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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의 전쟁 -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
단기 3959(1626)년 가을 파리
하루 하루를 힘겹게 지내온 루브르 궁 가로수들의 잎사귀들이 하루가 다르게 파릇함을 잃어갔다.
왕궁 모서리를 돌아 나가는 바람에 루이 13세의 목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끊어졌다 이어지곤 하던
사람의 목소리들이 모퉁이를 돌아 점점 크게 들렸다. 잔뜩 움츠려 있는 말소리가 끝나자 이내 노기가
가득 든 소리와 함께 루이 13세의 모습이 모퉁이를 돌아 나왔다.
리슐리외와 마자랭이 총총걸음으로 나타났다.
“그래서 ?”
“일단은 에드몽을 인정하고 그를 연합 세력으로 끌어들여야 한다는 의견입니다.
지금 급한 것은 에드몽이 아니라 터키와 대한제국의 공격입니다.
총체적인 위협에 직면해 있는 지금, 내전을 벌이는 것은 대한제국을 도와주는 거와 다를 바 없습니다.
에드몽이 한때 대한제국과 손을 잡긴 했지만, 그 역시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인임을
부인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유럽 연합과 프랑스간의 업무 연락관을 맡고 있는 마자랭이 루이 13세를 설득하고 있었지만,
루이 13세는 여전히 떨떠름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하지만 리슐리외는 마자랭의 의견에 반대하고 나섰다.
“안됩니다. 에드몽이 우리와 손을 잡을 것 같지도 않거니와 설사 손을 잡는다 해도 큰 도움이
되긴 힘들 거라는 판단입니다. 농민 무지렁이들로 구성된 군대라는 것이 얼마나 허약한지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
“그렇게 허약한 적에게 영불 연합군이 전멸당했습니까 ?”
“그건… 대한제국놈들 때문에…”
루이 13세가 리슐리외경에게 핀잔을 주었지만, 그건 리슐리외경의 말이 틀려서가 아니었다.
자신의 왕국에서 반란이 일어났는데 그걸 진압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핀잔이기도 했다.
“마자랭 ?”
“말씀하시옵소서”
“그대는 정말로 에드몽이 유럽 연합에 가입할 것으로 보시오 ?”
“그렇습니다. 물론 낭트 칙령에 버금가는 칙령을 발표하셔야 합니다.”
“구교도에서 그걸 가만히 보고 있지 만은 않을 텐데 ?”
“그건… 필요하다면 교황청의 힘을 이용하실 수도 있습니다.
유럽 연합에서는 조만간 그라나다를 공격하고자 합니다.
그전에 로리앙 지방에 대한 결정이 나길 희망하고 있습니다.
에드몽을 끌어드리기만 하면, 그들이 가지고 있는 대한제국의 기술에 좀더 가까이 갈 수 있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구미가 당기긴 했다. 루이 13세가 리슐리외를 바라보았다.
“가능하다면 나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언제까지 로리앙 지방을 그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습니다.
우리를 배신한 대가를 꼭 치르도록 하겠습니다.”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기로 하고. 재상도 동의한 듯 하니, 우선 특사를 로리앙에 보내도록 하지.
그리고 위그노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준다는 칙령 초안을 마련해 보게.”
십만에 가까운 병력이 전멸하면서 폴란드가 대한제국에게 맥없이 무너지자, 유럽 연합은 급속도로
뭉쳐지기 시작했다. 거기에 영국에서 불어온 무기의 개량화가 신성로마제국을 거쳐 프랑스로
유입되면서 유럽 연합군의 전력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영국 런던 유럽연합군 총지휘부
유럽연합의 창설과 동시에 창설된 유럽 연합군 총사령관에게 유럽 내 모든 군사력, 육군과 해군에
대한 지휘권이 주어졌다. 각국 최고 통치자들의 지지를 얻고 있는 유럽 연합군은 우선적으로 지방의
중소 영주들에게 소속된 병력을 하나로 묶고 해적들을 포함한 모든 상선단과 해군을 통합하여
유럽사상 전례가 없는 대규모 병력을 휘하에 두고 있었다.
몇몇 영주들의 반발이 있었지만, 유럽 연합군은 무력 진압과 설득을 병행하여 적절히 구사함으로써
꾸준히 세력을 키워나갔다.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스페인에서 징집된 각각 십만, 총 30만의 병력을
주축으로 이루어진 유럽 연합군은 신성로마제국이 가세하면서 50만을 훌쩍 넘어섰다.
“발렌슈타인이 죽은 것은 하나도 아쉽지 않지만, 케플러까지 죽여버리다니 월터 데버루에게
미리 알려줬어야 했는데…”
세계지도가 걸려있는 방에서 한 사람이 중얼거렸다. 긴 등받이 의자에 온몸을 푹 파묻고 있던
유럽 연합군 총 사령관은 신성로마제국에서 보내온 보고서를 덮으며 한숨을 쉬었다.
그의 명령에 따라 월터 데버루가 이끄는 병력이 필젠을 떠나 에게르로 이동하는 발렌슈타인을
추격하여 그 일행을 참살했다는 보고서가 그에게 올라와 있었다.
보고서 맨 마지막에 위치한 사망자 명단에는 발렌슈타인을 비롯하여 트로츠카, 일로 등 발렌슈타인을
지지했던 장군들이 예상대로 올라가 있었다. 하지만 케플러가 그 명단에 들어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갈릴레이와 더불어 유럽 최고의 지성이라 일컬어지고 있는 케플러는 늙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대한제국에서 유학까지 하고 온 석학이었다. 신무기 개발에 깊숙이 참여해 많은 성과를 거두기도
했던 그가 자신의 실수로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똑똑똑”
“들어와”
총사령관은 누군가 문을 두드리자 자세를 고쳐 잡았다.
오랜 시간 죽은 듯이 앉아있던 자세에서 몸을 일으켜 세우려니 허리가 뻐근해져 왔다.
저절로 손이 허리에 갔다.
“총사령관님. 전략, 전술실에서 올라온 보고서 입니다.”
“음. 그래 ? 놓고 가게. 그리고 리즈 백작님은 지금 어디에 계시나 ?”
“리버플에서 개발된 신무기를 실험 중에 있습니다.”
“런던으로 오시라고 하게. 조만간 총사령부를 대륙으로 옮긴다.”
“알겠습니다.”
대답하는 부관의 얼굴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변해갔다.
“각 항구에 나가 있는 장교들에게서는 아직도 소식이 없나 ? 그리고 코펜하겐에서는 ?”
“아직 이렇다 할 보고는 없습니다.”
“알았네. 그만 나가보게”
경례를 한 부관이 돌아 나갔다. 제임스 왕의 명령에 따라 그 동안 꾸준히 대한제국군을 연구하고
그들의 무기와 편제를 연구해 온 그였지만 이번 전쟁에서 대한제국을 이길 수 있을 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다행히 동쪽에서 온 사람으로 인해 최근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긴 했지만, 폴란드를 간단히
제압해버린 대한제국군의 힘과 비교하면 달빛과 반딧불만큼이나 차이가 났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기다릴 수는 없었다. 대한제국군은 벌써 오드리 강까지 진출해 있었다.
“아무래도 이상해. 이상하단 말야 ?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대한제국은 이미 깊숙이 들어와 있는
것이 틀림없어. 폴란드나 크레타기지가 수천마일이나 떨어져있다고 안심할 일이 아니야.”
최근 몇 달 동안 신대륙이나 인도에서 오던 배들이 점점 숫자가 줄어들더니 이제는 단 한 척도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매달 최소한 10여척의 배들이 신대륙이나 인도로 출항을 했지만, 돌아오는 배가
없었다. 처음에는 오던 중 태풍을 만났거나, 별일 아니려니 생각했던 각국의 선주들은 그 숫자가 점점
늘어나자 아예 신대륙으로의 출항을 포기하기 시작했다. 일이 이쯤되자, 연합군 해군사령부에서는
각 항구에 조사원을 파견하고 신대륙과 인도에 조사선을 파견했지만 아직까지 소식이 없었다.
대한제국이 모종의 술수를 부리고 있다는 심정이 다분했지만 확인할 만한 증거가 없었다.
“또 그렇다고 해도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고. 답답하군. 그 놈이 빨리 만들어져야 할 텐데.”
부관이 나가고도 총사령관의 중얼거림은 계속되었다. 자문 자답을 하며 다시금 의자에 몸을 맡긴
사령관은 눈을 감고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터키 이스탄불 황궁
“휴”
성스러운 지혜 사원을 돌아 바브 휴마유 문 앞에 선 김영일이 짧게 숨을 내쉬었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사라이 제디데이 아미레 궁전이 오늘 따라 더욱 낯설게 느껴졌다. 5미터는 됨직한 성벽으로
둘러 쌓인 궁전 앞에는 커다란 대포가 궁전을 지키는 상징물로 놓여져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궁전을 톱카프 궁전이라고 부르곤 했다. 그를 태운 마차가 정문을 지나 정원을
돌아나갔다. 유목민족이여서 그런지 터키의 궁전은 유럽과는 그 규모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22만평의 대지에 넓게 자리잡은 궁전 안에는 크고 작은 정원이 많았다. 상주인원만 오천명이 넘는
이 궁전은 유럽에서 가장 큰 궁전이라 할 수 있었다.
“평안하셨습니까 ? 황태후 폐하 그리고 황제 폐하 ?”
“그렇습니다. 대사께서도 잘 지내셨습니까 ?”
짧은 인사가 오가고 나자 잠시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재건된 터키 함대가 마르마라해에서 출항을
서둘렀기에, 기다리다 못한 황태후가 대한제국 대사를 궁으로 불러들였다.
그녀가 정한 기한이 거의 다 차고있었지만 대한제국에서는 아직까지 확답을 주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사를 부른 연유를 잘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만 ?”
“잘 알고 있습니다. 본국에서 훈령을 기다리느라 좀 더 일찍 찾아 뵙지 못 한 점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래 본국에서 훈령이 오긴 온 거요 ?”
“그렇습니다.”
“그래요 ? 어디 한번 들어봅시다.”
황태후는 미덥지 않은 표정이었다.
“본국에서는 바닷길을 여는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의향을 전해왔습니다. 그 이상은 본국으로서도
힘에 부친다며 황태후 폐하의 양해를 부탁하셨습니다. 잘 아시리라 사료되옵니다만, 본국도 폴란드와의
전쟁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고 있습니다. 본국의 힘을 폴란드에 집결시키기에도 벅찬 실정이온지라
이곳에서 또 다른 전선을 형성하는 것을 바라지 않고 있습니다.”
김영일의 말은 황태후를 만족시키기에는 한 참 모자란 수준에 머물렀다. 황태후는 지중해 함대를
움직이는 것은 당연하고 크레타 기지에 주둔하고 있는 전략 기동군이 움직이길 희망하고 있었다.
그들을 움직일 수만 있다면 고토회복이 훨씬 쉬워질 뿐 아니라, 터키 턱밑에서 웅크리고 있는
독사 같은 존재를 멀리 보낼 수 있는 일거 양득의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한제국은 터키의 목 젓을 노리고 있는 전략 기동군을 움직일 생각이 전혀 없었다.
“내가 일전에 영국 대사가 왔다 갔다는 말씀을 한 적이 있었지요. 그 애기도 본국에 전했습니까 ?”
황태후는 여차하면 자신이 유럽과 손을 잡을 수도 있다는 협박을 이야기하고 있었고, 김영일도 그 일을
염두에 두어 본국에 보고서를 작성해 올렸다. 하지만 천인단이나 천군부에서는 그 일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듯 했다. 훈령을 받고 재차 재고를 요청했지만 외교부에서는 오히려 자신을 본국으로
돌아오라는 명령서를 보내왔다.
“그렇습니다. 황태후 폐하.”
“그래요 ?”
일이 뜻대로 되지 않자, 황태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곧 이어 김영일의 폭탄과도 같은 말이 이어지자 이내 그녀의 얼굴에 노기가 띄었다.
“그리고 저는 이번에 본국으로 돌아오라는 명령서를 받았습니다. 저보다 더 유능한 대사가 부임해
올 듯 합니다. 그분이라면 터키제국과 본국간의 우호를 더욱더 증진시킬 수 있을 것으로 샤료됩니다.”
대사를 교체하는 것은 외교적으로 언제나 일어나는 일이었지만, 지금 같은 중대한 시기에 대사를
교체하는 것은 상식 밖의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는 대한제국이 터키제국에게 뭔가 불만이 있다는
표시이거나 아님 양국간의 관계가 소원해 질 수 있다는 신호이기도 했다.
“아니, 터키제국을 그대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이 어디 있다는 것이오 ?
이건 필시 귀국에서 딴 마음을 먹고 있는 것 아니오 ?”
“천부당하신 말씀이시옵니다. 사실 이곳에 너무 오래 있었습니다. 보통 한곳에서 5년 이상을
근무할 수 없게 되어있습니다만 저는 예외적으로 지금껏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시옵소서.”
“우연의 일치란 말씀이시오 ?”
“그렇습니다. 황태후 폐하 !”
“아무튼 그럼 언제 떠나게 되는 것 입니까 ?”
묵묵히 대화를 듣고만 있던 황제가 모처럼 말문을 열었다. 20대를 바라보는 청년답게
황제의 몸은 장성해 있었지만 어쩐지 그의 어깨는 축 늘어진 듯 보였다.
“열흘 후에 본국으로 가는 배를 탈 생각입니다.”
“그래요 ? 가시기 전에 저에게 한번 들렀다 가시구려. 그 동안 터키를 위해 물심양면으로
고생이 많으셨는데 내가 그 노고를 위로하는 자리를 마련하고 싶습니다.”
“망극하옵니다.”
간 다는 사람을 잡을 수는 없었다. 황태후는 여전히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고 있었다. 바닷길을
열어서 지중해 재해권을 다시 확보한다면 지원물자와 추가 병력을 그라나다로 실어 나를 수는 있었다.
하지만 그 이후의 전투에서 유럽 연합군을 이길 수 있을까 ? 하는 생각에 미치자 황태후는
여러 가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전에 부탁 드린 공장 건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습니까 ?”
“이미 공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비록 준공식을 보지는 못하겠지만 남아있는 사람들이 훌륭한 공장을
만들어 보일 것입니다.”
“그건 잘 되었군 듣자니 터키제국의 기술자들이 만든 증기기관을 설치한다는데 그것이 사실입니까 ?”
“그렇습니다. 나중에 고장이 나더라도 고치기가 더 수월하지 않겠습니까 ?
그래서 그렇게 결정했습니다.”
“어쨓든 정이 많이 들었는데 섭섭합니다. 대사 ?”
“망극하옵니다. 그럼 평안하시옵소서”
황태후는 공장이 터키제국의 기술로 만들어지고 있다는 생각에 그나마 위안이 되었는지 얼굴이
조금 펴졌다. 김영일은 황제가 무언가 할말이 있다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본다는 것을 느꼈지만
자리에서 일어났다. 간절하면서도 뭔가를 갈구하는 듯한 눈빛이 김영일의 가슴을 아프게 찔러왔다.
쥬신대륙 동부해안 뉴암스테르담 항구
유럽 연합군 해군 사령부 소속 미켈란은 대서양을 건너와 뉴암스테르담을 비롯하여 몇몇 항구들을
조사하고 다시 대륙으로 돌아가기 위해 자신의 배에 올라탔다. 대서양에서 거듭되는 상선 실종사건을
조사 중이던 미켈란은 뉴암스테르담에서 유럽으로 출항한 배 목록을 작성해서 그들을 추적할
생각이었다. 그가 가지고 있는 목록을 훑어보던 미켈란의 마음은 착찹하기만 했다.
그가 언뜻 보기에도 대부분의 상선들이 유럽에 도착하지 못한 듯 보였기 때문이다. 지난 6개월간에
신대륙을 출항한 상선은 100여척이 넘었지만 태반이 도착항에 도착하지 않았다고 신고가 되어 있었다.
“돛을 달아라.”
돛들이 올라가고 바람을 받아 부풀어 올랐다. 미켈란이 타고 있는 리치몬드호가 앞으로 나서자,
항구에 묶여있던 다른 상선들도 그 뒤를 따라갔다. 미켈란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선주들이 상선단을 조직하여 대서양을 횡단하기로 결정을 하고 미켈란을 따라 나섰다.
뉴암스테르담에 있던 사람들은 대서양에서 배들이 사라지고 있다는 소식을 알 수 없었다.
유럽에서 들어오는 배들은 정상대로 대서양을 횡단하고 있었고, 그 배들은 다시금 물건을 싣고
대륙으로 출항을 했다. 요즘 들어 대륙에서 오는 배의 숫자가 줄어들었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것이 배가 부족해서 생긴 현상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미켈란은 뉴암스테르담을 떠난 지 며칠이 지났지만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자, 긴장감이 많이
수그러들었다. 밤낮으로 감시의 눈초리를 칼날처럼 세웠던 선원들의 눈도 많이 부드러워져 있었다.
“대서양에 해적이 출몰하고 있다면 이번 기회에 따끔한 맛을 보여줘야겠습니다.”
이 십여 척의 상선단을 이루고 있는 상선들 중 10척의 배를 소유하고 듀네딘 선주가 미켈란 바로
옆에서 파이프에 불을 붙였다. 파이프를 몇 모금 뻑뻑 빨던 듀네딘은 미켈란을 바라보았다.
미켈란은 파이프대신 담배잎을 말아 만든 시거를 입에 물고 연기 한 모금을 뿜어냈다.
“푸….”
“담배 맛은 역시 슈마트라산이 최고지요. 그나저나 이번 일은 해적 짓이 아닌 듯 합니다.
해적이 설치고 다닐 만큼 만만한 곳도 아니고 짧은 시간에 그 많은 배가 당했다고 보기에는
그리고 흔적이 없다는 것이 이상합니다. 대한제국이 개입한 것 같은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설마요 ? 대한제국 함대를 보았다는 사람을 본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대한제국 함대가
뛰어나도 그 놈들은 중간보급기지가 없지 않습니까 ?”
정색을 하는 듀네딘의 얼굴에 불신이 가득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미켈란의 생각은 불가능해 보였다.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항구는 파나마나 지중해 크레타 또는 발틱해에 있다는 항구가 전부였고
그곳은 자신이 있는 곳에서 너무 멀리 있었다. 크레타나 발틱해 기지는 왕복 일만마일에 가까웠다.
파나마에서는 오천마일이 넘었다.
“땡땡땡”
“우측에 이상한 물체 출현”
거의 동시에 비상종과 더불어 망루에 올라가 있는 탐수꾼의 보고가 들려왔다. 미켈란이 급히 망원경을
들어 올렸지만 우측방에는 넘실대는 바다만 보였다. 망루의 높이에서 오는 거리 차이를 감안하며
물체가 망원경에 잡히길 기다리던 미켈란이 망원경을 내려놓았다. 시거를 한모금 길게 빨아드리고
나서 숨을 멈췄다. 다시 들어올린 망원경 안에 보일락 말락하는 하던 물체가 점점 그 형체를 드러냈다.
참고 있던 숨을 내쉬자 연기가 일순 시야를 가렸다. 희뿌연 연기가 거치고 대한제국군 파나마함대
소속 전투함이 그 위용을 나타내며 맹렬한 속도로 자신에게 다가왔다.
“상선단은 산개해라”
미켈란은 나타난 대한제국 함대가 불과 2척뿐이었지만 싸울 생각은 없었다. 이길지도 확실치 않은 적을
상대로 싸우기보다는 대한제국이 이곳까지 마수를 뻗쳤다는 것을 알리는 게 급선무였다. 그의 명령에
5척의 상선단이 선수를 돌려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고 나머지는 뿔뿔이 흩어져 제각기 살길을 찾아갔다.
“적이 함포를 발사했습니다.”
“펑. 꽝”
소리보다 더 빠르게 날아온 포탄이 리치몬드호 우현에서 물기둥을 만들어냈다.
가뜩이나 주늑 들어있던 듀네딘은 아예 사색이 되어 있었다.
“좌현 80도, 함포 발포”
미켈란은 침착하게 리치몬드호를 지휘하며 전투에 들어갔다. 사거리가 짧았지만 헛되이 포탄을
낭비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포탄이 발포되면서 포성과 함께 연기가 리치몬드호를 휘감았다.
고막이 터질 것 같은 소리와 시야를 가리는 연기가 사람들의 공포심을 조금은 가시게 해주고 있었다.
“펑”
이번엔 제법 가까이에 포탄이 떨어졌는지 물기둥이 갑판까지 치고 올라왔다.
“노를 저어라, 전속력 항진. 함포 재장전. 대기”
일찌감치 선실에 들어간 듀네딘은 미켈란의 고함소리를 들으며 무릎을 꿇었다.
왼쪽 벽에 걸린 십자가가 배의 움직임과 함께 오른쪽 왼쪽으로 움직였다.
살고자 하는 욕망과 죽음에 대한 공포심은 그를 독실한 신자로 만들었다.
그의 간절한 기도때문인지 미켈란의 능숙한 조함 능력때문인지 좀처럼 명중탄이 나오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리치몬드호의 행운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꽝꽝꽝”
연이어 3차례의 폭음이 들리더니 이내 화약냄새와 더불어 갑판이 불타 오르며 생겨난 매캐한 연기가
선실로 밀려들었다. 듀네딘은 이전과는 다른 냄새가 코를 자극하자 이내 자신이 탄 리치몬드호가
적 함포에 명중되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리고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붙잡으며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나 갑판을 볼 수 있는 창문을 열어 제쳤다.
돛들이 불타 오르고 수병들이 불을 끄기 위해 물동이들을 나르느라 분주히 뛰어다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어찌 된 일인지 불길은 물을 뒤집어쓰고도 좀처럼 꺼지지 않고 있고 있었다.
어수선한 갑판을 바라보던 듀네딘은 이내 두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또다시 날아온 포탄이 작렬하며 물동이를 들고 있던 수병하나가 그대로 폭사해 버렸다.
“흘수선을 맞추란 말야. 갑판에 떨구지 말고 흘수선을 알았나 ?”
정한성 대령은 일방적인 함포전을 바라보며 포술장에게 고함을 치고 있었다. 몇 번의 포격후에
명중탄이 나오고 있었지만 적에게 치명타를 주기위해서는 흘수선 아래쪽을 파고들어야 했다.
그래야 적함의 침몰을 앞당길 수 있었다. 한 척을 잡기위해 많은 시간을 허비할 수 없었다.
“꽈광”
다시금 포성이 들려오자 정한성 대령은 거의 반사적으로 쌍안경을 들어올렸다.
맨 선두에 있던 적함은 명중탄을 3발 이상 맞고 있었지만 아직 침몰하지 않고 있었다.
활활 타오르고 있는 것으로 봐서 전투력을 완전히 상실한 것 같았지만 끈질기게 버티며 시야를
방해했다. 다행히 이번에 들어간 포탄은 정확히 흘수선을 파고 들었다.
곧 이어 우측이 부서지면서 선체가 우측으로 서서히 기울어졌다.
“표적 수정 030.”
정한성 대령은 표적이 침몰하는 것을 확인하고 함포 표적을 바꿨다.
자연스럽게 함수가 방향을 바꾸며 자강 알맞은 함포각을 만들어 냈다.
“표적들이 흩어진다. 표적들 행적 잘 감시하고 추정 항로 산출해서 해도에 표기하도록.
한 놈도 빠져나갈 수 없다.”
정한성 대령은 모처럼 바다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오는 심연의 희열을 느끼고 있었다.
산산이 부서지는 파편들 사이사이로 바닷물이 튀어올라 햇빛에 반사되었다.
물보라와 화염들이 뒤섞여 부조화의 조화를 만들어냈다.
