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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반정
세검정(洗劍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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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반정 때 이귀·김류 등이 이곳에 모여 광해군의 폐위를 모의
거사 성공 후 이곳의 맑은 물로 칼을 씻었다 하여 명명된.,세검정.
원래, 1747년(영조 23) 건립된 정자이며 현재 건물은 1977년에 복원.
이 지역은 한성의 북방 인후(咽喉 : 목구멍)가 되기 때문에
조선 영조 때 총융청을 이곳에 옮겨 서울의 방비를 엄히 한 곳.
북한산성 수비 담당 총융청 군사들이 쉬는 자리로 정자를 지은 것.
이곳은 도성의 창의문(彰義門) 밖 삼각산과 백운산 사이에 위치.
주변의 경관이 아름다운 곳으로 탕춘대(蕩春臺)라는 언덕이 있다.
탕춘대는 냇가에 수각을 짓고 미희들과 놀았다는데서.,붙여진 이름.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 기록에 의하면
“세검정은 열조(列朝)의 실록이 완성된 뒤에는
반드시 이곳에서 사초(史草)를 물에 씻어 세초(洗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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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3. 3월.13 밤, 인조반정 진두지휘로 왕이 된 인조.
이귀, 심기원, 최명길, 김자점 등 병력 600∼700명으로
홍제원에 모여 김류를 대장으로 삼고, 능양군(훗날 인조)은
연서역에 나가 장단부사 이서 병력 700여명과 합류하여.,반정.
'단 하룻밤 만의 반란' 인조반정.
광해군에게 호통 치는.,인목대비.
인목대비가 유폐 되었던.,덕수궁 석어당.
반정 이후에도 인조는 분위기가 매우 무겁고
말이 없어 왕이 하루 종일 한마디도 하지 않아
측근 궁녀들도 왕의 목소리를 잘 알지 못할 정도.
인조 재위 동안에 신하들은
왕의 뜻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하여
추측으로 일관하는 일이 잦았다 전해온다.
인조는 글을 잘 지었으나,
신하들의 상소문에 대답하는
비답(批答)도 내시에게 베껴서
쓰게 하여, 필적을 남기지 않았다.
아들과도 거리를 두어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이 장성
출궁한뒤 입궐해 들어오면 시중들던
젊은 궁녀들을 피신시켜 자식 앞에서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는.,인조.
1624년(인조 2) 정월 이괄이 일으킨 반란.,이괄의 난.
인조반정 때 공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2등공신으로 책봉.
평안병사 겸 부원수로 임명되어 외지 부임에 앙심을 품고
사전에 치밀히 계획해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이 종래의 통설.
조선시대 역사 상, 국가가 환란의 위기에 처하면
백성은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지도자나 충신을 따랐다.
하지만, 역사는 그때마다 새로운 인물과 권신들을 등장시켜
구데타를 일으키거나 정권을 교체해 격동의 시대를 엮어내곤 했다.
'선조'에서 '인조'까지 이어지는
조선 중엽의 위기상황이 그러했다.
임진왜란 7년전쟁을 통해
망국 상황까지 몰렸던 조선은
그후에도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국제정세에 어두워 갈피를 잡지 못했다.
임진왜란 참전 후, 국력이 급격히 약해진.,명나라.
여진족의 지도자 누르하치가 세운 신흥강국.,후금.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펼쳤던.,광해군.
그때 광해군은 전후 회복사업을 통해 민생을 챙겼고
명과 후금 사이에서 명민한 실리외교를 통해 약소국이
강대국의 고래싸움에서도 생존할 수 있는 사례를 남겼다.
그러나, 광해군을 보필하던 대북파 신료들이
권력을 굳히려고 잦은 정쟁과 옥사를 일으키고,
영창대군 사사, 인목대비 폐출 등 유교관에 반하는
행위를 부추겨 정적들에게는 반정의 명분을 내주었다.
그무렵, 조선이 임진왜란으로 위기에 처했을때
구원병을 보낸 명나라 재조지은(再造之恩)에 감읍.
조선의 양반사대부들은 소중화의식에 얽매어 있었다.
그리하여,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중립외교로
조선의 국방을 안정시키고,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며
임진왜란 후, 폐허화된 조선을 재건하는데 전념한 광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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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서인을 중심으로 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축출하고 인조를 보위에 올렸기에
장차, 조선은 북방의 환란을 자초한 결과를 초래.
조선은 임진왜란 7년 전쟁 후
또 다시 정묘호란을 겪게 되었고
'이괄의 난'과 '병자호란'을 겪는다.
인조반정에 성공한 공신세력들은
친명배금 정책으로 정묘호란을 야기.
인조 즉위 2년 후에는 '이괄의 난.'을 야기
조선이 병자호란을 겪게된 결과까지 초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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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재평가되고 있는.,
광해군의 치적 & 중립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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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선조 25년)에 일어난 임진왜란은
조선에 엄청난 불행이었지만 광해군에게는
자신의 능력을 선보일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
조선군이 연전연패하면서 북쪽으로 쫓기자
선조는 서둘러 18세의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
그런 다음 선조는 평양을 거쳐 의주로 몽진하는 길에
영변에 이르러서 국가비상사태 때 조정을 둘로 나누는
분조를 행하고 광해군에게 국사를 일부 위임했던 것이다.
바로 그때부터 광해군의 진가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1592년 6월 14일, 분조를 이끌고 의주를 출발한 광해군은
12월 말까지 영변, 운산, 회천, 덕천, 맹산, 곡산, 이천, 성천,
은산, 숙천, 안주, 용강, 강서 등 평안도 지방을 시작으로 함경도,
강원도, 황해도 등지를 옮겨 다니며 의병을 모집하고 전투를 독려.
임진왜란 군량과 마초를 수집하는 등 활발한 후방지원 활동을 벌였다.
이와 같은 광해군의 활약으로
전란 초기 일본군에게 유린되었던
조선군이 항전 태세를 갖출 수 있었다.
그해 7월 광해군은 이천에서 의병장 김천일에게
왜적과 항전을 독려하는 격문을 보냈고, 전 이조참의
이정암에게 황해도의 연안성을 사수하라고 명령했던 것.
이에 따라 이정암은 500여 명 의병으로
5,000명이 넘는 일본군을 격퇴하는 개가.
광해군은 또 명과 일본군의 화의 교섭으로
전쟁이 주춤해진 1593년 10월부터 이듬해 8월까지
명군 지휘부의 요청에 따라 남행길에 올라 무군사(撫軍司)
조직을 이끌며, 충청도와 전라도를 순행하고 민심을 살폈다.
혼란스러운 전장에서 광해군의 활약상을 지켜본 선조는
1594년(선조 27년) 윤근수를 명에 파견해 세자책봉을 주청.
명 예부는 선조에게 장남 임해군이 있다는 이유로 고명을 거부
하여, 광해군에게 세자 자리에서 물러나라고 5 차례나 종용했다.
그것은 명나라 황실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던 후계 다툼 때문.
당시 황제 신종은 정귀비에게 얻은 주상순을 염두에 두고
장자 주상락의 황태자 책봉을 미루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명나라 신료들은 만일 조선의 광해군를 세자로 승인해 주면
신종이 주상락 대신 주상순을 황태자로 책봉할 것이라고 우려.
그런, 상황 속에서도 광해군은 일본군의 철수로 한양이 수복되자
명 요청으로 설치된 군무사 업무를 주관하며 자신의 자리를 지켰고
1597년 정유재란이 일자 전라도를 순회하며 군대를 모으고 군량을 조달.
하여, 조야에서는 광해군이 차기 대권의 주인공임을 추호도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역사는 또 다시 기막힌 상황을 준비해 두었다.
1600년 6월, 의인왕후가 4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선조는 2년 뒤 1602년에 김제남의 19세 딸을 계비로 맞이.
그때 선조의 나이 51세 때였고
인목대비는 광해군보다 어린 19세.
인목왕후는 정국의 핵으로 돌변했다.
젊고 건강한 그녀가 만일 아들을 낳는다면
광해군의 입지가 좁아질 수밖에 없기 때문.
1603년, 인목왕후는 정명공주를 낳고
3년 뒤 1606년 1월, 영창대군을 낳았다.
선조 나이 55세, 인목왕후 나이 23세였다.
그때부터 영창대군을 후사로 삼을 것을 주장하는 소북(小北)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大北)으로 갈라져 조정은 치열한 정쟁.
