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평 : 5ㆍ31 지방선거 결과와 의미】
『인조반정과 참여정부의 닮은 점』
- 수필가 시인 주현중 -
2006년 5ㆍ31 지방선거 결과에 앞서, 우리민족의 조선조 때의 ‘인조반정’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선조(제14대)의 뒤를 이어 보위를 물려받은 광해군은 당론(黨論)의 폐해를 통감하고 이를 초월하여 좋은 정치를 해보려고 애썼으나, 자신이 대북파의 도움을 받아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당론을 초월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이원익(李元翼)ㆍ이항복(李恒福)ㆍ이덕형(李德馨) 등 명망 높은 인사를 조정의 요직에 앉혀 어진 정치를 행하려 하였으나, 당대의 충신이자 간신이었던 이이첨(李爾瞻)과, 정인홍(鄭仁弘) 등 대북파의 무고로 친형 임해군(臨海君)과 이모제(異母弟)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였으며, 또 계모인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유폐하는 패륜을 자행하였다. 이와 같은 광해군의 실정(失政)이 계속되어 기강이 문란해지자 서인 이귀(李貴)ㆍ김자점(金自點)ㆍ김류(金類)ㆍ이괄(李适) 등은 반정(反正)을 모의, 1623년 3월 21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모든 계획을 추진하였다.
도중에 이이반(李而搬)의 누설로 발각될 위기에 놓였으나 예정대로 거사를 단행하였다. 이서(李曙)는 장단(長湍)에서, 이중로(李重老)는 이천(伊川)에서 군사를 일으켜 홍제원(弘濟院)에서 김류의 군대와 합류하였다. 이 군대를 ‘능양군’이 친히 거느리고 이괄을 대장으로 하여 창의문(彰義門)으로 진군하여 훈련대장 이흥립(李興立)의 내응으로 반정군은 무난히 궁궐을 점령하였다. 이어 왕대비(인목대비)의 윤허를 얻어 능양군(인조=제16대)이 왕위에 올랐다. 광해군은 의관(醫官) 안국신(安國臣)의 집에 피신하였다가 잡혀 서인(庶人)이 되었으며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대북파 이이첨ㆍ정인홍ㆍ이위경(李偉卿) 등 수십 명은 참수되었으며, 추종자 200여 명은 유배되었다. 반정에 공을 세운 이귀ㆍ김류 등 33명은 3등으로 나누어 정사공신(靖社功臣)의 호를 받고 권좌의 요직을 두루두루 섭렵하였다. 그러나 이 논공행상(論功行賞)이 공평하지 못하다 해서 1년 후에 이괄의 난이 일어났다. 반정 후 남인의 이원익이 영의정에 영입됨으로써 남인도 제2의 당세를 형성하게 되었다.
위의 고사古史는 고등교육 이상이거나, 텔레비전을 통해 사극을 즐겨 보았다면 누구나 어렴풋하게나마 아는 이야기이다. 2006년 5ㆍ31 지방선거의 결과와, 현 정권 ‘참여정부와 여당 ’을 ‘인조반정’에 비유하는 것은 너무도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우선 ‘인조반정’과 ‘참여정부’를 잠시 접고, 제10대 임금 ‘연산군’은 폭군이었지만,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제15대)’ 은 폭군은 아니었다는 것도 잠시 떠올려 본다. 물론, ‘연산군’은 모후 윤氏의 한풀이를 한 셈이고, ‘광해군’은 자신이 무수리(궁녀)의 아들이라는 없이 여김에 따른 분풀이를 한 셈이다. 둘 다 흡사하지만 그 질은 전적으로 다르다고 볼 수 있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인조반정’과 ‘참여정부’의 닮은 점을 살펴보자면, 먼저 현직 대통령인 ‘노무현’대통령이 대통령으로 당선되기 이전으로 돌아가서 하나하나 짚어나가야 한다. 지난 2002년 당시 ‘노무현’의원의 당적은 제15대‘김대중’대통령이 창당한‘새천년민주당’이었다. 그러나 대통령 후보 당시 ‘노무현’의원은 ‘정몽준’의원과 후보단일화에 실패를 하게 되었고, 그 이후 대통령으로 당선된 직후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하였다. 당적을 버리는 것은 본인의 고유의사이지만, 그 이후 다시 신당으로 탄생한 ‘열린 우리당’으로 입당하게 되었는데, 오늘 현재의 여당인‘열린 우리당’의 참담한 패배는 이미 그 때부터 예고된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봐야 한다.
