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6월 11일
한진중공업, 한국 첫 쇄빙선 ‘아라온호’
2009년 6월 11일 한진중공업 부산 영도
조선소에서 순수 국내 기술로 건조되는 우리나라 최초의 쇄빙연구선 ‘아라온호’ 진수식이 열렸다.
아라온호는 남극 대륙 주변이나 북극해
처럼 얼어있는 바다에서 단독으로 항해
할 수 있는 쇄빙선(6950t급)으로 길이1
10m, 폭 19m 규모다.국토해양부 산하 극지연구소의 발주로 1030억원이 투입
돼 제작된 아라온호는 마무리 작업을 거
쳐 9월 말 인천에 있는 극지연구소에 인도될 예정이다.
쇄빙 능력을 확인하는 시험 항해를 거쳐 내년부터 본격적인 탐사와 연구활동에 투입될 예정이다. 한국은 그동안 쇄빙선
이 없어 다른 나라 배를 빌려 사용했다.
아라온호는 60여종의 최첨단 장비를 갖춰 연구능력이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아라온’이라는 이름은 순 우리말로 바다
를 의미하는 ‘아라’에다 전부나 모두라는 뜻이 있는 관형사 ‘온’을 붙여 지었다. ‘전 세계 모든 바다를 누비라’는 의미와 ‘어떠
한 상황에서도 역동적으로 활약하라’는 기대를 담고 있다.
➡️ 2015년위안부 피해자. 포항 김달선 할머니 90세로 별세
👉🏿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김달선(90·사진) 할머니가 지난 11일 오후 9시 15분 경북 포항의 한 요양병원에서 별세했다. 같은 날 경기도 광주에서 위안부 피해자
김외한(80) 할머니가 별세했다.
이날 하루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 두 명이 30분 간격으로 숨을 거두면서 정부에 등록된 위안부 피해자 238명 가운데 생존자는 50명으로 줄었다. 광복 70주년을 맞은 올해에만 벌써 5명의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가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를 받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1925년 경북 포항에서 3남 3녀 중 둘째로 태어난 김달선 할머니는 19세이던 1943년 포항 흥해시장 거리에서 일본 경찰에 의해 미얀마로 끌려갔다. 1945년 귀국 전까지 2년간 수술을 2차례 받을 정도로 고초를 겪었다. 주변인들의 권유로 1996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에 피해자로 신고한 김 할머니는 “죽기 전에 꼭 일본 정부의 사과를 받겠다”며 대구 지역에서 ‘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과 함께 활발히 활동해왔다.
김희정 여성가족부 장관은 이날 포항 시민장례식장에 마련된 김 할머니의 빈소를 찾았다. 김 장관은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생전에 사과하지 않는다면 또 한 번의 씻을 수 없는 역사적 과오로 인류사에 기억될 것임을 명심하길 바란다”며 일본의 사과를 촉구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생존한 일본군위안부 피해자는 줄어들고 있지만, 일본 아베 정부는 위안부 문제에 일본 정부가 개입한 사실 자체를 부인하고 있다. 고(故) 김외한 할머니를 비롯한 10명은 지난달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모욕한 일본의 극우 정치인 스즈키 노부유키(50)를 서울중앙지검에 고소하기도 했다.
➡️2015년위안부 피해 김외한 할머니 별세
➡ 2010년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2010년 FIFA 월드컵이 개막되었다. (~7월 11일)
➡ 2009년 대한민국의 우주기지 나로
우주센터가 이명박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
데 준공식을 가짐. 세계에서 13번째로 우주기지를 보유한 국가가 되었다.
➡2009년 기독교윤리실천운동 교회신뢰회복네트워크 명동 청아람에서 '교회의 사회적 책임 2.0포럼' 개최. 주제발제 장신대 임성빈 교수
➡ 2009년 세계보건기구, 인플루엔자AH1N1의 전염병 경보수준 ‘대유행’으로 격상.