소북의 영수 유영경은 어린 영창대군에게 하례를 드리기까지 했다.
1607년 10월부터 병석에 누운 선조는 이미
광해군에게 전위하겠다는 비망기를 내렸다.
어린 영창대군으로서는 전란으로 피폐해진
조선의 재기를 도모할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것.
그러자 당황한 영의정 유영경과 소북 대신들은
그 내용을 비밀에 부쳤지만 대세는 이미 광해군.
이듬해 1608년 1월, 자신의 죽음을 예상한 선조는
중신들을 모아놓고 광해군에게 선위교서를 내렸던 것.
그런데 유영경이 이를 감추었다가 대북파 정인홍에게 발각.
그리하여, 유영경의 죄상을 발고하는 과정에서 선조가 운명.
다급해진 유영경은 영창대군으로 후사를 삼고 수렴청정하라고
인목대비를 부추겼지만, 선조의 유명을 중시해 광해군이 즉위한 것.
그렇듯 다사다난한 과정을 거쳐 광해군은 1608년 2월 2일,
34세의 나이로 보위에 올라 파탄지경 국가 재정의 확보에 최선.
그와 함께 2월 23일, 비망기를 내려 당파 대립을 없애겠다고 천명.
‘하늘이 한 세대의 인재를 내리는 것은
그들로서 한 세대의 임무를 완성하려는 것.
그럼에도 요즘 사대부들은 논의가 갈라져서
명목을 나누고 배척하는 데 거리낌이 없다.
이제부터는 피차를 막론하고
어진 인재만을 거두어 시대의
어려움을 헤쳐 나가야 할 것이다.’
광해군은 그런 자신의 의지를 증명이라도 하듯
당시 신망 높던 남인 이원익을 영의정으로 임명.
국방과 외교의 전문가였던 이항복과 이덕형도 중용.
그래서 광해기 치세 초기에는
3인이 번갈아 정승직을 맡았다.
정인홍, 유희분, 이이첨 등 대북파 실세들은
이런 인사에 불만이었지만 광해군의 뜻은 완강.
국방정책 같은 대사는 당파를 떠나 능력 있는 인물에게
맡겨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조정은 이귀, 김류, 정경세 등
서인과 일부 남인들의 연립정권으로., 광해군 재위 때 구성.
당시 조선에서는 나이 지긋한 서인과
남인 원로들이 정승으로서 광해군을 보좌했고,
상대적으로 연소한 북인들은 인사와 언론을 담당했다.
그렇게 해서 조정이 안정을 되찾자
광해군은 피폐해진 백성들을 위로하고
무너진 국가기반을 재건하는데 전력 투구.
아울러, 광해군은 왕권 강화에도 박차를 기울였다.
우선 세자 시절 자신의 앞길을 막았던 유영경을 제거.
유영경은 임진왜란 종전 이후
광해군의 선무공신 책봉에 반대했고,
세손의 원손책봉과 혼인을 지연시켰으며,
선조의 전위를 방해한 죗값을 목숨으로 치뤘다.
이윽고 조정에서는 명에 광해군 즉위를 알리는 사신을 파견.
그런데 명나라는 엉뚱하게도 요동 도사 엄일괴와 만애민을 보내
광해군의 세자책봉과정을 조사했고 왕실에서 막대한 은을 뇌물로 받은
두 사람은 조선 중신들에게 임해군을 박대하지 말라고 종용한 다음 돌아갔다.
그후 광해군은 임해군이 왕위를 집착하자
강화도에 귀양 보낸 다음에, 그를 추종하던
고언백, 박명헌, 운원도정 등 100 여 명을 처형.
몇달 뒤에는 이이첨의 사주를 받은 강화 현감 이직이
1609년(광해군 1년) 5월 3일, 임해군의 목숨을 빼앗았다.
1609년 6월, 명 사신이 광해군 책봉을 허락하는 칙서를 전달.
1611년(광해군 3년), 유림 숙원
사림5현의 문묘종사가 이뤄졌다.
그 과정에서 정인홍이 이언적과 이황의 문묘종사 반대.
사림과 성균관 유생들의 거센 반발을 샀기에 사림과 분란
사람과의 분란은 광해군 정권의 험난한 앞날을 예고하는 것
이듬해인 1612년(광해군 4년)에는 김직재의 옥사가 일어났다.
당시 조정에서 쫓겨난 서인과 소북파는 영창대군이나 능창군을
옹립하려 은밀하게 명에 사람을 보내 세자책봉 과정 재심을 요청.
그 정보를 정적 말살의 계기로 삼은 대북파.
황해도 봉산 군수 신률이 병역을 피하기 위해
어보와 관인을 위조한 김경립을 체포한 다음에
유팽석을 고문해 '김경립의 역모' 자백을 받아냈다.
이어 재차 김경립을 고문하여
팔도에 대장과 별장 등을 정해
불시에 한양을 함락시키고 대북파와
광해군을 축출하려 했다는 자백을 받았다.
그의 아우 김익진에게는
팔도도대장이 김백함이라는
자백까지 받자 그 여파로 김직재와
김백함 부자, 사위 황보신과 일족이
모조리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을 당했다.
결국 고문에 못이긴 김직재는
자신이 역모의 주동자임을 자인하고,
순화군의 양자 진릉군 이태경을 옹립하려
했다고 허위 자백을 하기까지에 이르렀던 것.
이때 연루된 인물로는 연흥부원군 이호민,
전 감사 윤안성, 전 좌랑 송상인, 전 군수 정호선
등 대부분이 소북파 인사들이었고 그 결과 진릉군을 비롯
김직재, 김백함 부자가 처형당하고 100명 소북파 인사들이 된서리
1613년에는 칠서의 옥이 발생하여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이 사사되고
영창대군이 강화도에 위리안치이후 주살.
칠서의 옥이란
조령에서 상인을 대상으로
강도 행각을 벌이다 붙잡힌 강도
박응서 등 일곱 명의 서얼이 김제남과
역모를 꾀했다는 허위진술에 따라 일어난 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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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2년 뒤 1615년
신경희 옥사가 발생했다.
대북파는 능창군이 신경희 등의 추대를 받아
왕이 되려 했다는 죄로 강화도 교동에 위리안치.
능창군은 정원군의 셋째 아들로
임진왜란 중에 죽은 신성군의 양자.
역모의 주인공으로 몰린 능창군은
억울함을 호소하다 자결해 버렸다.
이 사건으로 신경희가 처형되고 양시우,
김정익, 소문진, 김이, 오충갑 등이 유배형.
1617년에는 이이첨과 정인홍 등이 폐모론을 제기
인목대비가 서궁에 유폐고 폐모론을 끝까지 반대하던
이항복, 기자헌, 정홍익 등은 유배형을 당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광해군의 연이은 무리수는
영구집권을 노린 대북파에서 비롯.
그들은 역모를 빌미로 정적들을 제거
권력을 공고히 하려 했지만 지나친 살상과
군주의 패륜을 부추김으로써 결과적으로 민심이
광해군에게 등을 돌리는 부작용을 낳았던 것이다.
광해군의 재위 시절 국제정세는 급변하고 있었다.
명은 당쟁격화와 환관들의 횡포 때문에 국력이 약화.
그틈에 만주에서는 누르하치가 후금을 건국해 세력 팽창.
일본에서는 도쿠가와 이에미쓰가 3대 쇼군이 되면서,
히라도에 네덜란드 상관 설치, 영국과 통상, 개항에 박차.
같은시기에 광해군은 민생을 구제하고 나라를 안정시켰다.
1608년 선혜청을 설치했고,
경기도 일원에 대동법을 실시
민간 세금 부담을 줄여 주었다.
대동법은 왕실이나 관청에 필요한 공물을
백성에게 현물 대신 쌀로 받는 획기적 조처.
1611년(광해군 3년) 양전사업을 통해
경작지를 넓히고 국가재원을 확충했다.
또 왜란 중에 불타버린 창덕궁을 수리하고
종묘를 중건했으며 사고를 비롯한 관청을 재건.
또 인경궁과 경덕궁, 원구단을 짓는 등 왕권을 강화.
하지만 대북정권은 대규모 토목공사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세금을 올리고 은, 목재, 석재 등을 바치는 사람에게 매관매직.