‘노무현’대통령이 그 당시‘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한 것은 ‘김대중’대통령의 국민의 정부가 맘에 들지 않아서였다고 봐야 한다. 당시 대다수 유권자들은 비록 최종학력 고등학교라는 결점은 있었지만, 젊고 패기 있고 청렴결백한 인권변호사 출신인 그를 선택하였다. 그러나 대통령 취임 이후‘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하였다가 다시 비슷한 색깔을 띠는 신생정당 ‘열린 우리당’에 입당한 것은 당시 모든 국민으로서는 의아스러워했다. 전 정권과 차별을 두고 뭔가 새롭게 시작하려는, 이를테면 진보적 개혁을 주도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모든 개혁정치라는 것이 물 흐르듯이 수순에 따라 서서히 하여야 뒤탈이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으로 취임하자마자 자신을 대통령으로 만든 ‘새천년민주당’을 헌신짝 버리듯 버리고 ‘열린 우리당’의 선택한 일은 호남권 정서는 물론 영남권 정서까지도 뒤흔들어 놓기에 충분하였다.
개혁정치는 취임 초기부터 흔들리기 시작하여, 결국엔 버린 ‘새천년민주당’과 ‘한나라당’의 역공을 받아, 잠시이긴 했지만 헌정사상 최초로 기록되는 실각失脚을 당하게 되었다. 또한, 국민에게는 크나 큰 실망을 안겨주게 되었으며, 당시 국무총리였던 ‘고건’총리가 대통령권한대행을 맡아, 사실 ‘노무현’대통령보다 더 낮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하였다.
그래도 다수의 국민들은, 이젠 정신 좀 차리고 뭔가 제대로 하기를 학수고대했지만 하는 일마다 실수를 밥 먹듯이 하기에 이르렀다. 국민들에게 직접적인 영향력을 주는 경제정책은 날마다 “좋아지고 있습니다.”라며 국민을 달래려고 노력은 했지만 결과적으로 제14대 ‘문민정부’와 제15대 ‘국민의 정부’때보다 더 못한 일관된 경제정책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개혁이라는 것은 대통령 혼자 밀어붙인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대다수의 국민의 호응을 받아야 되는 것은 지난 역사의 교훈이라는 것을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 2006년 5ㆍ31 지방선거의 결과는 조선조 때의 ‘연산군’이나, ‘광해군’같은 폭정은 아니지만, 그에 못지않은 무능력의 결과이다. 당시 ‘노무현’대통령을 지지하여 주권을 행사했던 많은 유권자들은 수 없이 반복되는 실정에도 초심으로 믿었으나, 믿는 만큼의 3분의 1 정도도 더 이상은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심판한 결과이다. 정부 여당 또한, 여당인지 야당인지 판단하기 어려울 정도의 행보를 보여줌으로서, 이제는 여당이라는 명패마저도 내려야하는 존립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새천년민주당’의 뿌리를 이은 ‘민주당’의 ‘한화갑’당 대표는 지방선거의 결과에 대한 소감을 피력하는데 있어, “이제 열린 우리당은 정리해고 되어야할 당이다.”라고 하였다. 한마디로 ‘봐라!’라는 노대통령으로부터 버림받은 회한어린 말로 해석된다고 볼 수 있다.
그 다음으로 5ㆍ31 지방선거의 결과가 제1야당인 ‘한나라당’의 완승으로 판가름이 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한나라당’이 모든 정치를 잘했다고 평가한 것이 아니다. 정부 여당과 ‘노무현’대통령의 무능력에 실물이 난 나머지 정부와 여당으로부터 등을 돌린 결과일 뿐이다. 이점을 ‘한나라당’이 가벼이 여긴다면, 2007년 대선에서 현재의 ‘열린 우리당’의 전철을 고스란히 밟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깊이 헤아려야 한다. 말 그대로 ‘한나라당’이 차기 집권을 창출하기를 꿈꾼다면 말이다. 또한, 이번 5ㆍ31 지방선거의 결과는 다른 이면으로 생각해 본다면, 대다수 국민들이 정계 개편을 요구하고 있다고 보아야 하며, ‘열린 우리당’역시 이대로 존속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우리 대한민국 국민의 정서는 지나친 보수주의도 바라지 않으며, 지나친 진보주의도 바라지 않는다고 봐야 한다. 거듭 말하면 보수와 진보를 모두 끌어 앉는 정부와 정권을 바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또한, ‘한나라당’이라는 당명이 풍기는 그야 말로 대한민국이 하나의 물결로 거듭나기를 원한다면, 진보적 개혁정치는 하되 현재의 개혁정치는 대대적인 대수술이 요구된다고 보여 진다.
헌정사상 유래가 없는 일개 정당이 90퍼센트 이상의 한 물결을 이룬 선거결과가 한편으로는 썩 개운하지는 않은 게 사실이다. 2006년 5ㆍ31 지방선거의 칼날은 ‘열린 우리당’을 겨냥하였지만, 뒤 이어 날아들 화살은 ‘한나라당’임을 ‘한나라당’은 명심하여야 하리라 본다. 이제 칼자루는 ‘한나라당’과 ‘박근혜’대표에게 쥐어졌다. 그러나 지켜보아야할 칼이다. 5ㆍ31 지방선거의 결과는 조선조의 ‘인조반정’의 성공과‘한나라당’의 지방선거 완승과도 일치하는 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