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주세법의 변화로 크래프트 맥주(수제 맥주)에 많은 찬스가 이어지고 있는 듯하다. 가격에 세금을 매기는 것이 아닌, 용량에 세금을 매기다 보니 고부가가치 맥주에도 같은 세금이 적용, 크래프트 맥주 등 고급 맥주의 가격이 내려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맥주는 언제쯤 시작했던 것일까?
한국의 맥주는 일제강점기 일본 자본에 의해 시작됐다. 사진은 1970년대 크라운 맥주.
흥미롭게도 조선왕조실록에 맥주가 등장한다. 영조가 금주령의 항목으로 맥주를 언급했기 때문. 하지만 당시의 맥주는 순수한 보리술로 청주에 가까웠다. 지금의 홉이 들어간 맥주 형태와는 완전히 다른 술이라고 볼 수 있다.
현대 맥주의 시작은 신미양요 때로 보인다. 1871년 강화도에 미국 군함 5척이 정박을 했고, 조선과 통상을 요구했다. 이들을 돌려보내기 위한 협상가로 문정관이라는 직책의 하급 관리가 올라가게 되는데, 맥주 대접을 받고 빈 병을 한가득 안고 나온다. 이때가 서양 맥주가 한국에 처음 들어온 공식적인 기록이다.
이후 일본과 불평등조약인 강화도 협약(조일 수호 조규)을 맺고, 일본 맥주가 본격적으로 들어온다. 특히 1900년대 초반부터 눈에 띄는데, 이때 가장 유명한 맥주가 기린 맥주와 에비스 맥주였다.
당시 일본은 대일본맥주라고 해 지금의 삿포로 맥주, 아사히 맥주, 에비스 맥주가 하나의 회사로 통합돼 있었고, 여기에 기린 맥주 정도가 경쟁구도였다.
기린 맥주는 1888년 메이지야(明治屋)라는 거대 유통사와 총판 계약을 맺었고, 한반도에는 1905년부터 진출했다. 이때부터 맥주는 상류층의 향유물로서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당시 한국 맥주는 맥주라는 표현보다는 주로 ‘삐루’(맥주)라는 일본식 표현을 자주 사용했다. 당시의 기록을 보면 맹물(탄산수로 보인다)을 병에 넣고 맥주라고 팔기도 했으며, 독립운동가들이 맥주병에 석유를 넣고 친일파를 처단한 적도 있었다.
일본은 한반도로 본격적인 진출을 위해 맥주 공장을 영등포에 세운다. 삿포로 맥주(후의 조선 맥주)와 쇼와기린 맥주다. 삿포로 맥주는 주로 삿포로 맥주와 에비스 맥주를 만들었고, 쇼와기린 맥주는 이름 그대로 기린 맥주를 만들어 한반도에 유통했다.
역사적 사실을 떠나, 흥미로운 것은 당시 맥주를 판매하고 저장하던 방법이었다. 당시 냉장고가 없었던 만큼 맥주를 시원하게 마시기가 어려웠는데, 이때 알려진 방법은 맥주를 우물에 보관하는 것이었다. 우물은 지하수로 연중 15도 정도를 유지했기 때문에, 여름에는 시원하게 겨울에는 따뜻하게 먹을 수 있었다.
당시 맥주 배달을 할 때는 일명 ‘짝’이라고 불리는 플라스틱 케이스가 없었다. 병끼리 부딪혀 깨지는 경우도 많아, 결국 왕겨를 넣어 파손을 방지했다고 한다. 지금에 비유하면 마치 꽃게를 넣은 박스에 톱밥을 넣는 것과 비슷할 수 있다.
영등포에 있던 삿포로 맥주와 쇼와기린 맥주는 이후 미 군정의 입찰을 거쳐 크라운 맥주(현 하이트맥주)와 동양맥주(OB:Oriental Brewery)로 바뀌게 된다.
결국 한국 맥주의 시작은 슬프게도 일본 자본에 의해, 그것도 일제강점기에 이루어진 것이다. 당시 공장 자리는 영등포 공원과 푸르지오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명욱 주류문화칼럼니스트&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