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두 시즌 동안 ‘서울의 자존심’두산은 1998시즌부터 2001시즌까지 4년 연속 포스트 시즌에 진출한 팀의 면모를 조금도 엿볼 수 없다. 특유의 끈기와 뚝심은 여전하지만 갈수록 팀 전력에 누수가 생기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두산을 두 차례나 정상에 등극시켰던 김인식 감독마저 오프 시즌 동안 팀을 떠난 상황이다. 위기를 맞고 있는 두산. 그들의 2003시즌을 되돌아보고, 내년 시즌에는 어떤 모습을 보여줄 것인지 조심스럽게 예상해본다.
▶마운드
두산의 부진은 마운드에서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명환-이경필-빅터 콜 등이 버틴 선발진과 진필중-구자운-차명주-이혜천-김유봉-이상훈이 이끌었던 불펜진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던 모습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졌다. 선발 로테이션을 정상적으로 유지하기가 힘들 정도였고, 진필중이 빠져나간 불펜도 8개 구단 최고의 자리를 지키기에는 부족한 모습을 보였다.
역시 가장 큰 원인은 게리 레스와의 재계약 실패. 2002시즌 기록한 16승이 증명하듯 레스는 국내 무대에서 충분한 검증을 거친 에이스급 투수다. 더구나 그는 최고의 기량을 선보일 나이에 접어 들었으며 환상적인 체인지업은 앞으로도 몇 년 동안 국내 타자들의 혼을 빼놓기에 충분한 구질이다. 즉, 두산의 No.1 피처를 맡기에 조금의 모자람이 없는 투수라는 것이다.
이처럼 뛰어난 능력을 지닌 레스를 붙잡지 못함에 따라 두산은 마운드를 이끌어갈 축을 잃게 됐다. 연패에 빠졌을 때 스토퍼의 역할을 해낼 수 있는 투수, 연승 행진에 가속 페달을 밟아 줄 에이스 없이 마운드가 운영된 것이다. 뒤늦게 기아로부터 키퍼를 영입하는 등 후속 조치를 취했으나 한 번 기울어진 두산은 마운드는 결코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박명환과 이리키의 부진도 아쉽다. 2002시즌 14승을 기록하며 레스와 함께 원투펀치의 역할을 해냈던 박명환은 이번 시즌 단 5승에 그치는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레스가 없는 마운드에서 에이스는 단연 박명환이다. 좀 더 막중한 책임감을 갖고, 팀의 에이스와 마운드의 리더 역할을 보여주었어야 한다. 시즌 막판 좋은 투구 내용을 보여주었지만, 이리키도 기대 만큼의 투구 내용을 선보이지 못했다. 특히, 시즌 초반 계속된 블로운 세이브는 두산이 초반부터 롯데와 하위권으로 추락하는 빌미를 제공했다.
그러나 두산의 마운드에도 밝은 희망은 있었다. 일단 진필중의 공백을 훌륭하게 채워준 구자운과 선발과 불펜을 오가며 한층 성숙된 투구 내용을 보여준 이재영의 활약은 두산이 얻은 가장 큰 소득이다. 갑작스런 클로저로의 전향으로 인해 초반에는 불안한 모습을 보였지만, 구자운은 시즌 후반으로 갈수록 안정된 투구 내용을 보여주었고, 이재영 역시 위력적인 구위로 타자들을 압도하며 자신감을 얻은 듯한 모습을 보였다.
두 선수 이외에도 재기에 성공한 손혁은 많은 박수를 받기에 충분했고, 충분한 가능성을 비친 노경은과 몰라보게 성장한 정성훈은 내년 시즌 많은 출전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공격력
팀 타율 .276(3위)에서 알 수 있듯이 두산의 방망이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골든글러브를 수상한 김동주와 안경현이 타격 1, 3위를 차지하며 시즌 내내 불방망이를 휘둘렀고, 최경환-장원진-홍원기-전상열-강인권-김창희 등도 기대 이상의 활약을 선보였다. 문희성 역시 심심치 않게 홈런포를 쏘아 올리며 내년 시즌의 전망을 밝게 했고, ‘영건’ 손시헌과 나주환은 뛰어난 수비 센스를 과시하며 두산을 이끌어 갈 재목임을 입증했다.
