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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5~39) 중앙SUNDAY 김명호(57세)교수는... 건국대ㆍ경상대 중문과 교수를 거쳐 성공회대 중국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해외에서 중국 전문서점으로 유명한 싼롄(三聯)서점의 서울점인 ‘서울삼련’을 10여 년 경영하며, 중국 관련 전문서적과 희귀 사진을 수집했다. 5·4운동 지도자 段錫朋의 변절(25) |제25호| 2007년 9월 2일
▲미국 유학 떠나기 전 기념촬영을 한 5·4운동의 학생 영수 다섯 명. 뒷줄 가운데가 돤시펑이다. [김명호 제공]
1919년의 5·4운동은 신식 교육을 받은 신지식인들의 첫 번째 현실참여였다. 시위 주동자 중 뤄자룬(羅家倫)· 돤시펑(段錫朋)·쉬더옌(許德衍)·푸쓰녠(傅斯年) 등은 베이징대학 학생들이었다. 영미식 자유주의 영향을 받은 이들의 목표는 평화적 시위로 군벌정부의 굴욕외교에 항의하고 민중을 각성시킨다는 것이었다.
반면 베이징고등사범학교의 쾅후성(匡互生)과 슝멍페이(熊夢飛) 등은 유혈과 희생이 따르지 않는 시위는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시내 사진관을 다니며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한 중국 대표들의 용모를 익히고 친일파 차오루린(曹汝霖)의 집을 수소문했다. 차오의 집 앞에서 폭동을 일으킬 계획이었다. 가솔린과 성냥을 준비했고 권총은 구하려 했으나 미수에 그쳤다.
5월 4일은 일요일이었고 유난히 더웠다. 학생들이 방 안이나 도서관에 있기엔 적당치 않았다. 거리로 나온 학생들이 차오의 집에 이르렀을 때 집주인은 이미 도망가고 없었다. 방화를 결심한 쾅후성이 성냥을 꺼내자 옆에 있던 돤시펑이 기겁을 하며 막았다.
“무슨 짓이냐? 나는 책임 못 진다.” 쾅은 “누가 너보고 책임지라고 했느냐? 너는 책임질 일 없다”며 방화를 감행했다.
책임 문제를 거론한 것만 봐도 돤시펑은 자타가 공인하는 학생 영수였다. 며칠 후 돤은 베이징에 설립된 학생연합회 회장에 뽑혔고, 6월 18일엔 상하이에서 열린 전국학생연합회에서 회장에 당선됐다. 이때부터 상하이가 학생운동의 중심이 됐다. 학생자치를 주장하는 돤을 사람들은 “돤총리(段總理)”라고 불렀다.
돤시펑과 학생운동 지도자들에 대한 회유와 매수도 만만치 않았다. 상하이 방직업자가 이들의 미국유학 자금으로 거금을 내놓았다. 후스(胡適)도 “혼란기일수록 학생들은 구학(求學)에 충실해야 한다”며 돤에게 유학을 권했다. 학생 영수 다섯의 미국 유학은 “오대신출양(五大臣出洋)”으로 풍자됐다. 귀국 후 모두 군벌정부에 충실했음은 물론이다.
신문화 운동에서 시작해 5·4운동과 마르크스주의 전파, 그리고 중국공산당의 성립으로 이어지는 미래에 대한 환상을 품고 살아야 했던 복잡한 시대의 가장 큰 실패자가 이들이었다. 민주와 과학을 외쳐댄 5·4운동을 통해 입신했지만 모두 반민주적인 인물로 타락해 버렸기 때문이다.
‘長征’의 탄생(26) |제26 | 2007년 9월 8일
▲1935년 10월 산베이(陝北) 지역에 도착한 중앙홍군 주력부대. [김명호 제공]
중국을 연상시키는 많은 용어 중 하나가 장정(長征)이다. 흔히 앞에 대(大)자를 붙여 민주 대장정, 골프 대장정, 선교 대장정, 통일 대장정, 민심 대장정 같은 말들을 비장한 어조로 쓴다. 그러나 장정은 원래 있었던 단어도 아니고 중국인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용어도 아니다.
1934년 10월 중국인민해방군의 전신인 중국농공홍군(農工紅軍)은 장제스가 지휘하는 국민당 대군의 포위 섬멸작전에서 벗어나기 위해 장시(江西)성 루이진(瑞金)의 중앙 소비에트를 포기하고 대규모 군사이동을 감행했다.
도주나 다름없는 풍전등화의 상황에서 격조 있는 작전 명칭이 있을 리 없었다. 처음엔 “장거리 행군을 겸한 전투” “전략적 이동” “원정(遠征)” 등으로 부르다가 홍군 총지휘부의 지시로 “서정(西征)”이나 “포위 돌파(突圍)”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35년 5월 중앙홍군은 다량산(大凉山)의 소수민족 지구에 진입했다. 홍군의 총사령관 주더는 농공홍군에게 보내는 포고문에서 “홍군의 만리 장정은 가는 곳마다 기세가 대나무를 자르는 듯하다(破竹之勢)”며 처음으로 “장정”이라는 표현을 썼다. 새로운 단어가 탄생한 것이다.
한 달 후인 6월 12일에는 중앙홍군과 제4방면군이 쓰촨(四川)성 서북지역에서 회합했다. 홍군 총정치부 선전대는 경축 노래를 만들며 가사에 “만여리 장정”이라는 말을 삽입했고, 8월 5일 개최된 중앙 정치국 회의는 홍1방면군(中央紅軍)의 “1만8천리 장정”을 중국 최초의 위대한 사업으로 결의했다.
35년 10월 홍1방면군의 주력부대가 산시(陝西)성 북부에 도착했다. 11월 홍1방면군 전체 간부회의에 참석한 마오쩌둥은 “루이진을 출발해 367일 동안 적과의 전투가 35일, 행군이 267일, 휴식은 65일을 넘지 않았고 2만5천리를 행군한 부대도 있다”며 “이는 과거 그 어디에도 없었던 장정”이라고 말했다.
이때부터 중국공산당중앙과 중화소비에트공화국 명의로 발표하는 선언문 등에 “2만5천리 장정”이라는 명칭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두 달 후 마오가 글을 통해 장정의 의의를 확실하게 규정하자 당사(黨史)나 군사(軍史)는 ‘장정 시기’를 따로 설정하게 되었고 장정은 전투를 겸한 행군만이 아닌 함축성 있는 역사 용어가 됐다.
‘20세기 화타’ 蕭龍友(27) |제27호| 2007년 9월 15일
▲1951년 중국 중앙문사관(中央文史館) 관원 시절의 샤오룽요. [김명호 제공]
1924년 12월 31일 중국혁명의 아버지 쑨원(孫文)이 베이징(北京)에 도착했다. 한 달 전 톈진(天津)에서부터 고열에 시달린 탓에 병색이 완연했다. 치료를 위해 독일병원(현 北京醫院)과 셰허의원(協和醫院) 부근인 베이징호텔(北京飯店)에 투숙했다. 왕진 온 독일인 의사가 간염(肝炎)이라고 했다.
10여 일을 치료했지만 호전은커녕 황달 기운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고통스러워했다. 병상을 지키던 부인 쑹칭링(宋慶齡)은 중의(中醫, 한의사) 샤오룽유(蕭龍友)를 청하기로 했다. 미국 생활을 오래한 탓에 평소 중의를 신뢰하지 않았던 쑹칭링의 마지막 선택이었다.
수척해진 쑨원을 응시하던 샤오룽유(1870 ~1960)가 진맥을 시작했다. 간암(肝癌)이었다. 10년이 지났다고 단정했다. 쑨원이 의사 출신임을 아는 샤오는 진단 결과를 숨기지 않고 증세를 설명했다. 그간 옆에서 쑨원을 보아온 쑹칭링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영험한 묘약을 간청했고, 주위의 사람들도 처방을 요구했다. “선생의 간은 이미 굳어 버렸다. 그 어떤 탕약으로도 풀 수 없다.” 샤오는 비통한 어조로 단호히 거절했다.
