영 헤어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또 CS 루이스의 우화 ‘사자와 마녀와 옷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악한 마녀가 아주 똑똑한 소년 에드먼드를 죽이려고 사용한 도구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터키 사탕’입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달콤하고 향기로운 사탕인데 한번 먹어본 사람은 그 달콤함에 빠져 그것을 먹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사탕 속에는 사람이 느끼지 못할 만큼 아주 적은 양의 치명적인 독약이 들어있습니다. 터키 사탕은 달콤한 맛으로 사람을 서서히 죽음의 골짜기로 몰아가는 무서운 독약인 것입니다.
양들은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습니다. 그러나 낯선 사람의 목소리는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오히려 피해 달아납니다. 우리는 목자의 목소리와 낯선 자의 목소리를 구별해 낼 수 있습니까? 일반적으로 처음엔 거칠고 나중엔 부드러운 목소리가 참 목자의 목소리입니다. 그러나 처음엔 달고 나중엔 쓴 목소리는 낯선 자의 목소리이고 우리를 파괴시키려는 도둑이며 강도의 목소리인 것입니다. 악의 유혹은 언제나 달콤함과 화려함으로 치장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듣기 좋은 소리만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가 진정 나를 사랑하는가를 먼저 확인해야 할 것입니다.
송현이라는 사람이 쓴 <어느 쥐의 유언>이라는 시를 마지막으로 읽어보며 우리도 참 목자가 아닌 강도들의 목소리에 따라가는 일이 없도록 결심합니다. “내 말 귀담아 듣거라.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들은 저마다 다른 무서움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그 중에서 무서움의 형식을 감추고 있는 무서움이 가장 무서운 무서움이다. 내 말 잘 알아듣거라. 고양이와 쥐덫이 가장 무서운 것이 아니다.
고양이는 언제나 고양이로 있고, 쥐덫은 언제나 쥐덫으로 있으니, 내 나이가 되면 고양이쯤이야 차라리 같이 늙어가는 이웃일 수도 있고, 쥐덫쯤이야 내 슬기의 시험대 정도로 그친다.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고양이도 아니고 쥐덫도 아니고, 무서움을 다채롭게 위장한 쥐약이다. 쥐약의 외형은 탐욕의 혀끝과 코끝을 유혹하기 위해 자연스럽고 믿음직스럽고 우호적이고 헌신적이다. 그러나 쥐약의 외형이 어떻거나 간에 쥐약은 쥐약이다. 이 바보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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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0,1-10 : 나는 양이 드나드는 문이다
“양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자는 도둑이며 강도다.”(1절) 목자가 드나드는 ‘문’은 바로 ‘성경’을 의미한다. 성경은 우리를 하느님께로 데려다 주고 우리에게 하느님에 관한 지식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성경은 우리를 그분의 양떼로 만들어 주며 우리를 이리떼로부터 막아준다. 성경은 튼튼한 문처럼 이단에 대항해 길을 막고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주고 헤매지 않도록 한다. 그러기에 목자라고 하면서 성경을 이용하지 않는다면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자”이며, 도둑과 같은 자이다. 그분이 바로 하느님의 말씀이시니 우리를 아버지께로 인도하시는 문이시고, 우리를 보살피시니 목자이시다.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들의 목자다.”(2절) 목자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들어가는 사람이다. 그는 그리스도를 본받으며 그리스도의 겸손을 잘 아는 사람이다. 양들의 목자는 가르침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며, 문을 이용한다. 온 마음으로 삶으로써 우리에 들어가는 사람이다. 그는 다른 모든 이에게 그들이 배불리 먹고 이후로도 계속 먹어야 할 말씀의 양식을 보여줌으로써 그들을 양들처럼 풀밭으로 인도한다. 그 목자는 말씀, 곧 성경을 어떻게 이해하고 또 멀리해야하는 가르침이 어떤 것인지 보여 줌으로써 인도해 준다. 도둑이나 강도는 이와 정반대이다. 그는 합법적인 문을 이용하지도 않고, 턱없이 문과 교사의 지위를 차지하려고 한다.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 준다.”(3절) 여기서 문지기는 우리 주님 자신이다. 주님께서는 당신 자신을‘문’으로 또는 ‘목자’로 표현하신다. 그렇다면 ‘문’과 ‘문지기’로 표현할 수 있다. 문은 들어가는 길이다. 문지기는 문을 열어 주는 사람이다. 그러니 당신을 열어 주는 이는 당신 자신을 눈에 보이게 드러내 보여주시는 분이시다. 문은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는 진리이시며, 문을 열어 주시는 분이 우리 모두를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목자는 이들을 이름으로 부른다. 그리고 그들은 목자를 따른다. 양들은 그들이 듣기 좋아하는 목소리를 지닌 목자를 따른다.