그렇지만, 전혀 예상치 못했던 정수근과 홍성흔의 부상이 두산의 발목을 붙잡았다. 공격 첨병의 역할을 해주어야 할 정수근의 공백으로 인해 안경현과 김동주에게 많은 찬스가 연결되지 못했고, 홍성흔의 부상 결장은 마운드의 붕괴와 하위 타순의 중량감이 떨어지는 원인이 되었다.
심재학과 쿨바의 부진은 더욱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만일, 좌타자인 심재학이 중심 타선에서 제 몫을 해냈다면, 여기에 쿨바가 시즌 내내 유격수 자리를 지켜주었다면 두산은 삼성과 현대에 맞먹는 막강한 타선을 형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더욱 큰 문제는 다가올 2004시즌. 갈수록 전력이 약화되고 있는 두산은 팀의 외야를 책임지고 있는 정수근과 심재학을 롯데와 기아에 내주고 말았다. 삼성, 기아, 현대 등의 외야가 포화 상태에 이른 것과 달리 두산은 내년 시즌 외야 라인업을 구성하기가 힘들 정도다. 김창희와 전상열이 좋은 활약을 보여주긴 했지만 두 선수 모두 풀 타임 주전 외야수를 맡기에는 공격력이 많이 떨어지는 선수들이다. 때문에 수비가 불안하긴 하지만 장원진이 1루보다 주전 좌익수 자리를 지켜주어야 하고, 최경환은 우익수로 포지션을 변경해야 한다. 공, 수, 주를 갖춘 걸출한 용병이 절실하지만, 마크 키퍼, 게리 레스와의 재계약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두산에게는 선발 마운드가 최우선 과제인 만큼 야수 용병은 시즌 중에라도 기대하기 힘들다.
유망주의 발굴 또한 시급하다. 현재 두산의 주전 라인업 중 최경환-홍원기-전상열-김창희 등 상당 선수들이 다른 팀에서 이적한 선수들이다. 김동주-정수근-홍성흔의 뒤를 이어줄 유망주가 몇 년째 나타나지 않고 있다. 전력 보강 대신 계속해서 긴축 재정을 이어갈 것이라면 유망주들을 대거 기용하며 그들에게 많은 기회를 줄 필요가 있다.
▶두산의 2004시즌
지난 10년 동안 두산을 훌륭하게 이끌었던 ‘덕장’ 김인식 감독과 붙박이 1번 타자 정수근이 나란히 팀을 떠난 두산. 젊은 김경문 감독과 함께 새로운 각오로 시즌을 맞이하겠지만, 내년 시즌 역시 전망은 그리 밝지 않다. 게다가 타이론 우즈처럼 팬들을 열광시켜 줄 수 있는 매력적인 플레이어도 없는 상황.
그렇지만, 포기는 금물이다. 선발 로테이션만 정상적으로 유지된다면 두산도 얼마든지 가능성은 있다. 일단, 레스-키퍼와의 재계약을 통해 확실한 1, 2선발을 만드는데 성공했다. 박명환과 이경필이 뒤를 받쳐주며 두자릿수 승리를 기록한다면 시즌 후반 포스트 시즌 진출의 기회도 잡을 수 있다. 박명환과 이경필의 어깨에 내년 시즌 두산의 운명이 달려있는 것이다.
두산의 구단 프런트와 선수들은 잠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 팀의 포스트 시즌 진출이 일찌감치 좌절된 상황에서도 경기장을 찾아 많은 비를 맞으며 목이 터져라 선수들을 응원했던 베어스 팬들의 뜨거운 성원이 내년 시즌에도 이어질 것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