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돌이’ 이건주가 돌아왔다. <스카우트> 공개 전까지 베일에 싸여 있던 괴물투수 '선동렬'을 연기한 이건주는 요즘 몸이 열 개라도 모자라다.
허남웅 기자 | 영화지와의 인터뷰가 처음이라고? 이건주 | <스카우트>는 성인이 돼서 본격적으로 활동하는 첫 영화라 설렌다. 큰 역할은 아니지만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거라 걱정을 많이 했다. 영화는 물론이고 내 연기도 잘 봐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마침 인터뷰까지 하게 됐다. 기분 좋다. (웃음)
허남웅 기자 | 실제 인물이자 한국 야구계의 전설인 선동렬을 연기했다. 이건주 | 김현석 감독님께서 선동렬 역 오디션을 많이 보셨다. 맘에 드는 사람이 없었다는데 촬영감독님이 나를 추천했고 사진을 본 감독님이 바로 OK를 했다고 들었다. 그동안 오디션도 많이 보고 출연기회도 있었는데 번번이 기회를 놓쳐 아쉬워하던 차였다. 마침 해외여행 중이었는데 연락받자마자 들어왔더니 별 오디션 없이 얼굴만 본 감독님이 이러셨다. "어서 유니폼 사이즈 재".
허남웅 기자 |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는 사실보다 연기한다는 자체가 기뻤나? 이건주 | 비중이 크건 작건 간에 캐스팅된 사실이 너무 기뻤다. 선동렬을 스카우트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만큼 선동렬이라는 인물이 중요하게 부각되는데, 내가 연기한다는 것만으로도 영광이다. 선동렬 감독님께는 죄송하지만.(웃음)
허남웅 기자 | 시사회 전까지는 선동렬 역을 맡은 배우에 대해 전혀 알려진 바가 없었다. 이건주 | 처음부터 감독님께서 공개를 안 하겠다고 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라이언 일병이라고 생각하고 연기하라는 얘기만 들었다. 처음엔 선동렬을 베일에 싸인 인물로 그리기 위한 감독님의 의도를 모르고 왜 공개하지 않을까 서운했다. 내가 영화를 찍었다는 사실을 관객에게 알려주고 싶었으니까. 무엇보다 관객의 반응이 궁금했다.
허남웅 기자 | 드라마 <한지붕 세가족>의 ‘순돌이’ 이미지가 워낙 강해서 선동렬보다 이건주가 더 부각될 거라는 부담은 없었나? 이건주 | 어릴 때의 강한 이미지로 좋은 작품에 해가 되지는 않을까 내심 걱정이 컸다. 다행히 많은 분들이 선동렬과 닮았다고 해주셔서 한시름 놓았다. 피부에 특수 분장까지, 최대한 비슷하게 보이도록 노력했다.
허남웅 기자 | 맞다. 여드름 특수 분장! 선동렬은 당시 여드름이 하도 많아서 별명이 ‘멍게’였다. (웃음) 이건주 | 김현석 감독님이 처음에 나더러 생각보다 피부가 너무 좋다며 걱정을 하시는 거다. 그래서 특수 분장을 한 건데 ‘딱이다!’라고 만족하셨다. 근데 기술시사 보면서 스탭과 관계자들이 내가 나오는 장면을 보고는 박장대소했다. 과연 좋은 의미인지, 나쁜 의미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허남웅 기자 | 특수 분장에 사투리 연기까지, 출연 분량에 비해 공을 많이 들였겠다. 이건주 | 제일 걱정했던 부분이 사투리 연기였다. 사투리 연기에 좀 더 신경을 써달라는 감독님의 주문도 있었는데 마침 감독님이 광주 출신이라 많이 물어봤다. 처음으로 투구 폼도 배웠다. 극중에서 투구를 하고 직접 공을 던지는 장면은 나오지 않지만 포스터에 들어가니까 연습을 해야 했다. 야구선수 출신 동생과 한강 고수부지에서 매일 선동렬 투구 폼을 연습했다.