양들은 목자를 따른다. 양들에게는 목자가 필요하다. 보통 목자들은 양들을 뒤에서 따라간다. 그러나 자신이 그들 모두를 진리로 인도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양들 앞에서 가는 것이다. 양들 앞에서 양들이 따라가야 할 곳으로 앞장서서 간 분은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나 다시는 죽지 않는 주님이시다. 이 양들은 낯선 사람을 따르지 않는다. 양들은 그를 피해 달아난다. 낯선 사람들의 목소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5절) 우리는 목자의 소리를 따라야 한다. 주님께서 목자로서 문을 통해 우리를 부르실 때, 그분을 따라야 할 것이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7절)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양들의 문이시라고 하신다. 진리에 다가가려는 사람들에게 당신이 중요한 통로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분은‘말씀’이시다. 모든 사람은 그것을 통해 아버지를 알게 된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분의 계명과 가르침을 따르는데 힘써야 한다. 그분은 당신을 양들의 문이라고 표현하셨다. 주님을 믿지 않고는, 그분의 가르침을 통하여 진리에로 나아가지 않고는, 우리가 아버지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감으로써 갖는 기쁨을 찾지 못한다면 진리를 찾을 길이 없기 때문이다. 진리를 통한 자유와 기쁨이 없다면 잘못된 신앙이다.
“나보다 먼저 온 자들은 모두 도둑이며 강도다. 그래서 양들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8절) 예수님께서 착한 목자라는 말을 쓰신 것은 나쁜 목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도둑’이며 ‘강도’이다. 아니면 기껏해야 ‘삯꾼’들이다. 이들은 양가죽을 쓴 이리들이다. 이들은 양들을 미혹시키는 기회주의자들이다. 그들은 믿음이나 삶속에서 복음을 드러내지 못하고 그것을 이용하여 현세적 이익을 취하려고만 한다. 그들은 속임수와 폭력으로 순진하고 말재주 없는 양들을 잡으려 한다. 이런 자는 도둑이며 “도둑질을 하지 말라고 설교하면서 왜 그대는 도둑질을 합니까?”(로마 2,21)라는 말을 들을 것이다.
“나는 문이다.”(9절)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문이시다. 구약과 신약의 모든 백성들이 그 문을 통하여 아버지께로 들어가게 된다. 곧 그리스도라는 문을 통하여 모두가 하느님과 일치하게 된다. 그분은 길이시다. 당신 자신을 통하여 우리를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우리를 안으로 들여보내 주는 문이시며, 우리를 물가에서 쉬게 하시고 푸른 풀밭으로 인도하여 그곳에 머무르게 하는 목자이시다.(시편 23,2 참조)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10절) 이것은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갈라 5,6)을 말한다. 이러한 살아있는 믿음으로 그들은 우리로 들어가고 생명을 얻는다. 의로운 사람은 믿음으로 살기 때문이다.(로마 1,17 참조) 끝까지 견디는 사람은 생명을 얻을 뿐 아니라, 이 문을 통하여 들어감으로써, 즉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으로써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된다. 교회를 이끌어갈 훌륭한 목자들을 보내 주십사 청하면서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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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목자의 비유>
‘목자의 비유’는, “예수님만이 유일한 목자다.”라는 가르침이고, 또 “가짜 목자를 따라가지 마라.”라는 가르침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하늘 아래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 4,12)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을 이렇게 꾸짖었습니다. “하와가 뱀의 간계에 속아 넘어간 것처럼, 여러분도 생각이 미혹되어 그리스도를 향한 성실하고 순수한 마음을 저버리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사실 어떤 사람이 와서 우리가 선포한 예수님과 다른 예수님을 선포하는데도, 여러분이 받은 적이 없는 다른 영을 받게 하는데도, 여러분이 받아들인 적이 없는 다른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는데도, 여러분이 잘도 참아 주니 말입니다."(2코린 11,3-4)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기 전에도 ‘자칭 메시아’가 많았고(사도 5,36-37), 승천 후에도 많았고, 오늘날에도 많이 있습니다. ‘자칭 메시아, 자칭 재림 예수’는 모두 다 백퍼센트 가짜입니다. 그 외에도 ‘새로운 계시’를 받았다고 선전하면서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경우도 많은데,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공적인 계시는 끝났고, 더 이상 새로운 계시는 없다는 것이 우리 교회의 확고한 믿음입니다. 또 성경을 마음대로 해석하고 왜곡하는 사이비들도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자들은 모두 도둑이며 강도라고 말씀하십니다.(요한 10,1) 그들은 자신들의 탐욕을 채우는 짓만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양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자는 도둑이며 강도다. 그러나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들의 목자다.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그리고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이렇게 자기 양들을 모두 밖으로 이끌어 낸 다음, 그는 앞장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낯선 사람은 따르지 않고 오히려 피해 달아난다. 낯선 사람들의 목소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요한 10,1-5)
양 우리에 들어갈 때 문으로 들어간다는 말은, 하느님께서 주신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뜻하는 말로 해석됩니다.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간다는 말은, 하느님으로부터 권한을 받은 적이 없다는 것을 뜻하는 말로 해석됩니다. 여기서 ‘문’은 합법적인 출입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드러내는 장치 같은 것입니다. 물론 실제로 그런 문이 있다는 것은 아니고, 이것은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 예수님은 그 권한을 가지고 계신 분이고, 세례자 요한처럼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들은 그 권한을 위임받았습니다. 가짜 예언자, 가짜 메시아는 그 권한이 아예 없기 때문에 그자들이 사람들에게 접근하는 것 자체가 불법이 됩니다.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일을 하는 것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지 않은, 또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을 하는 것은,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것입니다.