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 이희순 | 날짜 : 13-11-10 00:56 조회 : 1723 |
| | | 그 집에는 사립문이 없었다. 고샅길 오며가며 길쭉한 작대기가 가로 걸쳐져 있으면 ‘닫힌 문’이었다. 나는 열다섯 소년에 그 집 앞마당의 단감나무에 찾아든 가을을 야수었다. 추석이 가까워지자 주황으로 익어가는 단감들이 내 안의 도심을 흔들었다. 나는 작대기를 울타리에 비껴 세워놓고 도둑고양이가 되어 감나무에 올랐다. 굵고 때깔 좋은 것으로 골라 따서 아래위 호주머니에 우겨넣었다. 욕심을 채우려다가 감 하나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때에 느닷없는 인기척을 앞세우며 집주인이 성큼 들어오고 있었다. 그는 나보다 일곱 살 많은 형이었다. 그는 감나무 아래까지 다가와 두리번거리더니 내가 떨어뜨린 단감을 주워들었다. 나는 숨도 쉬지 못하고 나무 위에 얼어붙었다. “누가 감을 따러 왔었나?” 이제 들키는 건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집 모퉁이와 울타리만 빙 둘러보곤 감나무 아래에서 고개를 숙인 채 골똘하더니 총총히 나가버렸다. 나는 한참 동정을 살피다가 감나무를 탈출하였다. 고개 한 번 쳐들었으면 끝장이었을 텐데 그 형의 어수룩함이 나를 살렸다. 집 앞 감나무 밭에 도둑이 들었다며 아내가 설레발을 쳤다. 샤워를 하다가 반바지만 걸치고 랜턴으로 캄캄한 감나무 밭을 휘저었다. 시커먼 물체가 탱자나무 울타리의 틈바구니를 빠져나가 골목으로 줄행랑을 치고 있었다. 나는 푸르스름한 랜턴 불빛으로 도둑의 발길을 어지럽히며 뒤를 쫓았다. 도둑은 골목을 휘돌더니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골목 모퉁이의 헛간이 수상쩍어 불을 비춰보았으나 안쪽 어중에 드럼통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있을 뿐 도둑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발길을 돌리다가 그저 한 소리 던져보았다. “거기 드럼통 뒤에 숨은 줄 다 안다.” 바보도둑이 순순히 정체를 드러냈다. 열일곱 살 도둑은 용서 받았고 훔친 단감도 받아갔다. 나는 기지를 발휘하여 도둑을 잡았고 단감도 안겨 보냈지만 옛 시절의 그 형은 투미하여 나를 찾아내지 못했던 거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뒤에야 나는 그가 나를 가만히 용서하고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영영 모르도록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 소년시절 속에는 ‘말 못하는 할머니’가 있었다. 지금에야 돌이켜보니 ‘벙어리 할머니’나 ‘농아 할머니’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정겨운 말인 듯하다. 또래 아이들이 할머니네 논밭두렁이나 말림갓에서 꼴을 베거나 소를 먹이다가 들키는 날엔 자신의 느린 걸음을 원망해야 했다. 낫과 망태기를 빼앗기고 알 수 없는 괴성에 혼쭐이 났지만 오직 나만은 예외였다. 서슬이 퍼래서 쫓아왔다가도 나를 알아보는 순간 할머니의 얼굴에는 어머니와도 같은 인자함이 넘쳤다. 꼴을 더 베어 망태기를 가득 채우게 하고 해가 떨어질 때까지 소를 뜯기도록 해주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어머니가 할머니의 내력을 들려주셨다. 어느 해 오뉴월 들녘에서 한나절 김을 매고 점심 먹으러가는 길에 할머니와 동행하게 되었고 꽁보리 찬밥 한 덩이 대접한 게 전부라고 하셨다. 할머니는 결코 누구에게 밥을 얻어먹어야 할 형세가 아닌데 그날은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다고 하셨다. 그 일이 있고 나서 할머니는 종종 우리 집을 들러 열무 다발이며 배추포기를 툭 던져놓기도 하시고 호박이나 옥수수를 따서 건네주기도 하셨다고 한다. 할머니 댁에 제사가 있는 날엔 어김없이 떡과 여러 가지 음식을 싸다주셨다. 나는 그렇게 ‘말 못하는 할머니’의 특별한 사랑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농촌의 방학은 연일 일 가운데로 내 옷자락을 끌어당겼다. 여름방학에는 뙤약볕 농사일로 땀에 젖은 무명등거리가 해어지고 퇴비를 장만하고 푸나무를 하느라고 손가락에 생채기가 가실 날이 없었다. 겨울방학은 내내 땔감 마련에 날이 저물었다. 다들 산으로 몰려드니 솔가리는 구경하기 힘들고 검부나무로라도 지게를 채우면 족한 형편이었다. 산에 나무를 하러 갈 때면 나는 오 부잣집 머슴살이 ‘디’를 동무 삼았다. 나와 또래인 디는 상머슴답게 나무하는 솜씨가 뛰어났고 어디로 가야 무난히 한 짐을 해 올 수 있는지 산판을 꿰고 있었다. 나는 푸나무가 무성한 자리를 늘 디에게 양보하였다. 