“부사령관님. 그만 내려가야 합니다.”
“왜 ? 아직 한계선은 멀었잖아 ?”
정한성이 신경질적으로 물어왔다. 최초 교전이후 흩어진 표적을 추적하던 정한성은 대서양을
동서남북으로 종횡무진 돌아다녔다. 한 척 한 척을 찾아내 격침시키느라 수병들이나 선체에 가해진
피로도가 극심해졌다. 그것은 정한성도 예외는 아니었는지 시간이 갈수록 머리가 무거워져갔다.
“보급품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기관실 소모품도 바닥을 보이고 있습니다.”
“기관장 대”
함장의 이야기를 들으며 정한성은 기관실과 연결된 전화를 들었다.
“얼마나 버틸 수 있다고 ? 15일 ? 20일 ? 뭐라고 ?”
소리가 잘 안들리는 지 정한성의 목소리가 점점 커져 갔다. 통화를 마친 정한성이 힘없이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자신이 타고 있는 2415함의 함장을 빤히 바라보았다. 함장이 배시시 웃어보였다.
2415함이 아니라 전대를 구성하고 있는 4409함이 문제였다. 상대적으로 작은 4409함은
이미 한계치에 다다르고 있었다.
“기지로 돌아간다. 우리가 놓친 표적이 몇 개야 ?”
“네. 처음에 후미로 빠진 5척을 제외하면 4척입니다.”
“그놈들. 매일밤 악몽에 시달리면서 꽁지가 빠지라 도망가고 있겠군.
운이 좋은 놈들이야. 앞으로는 더욱 힘든 숨바꼭질이 되겠는데.”
드넓은 대서양을 단 6척으로 전함으로 완벽하게 봉쇄하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지금껏 파나마함대가 그나마 실적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은 길목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이제는 그것도 힘들어 보였다. 자신을 잡아먹을 늑대가 기다리고 있는 줄 뻔이 알면서
그 길을 지나갈 순진한 양은 없었기 때문이다.
단기 3959(1626)년 가을 로리앙 에드몽성
“자네는 어찌 생각하는가 ?”
“신중하게 생각하셔야 합니다만 제 사견으로는 파리를 믿을 수 없습니다.
차라리 대한제국을 믿는 게 더 유리합니다.”
“지금 당장 급한 건 피해가야 하지 않나 ? 대한제국은 너무 멀리 있어. ”
에드몽은 파리에서 온 특사가 내민 당근을 가지고 고민 중이었다. 지금 위그노란 나라는 아직 나라로서
기틀이 마련되지 않았고, 주변국에서도 위그노란 나라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다. 오히려 군대를 보내
진압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에드몽은 새로운 전쟁이 시작되면 유럽 전체와 싸워서 버텨야만 했지만
그럴 자신이 없었다.
“대한제국에 미리 연락을 해서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
“그건…”
지금으로서는 가장 좋은 생각이었다. 하지만 에드몽은 애써 얻은 지위를 대한제국 때문에 잃고
싶지도 않았다. 두 마리의 토끼를 다 잡으려는 에드몽의 머리 속이 복잡해졌다.
“대한제국을 버리면 소나기를 피할 수 있어도 장마비를 피하기는 어렵습니다.”
위그노 총사령관인 살라몽은 대한제국에 대한 절대적인 신봉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본 대한제국의
무력은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그런 군대를 상대로 싸워서 이길 수 있는 나라는 유럽 내에 존재하지
않았다. 설령 유럽이 하나로 뭉쳤다 해도 그건 반딧불이 수십 개 모아 보았자, 촛불하나에도 비기지
못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더군다나 대한제국은 촛불이 아니라 달빛이었다.
“다윗의 돌팔매는 성경에나 있는 이야기일 뿐입니다.”
“나도 잘 알지. 문제는 위그노라는 나라가 소나기를 버틸수 있냐는 거네. 이 나라의 군대를 책임지고
있는 총 사령관으로서 어떻게 생각하나 ?”
“힘은 들지 않겠습니까 ? 하지만 버티는 데 성공하기만 한다면 그 이후로는 대한제국을 등에 없고
크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대한제국. 대한제국. 대한제국.”
대한제국을 뇌까리며 망설이는 에드몽에게 살라몽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내 뱉었다.
“넘지 못할 산입니다.”
“빌라봉성에 사람을 보내 약속시간을 잡게. 넘지 못 할 산이란 말이지, 대한제국이.
그리고 파리에는 우리가 협상할 의지가 많다는 정도만 흘리고 시간을 벌고…. ”
“알겠습니다. 현명하신 결정이십니다.”
살라몽은 이제 안심이 되는지 얼굴 근육이 풀어졌다.
빌라봉성
“사랑하는 그대에게
사무치도록 보고싶습니다.
행여 갈대에 이는 바람에 님 소식 전해올까 창문너머 남쪽에 귀 기울여 봅니다.
이곳은 연일 우울한 날씨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어제는 올해 들어 처음으로 눈발이 비치더니
이내 축축한 가을비가 내렸습니다. 그곳은 그나마 따뜻한 곳이라 한결 마음이 놓입니다만
매일아침 따뜻한 국이라도 드셔야 할텐데…. 언제쯤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
저는 조만간에 스웨덴 스톡홀롬으로 자리를 옮길 예정입니다. 그곳에서 스웨덴 여왕의 고문을 맡게
될 것 같습니다만 아직 확정되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파리를 떠나온 이래 줄곧 마음이 걸리는 바가
있는데 이곳에서는 제 힘이 미약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부디 저의 마음을 헤아려주시어,
제 식구들을 보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떠나올 때 살아만 있으면 언제고 찾아오겠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지금도 암흑으로 가득찬 곳에서 저를 기다리며 하루 하루를 힘겹게 보내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미어집니다. 이런 일이 아니더라도 힘드실 텐데라는 생각이 들어서 여러 번
망설였습니다만 딱히 부탁드릴 곳이 없습니다. 부디 몸조심하시고 다시 만날 그날까지 안녕히….
모스크바에서 마리가”
이억만리에서 사선을 넘나들며 타향살이를 하는 고진영에게는 마리가 보내오는 편지만이 그의 시름을
씻어 주었다. 오늘따라 마리를 보고싶다는 생각이 더욱 간절한 고진영이 달력을 세어 보았다.
벌써 6개월이 넘어가고 있어다.
고진영을 비롯하여 빌라봉성에 남은 인원들은 봄 전투이래 몇 달간은 비교적 한가하게 시간을 소일하고
있었다. 파리에서 실종된 대사관 직원들과 외교부 특수부 요원들의 행방을 수소문하는 데 모든 역량을
집중시키고 있었지만, 그들의 생사는 여전히 불투명한 상태였다. 다만 당시 세느 강 하류에서
프랑스 정규군과 특수부 요원간의 전투로 보여지는 전투가 있었다는 것만 확인된 상태로
그 전투에서 생존자가 있었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었다.
“아무리 뒤져봐도 그들의 흔적이 없어. 이렇게 감쪽같이 사라질 수 있을까 ?
모조리 침몰했다 쳐도 시체라도 떠올라야 하는 것 아냐 ?”
고진영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프랑스가 그 정도로 정보를 차단할 만한 능력이
있다고 볼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강바닥에 고스란히 가라앉아있다고 보기에도 무리가 있었다.
굽이굽이 돌아나가는 강물 때문에 목선들이 침몰했다면 필시 강변으로 밀려나게 되어 있었다. 그렇게
되면 누군가에 의해 발견이 되었을 거고 인양이 되었을 것이 분명했지만 어디에도 그 흔적이 없었다.
“똑똑똑”
“미치겠구만. 직접 가보면 좋을 텐데. 들어와 !”
몸을 벌떡 일으키며 고진영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감청색 상의와 바지를 입은 고진영은 175센티미터의 키에 딱 벌어진 어깨가 다부져보였다.
대한제국군의 평균 신장이 160센티미터임을 감안하면 그의 키는 큰 키에 속했다.
일본부의 평균신장이 150센티미터를 밑도는 것을 생각하면 고진영은 키다리에 가까웠다.
“본국에서 암호문이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이건 최근 프랑스와 위그노의 동향 보고서입니다.
움직임이 활발한 것이 무슨 꿍꿍이를 벌이고 있는 듯 보입니다.
그리고 에드몽측에서 사람이 왔다 갔습니다. 일간 뵙으면 한다는 전갈입니다.”
“저기다 놓고 이리 좀 앉아봐”
좀처럼 오지 않던 암호문이 왔는데도 고진영은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책상 앞에 꼿꼿이 서있는 감숙민이 고진영을 빤히 쳐다보았다.
긴급을 요하거나 중요한 내용이 아니면 암호문이 올 리 없었다.
“이리 앉으라니까 ?”
“네.”
우물쭈물하던 감숙민이 자리에 앉으며 무릎 위에 결제판을 올려놓았다.
“그림자 1선이 철수를 하고 있는데 새로운 거라도 발견된 것 없나 ?”
4군에서 프랑스로 파견된 특수여단 인원 대부분이 신성로마제국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그 와중에 혹시라도 새로운 소식이 있는 지 그걸 묻고 있었지만, 들려온 대답은 신통치 않았다.
“대사관 일행의 행적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4군이나 대명부에서도 실종처리 할 것으로 보여집니다.”
“이찬용이 이끄는 팀은 해외 특작팀중에 최고였는데, 도저히 믿기지 않는군. 알았네
그리고 바스티유에 대해서는 계속 주시하고. 그만 가보게 그리고 에드몽에게는 내일 만나자고 하고”
바스티유 감옥은 샤를 5세의 명령으로 파리의 생탕트완 교외에 건설된 요새로 근래에 리슐리외에 의해
감옥으로 개조되었다. 주로 국사범이나 사상범을 수용하는 바스티유 감옥은 감옥이라기보다는
하급 호텔에 가까웠다. 스퀘델리가 질병 덩어리라는 콩세르주리 감옥에 갇히지 않고 바스티유에
투옥된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다.
바스티유 감옥은 음식이나, 기타 내부 장식등이 호화로운 별장에 가깝게 제공되고 있었다.
물론 바스티유는 수감자들이 대부분 정치 사상범이라는 것과 출신 성분이 귀족이라는 점 그리고
요새로써 지어졌기에 자체 경비가 삼엄했고, 경비를 담당하는 수비군 역시 프랑스 정예군이 담당하고
있었다. 그래서 4군 사령부나 외교부에서도 당분간 몽블랑 식구들을 관찰만 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스퀘델리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중얼거리던 고진영이 감숙민이 놓고 간 암호문을 집어 들었다. 암호문을 읽어보던 고진영은
해독하기 위해 책장에 끼워져 있는 삼국지를 꺼내 펼쳤다. 숫자와 문자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암호문과 삼국지를 넘기면서 한글자 한글자를 맞춰나가며 한 문장을 만들어냈다.
“3959년 12월 35일 그림자가 햇빛을 받는다.”
올 말을 기해 2선에서 암약하고 있는 그림자들이 수면위로 부상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번 일만 끝나면 나도 스웨덴에나 가봐야지.
슬슬 철수 준비를 해야데는데 에드몽이 어떻게 나오려나 ?”
2선 그림자들이 나타난다면 더 이상 고진영이 이곳에서 있을 이유가 없었다.
외교부와 4군에서 본격적으로 모습을 들어내고 유럽을 압박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고,
빌라봉 성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렇게 되면 빌라봉 성으로 집중되는 정보는 제2의 정보선을 따라 움직이게 되어 있었다.
유럽 원정군 5군단 사령부
6군단과 임무를 교대한 5군단은 바르샤바에서 부대를 재정비하고 다음 임무를 기다렸다.
지난 전투에서 피해를 입은 5군단은 기병사단을 제외하고는 당분간 전투에 참가하기가 어려워 보였다.
폴란드군의 진격을 최전방에서 막아냈던 보병 4531사단이 그 중 피해를 가장 많이 입어서 사단 전체가
재편을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전투 중 일어났던 일련의 돌출 상황에 대한 평가가 병행되고 있어서,
4531사단장을 비롯한 각급 지휘관들이 조사관에게 시달림을 당하고 있었다.
“아무리 중대 본부가 와해 되었다 해도 2연대 3대대 2중대 병력이 아군 포화에 그대로 노출된 것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대대 공용 주파수로 교신을 했어야 하지 않았습니까 ?
그리고 전령을 보낸 시간이 너무 늦지 않았습니까 ? 예하 부대에 후퇴명령을 전달하기도 전에
대대가 후퇴를 먼저 한 것 아닙니까 ? 그래서 일시적으로 통신체계에 혼란이 초래한 것 아닙니까 ? ”
포병여단 배치의 적절성과 기습을 허용한 초기 대응의 부적절성 그리고 기계화 사단의 대응 방법 등
군단 지휘부 및 사단급 지휘부의 조사를 마친 조사관들이 개별 전투에 대한 조사에 들어가 있었고,
그 첫 사례로 2연대 3대대 2중대에 대한 심도 있는 질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3대대장은 벌써 3시간 째 계속되는 조사에서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유독 사상자가 많이 발생한 3대대는 조사관의 집중 조사를 받고 있었다.
“워낙 창졸 간에 벌어진 일이고, 대대 전체가 적 포격에 노출된 상태였습니다.
당연히 대대 공용 주파수로 후퇴 명령을 내렸지만, 2중대만은 수신 하지 못한 것으로 파악됩니다.
대대본부는 후퇴명령 전파와 거의 동시에 후퇴를 하긴 했지만 통신체계에 혼란은 없었습니다.
교전이 벌어지고 있는 지역에 더군다나 시계가 극히 불량한 지역에 전령을 보내기가 위험하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에 전령을 보내기를 주저했던 것 입니다. 그리고 2중대 3소대의 유일한 생존자인
이완용 하사관의 말을 빌리면 후퇴명령이 3소대를 비롯한 2중대 예하 소대에 접수가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요 ? 그럼 이완용 하사관이 말한 당시 상황을 읽어 보겠습니다.”
조사관이 서류철을 뒤적이더니 종이 한 장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거기에는 이완용의 진술 내용과 이완용의 확인 도장이 찍혀 있었다.
“적 포격을 받은 직후 적 보병의 공격을 받음. 포격으로 소대 병력의 반을 잃고 중대 본부와 교신을
시도. 소대장이 후퇴 권고를 종용하던 중 갑자기 중대장과의 무선이 단절. 곧이어 대대에서 보낸
후퇴 명령을 접수. 소대 후퇴 준비중 진내 포격을 받음. 소대장 이하 소대원이 포격에 노출되어
전원 전사함.자신은 천운으로 포탄을 피하고 무사히 후퇴함”
조사관이 당시 상황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증인의 진술이 끝났다.
대대장은 그것 보라는 듯 조사관의 눈을 응시했다.
“하지만 이완용의 진술에서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분명히 대대장님께서는 대대 공용 주파수를
이용했고, 3소대 역시 공용주파수를 이용해 후퇴명령을 접수했습니다. 그런데 왜 대대 통신대에서는
3소대의 무선을 청취했다는 기록이 없는 걸까요 ? 명령 접수 확인을 했을 텐데 말입니다.
그리고 2선에서 전투를 수행하던 다른 병사들의 말에 의하면, 이완용이 2선으로 후퇴한 시간이 당일
새벽 2시 전후였습니다. 다시 말해 진내 포격이 시작되기 전에 이완용은 이미 2선으로 후퇴했다는
결론입니다. 혹시 대대장님은 이완용의 진술에 압력을 행사 하지 않았습니까 ?”
“그런 적 없습니다.”
“그래요 ? 그럼 이완용의 진술에 모순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까 ?”
“당시에는 몰랐습니다. 부하가 그렇다고 하는데 딱히 의심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
“단지 혼자만 후퇴했다는 데 전혀 의심을 하지 않았다는 것 입니까 ?”
“그렇습니다.”
“좋습니다. 이 점은 나중에 다시 조사하기로 하겠습니다.
당시에 2중대에 보낸 전령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
이어지는 질문과 대답이 조사실을 가득 채웠다. 대대장과 조사관 사이에 드리워진 신경전이
팽팽이 맞서며 평행선을 그었다. 한 장교가 쪽지를 조사관에 건네기 전까지.
“이완용이 20분전에 자살을 했다는 소식입니다. 유일한 생존자였는데 안타깝습니다.”
“뭐 이 새끼야 ? 안타까워 ? 니들이 진짜로 안타까운게 뭔지 알아 ?
사선에서 목숨을 초개처럼 버리고 있는 병사들의 고뇌를 니들이 알아 ?
그렇지 않아도 혼자만 살았다고 자책하고 있는데 그걸 들쑤셔서 자살까지 하게 만들어 ?
그러고도 니들이 대한제국 군인이냐 ? 이이이 !”
대대장은 이완용이 자살했다는 소식에 꾹꾹 눌러왔던 감정을 폭발시키며 조사관에게
폭언을 퍼 붇기 시작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조사관에게 다가가려다 제지 당하자,
대대장이 책상과 의자에 발길질을 해댔다.
“진정하십시오. 오늘은 그만 하겠습니다.”
“진정 ? 너 같은 놈이 부하를 잃은 아픔을 알기나 해 ?”
길길이 날뛰는 대대장을 남겨놓고 조사실을 나온 조사관은 안주머니에서 궐련초 하나를 꺼냈다.
군에서는 흡연자에 대한 대우가 형편없었지만, 이런 일을 한다는 것 자체가 승진을 포기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했다. 그렇기에 조사관들은 대부분 흡연에 대한 강박관념이 없었다. 성냥 한 개비로 불을 붙인
조사관이 연기를 폐 속 깊숙이 빨아드렸다 내 뿜었다.
“젠장. 분명히 뭔가 있었어. 신변을 먼저 확보하고 조사를 시작했어야 했는데…”
조사관 생활에서 오는 직감은 그에게 뭔가를 말하고 있었지만, 유일한 생존자가 죽어버림으로써
진실이 땅속으로 묻혀버릴 것 같았다. 그가 눈에 비친 대대장의 마지막 행동은 분명 과장된 연출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모나코 공국 망통
슈레키가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도시 망통에 들어와 올리브 무역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장사를
시작한 지 8년이 넘었다. 그는 올리브 기름과 향신료만을 취급했다. 남부 프랑스와 모나코 주변에서
생산되는 올리브 기름을 수집하여 터키나 이태리에 팔고 그곳에서 향신료를 사다 유럽에 되파는
무역에 종사하는 슈레키는 망통에서는 알부자로 속해 있었다.
그는 그리말디 왕가와 친분까지 두터웠다. 모나코는 스페인의 보호령으로 지정되어 있긴 하지만
전통적으로 제노바 그리말디 왕가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다.
“출항 준비가 다 되었다는 연락입니다.”
빨강과 하얀색 마름모 꼴 휘장이 비스듬이 열리며 비서가 슈레키 집무실에 들어왔다.
항구에 있는 배에게서 연락이 온 모양이었다. 지중해 재해권이 유럽에 넘어가면서 그에게는
득보다 실이 많았다. 항로가 열리면서 다른 유럽 상인들의 도전을 받고 있었다.
그 동안 터키에 있는 親舊들의 비호아래 거의 독점적으로 항로를 이용한 반면
다른 유럽 상인들은 안전상의 이류로 배 띄우길 꺼려했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번에 출항하는 배에게 각별히 조심하라고 하게. 아무래도 또 한번 해전이 벌어질 것 같아.
들리는 소리들이 심상치 않아.”
“네. 선장들에게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그리고 프랑스에서 인편으로 편지가 왔습니다.”
“프랑스 ? 親舊가 없는데 누가 보냈지 !”
머리를 가웃뚱 거리며 슈레키가 편지를 받아 들었다.
납작한 것이 지인이 보낸 일상적인 편지라기보다는 무슨 초청장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겉봉투를 열고 안을 살펴보던 슈레키가 비서에게 손짓을 했다.
“그만 나가보게”
겉봉투에서 꺼낸 내용물은 봉인이 되어 있었다. 창과 방패 문장이 새겨진 봉인을 본 슈레키는
다시 겉봉투에 밀어넣고 눈을 감았다. 과거 10년 동안의 자신의 행적을 더듬어 가던 슈레키가
심호흡을 하고 봉인을 뜯었다. 반절로 접혀진 종이 안에는 동굴에 햇빛이 비치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지평선에 반쯤 얼굴을 내민 태양에서 뿜어져 나오는 밝은 빛이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그 중 한 줄기가 산 중턱에 있는 동굴 속으로 화살처럼 파고 들었다. 산 꼭대기에 올라선 사람이
대지를 새로운 새벽을 감상하고 있었고 그림 하단에는 MMMDLIX MCCXXXV라는 붉은색 표식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어떤 암호처럼 쓰여진 표식을 살피던 슈레키는 책상 위에 백지를 올려놓고
뭔가를 끌적이기 시작했다.
단기3959년 영국 런던 이스턴 엔드
인구 40만이 몰려들어 북적대는 런던 동쪽 끝, 이스턴 엔드에는 주변 농촌지역에서 몰려든 사람들이
하루 일거리를 찾아 거리를 어슬렁 거렸다. 런던 중심부 서쪽에는 프랑스 신교도로 대표되는 부유한
이주민과 상공인들 그리고 귀족들이 자리를 잡은 반면, 동쪽은 그 반대 계층들이 다닥다닥 부대끼며
살고 있었다.
작달막하고 누더기 옷을 입고 있는, 술에 찌들어 사는 주정뱅이들과 창녀들을 언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거리가 바로 화이트 체프 거리였다. 그 거리에서 생활한 지 5년이나 지나서 인지,
휴즈는 잘 정돈된 웨스턴 거리보다 이곳 이스턴 거리가 정겹게 느껴졌다.
“안녕하세요 신부님?”
“물론이죠. 캐더린은 잘 지내죠 ?”
“네. 신부님의 기도 덕분입니다.”
“다 하나님의 은총이십니다.”
5년 전 처음 이곳에 왔을 때, 휴즈는 길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웃는 얼굴로 무조건 인사를 했다.
그러길 몇 달을 하자, 이제는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고 인사를 해왔다. 못살고 힘없는 자들인 그들은
병이 들어도 마땅히 갈 데가 없었다. 정주법을 어기고 런던에 들어온 농민들은 때때로 런던 경찰들에게
붙들려 작신 두들겨 맞고 신대륙으로 강제이주를 당하곤 했다. 세상에 악이 받친 그들에게 다가가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어쨓든 휴즈는 이제 이곳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해져 있었다.
“신부님 ? 신부님 ?”
휴즈는 헐레벌떡 달려오는 찰리가 좀 더 가까이 오길 기다렸다.
찰리는 이제 10살이 남짓으로 그 자신조차 나이를 몰랐다. 부모에게 버려진 찰리를 키우고 있는
휴즈였기에 찰리가 가까이 다가오자, 두 팔을 벌려 아이를 안으려 했다.
“그런데 손에 들고 있는 게 뭐니 ?”
“이거요 ? 쥐잖아요.”
찰리가 오른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 꼬랑지만을 묶어 거꾸로 들려진 쥐는 언뜻 보기에도 다섯 마리는
됨 직 했다. 빈민가에서는 배고픈 사람들이 남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쥐를 잡아 먹기도 했기에,
휴즈는 찰리가 먹으려고 잡았는지를 묻고 있었다.
“누가 쥐인지 모른다더냐 ? 어디서 난 거냐 ?”
“저쪽에 가득해요.”
찰리가 가리킨 곳은 화이트 체프거리가 끝나는 지점이었다. 그곳은 공터나 다름없는 곳으로 쥐들이
살기에는 안성맞춤이었기에 쥐들이 많이 살았다. 그렇다 해도 찰리에게 잡힐만한 쥐들이 아니었다.