(마르 3,4)>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 주고”라는 말씀은, 목자의 정당한 권한 행사를 뜻합니다. <실제 상황에서는, 목자가 여러 명이라면 목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문지기 역할을, 즉 일종의 ‘불침번’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목자가 한 명뿐이라면, 그 목자가 문지기 역할도 겸하게 됩니다. 지금 이 ‘목자의 비유’에서는 목자가 예수님뿐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목자이면서 동시에 문지기입니다. (목자도 보호자이고, 문지기도 보호자입니다.) 따라서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 주고”는 “목자는 문을 열고 들어가고”로 바꿔서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는 중재자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는 중재자가 따로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직접’ 만나시고, 나도 예수님을 ‘직접’ 만납니다. (중간에서 거치적거리는 존재는 없다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선교활동을 하면서 다른 사람을 예수님에게로 인도하는 일을 하는 경우에, 그것은 ‘옆에서’ 도와주는 인도자 역할을 하는 것이지 문지기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라는 말씀은, 우리 입장에서는 “목자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들어야 한다.”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하나’라는 말은,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는 ‘일대일’의 관계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를 사랑하시는 분이고, 동시에 ‘나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개인이 전체에 묻히는 일이 없는 공동체, 한 사람 한 사람이 특별하고 귀한 존재가 되는 공동체입니다.) 목자가 ‘앞장서 가고’ 양들은 목자를 따른다는 말씀은, 신앙생활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생활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보다 앞에서 갈 수도 없고, 예수님보다 위에 설 수도 없습니다.) ‘낯선’이라는 말은, 여기서는 하느님의 계명과 예수님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것을 뜻합니다. ‘낯선 사람’은 하느님의 계명에 맞지 않는 말과 예수님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말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자는 사이비이고 가짜입니다. ‘피해 달아난다.’는 ‘피해야 한다.’이고, “낯선 사람들의 목소리를 알지 못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말은 들으면 안 된다.”입니다.
7절의 “나는 양들의 문이다.”라는 말씀과 9절의 “나는 문이다.”라는 말씀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라는 말씀과 ‘같은 말씀’입니다.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고,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의 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가르침만이 유일한 ‘구원의 진리’입니다. ‘사이비들’과 ‘가짜들’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말만 하면서 사람들을 속입니다. 그들을 따라가면 구원의 정반대쪽으로, 즉 멸망으로 가게 됩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구원하고 살리는 것만 바라시고, 그 일만 하시는 분인데, 사이비들과 가짜들은 자신들의 탐욕을 채우는 일에만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교회 외부에만 사이비와 가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내부에도 있습니다. 그자들에게 속지 않으려면, 더욱 열심히 교리공부와 성경공부를 해야 합니다. ‘게으름’과 ‘무지’도 ‘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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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어제는 석가 탄신일이었습니다. 부처님의 자비가 세상에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불가에서는 부처님이 이런 꿈을 꾸었다고 합니다. “히말라야 산을 베개로 하고, 대지를 큰 침상으로 하여 누웠는데 왼 손은 동쪽 바다에, 오른 손은 서쪽 바다에 놓여 있고 두 발은 남쪽 바다에 두고 누워 있는 꿈, 부처님 배꼽에서 일종의 넝쿨나무인 띠리아 풀이 나와서 자라기 시작하는데 계속 자라 구름까지 닿은 뒤에 멈추는 꿈, 수많은 벌레들이 몸통은 흰색인데 머리는 까만 벌레들이 부처님의 두 발에서부터 기어올라 양 무릎까지 잔뜩 붙어 있는 꿈, 부처님께서 앉아 계신데 사방에서 각기 다른 색의 새 네 마리가 날아와 부처님의 발아래 내려앉더니 모두 흰색으로 변하는 꿈, 부처님께서 똥오줌이 가득한 산에 들어가 걸어가는데 발이나 몸이 하나도 더럽혀지지 않는, 전혀 묻지 않고 깨끗한 꿈”입니다.
이런 꿈들을 불가에선 이렇게 해석하였다고 합니다. “첫 번째 꿈은 깨달음이 크다는 것을 뜻합니다. 두 번째 꿈은 깨달음이 모든 이들에게 전해진다는 것을 뜻합니다. 세 번째 꿈은 많은 사람들이 깨달음을 얻는 다는 것을 뜻합니다. 네 번째 꿈은 신분과 혈연을 넘어서 많은 이들이 해탈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다섯 번째 꿈은 세상의 것들에 홀리거나 집착을 내거나 탐착하거나 하여, 오염되거나 묶이지 않으며 거기에서 위험을 보고 벗어남을 통찰하면서 스스로를 잘 지킨다는 것을 뜻합니다.” 저는 다섯 번째 꿈의 해석을 생각합니다. 진세를 버리고, 깨끗이 한 청춘을 부르심에 바쳤다고 하지만, 그래서 사제가 되었지만 세상의 것에 너무도 쉽게 물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는데 십자가를 너무 쉽게 내려놓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 독서는 편견, 우월감, 선민의식이라는 잣대로 세상을 보지 말자고 합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께 속해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할례 받은 이도, 할례 받지 않은 이도, 유대인도, 이방인도, 남자도, 여자도, 부유한 이도 가난한 이도, 고아와 과부도 모두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다른 민족들에게도 생명에 이르는 회개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구원의 문으로 들어갈 수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거짓과 욕망으로 굳게 닫힌 우리의 문 앞에서 기다리는 것 같습니다. 위선과 미움으로 닫힌 우리의 문 앞에서 기다리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문을 열고 주님을 맞이하면 이제 우리는 주님의 눈으로 같은 곳을 바라볼 수 있을 것입니다.