1925년 1월 26일 쑨원은 셰허의원에서 수술을 받았다. 간이 나무처럼 굳어 있었다. 말기 간암이었다. 두 달 후 쑨원은 “혁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샤오룽유는 량치차오(梁啓超)와 친분이 두터웠다. X선을 찍은 량에게 신장염이라는 진단 결과가 나왔다. 의사들이 수술을 권했다. 량치차오를 진맥한 샤오는 대단한 병이 아니라며 수술을 못하게 했다. 독서와 강의를 중지하고, 잘 먹고 과로하지 않으면 저절로 완치된다고 했다. 량치차오는 “군인이 전쟁터에서 죽는 것처럼 학자는 강단에서 죽어야 한다”고 되받았다. 결국 누적된 과로를 이기지 못한 량치차오는 입원해 수술을 받았다. 의사가 병든 신장을 그대로 두고 멀쩡한 신장을 떼어내는 바람에 강단에서 죽으려던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의료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샤오룽유는 20세기 중국 최고의 명의(名醫)였다. 중의학과 서양의학의 결합을 주장했다. 베이징중의학원(北京中醫學院)도 그가 설립했다.
중국 최초의 권력형 절도(28) |제29호| 2007년 9월 30일
▲바오딩 인민체육광장의 2만인 대회에서 사형 선고를 받는 류칭산(왼쪽)과 장쯔산. [김명호 제공]
1952년 2월 10일 허베이(河北)성 인민법원은 스자좡시 당위원회(石家庄市委) 부서기 류칭산(劉靑山)과 톈진 지역위원회(天津地委) 서기 장쯔산(張子善)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직권을 이용해 비행장 건설과 수재복구 비용을 도용했고, 양곡을 도둑질했으며 불법 대출로 은행 돈을 훔친 죄였다. 고위 공직자가 직권을 이용해 공금을 도둑질한 최초의 사건이었다. 여자 사기꾼과 결탁해 회사를 차리고 건축자재를 비싸게 구입하는 수법으로 국고에 손실을 입히기도 했다.
사치와 함께 사생활도 복잡해졌고, 공금으로 자동차를 구입해 공무와 상관없는 사람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류칭산은 “우리는 천하를 얻었다. 이 정도야 어떻단 말인가”라고 했다. 검거 직전 사람들을 매수해 증거를 없앴다. 한 번에 378건의 증거물을 소각하기도 했다.
1951년 12월 중국공산당 화베이(華北)국이 주관한 두 사람의 형량에 관한 토론 참가자 중 552명 거의가 사형을 주장했다.
이들의 “권력형 절도(權力型 竊盜)” 보고서를 접한 마오쩌둥(毛澤東)은 숙고했다. 항일전쟁 시절 류칭산을 잡기 위해 일본군은 현상금까지 내건 적이 있었다. 국공전쟁에서도 혁혁한 공을 세운 정권 수립의 공로자인 이들에게 개조의 기회를 주자는 의견이 있었다. 마오가 결심했다. “이들은 높은 지위에 있었다. 큰 공을 세웠고 영향력도 컸기 때문에 처형을 피할 수 없다. 그래야만 앞으로 많은 간부들이 잘못을 면할 수 있다.”
2월 9일 밤 류칭산은 “나를 전형으로 삼아라. 두고두고 유용할 것이다”라는 유언을 했다. 장쯔산은 “할 말이 있어도 이미 늦었다. 피의 교훈을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다음날 바오딩(保定) 인민체육광장의 2만인 대회에서 이들에게 사형 선고와 함께 집행이 선포됐다. “머리가 상하지 않게 심장을 겨냥해라. 집행 즉시 안장하고 관은 국가가 부담한다. 이들의 친족은 반혁명분자가 아니다. 자녀들은 국가에서 돌본다”는 당 중앙의 지시가 전달되자 두 사람은 대성통곡했다. 류칭산은 붉게 충혈된 두 눈을 감아버렸고, 장쯔산은 사진기를 든 기자들을 향해 울부짖었다. “나를 찍어라. 그래서 후세들에게 교훈으로 남게 하라.”
장제스와 천제루의 만남, 그리고 이별(29) |제30호| 2007년 10월 7일
◀1924년 황포군관학교 교장 시절의 장제스(왼쪽)와 천제루. [김명호 제공]
1927년 8월 21세의 천제루(陳潔如)는 장제스(蔣介石)가 권하는 미국 유학을 떠났다. “정권을 장악하면 경제건설에 착수하겠다. 서양의 기술이 필요하다. 새로운 문화를 익혀라.” 결혼한 지 6년 만이었다.
상하이를 출발한 지 10일 만에 하와이에 도착했다. 중국 영사관 관원들이 영접했고, 현지의 국민당 열성당원들은 ‘국민혁명군 총사령관 부인 환영’이라고 쓰인 현수막을 내걸었다. 미국 언론도 중국의 통일을 눈앞에 둔 장제스의 부인 천제루의 미국 방문을 연일 보도했다. 그러나 며칠 후 주미 중국대사관 공보처는 “장제스 총사령관에게는 미국에 와 있는 부인이 없다”는 공고를 신문에 게재했다. 경악한 천은 황급히 목적지인 뉴욕으로 향했다. 그해 겨울 친구의 편지를 통해 장제스가 쑹메이링(宋美齡)과 결혼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천제루는 13세 때인 1919년 여름 국민당 4대 원로 중 한 사람인 장징장(張靜江)의 집에서 장제스를 처음 만났다. 당시 장제스의 직업은 증권 중개인이었다. 장징장은 동업자였다. 청방(靑幇)의 독무대였던 상하이의 증권교역소에서 이들과 결탁해 벌어들인 돈으로 홍등가에서 날을 지새우기 일쑤였다. 장제스는 큰 키에 러시아어가 유창한 천의 환심을 사려고 애썼다. 장은 한순간에 상대를 제압해 버리는 재능은 탁월했지만 성격이 불같아 사람을 설득할 줄 모르는 단점이 있었다.
무슨 일이건 순식간에 처리하지 못하면 스스로 해결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장징장의 부인이 천을 설득했다. 그러나 뒷조사를 해본 천의 모친은 완강했다. 고향에 부인이 있고, 아들이 있는 것도 큰 약점이었다. 장징장이 나서고 쑨원(孫文)까지 가세해 모친을 설득하는 바람에 장제스는 2년 만에 20세 연하의 천과 겨우 결혼할 수 있었다. 후일 장제스의 전기작가는 궁리를 거듭한 끝에 이때를 “총통의 도양(稻養·벼가 한참 자라던) 시기”라고 했다.
장제스는 쑨원의 부름으로 다시 군복을 입었고 쑨의 처제 쑹메이링도 알게 되었다. 장은 천에게 했던 것을 쑹에게도 그대로 반복했다. 장의 감정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후일 장과 쑹의 결혼을 정략결혼이라고 했지만 장은 이성문제에 있어서는 정략적이지 못한 사람이었다.
황포군관학교 교장이 되면서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장제스는 숙원이었던 북벌(北伐)을 완수했고, 27년 4월에는 정변을 일으켜 세계를 놀라게 했다. 중국의 최강자로 부상했고 타임(TIME)지의 표지를 장식했다. 이미 눈앞에 쑹메이링이 아른거리기 시작했지만, 그가 가는 곳마다 모습을 나타낸 것은 공인된 부인 천제루였다.
천은 컬럼비아 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하고 귀국해 상하이에 정착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저우언라이(周恩來)는 천에게 “홍콩이나 미국을 자유롭게 다녀라. 언제 돌아와도 좋다”고 했다.
천은 홍콩을 택했다. 대만의 장징궈(蔣經國)는 ‘상하이 엄마(上海)’라 부르며 따르던 그를 위해 주룽(九龍)에 저택을 마련했다. 장제스도 쑹메이링 몰래 편지를 보냈다. “우리는 한 배를 타고 비바람을 헤쳐나갔던 날들이 있었다. 그때의 고마움을 잠시도 잊어본 적이 없다.”
천은 세상을 떠나기 직전 장제스에게 편지를 보냈다. “30여 년간 내가 얼마나 억울하고 분했는지 잘 알 것이다. 그러나 나는 군(君)과 국가의 명예를 위해 모든 것을 감수했다." 천은 생전에 영문 회고록을 남겼는데, 장제스와 본인의 사후에 공개할 것을 조건으로 달았다.
개와 玉을 좋아한 西太后(30) |제31호| 2007년 10월 13 입력일
▲출타 길의 서태후(가운데) 앞에 애견 ‘하바’가 쭈그리고 앉아 있다. [김명호 제공]
서태후는 경극(京劇)과 예쁜 신발, 개(狗)와 옥(玉)을 좋아했다. 이화원의 경극 공연장을 직접 설계했고, 신발에 수를 놓아 여관(女官)들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그러나 경극과 신발도 개와 옥에는 미치지 못했다.