전국에 조도사를 파견해 돈을 긁어 모아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광해군 치세에는 문화 사업도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용비어천가>, <동국신속삼강행실>
등이 간행되었고, <국조보감>, <선조실록>의 편찬되었다.
허균의 <홍길동전>, 허준의 <동의보감>
1616년 유구에서 담배가 들어와 민간에 보급.
1610년 초반, 흩어졌던 여진족의 통합이 가속화되자
광해군은 비변사에 대책 마련을 촉구하고 정보수집활동
1611년에는 과거 누르하치 진영에 포로로 억류되어 있었던
하세국에게 6품직 사과(司果)를 제수했고 그의 여진어 실력과
견문을 활용하여 급변하는 북방의 정보를 입수하기 위함이었다.
광해군은 누르하치를 노추(老酋),
여진족을 견양(犬羊)으로 부르며 멸시
그러나, 그들과의 불필요한 충돌은 피했다.
왜란의 후유증이 남아 있는 상태에서
또 다른 전란을 맞게 되면 조선은 치명타.
광해군은 최악의 경우를 대비
원거리 무기인 조총과 화포 등
신무기 확보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무렵 평지 전투에서 누르하치 철기부대는 적수가 없었다.
이를 직시한 광해군은 침략국이었던 일본과 1609년(광해군 1년)
일본송사약조(日本送使約條.기유약조)를 체결하여 국교를 재개했다.
1617년 오윤겸을 회답사로 파견해
조총, 장검 등을 구입해 오게 했다.
나라의 안정을 위해서는 어제의 적도
오늘의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광해군 생각.
광해군은 병력 확충을 위해 호패법을 실시
하고 수시로 무과를 열어 지휘관을 양성했다.
1622년(광해군 14년) 이후에는 모든 무과 합격자들을
변방으로 배치하고, 향리에 은거하고 있던 의병장 곽재우를
북병사로 제수, 조선 최후의 보루 강화도 정비에 힘을 기울였다.
이 같은 조치는 광해군이 당시
얼마나 북방의 위협에 긴장하고
있었는지를 대변해주는 국방정책.
1616년(광해군 8년) 누르하치가 후금(後金)을 건국.
과거 아구다 금(金)나라 이래 두 번째로 여진족의 나라.
이 소식을 들은 광해군은 국방태세 점검, 대포 주조를 독려.
평양 감사 박엽, 만포첨사 정충신을 임명, 후금 움직임을 주시
그 무렵 후금의 대군은 만주지역을 일통하고
서쪽으로 명나라를 압박하며 세력을 확장했다.
수세에 몰린 명나라는 1618년 윤4월 27일,
병부좌시랑 왕가수의 격문을 보내 원병 요청.
광해군은 명군이 후금을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하고
파병을 거부했지만, 이이첨을 비롯한 비변사 신료들은
명의 임진왜란 재조지은을 강조하며 파병을 적극 주청했다.
그무렵 광해군은 폐모 논의와
궁궐 건설 등 내정의 현안들로 골머리 중
거듭된 명의 압력과 신하들의 주청에 파병을 수락.
1619년(광해군 11년) 2월, 1만 5천 명의 조선군이
압록강을 건너 심양 부근의 사르후 지역으로 출동.
이 원정을 '심하전역' 혹은 '사르후 전투'라고 한다.
광해군은 당시 명군이 동북 오지인 허투알라까지
장거리 원정을 나선 것을 알고 피로에 지친 명군이
조선군을 전투 일선에 배치해 활용하리라 판단했다.
그렇다면 조선군이 억울한 희생양이
될 가능성이 많아 상황을 직시한 광해군.
어전통사 출신의 강홍립을 도원수로 임명해
명군의 명령에 일방적으로 따르지 말고 신중하게
처신하여 일선에 나서 패하지 않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왕명을 받은 강홍립은 군대를 좌우중영으로 나누어
평안도 창성을 출발, 1619년 2월 23일 압록강을 건넜다.
2월 26일 진자두에 다다른 강홍립
광해군의 시전 지침에도 불구하고
초기에 명군 총사령관 양호의 요구대로
화기수 5,000명을 떼어 명군 우익남로군
사령관 유정 휘하에 배속시킬 수 밖에 없었다.
그후 명군의 성화에 못 이긴 조선군은
군량이 떨어진 상태에서 강행군을 거듭해
3월 2일 허투알라에서 60리 사르후 지역에 도착
초전에 조명연합군이 600여 후금군과 싸워 물리쳤다.
3월 4일 부차(富車)에
다다른 조선 파병군은
앞서 갔던 명군 본진이
후금군에게 대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아연 실색했다.
당시 네 개의 부대로 편제되었던 명군이
3월 1일 동시에 허투알라를 향해 출발하기로
약속되어 있었는데, 좌익중로군 두송이 공명심 탓에
일찍 출발했다가 귀영가, 홍타이지, 아민이 이끄는 3만
후금군의 매복에 걸려 궤멸당하고, 뒤이어 마림과 유정 등의
잔여부대도 각개격파 당했기에 조선군 처지도 별로 다르지 않았다.
조선군의 좌우영이 후금군의 철기의 공격을 받아
선천군수 김응하, 운산군수 이계종, 영유현령 이유길
등이 전사하고 진영이 와르르 무너졌기에 중영에 있던
강홍립은 더 이상 전투를 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항복했다.
<광해군일기>에는 당시 후금군이 통사를 보내와 항복을 종용
<만주실록>에는 강홍립이 먼저 사람을 보내 항복했다고 기록.
강홍립은 3월 5일 허투알라로 가서 누르하치에게 무릎을 꿇었다.
명청 교체기에 가장 중요한 일전이었던 사르후 전투 결과
명군은 10만 전사자, 후금군은 200여 명을 잃었을 뿐이었다.
강홍립의 항복소식이 알려지자
조선의 조야는 들끓었고 강홍립의 처자를
죽이라는 상소가 줄을 이었지만, 광해군은 들은 체도
하지 않자 명나라 역시 강홍립이 고의로 항복했다고 의심.
명나라는 서광계를 보내 조선에 재징병을 요구.
그러자 광해군은 원정군으로 후금군과 싸우다 순절한
김응하를 추모하는 사당을 짓고 시집 <충렬록>을 편찬.
조선군이 전투에서 얼마나 열심히 싸웠는지를 내외에 선전.
광해군은 명나라 조정을 달래려고 애썼다.
광해군의 재위 15년 동안에 정권을 장악했던
대북파는 권력유지를 위해 많은 옥사를 일으켰다.
그 때문에 살아남은 정적들은
은인자중하면서 복수를 노렸다.
급기야 1623년 서인인 김류와 이귀, 김자점 등이
과거에 죽은 능창군의 형 능양군과 손잡고 인조반정
대북파를 제거하고 광해군을 폐위시키는 데 성공했다.
반정 명분은 광해군이 명나라에 대한 사대를 거부했으며,
형제 영창대군을 죽이고 계모 인목대비를 폐모하는 등 패륜.
하루 아침에 임금에서 왕자로 강등된 광해군은 강화도에 유폐.
당시 인목대비는 아들 영창대군을 죽이고
친정을 멸문지화시킨 광해군에게 원한을 품고
광해를 죽이고자 했지만, 보위에 있었던 사람을
함부로 죽일 수 없다는 인조의 만류로 분루를 삼켰다.
그후 병자호란의 패배로 삼전도의 치욕을 겪은 인조는
혹시 모를 청의 광해군 복위를 염려하여 제주도로 이배.
광해군의 아내 유씨는 광해군과 함께 귀양보내줄 것을 요구.
그러나, 거절당한 뒤 1년 7개월 뒤
1624년 10월,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유씨는 인조반정이 일어났을 때
창덕궁에 몰려든 반란군을 향해
엄중하게 힐난했던 여걸이었다.
“오늘의 거사가 대의를 위한 것이오,
아니면 일신의 영달을 위한 것이오?”
그후 광해군은 피붙이 하나 없는
제주에서 홀로 쓸쓸한 말년을 보내다
1641년(인조 19년) 7월 1일, 67세에 운명.
당시, 조선의 피폐한 민생에 한 줄기 희망을 뿌렸던
조선의 빛은 그렇게 제주에서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광해군은 즉위한 뒤 명나라와 후금 사이에서
어느 한편을 들지 않고, 조선의 사정에 맞추어서
실리를 취한 외교정책을 취한 중립외교(中立外交).