엄마는 말을 못 하는 아이의 표정과 몸짓만을 보고서도 아이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온 마음을 다해서 아이의 눈에 맞추기 때문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눈높이를 맞추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셨지만, 우리를 위해서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언어로 눈높이를 맞추셨습니다. 내가 나의 능력과 나의 힘으로 여기까지 온 것 같지만 사실은 주님께서 나를 이곳까지 이끌고 오셨음을 느끼라는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감사해야 하고, 그래서 우리는 또 다른 이웃을 주님께로 초대해야 합니다. 대화가 되지 않을 때, 혹시 내가 나의 기준으로 상대방을 대하는 것은 아니었는지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자존심과 욕심으로 나의 귀를 막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생각했으면 합니다. 나의 선입견으로 내가 듣고 싶은 것들만 들으려고 한 것은 아니었는지요?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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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하성호 사도요한 신부님]
<우리는 주님의 양들입니다>
세계적인 이론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 박사가 휠체어에서 벗어나 무중력 공간 체험을 하였다는 언론 보도가 있었습니다. 호킹 박사는 그 감격을 말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습니다.
“지구에서의 삶은 갑작스런 온난화나 핵전쟁, 유전적으로 변형된 바이러스 등의 위험으로 사라질 수도 있어 인류는 우주로 나가야 한다.”
호킹 박사는 루게릭병으로 인해 팔,다리를 전혀 움직이지 못하고 컴퓨터를 통하지 않고는 말도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우주 공간의 무중력 상태를 경험하고 난 뒤에 지구상의 인류를 걱정하는 모습은 너무나 진지하였습니다.
호킹 박사의 지구 미래에 대한 그 진지한 메시지를 우리는 과연 얼마나 귀담아 듣고 있습니까?
불과 며칠 전에 봄이 오는가 싶더니 벌써 늦봄이 된듯합니다. 예전에 양봉 꿀을 따는 사람들은 남쪽에서 시작하여 위로 차츰 올라가며 아카시아 꿀을 딸 수 있었는데, 이젠 한반도 전역에 아카시아 꽃이 거의 동시에 피기 때문에 이동하며 꿀을 딸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아프리카 등지에서 발생하는 신종 폐결핵은 걸리면 항생제가 듣지 않아 80% 이상이 사망한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께서 양들은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양들입니다. 주님의 목소리를 귀 기울여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선 우선 나를 떠나서 세상을 보는 연습부터 해야 한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예를 들면 편안하게 살고픈 나의 본능에 따라 살면 사제로 옳게 살지 못할 것 같아, 차를 없애고, 가능한 걸어 다니려 애를 씁니다.
처음에는 불편하였지만 요즘은 걷는 것이 참 좋습니다. 지구 온난화를 생각하면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 하나쯤 생각하기 쉽지만 나 하나부터라는 의식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이렇게 사소한 나의 일상 주변에서부터 시작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파괴하지 않고 가꾸려 노력하는 것부터가 주님의 목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어제가 성소주일이었습니다. 착한 목자이신 주님께서 당신의 양들인 우리에게 지금 무엇을 말씀하시겠습니까? 우리가 처한 곳에서 빛과 소금의 생활을 할 것을 명하십니다. 주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으시면 복음서를 펼쳐보십시오. 늘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 하루 또 우린 분주하게 생활하게 됩니다. 하루를 살면서 하루를 알차게 보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루를 몽땅 허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주님 목소리를 듣고 감사드리는 하루가 되게 살고, 그리고 저녁에 감사드릴 수 있는 그런 하루를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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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강영구 루치오 신부님]
<양을 아는 목자>
새로운 한 주간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에게 허락하신 이 한 주간이 보람차고 행복한 시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어떻게 살면 이 한 주간이 행복할 수 있을까요?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과 함께 라면 행복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는 분입니다. 하느님 또한 예수님을 압니다. 예수님은 양떼인 우리들을 압니다.
‘안다’는 것은 서로에 대한 객관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안다’는 것은 지식을 뛰어넘어 생명과 사랑을 나누는 관계를 말합니다.
양떼를 ‘아는’ 목자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을 알게 되고 하느님의 생명 안으로 들어갑니다. 목자 예수님은 양떼를 이리의 위험으로부터 보호해주실 뿐 아니라 맛있고 싱싱한 풀과 맑고 시원한 물을 마시게 합니다. 목자이신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이 당신 삶이 길잡이가 되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만일 욕망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목자의 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됩니다. 욕망의 소리를 따르면 당신의 삶은 신나고 재미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목자 없는 당신의 삶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양들을 위해 목숨 내어놓기를 주저하지 않는 목자 예수님과 함께 행복한 한 주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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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정병덕 라파엘 신부님]
<우리가 해야 할 일>
횡단보도에서 어떤 사람이 빨간 신호인데도 길을 건너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뒤를 따라가는 사람이 꼭 있습니다. 또 반대로 신호가 바뀔 때까지 굳세게 버티고 서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레프코위츠라는 학자가 이런 실험을 했다고 합니다. 아주 한산한 거리에서 과감히 무단행단을 하는 가짜 행인을 한 명 고용을 하여 이 행인이 허름한 복장을 하고 무단행단 했을 때와 반대로 깨끗하고 말끔한 복장을 하고 무단행단 했을 때를 비교해보았답니다.