➡️2004년박지원 전 문화관광부 장관, 현대 비자금 150억원 받은 혐의로 징역 12년 선고
➡️2004년미국 로스앤젤레스 고속도로 ‘도산 안창호 메모리얼 인터체인지’ 표지판 헌정
➡️2003년프로 테니스선수 앤드리 애거시, 1000번째 경기 수립
➡️2003년‘영화 100년간 최고의 영웅’, 그레고리 펙 별세
➡ 2003년 이라크전쟁, 사망자 민간인만 3,240명
➡ 2001년 일본 벤처 자프코 "한국에 340억원 투자"
➡ 2001년 실비오 베를루스코니가 78번째 이탈리아 총리에 취임했다.
➡️2001년미국 오클라호마시티 연방청사 폭파범 멕베이 사형
➡ 2000년 교황 남북정상회담 특별메시지 발표.
➡️1999년월북작가 함세덕 희곡 ‘무의도 기행’ 국립극단서 처음 공연
👉🏿 국립극단이 1940년대를 풍미한 희곡작가 함세덕(1915∼1950)의 ‘무의도 기행’ 을 1999년 6월 11일부터 22일까지 국립중앙극장 소극장에서 공연했다. 우리 국립극단이 월북 작가의 희곡을 무대에 올리는 것은 창단 이후 처음이었다.
함세덕은 35세로 요절했기에 10여년 밖에 작품 활동을 못했다. 그러나 그는 일제 말 암흑기, 광복 전후 혼란기를 통해 희곡 20여 편을 써내며 연극계 중심에 섰다. 대부분 유치진 연출로 공연됐던 함세덕의 작품은 잘 짜인 드라마 속에 암울한 시기의 꿈을 담아, 조국 잃은 사람들 가슴에 큰 울림을 안겼다. 1988년 우리 정부의 해금 조치로 그의 희곡들이 햇빛을 봤으나, 이번 공연으로 그의 작품 세계가 본격적으로 평가받을 수 있게 됐다.
‘무의도 기행’ 은 1930, 40년대 서해의 작은 섬 무의도가 배경.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한 시대를 암울하게 살 수 밖에 없던 어느 섬 소년의 고독한 성장기, 처참한 종말에 이르는 비극적 삶이 그려진다. 친딸까지 팔았던 비참한 가난이 적나라하게 묘사되고 있으며 대사엔 우리말 특유의 맛이 배어 있다. 이번 공연은 월북 작가라는 이유만으로 묻혔던 우리 연극사의 한 부분을 재발견하는 일에 국립극단이 나섰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1998년중-일 공산당, 문화대혁명 이후 단절되었던 상호관계 정상화하기로 합의
➡️1997년제2차 북미 미사일 회담 (뉴욕. -13일)
➡️1995년설치미술가 전수천, 베니스비엔날레서 특별상 수상
➡️1988년사회정화위원회 폐지
➡️1985년소련의 금성탐사위성 베가1호의 착륙선이 금성에 착륙
➡️1984년이탈리아의 공산당 서기장 베를링구에르 사망
➡️1981년이란의 켈만주에 대지진, 1500~3000명 사망
➡️1981년제1공영호(선원21명) 서해북방한계선서 납북
➡️1980년음주측정기를 이용한 음주운전 단속 시작
👉🏿 1980년 6월 11일 치안본부는 차주 운전자가 늘어나면서 음주운전으로 인한 교통사고가 급증하자 미국에서 음주감지기 4백대를 도입, 전국 경찰에 나누어주고 음주 운전자를 강력히 단속토록 했다.
이 음주 감지기는 소형 휴대용 트랜지스터 라디오 정도의 크기로 상단에 붙어 있는 파이프에 운전자가 입김을 불어넣으면서 버튼을 누르면 알콜의 함량이 숫자로 표시되게 제작됐다. 이 감지기는 주로 교통경찰이 휴대, 지그재그 운전을 하는 운전자나 교통사고를 낸 운전자의 음주여부 및 호흡 1ℓ당 알콜흡인량을 알아내는데 쓰였다.