훗날, 인조반정의 빌미가 된
광해군 재임 때 중립외교 정책.
'선조'에서 '인조'까지 이어진
임진왜란,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
조선 중기의 위기상황을 겪는 동안에
조선 8도, 도서지역, 해안가에 군마를 사육.
조선은 왜 국운을 걸고
당시 군마를 사육한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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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인간과 가장 친숙한 동물 중 하나.
구석기시대까지는 사냥감에 불과했지만
신석기시대부터는 인간과 함께 살기 시작.
BC 4000~3000년경 유라시아에서 군마 등장하였다.
BC 2000년 경에는 전차가 등장하였고, 말안장이 고안.
세계 역사 상 군마(軍馬)가 근대사에서는 탱크 역활.
그뒤로 말은 교통, 통신수단으로, 밭갈이용 가축으로,
전투에서는 군마로 때로는 식용으로 인간의 삶에 기여.
세계 역사 상 군마는 기동력과 파괴력을 겸비한 전쟁도구.
군마(軍馬)가 탱크 역활을 하였기에
보병보다 한발 앞서 적진을 휘저었으며
빠른 기동력으로 적의 측면과 후미를 공격.
전쟁이 일상화 되었던 고대 사회에서는
승마나 마술에 능하다는 것은 대단한 능력.
말타고 사냥, 마술 등을 그린 고구려 고분벽화.
고구려인들은 말을 타고
활을 쏘는 능력이 탁월하여
인접국들이 벌벌 떨며 눈치를 봤다.
조선시대에도 국방강화와 교통, 통신,
농경의 필요성으로 군마를 사육하였다.
마장(馬場)은 전라도나 경상도에도 설치하였지만
대부분 경기만 일대의 도서지역이나 해안에 많았다.
'세종실록지리지'-전국에 53개 마장(馬場)이 있었다.
병자호란 뒤 북벌을 준비하면서 약 180여 개 목장 증설.
1678년 허목이 제작한 목장지도에는 '폐목장 63개를 포함
전국 8도에는 약 200여 개의 목장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목장에는 주로 말을 사육하였지만
경기만 일대에서는 소나 양, 돼지도 사육하였다.
이는 궁궐이나 상류층들의 식용을 위해 사육한 것.
조선시대 마장은 사복시 소관이었다.
마장 관리를 위해 감목관을 파견하였다.
또 목장전을 지급하였으며 목장 주변 백성들에게
목부(牧夫) 역(役)을 부과해 운영에 차질없도록 한 것.
홍원리 홍원마장
원정리 괴태마장
평택지역에 포승읍 홍원리 홍원곶과
원정리 괴태곶에 목장이 설치되었다.
현덕면 장수리에도 목장이 있었다고 전해오나
고덕면 해창2리 마분마을, 남산리 등 말 무덤 뿐.
홍원목장과 괴태목장 설치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는 15세기 후반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 수원부편과 양성현편에 나오고 있어
세종실록지리지에 수록된 53개 목장에 포함되었을 것.
목장은 바다 쪽으로 돌출된 반도를 가로질러
길게 성벽을 쌓은 뒤 말이나 소를 방목하는 형태.
때로는 일렬로 빽빽하게 나무를 심기도 하였고,
성벽 위에도 촘촘히 나무를 심어 말들이 가두었다.
홍원목장과 괴태목장에도 마장에 성벽이 축성되었다.
홍원목장의 성벽은 처음에는
홍원리 외원마을과 자오마을 사이에
쌓았다가 나중에 낡은성 마을 쪽으로 옮겼고
그후 학현리에서 석정리 감탕개까지 8㎞ 장성(長城).
괴태목장에도 지금은 포승국가공단에 수용된
원정리 옛 곡교마을에서 반대편에 있는 도곡리
당두마을까지 곶(串)을 가로질러 성벽을 쌓았다.
이 토성은 1990년대 중반 시민단체의
우리고장 문화유산지키기운동의 성과로
도곡리 포승국가공단 안에 일부만 이전복원.
목장은 조선 초 만해도 대부도의 대부목장 감목관이
홍원마장과 괴태마장을 관할했으며 그러다가 양난 후
홍원목장에도 파견되어 괴태목장까지 관할하게 하였다.
목장에는 좌지전(坐地田) 182결
원전답(元田畓) 76결 49부 6속을
목장전으로 배정, 목리(牧吏) 3명과
목부(牧夫) 75명을 배속시켜 관리했다.
홍원목장에 감목관이 파견된 시기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경종3년(1723) 여름 사헌부 지평 심준이 “본래 홍원목장은
대부도 대부목장 관할 일때만 해도 백성수탈이 거의 없었다.
목관(牧官)을 설치하고 별도의 아문을 세운 뒤에는
수탈양이 백배나 되니 목부들이 못견디고 흩어졌다.
또 감목관이 목초지 풀을 베고 땔나무 하는 일을 금한 뒤
소금구울 땔감으로 사용하여 폐단이 심하니 감목관을 폐지.
전처럼 대부목장에 귀속시켜 달라”는 상소문을 올린 것으로
봐서는 대략 효종, 현종 때쯤에 파견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감목관은 사복시에서 파견했기에 파원(派員)이라 불렀다.
파원(派員)은 갑오개혁 뒤에는 내장원이나 궁내부에서 파견.
홍원리 감당골 이씨 할아버지는 자신의 조부가 이파원이라 주장.
파원(派員)이란 직명(職名)이 생소하여
‘감목관이 아니던가요?’ 라고 물었지만
자신은 ‘파원(派員)’이라고 들었다 했다.
파원은 1900년 궁내부에서 파견된.,이동우.
이동우는 전임 파원 김석규가 비리로 파직 당하자
파견되었는데 을사조약 후 나라가 망하자 홍원리에 정착.
마장에 소속된 목부(자)들의 삶은 고달팠다.
조선시대 국영마장의 규율은 매우 엄격하였다.
말이 도망가거나 운송 중 죽으면 벌받거나 변상.
마장의 백성들은 신분적으로는 양인이었지만,
하는 일이 천하다고 하여 사회적 차별을 받았다.
더구나 가렴주구 감목관이라도 만나면 고역은 가중.
감목관의 가렴주구는
경종3년(1724) 심준의
상소에도 잘 나타나 있다.
심준은 홍원목장에 감목관을 설치하면서
관리들이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근거 없는
조세를 징수하기도 하고, 목장에 염전을 설치.
'소금을 구워 이익을 취한다.'고 보고하고 있다.
관리들의 가렴주구는 근대 이후
국영목장 폐지과정에서 더욱 극심.
근대교통과 무기가 발달하면서 국영목장들이 폐지
목부들이나 주변 백성들은 살아갈 길이 막막하였다.
대부분 얼마 안 되는 목장전을 경작해 먹고 살았지만
소작료가 턱도 없이 비싸서 이것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더구나 대한제국시기 국가기강이 문란해지면서
전직관료나 궁내부 파원들의 수탈과 횡포까지 겹쳐
마장 주변에 살았던 백성들은 곤란한 처지에 빠졌다.
광무4년(1901)에는 본래 백성들의 소유였다가
목장을 조성하면서 빼앗겼던 토지를 갑오개혁 때
목장이 폐지되면서 다시 돌려받았던 백성들이, 2년뒤
궁내부와 탁지부가 본래 목장전이었으므로 둔토라고 주장.
조세를 징수하자 내장원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한 일도 있었다.
국가기강이 헤이해진 틈을 타서
전직관료와 궁내부 파원들이 손잡은
수탈도 백성의 삶을 곤궁에 빠뜨렸다.
궁내부 파원 김석규는 조세 과다징수
절반은 상납하지 않고 착복하였으며,
목장전의 도지(賭地)를 납부하였는데도
내지 않았다며 백성들을 구금하는 등 횡포.
백성들이 집단소송을 제기하여 파직당하였다.
이처럼 국가기관과 관료의 부당한 수탈은
백성들의 공동대응으로 대부분 해결되었다.
백성들은 목장을 만들면서
빼앗겼던 토지를 상당부분 되찾았으며,
목부 역(役)에서도 벗어나 신분은 양인이었지만
사회적으로는 차별을 받았던 억울함을 덜게 되었다.
해방 뒤에는 전쟁피난민들과
대청댐 수몰민들로 인구가 증가.