근동의 집집이 땔나무를 하려고 피가 나도록 산판을 헤집어대는 판국이라 해가 기울도록 한 짐을 채우지 못하는 때가 잦아졌다. 그런 날이면 나는 디의 지게를 채워주느라고 쪼그랑이 나뭇짐을 부모님에게 번번이 야단맞았다. 나는 한 번 꾸중 들으면 그만이었지만 디는 남의 집 머슴이었다. 디와 함께 했던 시절은 내 추억 속에 남아 가끔 뜻 모를 자랑으로 다가왔다. 그것은 차가운 보리밥 한 술이나마 대접 받고 보은을 한 ‘말 못하는 할머니’의 삼십 년보다 순전히 베풀기만 한 나의 삼 년이 더 나은 거라는 야릇한 자만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뒤에야 내게는 할머니와 같은 ‘충심’이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골짜기의 맑은 물소리는 산이 깊은 연고이다. (한국수필 11월호) |
| 임재문 | 13-11-10 01:34 |  | 이희순 선생님의 글을 읽으니 저는 어릴적에 비록 농사는 안지었어도 시골에서 살았기에 농가의 일을 벗삼아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저도 그렇게 어릴적에는 보리탕 콩탕을 해먹기도 하고, 입주위기 시커멓도록 먹고, 그냥 남의 무우도 한개씩 서리해서 먹기도 하고 그랬었지요. 지금 생각하면 잘못된 것인데 통상 그시절에는 그렇게 했으니 저도 그랬었던 것 같습니다. 어릴적 추억이 묻어나는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희순 선생님 ! | |
| | 이희순 | 13-11-11 20:53 |  | 선생님의 추억담을 듣고 나니 '무 뽑아 먹다가 들킨 놈'이라는 속담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신세대에겐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이 되어버린 6,70년대에는 콩 서리, 참외 서리에 별다른 죄의식이 없었던 듯합니다. 감사합니다. | |
| | 임병식 | 13-11-10 13:10 |  | 제 작품 서취량에서도 썼지만 전에 사람들은 도둑을 직접 지칭하게나 궁지로 몰지 않았지요. "무슨 인쥐가 손을 댔는지 모르겠네"하는 식으로 은유적인 표현을 쓰곤 했지요. 그분도 결코 모르고서 그러지는 아니했을 것입니다. 각박한 세상을 살다보니 그런 마음씀과 여유가 그리워지기도 합니다. | |
| | 이희순 | 13-11-11 20:45 |  | 선생님 말씀처럼 세상이 각박하다보니 더욱 '주는사랑'이 넘치던 옛 정이 그리워지는가 봅니다. | |
| | 정진철 | 13-11-13 06:34 |  | 이선생님도 맑은 물소리가 나는 분입니다. 위 작품에서 그런 소리를 듣고 향기를 맡습니다. 저는 얼마전에도 시골에 갔다가 남의 밭에서 배추가 너무 잘 여물어서 한개를 슬쩍 뽑은 적이 있었는데. 마침 주인이 그 광경을 목격하고도 아무말을 안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저도 별 죄의식 없이 한짓이지요. 덩치가 커서 그랬는지 아니면 배추값이 형편없어져서 그랬는지. 슬쩍한 저도 주인이 뭐라고하건 말건 별생각없이 그랬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아무런 감정도 없는 주인과 슬쩍맨이었는데 참 재미 없는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선생님처럼 오는정 가는정속에 인생이 아름다운 것인데 말입니다. | |
| | 이희순 | 13-11-15 15:32 |  | 선생님, 옛 시절에 비하면 너무나 각박하고 급박한 세태인 듯합니다. 배추 몇 포기, 무 몇 뿌리야 밭 임자한테 사후통보로 족했던 인정이 그리워집니다. | |
| | 류인혜 | 13-11-17 09:10 |  | 담밖으로 나온 감나무의 주홍색 예쁜 감은 언제나 마음을 유혹합니다. 슬쩍 따내어 한 잎 깨물다가 떫은 맛에 혼이 난적이 있어요. ^^ 잘못을 알면서도 모른 척 덮어주는 인정과 작은 것이라도 베풀어 주는 넉넉함이 그립습니다. | |
| | 이희순 | 13-11-17 17:39 |  | 선생님께서 담밖으로 나온 주홍색 감을 그려내시니 문득 '오메 단풍 들겄네'가 생각납니다. 가을은 어느덧 작별을 고하려고 사립문을 기웃거리는데 인정 넘치던 옛 추억들이 감나무 붉은 단풍되어 장광에 흩날립니다. | |
| | 일만성철용 | 13-11-18 11:57 |  | '창랑정기'를 읽는 기분입니다. 그렇게 아름다운 농촌과 그 추억을 간직하고 사시는 이 작가님이 부럽고 부럽습니다. 저의 어린 시절은 형에게 얻어 맞는 기억밖에 없거든요. | |
| | 이희순 | 13-11-21 00:07 |  | 선생님의 불후의 정열과 탐구정신을 본받습니다. 감사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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