그런데 그 결과, 깨끗하고 말끔한 복장을 하고 무단행단을 했을 때가 압도적으로 많은 위반자가 생겼다고 합니다. 이 실험의 결과는 사회적 지위가 높게 보이는 사람이 잘못을 하면 그것을 쉽게 모방하거나 동조한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가르쳐주지요.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이 바로 착한 목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당신 스스로 모범을 보이시고,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타인을 위해 희생까지도 감수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행동의 원칙으로 사랑을 말씀하셨습니다. 항상 사랑이라는 계명 아래에서 예수님은 생각하고 판단하셨으며 그 판단을 사람들에게 심어주셨습니다.
선의 실천은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열쇠입니다.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닮아 우리의 삶도 사랑이 넘치는 삶이 될 수 있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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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울타리와 문>
요한 10,1-10 (목자의 비유, 나는 착한 목자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양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자는 도둑이며 강도다. 그러나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들의 목자다.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그리고 목자는 자기 양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이렇게 자기 양들을 모두 밖으로 이끌어 낸 다음, 그는 앞장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낯선 사람은 따르지 않고 오히려 피해 달아난다. 낯선 사람들의 목소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에게 이야기하시는 것이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하였다.
예수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 나보다 먼저 온 자들은 모두 도둑이며 강도다. 그래서 양들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올 뿐이다. 그러나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
<울타리와 문>
나의 울타리 안에서
나는 오롯이 나입니다
너의 울타리 안에서
너는 오롯이 너입니다
나의 울타리 건너야
나는 너를 만납니다
너의 울타리 건너야
너는 나를 만납니다
나는 너를 만나야
나는 참으로 나입니다
너는 나를 만나야
너는 참으로 너입니다
나는 참으로 나이어야
나는 비로소 너가 됩니다
너는 참으로 너이어야
너는 비로소 나가 됩니다
나는 너가 되기 위해서
나의 울타리를 건넙니다
너는 나가 되기 위해서
너의 울타리를 건넙니다
나의 울타리 어딘가 문으로
나는 너에게 갑니다
너의 울타리 어딘가 문으로
너는 나에게 옵니다
너와 나를 가르는
울타리입니다
너와 나를 잇는
문입니다
나는 울타리를 넘어 들어가
너를 침범하지 않습니다
너는 울타리를 넘어 들어와
나를 침범하지 않습니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빛의 문으로 드나듭니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존중의 문으로 드나듭니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공감의 문으로 드나듭니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나눔의 문으로 드나듭니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섬김의 문으로 드나듭니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살림의 문으로 드나듭니다
나는 오롯이 나이면서
나는 비로소 너가 됩니다
너는 오롯이 너이면서
너는 비로소 나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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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경청하고 식별한 다음 행동하라>
한 신부님이 많은 돈과 귀한 보석을 선물로 받았답니다. 갑자기 너무 많은 재물이 생겨서 어찌할까 고민하다가 우선 보관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아무리 궁리해도 보관할 장소가 마땅치 않았습니다. 그러다 ‘성체를 모시는 감실에 두면 아무도 눈치를 채지 못하리라’는 기발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였습니다. 그래도 불안하여 감실 앞에 “예수님께서 이곳에 계시느니라.” 하고 써 붙였습니다. 아!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아침에 나와 보니 누군가 감실 문을 열고 보석을 몽땅 가져간 것입니다. 그리고 종이쪽지에다가 “예수님은 부활하시어 이곳에 안 계시는 도다”하고 써 놓았더랍니다.
쌓아 놓으면 쌓아 놓을수록 줄 것이 없고, 주면 줄수록 줄 수 있는 능력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이 무엇이든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내놓으면 주님께서 더 풍요롭게 해 주십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목숨을 내놓기까지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담을 그릇을 준비하지 않으면 그것을 얻을 수 없습니다. “공것이라면 비상도 먹는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공것이라면 매우 좋아하여 가리지 않고 덤빈다는 말입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상으로 은총을 주십니다. 그런데 왜 주님께 달아 들지 않는지 안타깝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최고는 아닌데도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을 얻고자 한다면, 풀밭을 얻으려 한다면 먼저 예수님을 통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완전한 자유를 누리는 방법이며 충만한 생명을 체험하는 지름길입니다. 따라서 말씀 안에서 예수님을 만나야 하고,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 곧 미사 안에서 성체를 자주 모셔야 합니다. 자주 성체가 모셔져 있는 감실 앞에 머물러야 합니다. 사실 “성체 조배는 예수님과 살기 위한, 예수님 안에서 참된 인격을 형성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알베리오네 신부)이 됩니다.
