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8일 영원한 왕국 시민 바빌로니아 제국은 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현재 중동 지역을 지배했고, 이스라엘 민족도 이 제국에 침략당해 온 국민이 노예로 끌려가기도 했다. 영원할 것 같았던 그 제국은 멸망해서 역사책에만 남아있다. 칭기즈 칸의 원나라도, 알렉산더 대왕의 그리스도, 로마 제국도, 천 년의 신라와 500년의 조선도 모두 사라졌다. 강대국 미국도 자랑스러워하는 대한민국도 언젠가는 그렇게 되지 않을까? 내가 속한 수도회도 300년을 넘어 계속 존속하는 건 내 바람일 뿐이다.
반면에 우리 그리스도 왕국은 계속 성장하고 그 영토를 확장해 가는 중이다. 모진 박해에도 사라지기는커녕 오히려 그 영토가 더 넓어졌다. 동그랗게 아름답던 민들레씨가 바람에 날려 다른 곳에 똑같은 꽃을 피우는 거처럼 그 왕국은 지금 나와 내가 사는 이곳을 점령했고 저 멀리 다른 영혼과 지역으로 행진 중이다. 내가 참으로 영원히 속한 곳은 그 왕국, 하느님 나라다. 나는 언어와 문화 그리고 피부색이 달라도 예수님을 형제, 친구, 유일한 스승으로 부르는 하나의 민족에 속한다.
나는 크고 아름다운 잔치에 초대받았다. 신약성경은 이를 어린양의 혼인 잔치라고 부른다(묵시 19,9). 하느님과 내가 결합하는 잔치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 건 아니지만 나를 기쁘게 맞아주는 임금님, 신랑이 신부를 맞는 그 마음으로 나를 반기는 것에 대한 믿음이 커지면서 그 두려움은 점점 힘을 잃는다. 어머니가 마지막 시간에 당신 남편 아버지가 당신을 맞으러 오셨다고 했던 걸 똑똑히 기억한다. 누가 나를 마중을 나와 줄까? 성모님이 어머니 모습으로, 베드로 사도가 아버지 모습으로 나를 인도해 주시지 않을까? 그렇다고 내 삶을 셈하는 자리에 당당하게 앉을 거라는 뜻은 아니다. 그 자리에서 나를 위해 증언해 줄 친구들, 얼굴을 모르는 이들이 많기를 바란다.
죽음이 두려운 이유는 그것이 처음이라서 그런 걸 텐데, 그만큼 외로울 거라는 얘기다. 그때 나와 함께해 줄 이가 정말 아무도 없다. 그래서 임종 때 가족이나 가장 가까운 이들이 그 자리를 지켜주는 이는 참으로 행복하다고 말하는 걸 거다. 하늘이 열리는 그때까지,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는 그 직전까지만, 믿음이 가장 큰 도전을 받는 때라서 기도로 믿음을 북돋아 주는, 뿌옇던 믿음이 확실한 현실이 되는 그 순간까지 나와 함께 있어 준 참으로 고마운 이들이다. 어느 신부는 그 마지막 시간을 잘 맞을 자신이 없어 선종(善終) 기도를 바치기 시작했다고 한다. 동의한다. 고마운 이들이 내 곁을 지켜주지 않아도 십자가에서 홀로 외롭게 돌아가신 예수님을 올려다보며 잘 떠나기를 바란다. 그렇게 지상 순례를 잘 마치고 영원한 왕국으로 들어가게 되기를 바란다. 그때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게 되기를 바란다(루카 21,28).
예수님, 마지막 날이 두려움과 슬픔이 아니라 평화와 기쁨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기서 영원히 살 거처럼 열심히 일하고, 오늘밤이 여기서 지내는 마지막 밤이 되어도 괜찮게 준비하겠습니다.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며 제가 하늘나라 시민임을 잊지 않습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저 자신을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잘 지고 가게 도와주소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