그런대도 찰리 손에는 다섯 마리가 들려져 있었다.
“찰리가 이걸 잡았구나 ? 어떻게 잡은 거니 ? 참 대단하다.”
휴즈의 칭찬에 찰리가 머리를 긁적거렸다.
“잡은 게 아니라 주웠어요. 여기저기 널려 있더라구요 !”
“뭐라고 ? 쥐들이 널려있다고 ?”
찰리의 말에 깜짝 놀란 휴즈가 찰리 손에 들려져 있는 쥐들을 자세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쥐 입 주위에 거품을 흘린 흔적이 있었고, 어떤 놈은 죽은 지 얼마되지 않았는지
하얀 거품이 그대로 있었다.
“그 쥐들을 내려놓아라. 어서”
갑자기 휴즈가 고함을 치자, 찰리가 멀뚱멀뚱 휴즈를 쳐다보았다.
“내려 놓으라니까 ? 빨리”
칭찬을 받을 줄 알았던 찰리는 휴즈가 고함을 쳐대자, 손아귀에서 힘을 뺐다.
꼬랑지들이 손바닥을 스치며 빠져나가, 땅바닥에 팽개쳐졌다. 휴즈의 돌변에 두 눈에 눈물이 글썽였다.
“옷을 다 벗어라. 어서”
혹시 하는 마음에 휴즈는 일단 옷을 다 벗게 했다. 옷이라고 보기에도 민망한 넝마를 훌러덩 벗은
찰리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어물쩡거렸다.
“두 손으로 꼭 잡고 있어라. 가자. 어디에 쥐들이 있었는지.”
휴즈의 목소리가 많이 누그러 들었다. 찰리를 앞세우고 화이트 체프 거리 끝 자락까지 걸어간
휴즈는 공터 주변에서 죽어있는 수많은 쥐들을 보고 다리에 힘이 탁 풀렸다.
뛰다시피해서 천막교회에 도착한 휴즈는 구석에 처 박혀 있는 나무 상자의 자물쇠에 열쇠를 끼웠다.
상자 뚜껑을 열고 상자 안에 손을 집어넣은 휴즈가 뭔가를 꺼내 들었다.
“우리 목욕이나 하러 가자”
어느새 휴즈의 손에는 사각형 비누와 유리병이 들려 있었다.
유리병을 겹겹이 싼 하얀 종이가 벗겨지자 ‘농용산’ 이라는 글씨가 보였다.
찰리는 휴즈가 건네준 비누를 손에 꼭 쥐고 휴즈를 뒤따라갔다.
가끔 강에서 신부님과 목욕을 하긴 했지만, 오늘은 특별한 목욕이 될 것 같았다.
휴즈가 향하는 곳은 강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신부님. 그런데 왜 그러시는 거예요 ?”
“왜 ? 아까 버려 둔 쥐가 생각나서 그러는 거니 ?”
“네. ”
“잊어 먹어라. 그것보다 더 한 일이 앞으로 다가올 것 같구나. 신의 처벌이 !”
정확히 사흘 후 재앙이 시작되었다. 고열에 시달리며 피부가 검은 반점으로 물들어가며 사람들이
죽어갔다. 빈민가 이스턴 엔드 화이트 체프에서 시작된 페스트는 순식간에 런던 전체로 퍼져나갔다.
마주치는 눈빛만으로도 전염된다고 믿을 정도로 극도의 공포를 안겨준 페스트는
런던을 텅 비게 만들었다.
영국 스코틀랜드 북해 연안 에든버러
런던에서 페스트가 창궐하자, 찰스 1세는 부랴부랴 에든버러로 피신해 왔다. 스코틀랜드 왕국의
수도인 에든버러에는 스코틀랜드 왕궁 홀리루드하우스 궁전이 있었다. 스코틀랜드는 찰스 1세에게
친가와 같았다. 그의 아버지 제임스 1세는 원래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6세였지만 엘리자베스 여왕이
죽자 혈통에 따라 잉글랜드 왕을 물려받았다. 그의 아들인 찰스 1세 역시 자연스럽게 양국을
통치하고 있었다.
“런던은 어떻습니까 ?”
찰스 1세가 시거에 불을 붙이며 들어온 윌리엄 총리에게 물었다. 페스트에 특효라고 알려진 담배는
요즘 없어서 못 팔 정도로 귀했다. 평소에 담배를 즐기지 않던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로 와서는
거의 입에 달고 살았다.
“점점 수그러 들고 있습니다. 일부 안전 지대에서는 시민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외곽에 거주했던 지방 영주들이나 귀족들은 자신의 영지로 되돌아갔고,
현재는 발병지역에 대한 통제가 강화되고 있습니다.”
런던 시장의 요청과 찰스 1세의 명령에 따라 왕실 군대가 페스트 발병 지역을 외부와 격리시키기
시작하면서 페스트가 점점 그 기세를 누그러트리는 것 처럼 보였다. 최초 발병지로 지목된
이스턴 엔드 지역은 궁수들과 창기병들에 의해 외부로 나가는 모든 길이 봉쇄되었다.
“진작에 다 쫓아냈어야 했어. 그런 거렁뱅이 놈들이 언제나 문제였어.
이번 일이 진정되면 다 잡아다 버지니아로 다 보내버려. 유태인보다 더 유해한 놈들이야.”
찰스 1세는 자신의 도시에 무턱대고 들어와 음식을 축내고, 거리를 더럽히고, 온갖 병들을 퍼트리는
지저분한 빈민자들을 발가락에 낀 때 만큼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찰스 1세에게 신민이 아니라
소각하고 매립해야 될 도시의 쓰레기들이었다.
“알겠습니다. 겨울이 오면 진정될 것이니 너무 심려 마십시오.”
“그래야지. 이번 일이 대륙에 알려졌을 텐데, 유럽연합의 움직임이 어떻습니까 ?”
“템즈강이 봉쇄되었습니다. 그리고 템즈강 상하류에서 출항한 배들은 하역항에서 불가피하게
억류당하고 있습니다만 다른 지역은 별 특이사항이 없습니다.
다만 유럽 연합군 사령부 이전이 지체될 것으로 보입니다. 그라나다 공격도 늦춰질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스웨덴 여왕이 신성로마제국에게 전쟁 배상금으로 황금 십만 파운드를 지불하거나 발렌슈타인의
영지를 스웨덴에 넘기라는 요구를 해왔습니다.”
“그 젓 비린내 나는 여자가 ? 아버지가 죽고 나서 실성을 했군. 허허 참 내.
스웨덴이 무슨 힘이 있다고 ? 대한제국에 빌붙어서 연명하기도 급급한 여자가 다시 군대를
조직할 힘이 있을 리 없잖아 ?그래, 신성로마제국에서는 이 일을 어떻게 처리했다던가 ?"
찰스 1세는 기가 찬 듯 웃었다. 구스타프와 함께 발틱해를 건너온 군대는 아직도 스웨덴으로
복귀하길 거부하고 있었다. 실질적으로 그들은 스웨덴 왕가와 결별을 선언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버킹엄의 얼굴은 심각했다.
“어린 아이의 치기로 여기는 듯 합니다. 하지만 폐하 ?
스웨덴 뒤에 누가 있는가를 생각한다면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스웨덴 뒤에 ?”
“그렇습니다. 지금 신성로마제국 뿐만 아니라 전 유럽이 악마의 손아귀에 놓여진 바와 진배 없습니다.
호시탐탐 기회를 보고 있는 그 놈들은 실오라기만한 빌미만 있어도 공격해 올 놈들입니다.”
스웨덴 뒤에는 대한제국이 있었고, 여왕은 재상으로 대한제국인을 임명했다.
여왕의 남편 역시 대한제국에서 강요했다는 소식이 파다했다.
지금은 폴란드 왕이 된 바쟈는 대한제국의 꼭두각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고,
실제로 폴란드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대한제국이었다.
“알고 있네. 하지만 우린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아. 그 동안 충분한 준비를 해왔어.
이제 받은 만큼 돌려주기만 하면 되는 거지. 페르디난트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전쟁은 신성로마제국 영토에서 끝나게 될거네. 그것도 우리의 승리로….”
“지당하신 말씀이시옵니다. 폐하.”
“배상금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올해도 대한제국에서 배상금을 요구했지 ?”
“네. 올해는 이만 파운드를 내라더군요. 아주 웃기는 놈들입니다.
이제 그만 포기할 때도 되었는데 말입니다. 해마다 500파운드씩 오르더니 요새는 자기 마음대로입니다.
이번 회담에서 어떤 식으로든 결론이 날 것입니다.”
3948년 말라카와 자카르타 주변에서 있었던 유럽 연합함대와 대한제국간에 벌어진 해전을 승리로
이끈 대한제국은 당시 해전에 참전했던 상대국들에게 해마다 배상금을 요구하는 문서를 보내고 있었다.
황금 오천파운드에서 시작한 배상금은 시간이 흐르면서 2만 파운드까지 이자에 이자가 붙어 있었고,
스페인과 네덜란드는 그보다 더 많은 배상금을 지불하도록 협박문서를 보내곤 했다.
각국은 초기에는 나라간 해전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해적들의 싸움으로 몰고 갔으나 언제부터인가
대꾸도 하지 않고 있었다. 당연히 각국은 대한제국의 문서를 정식으로 접수하지도 않았다.
대명부 광주
대한제국 최대의 곡창 지대인 주장강 유역에서 걷어드린 쌀이 운하를 타고 광주로 모여들었다.
5만톤을 저장할 수 있는 곡물창고 수십 개가 항구 곡물 부두에 줄을 지어 건설되어 있었고,
하루 종일 마차와 소형 조운선으로 운반된 곡물이 창고에 들어갔다. 곡물창고에서 부두까지 이어진
컨베이어 벨트는 시간당 천톤의 곡물을 부두에 접안 된 화물선에 쏟아 부었다.
선적 작업이 있을 때면 나락들이 부딪히며 만들어낸 작은 먼지들이 부두 전체를 뿌옇게 만들었다.
“마리포 ? 작업 중단.”
갑판에 나가있는 작업반장에게서 작업 중단 지시가 확성기를 통해 들렸다. 선적기를 움직이던
마리포 기사가 컨베이어로 연결되는 동력선 손잡이를 아래로 내리자, 기계가 멈춰 섰다.
“3번 창으로 이동”
총 4개의 화물창을 가지고 있는 태평양상선 소속 화물선 부산호 화물창이 꽉 차갔다. 이제 3번창에
1/3만 쏟아 부으면, 오늘 일은 끝이 났다. 입과 코를 막고 있는 먼지마개를 갈아 끼던 마리포가
선적기를 4번창에서 3번창으로 이동시켰다.
“그만. 천천히 부어.”
작업반장은 허리를 굽혀 선창 안을 들여다보며 직접 작업을 통제했다. 끝부분이라 과선적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지만, 먼지가 쓰고 있는 안경에 달라붙어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멈춰”
먼지를 가라앉길 기다리던 일항사와 작업반장이 다시 선창 안을 들여다 보았다.
“저쪽에 조금 더 실을 수 있겠는데요 ?”
많이 실으면 실을수록 이익이기에 일항사는 측면으로 여유공간이 보이자 작업반장에게
조금 더 실을 것을 요구했다.
“더 실어봤자, 50톤도 안됩니다. 그냥 출항하시죠 ?”
작업반장이 일항사가 가르키는 곳에서 눈길을 떼었다. 50톤 더 실으려다 과선적이라도 되면,
문제가 복잡해지기 때문에 작업반장은 일항사의 동의에 아랑곳 않고 바로 선적기를 밖으로 뺐다.
아쉬운 입맛을 다시던 일항사가 손짓을 하자, 선원들이 다가와 선창을 닫기 시작했다.
“호주까지 가시려면 고생 좀 하겠습니다.”
선적 서류에 서명을 마친 작업반장은 목적지가 호주 북부 담피아로 되어 있는 선화증권을 선장에게
내밀었다. 선주를 대신해 모든 권한을 위임 받은 선장은 증권 문구를 꼼꼼이 살펴보더니
맨 아래 서명란에 도장과 함께 서명을 하고 건네주었다.
“늘 지나는 길인데요. 파나마로 것보다는 괜찮습니다.
가끔 이상한 배들이 나타나서 집적대는 것 빼고는 말입니다.”
선장이 말한 이상한 배란 동남아에서 활동하고 있는 해적들을 말하고 있었다. 뱃길이 알려지면서
아직까지도 남아있는 해적들이 화물선을 공격하곤 했지만, 선장은 지금껏 피해다운 피해를 본 적은
없었다. 자카르타 함대와 해적들간의 숨바꼭질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었지만, 대한제국 해군성에서
이곳 해역에 관심을 보이면서 해적들이 대거 토벌되고 있었다.
“안전항해 하세요 ? 전 그만 하선합니다.”
부산호에서 사다리를 타고 부두로 내려가자, 마리포를 비롯한 기사들이 기계들을 대충 손보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루 일과가 끝났으니 어디 가서 한잔 할 기세였다.
‘저 놈들이 또 ! 오늘은 무슨 핑계를 댄다.’
꼼생이로 소문난 작업반장이 기사들을 못 본 체하고 사무실로 들어가려하자,
마리포가 능글맞게 웃으며 뒤따라왔다.
“반장님. 제가 좋은 곳을 봐 뒀는데 말입니다. 꼭 반장님을 모시고 싶습니다. 오늘 괜찮으시죠 ?”
“어. 그래 ? 그런데 어쩌나 ? 오늘 밤에 약속이 있는데 ? 손님이 오시기로 했거든. 다음에 하지.
오늘은 자네들끼리 뭉치라구. 난 그럼….”
능청스럽게 거짓말을 하며 작업반장이 기사들을 따돌리려 했다.
“참 아쉽네요. 제가 잘 아는 아줌마가 중매를 부탁하길래 반장님을 소개시켜주려 했는데 안되겠네요.
그럼 누굴 소개시켜 준다.”
반장의 최대 약점을 살살 건드리며 마리포가 눈치를 살폈다. 의무 기간을 올해로 마치는 반장은
내년에는 쥬신 대륙으로 갈 거라고 했다. 올해로 24살인 반장은 쥬신 대륙으로 가기 전에 결혼을 할
생각이었지만 마땅한 혼처가 없어서 시간만 죽이고 있었다. 그가 결혼을 서두르는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대한제국에서는 조선인이 조선인이 아닌 사람과 결혼을 하면 적잖은 혜택을 주고 있었다.
민족간 융화를 목적으로 신설된 이족결혼장려기금에서 장려금이 나올 뿐 아니라,
자식들에게는 학교 입학 우선권이 주어지기도 했다. 대명부에서 사는 동안 세금 감면혜택도
받을 수 있었다. 그 외에도 잡다한 많은 혜택이 주어졌다.
사실 시집오겠다던 처녀는 많았다. 대명부 어느 지방에서나 그랬듯이 조선인은 조선인 자체만으로
최고의 신랑감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지금껏 만나본 처녀들은 하나같이 반장의 맘에 들지 않았다.
마리포의 말에 마음이 동한 반장이 마리포를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확실하다니까요 ? 심성도 착하고, 중학교까지 나왔답니다. 지금은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습니다. 집안이 넉넉한 것은 아니지만, 똑똑하다는 평도 인근에서는 자자하고요 !”
“이름이 뭔데 ?”
마리포는 반장이 관심을 보이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정도 관심을 보인다면, 오늘은 모처럼 반장 주머니에서 나온 돈으로 술을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임청영 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
“임청영 ? 아니 !”
“그럼 오늘 술은 반장님이 사시는 겁니다 ?”
“손님이 오시기로 했다니까 ?”
“에이 왜 이러세요 ? 다 안다니까요. 손님이 오시면 기다리시겠네요. 이런 일이 흔한 줄 아십니까 ?”
마리포가 옷 소매를 붙잡으며 반장과 실랑이를 벌였다. 반장은 못이기는 척 하며 은근 슬쩍 넘어갔다.
“그럼 그럴까 ? 먼저 가서 기다리라고. 내 이것만 처리하고 금새 뒤따라감세.”
“그럼 그곳으로 오시는 겁니다?”
“알았다니까 ? 내가 언제 간다고 하고 안간 적 있었나 ?”
반장은 꼼생이긴 하지만 자신이 뱉은 말은 꼭 지켰다.
반장이 사무실로 들어가자, 마리포는 동료들과 함께 항상 가던 술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대부분이 한족 출신인 그들 역시 반장처럼 의무기간을 채우고 있는 중이었다.
징병검사에서 불합격을 받은 그들은 군대 입대 대신 5년간 노력봉사를 하고 있었다.
“군대를 갔어야 하는데. 아이고 내 신세야 !”
마리포는 술잔을 받아 들고 신세한탄을 했다. 같은 동네에서 자란 불알친구 이소찬은 요행히
징병검사에서 합격해서 군대에 들어갔다. 지난 여름, 멋진 제복에 모자를 쓰고 온갖 선물을 들고
고향을 찾은 이소찬의 모습이 떠올랐다. 벽돌 3개를 쌓아놓은 모양의 계급장을 단 이소찬은
동네에서 10일을 머물고 부대에 복귀했지만, 동네 처녀의 마음을 온통 흔들어 놓았다.
어린아이들은 하루종일 이소찬 꽁무니를 쫓아다니며 이야기를 해달라며 졸랐다.
그런 아이들의 성화에 못 이겨 자리를 잡고 이야기 보따리를 풀라치면 어느새 주변에 마을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마을을 떠나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소찬은
거의 신적인 존재나 다름없었다.
“나도 의무 복무만 끝나면 다른 지방으로 가야지. 어디가 좋을까 ?”
“뭐니 뭐니 해도 조선부로 가는 게 좋지. 사람은 큰 물에서 놀아야 성공한다니까 ?”
“자넨 애기도 못 들었나 ? 러시아 부쪽으로 가는 게 기회가 많아.
대한제국민이면서 중학교 졸업장만 있으면, 출신을 불문하고 관리로 채용한다던대.”
“러시아부가 아니라 뭐라더라 폴란든가 우크라이난가 뭐 그런데라던데 ?”
“그게 그거지. 다 러시아부에서 관할하는 지역이잖아 ?”
“그런가?”
부두 선적기 기사들이 한 참 수다를 떨고 있을 무렵 작업반장이 술집 문을 열고 들어왔다.
술집 주인이 살갑게 아는 체를 하며 반갑게 맞이했다.
“아이고, 반장님도 오셨네. 하도 안 보이 시길래 술을 끊으셨나 했네요. 저쪽으로 가세요.”
“네. 잘 계셨죠 ?”
“그럼요. 이곳을 뜨신다는 소문이 있던데 사실인가요 ? 서운해서 어쩐대요 ?”
“그렇게 되었습니다.”
반장이 자리로 다가오자 마리포가 반장을 위해 자리를 마련한다, 안주를 하나 더 시킨다,
술을 더 가져오라는 둥 부산을 떨었다. 술집주인은 반장 앞에 술잔을 내왔다.
벌써 몇 순배가 돌았는지 마리포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 올라 있었다.
단기3959년 겨울 포츠담.
최근의 일련의 사태를 당사국간에 만나서 해결하자는 대한제국에서 제안으로 동서양이 만나는 최초의
다자간 회담이 포츠담에서 열리고 있었다. 대한제국에서는 10년전의 해전 배상금 문제와 위그노에 대한
승인 건을 들고 나왔고, 유럽 각국과 터키는 그들의 현안을 의제로 채택하길 희망하고 있었다.
포괄적 다자간 협상을 제안한 대한제국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유럽 각국의 대표들이 무리를 지어
회담장이 있는 1층 곳곳에서 서로의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4층짜리 석조건물로 사용되고 있는 건물
층층에 마련된 대표들의 숙소를 정리하기 위해 특별히 선발된 사람들이 층층을 돌아다녔다.
“각국의 대표들은 회의실로 들어오시기 바랍니다.
회의가 시작될 예정이오니 속히 회의실로 들어오시기 바랍니다.”
회의 의장을 맡고 있는 대사가 회의 시작을 알리며 복도를 돌아다녔다.
삼삼오오 사람들의 회의실로 들어가자, 회의실 문이 닫히며 주변이 조용해졌다.
“먼저 이곳에 모여주신 각국의 대표님들에게 감사 드립니다. 오늘 우리는 각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불행한 사태를 종식시키고 서로의 안녕을 도모하고자 모였다는 것을 양지하시고 회담에 임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먼저, 대한제국에서 오신 대표님의 제안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대한제국 외교부 장관인 민영완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회의장 중앙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전통적인 한복을 차려 입은 민영완은 원형 한 가운데에 섰다. 각국의 대사들은 중앙을 중심으로
원형으로 빙 둘러 자리를 잡고 민영완의 말을 기다렸다.
민영완은 헛기침을 한 번 하고 유창한 프랑스어로 대한제국의 입장을 말하기 시작했다.
“먼저 이 자리에 참석해 주신 각국의 대표님들에게 대한제국의 황제폐하와 정부를 대표해서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저희 대한 제국은 지난 수 천년 동안 국민들로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하고 세상에 빛을
주는 것을 그 근본으로 삼고 있는 나라입니다. 지구에 살고 있는 모든 생명체의 안위를 책임지는
막중한 사명을 안고 있는 대한제국으로서, 얼마 전에 폴란드 바르샤바 전투에서 십만 명에 가까운
아까운 목숨이 사라진 것에 애도를 표하는 바입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기에 여러분들에게 오늘 자리에 꼭 참석하시도록 요청 드렸던 것 입니다.
저는 대한제국의 대표로서 감히 여러분에게 제안을 드립니다. 지금 이 시간 부로 모든 전쟁과 쟁투를
종식시키고, 불신과 탐욕 그리고 권력욕에서 벗어나 회계하십시오. 하늘의 나라, 그 이름 대로 천국인
대한제국과 그의 군대 천군에게 그대들의 안위를 맡기시기 바랍니다. 아름다운 이 땅에 더 이상 죽음과
공포가 드리워지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 어떤 것도 한 사람 한 사람의 목숨과는 바꿀 수 없는 것이기에,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대한제국이 마련한 지구 연합에 가입하는 것 입니다. 이미 위그노와 스웨덴, 폴란드는
지구 연합에 가입의사를 밝혀 왔으며, 조만간 터키 제국도 연합에 가입할 것으로 보입니다.
회의 참석 전에 연합의 운영에 대한 초안을 여러분에게 배포해 드렸습니다.
검토 해 보시고 봄이 오기 전에 답을 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당연히 지구 연합에 가입하신 나라는 대한제국에게 지불해야 할 전쟁 배상금을 전액 탕감 받게
됩니다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금년 안으로 배상금을 대한제국에 지불해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대한제국에서는 지구 연합에 가입한 나라를 공격하는 것은 곧 대한 제국을 공격하는 것으로
간주함과 동시에 그에 알맞은 보복 공격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을 천명하는 바 입니다.”
민영완의 발언이 진행되는 중간 중간에 곳곳에서 경악스러운 탄성이 터져 나오기 시작하더니,
민영완의 발언이 끝나자, 이내 중소 왕국 대표들의 아우성소리로 회의실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대한제국은 유럽 각국에게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인 항복을 강요하고 있었다. 당초에 회의실 안팎에서
나돌던 대한제국의 의제에서 한참을 벗어나 있었다. 하지만 대한제국의 폭탄 선언에 가까운 일방적
제의에 영국을 비롯한 강대국들의 대표들은 오히려 실실 웃음을 흘렸다.
“하하하. 근자에 가장 재미있는 우스개소리를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일찍이 이처럼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지 못 했습니다.”