성체 조배를 통하여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지신 주님의 목소리를 알아듣게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그 말씀을 따라 걸어가야 합니다. 들음은 행동, 곧 실천으로 옮겨져야 합니다. 말씀을 듣기만 하고 기존의 삶에 안주하고 있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물론 목소리를 알아듣고 익숙해지려면 그만큼 함께한 시간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사실 행동은 경청과 식별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식별을 거치면 근심, 걱정, 슬픔과 좌절, 실망, 불안을 조장하는 목소리는 하느님의 목소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스승은 항상 당당하고, 참된 제자는 그를 따릅니다. 스승에게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그저 따를 뿐입니다. 따름으로써 스승을 완전하게 알게 되고 믿게 됩니다. 세상 속의 헛된 목소리를 경계하고 하느님의 목소리를 경청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주님의 말씀은 구원의 길로 가는 이정표이며 등대입니다. 우리의 스승 예수님, 밥이 되어 오신 예수님을 충실히 닮고 따르는 가운데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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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전주교구 박문수 막시미노 신부님]
“나는 양들의 문이다.” 어제와 다르게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문’으로 계시하십니다. 양들이 드나드는 문! 바로 이 문을 통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양들이 이 안전하고 확실한 문으로 드나드는 것을 방해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도둑과 강도가 바로 그들입니다. 양들의 문이자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통해서가 아니라, 다른 것으로 양들을 유혹하는 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양들의 문이자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 그리고 도둑과 강도, 이렇게 오늘 복음은 양들을 사이에 두고 있는 두 부류의 등장인물로 구성되어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이면, 또 다른 인물이 복음에 등장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로 문지기입니다. 단 한 차례 언급되고 사라지기는 하지만, 오늘 복음에서 문지기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착한 목자에게 양 우리의 문을 열어 주고, 양들이 목자를 향하여 나아갈 수 있도록 길과 방향을 제시해 주는 이가 바로 문지기이기 때문입니다.
문지기에 대하여 묵상하다 보니, 교회 안에서 사제와 수도자가 바로 문지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들이 바로 하느님의 은총을 신자들에게 전하고, 신자들이 올바른 방향 안에서 하느님을 찾고 만날 수 있도록 인도하는 대표적인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를 좀 더 확장해 보면, 모든 그리스도인 또한 세상 사람들을 하느님께 이끄는 문지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의 말과 행동을 통하여 세상은 교회와 그리스도께 호감을 가지고, 알고 싶어 하며, 마침내 믿음의 사람으로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문이 되어 주시는 예수님을 찬미하며, 오늘 하루 주위의 이웃들을 그 문으로 이끄는 하느님 나라의 충실한 문지기가 되어 보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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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나는 양들의 문이다.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요한10,7.10)
<양들의 문이신 예수님!>
저의 부활을 고백합니다. 솔직하게 고백하면 저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는 날에 부활하지를 못했습니다. 4.27(수)에 마음이 부활했고, 그 다음 주인 5.4(수)에 몸이 부활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위해 온갖 모욕과 침뱉음과 채찍질과 옷벗김 당하시는 수모와 고통, 가시관을 쓰시고 피를 흘리시면서 십자가에 달리셨는데도 저는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지를 못했습니다.
좀 늦었지만, 마음과 몸이 부활하니 정말 기뻤습니다. 부활은 그냥 주어지는 선물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금 깊이 체험했습니다. 언젠가 말씀드린 대로 지나고 보니 풍랑이 은총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서 완전하게 드러나고 있듯이, 부활은 죽음인 고통을 전제로 합니다. 죽음 너머에 부활이 있듯이 고통 너머에 부활이 있습니다.
문제의 근본 원인은 너에게 있지 않았습니다. 양들의 문이시고, 생명과 부활에로 이끄시는 문이신 예수님께로 향해 있지 않은 나의 영적 메마름의 상태가 나의 부활을 방해하는 가장 큰 장애물이었습니다.
오늘 독서는 유다인들 사이에서 아주 중요하게 여겨지는 할례에 관한 논쟁입니다. 베드로는 할례라는 율법 안에만 갇혀 있었던 유다인들에게 할례 받지 않는 이들에게 달려가야 하고,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도 구원이 전해지게 하셨다고 역설합니다.
그렇습니다. 세례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세례의 합당한 삶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세례 받지 않은 이들이 세례 받은 이들보다 삶으로 예수님의 모습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세례의 합당한 삶! 자기 성소의 합당한 삶을 통해서 더 큰 부활에로 나아가는 하느님의 자녀들... 오늘 부활했기 때문에 우리 주님께서는 더 큰 부활을 선물로 주시기 위해 또 다른 고통도 주실 것입니다. 성모님 손잡고 이 고통을 이겨내고 내일 또 다시 부활하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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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사람은 기본적으로 ‘이기적 편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사 분담 문제로 부부 싸움을 많이 한다고 들었습니다. 아내는 남편이 가사를 전혀 도와주지 않는다고 하고, 남편은 나름 많이 가사 일을 돕는다고 말합니다. 서로 자신의 가사 분담이 크다면서 다툽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 속에서 자기도 모르게 자기에게 유리한 정보는 과장되게 말하고, 불리한 부분은 무시해버립니다. 자기중심적 편견이 있다는 것입니다.