허남웅 기자 | 티저 포스터에 등만 나오는 선동렬은 당신 연기인가? 이건주 | 그건 내가 아니라 대역이다. 촬영 당시 프랑스에 있었다. 연락을 받긴 했는데 돌아오는 티켓이 구해지지 않아 포스터 촬영을 못 했다. 사람들도 내가 아닌 걸 알아보더라. 이건주치고는 턱살이 너무 없다고들 하시면서.(웃음)
허남웅 기자 | 극중에선 굉장히 우람하게 등장하는데 실제로 보니 그렇진 않다. 이건주 | 역할 때문에 살을 찌웠다. 그전까지 다이어트를 하고 있었는데 젊은 시절의 선동렬은 굉장히 날씬했기 때문에 당시 내 몸으로는 그대로 연기하기에 무리였다. 아예 반대로 퉁퉁한 선동렬의 모습을 보여주는 게 어떨까 싶었다. 안 그래도 백일섭 선생님이 극중 선동렬 부모님으로 출연하시는데 나와 이미지도 많이 비슷하지 않나. 그렇게 가족의 이미지를 맞춰가는 게 영화적으로 옳다고 생각해서 오히려 살을 찌우게 된 거다. 그런 뒤 머리까지 빡빡 밀고 나니까 퉁퉁해 보이고 유니폼까지 입으니 덩치도 있어 보이더라. 극중에 나오는 허벅지는 다 내 허벅지다. (웃음)
허남웅 기자 | 올해 들어 특히 활동이 활발하다. <스카우트>는 물론, 드라마 <칼잡이 오수정>과 사극 <왕과 나>까지, 세 편이나 출연했다. 이건주 | 군 제대하고 나서 작년부터 일이 갑자기 많아졌다. 그동안 잘 안 되고 정말 힘들었으니까 이제는 일이 풀려도 될 때라고 스스로 자위한다. 정말 좋은 건 <왕과 나> 시청률이 많이 올라서인지 나를 '순돌이'가 아닌 극중 캐릭터 ‘송개남’으로 많이 알아준다는 사실이다.
허남웅 기자 | '순돌이'라는 이미지는 이제 떨치고 싶은 과거인가? 이건주 | '순돌이'라는 이름이 한스럽고 원망스럽기도 했다. 특정 캐릭터를 이건주라는 배우가 맡으면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하다가도 캐릭터가 묻어나오는 게 아니라 '순돌이'가 나올 것 같다고 생각하신 분들이 많았으니까. 그로 인해 놓친 캐릭터가 많았다. 하지만 미워할 수 없는 이름이기도 하다. 이 정도까지 나를 알릴 수 있었으니까. 애증의 이름이다. (웃음)
허남웅 기자 | 필모그래피를 보면 몇 번의 공백기가 있다. '순돌이' 이미지를 버리기 위한 의도였나? 이건주 | 솔직히 얘기하면 일이 없어서 쉬었다.(웃음) 내가 얼마나 뛰어난 배우라고 의도적으로 휴식을 취할 수 있겠는가. 절대 아니다. 일을 하고 싶어도 그땐 나이도 어려서 자기관리도 잘 못했고 일도 없다보니 공백이 생겼다.
허남웅 기자 | 의도하지 않은 공백기를 어떻게 견뎠나? 이건주 | 난 촬영장에 가면 기가 많이 죽는다. 일도 없고 사람들한테 무시당하고 자존심 상하는 말을 들으면서부터 그렇게 됐다. 상태가 심해서, 당당하고 싶은 게 있는데 그것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근데 올해 출연한 작품들의 감독님이나 배우, 스탭들이 잘 대해주셨다. 그분들이 왜 이렇게 기가 죽어 있냐, 당당해라 등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셨다.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앞으로도 이런 느낌을 조금은 가져가고 싶다. 자만하는 배우가 되고 싶지 않아서. 연기로만 인정받는 배우가 아니라 인간성도 인정받는 배우가 되고 싶다.
허남웅 기자 | <스카우트> 시사회에 참석해서 사람들 반응은 좀 살펴봤나? 이건주 | 기자시사회는 <왕과 나> 촬영 때문에 참석할 수 없었다. 대신 VIP시사회에서 처음으로 무대인사를 했다. 연기자 생활을 한 이래 그때처럼 떨리는 순간이 없었다. 마이크 잡고 정말 열심히 했으니 재미있게 봐달라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 드디어!(웃음). 그 앞에 서니 설레고 흥분되고 기대되고 만감이 교차했다. 요즘 매니저 없이 활동을 하느라 잠도 못 자고 너무 피곤하지만 너무 행복했다.
허남웅 기자 | 연기생활이 처음도 아닌데 새삼스러운 거 아닌가. 이건주 | 불러만 주면 너무너무 열심히 일하고 싶었다. 다행히 이제 할 수 있게 된 거다. 죽도록 일만 하고 싶다. 일주일 내내 잠 한숨 못 자도 괜찮다. (웃음) 나는 항상 작품을 할 때마다 감독님과 스탭 분들한테 고맙다는 얘기를 한다. 맘에 없는 소리가 아니라, 나보다 더 나은 다른 좋은 배우가 많았을 텐데도 나를 선택해줬으니까. 주위에서 만류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결국 믿어줬으니 얼마나 고마운가.
사진 김주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