발언권을 얻는 영국 대표가 일어나 민영완에게로 다가갔다. 민영완은 영국 대표로 참석한
윌리엄에게 가볍게 목례를 하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윌리엄의 얼굴은 조소로 가득 찼다.
“여러분 ! 대한 제국은 악마의 나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대한제국은 터키보다도 더 사악한
사탄의 나라라고 본인은 단언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교도의 나라 터키가 대한제국의 꼭두각시
노름을 하고 있겠습니까 ? 입으로는 평화를 말하고 있지만, 무자비한 대한제국은 하나님을 따르는
수많은 신도들을 잔인하게 살해했습니다. 일찍이 마카오나 말라카, 바티비아에서도 그랬고, 로리앙이나
지중해서는 악마의 힘을 빌린 대한제국 놈들에게 얼마나 많은 희생이 있었습니까 ?
대한제국 대표가 스스로 인정했듯이 폴란드에서는 무려 십만 명을 학살했습니다. 지금도 대서양에서는
가증스런 대한제국 함대가 우리의 선량한 시민들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이런 놈들이 평화를 운운한다는
것이 가당하기나 합니까 ? 대한제국은 당장 폴란드와 스웨덴 그리고 러시아에서 물러나 그들이 있던
곳으로 물러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불로써 징벌하실 것 입니다.”
윌리엄이 잠시 말을 끊었다.
“맞습니다. 와아아아”
대한제국의 협박에 잔뜩 기죽어 있던 사람들이 윌리엄의 발언에 박수까지 쳐대며 환호성을 질렀다.
윌리엄이 좌중이 조용해지길 기다리며 손가락을 꼼지락 거렸다.
“대한제국은 우리의 땅을 강제로 빼앗고 하나님의 종들을 가차없이 죽였습니다.
그럼에도 저 간악한 자들은 우리에게 배상금을 내라고 합니다. 오히려 우리가 받아야 함에도 말입니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인 이런 일을 태연자약하게 버릴 수 있는 무리는 오직 대한제국밖에 없을 것이라
저는 단언합니다. 대영제국의 대리로서 저는 이번 이 자리에서 여러분에게 제안합니다.
대한제국과 맞서 싸우기 위해 우리 모두 힘을 합쳐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비록 서로의 신앙차로 인해 싸움을 하긴 했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자손이란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유럽 내부에서 겪고 있는 작은 혼란들, 심지어 이슬람교도와의 싸움들은,
지금 우리가 직면한 사탄의 위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저들은 시간이 갈수록 힘이 강해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힘을 합쳐 사탄과 맞서 싸워,
저들이 왔던 무저갱으로 돌려보내야 합니다. 우리의 머리 위에는 항상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고
계심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 항상 신은 진리 편에 서계십니다.”
청중들을 흥분과 분노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영국 대표가 자기 자리로 돌아가자,
곧 이어 로마 교황청 대표가 중앙으로 나왔다..
“…우리를 굽어 살펴주시옵소서. 아멘.”
눈을 감고 장황하게 하나님에게 기도를 올리자, 주위가 일순 숙연해졌다
“저는 교황 성하를 대신해서 대한제국에게 엄중히 경고합니다. 폴란드와 스웨덴에 뻗친 마수를
스스로 거두기 바랍니다. 프랑스 로리앙 영주를 현혹시킨 간악한 마법을 회수해 가길 권고합니다.
성스러운 땅 그라나다를 피로 물들인 그대들 터키인들은 스스로 잘못을 깨닫고 물러나지 않을 경우
하나님의 성난 목소리를 듣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마지막 기회를 저버리지 마시길…”
교황청의 대표의 연설이 끝나고 각국의 연설이 시작되었다.
연설 내용은 대한제국을 주축으로 한 연합과 유럽 진영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아직 지구연합에 가입하지 않은 터키만이 그라나다가 오래 전부터 이슬람의 땅임을 확인하는
애매한 입장을 표명하였다.
첫날 각국의 연설을 시작으로 열린 다자간 협상은 협상 4일이 지나도록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4일 내내 대한제국의 대표는 숫적 열세에서 기인한 수세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대한제국에게 퍼부어지는 온갖 비난과 질문에 시종일관 고압적인 자세로 적확한 대답을 회피했다.
이는 곧 에드몽의 마음을 흔들리게 만들었고, 터키제국이 대한제국에게 갖고 있는 막연한 두려움을
희석시키고 있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에드몽의 숙소에 들른 마자랭이 에드몽에게 대답을 구하고 있었다. 에드몽을 포섭하라는 특명을
받고 있는 마자랭이 은밀히 에드몽 처소에 들른 것은 자정이 다 되어서였다.
“그러니까. 폐하의 친서와 더불어 영국과 스페인에서 위그노를 승인하겠다고 했단 말입니까 ?”
“그렇습니다.”
예기치 않은 손님이 가져온 제의는 자신을 위그노의 왕으로 유럽의 강대국들이 인정한다는 것과 함께
상호 협력을 약속을 포함하고 있었다. 대한제국을 배신한다는 조건이 달려있었지만 에드몽의 귀를
솔깃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대한제국을 배신했다는 오명을 쓰게 됩니다.
더군다나 대한제국을 천군으로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을지 ?”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차피 위그노에 있는 대한제국군은 전부 철수하지 않았습니까 ?
남아있는 사람이래야 기껏 민간인 백여명이고, 그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처치하고 대한제국이
위그노를 배신했다고 하면 아무도 의심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거기다 각국의 칙서와 교황 성하의 교지를 내세운다면 충분한 명분이 되는 것이지요 !”
“살라몽 장군은 결코 대한제국을 배신하지 않을 겁니다.”
“도대체 위그노의 왕은 누구입니까 ? 에드몽 전하이십니까 ? 살라몽입니까 ?”
“그야 물론 당연히…”
“정 걱정되시면 살라몽 장군도 제거하십시오. 그리고 지금 프랑스에 자그마치 40만의 대군이 집결하고
있습니다. 일급 비밀인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에드몽 전하께서 처한 현실을 직시하는데 도움을 주고자
함입니다. 그들이 로리앙을 거쳐 그라나다로 간다면 위그노는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
마자랭은 거침없이 말을 뱉어내고 있었다. 적당히 위협을 섞어 가며 에드몽을 구슬려갔다.
“하지만…”
에드몽은 여전히 마음을 정하지 못 하고 갈등하고 있었다. 그때 방문이 열리며 온 몸을 외투로
감싸안은 사람은 에드몽 방으로 조용히 들어왔다. 철통 같은 경비를 하고 있음에도 에드몽의 방문은
아무런 장애를 받지 않고 있었다. 방금 들어온 사람이 외투를 벗어 내리고 에드몽을 바라보았다.
에드몽은 새로운 불청객의 눈이 마주치자 그 자리에서 몸이 뻣뻣이 굳어갔다.
“오랜만입니다. 위그노 왕”
에드몽을 위그노 왕이라 칭한 인물이 에드몽에게 다가가자, 에드몽은 다리가 후들거렸다.
에드몽은 무슨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입속에서만 맴돌았다.
불청객이 에드몽의 어깨에 손을 얹고 가슴으로 끌어당겨 힘껏 껴안았다.
“폐하 ?”
에드몽은 힘겹게 말문을 열었다. 그를 찾아온 불청객은 다름아닌 루이 13세였던 것이다.
“그렇소. 나요. 프랑스 황제 루이 13세요. 이제 그만 이교도의 꼭두각시에서 벗어나시고.
내가 직접 그대를 위그노의 왕이라 칭하지 않았소. 이러면 그대가 믿겠소 ?”
루이 13세가 두루마리 하나를 가슴에서 꺼내 에드몽에게 건네 주었다. 각국의 서명이 쓰여있는
연판장에는 에드몽을 위그노의 왕으로 인정한다는 내용의 서약이 쓰여져 있었다.
“기독교도의 일치단결을 위해서 이미 특단의 조치들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스페인 왕 필립4세는 아라곤 왕가에게 영지를 돌려주었으며, 신성로마제국은 보헤미아인들에게
신앙의 자유를 주었습니다. 교황 성하께서는 신교와 구교간의 전쟁을 금지한다는 교서를 내렸습니다.
모두들 기독교도의 단결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이때에 위그노만이 빠져서야 되겠습니까 ?
지금 유럽 연합은 그대의 결단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유럽 전체와 전쟁을 해서 대한제국이
이길 수는 없습니다.”
“생각할 시간을 주십시오. 폐하 ?”
에드몽의 마음은 점점 대한제국에서 멀어져 갔다. 하지만 그는 뜸을 드리고 있었다.
빌라봉 성에 나타난 하늘을 나르는 물체며, 로리앙 항구에 떠있는 거대한 철선들이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그런 괴물을 가지고 있는 대한제국을 유럽연합이 이길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많은 시간이 없습니다. 저희가 조사한 바로는 전하의 아버님이 갑작스레 돌아가신 것도
미심쩍습니다. 혹시 이런 생각은 해 보신 적이 없으신지요 ? 아무래도 대한제국이 그 일에
개입한 것 같다는 추측입니다. 그리고 지금 터키와…”
“마자랭 !”
마자랭이 터키를 들먹이자, 루이 13세가 황급히 그를 불러 말문을 막았다.
자신의 실수를 깨달을 마자랭이 교묘하게 말꼬리를 돌렸다.
“지금 터키와 대한제국은 한배를 타고 있지만 갈라설지도 모릅니다.
대한제국에서 배포한 지구 연합 초안은 터키 제국에게도 위협이 될 거라는 것을 알 테니까요.
그 이교도 놈들 머리가 그렇게 멍청하지만 않을 테니까요 ?”
에드몽은 마자랭이 자신의 아버지 일을 들먹이자, 마음 한 구석에 의구심이 일어났다.
지금껏 단 한번도 의심을 한 적이 없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이상했다.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제국이 관여했다면 아들 된 자신이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돌이켜보면 아버지는 그렇게 급작스레 돌아가실 만큼 건강이 나쁜 편도 아니었고,
말 타기를 즐겨 하셨던 분이셨다.
그런 분이 자신이 차용증서에 서명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냥터에서 낙마를 하고
시름 시름 앓다가 자식의 마지막 모습도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당시에는 이것 저것 따져볼 만큼 마음의 여유가 없었지만 모든 것이 의문 투성이었다.
“대한제국이 아버님을 시해했다는 증거라도 있습니까 ?”
에드몽의 목소리가 떨려왔다.
“확증은 없습니다만, 충분한 가능성이 있습니다. 폴란드 남부 영주들이 떼죽음을 당했을 때를
생각한다면 그런 일은 대한제국에게는 어린아이 손목 비틀기보다 쉬웠겠지요.”
곰곰이 생각을 정리하던 에드몽이 루이 13세를 바라보면 눈물을 뚝뚝 흘렸다.
못난 자식 때문에 아버지가 죽임을 당했다면, 그러고도 마치 자신의 구세주인양 그들을 떠받들고
다녔다는 것이 부끄럽기 짝이 없었다. 대한제국놈들은 그런 자신을 보면서 속으로
얼마나 조롱했을까 생각하니 수치심이 끌어올라 얼굴을 빨갛게 달궜다.
“너무 자책하지 마십시오.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니지 않습니다. 앞으로 천천히 조사해보면
다 밝혀질 것입니다. 지금부터는 자신의 마음을 잘 추스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
마자랭이 에드몽을 위로하고 나섰다. 에드몽은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썼지만 좀처럼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그럼 스웨덴이나 폴란드도 유럽 연합에 가입하는 겁니까 ?”
거의 마음을 굳힌 에드몽이 유일하게 유럽에서 대한제국을 지지하고 있는 두 나라를 언급했다.
두 나라는 사실상 대한제국의 지배 하에 들어간 거나 진배 없기에 그는 질문을 하고도 머쓱해 했다.
하지만 마자랭의 답변은 뜻밖이었다.
“물론입니다. 아직 대한제국은 폴란드와 스웨덴을 장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곳곳에 우리의 협력자도 많이 있고, 무엇보다도 폴란드 왕 지그문트의 장자가 지금 빈에 있습니다.
빈에 있는 왕자는 선택의 여지가 없지요. 그리고 스웨덴 여왕은 힘이 없습니다.
기껏해야 스톡홀롬 주변 영주들이 지지를 하고 있을 뿐이지오.”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
“우선은 대한제국에 협력하는 척 하십시오. 그리고 우리에게 그들의 신무기에 대한 정보를
빼돌려주십시오. 대한제국을 속이기 위해 황제군이 위그노 국경을 위협하며 국지전이 벌어질 수도
있지만, 결코 대규모 전투는 없을 테니 과잉반응하지 마시길 부탁드립니다. 그러면 되는 것입니다.”
“좋습니다.”
에드몽은 루이 13세까지 가세한 설득에 유럽 연합에 가입하는 서류에 서명을 하고,
루이 13세에게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일어나십시오. 그대는 한 나라를 통치하는 왕입니다.”
루이 13세가 황급히 에드몽을 일으켜 세웠다. 마지못해 일어나던 에드몽의 눈가에 작은 떨림이 일었다.
이로서 루이 13세는 진정으로 자신을 왕으로 인정한 것이었고, 프랑스에 인정했다면 다른 나라에서도
가타부타 할 일이 아니었다.
에드몽이 루이 13세의 방문을 받고 있을 무렵, 터키 대사는 영국 대표의 방문을 받고 있었고,
네덜란드와 덴마크의 대표들은 대한제국에서 보낸 특사의 방문을 받고 있었다.
각국의 대표들은 조용히 개별 막후 협정을 맺느라 다자간 회담의 마지막 밤을 하얗게 지새우고 있었다.
베를린 동북쪽 100킬로미터지점
대한제국의 제안으로 열린 다자간 회담은 결국 아무런 협약이나 선언을 채택하지 못하고 결렬되어
버렸다. 각국의 대표들은 회담 결렬을 알리는 의장의 선언이 있은 직후 모두들 뿔뿔이 흩어졌다.
포츠담을 출발한 대한제국 외교부 장관일행은 동북쪽으로 100여킬로미터를 달려 오드리 강에 도착했다.
4군 특수여단 전 병력이 외교부 장관 일행을 경호하기위해 주변으로 흩어졌다.
“이번 회담은 별 성과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역효과가 나지 않을 지 걱정입니다.”
민영완 장관은 오드리 강을 건너기 위해 배에 오르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수행원 중 한명이 우려를 나타냈지만, 민영완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포츠담에서 이곳까지 오는 길 내내, 줄곧 입을 꽉 다물고 있던 민영완은
무사히 강을 건너자 비로소 말문을 열었다.
“얻은 것도 있다네.”
네덜란드나 덴마크를 지구 연합에 합류하려는 민영완의 노력은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그는 유럽연합의 연합이 얼마나 강력한 것인가를 확인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하지만 민영완이 생각하는 이득이란 다른 곳에 있었다.
회담이 진행되면서 민영완은 당혹스러운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스페인 대표가 파나마 전쟁 이후,
대한제국이 총독에게 스페인 황제를 대신해서 서명을 하라고 한 것은 명백한 거짓 문서라며 따지고
나섰을 때는 등즐기에서 식은 땀까지 흘렀다. 신성로마제국 대표가 발렌슈타인의 반역에 대한제국이
관여했다고 나섰을 때나, 지그문트의 죽음 역시 의심스럽다고 발언을 했을 때는 할 말을 잃고
머리 속을 정리하느라 바로 답변을 하지 못했다. 유럽 연합은 대한제국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정보 수집력이 강력했으며, 대한제국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었다. 예상치 못한 소득이었다.
반격
단기3959년 겨울 서울
대한제국의 국가기관 중 정보를 취급하는 부서의 양대 축에는 천군부 정보위원회 산하 기구인
정보 사령부와 천인단 산하 기관인 중앙 정보부를 들 수 있다. 두 조직의 정점에는 단군이 자리잡고
있다. 전역에 퍼져있는 군부대에서 올라오는 정보들은 각 사단, 군단 정보대를 거쳐 각 군 사령부와
서울에 있는 정보 사령부에 모여들었다.
천군부 맞은 편에 있는 정보 사령부 지하 1층 이천평의 공간에 가득 찬 온갖 통신 장비들은
세계 각지에서 오는 정보들을 쉴새 없이 토해냈다. 이곳에 모인 정보들을 분석, 분류작업을 하는데
정보 분석가 일천여명이 3교대로 투입되고 있고, 그렇게 가공된 정보들은 관련 부대나 부처에
다시 보내져 작전 수립과 진행에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들어와”
문 두드리는 소리에 조국환 사령관은 읽던 신문을 접어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대한제국군의 모든
정보를 책임지고 있다고 하기에 믿기지 않게도 그의 외모는 왜소하기 그지 없었다. 깡마른 체구에
겨우 170센티미터가 될까 말까 한 키 그리고 털털한 옷 차람. 날카로운 눈빛마저 없었다면
그는 어느 평범한 촌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회의 준비가 끝났습니다.”
간밤에 들어온 주요 정보들을 간추린 두툼한 서류철을 들고 비서가 들어왔다. 오일에 한번씩 있는
각 지대장과 지부장들이 참석하는 회의가 예정되어 있었다. 오늘은 특별한 손님이 참석하는 날이기도
했다. 조국환은 시계를 힐끗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국환이 손을 내밀자, 비서가 들고 있던
서류철을 건넸다.
“가지. 중앙 정보부장님은 참석하셨나 ?”
“네. 10분 전에 회의실로 들어갔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대충 서류철을 훑어보며 회의실로 내려가던 조국환이 회의실 문 앞에 섰다. 지하로 내려가는 통로를
거치기 위해서는 4중의 보안 장치를 통과해야 했다. 통로를 지키는 경비병이 사령관이 다가오자
부동자세로 경례를 했다.
“보안. 사령관님 신분증을 보여주십시오”
조국환이 목에 걸고 있던 신분증을 건네자, 보안 요원이 신분증 철을 뒤져 원본과 동일한지 대조했다.
그리고는 손가락 지문을 찍어 등록된 지문과 일치하는 지를 다시 확인했다. 지하 1층까지 내려온
조국환은 다시 한번 확인 절차를 거치고 지하 1층 내부로 들어갔다. 방음장치를 했음에도 사방에서
타자 찍히는 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회의실이 있는 지하 2층은 1층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었다.
2층과 연결된 복도에서 보안요원이 숫자와 한글 자모음이 찍혀있는 판을 내밀었다.
조국환이 자신만의 고유번호를 입력하자 안에서 문이 열렸다. 300명이 근무를 하고 있었음에도
지하 2층은 1층과는 다르게 조용했다.
“자. 회의를 시작하지”
“터키 해군이 크레타 기지 근처를 주기적으로 순찰하고 있다는 보고입니다. 예전에는 없었던 이례적인
일입니다. 최근 들어 흑해 기지와 수에즈 운하 주변에 현지인들이 계속 목격되고 있습니다. 터키쪽의
감시를 받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는 정보 책임자의 사견이 있습니다. 잠수함 전대의 보고서에
의하면 지중해에서 더 이상 유럽함대를 찾을 수 없다는 보고입니다. 터키 함대도 행동을 자제하고 있는
듯한 분위기 입니다. 그라나다에서도 군사 충돌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습니다.”
“위그노쪽은 어떻지 ?”
지중해와 그라나다에서 전투가 소강상태에 빠져있다면 유럽 연합군이 위그노를 치기 위해 힘을
정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사령관의 질문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바로 대답이 들어왔다.
“프랑스 혼성 부대가 위그노 국경으로 이동 배치되었습니다.
포병과 기병대가 포함된 막강한 세력입니다. 숫자상으로만 본다면 최소 삼만 명은 넘어보입니다.
현재 국지전이 벌어지고 있으며 위그노에서 구원요청이 들어와 있습니다.”
“그 정도 병력이면 위그노가 방어하는데 무리가 따르겠군.”
사령관은 대한제국에서 위그노에 제공한 무기와 위그노 방위군 상황표를 집어 들었다.
“그렇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뭐가 ?”
“충분히 위그노를 뭉갤 수 있는 병력을 집결시켜 놓고도 전면적인 공세를 자제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지금까지 파악된 바로는 주로 소수의 기병대를 이용한 치고 빠지기 식의 작전을 구사하고
있습니다. 프랑스나 위그노 양측 다 경미한 피해만을 입고 있을 뿐입니다.”
“겨울이라서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 아님 대한제국을 두려워서 인지도 모릅니다.
저 번에 호되게 당한 경험도 있으니 말입니다.”
주로 북부 유럽의 정보를 책임지고 있는 지대장이 나름대로 이유를 설명하려 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좀더 알아볼 필요는 있겠어. 그리고 터키쪽 움직임이 수상하다면 큰일이군.
우리군의 아킬레스건을 쥐고 있는 놈들인데…”
조국환은 터키 제국 내에 있는 대한제국의 군사 기지들을 떠 올렸다. 수에즈 운하의 경비 강화를
지시할 것을 천군부 장관과 단군에게 건의할 것인지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조국환이 정보부장관에게
눈길을 주었지만, 정보사령부 보다 더 고급정보를 가지고 있을 텐데도 정보부 장관의 닫힌 입은 열리지
않았다. 정보부 장관과 한차례 눈빛을 교환한 조국환이 새로운 안건을 들고 나섰다.
다른 안건을 처리한 후 다시 생각하겠다는 마음이 통했는지, 정보부 장관의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건 그렇고 다른 사항은 ?”
“초석이 대량으로 이태리로 유입되고 있습니다. 터키 상인을 통해 움직이는 양이 벌써 이만 톤이
넘었습니다. 그림자 2선 보고에 의하면 유럽 내부에서도 초석 물동량이 현저히 증가함이 감지되고
있습니다. 모두들 신성로마제국으로 이동한 이후에는 종적이 묘연합니다.”
“이만 톤이나 ? 어디서 생산된 거지 ? 내가 알기론 유럽 내에 그만한 산지가 없는데 ?”
조국환은 대량의 초석이 움직인다는 말에 놀라워 했다. 초석은 황산이나 질산 같은 발화성 물질을
정제하는데 사용되어지는 정보사에서 감시하는 몇 안 되는 광물 중 하나였다.
초석 자체만으로는 위험하지 않지만, 그것을 이용해서 만들어지는 질산은
화약 제조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기 때문이다.
“알프스 산맥에서 채취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만 정확한 지점은 파악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일부는 인도에서 유입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파나마쪽에 한번 알아봐. 그 정도 양이라면 남쥬신 대륙에서 유입되었을 가능성이 있어.”
남쥬신 대륙에는 대규모 노천 초석광산이 여럿 있었기 때문이다. 파나마에 주둔하고 있는 6군 사령부는
아직 태동단계에 있어서 규모도 작았고, 모든 것을 5군 사령부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
그런 만큼 활동도 미비해서 파나마 남쪽으로 세력을 확대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유럽과 터키를 제외하고 다른 지역은 비교적 평온했다. 5군이 맡고 있는 쥬신 대륙은 작은 소란들이
일긴 했지만 군사행동까지 벌일 만큼 심각한 사건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대한제국민과 이로쿼이 연맹 부족들은 조금씩 그러나 꾸준히 동쪽으로 영역을 확대해가고 있는 와중에
평원족들과 부족간 싸움이 벌어지긴 했지만 우려할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연맹을 이끌고 있는
은하이는 교육제도를 정착시키는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기에 주변 부족과의 마찰을 달갑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유럽과 터키에 정보력을 집중하고, 다른 지역에서 들어오는 정보 중에서 유럽과 터키와 관련된
정보는 티끌만한 것이라도 철저히 조사하는 집중력을 발휘해야 될 때야. 다들 알겠지만, 앞으로
몇 달이 어쩌면 가장 중요한 시기일지도 모른다. 크레타 기지에 대한 우려는 단군에 보고할 테니
좀더 자료를 보강하도록.
