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6일 기회를 놓치지 말기 전례력으로 마지막 주간을 지내면서 내 지상 순례의 끝과 세상 종말에 대해 묵상한다. 죽음과 세상 종말은 사이비 종교가 사람들을 현혹하는 아주 좋은 소재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동시에 전혀 모른다. 나는 분명히 언젠가 죽어 하느님 앞에 선다. 그런데 그날이 멀지 않음은 알지만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르고, 세상 종말은 예수님도 모른다고 하셨으니 궁금해할 필요도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늘 걷고 내일도 또 걸을 수 있는 힘이다. 그 힘은 하느님이 믿음을 통해 심어주신 희망에서 생긴다. 믿음이 없으면 희망이 없고 희망이 없으면 죽는다. 믿음과 희망의 근거는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과 자비다. 보이는 건 믿음의 대상이 아니고 사라 없어질 것에 희망을 두지 않는다. 나는 참 좋으신 아버지 하느님과 마지막 날에 나를 알아봐 주실 예수님을 믿는다. 그리고 나도 긴 곱슬머리의 청년이 아니더라도 그분을 단번에 알아 뵙게 되기를 바란다.
러시아 대통령이 핵무기 사용을 말하고 지구촌 곳곳에서 보도되는 기후 재앙을 보면 세상 종말이 얼마 남지 않은 거 같다. 하지만 뒤를 돌아보면 세계대전을 두 번이나 겪었고, 수천만 명이 목숨을 잃는 전염병이 창궐했는데도 인류는 멸망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인류 역사가 영원하다는 뜻은 아니다. 그날과 그 시간은 정말 아무도 모른다. 우리는 오로지 지금 여기서 온 누리의 임금이신 예수님이 주신 계명을 나름 충실히 지키고 또 심화해 나갈 뿐이다. 무엇이 그리고 어떻게 하는 게 그에게 좋은 것인지 끊임없이 자신에게 묻고 실천한다. 그러면서 내 이웃 사랑이 바로 나의 하느님 사랑임을 잊지 않는다. 내 이웃 사랑의 성과와 성공 그리고 감사와 보람은 내 관심거리가 아니다. 내 희망은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께 있다.
하느님 앞에 서는 날이 두렵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그 두려움은 무서움이나 공포가 아니라 낯섦이거나 불안이겠다. 여기서는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일이라서 낯설고, 혹시 뭔가 빠뜨렸거나 잘못 알고 있었던 건 아닌가 해서 불안한 거다. 오늘 독서 묵시록은 마지막 날 천사가 다 익은 포도를 수확해서 ‘하느님 분노의 큰 포도 확’에 던져 넣을 거라고 했다(묵시 14,19). 그 확에서 흘러넘치는 포도즙이 세상을 심판할 거다. 이 땅에서 하느님 계명을 충실히 지켜 예수님처럼 아름다운 인간으로 변모한 이들, 의인들이 잘 익은 포도처럼 하느님 품에 안겨서 그렇지 않았던 이들을 심판한다. 라자로가 아브라함 품에 안겨 있는 거처럼 참 좋으신 하느님 품에 안겨 있는 의인들을 보고 그들은 스스로 심판받는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들을 보고 고통스럽게 후회하게 될 거다. 모든 게 다 드러나고 보니 나에게 기회가 수없이 많이 주어졌었음을 알게 되는 거다. ‘내가 왜 그걸 몰랐을까, 왜 안 했을까, 왜 그렇게 인색했을까, 기회가 그렇게 많았는데.’ 하며 아프게 후회하고 괴로워하는 거다. 그런데 그 또한 하느님이 주시는 기회다. 후회와 괴로움이 회개의 시작인 셈이다. 그게 지금 여기서라면 정말 감사할 일이다. 그마저도 안 한다면 그에게는 정말 희망이 없다. 그래서 이를 두고 어떤 사람은 지옥은 비어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 밖에도 알아내지 못하고, 모르고 그랬던 죄까지 모두 용서받는다. 하지만 사랑하고 잘해줄 수 있는 기회를 놓친 건 어떻게 하지 못할 거 같다. 이웃 사랑은 지금 여기서밖에 못하니까 말이다.
예수님, 내일이 세상 끝 날이라도 오늘 사과나무를 심겠다던 한 철학자의 주장처럼 제 삶의 주제는 사랑입니다. 이웃 사랑 특히 내게 보답할 수 없는 이들에게 잘해주는 것, 그것은 아주 좋은 소재입니다. 제 하느님 사랑은 허공을 향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보람 없어 기운 빠질 때 바로 그때가 주님이 제게 가장 가까이 계시다는 걸 깨닫게 해 주십시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제 신앙을 지켜주시고, 주님의 길로 인도해 주소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