운동선수는 승리를 자신이 쏟은 노력의 결과라고 생각하고, 패하면 날씨나 심판의 편파적인 경기 운영 같은 다른 요인으로 탓을 돌립니다. 운전하는 사람도 대부분 자신이 운전을 능숙하게 하고 미숙하게 운전하는 다른 사람 때문에 운전하기 힘들다고 말합니다.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이기적 편향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이기적 편향을 내세우면서 자신의 권력까지 드러냈던 사람들이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을 향한 예수님의 일침은 “이 위선자야~”였지요.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과 우리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보여주신 겸손을 갖추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 겸손의 모범을 갖추고 주님을 따르지 않는다면 주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가 없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양들이 드나드는 문이라고 하십니다. 그에 반해서 잘못된 길로 이끌면서 자신의 이기적 편향을 내세우는 종교 지도자들을 향해서는 도둑이며 강도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자기 양들만 생각하는 착한 목자였고, 종교 지도자들은 양들의 안녕은 생각하지도 않고 오로지 자기 탐욕에만 골몰하는 가짜 목자라는 것입니다.
양들은 자기들을 보살피는 목자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모든 것을 내맡기고 무조건 따라갑니다. 그러나 낯선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면 산신이 흩어집니다.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욕심과 이기심을 내세우는 ‘이기적 편향’만이 가득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 모두가 낯설게만 들릴 수밖에 없었고, 주님의 곁에서 멀어졌던 것입니다.
이기적 편향을 내려놓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양들의 문이신 주님의 문 안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이 양의 우리가 되어 안전하게 우리를 보호해주실 뿐 아니라, 목자로서 우리 밖에 있는 다른 이들도 불러들이는 사랑과 보살핌으로 당신 임무를 완수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제 하느님께서는 다른 민족들에게도 생명에 이르는 회개의 길을 열어 주셨다.”(사도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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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착한 목자 예수님과의 관계>
-주님의 양, 주님의 착한목자, 주님의 문지기, 주님의 문-
"제 영혼이 생명의 하느님을 목말라 하나이다."(시편42,3ㄱㄴ)
세월을 이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세월과 더불어 모두가 흘러갑니다. 사라져 갑니다. 문화예술인들의 별세 소식이 줄을 잇습니다. 어제 ‘타는 목마름으로’, ‘밥이 하늘이다’ 라는 불후의 시를 남긴 시인 김지하씨가 향년 81세로 별세했습니다. 그 전에는 여배우 강수연씨가 50대 젊은 나이에 별세했고 그 얼마전에는 소설가 이외수씨가 70대 후반 나이에 지병으로 별세했습니다.
어김없이 때되면 찾아 오는 죽음입니다. 아무도 선택할 수 없는 죽음이지만 그래도 하루하루 죽음을 준비하며 사는 일이 얼마나 본질적인 중요한 일인지 깨닫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란 물음은 ‘어떻게 죽어야 합니까?’란 물음과 직결됩니다. 파스카 예수님은 바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에 대한 궁극의 답을 줍니다. 어제 아침 산책시 초록빛 가득한 신록의 계절, 불암산 배경의 수도원을 보며 쓴 ‘초록빛 소년’이란 시를 나눕니다.
“초록빛
불암산 배경으로
초록빛
궁전같은 숲 안에서
초록빛
주님과 함께
초록빛
소년이 되어
초록빛
영원을 살아가는 이들!
행복하여라”
초록빛 영원을 살아가는 여기 수도원의 우리 수도형제들입니다. 참으로 착한목자 파스카 예수님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세월도 비껴갑니다. 초록빛 영원을 살아가는 초록빛 소년들이 됩니다. 마침 교황님 홈페이지에서 한눈에 들어온 ‘듣고 따르자, 우리의 착한목자 주님을’ 이라는 어제의 강론 주제였습니다. 참으로 하루하루 날마다 착한목자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를 때 영원한 생명의 초록빛 구원이겠습니다. 오늘 복음도 어제와 같은 맥락입니다.
“나는 양들의 목자다. 문지기는 목자에게 문을 열어주고, 양들은 그의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그는 앞장서 가고 양들은 그를 따른다. 양들이 그의 목소리를 알기 때문이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올 뿐이다. 그러나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
바로 우리가 믿고 희망하고 사랑하는 예수님의 목자와 문으로서의 신원입니다. 목자라고 다 착한목자가 아닙니다. 문이라고 다 구원의 문이 아닙니다. 세상에는 강도와 도둑같은 거짓 목자도 많고 멸망에 이르는 죽음의 문들도 수없이 많습니다.
참으로 구원의 목자는, 구원의 문은 파스카 예수님 한분뿐입니다. 거짓 목자들과 거짓 문들을 식별해 낼 수 있는 유일한 기준이자 잣대는 바로 파스카 주 예수님뿐입니다. 그러니 주 예수님과 깊은 우정의 관계가 우리의 삶에 얼마나 결정적으로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착한목자 예수님과의 관계를 통해 환히 드러나는 우리의 신원입니다. 바로 우리는 주님의 1.양들이자 2.착한목자요 3.문지기요 4.문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착한목자이신 주님의 말씀을 잘 듣고 따르는 양들이 바로 우리의 제1차적 신원입니다. 과연 날마다 주님을 잘 따르고 있는지요.
참으로 착한목자 주님을 잘 따를 때 우리는 주님을 닮아 이웃에 착한목자로 살 수 있습니다. 착한목자 주님을 닮아 착한목자로 살아가는 것, 바로 우리의 제2차적 신원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착한목자 예수님의 훌륭한 양으로 동시에 착한목자가 되어 살아가는 분들이 참 많습니다. 특히 정치지도자들이 착한목자 주님을 닮아 착한목자처럼 그 역할을 다했으면 참 좋겠습니다.