그리고 그럴 리가 없겠지만, 천군부내에 비선 조직이 있다는 소리가 천인단에서 흘러나오고 있어.
정화 사령부에서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으니,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고 우리 정보사도 예외가
아니란 것을 명심하게. 이상 오늘 회의를 마치겠네.”
사령관이 비선 조직을 언급하자, 모두들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자신들도 알지 못하는 비선조직이
존재할 리 없었다. 사령관과 정보부 장관이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을 나갔다.
남아있는 참석자들이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며 아무도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우리가 모르는 조직이 있을 리 없잖아 ? 괜히 찔러보는 것이겠지.
뜬소문에 부화뇌동하지 말고 그만 일어나자고.”
야간조를 맡았기에 밤을 꼬박 세운 2 지대장이 의자를 밀어 일어났다.
신경 쓸 일이 아니라고 말을 했지만, 그 역시 걱정이 되긴 했다. 만에 하나 어떤 미친놈이
비선조직에 가담했고, 그놈이 자기 부하라면 그 불똥이 자기에게 떨어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단기3959년 겨울 영국
기병대의 호의를 받으며 리버풀 항구에 도착한 리즈 백작은 하역 되고 있는 초석들을 바라보았다.
선왕 제임스의 왕명에 의해 연금술사들을 모아 만든 마을이 리버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대한제국에서 밀수입한 총을 복제하기 위해 만든 무기창 이었지만,
지금은 영국 최대의 화학단지로 발전해 있었다.
“초석 재고량이 얼마나 되나 ?”
“오늘 아침까지 오십만 파운드였습니다.”
리즈 백작은 재고가 230톤이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당분간은 화약제조에만 신경을
써도 될 듯 했다. 겉보기에는 어느 항구와 다를 바 없었지만, 리버풀은 군사항에 준하는 경비를
받고 있었다. 찰스 1세가 특별히 선발한 군인들이 하역 인부로 일하고 있었고,
리버플에 사는 주민들은 외지인이 나타나면 의심의 눈초리로 외지인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했다.
“런던에서 훈련이 기대대는군. 그만 가지.”
“네.”
리즈 백작이 느슨하게 풀어진 외투 끈을 단단히 묶고 말머리를 돌려 항구에서 멀어져 갔다.
사방에서 그를 에워싸며 동행하는 경기병대원의 손에는 대한제국 소총과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는 총이 들려 있었다.
영국 런던 이스턴 엔드
겨울이 찾아 들고 기온이 내려갔음에도 페스트는 그 마지막 발악을 하고 있었지만, 그 세력이 많이
약화되어 있었다.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이스턴 엔드 지역 주민들은 반수 이상이 사망해 버렸지만,
유독 화이트 체프 거리에서는 사망자가 많지 않았다.
최초 발병지면서 가장 먼저 페스트의 위협을 벗어난 지역이기도 한 화이트 체프 거리에서는
페스트보다 더 무서운 상대와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었다.
“왜 들어오는 것까지 막는 거야 ? 이러고도 하나님의 은총을 바라느냐 ?”
휴즈는 확성기를 입에 대고 목이 터져라 외쳐댔다. 런던 시장과 이스턴 엔드의 유일한 대화 창구에
나온 휴즈는 안전선을 아슬아슬하게 넘지 않고 있었다. 누구라도 런던 시장이 설정한 안전선을
넘어서면 바로 총알과 화살이 날아왔다. 발병 초기에는 이스턴 엔드 지역에서 나가는 것만을 막던
경비병들이 이제는 들어가는 것 까지 막고 있었다. 가족이 봉쇄지역에 있던 사람들은 어떻게든
음식을 안으로 보내려 했지만 그러려면 목숨을 걸어야 했다.
“빵을 보내라.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굶주림과 추위에 죽어가고 있다.”
휴즈는 매일 아침 저녁으로 이곳에 나와 절규하고 있었지만, 반대쪽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아무래도 런던 시장은 이곳을 완전히 버릴 모양이었다.
“그만 가시지요. 신부님”
“안돼. 오늘 안으로 무슨 답을 들어야 돼. 자네도 알지 않나 ?
우리가 가진 걸로는 며칠 못 버티지 못해. 모두들 굶어 죽을 판이라고!”
“여기서 이렇게 해 보았자 아무 소용 없습니다. 안으로 들어가셔서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 합니다.”
“다른 방법 ? 무슨 방법 ? 봉쇄를 뚫고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나 ?”
휴즈도 자신이 무모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죽을 각오를 하고 여길 탈출해도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하지만 이스턴 엔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이래 죽으나 저래 죽을 거라며 싸우고 줄을 생각인 듯 싶었다.
“기병대다. 군대가 들어온다.”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주변이 술렁거렸다. 어찌된 일인지 이쪽으로는 얼굴도 돌리지 않으려던
사람들이 그것도 푸른색 제복을 입은 기병대가 또각 또각 소리를 내며 천천히 이스턴 엔드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휴즈는 어리둥절했다.
“뒤로 물러나시오. 일단은 지켜봅시다.”
휴즈는 불길한 예감에 몰려있는 사람들은 뒤로 물러나게 했다.
인도적인 일이라면 굳이 군대가 들어올 리 없었다. 그것도 기병대가.
그들의 손에는 하나같이 머스켓보다 작지만 피스톨보다는 큰 총기를 들고 있었다.
“억. 도망치시오. 모두들”
“탕. 탕. 탕”
휴즈는 기병대원들이 총기를 들어올려 자신들을 조준해가자 소스라치게 놀라 소리쳤다.
런던 시장은 이곳 주민들이 굶어죽을 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혹시나 하고 기대심을 가지고 맨 앞줄에 서 있던 사람들이 피보라를 뿌리며 죽어갔다.
혼란상태에 빠진 군중들이 재차 사격이 일어나자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군중들의 대열이 무너지고 사방으로 흩어지자, 기병대가 속도를 높였다.
휴즈는 골목길로 들어가 서둘러 천막교회가 달려갔다.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목덜미를 자꾸만 붙잡았지만, 기병대보다 먼저 교회에 도착해야만 했다.
그곳에는 어린 찰리가 있었고, 없애야 할 것들이 있었다.
“찰리 ? 찰리 ?”
교회에 도착한 휴즈는 찰리를 부르며 천막 주변을 맴돌았지만 어디에도 찰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기병대가 거리에 불을 질렀는지 검은 연기가 하늘 높이 솟아 올랐다.
“하나님. 저들에게 천벌을 내리소서”
하늘을 우러러보며 절규하던 휴즈는 교회로 달려오는 기병대가 보이자 서둘러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가장 깊숙한 구석에 쳐박혀 있던 상자 열쇠고리를 도끼로 힘껏 내리쳤다. 굳게 닫혀있던 자물쇠가
힘없이 떨어져 나갔다. 상자 안에 있던 심지가 달려있는 대나무 토막 서너 개와 석유 병을 꺼내든
휴즈가 사방에 석유를 뿌리고는 석유가 잔뜩 묻은 헝겊을 돌돌 말아 불을 붙였다.
대나무 토막은 여기저기에 쑤셔 박았다. 천막 밖으로 나가려던 휴즈는 천막 왼쪽에 놓여져 있던
철 상자 뚜껑을 열었다. 상자 안에는 숫자가 쓰여진 단추가 열 개가 가지런히 놓여져 있었다.
휴즈가 숫자 9를 10번이상 눌러댈 무렵 밖에서 말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횃불을 들고 천막을 나서자 기병대 10여기가 천막 입구에서 서성거리고 있었다.
“휴즈 신부님을 모셔오라는 명령을 받고 왔습니다.”
“네 이 놈들.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고도 너희들이 지옥에 가지 않길 바라느냐 ?”
왼손에 성경을 오른손에 횃불을 들고 있는 휴즈의 모습은 무서운 전사 같았다.
그의 눈에는 분노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기병대 대장인 듯 한 사람은 휴즈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휴즈의 협박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좋은 말 할 때 갑시다. 괜히 험한 꼴 당하지 말고”
“못 한다 이 놈아. 난 이곳에서 떠나지 않겠다. 맘대로 해라.”
휴즈가 횃불을 들고 다시 천막으로 들어가려 기병대에게 등을 보였다.
난처한 표정을 짓던 기병대 대장이 눈짓을 하자, 대원하나가 휴즈의 다리를 향해 활을 날렸다.
워낙 가까운 거리였기에 화살은 정확히 날아가 휴즈의 왼쪽 허벅지에 들어가 박혔다.
화살을 맞은 휴즈가 그 자리에서 앞으로 쓰러졌다. 오른손에 들려있던 횃불이 땅에 떨어졌다.
“네놈들이 감히…”
허벅지에서 오는 고통과 수치심에 몸이 부들 부들 떨려왔다.
두 명의 병사가 말에서 뛰어내려 쓰러져 있는 휴즈에게 다가왔다.
휴즈는 주변에 떨어진 횃불을 들어 다가오는 기병대를 흔들더니 이내 천막을 향해 힘껏 던졌다.
휴즈에게 다가가던 병사들이 주춤하더니 이내 미소를 머금으며 휴즈에게 다가갔다.
횃불로 저항하려던 휴즈가 횃불을 던져버리자 거리낄 것이 없었다.
휴즈는 힘겹게 일어나 절뚝거리며 천막 쪽으로 걸어갔다.
천막 안으로 던져진 횃불이 주변에 뿌려진 석유에 옮겨 붙으면서 불이 천막 전체로 번져갔다.
검은 연기가 조금씩 밖으로 새어 나왔다.
“나머지는 안으로 들어가서 불을 꺼라”
대장을 제외한 나머지 대원들이 말에서 내려 천막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펑펑펑”
그 순간 안에서 갑자기 굉음을 동반한 폭발이 일어났다.
천막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공기들이 데워지면서 천막이 부풀어 오르더니
이내 천막을 하늘 높이 솟구치게 했다. 사방으로 불똥이 튀어나가며 주변을 삽시간에 휩쓸어갔다.
단기3959년 늦겨울 덴마크 코펜하겐 부근 해협
대한제국의 폴란드 침공이후 발틱해는 대한제국 발틱함대의 안방이 된지 오래다.
덴마크 해군은 유명무실해서 대한제국 함대가 자신들의 해역을 휘젓고 다녀도
딱히 저지할 방법이 없었다. 그런 해역에 유래가 없는 범선 30여척이 나타났다.
“정말 이것이 통하겠습니까 ?”
“그럼. 당연하지.”
넬슨은 파커의의심 섞인 물음에 확신이 가득찬 어조로 대답했다. 넬슨은 자신이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하기만 하면 대한제국 발틱함대를 한동안 묶어 놓을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자네도 잘 알지 ? 이곳 수심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을.”
“물론입니다.”
“그럼 생각해 보게. 이런 곳에서 우리가 쳐놓은 그물에 물고기가 걸리지 않고 배기겠나 ?
그리고 우린 단 한마리만 잡으면 돼. 그러면 만사 형통이지.”
“그래도 걸릴까요 ?”
“물론. 그것 보다는 대한제국 놈들에게 안 걸리도록 조심하기나 하게.
지금부터는 스웨덴 국기를 내건다.”
넬슨 제독의 말에 30척의 범선 마스트에 스웨덴 국기가 올려졌다. 질랜드를 돌아 나온 범선들이
롤랜드와 랭글랜드 사이를 가득 메우고 바다에 그물을 던져 넣었다. 그물이 무거운지 선원들이
힘겹게 들어올란 난간에 걸쳤다가 장대로 밀었다. 그물 중간 중간에는 나무통이 매달려 있었다.
“다음 지점으로 이동”
정체불명의 범선들은 폭 9킬로미터의 좁은 해역 구석구석에 그물을 던져넣으며 발틱 해를 빠져나갔다.
배에 가득 싣고 온 그물들을 모두 던져버린 넬슨은 범선을 한곳으로 집결시켰다.
“선원들을 옮겨. 배들을 침몰 시킨다.”
그물대신 무거운 돌맹이를 가득 싣고 있는 범선에서 선원들이 종선을 타고 다른 배로 옮겨갔다.
이곳으로 오기 전 수십 차례의 실험을 통해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며 바닷속으로 가라앉히는 방법을
익혀왔지만, 침몰 대상선 10척 중 5척이 두 동강나며 침몰했다.
“저 정도면 충분하겠지. 함부르그로 돌아간다.”
앞으로 넬슨 제독이 이끄는 함대는 이제 물고기를 잡기 위해 미끼 역할을 하며 이곳 해역을
돌아다녀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함부르그에서 보급을 받아야 했다.
20척이 사라진 해역을 바다 위를 날아다니는 갈매기들이 가득 채웠다.
수에즈 운하 홍해 투묘지 아침
대한제국 조선부 동해에서 시멘트를 가득 싣고 크레타 기지로 가는 일만톤급 화물선 평양호와 그
자매함 개성함은 어제 해질녘에 수에즈 운하 입구에 도착했다. 안전상의 이유로 수에즈 운하 통제국은
야간에는 운하를 통제하고 있었고, 주간에만 그것도 편도 2 차례만 통항을 허용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평양함과 개성함은 하룻밤을 보내야만 했다.
“선장님. 도선사가 승선하고 있습니다.”
함장은 평양함 출항 준비를 감독하던 중, 3 항사의 무선 보고를 듣고 갑판을 바라보았다.
우현에서 하얀 모자가 조금씩 올라오더니 햐안 제복을 입은 사람이 3항사의 경례를 받으며
갑판으로 올라왔다. 그 뒤를 이어 운하 통과에 필요한 줄잡이들이 대여섯명 올라왔다.
“좋은 아침입니다.”
“어서 오십시오. 승선을 환영합니다.”
도선사가 함교로 올라와 선장과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 함교 중앙으로 걸어갔다.
“자. 그럼 갈까요 ?”
“닻을 올려라”
선장이 무전기에 대고 짧게 소리쳤다. 사람 팔뚝만한 쇠사슬로 연결되어 있는 닻 두 개가
끌려 올라오고 기관질 엔진이 힘찬 숨소리를 내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운하 통제국 소속 선도함이 앞서고 그 뒤에 있는 개성함에서 검은 연기가 올라왔다.
“저속 엔진”
“저속 엔진”
도선사가 올라오면서 선장으로부터 조함권이 도선사에게 넘어갔다. 도선사의 굵고 짧은 명령은
바로 기관실에 전해져 평양함에서도 검은 연기가 피어 올랐다. 엔진 대기 상태에서 저속 노즐이
바뀌어지며 동축을 통해 동력이 스크루로 전달되자 평양함 후미에서 물보라가 일어났다.
배가 서서히 앞으로 움직였다.
“좌로 15도”
“좌로 15도”
조타수가 복명복창을 하며 조타기를 돌렸다. 느릿 느릿하게 선수가 좌측으로 방향을 틀어갔다.
선도함이 운하에 진입하기 시작하자, 도선사가 긴장하기 시작했다.
운하로 진입하는 순간이 가장 위험했다.
여기서는 잠깐 동안 한눈을 팔거나 조함에 실수가 발생하면 바로 좌초나 충돌이 일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매일 하는 일이지만 도선사의 얼굴은 경직되어 있었다. 옆에서 말없이 지켜보고 있는
선장이나 일항사도 긴장하기는 마찬가지여서 함교에는 작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우로 10도”
“좌로 5도”
“우로 10도”
몇 번의 변침을 하고 나서야 운하에 진입해서 100미터를 앞서가는 개성함의 꽁무니가 평양함의 선수와
일직선을 이루었다. 그제서야 선장이 작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점점 개성함과 거리가 멀어졌다.
“타 고정. 속도 10노트로 증속”
운하 1/3 지점에 있는 호수까지는 거의 일직선에 가까웠다. 개성함이 속도를 내며 앞으로 쭉 나가자
도선사는 속도를 높였다. 저속 노즐이 고속 노즐로 바뀌고 평양함이 벌어진 거리를 좁혀갔다.
이격거리 100미터를 유지하며 상선대 15척이 일렬로 줄을 지어 운하를 통과하기 시작했다.
“차 한잔 하시겠습니까 ?”
통과 행렬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자, 선장은 조리장에게 따뜻한 녹차를 주문하며
도선사의 의중을 물었다.
“좋지요.”
“조리장 ? 함교로 녹차하고 꿀차 맛있게 타서 올려 주세요.”
10분 후에 조리장의 심부름을 하는 사환이 쟁반에 차 두 잔을 받쳐들고 함교로 들어왔다.
사환은 싱글거리며 의자에 앉아있는 선장과 도선사에게 하나씩 건네고 함교에서 내려갔다.
차를 뜨겁게 끓였는지 찻잔에 달린 손잡이까지 열기가 느껴졌다.
“이번이 처음이시죠 ?”
도선사가 선장을 보며 말을 건네자, 지리한 10시간을 어떻게 보낼 가를 고민하던 선장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네. 전 주로 명부하고 일본부를 왔다 갔다 했습니다. 가끔 극동으로 가기도 하구요.
이쪽으로는 처음입니다.”
“어쩐지. 처음 뵙는 분 갔더라니 ? 어떻습니까 ? 첫인상이 ?”
“우선 놀랍습니다. 이런 엄청난 운하를 직접 눈으로 보게 되다니 꿈만 같습니다.
이게 정말로 사람의 힘으로 만든 것입니까 ? 눈으로 보고있으면서도 믿어지지 않습니다.”
선장은 자신의 직분과는 어울리지 않게 팔을 크게 휘두르기도 하면서 자신의 소감을 이야기 했다.
도선사는 선장의 조금 과장된듯한 첫인상을 들으며 천천히 찻잔을 들어올렸다.
정면을 주시하던 도선사는 개성함이 우로 약간 변침을 하자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중앙에 있는 조타기로 다가갔다.
“우로 1도 변침 준비.”
도선사 말에 조타수가 고정 장치를 풀고 조타기를 꽉 잡았다.
“어 ? 선도함 무슨 일인가 ? 개성함의 변침각도가 너무 크다.”
1도 변침하면 될 곳을 앞서가는 개성함은 거의 5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아무런 사전 경고도 없는
개성함의 돌발상황에 도선사뿐만 아니라 평양함 선장도 크게 당황하기 시작했다. 선장이 개성함과
직통으로 연결된 근거리 무선망을 막 들어올리려는 순간, 개성함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개성함입니다. 조타기가 말을 듣지 않습니다.”
“엔진 역추진 ?”
“역추진 불가. 으악.”
“예인선은 개성함의 충돌을 막아”
“선도함 ?”
“응급 조치반 ? 응급 조치반 ?”
“둑에 부딪힌다. 충돌에 대비하라”
곧이어서 평양함 함교에는 사방에서 들어오는 무선 목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모두들 사고를 막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었다. 평양함 도선사는 사태가 심각하게 돌아가자, 배고동을 울리는 손잡이를 짧게
세번 잡아 당겼다. 다시 세번 잡아 당기자, 후미에서 따라오던 배들이 뱃고동 소리를 울렸다.
“피익 피익 피익”
“엔진 정지. 역추진”
“엔진 정진. 역추진”
기관실에서 긴급상황에 맞게 복창을 하며 후진 노즐을 바꿔 끼우고 다시 동력을 연결하자,
스크루가 반대방향으로 회전하면서 배의 속도를 줄여나갔다.
“펑. 꽈광”
“무슨 소리야 ? 기관실 ? 기관실 ?”
속도가 줄어들자, 전방의 개성함을 지켜보던 함장은 깜짝 놀랐다. 선저에서 들려온 묵직한 소리와 함께
배가 앞으로 계속 미끄러지고 있었다. 기관실을 계속 호출했지만 응답이 없었다.
“일항사가 기관실로 내려가봐”
“좌로 5도 변침, 예인선은 선수에서 최대 출력으로 밀어내. ”
운하 좌측 둑과 충돌한 개성함이 한동안 움직이지 않더니 운하를 가로막기 시작했다.
계속 돌아가는 스크루가 발생시키는 힘이 개성함을 앞으로 움직이게 하지 못하는 대신 옆으로
움직이게 하고 있었다. 어수선하고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도선사는 개성함과 평양함과의 충돌을
막기위해 침착히 함을 움직였다. 1000마력급 예인선 두 척이 선수에 붙어 평양함을 정지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지만, 평양함은 계속해서 미끌어졌다. 일만톤이 시속 16킬로로 움직이는
운동에너지를 2000마력 엔진으로 막기에는 역부족 이었다.
“모든 선원은 충돌에 대비하라.”
역 추진이 되지 않는 이상 개성함과의 충돌은 불가피해 보였다. 시속 8노트로 움직이는 일만톤급
화물선을 예인선 두 척으로 멈추기에는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100미터의 이격거리는 불과 1분만에
손에 잡힐 만큼 가까워졌고 이내 평양함 선수가 개성함 선미를 스치며 지나갔다.
“끼이익. 꽈광”
불꽃이 사방으로 튀어 오르고 평양함 선체가 종잇장처럼 찢겨지며 선창에 들어있던 시멘트들이
쏟아져내렸다. 개성함 기관실에서 작은 폭발에 이어 큰 폭음이 들리며 들썩이더니 선저에 균열이
생기며 가라앉기 시작했다. 불과 2분 30초사 이에 벌어진 사고라고 하기에는 믿기지 못할 정도의
엄청난 파장을 일으키며 운하 개통이래 처음으로 운하 전면 봉쇄가 이루어졌다.
바르샤바 북쪽 30킬로 미터지점 원정군 군수지원 사령부 제 3 보급창
30만평의 부지 위에 마련된 제 3 보급창 정문으로 보급품을 가득 실은 트럭들이 꾸역꾸역 들어왔다.
정문을 통과한 트럭들이 보급창 중앙에 만들어진 인공호수를 돌아 각자 할당 받은 창고로 다가가서
멈춰 섰다. 뒷문이 열리고 달려든 병사들이 10톤 트럭에 가득 찬 보급품을 창고로 옮겨 차곡 차곡
쌓았다. 공병단에서 지은 보급 창고는 조립식 건물로 임시로 사용하기에는 훌륭했지만,
내구성에서는 신뢰도가 낮은 것이 흠이었다. 그렇기에 제3보급창은 비교적 보관이 용이한
1종/2종/6종/10종 보급품을 담당하고 있었다.
“오늘 들어올 차량은 다 들어왔나 ?”
보급창 창장 강윤식 준장은 서류에 서명을 하며 물었다. 열악한 보급로로 인해 스몰렌스크에서
이곳까지 오는데 꼬박 5일이나 걸려 수송부대가 들어왔다. 기껏 800킬로미터 남짓한 거리이지만,
날씨가 나빠 길이 막히면 중간에서 오도가도 못하고 갇혀 있어야 했다. 그나마 겨울 끝 자락이라
수송이 한결 수월한 것을 감사해야 했다. 겨우 내내 4군이 보유하고 있는 대부분의 수송수단이
스몰렌스크에서 바르샤바 주변에 흩어져 있는 보급창으로 보급품을 실어 나르고 있었다.
“그렇습니다. 창장님. 내일 부터는 반출 작전이 시작됩니다.”
“알아서 잘 하겠지만, 각별이 신경 좀 쓰게. 외지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는데 보급 때문에
시비가 생기면 골치 아프니까 ? 그리고 수송대 애들 잘 돌봐주고.”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알겠습니다.”
강윤식 준장의 잔소리는 끝이 없었다. 부청장 서문 병철 대령은 수첩에 강준장의 잔소리를 일일이
기록하며 대답을 하고 있었다. 꼼꼼한 성격의 강윤식 준장은 작은 것 하나도 직접 챙기기로 유명했다.