홍원리와 옥길리 사이의 연백사업장과
호구포 일대의 간척사업으로 경작지 확대.
괴태목장 터였던 원정리 번제마을 머물마을,
도곡리 당두마을 일대에도 염전이 개발되었고
근래에는 포승국가공단과 해군제2함대사령부가
자리를 잡으면서 목장의 흔적은 온데간데 없어졌다.
광해군의 유배생활.
임진왜란(1592년)으로 피폐해진 조선을 재건.
조세와 민생의 안정을 위해 대동법을 실시하고,
욱일승천 성장하는 후금 침입을 걱정했던.,광해군.
명나라 모르게 누르하치와 친선도모 중립외교.
무릇 국가 지도자가 가져야하는 확고한 정치이념
백성의 복지와 국가의 안위를 지키기 위한 15년 재위.
심지어, 명나라 요청으로 동원된 조선군이
후금과 싸우러 가서는 촉을 뺀 화살을 쏘며
싸울 의사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권신 그대들이 부르짖는 사대주의
그 사대의 예를 갖추고 지키는 것보다는
내 나라 백성들의 안위가 나는 더 중요하오." -광해 -
광해군(1575-1641, 재위1608∼1623)
소현세자(1612~1645)는 동시대 인물.
두 인물은 나이가 한 세대 정도 차이 나지만,
서로에 대한 소식을 몰랐을 리 없었을 것이다.
광해군이 유배생활을 하다 죽은 해가 1641년이다.
광해군은 1623년 인조반정 후 약 20년을 더 살았고
소현세자는 병자호란(1636년) 다음해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갈 때까지는 조선 땅에서 청소년~ 청년기를 보냈다.
소현세자는 보고 겪었던
인조반정과 광해군의 유폐,
정묘호란(1927년), 병자호란.
광해군과 소현세자., 두 인물.
명분만 찾는 보수적 사대주의자가 아니라
시대정신의 변화를 추구하는 개혁주의자 였지만
숭명배금(崇明排金) 권신들에게 제거당한 것 아닐까?
소현세자는 청나라 수도 심양에 인질로 있으면서
포로 송환문제도 다루기도 했고, 조선의 부녀자들이
그곳 시장에서 매매되고 성노리개로 전락한 꼴도 목격.
호란(胡亂)으로 인한 백성의 피폐를 걱정한.,소현세자.
청(淸)나라에서 인질로 있으면서 신부 '아담 샬'에게서
서양의 천주교와 조선보다 훨씬 앞선 과학문명을 배웠다.
특히 역법에 관심을 많이 가져
동서양의 역법이 크게 다른 것과
조선의 천문학이 초보단계임을 자각.
명이 멸망하자 귀국한 소현세자는 대청외교를 담당.
청의 힘을 보아왔기 때문에 청과의 타협을 추구하였고
서양문화를 수용하기에 이르렀지만 보수주의자들이 배척.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농성하다가
삼전도에서 청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땅바닥에 엎드려서
세 번 절, 아홉 번 머리를 조아려.,삼배구고두례(三排九鼓頭禮)
삼전도 굴욕의 치욕적인 기억을 가지고 있던 인조에게
소현세자의 청나라에 대한 인식은 달가울 리 없었을 것.
1644년 명을 멸한 청이 9년만에 소현세자를 귀국시킨 일.
인조가 요청하지 않았는데 억류된 세자를 풀어준 청나라.
혹시, 청나라가 소현세자를 왕위에 앉히려는 음모 아닐까?'
서양의 수많은 선진문명 서적과 물품들을 들고 귀국하여
조선을 새로운 국가로 만들 꿈에 부풀어있었던.,소현세자.
인조는 밀정을 통해 소현세자가 청태자와 친한 사실을 간파.
청나라에게 반청파로 낙인 찍힌 인조는 이미 병든 몸.
소현세자가 청나라 사정과 서양문물에 대해 이야기하며
서양의 책과 기계를 보여주자 벼루를 들어 내리쳤던.,인조.
소현세자의 진보적인 행동은
철저한 사대주의에 빠져있던 인조와
서인(西人)세력에게는 두려움을 불러 일으켰다.
소현제자는 귀국한지 석달 만에 병들어 죽었다.
그뒤로,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조선에 파다했다.
봉건시대 국가 흥망성쇄는 왕 중심으로 이끌어간다.
광해군이라면 능히 병자호란을 막아낼 수 있었고
소현세자라면 보다 새로운 청나라의 문물을 받아들여
조선의 중흥을 뒤쳐지지 않게 이뤄낼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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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해금정책과 공도정책으로 폐허화된 도서지역.
제주도는 한번 들어가면, 살아나오기 어려웠던 유배지.
1641년 유배생활 18년 만에 향년 67세로 운명한.,광해군.
왕권정치를 확립하려다 권력 대신들에게 밀려 폐위된 왕.
폐위된 후, 18년 간 왕위를 되찾으려는 온갖 노력도.,수포.
조선 역사 상 가장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운명한 비운의 왕.
폐위되어 한양에서 강화도로 다시 제주로 가는 유배길.
'광해군 가족도 풍랑에 시달리고 뱃멀미에 시달렸으리라.'
한 배를 탔어도 중죄인은 가족 상봉이 허락되지 않는 뱃길.
그러나, 예외적으로 광해군 부부와 세자 부부는
궐과 동궁전에서 거느리던 몇몇 상궁 나인과 함께
제주 위리안치 유배를 함께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제주 도착 후, 광해군 일행들은 유배지까지 160리 길을
목에 칼을 차고 짚신만 신은채 꼬박 이틀간 걸어야 햇다.
겨울철이라 따뜻한 물을 구하지 못해 소변으로 세안했다.
이때 광해군에게 불만을 터뜨린.,상궁.
"폐주가 유배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우리는 무슨 죄로.,이 고생을 해야한단 말이오?
주인을 잘못만난 죄밖에 더 있오. 말좀 해보시오."
"광해군은 당돌한 상궁의 불평불만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고개 숙인채
나무라지도 못하며 가만히 있었다." 전한다.
유배지에 당도할 때까지
밥도 주지 않아 굶어야 했던
광해군 일행의 제주도 유배길.
광해군이 폐위된 이후에, 그의 가족들은
비참한 생활을 하다가 두달 만에 생을 마감하였고.
광해군 부부 일행은 강화도에서 제주도로 이배 중이었다.
일행 모두 숨이 겨우 붙어있어도 어차피 죽을 목숨.
이미 모두 죽을 고생을 겪은 후라 반 송장 같은 상태.
일행 모두 모진 목숨으로 사느니 차라리 죽고 싶은 심정.
이는 인목대비의 철저한 복수심의 표출과
인조반정 세력의 목적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폐위된 광해군 & 폐비 윤씨,
폐세자 질 & 폐세자빈 박씨.
4사람은 강화도에 위리안치.
4사람을 강화도에 유폐시킨 까닭은
그곳이 감시하기 용이한 곳이기 때문.
반정세력은 4사람을 한곳에 두지 않았다.
광해군과 페비 윤씨는 강화부 동문 쪽에
폐세자와 폐세자빈은 강화부 서문 쪽에 안치.
폐세자 부부는 위리안치 두달만에 각각 운명한다.
당시 20대 중반이었던 폐세자 부부는
아마 강화도 바깥 쪽과 내통하려고 한듯.
그런데, 자살하는 과정이 몹시 기구하였다.
.
세자 질은 강화 유배지 집담 밑에 구멍을 뚫고 탈출 시도.
세자 비는 울타리 위에 올라가 망보다가 추락 후 자살한다.
남편이 탈출하다가 잡히자 더 살아갈 희망이 없었기 때문이다.
..................'세자 질'.,탈출 사건...............
세자 부부는 강화 적소에 위리안치되어 15일간
물도 마시지 않고 수의까지 만들어 놓고 죽을 각오.
그래도 목숨이 끊기지 않아 세자빈은 목을 매 자살기도.
마침, 여종이 들어선 발견해 가까스로.,회생.
어느날, 한양에서 보내온 인두와 가위를 받고
탈출을 결심하고 26일 동안 70척 땅굴을 파냈다.
세자는 땅굴을 통해 위리안치 적소를 벗어나
배로 탈출하려다가 실패 후, 마니산으로 향했다.
그곳 탈출이 여의치 않자 가야산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러나, 산속에서 방향감각을 잃고 헤메다가
나졸 최득룡에게 발각되어 체포당하고 말았다.