개를 좋아했을 뿐만 아니라 혈통 보존과 감별에 관한 연구는 일가를 이룰 정도였다. 황실견 사육장인 어구옥(御狗屋)에 볼일이 생기면 조회도 대충 끝내버리곤 했다.
어느 날 아침 조회를 기다리던 대신들은 뛰고 자빠지고 구르며 태후(太后)의 처소로 달려들어가는 태감(太監)의 황급한 모습을 보았다. 천재지변이나 반란이 발생한 줄 알았다. 잠시 후 간편한 복장의 태후가 나타나 화려하게 차려입은 대신들 사이를 빠른 걸음으로 지나쳤다. 태후의 발길이 앞을 스칠 때마다 꿇어 엎드려 머리를 땅에 조아리고, 직함과 성명을 외쳐대는 소리들이 장관을 이루었다. 태감의 보고는 태후가 귀여워하는 흑옥(黑玉)이 새끼를 네 마리 낳았다는 것이었다.
대나무로 만든 사합원 모양의 어구옥에 거의 도달했을 때 태후는 옆에 있는 더링(德齡, 1886∼1944)에게 “장구한 역사가 있는 종자들이다. 만주인들은 오래전부터 ‘하바(哈巴)’라 부르며 애완용으로 키웠다. 우리 조상들이 만리장성을 넘어 중원으로 들어올 때 이들도 함께 왔다. 그 후로 ‘베이징 개(北京狗)’라고 부르게 됐다”고 말했다.
태후가 올 때마다 개들은 조련사의 구령에 따라 요란하게 짖어대며 소리와 앞발을 드는 게 다를 뿐 조정의 대신들이 하는 것과 흡사한 예를 행했다. 20마리를 초과하게 되면 태후는 이상이 있는 개들을 지적했다. 지적은 퇴출을 의미했지만 절대로 죽이거나 잡아먹지는 못하게 했다. 시장에 데리고 나가 팔게 했다. 황실에서 나왔기 때문에 고가로 팔려나갔다. 태후는 태어난 네 마리 중 이마에 흰 점이 있는 한 마리에게만 반옥(斑玉)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네 마리가 태어나면 세 마리는 불량품이게 마련이다. 커가면서 다리가 짧거나 몸통이 길거나 털이 거칠다. 7일 만에 눈을 떠야 10일 만에 꼬리를 잘라줄 수 있다”고 했다. 더링은 7일 만에 눈을 뜬 것은 반옥 하나였다고 회고록에서 밝혔다.
서태후는 노년에 들어서도 자색(姿色)에 자신이 있어 했고 장신구에 신경을 많이 썼다. 대신이나 총독 혹은 외국 대사들이 예물로 보낸 것을 주로 착용했다. 태후는 그중에서도 옥으로 만든 것을 제일 좋아했다.
여러 곳의 총독과 군기대신을 역임한 장즈둥(張之洞, 1837∼1909)은 소문난 옥광석 수집가였다. 수집해 놓았던 천연 옥광석 중에서 태후를 위해 미옥(美玉)을 한 덩어리 추출해냈다. 완벽한 녹옥(綠玉)이었다. 초승달 모양의 귀걸이와 수촉(손톱 보호용 장신구)을 만들어 예물로 보냈다. 태후는 “소장품 중에 이보다 뛰어난 것은 없다”고 감탄했다. 여관들은 바로 착용할 줄 알았다.
그러나 결과는 반대였다. 거울을 보고 귀걸이와 수촉을 응시하기를 반복하더니 “내 얼굴이 흠집 하나 없는 옥귀걸이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손에도 주름이 많다. 젊고 아름다운 여자에게 어울릴 물건을 늙은이가 착용하면 고목 같은 몰골만 더 드러난다. 창고로 보내라. 가끔 가서 보기만 하겠다”고 했다.
장즈둥의 심미안은 탁월했다. 총명하고 세심한 사람이었다. 여름이 임박했고 태후가 아직 젊다는 것을 찬미하기 위해 젊은 여자에게 어울리는 옥을 예물로 선택했다. 그러나 서태후는 더 총명했다.
“魯迅 이후엔 張愛玲”(31) |제32호| 2007년 10월 20일
◀1994년 7월 김일성 북한 주석의 사망을 다룬 신문을 들고 찍은 이 사진이 짱아이 링이 남긴 마지막 모습이다. [김명호 제공]
한때 동거했던 사람의 말이지만 "루쉰(魯迅) 이후엔 짱아이링(張愛玲)"이라는 소리를 듣는 작가 짱아이링은 명문 출신이었다.
조부 짱페이룬뤈(張佩綸)은 여섯 살에 군벌의 창시자 쩡궈판(曾國藩)의 사숙에 들어갔다. 대담한 성격에 문장과 서법에 뛰어나 총애를 받았다. 사방 만리를 통틀어 한 명 나올 수 있는 인재라는 소리를 들었고 23세에 대과에 급제했다. 그의 상소문은 비견할 자가 없었다. 특히 군사문제를 논한 상소는 보는 사람을 황홀케 했다. 전황 분석과 적절한 작전 제시 등 막힘이 없었다. 평생을 전쟁터에서 보낸 장군들도 그 앞에선 고개를 들지 못했다. 병(兵)을 아는 기재(奇才)로 인정받았다.
프랑스와 전쟁이 벌어졌다. 그를 얄미워하던 사람들이 합심해 전선에 파견할 것을 주장하는 바람에 실전을 지휘케 됐다. 입으로만 병(兵)을 논하던 그에겐 날벼락이었다. 첫 번째 전투에서 혼비백산했다. 한밤중에 장대 같은 빗속을 뚫고 도망쳤다. 결국 관직에서 쫓겨났고 웃음거리가 됐다. 어린 시절 짱아이링은 전쟁과 관련된 조부의 일을 아버지에게 자주 물었고 그때마다 야단을 맞았다.
리훙장(李鴻章)은 짱페이룬뤈에게 딸을 출가시켰다. 리훙장의 부인은 짱의 나이가 딸보다 스무 살이나 많고 죄인이나 다름없는 주제에 먹는 것만 밝힌다며 기를 쓰고 반대했다. 짱페이룬뤈은 소문난 미식가였다. 딸도 싫어했지만 리훙장이 높이 평가한 것은그의 문장이었다. 음식에 조예가 깊은 것도 교양인이라는 증거였다.
짱페이룬뤈의 문재(文才)를 손녀 짱아이링이 이어받았다. 짱아이링의 생모는 아편 중독자인 남편과 어린 두 딸을 두고 유럽 유학을 떠났다. 귀국 후엔 운전사와 가출해 버렸다. 부친은 북양정부 총리의 딸과 재혼했다. 계모는 결혼 전 입었던 옷을 짱아이링과 동생에게 입혔고 새 옷을 사주지 않았다. 아버지는 딸이 엄마를 닮아 성격이 못됐다며 다락방에 가두기 일쑤였다. 그럴 때마다 짱아이링은 다락방의 작은 창문을 바라보며 수많은 상상을 창틀 속에 채워놓곤 했다.
중학생 시절 짱아이링은 천재 소리를 들었다. 런던대에 합격했지만 전쟁으로 유학을 포기하고 홍콩대에 입학했다. 일본군이 홍콩을 점령하자 상하이로 돌아와 글을 쓰기 시작했다. 아무리 써도 끝이 없었다. 23세 때 후란청(胡蘭成)을 알게 됐고 동거했다. 후는 일본을 위해 일하는 '문화 매국노(文化漢奸)'였다. 일본이 패망하자 그는 망명했다. 몸 둘 곳이 없어진 짱아이링은 미국으로 건너가 죽는 날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후란청은 대만에 돌아와 대학 강단에 섰지만 과거 전력 때문에 오래 있지 못했다. 그는 귀재였다. 대만에 머문 기간은 짧았지만 문단에 큰 영향을 끼쳤다. 영화로 더 유명한 '비정성시(悲情城市)'는 그를 신처럼 모시던 제자의 작품이다. "루쉰 이후엔 짱아이링”이란 말을 한 것도 후였다.
짱아이링의 만년은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적막 그 자체였다. 피부병이 심해 옷도 종이로 만들어 입었다. 전화도 받지 않았고 사진도 찍지 않았다. 그랬던 그가 북한 김일성 주석의 사망을 보도한 신문을 들고 생애의 마지막 사진을 찍었다. 이유는 알 길이 없다. 그는 한국과 별 인연이 없었다. 무용가 최승희가 유일한 한국인 친구였다.