그는 자신이 맡고 있는 부대로 인해 잡음이 나는 걸 병적으로 싫어했다.
“오늘 야간 경비는 누가 맡나 ?”
“3대대에서 맡습니다.”
“그래. 보급창이 얼마나 허술한지 자네도 잘 알고 있지 ? 외곽 경비 체계를 다시 한번 훑어봐야겠어.
그리고 3대대 이외의 병력도 항시 긴급대응 할 수 있도록 해야 돼. 대대병력 이래야 겨우 600명이야.
3교대 투입하면 200명이 불안전 지역에서 30만평을 완벽하게 지킨다는 건 무리가 있어.
오늘 밤 비상 훈련을 하는 것도 괜찮지.
그리고 방화 체계도 매일 확인하고 강추위에 호수관이 얼지 않도록 하고.”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비상훈련은 그제도 했지 않습니까 ?
너무 자주 하면 부대 사기가 저하될 수 있습니다.”
“다 살고자 하는 거야 필요하면 매일 할 수도 있는 것이 훈련이야.
군대가 훈련을 두려워해서야 어디 그게 군대인가 ? 그 외 또 뭐가 있나 ?”
거의 한시간 동안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해 놓고도 모자랐는지 창장은 혹시 빠트린 것이 없는지를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꼿꼿이 서 있던 서문 대령은 다리와 허리가 아파오기 시작하자
자신도 모르고 몸이 비틀리고 있었다.
“철컥”
어둠이 스멀스멀 밀려오며 보급창으로 통하는 모든 문이 잠겨갔다. 정문 초소에는 장애물이 세워지고
중기관총이 거치 되었다. 장갑차량 두 대가 정문으로 다가와 자리를 잡을 무렵 보급창 외곽에 쳐진
철조망 옆에 세워진 가로등이 하나 둘씩 불이 들어왔다. 경비병력이 각 초소에 투입되기 시작하면서
보급창은 어둠 속으로 묻혔다.
“어렵겠습니다.”
자정무렵, 어둠을 이용해 보급창을 주시하고 있던 유럽연합군 특수 부대원들은 자신에게 할당된 임무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보급창 주위는 이중 철조망이 쳐져 있었고,
경비 병력은 밀어내기식 경비를 하고 있어, 은밀히 침투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다.
대원들의 우려에도 부대원을 이끌고 있는 에드워드는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몸으로라도 뚫고 들어간다. 다른 부대도 마찬가지야. 시간이 약간 남아 있으니, 탐조등”
에드워드는 말을 하다 말고 급히 바닥에 엎드렸다. 적들은 철조망 주변을 대낯처럼 밝혀놓은 것도
모자라 탐조등으로 사방을 훑으며 주변을 경계하고 있었다. 부대 규모로 봐서는 적어도 수천명이
주둔하고 있을 것 같은 곳을 단 백명으로 공격해야하는 에드워드도 걱정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에게 목숨보다는 임무 완수가 우선이었다.
탐조등이 한차례 지나가자 고개를 든 에드워드가 몇 사람을 지목했다.
“대포 설치해. 나머진 산개. 전령은 정확히 새벽 3시에 공격한다고 주변에 전파하도록”
에드워드가 이끄는 팀은 지금 10개로 나뉘어져 주변에 산개해서 제3 보급창을 공격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대원 두 명이 새롭게 개발된 물 로켓, 일명 워터 캐논을 설치하는 사이 나머지 대원들이 몸을
엄폐하기 위해 흩어졌다. 워터 캐논은 물과 공기의 압력으로 탄두 600그램짜리 탄을 100야드 가까이
날릴 수 있다. 다섯 개의 물대포가 설치 완료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령이 되돌아왔다.
시간을 가늠하던 에드워드가 손짓을 하자, 모든 대원이 양손을 바닥에 집고 튀어 오를 준비를 했다.
동시에 대원 하나가 물대포에 장착된 포탄에 도화선을 꼽고 불을 붙이기 위해 성냥을 꺼냈다.
“탐조등. 3시 방향”
초소에서 전방을 주시하던 구문 일병은 앞에서 뭔가 반짝이자 탐조등을 그 쪽으로 돌리게 했다.
탐조등이 3시 방향을 비추기 위해 빠르게 움직였다. 구문 일병은 앞쪽에서 미확인 물체가
계속 반짝거리자 등골이 오싹해졌다.
“피우웅”
“뭐야 ?”
반짝이는 뭔가가 하늘로 올라가더니 서서히 날아오고 있었다. 반짝이는 물체를 쫓던 구문 일병은
탐조등이 3시 방향을 비추자 눈을 돌렸다. 멀어서 잘 보이진 않았지만, 움직이는 물체가 있긴 있었다.
곧이어 또 다른 물체가 하늘로 올라갔다.
“꽝”
“비상. 적이다. 사격.”
구문 일병이 소리치며 상황실과 연결된 비상 줄을 잡아당겼다. 비상 줄은 곧바로 상황실에 있는
비상벨로 연결되어 부대 내부에 비상 싸이렌이 울려 퍼졌다. 거의 동시에 꺼져있는 모든 가로등이
켜지며30만평을 훤히 밝혔다. 보급창 부대원들은 새벽에 울린 비상 싸이렌 소리에 일사 분란하게
움직이며 각자 자신이 밑은 구역으로 달려 갔다. 워낙 많이 해본 훈련이라 병사들은 순식간에
자신의 거점을 확보했다.
“뭐야 이거 ! 실제 상황이네 ? 분대 사격 준비.”
허겁지겁 달려 나온 주만주 중사는 총소리와 폭음이 드려오자 막사에 놓고 온 야전 상의가 아쉬웠다.
상황 파악을 제대로 못 한 주만주 중사는 훈련인 줄만 알고 편한 복장으로 나온 것이 실수 였다.
뛰어 오느라 난 땀이 식자 한기가 뼈 속까지 밀려왔다.
“일분간 사격”
“타타타타타타”
보급창 공용 통신망으로 야간 당직 사령의 명령이 내려왔다. 그와 함께 부대 전체가 총소리로 가득
찼다. 야간 공격을 받을 경우를 대비해 개발된 무차별 사격 개념은 적이 어디로 오는 지 확신할 수
없을 때 적용되고 있었다. 부대원들에게는 미리 사격 방향을 지정해 주고 명령이 내려오면
할당 받은 지역에 무차별 사격을 가해 접근하는 적을 저지하고 적의 반격을 감지하여 정확한 진입로를
찾아내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다.
“펑펑펑”
일제 사격이 끝나고 사방으로 조명탄이 쏘아졌다. 보급창으로 접근하여 막 철조망을 넘던
유럽 연합군 특수대원들이 조명탄에 노출되면서 집중 사격을 받았다.
“장갑차 보내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라. 주변 부대에 협조요청하고”
강윤식 준장이 어느새 직접 전투를 지휘하기 시작했다.
“꽈 광 꽈 광”
“저건 뭐야 ? 85번 창고에 화재 발생. 소화반 출동. 펌프 가동”
갑자기 전투 현장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85번 창고 지붕이 폭발하면서 불이 붙었다.
불이 나자 중앙 호수와 연결된 펌프가 가동되며 물을 끌어올려 85번 창고 지붕위로
시간당 10톤을 물을 쏟아 부었다.
“35번 창고에 화재 발생”
“뭐야. 원인이 뭐야 ? 이런 탐조등 하늘 비춰봐”
화재 진압에 정신이 없던 서문 대령은 갑자기 여기저기서 화재가 발생하자 순간 하늘을 올려 다 보았
다. 부청장의 명령에 탐조등이 일제히 하늘로 올라가고 하늘에 떠 있는 물체가 탐조등에 걸려들었다.
“내부 요원들은 대공사격. 장갑차 대공사격”
그러는 와중에도 하늘에 떠 있는 물체에서 폭탄이 떨어져 내렸다.
폭탄은 정확히 호수에서 물을 끌어올리는 펌프에 떨어져 폭발했다.
펌프가 폭발에 휩쓸려 터져나가자 사방으로 물이 튀었다.
물을 흠뻑 뒤집어 쓴 병사들은 서둘러 옷을 벗고 막사로 달려갔다.
“한 놈씩 일제 사격해. 12시 방향 일제 사격”
대공사격훈련을 한번도 받은 적이 없었기에 서문 대령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대응속도가 너무 느렸다.
“드드드드”
“펑펑 꽈꽝”
대공사격이 이루어지자 하늘에 떠 있던 기구가 추락하기 시작했다. 탐조등에 포착된 기구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추락하고 있었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추락하는 와중에도 기구 안에서는 계속해서
포탄이 떨어져 내렸고, 기구 자체가 창고와 충돌하며 창고 하나를 완전히 불길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비상 펌프 가동하고. 불을 끄는 데 주력하라. 탐조등은 계속 대공 감시.”
강윤식 준장은 활활 타오르는 13번 창고를 바라보며 책상을 걷어 찼다. 그렇게 조심 하고, 하루 걸러
하루 훈련을 하고 외곽 순찰을 돌았는데도 적은 보란 듯이 공격을 해왔고, 3보급창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는데 성공했다. 장갑차가 외곽에 투입되고 내부 병력이 외곽을 공격하면서 에드워드 부대는
철조망을 넘지도 못하고 후퇴해야만 했다.
“이젠 하늘도 감시해야 한단 말이지. 도망친 놈들은 끝까지 추격해서 잡아와.”
“창장님 ?”
“왜 ?”
통신장교가 창장을 불렀다. 창장은 또 뭐냐는 투로 통신 장교를 바라보았다. 통신 장교에게 전문을
건네 받은 강준장은 믿기지 않는 듯 두 눈을 크게 뜨고 전문을 다시 한번 읽었다.
“제6보급창 전소. 제4보급창 반파. 각 보급창은 1급 경계령. 대공 감시에 주력할 것.
적은 기구를 이용한 공격을 하고 있음.”
“이런 개 같은 경우가 ?”
강준장은 전문을 구겨버리곤 버럭 소리를 질렀다. 거대 보급 기지 스몰렌스트에서 겨우 내내 폴란드로
이송된 보급품들은 이번 봄에 있을 전투에 쓰여지기 위한 것이었다. 정확한 피해가 얼마나 되는 지
알 수 없었지만, 전문과 자신이 입은 피해를 근거로 어림잡더라도 최소 1/3에서 최대 반절은 날아간 것
같았다. 적이 하늘을 통해 공격을 해 올 거라고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기에 폴란드의 하늘은 아무런
감시를 받지 않고 있었다.
“6 보급창이 날아갔으면 봄 진격은 아에 글렀군”
주로 석유, 연료, 윤활유등 3종 보급품을 보관하던 6 보급창은 단 한번의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날아가
버렸다. 그렇게 되면 4군 원정군은 발이 묶인 거나 진배 없었다. 기계화 사단 자체 보유 연료가 얼마나
될까를 짐작하던 강준장은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여명이 밝아오면서 부대 내부 곳곳이 흉측한 몰골을
드러내며 강준장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 2004-2005 대한민국의 비극 ///
2004.5.1 노동절, 토요일
2004.6.6 현충일, 일요일
2004.7.17 제헌절, 토요일
2004.8.15 광복절, 일요일
2004.10.3 개천절, 일요일
2004,12.25, 토요일
모두다 2004의 비극은 2005년을 대비하기 위한
2005.5.1 일요일
2005.5.8 일요일
2005.5.15 일요일
2005.7.17 일요일
2005.9.18 일요일
2005.12.25 일요일
전조였다.
단기3960년 발틱해 대해협
신항 잠수함 기지를 출항한 잠수함 전대 소속 4891함에 문제가 발생한 것은 위험 해협을
다 빠져나갈 무렵이었다. 이격거리 1킬로미터를 유지하며 뒤따라오고 있던
4571함은 4891함이 해협을 빠져나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뭐가 문제야 ?”
“모르겠습니다.”
“아까 기분 나쁜 마찰음 때문에 기관에 문제가 생겼나 ?”
함장은 대해협을 지날 때 발생한 소음이 신경 쓰였다. 잠수함 밑바닥을 뭔가 긁는 듯한 기분
나쁜 소리가 들렸지만 조금 후에 정상으로 돌아왔기에 잊어버리고 있었다.
생전 처음 당하는 사고에 함장과 기관장 모두 당황하고 있었지만 속으로 삭이고 있었다.
“아무래도 잠수부를 내보내야 할 것 같습니다.”
“부상. 잠망경 올려.”
큰일이었다. 여기서 꼼짝달싹 못하면 대서양 봉쇄 뿐 아니라 빌라봉 지원에 차질이 생기고
최악의 경우 대서양으로 나가는 해로가 막힐 수 있었다. 다행히 주변에는 지나다니는 배들이 없었다.
“젠장. 슈체친으로 구조 요청하고 잠수부 투입해.”
“선저가 심각하게 손상되어 있습니다. 심해 잠항을 불가능할 것으로 보입니다.”
“스크루에 뭔가가 끼어 있습니다.”
늦겨울 발틱 해는 차갑기 그지 없었다. 아무리 잠수복이 방한 효과가 있다 해도 10분 이상
잠수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10분 간격으로 계속해서 자맥질을 하던 잠수부들이 보고를 해왔고
일부는 스크루에 낀 것을 빼내려 했지만 쉽지가 않았다.
“3시 방향 범선 출현”
함장은 통신장교의 외침에 3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돛대가 수평선 위로 너울거리며 넘어왔다.
“4571함에게 저지시켜 달라고 해”
“함장님. 범선들이 흩어집니다.”
“9시 방향에 새로운 범선 출현”
새롭게 나타난 범선은 이쪽을 발견했는지 거의 일직선으로 다가왔다.
“4891함 퇴함하라. 우리쪽으로 넘어와라.”
후미에 대기하던 4571함장이 퇴함을 지시함과 동시에 9시 방향으로 어뢰를 발사했다.
어뢰 발사 후 속도를 높여 거리를 좁힌 4571함이 4891함 근처에서 부상했다.
3시 방향에서도 이쪽을 포착했는지 급속도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전 승무원에게 알린다. 즉시 퇴함 하라. 4571함으로 옮겨 탄다.
부장 자폭장치 가동시켜. 시간은 30분. 시간이 없다.”
승무원들이 갑판으로 나가는 통로를 통해 차례대로 빠져나갔다.
4891함과 4571함 사이에 얇은 철판이 깔리고 수병들이 조심스레 4571함으로 옮겨 타기 시작했다.
“꽝꽝꽝”
적들이 함포를 쏘아댔지만 아직 사거리가 훨씬 모자랐다.
수병들의 발걸음이 더욱 빨라지며 4891함 승무원 100여명이 4571함으로 옮겨 탔다.
“포반철수”
마지막으로 갑판에 설치된 포반원들이 포를 떼어내 철판을 건너오자,
4571함이 4891함에서 멀어져 갔다.
“펑펑펑”
다가오는 범선은 계속해서 함포를 쏘아댔다.
“저건 스웨덴 국기잖아 ?”
분명히 자신을 공격하고 있는 범선들은 스웨덴 국기를 달고 있었다. 선주나 영주의 휘장대신 배에
국기를 달고 다니는 배는 대한제국과 스웨덴이 유일했다. 터키 해군조차 제국을 상징하는 국기가
만들어져 있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스웨덴을 욕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끼이익 끼이익”
4571함이 급선회를 하는 동안 4891함이 당했던 괴이한 소리가 들려왔다. 4891함장은 4571함도 멈춰서는
것이 아닌가 겁을 집어 먹었지만 다행히 4571함은 무사히 선회를 마치고 신항으로 항로를 잡아갔다.
4891함과 안전거리를 확보하자 4571함 함장은 4891함 함장을 바라보았다. 4891함 함장이 고개를
끄덕이자, 함장은 지체 없이 어뢰 발사를 명령했다.
“4891함으로 어뢰 2발 발사”
“쿵. 쿠궁”
어뢰가 4891함에 도착하기 전에 자폭장치가 작동했는지 묵직한 폭발음이 들려왔다. 4891함 승무원들은
자폭음이 들려오자 비로소 자신의 잠수함이 침몰했다는 사실에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위그노 빌라봉 성
고진영은 피레네를 넘어 프랑스로 들어온 스페인 사람의 숫자를 헤아렸다. 지난 가을부터 시작된
이동은 수만 명이 넘었다. 그렇게 넘어 온 사람들은 다시금 북쪽으로 이동하며 흩어졌다.
그라나다에 침입한 터키군을 피해 움직이는 피난민이라는 소문이 파다했지만,
고진영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유럽 연합이 군 병력을 집결시키고 있는 건가 ? 이곳을 내버려두는 것이 이상해.”
위그노는 분명 대한제국의 첩자국이라고 생각할 것이고, 드러난 첩자를 내버려둘 리 만무했다.
그런데도 프랑스군은 위그노 국경을 포위만 할 뿐 적극적인 공격을 자제하고 있었다.
“무슨 속셈이야 ? 위그노가 이용가치가 있다는 이야기인데…. 이용가치라면 뭐가 있을까 ?
내부 반란을 우려하는 것인가 ? 아님 그만큼 자신감이 있다는 건가 ?”
위그노가 가지고 있는 이용가치라면 대한제국이 제공하고 있는 물품밖에는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살라몽 장군에 의해 철저히 관리되고 있어서 외부 유출이 쉽지 않았고,
핵심은 다 빌라봉 성에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대장님. 파리에서 급보입니다.”
이런 저런 궁리를 하던 고진영을 방문을 열어 젖히고 들어오는 오로치를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몽블랑 식구들을 처형한답니다. 그것도 몽마르뜨 언덕에서 공개 처형을 한다고 합니다.”
“언제 ? 갑자기 처형이라니 ?”
고진영은 순간 마리의 얼굴이 떠올랐다. 자신에게 신신당부하던 글귀가 눈에 선 했다.
“앞으로 5일 후 입니다.
“당장 구조팀을 가동하고 잠자리를 띄워. 지중해 함대나 발틱함대에 지원 함을 보내 달라고 하고.
젠장. 파리에 나도 간다.”
서둘러야 했다. 5일이면 시간이 빠듯했다. 빌라봉성 옥상에 있는 잠자리는 만일을 대비해 배치되
있었다. 특수여단이 철수하면서 빌라봉성이 함락될 위험에 빠졌을 때 최후의 수단으로 이용하도록
남겨진 잠자리는 3대가 있었다. 배치된 이후 단 한번도 덮개를 걷지 않아서인지 잠자리를 덮고 있는
덮개에는 먼지가 두껍게 내려앉았다.
파리 몽마르뜨 언덕
언덕위로 스퀘델리와 그의 오빠 그리고 몽블랑 살롱 일꾼 2명과 다른 지방에서 잡혀온 사형수들이
줄줄이 끌려갔다. 언덕으로 오르는 길 양 옆으로 파리 시민들이 죄인들을 구경하기 위해 길게 줄을
섰다. 창을 든 경비병들이 시민들을 밀쳐내고 있었다. 스퀘델리는 발목에 달린 쇠구슬이 힘에 부친 지,
언덕 마루를 얼마 남기지 않고 쓰러졌다. 발목에는 피가 계속해서 흘러내렸고, 머리는 치렁치렁
흐트러져 눈앞을 가렸다.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스퀘델리의 휑한 눈빛이 구경꾼들을
훑고 지나갔다. 스퀘델리가 쓰러지자 행렬이 멈춰 섰다.
“마녀. 죽어라 !”
겁에 질린 사내아이 하나가 돌을 던졌다. 경비병들이 형식적으로 제지를 하자 날아드는 돌이 많아졌다.
쓰러져 있는 스퀘델리를 향해 온갖 욕설이 튀어나오고 더러는 막대기로 쿡쿡 찔러대기도 했다.
경비병 하나가 스퀘델리를 일으켜 세우자 행렬이 언덕을 향해 움직였다.
“묶어라. 정각에 화형에 처한다.”
이번 사형을 주관하는 파리 대주교의 명령에 붉은색 바탕에 하얀 십자가가 그려져 있는 옷을 입고있는
병사들이 죄수들을 나무에 묶어 바닥에 세웠다. 나무 밑에는 장작들이 수북이 쌓였다. 횃불을 들고
있는 병사들이 횃불을 던져넣기만 하면 금새 화염이 죄수들을 집어 삼킬 준비가 다 되었다. 하늘에 떠
있는 태양을 바라보던 대주교는 로트르담 대성당에서 사형집행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오길 기다렸다.
“웅웅웅웅”
“무슨 소리지 ?”
대주교는 기다리던 종소리는 들리지 않고 이상한 소리가 멀리서 들려오자 소리 나는 곳으로 향했다.
멀리 남쪽에서 하늘을 날아오는 것들이 보였지만, 도통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대주교님 저것이 무엇입니까 ?”
대주교는 사제의 물음에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비행물체가 빠른 속도로
몽마르트 언덕으로 다가왔다. 불현듯 두려움이 밀려든 대주교는 경비병들에게 외쳤다.
“불을 질러라. 저기 다가오는 것에 총을 쏴라.”
“타타타타타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몽마르뜨 언덕으로 날아온 잠자리들은 정지비행을 하며 횃불을 들고 있거나 무기를
들고 있는 자들을 저격하기 시작했다. 굉음과 함께 경비병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지자, 구경꾼들이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잠자리들이 재빨리 병력을 내려 몽블랑 식구들을 태우고 몽마르뜨 언덕을
한바퀴 돌고 남쪽으로 멀어져 갔다.
“우리는 하늘에서 내려온 천군이니라.
너희들이 내가 보낸 사자를 핍박했으니 너희들 또한 그렇게 당하리라.”
괴상한 물체에서 뿌려댄 전단지를 들고 읽어나가던 대주교가 멍하니 남쪽을 바라보았다.
“땡 땡 땡”
센 강 중간에 있는 섬 시테섬에 우뚝 솟은 로트르담 대성당 종탑에서 시작된 종소리가
은은히 울리며 몽마르뜨 언덕을 타고 넘었다.
“고생이 많았습니다. 좀더 일찍 구출을 해드리려 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았습니다.”
응급처치를 하고 흐르는 피를 멈추게 했지만, 몽블랑 식구들은 하나같이 제정신이 아니었다.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났지만 그들은 생전 처음 보는 물체를 타고 하늘을 날고 있었다.
스퀘델리는 혼절해서 그나마 나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귀가 멍멍해 두 손으로 귀를 꽉 막고
눈을 질끈 감고 뜨려 하지 않았다.
“잠자리 하나, 옹달샘 나와라”
빌라봉이 가까워지자. 잠자리 조종사가 옹달샘을 불렀다.
“의료진을 대기하라. 옹달샘 응답하라.”
“대장님 ? 옹달샘과 교신이 되지 않습니다.”
잠자리 1호기 기장이 고진영을 보고 소리쳤다.
“3호기는 주변을 한바퀴 돌며 정찰을 하도록. 고도를 낮춰서 통신을 요청해봐.”
“네.”
“옹달샘 나와라 옹달샘 나와라”
한참이 지나서야 옹달샘에서 응답이 왔다.
“대장님. 연결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잡음이 들려옵니다.”
단거리 통신에서 잡음이란 있을 수 없었다. 전파 간섭을 생각했던 고진영은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이 근처에 간섭할 전파를 발생할 만한 것이 없었다. 고진영은 자리 왼쪽에 걸려 있는 송수신기를
꺼내 들고 직접 통신을 시도했다.
“나 고진영이다. 기지에 무슨 문제가 있나 ?”
“아닙니다. 아무런 문제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순조롭습니다.”
반대쪽에서 들려오는 오로치의 목소리는 평상시와 다름없었지만 규칙적인 잡음이 들려왔다.