기준 이상을 마시고 운전하다가 적발되면 1년 이하의 징역과 30만원 이하의 벌금 이외에 30일간의 운전면허 정지기간이 길어지고 자동차 사용 정지처분이 병과되도록 했다.
치안본부가 음주감지기를 도입하게 된 것은 1979년 한해동안 전국에서 음주운전으로 인해 2006건의 사고가 발생, 1백50명이 사망하고 1천7백11명이 부상했기 때문인데, 이 사고 건수는 1978년에 비해 45.9%가 증가한 것이었다.
그러나 음주감지기를 이용한 음주운전자 적발-처벌은 개개인에 따라 다른 알콜반응도, 다시 말하면 술이 센 사람과 덜 센 사람, 맥주 한 병을 마시고도 운전할 수
없는 사람과 할 수 있는 사람을 구분할 수 없다는 데에 문제점이 있었으며이 때문에 선진국에서는 감지기보다는 운전자로 하여금 직선 위를 걷게하여 똑바로 걷는가의 여부로 판정했다.
➡️1980년알지에석유수출국기구(OPEC)총회, 원유의 가격통일 실패
➡️1979년미국 민간대외원조협회(CARE) 한국서 철수
➡️1979년영화배우 존 웨인 사망
➡️1979년한국-쿠웨이트, 국교수립
➡️1977년네덜란드군, `몰루카` 테러범 습격 인질 51명 중 49명 구출
➡️1976년김영삼 총재사퇴 선언
➡️1974년브라질의 대통령(1945-50) 두트라 사망 - 입헌민주주의 회복
➡️1971년리비아, 대만과 단교 중국 승인
➡️1970년러시아 총리, 알렉산드르 표도로비치 케렌스키 사망
➡️1969년캄보디아, 미국과의 국교재개를 통고
➡️1968년프랑스, 반드골 학생데모 격화
➡️1965년베트남 쿠데타(5차)로 웬반티우 장군, 웬까오끼 장군 공동 집권
➡️1942년미국-소련 상호원조조약 조인(워싱턴)
➡️1930년중국 중앙위, 이입삼노선 채택 (도시무장봉기 결의)
➡️1925년삼시협정(미쓰야협정)으로 재만(在滿)한인의 단속강화
➡️1923년경성무선전신국 설치
➡️1908년의병장 허위 피체
➡️1901년바이올린 연주자 채동선 출생
1455년 수양대군, 단종을 폐위하고 세조에 즉위
👉🏿1455년 윤6월11일, 왕위에 올라 갓 3년을 보낸 단종이 삼촌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났다. 수양대군이 2년 전 계유정난을 일으켜 김종서, 황보인 등과 친동생 안평대군을 죽이고 실권을 장악한 뒤부터 명목상의 임금으로 근근히 왕권을 유지해왔으나, 수양대군이 단종의 측근들을 유배시키며 압력을 조여오자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왕위를 포기한 것이다.
단종은 태어난지 3일 만에 어머니가 숨지는 불운을 겪었지만 할아버지 세종의 총애를 받으며 8세 때 세손, 10세 때 세자로 책봉돼 나름대로 순탄한 길을 걸었다. 그러나 세종이 죽고 병약한 아버지 문종마저 즉위 2년 만에 죽자 단종은 1452년 5월, 12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라 기구한 운명 속으로 내몰렸다. 상왕으로 물러난 단종을 위해 사육신 등이 한때 복위를 시도했지만 그들의 목숨은 물론 단종의 수명까지 단축시키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결국 단종도 사건에 연루됐다는 이유로 1457년 6월 노산군으로 강봉당해 강원도 영월땅 청령포로 유배됐다. 그해 12월 사약을 받고 영월 장릉에 묻혀 조선 임금 중 유일하게 경기도 밖에 묻힌 왕이 됐다.
https://youtu.be/LgeYKyYIf-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