짱아이링은 1995년 9월 세상을 떠났다. 경찰이 문을 따고 들어가 시신을 발견했다. 사망 일자도 불분명하다. 그의 죽음은 반세기 동안 잊혀졌던 그를 다시 알리는 계기가 됐다. 후란청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도 아직은 없다.
中共 지하당 특공요원 천껑(32) |제33호| 2007년 10월 27일
◀1930년대 옌안 시절의 천껑(가운데). [김명호 제공]
1927년 4월 12일부터 상하이에서 시작된 국민당의 공산당 숙청은 3일 만에 300여 명을 처형하고 500여 명을 체포했다. 5000여 명은 실종되었다. 거리마다 공산당원들의 목이 낙엽처럼 굴러다녔다. 체포된 당원들이 잇따라 투항했다. 중공 중앙은 상하이로 이전했다. 사방에 위험이 잠복해 있었지만 가장 위험한 곳이 가장 안전한 곳이었다.
중앙 군사부장 저우언라이(周恩來)는 같은 해 11월 중앙특과(中央特科)를 설립해 본격적인 지하전쟁에 돌입했다. 중앙위원 꾸순장(顧順章)과 정보과장 천껑이 공작을 지휘했다.
빈민굴 출신인 꾸순장은 키가 작고 비대했지만 권법과 창술의 달인이었다. 남양연초공사 공원 시절 시위와 파업에 두각을 나타내 공산당의 주목을 받았다. 천껑과 함께 소련에 파송돼 공작기술을 익히고 상하이로 돌아와 마술사로 위장했다. 종합 오락장인 ‘대세계(大世界)’에서 연출하던 그의 마술은 일품이었다고 한다. 진한 분장을 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배신자 암살 전담인 홍대(紅隊, 일명 打狗隊)를 지휘했다.
황포군관학교 1기생인 천껑은 전쟁터에서 포위되자 자살하려는 교장 장제스(蔣介石)를 등에 업고 탈출한 적이 있었다. 장제스는 그를 시위참모로 기용해 최측근에 두었다. 그러나 천껑은 공산당원이었다. 장제스를 떠나 무장봉기에 참가했다. 총상을 치료하러 상하이에 왔다가 저우언라이에 의해 특과공작에 투입되었다. 적의 심장부에 요원을 침투시켜 고급정보와 체포된 동지들을 끄집어 내오는 일이 그에게 주어진 임무였다.
1928년 4월 상하이 경찰국은 중공의 비밀 아지트 한 곳을 급습했다. 천껑은 경악했다. 독일어를 할 줄 아는 젊은 부인이 현금 5만원과 여권발행을 조건으로 공산당원 350명의 명단과 거처를 제공하겠다며 경찰국 책임자와 접촉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밀고자는 홍군(紅軍)의 아버지인 주더(朱德)의 전처 허지화(何基華)였다. 허지화와 주더의 결혼생활은 짧았다. 함께 독일 유학까지 떠났지만 의견이 맞지 않았다. 이혼한 허지화는 모스크바로 갔다. 문란한 생활을 했다고 하지만 근거는 없다. 귀국 후 상하이에서 지하공작에 종사했지만 공산당에 실망했다. 새로운 출로를 모색하던 중이었다.
꾸순장은 허지화의 집을 습격했다. 천껑도 함께 갔다. 허에게는 새로 결혼한 남편이 있었다. 아직 넘겨주지 않은 당원들의 명단을 찾아내고 두 사람을 사살했다. 그러나 남편만 죽고 허지화는 죽지 않았다. 고향 쓰촨(四川)으로 돌아간 허지화는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은둔 생활을 했다. 천껑이 가지 않았다면 허는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꾸순장과 천껑은 중앙특과의 전반기를 대표하는 인물들이다. 그러나 이들의 운명은 엇갈렸다. 꾸순장은 우한(武漢)에서 체포되자 투항했고 기밀을 다 털어놓았다. 상하이 지하당은 큰 손실을 봤다. 꾸는 교활하고 모략에 출중했지만 건달기질이 강하고 성격이 산만했다. 저우언라이와 천껑은 꾸순장을 캉셩(康生)과 교체하려던 참이었다. 천껑은 상하이를 떠나 전선으로 갔다. 또 부상을 입었다. 치료차 다시 상하이에 왔다가 체포되었지만 장제스는 과거의 제자이자 생명의 은인인 천껑을 탈옥시켰다.
천껑은 장정(長征)을 거쳐 항일전쟁과 해방전쟁에서 전공을 세웠고 한국전쟁에도 지원군 부사령관으로 참전했다. 1955년 그에게는 대장(大將) 계급장이 주어졌다.
자본론을 중국에 처음 들여온 馬一浮(33) |제34호| 2007년 11월 3일
◀자본론을 중국에 처음 들여온 馬一浮
마이후(馬一浮, 1883∼1967)는 철학과 문학에 정통했던 학자이며 시인이고 서예가였다. 외국어도 영어와 프랑스어·독일어·일본어·스페인어·라틴어를 자유롭게 구사했다. 서법과 시(詩)는 유행을 따르지 않았고 속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저장(浙江)성 샤오싱(紹興)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책이라면 닥치는 대로 읽었다. 항저우(杭州)에 황실 장서각인 문란각(文欄閣)이 있었다. 사고전서(四庫全書)가 소장된 곳이었다. 소년 시절 3년간 문란각 인근의 광화사(廣化寺)에 기거하며 사고전서 3만6000여 권을 다 읽었다고 한다. 중국의 전통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지만 서구의 문화와 학술에 관한 호기심도 많았다. 영·불·독어를 익히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했다.
20세 되는 해에 미국으로 갔다. 세인트루이스에 머물며 도서관과 서점을 학교 삼아 아리스토텔레스·헤겔·다윈·단테 등 서구의 사상과 문학에 심취했다. 4년간을 그러다가 독일 문학에 흥미를 느껴 다시 독일로 갔다. 독일에서 『자본론』을 처음 접했다. 그는 저자의 이론과 풍부한 지식, 세련된 문장에 푹 빠져 들었다. 감상하며 탄복하기를 반복했다.
1905년 마는 귀국길에 올랐다. 일본에 한동안 머물렀다. 일본인들도 『자본론』을 모를 때였다. 경쟁이라도 하듯이 그를 찾아와 가르침을 구했다. 일본에선 이때부터 『자본론』이 전파되기 시작했다. 그의 귀국은 “마르크스주의의 중국 전파사”라는 면에서 큰 의의를 갖는 사건이었다.
마이후는 친지와 친구들에게 열정적으로 『자본론』을 소개하고 선전했다. 그러나 읽고 감상하는 데 그쳤을 뿐 번역해서 전파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서구의 선진사상을 소개하기 위해 ‘20세기 번역세계’라는 잡지를 창간해 ‘프랑스 혁명당사’ ‘러시아의 허무주의사’ 같은 글들을 발표했지만 『자본론』에 관해서는 내용의 일부라도 소개하지 않았다. 그러나 하루도 빠짐없이 자본론을 읽으며 경탄하곤 했다.
그는 정치나 사회 문제에는 관심이 없었다. 1912년 1월 난징에 설립된 중화민국 임시정부는 마이후를 교육부 비서장에 임명했다. 1개월 후 “독서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관료가 되려면 또 다른 학문이 필요하다. 나는 소질이 없다”라며 사직했다. 베이징대학 교수직도 거절했다. 20년대 중반 동남지구 5개 성의 통치자인 대군벌이 마이후와 시국담을 나누려 항저우에 왔을 때도 “병이 깊어 완치가 되지 않았다”며 만나기를 거절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에도 그의 학자생활은 변하지 않았다. 초대 상하이 시장이 된 화동군사령관 천이(陳毅)는 군인이었지만 지식인들을 존중했고, 본인도 시인이었다.
천이는 마이후를 방문했다. 마이후는 손님이 온 줄 모르고 잠에 취해 있었다. 그날따라 비가 내렸다. 천이는 몇 시간을 문 앞에 서서 기다렸다. 사람들은 “馬門立雨(마이후의 문전에 서서 비를 맞으며 기다리다)”라며 두 사람을 칭송했다. 이날을 계기로 마와 천은 평생 친구가 되었다.