뭔가를 두드리는 듯한 소리는 흡사 어떤 부호와 비슷했다. 통신을 유지한 체 머리 속에 남은 잡음을
떠올리던 고진영이 그 특유의 건조한 목소리로 통신을 끝냈다.
“알았다. 알았다. 잘 알았으니 이상.”
“잠자리 2.3호기는 주파수를 바꾼다. 주파수 번호 1004”
긴급 발생을 알리는 암호 1004가 고진영의 입을 통해 나오자, 1호기 기장이 고진영을 바라보며
무슨 말인가 하려 했다. 하지만 고진영은 손가락을 입에 대고 먼저 주파수를 돌리라는 시늉을 했다.
"빌라봉성이 누군가에 의해 점령당한 듯 하다. 3호기는 착륙하지 말고 비상시 수칙에 따라 행동하도록.
1호기부터 착륙한다. 모든 대원들은 적의 공격에 대비하라. 최우선적으로 통신실을 장악 해야 한다.
이상”
빌라봉성 공터에 마련된 착륙지점에 다가가자 고도를 낮춘 1호기가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왔다.
착륙지점 주위에는 평소에는 없었던 나무통들이 군데 군데 놓여져 있었고, 오로치가 어설픈 웃음을
지으며 천천히 걸어왔다. 의료진으로 보이는 햐얀 옷을 입을 사람들이 들 것을 들고 대기하고 있었다.
1호기가 착륙하고 2호기가 착륙을 시도했다. 고진영과 함께 대원 3명이 따라 내렸다.
1호기에 거치 된 기관총사수는 총구를 땅을 향하게 하고 있었지만 총신은 의료진들을 따라 갔다.
“정말로 무슨 일 없나 ?”
“대장님. 왜 오셨습니까 ?”
그와 동시에 공터를 둘러쌓고 있는 건물 옥상에 사람들이 나타났다.
하나같이 제국 소총을 들고 잠자리를 겨냥하고 있었다.
“항복하라. 항복하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누구의 목소리인지 분명했다. 에드몽은 빌라봉 성을 장악하고 파리에서 돌아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느새 의료 요원으로 변장한 에드몽 병력이 고진영을 둘러쌓다.
“다른 대원들은 ? 보고는 ?”
“다 죽었습니다. 너무 창졸지 간에 당한 일이라 손쓸 시간이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 고진영이 느닷없이 두 손을 번쩍 들어 오로치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오로치를 껴 안고 바닥으로 뒹굴었다. 그것을 신호로 잠자리 2호가 하늘로 떠오르며
사방으로 기관총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에드몽이 고개를 바짝 숙이고 사격을 외쳐대자,
옥상에 배치된 병력의 집중 공격이 시작되었다.
“탕탕 드드드드 탕탕 펑”
착륙지점 주변에 흩어져 있던 나무통에는 잠자리용 연료가 가득 들어있는지 피탄 되면서 불꽃이
피어 올랐다. 불꽃에 휩쌓인 나무통이 굉음을 내며 폭발하기 시작했다. 동시다발적인 폭음이
떠오르려던 2호기를 휘감았다. 휘청이던 2호기가 1호기를 들이받고 한참을 미끄러져 벽에 쳐 박혔다.
어수선한 틈을 탄 고진영은 오로치와 함께 건물 안으로 잽싸게 뛰어들었다. 세상이 내일 망해도
고진영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허리춤에서 권총을 빼어 든 고진영이 주위를 둘러보며 왼쪽 벽을 타고
비상통로를 열 수 있는 장치를 찾아 눌렀다. 벽이 비스듬히 돌아가며, 사람 하나 지나갈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살아 남으면 나중에 보세”
자신의 권총을 오로치에게 주고, 비상통로로 들어간 고진영은 주머니에서 불티나를 꺼냈다.
빌라봉 성 건설당시에 설치된 자폭장치는 벽과 벽 사이에 있었다. 손을 더듬어 도화선을 찾아낸
고진영이 불티나에 불을 붙이고, 반대쪽 벽을 더듬었다. 원래는 안쪽 벽에서 들어와 바깥쪽으로
나가야 했지만 고진영은 거꾸로 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벽을 더듬어도 문을 열 수 있는 장치를
찾아낼 수 없었다. 고진영이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았다. 원래 안쪽 벽에는 개문 장치가 없었던 것이다.
“꽈광 펑펑펑펑”
연속음이 들려오며 화염이 벽과 벽이 만들어 놓은 좁은 공간을 달려 고진영을 집어 삼켰다.
“그만 가셔야 합니다.”
3호기 부기장은 빌라봉 성이 주저앉는 것을 보며 기장을 재촉했다.
항속거리 500킬로미터가 약간 되지 않는 잠자리였기에 착륙해서 짐칸에 실려있는 연료를 채워야 했다.
“일단은 이곳을 벗어나야 합니다.”
“어디로 ?”
3호기는 갈 곳이 없었다. 한정된 연료로 대한제국이 관할하는 곳까지는 날아갈 수 없었다.
“바다로 가시죠. 그곳에는 잠수함이 있을 지 모릅니다. 작전 개시 전에 요청한 지원함대가
가까이 와 있을 것입니다.”
부기장은 빌라봉 성을 지원하기 위해 대서양에는 잠수함이 항상 대기중이라는 것을 상기시켰다.
‘간다고 만난다는 보장도 없는데.’
기장은 차마 말을 꺼내질 못 했다. 3호기의 마지막 희망을 날려버리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작전로가 변경되지 않았기 만을 바라며 기장이 기수를 돌렸다.
단기3960년 오드리강 상류 브로츠와프
프라하에 모여든 유럽 연합군 10군단 병력 총 4만 명이 브로츠와프로 이동을 시작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군과 보헤미안군으로 구성된 10군단은 이례적으로 한스 장군이 지휘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한스가 10군단 사령관으로 임명된 데에는 보헤미안을 아우르는 신성로마제국의 정책이 크게 작용했다.
기병 이만에 보병 일만 포병과 기타 병과 일만으로 구성된 10군단은 브로츠와프에서 군을 재정비하고
유럽연합군 총사령관의 공격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봄이 오기 전에 폴란드를 해방시키고 여름이 오기 전에 모스크바 공격에 나서야 하는데.”
한스 장군은 각군의 예상 진격로가 나와 있는 유럽 원정군 전략 지도를 안주머니에 꺼내 책상에
펼쳐 놓았다. 8번 접혀져 있는 얇은 가죽 지도 위에는 어지럽게 선들과 점들이 그려져 있었다.
“똑똑똑”
군단장급에게만 제공된 전략 지도를 다시 곱게 접어 넣은 한스 장군이 문에 대고 소리쳤다.
“들어 오게”
“연합군 사령부에서 암호 전문이 도착했습니다.”
“내용은 ?”
“이번 전문은 전문 해독 권한이 제한되어 있습니다.”
유럽 연합군은 부대 정비를 끝내고 중요 명령서를 암호문으로 작성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각 전문은
해독을 할 수 있는 권한이 지정되어 있었다. 권한이 없는 자가 암호문을 해독하려면 키워드 없이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물론 명령서의 빠르고 정확한 전달을 위해 각 제대에 전령을 따로 관리하는
소규모 부대를 운용하기 시작했다.
암호문을 건네 받은 한스는 온갖 기호들, 알파벳 그리고 숫자로 이루어진 암호문을 해독해 나갔다.
이번에 온 전문은 프랑스어로 암호화 되어 있었다. 내용을 다시 한번 확인 한 한스 장군이 숨을 참았다
길게 뱉었다.
“각 사단에 암호문으로 보내게”
“네. 사령관님”
10군단에 이동 개시 및 공격 명령이 전달 되었을 즈음, 신성로마제국군으로 구성된 유럽 연합군
제9군단 역시 오드리강 상류에 있는 크라코프를 공격하기위해 움직였다. 오드리강 전역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유럽 연합군의 이동이 바르샤바에 사령부를 설치한 대한제국군 4군 원정군에
속속 보고되고 있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한 겨울에 공격을 감행하다니. 몰살되려고 작정한 모양입니다.”
새롭게 발견된 유럽군의 이동로가 전황판에 표시되었다. 작전참모가 말은 그렇게 하고 있었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걱정과 당혹함이 잔뜩 베어 있었다. 기본적으로 겨울 전투를 상정해 놓지 않은
원정군 사령부로써는 겁도 없이 움직이고 있는 적의 행태에 적잖이 당황하고 있었다.
“크라코프에 병력을 증파해야 합니다.”
“크라코프뿐 아니라, 브로츠와프, 오스트루프, 포즈난, 아니 전 전선에 병력을 증파해야 합니다.”
크라코프에는 우크라이나 일대를 관장하고 있는 4군단 예하 기병사단 1개 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6군단 전 병력은 오드리강 주변에 산개해 있었다. 하지만 달려드는 유럽 연합군 병력에 비하면
턱없이 모자랐다. 대부분이 10배 이상의 병력차를 보이고 있었고, 크라코프는 20배가 넘었다.
“작전상 후퇴를 권고합니다. 현실적으로 증원이 불가능하고, 고립될 경우 막대한 피해가 예상됩니다.
전선을 축소해서 비스와니 강을 중심으로 방어전에 임해야 합니다. 작전 참모진에서 마련한
동면 작전은 단치히와 비드고슈치 그리고 우치, 체스토호바, 라돔, 루블린을 연결하는 반원형 방어선을
형성하고, 3군단과 우크라이나 지원병력을 리보프와 루블린에 집결시킵니다. 이렇게 하면 전선을
1000킬로미터에서 500킬로미터로 축소할 수 있습니다. 봄까지 시간을 끌면 그 다음은…”
“말도 안됩니다. 어떻게 싸워보지도 않고 물러난다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까 ?
대한제국 군인으로서 그런 치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싸우다 죽겠습니다.”
5군단장 고수석 중장이 작전 참모의 말을 끊고 나섰다. 비록 수천명의 사상자를 내긴 했지만
적병 10만을 와해시키고 바르샤바에 무혈입성하는 데 전공을 세운 5군단이기에 그의 발언에는
힘이 실려 있었다. 주변에서 수근거리는 소리에 아랑곳 않고 고수석 중장이 말을 이었다.
“40만이든 50만이든 숫자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투지만 있다면 적이 아무리 많아도 대한제국군을
당해내지 못합니다. 괜히 우리를 천군이라 부르겠습니까 ? 천군을 이길 군대는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령관님. 저는 오히려 진격할 것을 건의합니다. 베를린과 빈을 공격하고 여세를 몰아
파리로 밀고가면 이번 전쟁은 끝난 거나 다름없습니다.”
“그건 어렵습니다. 수에즈 운하가 사고로 봉쇄되면서 흑해나 대서양을 통한 지원이 불가능한
실정입니다. 저희가 이용할 수 있는 보급로는 기껏해야 발트해를 통한 보급로와 육로를 통한 것이
전부입니다만 계절적 요인을 감안하면….”
“그러길래 누가 보급품을 날려 먹으라고 했습니까 ?”
보급참모의 말에 5군단장이 나섰다. 예하 부대들은 보유 보급품으로 그럭저럭 겨울나기는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다음이 문제였다. 이번에 당한 공격으로 원정군은 유류 보급품에 막대한 지장을
받고 있었기에, 진격에서 필수적인 포병과 기계화 사단의 기동이 극히 제한되고 있었다.
“천군부에서는 별다른 명령은 없나 ?”
사령관이 착찹한 심정으로 통신 참모를 바라보았다. 통신 참모 옆에 있던 정보 참모가 사령관과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정보 참모는 내년 봄에 적의 대대적인 공격이 시작될 것으로
보고했다. 그것을 바탕으로 원정군은 겨우내 지역 민심 확보를 위해 뿔뿔이 흩어졌다.
하지만 그의 예상은 한참 빗나가고 있었다.
“없습니다.”
천군부에서는 일을 이 지경까지 끌고 간 4군 사령관에 대한 무언의 불만을 표시하고 있는 듯 했다.
지금 다가오는 40만의 병력은 원정군 병력 15만에 비하면 그렇게 위협적인 세력이 아니었다.
하지만 적은 집중되어 있고, 대한 제국군은 분산되어 있었다. 적은 병력으로 많은 병력과 싸워
이기기 위해서는 자신의 이점을 최대한 활용해야 했고 대한제국이 갖은 화력의 우수성을
활용하기위해서는 적을 집중시켜 격멸 하는 것이 최선인 듯 보였다.
“봄까지 전선을 유지하면 폭격기의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후퇴하면 북부 영주들이 동요하게 됩니다. 폴란드 내 저항 세력들이 남부 집결할 것이
뻔하고, 이번 전쟁을 주시하고 있는 터키나 스웨덴이 오판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정참은 후퇴를 반대하십니까 ?”
작전참모의 질문에 대답하는 정보참모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그렇다는 것이지요. 반대하는 것은 아닙니다.”
“참 내. 그럼 말을 마시던가요 ?”
고수석 중장이 정보참모를 쏘아보더니 이내 군수 참모와 작전참모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후퇴할 수 있으면, 당연히 공격할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 왜 병력 지원을 못 합니까 ?
5군단 병력은 어떤 악천후에서도 이동할 수 있습니다. 사령관님. 저를 보내주십시오. 이번 기회에
유럽전을 끝내겠습니다. 우리가 힘들면 적은 더 힘들지 않겠습니까 ? 후퇴는 말도 안됩니다.”
후퇴하자는 의견과 맞서 싸우자는 의견이 분분한 가운데 사령관은 그저 묵묵히 고개만 끄덕였다.
적들은 시시각각으로 오드리강으로 다가오고 있었고, 일부 부대는 꽁꽁 언 강을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보란 듯이 건너도 있었다.
“수에즈 운하는 언제 개통할 수 있다던가 ?”
“빨라야 6개월입니다. 기존 운하를 보수하는 것 보다 새롭게 파는 것이 더 빠르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완벽한 후퇴가 가능하긴 한 건가 ?”
오랜 회의시간동안에 처음으로 사령관이 후퇴에 대한 관심을 나타냈다.
사령관은 이미 예하 부대에 보급된 겨울나기 보급품을 고스란히 이동시킬 수 있는지를 묻고 있었다.
“전부 가져갈 수 없습니다만 2/3정도는 가능합니다. 중화기를 우선적으로 이동시킨다면 3/4까지도
가능합니다.”
5군단장을 제외한 대부분의 회의 참석자들은 작전 참모부에서 올린 후퇴 건의안에 동의하는 눈치였다.
김상태 사령관은 눈을 감았다. 지금껏 천군 역사에 후퇴가 있었는지를 생각해 보았다.
그의 기억 속에는 하다못해 작전상 후퇴라는 것을 한 적도 없었다.
“크라코프를 포기해야 한단 말이지 !”
유럽 최대의 소금광산이 있는 곳을 포기하기란 쉽지 않았다. 지키기는 더욱 어려워 보였다.
“아무리 그래도 슈체친은 포기 못 하겠군. 그곳은 보급 걱정을 덜 수 있으니 포위당해도 걱정 없겠지.
퇴로도 확보된 거나 마찬가지니. 4111 사단에게 슈체친을 무슨 수를 쓰더라도 방어하라고 하고,
기병사단에게는 단치히로 후퇴하라고 해. 오드리강에서 비스와니강까지 후퇴하도록. 4511사단과
4611사단이 후퇴를 엄호하고 이 일은 고수석 중장이 김한석이와 함께 맡아주었으면 좋겠군.”
“사령관님 ?”
“그렇게 해주게. 자네밖에 없어!”
김상태 사령관은 한사코 후퇴를 반대하는 고수석 중장에게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 원정군 후위를
맡아주길 바랬다. 어쩌면 사령관은 고수석 중장처럼 진격하고 싶은지도 몰랐다. 간절한 눈빛을
떨쳐버리지 못한 고중장이 마침내 후위를 책임지겠다고 하자, 전격적인 후퇴가 결정되었다.
“그런데 민간인들에게는 후퇴사실을 알려야 합니까 ?”
“숨기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 동요를 막고 비밀 유지를 위해서는 숨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대한제국을 믿고 따라준 도의를 져버리면 나중에 믿음을 줄 수 있겠습니까 ?”
“그렇다고 후퇴한다고 광고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 그건 말도 안됩니다.”
확실히 민심을 잡지 못한 원정군으로서는 후퇴도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호의적인 집단과
호전적인 집단이 혼재해 있는 폴란드는 원정군에게 거대한 복마전이 따로 없었다.
“원칙대로 하는 게 좋아. 일단 우리의 후퇴사실을 사실대로 알리도록 하게.
누구에게, 언제 알리느냐는 지역 특성에 맞게 부대장과 민정참모에게 전권을 일임하도록 하고.
그리고 후퇴도 작전임을 잊지 말게. 한 사람의 낙오자도 없이 전원 비스와니 선까지 이동한다.
민스크에 새로운 보급창을 건설하도록. 이번 작전을 지급으로 천군부에 승인 요청하고
천군부에서 반대하지 않는 한 내일 정오를 기해 작전을 시작한다. 이상. 다들 나가봐.”
더 이상 할말이 없다는 듯 사령관이 의자를 돌려 창을 바라보았다.
회의에 참석한 참모진과 장성들이 회의실을 조용히 빠져나갔다.
한두 송이씩 내리기 시작한 눈발이 점점 많아지더니 이내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크라코프
폴란드 제2의 도시, 소금광산으로 유명한 크라코프를 담당하고 있는
4421사단 3연대장 조봉민 대령은 후퇴 명령서를 신경질적으로 꾸깃꾸깃 꾸겼다.
다시 펴서 읽은 명령서의 내용은 토씨하나 변하지 않았다.
“다시 돌아가라고 ? 적 그림자도 못보고 무서워 꽁무니를 빼란 말이지 ?”
“똑똑똑”
“뭐야 ?”
연대 민정 참모가 크라코프 시장과 함께 연대장 집무실로 들어섰다. 크라코프 시장은 조봉민의
고함소리에 상당히 놀란 눈치였다. 지그문트에 충성을 맹세하고 대한제국을 적대시한 영주와
군소 귀족을 몰아내고 새롭게 크라코프를 책임지고 있던 엘브롱그의 눈이 놀란 토끼처럼 동그래졌다.
“어서 오십시오. 이리로 앉으십시오.”
엘브롱그가 앉기를 기다린 조봉민은 차를 내오지도 않았지만 본론을 꺼내 들었다.
사령부에서 내려보낸 후퇴 명령서대로 부대를 이동시키자면 한시가 모자를 판이었다.
“우선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제 말씀 잘 들으십시오. 유럽 연합군이 오드리강을 넘어 이곳으로
오고있습니다. 사령부에서는 저희 부대에게 비스와니 강 이북으로 후퇴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그렇다고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작전상 후퇴입니다. 봄이 되면 반드시 되돌아 옵니다.
그때는 오드리강을 너머 피레네까지 단숨에 달려갈 겁니다. 저희가 걱정하는 것은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적들에게 이곳을 넘겨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양의 탈을 쓴 놈들이 무슨 헤꼬지를
할지 모르니 주민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는 것이 좋을 듯 싶은데 시장은 어떻습니까 ?”
“네 ? 지금 후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 버리신다는 ?”
조봉민의 예상 그대로 엘브롱그는 거의 까무러치기 일보 직전이었다. 말을 제대로 잊지도 못했다.
“버리다니뇨 ? 절대로 아닙니다. 지금 우리는 이렇게 가지만 기필코 돌아옵니다. 대한제국 군인으로서
명예를 걸고 약속합니다. 내년 여름이 오기 전에 난 이 자리에 지금 있는 그대로 있을 것입니다.
시장님께서는 잠시 여행을 하신다고 생각하시고 이곳을 떠나있으시면 됩니다. 가실 데가 없으시면
저희랑 같이 가셔도 됩니다. 그리고 주민들에게도 이곳을 잠시 피해 있으라 하십시오.
저희는 3일 후에 떠날 예정입니다.”
엘브롱그는 소치니의 설교에 감복을 받아 소치니 제자로 광부들과 농민들을 위해 교회를 열고
집회를 주관하며 봉건영주와 대항해 왔었다. 모진 탄압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던
소치니 파 교도들은 대한제국군을 자신들의 해방군으로 받아드리고 크라코프 일대를 장악해
나갔고 있는 중이었다. 이런 중대한 때에 자신들의 버팀목이 사라진다면 자신들은 보헤미안에서
벌어질 대학살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
“이건. 이건…. 이건 소치니 선생님과 의논해봐야 겠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
하나님도 무심하시지. 오 하나님 !”
엘브롱그가 쓰러질 듯 비틀거리며 연대 본부 건물을 빠져나가는 것이 창문 너머로 보였다.
충격이 심했는지 그는 모자를 쓰는 것조차 잊어버렸는지 오른손에 털모자를 움켜지고
시청사로 힘겨운 발길을 떼어 놓았다.
“젠장 ! 개새끼들.”
“부관 ? 허우긍이 들어 오라고 해”
책상을 세게 내리친 조봉민은 연대 보급을 맡고 있는 허우긍 소령과 실랑이를 벌였다.
조봉민은 리보프까지 가는데 필요한 보급품과 화기를 제외한 여분의 보급품을 크라코프 시민들에게
나눠주길 명령했고, 허우긍은 보급품 전용은 사단장 허가가 나지 않으면 불가하다며 맞섰다.
“하라면 해. 내가 책임진다. 크라코프를 떠나는 사람들에게 나눠주란 말야.
우릴 믿고 따르는 사람은 곧 대한제국민이나 다름없어. 알았어 ? 우리 대한제국민이라고.”
“하지만. 보급품전용은 군사재판에 회부될 수 있습니다.”
“재판을 받아도 내가 받으니까. 넌 걱정말고 다 풀어. 최소한 삼천 명이 한달간은 먹고 살 수 있겠지.
얼마나 살아 남을지 모르지만.”
“알겠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 삼일이 지났지만 엘브롱그는 끝내 조봉민을 다시 찾지 않았다.
이미 연대 보급창고를 열어 시민들에게 물품을 나눠주면서 후퇴한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조봉민은 부관이 크라코프를 떠나기 위한 준비가 끝났음을 알려오자 털모자를 둘러쓰고 집무실을
둘러보았다. 건물 밖으로 나온 그가 말 위에 올라타려는 데, 엘브롱그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같이 안가십니까 ?”
“예. 선생님께서는 여기 남길 바라십니다. 어떤 시련이 있어도 이곳에서 생을 마감하시겠답니다.
차마 저도 떠나지 못하겠습니다.”
“여기 있으면 죽을지도 모르는 데. 그래도 남으시겠답니까 ?”
“그렇습니다. 그리고 시민들을 위해 애쓰신 것에 감사드린다는 말씀을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죄송합니다. 전 꼭 돌아옵니다. 그때까지 살아만 계십시오.”
엘브롱그의 두 손을 꼭 잡은 조봉민이 말 위에 올라 손짓을 했다. 이천여명의 연대병력이 크라코프를
떠나기 시작했다. 물끄러미 대한제국 기병대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엘브롱그는 서둘러 시청으로
달려갔다. 그는 달리면서 피식 웃었다. 진짜 시장이 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자신을 믿고 따라준 시민들을 위해 비로소 자신이 할 일이 생긴 것이다.
단기3960년 오드리강 하구 스위노우치에 해병대대 방어선
슈체친에 가해지는 유럽 연합군 1군단의 압력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강력해졌다.
단치히에서 스위노우치에로 옮겨온 해병 대대원들은 주야간을 가리지 않는 전투에 진절머리가
나기 시작했다. 오드리강 하류에는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호수가 있고, 이 호수를 통해
발틱해로 연결되는 수로가 4개가 있었다. 해병대가 맡고 있는 것은 북쪽에서 3번째 수로로
가장 넓고 수심이 깊어 발틱함대가 이용하는 수로이기도 했다. 이 수로를 통해 슈체친과 발틱해가
연결되었고, 슈체친은 스위노우치에에서 30킬로미터 상류지점에 있다.
