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화된 생활세계를 해방시켜라
하버마스가 보기에 상호이해와 소통을 지향하는 활동이 일어나는 곳이 바로 우리의 일상, 즉 생활세계이다. 우리는 일상에서 주로 언어 활동을 통해서 교감하고 소통한다. 그런데 이러한 교감이나 소통이 가능한 이유는 언어 활동이 수학이나 과학 이론처럼 논리적으로 완전무결하고 체계적이어서가 아니다. 어쩌면 거꾸로 우리는 언어 활동을 통해서 교감과 상호이해의 가능성을 확인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화자가 청자에게 특정한 사실을 억지로 강요하거나 일방적으로 전달한다면 상호이해와 소통의 가능성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따라서 언어 활동은 이미 그 자체에 상호이해와 소통 가능성이라는 이념이 전제되어 있다. 하버마스가 언어 활동에서 주목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실이다. 언어 활동이란 단지 정보를 주고받는 행위가 아닌 상호이해를 겨냥한 소통의 행위이기 때문에 여기에는 가장 완전한 소통과 상호이해라는 궁극적인 목적이 전제될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모든 언어 활동에는 완전한 소통과 상호이해의 가능성이라는 가장 이상적인 소통의 상태가 전제되어 있다. 하버마스의 표현을 빌자면 모든 언어 활동은 ‘이상적 담화(der idealisische Diskurs)’를 전제하는 것이다.
하버마스는 언어 활동이 일어나는 생활세계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왜냐하면 언어 활동을 통해서 추구하는 상호이해와 소통은 강제적이 아닌 매우 자발적인 방식으로 수행되기 때문이다. 물론 현실적으로 볼 때 우리의 언어 활동에는 편견이나 관습 혹은 이데올로기가 은근슬쩍 침투하여 눈에 보이지 않게 우리의 활동을 강제하고 있을 수도 있다. 따라서 하버마스가 관심을 갖는 것은 이러한 강제나 편견으로부터 자유롭게 상호이해에 도달할 수 있는 언어 활동의 보편적인 조건들이다. 그는 성공적으로 언어 활동을 수행할 수 있는 조건들을 다루며 그것을 ‘보편적 화용론’이라고 부른다.
그럼 앞에 언급하였던 그림으로 다시 돌아가보자. 브뤼헐의 〈농가의 결혼식〉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매우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소통하고 있다. 이들의 대화나 행위가 서로 어떠한 연관이 있는지 확실히 결정되어 있지 않고 외관상 뚜렷한 체계도 없지만 질서를 지니고 통합적 체계를 이루고 있음에는 틀림없다. 이렇게 외관상 눈에는 띠지 않지만 자유로운 형태로 존재하는 소통적 합일이야말로 하버마스가 말하는 생활세계의 모습이자 이상적인 언어적 소통일지도 모른다.
반면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그림은 매우 강압적인 방식으로 체계를 이루고 있다. 등장인물들이나 식탁의 위치, 심지어 천장의 격자무늬에 이르기까지 외적인 체계에 의해서 의도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버마스는 이러한 비언어적이고 생활세계 외적인 통합적 기제를 생활세계와 대비하여 ‘체계(System)’라고 명명한다.
하버마스에게 체계와 생활세계는 삶을 합리화하고 통합하는 서로 대립된 질서이다. 여기서 생활세계는 바람직한 질서이며 체계는 바람직하지 않은 질서라는 이분법은 결코 성립하지 않는다. 하버마스는 생활세계 못지않게 체계 역시 사회통합의 질서로서 반드시 필요한 것임을 강조한다. 어쩌면 여기서 하버마스는 도구적 이성이나 강제적 통합 질서를 강력하게 비난하였던 선배 비판이론가와 갈라지는지도 모른다.
하버마스는 자본주의 사회의 강력한 자본의 논리가 체계적인 측면에서 사회를 합리화하는 데 기여했음을 명백하게 인정한다. 다만 하버마스는 자본주의가 발전하고 국가의 행정력이 비대해지면서 체계의 질서가 일상생활 속에까지 침투해버렸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 들면서 국가는 마치 레오나르도가 그림의 구석구석을 미리 체계적으로 분할하고 구성하였듯이 생활세계를 체계화한다.
하버마스는 이를 ‘체계에 의한 생활세계의 식민지화’라고 부른다. 국가는 모든 행위를 효율과 기능이라는 잣대로 사전에 정당화한다. 이러한 강제적 정당화의 기제가 생활세계에 침투할 경우 우려되는 상황은 분명하다. 생활세계를 이루는 언어 활동의 정당성은 오로지 참여한 당사자들의 상호이해를 통해서만 얻어진다. 정당성이 미리 결정되거나 강제로 주어질 때 이는 폭력적이고 기만적인 것이 된다. 하버마스가 보기에 오늘날 가장 시급한 과제 중 하나는 바로 생활세계를 식민지 상태에서 해방시키는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식민지화된 생활세계를 해방시켜라 (보고 듣고 만지는 현대사상, 2015. 08. 25., 박영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