마이후가 처음 들여와 감상하고 음미하기를 반복하던 『자본론』은 1920년대 말에서 30년대 초에 와서야 젊은 학자들에 의해 소개되기 시작했다. 1930년 최초의 중역본이 나왔지만 원본의 1부 중 1편만 번역한 것이었다. 완역본은 1929년 궈다리(郭大力)와 왕야난(王亞南)이 번역에 착수해 9년 만인 1938년에 출판되었다. 마이후가 독일어 원본을 들여온 지 33년 만이었다.
江靑의 첫번째 남자, 黃敬과 그의 가문(34) |제35호| 2007년 11월 11일
◀학생운동 영수 시절 베이징의 전차 위에서 연설하는 황징. 김명호 제공
톈진 사람들은 지금도 황징(黃敬·兪啓威) 얘기만 나오면 명시장이었다고 찬양한다.
그는 초대 시장이었다. 1949년 1월 15일 제4야전군이 톈진을 점령하면서 시장 겸 당서기에 임명된 황징은 단절된 전화·전기·수도·전차를 취임 3일 만에 개통시켜 시민들의 막연한 두려움을 해소시켰다. 1년 만에 공기업 생산력이 국민당 통치 시기를 초과했고 사기업도 원래 수준을 회복했다.
황징은 칭다오대학 재학 시절 도서관 직원인 18세의 장칭(江靑)을 공산당에 입당시킨 후 2년간 동거한 장칭의 첫 번째 남자였다. 또 국민정부에 항일을 청원하러 난징에 가기 위해 열차를 탈취했다가 퇴학당한 중국 최초의 열차탈취범이었다. 부친 위다춘(兪大純)이 철도국장을 지내 기차를 가까이할 기회가 많았다.
황징은 저장성 사오싱의 명문 출신이었다. 조부 위밍전(兪明震)은 태평천국을 진압한 쩡궈판의 손녀와 결혼했다. 대만포정사를 지낸 후 강남 수사학당 교장을 지냈다. 루쉰은 그가 아끼던 제자였다. 신문화 운동이 배출한 대표적인 학자로 베이징대학과 대만대학 총장을 역임한 푸쓰녠(傅斯年)은 고모부였고 저명한 희극연구가이며 칭다오대학 총장이었던 자오타이머우(赵太侔)가 매형이었다. 누이는 당시 양쯔강 이남의 연극계를 평정한 ‘남국극예사’의 대스타였다. 장칭과 헤어진 황징은 베이징대학 수학과에 입학해 야오이린과 함께 1·29 운동을 주도했고 항일전쟁이 폭발하자 항일근거지 건설에 참여키 위해 옌안행을 택했다. 그곳에서 팔로군 총정치부 전선기자단 종군기자인 판진(范瑾)을 만나 결혼했다. 판진은 당원교재인 ‘중국통사간편’의 저자 판원란(范文瀾)의 친동생이다. 건국 후 판진은 베이징일보 사장과 초대 베이징 부시장을 역임했다. 문혁 시절 장칭은 첫 애인의 부인인 판진을 심할 정도로 박해했다.
황징에게는 위다웨이(兪大維)라는 숙부가 있었다. 하버드에서 철학과 수학으로 학위를 받았고 독일 유학 시절에는 아인슈타인의 지도를 받았다. 군인이 되는 게 소원이었던 그는 귀국 후 군문에 투신해 육군 중장으로 예편한 뒤 교통부장을 지냈다.
1950년대 중반 중공의 진먼다오 포격으로 국공 간에 치열한 포격전이 전개될 때 대만의 국방부장이 위다웨이였다. “내가 갈 수 없는 곳엔 부하도 보낼 수 없다”는 게 그의 좌우명이었다. 매주 두 번 전선에 나가다 보니 국회에 출석할 틈이 없었다. 의원들이 비난하자 “전선의 정세는 하루가 다르게 급변한다. 나는 적과 싸우는 국방부장이지 너희들과 앉아 회의로 시간 보내는 국방부장이 아니다”며 의원들을 질타했다. 60세 나이에 정찰기를 타고 19차례 대륙을 정찰해 부하들로부터 '위 대담'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위다웨이의 아들은 장제스의 손녀와 결혼해 장징궈의 사위가 됐다.
황징은 판진과의 사이에 2남1녀를 두었다. 딸은 문혁 때 사망했다. 장남 창성(强聲)은 건국 후 최고의 반역자가 됐다. 정보기관에 근무하다가 1986년 미국에 망명해 중국 기밀을 털어 놓았다. 미국에서 암약하던 중국 간첩들은 그의 배신으로 하루아침에 일망타진됐다. 40년간 미국에 잠복해 있던 중국의 한 정보원은 체포된 후 자살했다. 창성도 몇 년 후 남미에서 행방불명됐다.
황징은 기계공업부장을 5년간 역임하다 1958년 4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과로였다. 황징의 건강을 염려한 마오쩌둥은 “쉬어라. 청산(靑山)은 영원하다. 땔감 없어질 것을 두려워 마라”며 요양을 권했지만 허사였다.
황징의 가계도를 보면 국공 양당의 최고 지도부에서 시작해 문인·학자·언론인·예술가와 반역자에 이르기까지 명인이 아닌 사람이 없다. 얼마 전 후베이성 서기 위정성(兪正聲)이 상하이시 서기로 부임했다. 위정성은 황징의 차남이다.
영화 ‘색, 계’의 실제 모델 띵무춘과 쩡핀루(35) |제36호| 2007년 11월 17일
▲1947년 남경 전범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는 띵무춘(왼쪽). 오른쪽은 25세 당시의 쩡핀루. [김명호 제공]
중일전쟁(1937∼45) 기간 중 일본은 상해 지샤훼이로(路) 76번지에 특무기관을 설립했다. 중앙특무위원회 특공총부라는 공식 명칭이 있었지만 흔히들 “76호”라고 불렀다. 띵무춘(丁默邨)이 주임이었고 부주임 리스췬(李士群)과 우스빠오(吳世寶)는 실권자였다.
재봉과 표구를 겸하던 집에서 태어난 띵무춘은 공산주의청년단(공청)의 전신인 사회주의청년단 단원이었지만 국공합작 직후 국민당에 입당하면서 특무세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공개된 신분은 ‘민당중학’ 교장이었지만 실제로는 조사과의 행동대원을 지휘해 암살과 테러를 전담했다.
1934년 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이 신설될 때 그는 3처장이었다. 그러나 1938년 기구가 개편되면서 1처는 중앙위원회 조사통계국(중통)으로 확대되고 2처는 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군통)으로 승격했다. 3처의 기능은 두 곳에 편입되었다. 띵무춘은 미래를 기약할 수 없게 되었다. 폐병 3기였고 심장과 위장이 성치 않았던 그는 홍콩으로 나와 병을 치료하며 사업에 손을 댔지만 본전을 날려버렸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일본의 특무기관이 유혹하기에 좋은 대상이 되어 있었다.
상해로 돌아와 76호의 주임이 된 띵무춘은 일본군 특무부대로부터 매달 30만원의 운영비와 권총 500정, 실탄 5만 발, 폭약 500㎏을 지원받아 중통과 군통에 대한 본격적인 파괴공작에 나섰다. 중통 중앙총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띵무춘을 암살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중통 상해 지부는 미인계를 썼다. 띵무춘이 교장 시절 아끼던 제자 쩡핀루를 써먹기로 했다. 양우화보(良友畵報)의 표지모델로 사교계에 널리 알려진 그를 끌어들이기 위해 쩡의 상해법정대학 동기생이 작전을 지휘했다. 쩡핀루는 많은 사진을 남겼다. 같은 모습의 머리 모양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치장에 신경을 많이 썼고 화려한 것을 좋아했다. 열정과 충동이라는 단어가 잘 어울리는 26세의 철모르는 귀한 집 딸이었다.
부친은 장쑤(江蘇)성 고등법원 검사관이었고 모친은 일본인이었다. 항공기 조종사인 남편이나 다름없는 약혼자가 있었지만 중통은 그것도 고려할 대상으로 삼지 않았다. 그만큼 흉악한 시대였다.