이때 나무 위에서 망보던 세자비는 놀라 실족한다.
그리고, 절망상태에서 식음을 전폐하고
3일 후에 스스로 목을 메어 자살을 했다.
세자 빈의 최후가 안타까웠는지 호조에서는
옷과 이불을 내려 염습하게 하고 빈소를 차렸다.
세자 질은 한달 후, 사약을 받고.,향년 26세에 운명.
.......................................................................
폐사자 질이 붙잡혔을때 그의 손에는
'은덩어리, 쌀밥, 황해감사에게 보낼 편지.'
짐작컨데 은덩어리 뇌물로
강화도를 빠져나가려 했던듯.
황해감사에게 보낼 편지는
광해군과 자신을 옹호하는 세력들과
힘을 합쳐 반정 세력을 몰아 내려한.,시도.
이 때문에 인목대비와 반정세력은
페세자 '질'을 죽이기로 결정하였고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질은 자살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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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복 많은 세상 일이 파란 같으니
시름 근심 부질 없어 마음 한가해
이십 육년은 참으로 한바탕 꿈이니
기꺼이 흰구름 사이로., 돌아가리라.'
'폐세자 질'이
강화로 유배될때
나룻배에서 지은 시'
세자 부부의 죽음은 광해군 부부에게도 전해졌다.
그 소식을 들은 '광해군의 유씨 부인은 충격받았다.
그리고나서, 유씨 부인은 시름시름 앓다가 운명한다.
광해군이 페위되자, 궁궐 후원에 이틀간 숨어 있으면서
인조반정이 종묘사직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몇몇 권신들이
부귀영화를 위한 반정이라 비판한 적도 있었던.,유씨부인.
그만큼 그녀는 성리학 사상에 기반을 둔
가치관이 분명하고 뚜렸하였던 여자였다.
광해군은 유배생활 1년 반 뒤 유씨부인과도 사별하게 된다.
유씨부인은 자신이 당한 현실이 믿어지지 않아 홧병으로 운명.
광해군 일가 중 무사했던 사람은 박씨 가문으로 시집간 옹주 뿐.
하지만, 광해군은 초연한 자세로 유배 생활에 적응 .
이 과정에서 몇 차례에 걸쳐 죽을 고비를 넘기게 된다.
광해군에게 아들을 잃고 서궁(덕수궁)에 유폐된 인목대비
반정 공신들은 호시탐탐 그를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
영의정에 제수된 남인 이원익과 광해군 파 관리들.
결사적으로 반정세력의 광해군 살해 기도를 막는다.
1624년 이괄의 난, 1636년 병자호란 때도 죽음의 위기
인조는 삼전도 수모를 겪은 후, 광해군을 제주도 적거지로 유배.
'절해고도' 적거지에 탱자나무 가시덤불 울타리 안으로.,위리안치
광해군의 복위에 위협을 느낀 나머지 그가 절로 죽게 하려 작심한듯.
.
강화에서 교동으로
교동에서 태안으로
태안에서 다시 강화로
강화에서 제주도로 이배.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인조는 광해군의 재등극이 염려스러워
태안으로 이배시켰다가 난이 평정되자 다시 강화도.
1636년에는 청나라가 쳐들어와
광해군의 원수를 갚겠다고 공언하자
조정에서는 또다시 그를 교동에 안치시켰다.
이때 서인 계열 신경진 등이 경기수사에게
그를 죽이라는 암시를 내리지만 경기수사는
이 말을 따르지 않고 그를 오히려 보호하였다.
이듬해, 조선이 완전히 청에 굴복한 뒤
광해군의 복위에 몹시 위협을 느꼈던 인조는
그를 저절로 죽게하려고 제주도로 보내 위리안치.
1575(선조 8)~ 1641(인조 19).
조선 제15대 왕(1608~23 재위).
빛 光, 바다 海, 임금 君.,광해군.
수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며 모진 목숨을 이어갔다.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아내를 차례로 잃은.,광해군
18년의 유배생활은 수모와 모멸로 이어진 기나긴 세월.
광해군으로 인해 아들을 잃고 서궁에 유폐되었던
인목대비가 끝까지 그를 죽이려고 혈안이 된 때문.
그리고, 인조 추종세력도 항상 광해군을 죽이려 시도.
1624년 이괄의 난 때., 광해군의 재등극을 우려
그를 태안으로 옮겼다가.,다시 강화도로 데려왔고
1636년 침공한 청태종이 "광해군의 원수를 갚겠다." 공언.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 때문이리라.
백일천하 경복궁 점령 후, 제압당한 반정군.
그당시 군 분열로 조선 국방력은 급경히 약화.
'이괄의 난'에 동조한 일부 군사들은 청으로 망명한 탓.
청태종과 함께 조선으로 처들어와.,광해군 재옹립을 시도.
청 사신은 툭하면 '광해군 재옹립' 엄포로 인조 정권을 압박.
청나라는 '광해군 재옹립' 히든 카드로
인조 정권 조선으로부터 실리를 취한 것.
그 바람에 인조는 재위 내내 피가 말랐다.
간, 쓸개까지 청나라에 모두 내줬어도
끊임없이 무리한 요구를 해온.,청 사신.
그로 인해, 조선의 재정은 바닥이 난 상황.
청나라의 무리한 전쟁배상금 요구에 못이겨
공녀 착출로 전쟁배상금 일부를 대신한.,조선.
그 빛을 다 갚을 때까지 공녀를 보내야만 했다.
백성들은 전란에 시달리고
굶주림과 가난에 시달려야 했고
더구나, 끊임없이 공녀로 차출되는 딸.
가족들과 생이별을 힌후
환향녀로 돌아왔을 때에는
이미 망신창이가 된.,버린 몸.
일정한 의무기간을
채우고 돌아오면 또 다시
돌아온 환향녀의 숫자 만큼이나
다시 보내야 하기에.,악순환의 반복.
그로 인해, 민심도 이미 그를 떠났고
그가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것 처럼
언제 다시 반정군이 처들어올지 모를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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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자다가도 꿈에 벌떡 일어나, 놀랐을.,인조.
"광해군의 원수를 갚겠다.".,청태종의 그말 한마디.
그무렵 어쩔 수 없이 삼전도의 수모를 겪어야 했던.,인조.
추운 겨울에 남한산성에서부터 맨발로 걸어나와
청태종이 보이는 곳에서부터는 3걸음마다 3번씩 절.
머리를 언땅에 피나도록 부딪치며 머리를 조아린.,인조.
'청태종이 앉아있는 권좌에서 "쿵"소리가 들리도록~'
형식 상, 항복 의례였지만, 사실은 목숨을 구걸한.,행위.
조선왕조실록에는 사실을 기록할 수 없었던.,삼전도의 수모.
그것도 청태종이 많이 양보한.,항복의식.
처음에는 그보다 훨씬 더 강경한 요구였다.
"조선 왕은 수의를 입고 등에 관을 메고 오라."
"죽이고 살리는 것은
만나서., 결정하리라."
인조의 치욕적인 삼전도의 수모 때문에
조선왕실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삼전도 비문을 쓴 이경석(李景奭:1595~1671).
"글을 배운 것이 차라리 후회스럽다."
청나라는 삼전도에 승첩비를 세우겠다며
조선의 조정에서 비문을 지어 바치게 했다.
조선의 기개 높은 선비들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할 정도.
인조반정 공신들까지도
청나라 눈치를 살피느라고
광해군 처형을 결사 반대할 정도.
삼전도의 수모때 청태종이
인조반정 공신들에게 한 말.
"너희가 이들을 알고 있느냐?"
광해군때 북방 수비를 맡았던.,무장들.
조선 개국 공신들이었던 귀순 여진족 후예들.
청태종을 도와 청나라 건국에도 일조한 무장들.
'이괄의 난' 이후 청나라에 투항.
다시 조선을 침공한.,반란 세력들.
'인조반정 공신들도 두려웠으리라.'
'나라 안밖으로
이럴 수도 없었고
저럴 수도 없던.,인조.'
'광해군을 제주도 탱자나무 가시 울타리에 가뒀지만
정작 인조는 '가시방석' 보위 위에 앉은 느낌이었으리라.'
왕명을 내려도 청나라 눈치를 보느라 따르지 않는 신하들.