조선시대 실학자이자 정약용의 목민심서牧民心書도 이런 지도자를 위한 책이겠습니다. 목민심서에 목민교회牧民敎會도 있네요. 참 이상적인 교회는 주님이 다스리는 목민교회이겠습니다. 우리의 궁극의 유일한 참 목자는 주 예수님 한분 뿐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문이면 우리는 주님의 문지기일뿐 아니라 주님의 문이 되기도 합니다. 주님 문의 문지기는 바로 우리의 제3차적 신원이요, 주님의 문은 우리의 제4차적 신원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문이신 주님을 닮아갈수록 우리 역시 주님의 훌륭한 문이 될 수 있겠고 주님의 훌륭한 문지기가 될 수 있겠습니다. 과연 날로 넓어지는 우리의 주님 문인지 혹은 날로 좁아지는 주님 문인지, 또 날로 주님의 문지기 역할을 잘 하는 우리의 삶인지 반성하게 됩니다.
고정불변의 예수님 문도 예수님 문지기 역할도 없습니다. 참으로 주님을 날로 알아 닮아 갈수록 우리는 주님의 참 좋은 문지기가, 주님의 참 좋은 문이 되어 살 수 있겠습니다. 바로 사도행전의 베드로가 그 좋은 변화 과정을 보여줍니다. 참으로 성령의 도움으로 다음과 같은 깨달음이 베드로를 주님의 참 좋은 문지기로, 주님의 참 좋은 문으로 변화시켰음을 봅니다. 다음과 같은 환시를 통해 주님을 체험한 베드로입니다.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어라.”
“주님, 절대로 안 됩니다. 속된 것이나 더러운 것은 한번도 제 입속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마라.”
이런 환시를 통해 주님을 체험함으로 베드로의 이해 지평은 주님의 이해 지평으로 넓어졌음을 다음 고백이 입증합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을 때에 우리에게 주신 것과 똑같은 선물을 그들에게 주셨는데, 내가 무엇이기에 하느님을 막을 수 있었겠습니까?”
이에 대해 “이제 하느님께서는 다른 민족들에게도 생명에 이르는 회개의 길을 열어주셨다” 하며 하느님을 찬양하는 예루살렘 교우들의 반응도 고무적입니다. 베드로와 예루살렘 교회 교우들의 이웃에 대한 주님의 문이 활짝 열린 느낌입니다.
참으로 이런 끊임없는 깨달음의 여정을 통해 우리의 영적 시야도, 사고와 이해 지평도 날로 확장되어 주님을 잘 알고 닮아감으로 참 좋은 주님의 양이, 착한목자가, 문지기가, 문이 되어 살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바로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을 닮아 주님의 참 좋은 양이, 착한목자가, 문지기가, 문이 되어 살 게 하십니다.
"주님, 당신의 빛과 진리를 보내시어, 저를 인도하게 하소서."(시편43.3ㄱ).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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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aNJEz-Uub_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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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나는 양들의 문이다."(요한 10, 7)
양들의
문(門)으로
말씀하시는
주님이시다.
자유롭게
드나드는
양들과
목자의
관계가
밀려드는
충만한
복음의
관계이다.
모든 관계는
문(門)에서
시작된다.
문(門)은
소통이며
신뢰이며
사랑이다.
문에서
목자의
음성을 듣고
사랑을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닫게
하는 문이다.
문이 있기에
지치지 않고
다시 생활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을
따라간 길에는
많은 문들이
있었다.
십자가의 문
광야의 문
풍랑의 문
말씀의 문
빵의 문이
있었다.
문을 걸어가고
있는 우리들
삶이다.
그래서
문이란
우리들에게
삶다운 삶을
일깨워주시는
구원의
주님이시다.
생명의 숨결을
느끼며 오늘도
문을 드나드는
우리들이다.
누군가의
문과 문이
되는 삶이
빛과 소금의
삶이다.
빛과 소금은
열린 문같이
열린 살아있는
만남이다.
살아있기에
드나드는
문이 있는
것이다.
더 잘 사랑하기
위해 오늘도
문을 드나들며
사랑을 배운다.
우리에게는
들을 수 있고
나눌 수 있는
사랑의 문이신
예수님이 계신다.
양들의 문이신
예수님과 함께
사랑으로
오늘을 가득
채운다.
문이 열리자
모든 시간은
은총으로
출렁인다.
문이 되시고
길이 되시는
주님을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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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나는 양들의 문이다."(요한 10, 7)
모든 삶은
문(門)으로
집중됩니다.
우리를 향한 사랑이
문(門)을 만들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몸소 문(門)이
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문(門)이
우리에게
활짝 열렸습니다.
우리를 보호하여
지켜주시는 살아있는
문(門)이십니다.
문(門)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만나게 됩니다.
믿을 수 있는
문(門)이며
성장할 수 있는
생명의 문(門)입니다.
생명의 문(門)은
오늘도 마음과 마음
사랑과 사랑을
이어줍니다.
자주 들락날락 하듯
자주 소통되듯
우리의 일상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문(門)을 만나는
은총의 시간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생명의 새로운
문(門)이 열립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구원의 문(門)이
우리의 삶을
잡아주고 있음을
진실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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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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