띵무춘은 욕실에서 밤을 새우고 욕조 위에 간이침대를 올려놓고 잘 정도로 의심이 많았다. 쩡을 바래다 줄 적에도 방탄차에서 내리지 않았고 약속 장소로 가는 도중 행선지를 바꿔버리는 습관이 있었다. 1939년 12월 21일 띵무춘은 일본특무부대장과의 만찬에 쩡과 동행하자고 했다. 쩡은 화장을 핑계 삼아 시간을 벌었고 그 틈에 중통과 연락했다. 만찬 장소로 가던 도중 “입고 있는 코트가 유행이 지났다. 시베리아 모피점에 들러 한 벌 사야겠다”고 했다. 미리 약속된 장소가 아니었기 때문에 띵무춘은 안심했다. 함께 옷을 고르던 띵무춘이 창밖을 스쳐본 후 황급히 200달러를 꺼내 쩡에게 건네주며 “네가 알아서 골라라” 하고는 밖으로 뛰어나가 방탄차에 올랐다. 죽여야 할 사람의 얼굴도 모르고 긴 모피코트를 입은 젊은 여자와 함께 나오는 중년의 남자를 기다리던 암살자는 띵무춘이 혼자 튀어나오는 바람에 저격 순간을 포착하는 데 실패했다. 차량을 향해 실탄 두 발을 발사하는 데 그쳤다.
30, 40년대의 상해는 암살과 살인이 난무하는, 단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는 곳이었다. 이날의 총격 사건도 워낙 번화가에서 벌어진 일이었기 때문에 신문에 작게 보도되기는 했지만 흔히 벌어질 수 있는 일이었고 띵무춘도 조용히 수습하려고 했다. 그러나 동료 우스빠오를 독살한 바 있는 부주임 리스췬은 이 사건을 이용해 띵무춘마저 제거하면 76호의 전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띵무춘의 주변을 항상 감시하던 리스췬은 쩡핀루를 체포해 사살해버렸다. 띵무춘은 76호를 떠났다.
남경정부의 문화부 차장이었던 후란청은 이 사건을 아주 재미있어 했다. 동거하던 소설가 짱아이링에게 자신의 상상까지 덧붙여 자주 얘기했다. 후란청이 70년대에 절세의 미인이었던 우스빠오의 부인과 일본에서 결혼하자 그 소식을 들은 짱아이링은 후란청과 우스빠오의 부인이 예전부터 연인 사이였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40년 전 들었던 ‘시베리아 모피점 총격사건’을 소재로 ‘색,계’라는 단편소설을 써서 대만의 ‘人間’이라는 잡지에 발표했다. 감정(色)과 이성(戒)이 주제였다.
2006년 상해영화제에 참석한 리안(李安) 감독은 짱아이링의 소설 중에서 ‘색,계’를 가장 좋아한다고 했다.
영화 色戒를 보시려면 상단 중앙에 있는 배경음악은 잠시 꺼주세요.
重慶에 온 시인 毛澤東(36) |제37호| 2007년 11월 24일
▲마오저둥은 1945년 8월 28일부터 10월 10일까지 총칭 회담 기간 중 다양한 인사들과 교류를 가졌다. 9월 16일 미국 조종사들과 함께 포즈를 취한 마오(왼쪽 사진 가운데). 마오저둥은 1936년 장정 중 자신이 직접 쓴 ‘沁園春.雪’을 그 후 45년 총칭 담판 때 만난 시인 류야즈에게 다시 써 건네주었다(오른쪽 사진). [김명호 제공]
1945년 8월 10일 소련 홍군이 중국의 동북지역에 진입해 관동군을 괴멸시키자 일본은 무조건 항복했다. 중국은 전승국이 되었다. 모든 불평등조약은 폐기되었고 5대 강국의 하나로 국제적 지위가 상승했다. 남은 일이라곤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고 부강한 중국을 건설하는 것밖에 없는 듯했다. 그러나 국공(國共) 양당이 합작해 치른 8년의 전쟁 동안 공산당은 점령지역에서 국민정부의 통치력을 와해시켰고 전쟁 초기 5만 명에 불과했던 군사력도 약 130만 명까지 늘었다. 국민당 군정계통에도 상당수의 공산당 비밀당원이 있었고 일부는 지휘계통 핵심부까지 침투해 있었다. 전후의 통화팽창과 부패도 극에 달해 내전은 시간문제였다.
미국은 국공 양당의 회담을 주선하며 장제스를 압박했다. 장은 8월 14일부터 세 차례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주석 마오저둥에게 전보를 보내 총칭(重慶)에서 회담할 것을 제의했다. 공산당도 국민당과 기타 민주당파와 함께 협의해 단결을 공고히 하고 통일의 실현을 희망한다는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다. 45년 8월 28일 마오는 중국 주재 미국대사 등과 함께 근거지 옌안(延安)을 떠나 임시수도 총칭에 도착했다. 난생 처음 타본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나는 평화를 위해 왔다”라는 성명을 발표하고 “장 위원장 만세”를 불렀다. 첫날부터 두 사람은 같이 사진 찍고 서로의 숙소를 방문해 산책하며 무려 43일간 기(汽)싸움을 벌였다.
회담 기간 마오는 외교사절을 비롯한 각 방면의 인사들과 폭넓게 접촉했다. 특히 시인 류야즈(柳亞子)와의 만남을 즐거워했다. 마오는 자신의 시(詩) 한 편을 붓으로 써서 류에게 선물했다. 36년 장정 도중에 쓴 ‘沁園春.雪’이라는 작품이었다.
북녘의 風光은 千里에 얼음 덮이고, 萬里에 눈발 날리네. 바라보니 長城 안팎은 망망한 白雪 天地, 大河의 상·하류 할 것 없이 도도한 기세 이뤘다. 山은 춤추는 은색의 뱀이런가. 高原은 내달리는 밀랍의 흰 코끼리, 저마다 하늘과 키를 겨루려 하네. 이제 다시 날이 개면 붉고 흰 옷차림의 모습은 유난히도 아름다우리, 이토록 아름다운 江山이기에 수많은 英雄들도 다투어 허리 굽히게 하였네. 아쉽게도 진시황과 한무제는 文彩가 모자랐고, 당 태종과 송 태조는 詩에 손색이 있었다. 一世를 풍미하던 하늘의 아들 칭기즈칸도 활 당겨 독수리나 쏠 줄밖에 몰랐거니. 그러나 이 모두가 지나간 일, 정녕 風流人物 꼽으려거든 오히려 이 時代를 보아야 하리.
沁園春.雪(一九三六年二月)
北國風光,千里氷封,万里雪飄 望長城內外,惟餘莽莽; 大河上下,頓失滔滔. 山舞銀蛇,原馳臘象,欲與天公試比高. 須晴日,看紅粧素裹,分外妖嬈. 山如此多嬌,引无數英雄競折腰. 惜秦皇漢武,略輸文采; 唐宗宋祖,稍遜風騷. 一代天驕,成吉思汗,只識彎弓射大雕. 俱往矣,數風流人物,還看今朝.
류도 즉각 화답하는 시를 보냈다. 마오는 이에 다시 답하며 “우리의 앞날은 밝다. 그러나 수많은 곡절이 따를 것이다”라고 재차 강조했다. 류는 마오가 총칭을 떠난 후 신화일보(新華日報)에 ‘沁園春.雪’과 자신의 화답시를 발표했다. 소설가 짱한수이(張恨水)도 “潤芝(마오의 字)가 詩에 능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沁園春.雪’을 읽다 보면 풍격의 독특함을 알 수 있다”며 자신이 주간이던 신민보(新民報)에 마오의 시를 게재했다. 대공보(大公報)에는 두 사람이 주고받은 詩와 평론이 3일 연달아 실렸다. 사람들 모이는 곳마다 마오의 시가 화제가 되기 시작했다. 암송하고 곡을 붙여 노래하며 마오야말로 진정한 “風流人物”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났다.
국민당 통치지역의 지식인들 중에는 마오에 관해 아는 사람이 극히 적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장정 도중 구이저우(貴州)에서 마오타이주(酒)에 발을 닦았다며 산채의 두령 정도로 알고 있는 사람이 대다수였다. 장제스도 ’沁園春.雪’이 딴 사람의 작품을 도용한 것은 아닌지, 마오가 쓴 것이 사실이라면 사람들이 열광하는 만큼 빼어난 작품인지를 측근에게 여러 차례 물었다고 한다.
총칭 담판은 모순을 해결하지 못한 실패한 회담이었다. 그러나 중국인들에게 미래의 지도자로 누가 적합한가를 저울질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두 사람 중 한 명을 선택해야 할 때 가장 결정적인 것은 누가 더 ‘매력’이 있느냐다. 담판 기간 동안 대다수의 중국인들은 마오에게서 그 매력을 발견했다.