인조는 광해를 죽이라는 밀지까지 내렸지만 경기수사가
이 말에 따르지 않아 광해군은 죽음에서부터 풀려났으며,
조선이 청에 복속된 이후 아예 제주도로 보내졌던., 광해군.
'제주도로 유배된 광해군 스스로
하루 속히 죽어 주기만 기다릴뿐..'
광해군은 자신을 데리고 다니는 별장이 상방을 차지하고
자기는 아랫방에 거처하는 모욕을 당하면서도 의연한 태도.
심부름 나인이 "영감"이라 부르며 멸시해도 굴욕을 참아낸다.
광해군은 초연하고 관조적인 태도로 18년 귀양살이를 일관.
그 기나 긴 세월 동안 복권 기회가 주어질지도 모른다는 일념.
그러나, 애석하게도 1641년 67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한 광해군.
죽기 전 어머니 공빈 김씨 묘 발치에 묻어 달라고 유언.
조정은 그 유언에 따라 어머니 묘 아래 오른편에 묻었다.
그리고 박씨 집안으로 출가한 서녀 자손이 보살피게 했다.
박장원에게 시집 간 옹주는,
광해군 폐위 후 서민으로 전락.
'자신이 비밀리 파견했던 강홍립. '
'자신이 무척이나 아꼈던.,총신 허균'
'그들을 저승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광해군은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도
언제 들이닥칠지 모를.,
눈앞에는.,죽음의 그림자.
그 앞에서 어떻게 초연한 삶을 살았던 것일까?
자신이 재위때 펼친 정치에 대한 자신감 때문일까?
아니면, 복권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치 않았던 것일까?
인목대비는 끝까지 광해군을 죽이려 했지만
번번히 반정공신들의 반대에 부딪쳐 실패한다.
오히려, 광해군보다 9년 먼저 세상을 뜬.,인목대비.
1641년 7월 1일,
제주도 대정리 적거지에서
광해군은 위리안치 유배 중.,운명.
탱자나무 가시 울타리가 하늘을 덮고
햇볕을 막아 그늘지고 눅눅한 초가에 갇힌채
집안에 갇혀서 밖에도 못 나가는 상황에서 운명.
'67세를 일기로 천수를 다했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은듯.
제주 목사 '이시방'이 열쇄를 부수고 들어가 예를 다해., 염
조정 인조의 충신들은 이시방의 행위를 '잘못된 일'로 규정.
광해군의 사망 소식을 실은 1641년 7월 10일의 <인조 실록>
광해군이 교동에서 제주로 옮겨갈 때에 지은 시 한 편을 소개
"이때 듣는 이., 모두 비감에 젖었다" 며., 운명한 광해군을 추모.
...........제주도 대정현.,광해군 적거지............
제주도에서도 바닷가와 가깝고 지형이 낮은 대정현 동문 안
장독(축축하고 더운 땅에서 일어나는 독기) 기운이 극심한 곳.
피와 살로 된 몸이 썩어 문드러지지 않고 버티기 어려웠던 듯.
8월 초순까지 음산한 비가 연일 내리고 사나운 바람과 안개 등
습기가 많아 옷, 재물, 곡식이 여름철만 지나면 썩어 무용지물
집이 낮아 바로 서기 어렵고 방도 좁아 무릎 추스르기 버거웠다.
온돌 연기와 그을음으로 의관이 더렵혀져 기거하기 힘든 환경.
집 동북쪽 모퉁이에는 '곡식 저장소' 목두(木豆)와 변소를 설치.
탱자나무 가시울타리 남쪽 문은 출입구, 서쪽 문은.,음식 배식구멍.
가시울타리는 4~5길 높이이고 둘레가 무려 50자.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의 오빠는 1776년 9월 흑산도로 유배
가시울타리 높이가 3길이며 4겹의 가시울타리를 쳤다고 한다.
가시울타리 높이 5~6m, 둘레가 12~13m 정도였음을 알 수 있다.
"가시가 처마까지 닿아
햇빛이 전혀 들지 않아
비록, 백주 대낮이라도
황혼 같이 어두웠으며
먼 하늘을 바라다보면
우물 속에 앉아있는듯.”
가시울타리 남쪽에 음식이 드나드는 작은 구멍이 있고,
그 바깥에는 사령들이 거처하는 경비소가 사방에 설치돼
토착 원주민들이 이곳을 산무덤이라 부를 정도였다는 기록.
요즘 교도소처럼 편지를 보내거나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위리안치 10년 만인 1623년 인조반정으로 풀려났던 동계.
1641년 73세로 생을 마감한 그는 제주 5현으로 칭송받는다.
제주도는 삼별초를 섬멸하고 1세기 동안 원나라 직속령.
원나라 왕족이나 왕권을 위협한 신하 170 명 유배가 최초.
그후 조선시대 본격적인 유배지로 등장한 것은 연산군 이후.
연산군은 강화도에서 위리안치 2달만에 숨을 걷우웠다.
31세의 한창 젊은 나이에도 견디기 힘들었던.,위리안치.
제주도는 5년 이상 유배형 또는 종신형 유형 제 1 번지
종신형을 선고 받은 유배자들 숫자가 압도적.
광해군, 김정희를 비롯 200 여명이 거쳐간 곳.
한번 들어가면, 거의 살아 나올 수 없었던 유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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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조선시대 정치범은 위리안치’ 유배생활.
탱자나무 가시 울타리에 갇혀 햇볕도 볼수 없는 환경.
1614년 영창대군을 죽인 강화부사 정항은.,제주도 유배.
유배생활의 참상을 알려주는
정온(鄭蘊·1569~1641)의 기록.
왕족이나 고위관료는 외인 출입금지 거주지 제한 유배형
위리안치는 보통 탱자나무가 많은 전라도 섬에서 유배생활.
죽음을 가까스로 면한 정치범들이 받는 가장 무거운 형벌이다.
광해군은 선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당시, 당파를 초월한 모든 신하들은 물론 집권층조차 그의 외교 정책에 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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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인조반정 구데타로 광해군은 왕권을 잃고.,폐위
과거, 역모에 연루된 혐의로 대비에서 폐출된.,인목 대비
1623년 3월 13일, 인조 반정을 일으킨 무리들에게 말한다.
반정공신들은 인목대비를 진정시키려 김개시부터 친국하게 한듯.
.
인조대비는 광해군에게 성은을 받은 궁녀들을 직접 친국.
김개시(개똥이)는 사지를 찢는 형벌을 가했다고 전해온다.
사형(死刑)·궁형(宮刑)·월형(形:발꿈치를 자르는 형벌)·
의형(形:코를 베어내는 형벌)·경형(얼굴 팔뚝 등에 문신)
이 중 하나인 궁형은 사형에 버금 가는 최고의 형벌이었다.
남자는 거세하고, 여자는 질을 폐쇄시켜
자손의 생산을 불가능하게 하는 형벌이다.
"찢어 죽일 년"은 당시 궁형에서 유래된 욕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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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개시(金介屎)..................
(金介屎, ? ~ 1623년)는 광해군 때의 상궁이다.
원래, 광해군 처소나인이었는데 선조 눈에 들었고,
결국 선조의 승은을 입어 선조가 새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 이름.,김가희.
김개시(金介屎)는
이름 끝자가.,똥 屎.
하여, 별칭.,"김 개똥."
"개똥아." "김 개똥."으로 불렸을.,김개시.
선조와 광해군 사이가 벌어지려 할 때마다
광해군을 위해 배후에서 보이지 않게 잘 중재.
말년에 선조가 애지중지 한 영창대군을
세자로 세우려고 하자 '선조를 독살했다.'는
소문도 궐내에서 무성할 만큼 광해군을 도왔다.
그리고, '선조의 계비' 인목대비와 대립관계였는데
인목왕후가 영창대군을 회임했을 때, 도깨비소동으로
유산시키려 했을 만큼 꾀가 많아 광해군의 총애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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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개시는 뛰어난 판단력과 두뇌로
광해군에게도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어려서 입궁했지만 상궁까지만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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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개시는 연려실기술 기록에는.,천예(賤隸)의 딸
이 기록으로 보아 노비 신분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나이가 차서도 용모가 피지 않아.,미인은 아니었던듯.
김개시는 처음에 동궁 소속의 궁녀로 입궐하여
청년 광해군에게 '처녀의 문'을 열고 인연을 맺는다.