‘혁명 기지’ 황포군관학교의 탄생(37) |제38호| 2007년 12월 1일
▲1924년 6월 16일 황포군관학교 1기생 입학식에 참석한 쑨원(가운데). 오른쪽에 군복을 입고 차렷 자세로 서있는 이가 교장 장제스. [김명호 제공]
황포군관학교는 소련 홍군의 건군 원칙과 작전 경험을 바탕으로 쑨원(孫文)에 의해 설립된 중국 최초의 현대적 군사학교다.
쑨원은 가는 곳마다 혁명을 역설했지만 군사력이 없는 혁명가였다. 그에게 감복한 용감하고 성질 급한 동조자들이 수없이 죽어갔지만 되는 일은 하나도 없었다. 나중에는 군벌의 역량을 이용해 혁명을 완수하려는 환상까지 품게 되었다. 1921년 코민테른 대표 마링이 군관학교 건립과 혁명군대 창설을 건의했다. 소련을 모방해 혁명군대를 양성하지 않는 한 혁명은 성공할 수 없다고 쑨원을 설득하며 지원을 약속했다. 갓 창당한 공산당으로부터는 군사투기꾼이라는 소리까지 듣던 참이었다. 건의와 독촉과 필요성에 의해 쑨원은 1924년 국민당을 개조하고 공산당과 합작해 군관학교 설립에 착수했다.
광저우(廣州) 교외 황포 나루터 건너 창저우다오(長洲島)에 있던 광동육군학교(廣東陸軍學校)와 해군학교(海軍學校)가 사관학교 부지로 선정되었다. 교명은 ‘육군군관학교’였지만 황포에 위치했기 때문에 ‘황포군관학교’라고 부르던 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정식 명칭처럼 되어 버렸다. 운영은 소련 홍군의 정치위원 제도를 본받았다. 혁명간부를 양성하고 군벌 관료의 도구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당에서 대표를 파견했다.
모든 명령은 당대표를 경유해 교장이 집행하게 했다. 당대표를 거치지 않은 교장의 명령은 무효였다.
쑨원은 초대 교장으로 청첸을 염두에 두었고, 장제스(蔣介石)와 리지션(李濟深)을 부교장에 임명하려고 했다. 광동군사령부 참모장이었던 장제스는 반발했다. 당과 군 경력이 가장 후배였지만 청첸의 밑에는 있을 수 없다며 광저우를 떠나 상하이로 가버렸다. 쑨원의 친구들을 찾아다니며 불만을 토로했다. 상하이에 있던 국민당 원로들이 광저우까지 와서 쑨원을 설득했다. 결국 장제스를 교장에 임명하고 부교장 제도는 없애버렸다. 쑨원은 장제스에게 온갖 추앙을 다 받았지만 그것은 사후의 일이다. 생전에는 장제스 때문에 체면을 깎인 적이 여러 번 있었다.
학생 모집은 광저우에서 공개적으로 했다. 군벌이 장악하고 있던 지역의 공산당과 공산주의청년단 지부는 군벌들 몰래 응시생을 모집해 광저우로 보냈다. 선발 기준은 엄격했다. 선발이 끝난 후 도착한 쓰촨 지역 응시생 20여 명을 추가로 합격시킨 것을 포함해 1기생 639명을 선발했다. 이들의 문화 수준은 다양했다. 해외 유학생과 대학생에서부터 학교 문턱에도 못 가본 사람 등 각양각색이었다. 후배들에게 창군의 주역이 되어 통일과 혁명의 제단에 고귀한 선혈을 뿌려야 한다며 해외에서 지원자를 모집해 직접 광저우까지 인솔해 온 유학생도 있었다. 그중에는 혼자 돌아가자니 눈치가 보여 어쩔 수 없이 응시했다가 후배들은 떨어지고 혼자만 합격한 사람도 여러 명 있었다.
1924년 6월 16일 1개월간 기초교육을 받은 1기생들의 입학식이 성대하게 열렸다. 쑨원은 “중국혁명이 지지부진하고 성공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진정한 무장혁명 대오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간 무장 세력들은 혁명이라는 미명하에 사욕에만 탐닉한 인민의 죄인이었다. 우리의 사명인 진정한 혁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당을 개조하고 군대를 소유하고 농민과 노동자에 대한 정책을 제시하고 실현해야 한다. 우리의 무력은 민중과 결합해야 하고 결국은 인민의 무력이 돼야 한다”고 생도들에게 훈시해 축하하러 온 군벌들을 어리둥절하게 했다.
황포군관학교는 1927년 4월 폐교될 때까지 1만5400여 명의 장교를 배출했다. 존속기간은 3년에 불과했지만 무수한 혁명가와 군사가를 배출한 세계 4대 사관학교 중 하나였다. 졸업생 중에는 4기 24명, 7기 34명 등 총 58명의 한국인이 있었다.
1950년대 동남아 최고 갑부 何東(38) |제39호| 2007년 12월 9일
◀홍콩에서 교자를 타고 외출하는 호퉁. [김명호 제공]
아편전쟁에서 완승한 영국은 청나라 조정을 윽박질러 홍콩을 빼앗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청은 무인도나 다름없는 섬 하나를 은혜를 베푸는 셈 치고 주었다며 오히려 '영국인의 무지함'을 비웃었다. 청은 내심 천혜의 항구인 닝보(寧波)를 내놓으라고 할까봐 우려하고 있었다. 청으로선 또 전투마다 전멸은 당했어도 항복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이 웃지 못할 유일한 자랑거리였다.
1841년 1월 26일 홍콩은 정식으로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서구의 상인과 군인들이 홍콩으로 건너오기 시작했다. 중국인들도 마찬가지였다. 10여 년이 지나자 거리엔 중국인 엄마의 손을 잡고 다니는 혼혈아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중·서 문화 교류의 가장 확실한 결정체였다.
혼혈아들은 1850년대와 1860년대에 급속도로 늘어났다. 부모들은 따로 사는 경우가 많았다. 19세기 중엽 중국인과 서구인은 생활 습관이 워낙 달라 함께 생활하는 게 도저히 불가능했다. 자녀들은 엄마와 함께 외가에서 살며 전통적인 중국식 가정교육을 받다가, 진학 연령이 되면 영국인이 설립한 정부중앙중학(政府中央中學) 등에서 서구식교육을 받았다. 모든 부담은 아버지 쪽에서 하는 게 관행이었다.
영어를 할 줄 아는 중국인이 극소수였던 시절이었다. 중국어와 영어에 능통한 혼혈아들은 자라서 중·영 무역의 교량 역할을 했다. 영국인 회사에 취업해 일을 배운 후 독립해 부를 축적한 미남 혼혈아들이 늘어났다. 총명하지 않은 혼혈아는 없다는 말도 생겨났다. 생활방식과 행동은 중국인보다 더 중국적이었지만 사고는 서구적인, 그래서 가장 홍콩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은 후일 홍콩경제의 지주(支柱)가 되었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1950년대 동남아 최고의 갑부 소리를 듣던 호퉁(何東, Sir Robert Ho Tung, 1862~1956)이다.
호퉁은 16세 때 단 한 명만 선발하는 광둥 세관원 모집시험에 합격했다. 높은 보수에 안정된 직장이었다. 2년을 근무했다. 어느 날 문득 세관은 발전할 기회가 적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로 사직했다. 홍콩 이화양행(怡和洋行)에 중·영 무역부 통역으로 취직한 호퉁은 2년 만에 계열사인 홍콩화재보험과 광둥해상보험의 경리를 겸직하게 됐다. 하루가 멀다 하고 대형화재가 발생하고, 해상에선 선박 충돌사고가 없는 날이 없을 때였다. 뛰어난 언변과 성실 하나로 깜쫑(金鐘)과 쭝환(中環) 일대의 땅을 시가의 1%에 불하받아 홍콩 부동산계의 깨질 수 없는 기록을 세운 호퉁은 1900년 친동생 호푸(何福)를 후임으로 추천하고는 20년간 근무하던 이화양행에서 퇴사했다. 풍부한 경험을 쌓은 그는 이미 홍콩 중국인 상단(商團)의 영수가 되어 있었다.
호퉁은 1906년부터 홍콩과 구룡(九龍)반도 일대의 토지와 건물을 매입하기 시작했다. 중구(中區)와 영국인 거주지역인 반산구(半山區)의 토지를 야금야금 구입했고, 구룡공원에서 몽콕(旺角)까지 대로변의 낡은 건물과 신계(新界)의 땅도 닥치는 대로 사들였다. 불과 몇 년 사이에 홍콩의 대지주가 된 그는 사들인 땅에 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건물명에는 그의 이름인 ‘동(東)’과 부인의 이름에서 따온 ‘영(英)’을 많이 사용했다. 그의 건물들은 볼품없고 큰 것이 특징이었다. 완공된 후에도 층수를 계속 높였기 때문이다. 작은 건물은 예뻐야 하지만, 워낙 크다 보면 모양은 아무래도 좋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호퉁은 많은 일화를 남겼다. 정변에 실패하고 도망 온 캉유웨이(康有爲)를 숨겨주었고, 중·일 전쟁이 발발하자 전투기를 구입해 중국에 보냈다. 아들도 중국군대에 입대시켰다. 아들 한 명 정도는 전사해야 집안에 체면이 선다고 생각했다. 아들은 훗날 친황다오 요새사령관까지 역임하며 중장으로 전역했다. 호퉁은 80세부터는 어디를 가든지 걸어다녔고 공원에 갈 때만 교자(轎子)를 탔다. 홍콩인에게 처음 수여되는 작위를 받으러 영국에 갈 때는 중국 전통복장을 했고, 세 명의 부인도 중국 여자였다. 애인도 모두 중국인이었다. 며느리와 사위도 중국인이 대부분이었다. 94세로 세상을 떠나는 날에도 그는 두뇌운동을 위해 황금 가격과 런던·뉴욕·도쿄의 주가를 세 번 확인했다.
지질학의 태두 웡원하오의 굴곡진 삶(39) |제40호| 2007년 12월 15일
▲1957년 5월 광산 노동자들의 삶을 살펴보기 위해 찾은 산시(陝西)성의 한 광산에서 식사하는 여공들과 담소를 나누는 웡원하오(가운데 안경 쓰지 않은 사람). [김명호 제공]
1930년대 초 교육부 차장 첸창자오(錢昌照)의 제안으로 정부 요직을 차지하는 학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국가 장래를 위해서라며 요구하지도 않는 보고서를 만드느라 온밤을 새우고, 채택되지 않아도 기 죽는 법이 없으며, 평소엔 온갖 자문에 응하느라 눈코 뜰 새 없었던 학자들은 이제야 정부가 사람을 알아본다며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관계(官界)로 나아가면, 자신들이 연구하던 분야에 공백이 클 것을 우려했지만 그런 일은 발생치 않았다. 그러나 바라지도 않던 '인재내각(人才內閣)’에 징발당해 비극인지 비운인지 분간하기 힘들 정도의 드라마를 연출한, 중국보다 해외에서 먼저 업적을 인정받은 세계적인 광물지질학자가 한 사람 있었다.
웡원하오(翁文灝)는 13세 때(1902년) 향시(鄕試)에 합격한 수재(秀才)였다. 벨기에 루뱅대에 유학해 1912년 학위를 받고 곧바로 귀국해 20년간 지질연구소에 봉직하며 그가 이뤄낸 업적은 모두 중국 최초의 것들이었다.
중국 최초의 지질학 박사였고, 최초로 광산지를 편찬했다. 전국의 지질도를 최초로 작성했고, 중국 최초의 유전인 옥문(玉門)유전도 발견했다. 1920년 깐쑤(甘肅)에 진도 8.5의 지진이 발생했을 때 현장에 달려간 유일한 중국 학자였고, 중국 최초의 지진구획도를 작성했다. 구조지질학과 역사지질학 방면에도 공헌이 컸다. 저우커우뎬(周口店)에서 출토된 베이징원인도 신생물연구소를 주도할 때 이뤄낸 업적 중 하나였다.
땅 위에서 기상천외한 일들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벌어지던 시대였다. 중국인의 생활과 미래를 바꿀 수 있는 어떤 물건들이 땅속에 있는지에 대해선 관심이 없을 때였다.
1932년 여름 첸창자오는 장제스에게 웡원하오를 데리고 갔다. 웡은 중국 전역에 산재한 광산자원의 종류와 매장량을 설명했다. 내륙에 중공업기지 건설도 가능하다고 했다. 구체적인 방안도 제시했다. 장제스는 3일 동안 웡원하오의 말을 경청했다. 시종일관 덕(德)과 재(才)를 감상하는 모습이었다. "내가 먼저 반성하겠다. 인재들을 찾아내 능력을 펼칠 수 있도록 하겠다"며 국방설계위원회 비서장을 맡아 달라고 했다. 웡은 거듭 사양하고 지질연구소로 돌아왔다.
다음해 정부는 웡원하오의 교육부장 임명을 발표했다. 웡은 계모의 상을 치러야 한다며 거절했다. 6개월간 부장이 공석이었지만 그는 끝내 취임하지 않았다. 칭화대 학생들이 총장을 내쫓았을 때 후임에 임명됐지만 학교가 안정을 되찾자 3개월 만에 사직했다. 중앙연구원 원장 선출투표에서 후스(胡適)보다 많은 표를 얻었을 때도 의아해하는 사람이 없었고, 취임을 사양했을 때도 의아해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만큼 웡원하오는 학술계의 상징적 인물이었다.
그의 운명을 결정짓는 사건이 발생했다. 1934년 설날 무렵 저장성에서 교통사고로 머리에 큰 부상을 입었다. 석유 탐사 중이었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사람이라고 신문마다 대서특필했다. 가족들은 뒷일을 준비했지만 장제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의료팀을 조직하게 했고, 저장성 주석을 병원에 상주시켰다.
일 년 후 장제스는 웡원하오를 행정원 비서장에 임명했다. 웡은 평소 장제스의 '불치하문(不恥下問)’과 '예현하사(禮賢下士)’하는 태도에 호감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교통사고 이후 장은 ‘생명의 은인’으로 웡의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웡은 서재(書齋)를 떠났다. 그의 정계 진출은 은혜에 대한 보답이었다. 13년간 실업부장, 재정부장, 자원위원회 위원장을 거쳐 1948년엔 내각 수반인 행정원장이 되었다. 국민당 몰락의 계기가 된 금원권 화폐 개혁이 실패하자 사직했다. 장제스는 아들 장징궈를 보내 만류했지만 두문불출하며 만나지 않았다.
공직에서 물러난 웡원하오는 유럽행을 택했다. 중공이 전범 명단을 발표했다. 여덟 번째에 그의 이름이 있었다. 미국의 여러 연구기관에서 고액 연봉을 제의했고, 타이완의 국민정부는 귀국을 재촉했다. 웡원하오는 제3의 길을 택했다. 저우언라이에게 편지를 보냈다. ‘조국에 돌아가 무슨 일이건 다하겠다. 그러나 장제스에 대한 비판만은 강요하지 말아 달라’고 간청했다. 중공은 두말없이 그의 요구를 수용했다.
1951년 귀국한 웡원하오는 번역과 연구활동에만 전념했다. 문화대혁명이 발생했을 때도 철저한 보호를 받다가 1971년 베이징에서 세상을 떠났다. 사망 소식을 들은 마오쩌둥은 ‘애국자(愛國者)’라는 말로 그의 일생을 정리했다. |
첫댓글 소위 정통으로 역사를 배우고 글을 쓰는 사람들은 이런 소재, 이런 스타일의 글은 잘 안 쓰는데, 글쓴이는 "인물로 보는 중국근현대사"라는 형식으로 잘 풀어내고 있네. 어떤 글은 거의 "野史"로 치부해버릴 만한 글도 있는데 이 역시 신뢰할 수 있는 자료에 의거했다면 읽을 만하다고 생각되네. 중국이나 중국 역사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먹물들의 딱딱한 논문이나 비평만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솔직히 말해 이런 류의 글쓰기는 쉽지 않아서 시도조차 어려운 게 사실이지. 많은 사람들이 삼국지연의나 수호지 등을 통해 중국 역사에 접근하고 이해하는 데서 보듯, 다양한 인간의 郡像에 관한 스케치는
그 자체로 흥미가 있지요. 그런 의미에서 이런 류의 글쓰기 (물론 이 글은 소설이 아니지만)가 더 많이 필요한지도 몰라요. 아무튼 다른 건 몰라도 글쓴이의 광범위한 자료 섭렵에는 높은 점수를 주고 싶네.
우선 머리 싸매지 않고
가볍게 읽을 수 있어서 좋은 글이라 생각하네.
약간의 과장이 없을 수는 없겠지만...
그런 것도 한편으론 재미있고~
중국 이야기가 아니면 어디에 그럴 일이 흔할까!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