'청년 시절, 광해군에게도 김개시는 첫사랑이었던걸까?'
글을 알고 문서 처리에 능했던.,김개시
선조의 나인으로 발탁되어., 특별 상궁.
왕의 성은을 입은 상궁이., 곧 특별상궁.
'조선왕조실록' 기록에 의하면
"그녀가 광해군을 사로잡은 것은
'그녀는 빼어난 미모가 아니었지만
성적기교 비방(秘方)을 써서였다."한다.
훗날, 광해군 즉위 후 대전 지밀나인으로 옮겨졌다.
비난을 무릅쓰고 광해군이 아버지를 모셨던 궁녀인
김개시를 자신의 궁녀로 데려온 데는 이유가 있었다.
먼저, 광해군이 세자 시절 맺었던 첫사랑의 인연 때문
그리고, 자신을 위해 충성할 똑똑한 궁녀가 필요한 때문.
광해군은 김개시에게 절대적인 신임을 보냄으로써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도록 하였고, 실제로 김개시는
오직 광해군의 왕권 강화를 위해 온갖 악역을 떠맡은 궁녀
그무렵 광해군의 왕권을
배후에서 호시탐탐 위협한
최대의 인물은.,인목대비 김씨.
김개시는 인목대비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인목대비의 궁녀들을 회유하여 첩자로 활용.
사건을 조작해 인목대비에게 덮어씌우기도 했다.
광해군 5년(1613)에 계축옥(癸丑獄)으로
인목대비의 친정을 멸문시킨 후 인목대비가
광해군을 저주했다는 사건을 제기해 인목대비까지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간 음모술수 주동자가., 김개시.
온갖 술수와 모함을 일삼는 정치꾼으로 변한.,김개시
끈질긴 공작으로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시키게 만든다.
그러나, 광해군이 저지른 반인륜적 처사를
바로잡겠다는 명분으로 일어났던., 인조반정
반정군 세력은 광해군을 반인륜적인 인물로 몰았고
김개시를 그 만행의 중심인물로 몰아 김개시를 참형.
광해군의 앞날을 가로막는 걸림돌을 자발적으로 없애고자
충성을 다한 김개시는 광해군에게는 훌륭했을런지 모르지만
"도덕적인 측면에서는 스스로 비극을 자초했다."고 여겨진다.
선조 때부터 상궁으로서 총애를 받았고,
그 아들인 광해군의 총애도 받았던 김개시.
선조의 총애를 받으면서
음으로 양으로.,배후에서
광해군의 세자 책봉에 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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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조 때 상궁이지만, 광해군의 총애까지 받았던 김개시.
이를 배경으로 국정에 관여해, 권신 이이첨(李爾瞻)과 쌍벽
두 사람은 비슷한 공통점 3가지를 갖고 있었기에 미움 받았다.
첫째, 역적을 토벌해야 한다며 과격한 역적 토벌론을 일삼기.
둘째, 벼슬에 대한 욕심을 삼가하면서도 실권을 최대한 챙기기.
셋째, 악역은 남에게 맡기고, 그로인해 얻은 공은 자신들이 독차지.
그래서, 이이첨은 영상 자리에 오르지 않고,
김상궁은 희빈 귀빈 자리에 연연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실 이익은 마음대로 챙겼던 두 사람.
.
두 사람은 매관매직을 일삼는 등 그 해독이 컸으므로,
윤선도(尹善道) ·이회(李洄) 등이 여러 차례 상소해.,논핵
그럴 때마다., 번번히 두 사람을 상소한 사람들이 유배되었다.
.
결국, 김개시와 이이첨은
반정군에 붙잡혀 참수된다.
.
광해군이 왕위에 올랐을때 명나라에서는 인정 안했던듯.
"조선의 왕이 된 광해군에겐 형님 임해군이 있다고 하는데
어떻게 동생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는지 조사를 해봐야겠다."
그러자, 임해군은 "광해군이 자신의 자리를 빼앗았다."하며
광해군을 비방하고 다니자 광해군은 임해군을 유배시켰던 것.
이때,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세력들이
광해군을 몰아내려는 음모를 꾸미기 시작.
이를 안, 광해군은 영창대군을 강화도에 유배
그런데, 광해군의 조카 능창군을 왕으로 세우려는., 음모 사건.
광해군은 이와 연류된 사람들을 모두 죽이거나 귀양을 보냈다.
그러자, 광해군을 반대하는 신하들이 인목대비 주변으로 모였다.
이를 지켜보던 신하들은 "인목대비를 폐하라." 고한다.
하여, 광해군은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시키라."., 어명
이일로 조정과 지방의 유림 선비까지 모두 들고 일어났다.
유교관념 사회에서
자식이 부모를 폐하는
일은 있을 수가 없는 일.
이때, '능창군 형' 능양군(훗날 인조)이
광해군을 쫓아내기 위해 일을 꾸미기 시작
623년 3월 능양군은 김자점, 이귀와 함께
광해군을 쫓아내기 위해 반정군를 일으켰다.
이를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인조반정이라 한다
..........................인조..............................
인조(仁祖, 1595년~1649년)는 조선의 제16대 왕.
선조 손자이고 원종(정원군)과 인헌왕후 구씨의 아들.
조선 왕조 역사상 가장 용렬하고 실패한 정치를 한 임금
조선 사회를 크게 후퇴시키게 한 임금이기도 하다.
1615년 막내동생 능창군(綾昌君)이 광해군에 의해 죽자
1623년 3월 인조반정을 일으킨 서인의 추대로 임금으로 즉위
왕위에 오른 인조는 서궁에 갇혀 있던 인목대비를 복위시키고
광해군 시절에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북인 200명을 대거 숙청.
광해군의 중립 외교정책 대신 후금을 배척하고 명나라와 친선.
1624년 1월 22일, 이괄의 난 때 서울을 버리고 잠시 공주로 피신
그러나 이괄이 북방 주력 부대를 끌고 내려와 변방 수비에 허점
이때 후금이 3만 군대를 이끌고 조선을 침공해 왔다. (정묘호란.)
이 정묘호란으로 인조와 신하들은 강화도로 피난을 갔고
후금과 형제 관계는 맺겠다는 조약을 맺은 후 전쟁을 마무리
그러나, 1636년 국호를 청나라로 바꾼 후금이 군신관계를 요구
조선이 거부하자 청나라는 12만 군대를 이끌고 또 침략(병자호란.)
인조는 서울을 버리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항전했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45일 만에 삼전도에서 홍타이지 앞에 무릎꿇고 항복하는 치욕 감수
이 때 청과 화의의 대가로 소현세자와 세자빈부부
그리고 봉림대군을 청나라에 볼모로 내주어야 했다.
전란의 와중에서도 통신사를 일본에 파견하는 등 외교
전쟁후 조정 정세는 다양한 당파 등장으로 복잡한 양상
한편 청나라에 볼모로 억류되었던 소현세자는
화포, 천리경, 로마 가톨릭 서적 서양문물을 소개
그러나 소현세자를 크게 의심한 인조는 김자점과 조귀인 참소에 휘둘려
소현세자를 독살하고, 세자빈 강씨와 소현세자의 아들 3명을 귀양 보내
그 중 두 명의 손자를 사사하는 등 잔인한 면모를 보였다.
인조 시대는 송시열, 김집, 송준길 등 성리학의 전성기
1649년 5월 8일에 재위기간 24년간 고통과 굴욕의 세월
55세의 나이로 승하.
능은 장릉(長陵)이다.
.............................
김포.,장릉
서울 종로구 신문로.,조선시대 별궁 경희궁 . 창건 때 유사시 왕이 본궁을 떠나 . 궁의 규모가 크고 여러 임금이 궁에서 . 원래 경희궁 자리는 광해군 이복동생 정원군 소유 . 경덕궁이라 했다가 후에 영조 왕명에 의해 경희궁. . 하지만, 인조반정에 의해 경희궁에 입궐도 못 해보고 폐위. . 후에 숙종과 경종이 경희궁에서 태어났고 . 7만평에 정전, 동궁, 침전, 제별당, 나인 입주처 등 경희궁 부속건물로 회상전, 융복전, 집경당, 융복전과 집경당은 없어졌고 나머지 건물은 1926년 숭정전은 일본의 불교종파 조계사에 매각 . 경희궁 정문 흥화문을 1932년 이토 히로부미를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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