“지원병은 언제 오는 겁니까 ?”
“그 하룻밤이 벌써 며칠짼 줄 아십니까 ? 3일 입니다. 더 이상 버티기 힘듭니다.
지원병을 보내주시던지 후퇴를 허락해 주십시오. 보급품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안됩니다. 네 ? 알겠습니다. 오늘 하루만 버텨보겠습니다.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안종순 중령이 4111사단 지휘부와 통화를 마치고 수화기를 통신병에게 건넸다.
방금 전에 끝난 전투에서 또다시 15명의 사상자가 새로 발생했는지 칠판에 숫자가 바뀌어 있었다.
사면초가에 놓인 4111사단의 유일한 보급로는 이제 오드리 강줄기 밖에 없었고,
오드리강 하구에 스위노우치에가 있었다. 이곳이 유럽 연합군에 넘어가면,
슈체친은 유일한 보급로를 잃어버리는 거와 같았다.
“지원병이 내일 아침 일찍 떠난다는 군.”
“천마도 옵니까 ?”
대대 작전참모가 지원병이란 말에 반색을 하며 물었다. 하지만 그건 희망사항에 불과했다.
천마를 이곳까지 운반할 선박이 슈체첸에 있을 리 만무했기 때문이다.
“무슨 수로 천마를 끌고 오겠나 ? 중대장들에게 오늘 밤만 버티라고 알려.
4111사단도 이제 겨우 숨통이 트인 모양이야. 지원병력이 오면 한동안 쉴 수 있겠지.
그나마 저 놈들이라도 있어서 다행이야.”
안종순은 하구에 떠있는 300톤짜리 소형 해안 순시선 2척을 바라보았다.
50미리 포 한문이 유일한 무장이었지만 6614함과 6620함은 대대가 믿을 수 있는 듬직한 대형화기였다.
6614함과 6620함은 발틱해와 오드리 하구에 만들어진 거대한 호수를 오가며 흩어져 있는 해병대대를
지원했다.
“발틱함대가 보급품 수송에 매달리지만 않았어도 이곳을 지키기는 어렵지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작전 참모가 아쉬워하는 것은 당연했다. 원래 이곳 방어는 자신의 부대와 함께 발틱함대가
같이 맡아야 했다. 하지만 부족한 보급품을 단치히를 거쳐 바르샤바로 나르기 위해서
발틱 함대가 총 동원되고 있었기에 이곳에는 달랑 두 척만이 남겨져 있었다.
“오늘 밤은 그냥 넘어갔으면 좋으련만. 지뢰지대 다시 확인하고, 정찰병 내보내.
오늘은 보름달이 빵빵하게 뜨려나 ?”
안대령의 바람이 통했는지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밤하늘에 둥근 보름달이 걸렸다.
해가 바다 너머로 사라지며 북쪽에서부터 차가운 밤공기가 대지를 뒤덮었다.
바람소리 가득한 호수 위를 6620함이 떠다니며 초계임무에 나서고,
섬 안에서는 대대 전 병력이 참호에 투입되어 선잠을 청했다.
“기관장입니다. 아무래도 잠시 정선을 해야겠습니다.”
회귀 점을 지나 북상을 시작한지 2시간이 지날 무렵 6620함 기관장의 요청이 들어왔다.
“이번에는 어디가 문제야 ?”
“윤할유만 교체하면 됩니다.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내일도 보급품이 오지 않으면 큰일입니다.”
“내일 온다고 했으니 오겠지.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한시간 동안 휴식이다.
모두들 편히 쉬도록.”
함장의 휴식 명령에 10명의 승무원들이 갑판 위에 그대로 널부러 졌다.
일부는 좁은 선실로 들어가 잠을 청하기도 했고 50미리 기관포를 책임지고 있는 수병들은
마른 헝겁으로 포신을 닦으며 하늘에 떠있는 별들을 바라보았다.
“6614함이다. 전방에 다수의 범선 출현. 계속해서 늘어난다. 수십 척이 넘을 것 같다.
6620함 지원 바란다. 현재까지 60여척.”
오랜만에 주어진 휴식을 즐기고 있는 6620함 갑판에 공용주파수로 6614함 함장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게 무슨 소리야 ?”
“여기는 물개다. 주파수 308. 지금 다수의 국적 미상 범선이 오드리강 하구로 다가오고 있다.
6620함은 현 위치를 알려달라.”
어리둥절해 있는 사이 삼각주에 주둔중인 해병대대에서 통신이 들어왔다.
주파수를 308로 바꾸고 물개와 통신을 마친 6620함 함장은 함에 비상을 걸고 최고 속도로
북북진을 시작했다.
6614함은 계속해서 수평선을 넘어오는 범선의 숫자를 세고 있었고, 그 숫자가 벌서 100을 넘어섰다.
“완전 개 떼처럼 몰려오는구만. 힘들겠어.”
새까맣게 몰려드는 유럽 연합 함대는 발틱 해를 가득 메우고 오드리 강 하구로 다가왔다.
150까지 숫자를 세다 그만 둔 함장은 불안감을 떨쳐버리려 연신 떠들어댔다.
때를 같이해서 육지에서도 해병대대 방어선에 대한 공격이 재개되었다.
해상과 육지에서 동시에 시작된 공격은 해병대대의 능력을 한참 상회하고 있었다.
“가장 앞에 놈부터 조준.”
기관포 사정거리에 연합 함대의 선두가 들어왔다. 연합 함대 선두에 배치된 함에서도
6614함을 발견했는지 진형을 넓혀가며 포위하려는 행태로 움직였다.
‘펑펑펑’
“충격에 대비하라. 기관포 발포”
‘둑둑둑’
해전이라고 부르기도 어색한 전투가 연합함대의 선공으로 시작되었다. 사방에서 포탄이 날아와
6614함을 위협하며 바다 속으로 떨어져 내렸다.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지근탄이 발생하며 바닷물을
갑판으로 쏟아부었다. 6614함장은 6620함이 올 때까지 버틸까 했지만, 6620함이 온다고 해도
별 수가 없을 듯 보였다. 저지해야 할 적선은 너무 많았고, 보유하고 있는 포탄은 한정되어 있었다.
더군다나 50미리 기관포로는 적선에게 피해를 줄 수는 있어도 침몰 시키기에는 부족했다.
“천천히 후퇴하며 적에게 최대한의 피해를 준다.!”
함을 뒤로 천천히 물러나게 하면서 함장은 물개를 급히 호출했다.
자신만으로는 도저히 적 상륙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알려줘야 했다.
“우린 천천히 수로 입구까지 후퇴하겠다. 적 상륙에 대비하라.”
“최대한 시간을 벌어주기 바란다. 가급적 남쪽 해안으로 유도하라.
한시간 안에 6620함이 지원할 수 있다.”
‘꽈과과광’
물개와 통신을 마치고 6614함이 천천히 뒤로 물러나고 있을 때, 유럽 연합 함대 중간에서
연속음이 들려오며 화염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폭음에 휩싸이며 서너 척이 단번에 침몰하고 있었다.
“잠수함이다. 모두들 힘을 내라.”
함장은 폭발의 강도로 봐서 잠수함에서 발사된 대구어뢰가 폭발한 것이라 생각했다.
신항을 모항으로 하고 있는 발틱함대 잠수함 전대 소속 잠수함들은 대서양으로 나가는 해로가
봉쇄되자, 오드리 강 주변에 몰려 있었다.
안종순 중령은 6614함과 통신을 끝내고, 적의 예상 상륙지점을 생각해 봤다.
하구 삼각주라 어디라도 상륙이 가능했다.
“병력이 없어. 전방의 공격을 막기도 급급한데, 상륙까지 허용한다면 끝장이다.
동쪽 해안을 맡고 있는 3중대를 서쪽으로 이동시켜.”
그나마 가장 압력이 덜한 3중대를 해안 방어선으로 옮기려 했지만 그것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그의 명령이 전달되기도 전에 3중대에서 비명 섞인 보고가 들어왔다.
“대대장님. 호수에 배가 나타났습니다. 50척이 넘습니다. 지원 바랍니다.”
“무슨 소리야 호수에 배가 어떻게 들어와 ?”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엄청 몰려옵니다.”
안 중령은 머리가 멍 해졌다. 유럽 연합 함대 일부가 호수에 들어왔다면 만일의 경우
이용할 후퇴로조차 위협 받고 있다고 봐야 했다.
“어떻게든 막아. 상륙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 알겠나 ?”
서둘러 무선을 끊은 안중령은 4111사단를 호출해 지금 상황을 설명하며, 후퇴 준비를 하겠다는
일방적인 통보를 해버렸다. 4111사단장이 길길이 날뛰었지만, 안중령이 보기에 이곳을 사수하기는
힘들어 보였다. 적은 수천문의 포대를 보유한 대규모 병력이었다. 안중령은 어차피 지키기 힘들다면
부하들의 목숨이라도 챙겨야 하는 게 자신의 의무라 생각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막아야 되는 데. 참모장은 후퇴로를 찾아봐.
상륙를 저지하는데 실패하면 대대 전체가 후퇴를 해야 할 지도 모르니까 ?”
대충 어림잡아도 대대 전방에 수천 명이 포진하고 있었고, 발틱 해에서 오는 대규모 함대에는
적어도 일만 명이 상륙할 것으로 보였다. 아무리 잠수함 전대가 공격을 하고 있지만
서서히 한계를 보이고 있었다. 동쪽 호수에서도 오천명 남짓 될 듯 했다.
이스탄불 황궁
김원중 신임 주터키 대한제국 대사가 무라도 4세의 은밀한 연락을 받고 하렘에 숨어 들었다.
하렘은 철저히 외부인과 단절된 곳이기에 김원중 대사가 들어올 수 없는 곳이지만,
무라도 4세가 유일하게 자유로울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저를 보시고자 하셨사옵니까 ?”
“그렇소. 일전에 전임대사께서 한 말이 생각나서 말이요.”
“어렵지 않겠습니까 ? 저희 대한제국은 타국의 내정에 간섭하는 것을 달갑지 않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천륜지간의 일에 끼여들만한 명분도 없거니와 그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럼 전임대사가 내게 한 말은 다 무엇입니까 ? 지금 대한제국이 나를 가지고 희롱하는 것 입니까 ?
일전에 반역자를 하와이로 보낸 것을 뭐라 말하겠습니까 ?”
말이 밖으로 새 나가지 않게 말소리를 죽였지만 황제의 목소리에 무거운 노기가 짙게 깔렸다.
코에 걸면 코거리요, 귀에 걸면 귀거리가 되는 것이 명분이었다.
“그런 것이 아니오라. 명분이 없다는 것입니다.”
“명분이라면 내가 곧 명분이 아닙니까 ? 비록 허수아비이긴 하지만 엄연히 제국의 황제이며
이슬람 교도의 수장이 누구입니까 ? 내가 원하는 것 보다 더 큰 명분이 필요하십니까 ?”
“정녕. 어머니와 반목하실 생각이십니까 ?”
“그렇소 !”
황제의 대답은 단호했다. 대한 제국이 부추긴 점도 있지만 황제는 스스로가 강력히 원하고 있었다.
그는 이제 그만 친정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거기에는 재상에 대한 알 수 없는 증오도 한몫하고
있었는데 무라도 4세는 이번 기회에 재상을 없앨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친정을 위해 힘을 모으던 황제는 세상이 온통 전쟁으로 어수선한 틈을 타 황궁을 장악할 계획을
꾸미기 시작했고, 대한제국이 협력자로 끼여들면서 계획이 실행에 옮겨졌다.
황제와 밀담을 나누고 관저로 돌아가는 길 내내 김원중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실실 웃음을 흘렸다. 태후 타라한이 유럽과 접촉을 강화하고 대한제국을 멀리하면서부터 대한제국은
황제에게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던 차에 운하가 봉쇄되고 보급로가 막히면서 새로운 보급로를
찾아야 했고, 대한제국은 그 대안으로 아프리카 남단에 보급기지를 건설하는 것과
흑해와 아조프해를 장악하는 것을 동시에 추진하기 시작했다.
“이제 재상이 황후를 만나는 날만 알아내면 되는 건가 ? 무라도 4세도 급하긴 급했군.
작은 미끼에 덥썩 물어버리다니. 그나 저나 정말로 이번 사건에 태후가 관련되었을까 ?”
흔들거리는 마차 안에서 이번 운하 사고의 보고서 내용을 떠올렸다. 보고서는 외부에서 가해진
어떤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방향타가 망가졌으며, 가해진 힘은 화약 폭발로 추정된다라고
사고 원인을 분석하고 있었다. 또한 정보 내부 문건은 유럽 연합측에 협조하는 세력이 터키내부에
존재한다는 것과 그 배후에 타라한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조심스러운 추측을 포함하고 있었다.
지중해 함대 흑해 분함대 사이레 기지
사이레 대한제국 해군 기지 부근에서 잡일을 하던 압둘 하지즈는 매일 아침 새벽이면 바다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로 올라 왔다. 하지즈는 언덕 위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가벼운 운동을 하면서
한시간 이상을 언덕에서 머물곤 했다. 끼룩거리며 날아다니는 갈매기를 쫓아가던 하지즈는 바다 위에
떠있는 배들이 들어오자 유심히 바라 보았다. 너무 멀어서 조그맣게 보였지만 기지를 출항한
대한제국 함대가 어디론가 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깜짝 놀란 하지즈는 구석에 삐죽 솟아난
바위 밑을 파내고 망원경을 꺼내 바닥에 엎드렸다.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함대의 숫자를 세던
하지즈는 서둘러 망원경을 접고 언덕을 내려왔다.
이스탄불
“대한제국 사이레 함대. 새벽에 기지를 떠남. 방향 불분명.”
무할라비 재상이 뒷짐을 지고 집무실을 서성댔다.
엉덩이에 닿아 있는 오른손에는 사이레에 심어놓은 첩자에게서 넘어온 암호 해독문이 들려져 있었다.
한참을 서성대던 재상이 의자에 털썩 주저 앉았다.
“똑똑똑”
문 두드리던 소리와 함께 터키제국의 정보와 군대를 책임지고 있는 황궁 친위 정보 장교가 들어왔다.
무할라비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정보장교를 반갑게 맞이하며 물었다.
“그래, 추가 정보가 들어왔나 ?”
“네. 사이레 함대가 보스포로스 해협을 통과한다고 알려왔습니다. 그리고 크레타 기지에서도
거의 전 함대가 기지를 떠났습니다. 지금 크레타 기지는 소형함만이 외항을 순찰 중입니다.”
“크레타 기지에서도 ? 움직일 여력이 없을 텐데 ?”
“북유럽 상황이 많이 불리한 모양입니다. 대한제국이 발틱해를 상실했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재상은 운하가 봉쇄되면서 대한제국 지중해 함대가 움직일 수 없다고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지중해 함대가 움직였다는 것은 그만큼 대한제국이 심각한 상황에 놓여있다고 봐야 했다.
대한제국이 드디어 마지막 카드를 빼들었지만 불안하기만 했다.
지중해에서 발틱까지는 자그마치 15일 이상이 걸렸다. 왕복 한 달이고 크레타 함대가 발틱해에서
머무르는 기간까지 합치면, 크레타 기지는 앞으로 최소 두 달은 속빈 강정에 불과했다.
“그리고 며칠 전에 대한제국 대사가 황제 폐하를 만나고 갔습니다.”
“그래 ? 무슨 일로?”
“확인 중입니다. 그런데 황제폐하 처소에서 은밀이 만가고 가서 시간이 좀 걸리겠습니다.”
“알았네. 토마스 로 경에게 적당히 포장해서 전달하게. 아무래도 황태후 폐하를 만나러 가야겠어.”
재상은 대한제국이 유럽 연합에 패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확인된 바로는 대한제국 육군은 거의 500킬로미터를 후퇴하고 있었고,
막강한 해군 전력은 전쟁에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유럽 연합의 제안을 받아들여도 괜찮으려나 ?”
무할라비는 타라한이 유럽 연합의 제안에 관심을 보였던 것을 기억해 냈다.
그들은 그라나다 지역을 터키제국에게 넘겨주는 대신 대한제국과의 동맹을 파기하고 유럽 연합에
들길 요청하고 있었다. 만약 그렇게 되면 그의 두 아들이 그라나다를 통치할 가능성이 높았다.
재상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좋은 기회였지만, 먼저 타라한을 확실히 설득해야만 했다.
“좋긴 합니다만, 대한제국이 호락호락하게 물러나겠습니까 ?
대한제국과 우리는 국경을 맞대고 있다는 걸 생각해야 합니다.
그냥 지금처럼 양쪽에 협력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
타라한은 재상의 말에 입맛을 다셨다. 그라나다와 대한제국을 저울질 하던 타라한은 유럽 연합보다는
대한제국에 무게를 더 주어야만 했다. 그만큼 대한제국은 타라한에게 두려운 존재였다. 수에즈 운하를
봉쇄하는데 협조를 했던 것은 대한제국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한 방편이었지, 대한제국과 완전히 등을
돌리려는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다.
“대한제국이 패하면 그때는 그 화살이 우리에게 돌아올 수도 있습니다. 폴란드 전투에서 대한제국은
싸워보지도 못하고 후퇴에 후퇴를 거듭하고 있다고 합니다. 여름 안에 모스크바까지 밀린다는
소문이 파다 합니다.”
“설사 모스크바까지 밀린다 해도 대한제국은 절대로 지지 않습니다. 그렇게 보고도 모르십니까 ?
대한제국의 힘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고 있어요. 유럽 연합측에는 그냥 중립으로 남겠다고 하는 게
좋습니다. 유럽 연합과 대한제국이 오랫동안 싸우면 우리에게는 이익이죠.
유용한 정보를 계속 제공해서 유럽 연합이 좀더 오래 끌도록 도와주기만 하면 됩니다.
그사이 우리도 힘을 키워 나간다면 대한제국도 제국을 무시하지 못 할 겁니다.
대한제국이 유럽연합을 제압해 나간다 싶으면 우리도 동맹군의 일원으로 유럽을 치고 나가면 됩니다.
그리 아시고 이 이야기는 여기서 그만 두시는 게 좋겠습니다. 술상을 봐두라 일렀습니다.
자리를 옮기시지요!”
재상은 타라한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녀는 자신보다 한수 위임에 틀림없었다.
이야기를 마친 두사람은 그들만의 은밀한 일을 위해 밀실로 자리를 옮겨 작은 술잔을 마주보고 앉았다.
“너무 늦었사옵니다. 그만 일어나야겠습니다.”
재상이 침실에서 일어나며 타라한을 바라보았다. 양 빰으로 열기가 올라와서 빨갛게 달아올랐다.
속이 훤히 보이는 망사 옷을 입고 침대에 누워있던 타라한 역시 홍조를 띄고 있었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옷을 주섬 주섬 들어올리던 재상은 밖에서 들려온 시녀의 목소리에
하마터면 들고 있던 옷을 떨어뜨릴 뻔 했다.
“황태후 폐하 ? 황제 폐하 납시셨습니다.”
야심한 밤에 황제가 황태후 침소에 올 일이 없었다. 그보다 황태후 처소는 황제라 하더라도
들어오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황태후 처소를 지키는 경비병은 황태후의 허락이 없이는 설령 황제라
해도 출입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잠시 후 시녀의 떨린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황태후 폐하 ? 황제 폐하 납시셨습니다.”
“무슨 일인지 여쭈어 보고, 급한 일이 아니면 내일 아침에 오시라 여쭈어라.”
일순 당황했던 타라한은 침착하게 말을 하며 옷을 입기 시작했다. 그러나 옷을 챙겨 입기도 전에
황제를 막고 있던 시녀 몸뚱이가 밀실 문을 뚫고 들어왔다. 밀실 문이 와장창 뜯겨져 나갔다.
“이게 무슨 짓이냐 ?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비상통로로 다가가던 재상이 너무 놀라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황제는 반쯤 올라간 재상의 바지자락과 어머니의 옷매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타라한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썩 나가지 못할까 ? 감히 어머니의 침실에 허락도 없이 들어오다니.
내 이 일을 묵과하지 않을 터. 황제는 썩 물러나라”
평소 같으면 황태후의 작은 소리에도 움츠러들었을 황제의 두 눈이 활활 불타 올랐다.
허리춤에 칼을 차고 들어선 황제의 모습은 이전의 모습이 아니었다.
“어머니. 지금 무슨 죄를 범하고 계신지 아십니까 ? 과부나 결혼하지 않은 여자가 남자와 정분을
통하면 사형이라는 것을 모르고 계셨습니까 ? 여봐라, 저 죄인을 당장 끌고 가라.”
황제가 소리치자, 황제 뒤에 있던 병사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재상을 묶으려 했다.
“내 이놈들 ! 당장 물러서라. 난 이 나라의 재상이다.”
“황태후 폐하 ? 황태후 폐하 ?”
아직도 사태파악이 되지 않은 재상이 고래 고래 소리쳤지만 이내 잠잠해 졌다.
병사 하나가 긴 창으로 재상의 머리를 휘갈겼기 때문이다. 피보라가 밀실 사방으로 튀었다.
황제에게 밀려들어온 시녀는 바들바들 떨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저에게 넘겨 주십시오. 그럼 이일은 불문에 붙이겠습니다. 하지만 당분간 이곳을 벗어나실 순
없습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 내일 조례 때, 발표하시겠습니까 ?”
“누구냐 ? 누가 너를 도왔더냐 ?”
자신의 정인이 피를 뿌리며 바닥에 쓰러지고, 아들에게 자신의 치부를 들켰음에도 타라한은
기세를 굽히지 않았다. 오히려 황제를 몰아세웠다.
“상인 연합입니다.”
“그래 ? 상인 연합이 너를 도왔단 말이냐 ?”
한동안 무라도 4세를 쏘아보던 타라한이 눈을 감았다.
“그래. 상인 연합이란 말이지 ? 대한제국만 아니면 되었다. 어느새 이렇게 훌쩍 컸구나.
그만 나가거라. 내 너의 뜻을 충분히 알았으니, 내일 아침 내가 알아서 하겠다.
알아들었으면 그만 물러가거라 ?”
“안됩니다. 어머니는 저와 함께 가셔야 합니다.”
타라한은 지금 상황이 부끄럽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어린아인 줄 알았던 아들이
어엿한 제국의 황제로 거듭나게 되었다는 것에 어머니로서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기쁜 마음으로 아들에게 황제로서의 통치권을 넘겨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아들은 어머니에 대한 신뢰나 존경심을 버린 지 오래였다.
황제가 움직인 병력은 기껏해야 100여명이 넘지 않았고, 대한제국군이 황궁으로 들어오기 전까지는
황후전을 외부와 철저히 격리시켜야 했다. 그렇기에 황제는 황후전에 있는 사람들을
모조리 죽이라는 명령을 내려놓았고, 대한제국군이 날아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이럴 때 황태후를 여기에 혼자 놔둘 수는 없었다.
‘웅웅웅웅 타타타타’
모두들 단잠에 빠져있을 이른 새벽, 언제나 그렇듯 교황은 똑 같은 시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면을 마친 교황은 4명의 수행원들과 함께 성베드로 대성당 정문을 받치고 있는 12개의 기둥을
지나 성당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발을 올렸다. 그 때 멀리서 은은한 소리가 들려왔다.
교황이 멈추자 일행 역시 그자리에서 멈췄다. 우르바누스 8세는 새벽 공기를 가르며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저절로 고개가 뒤로 넘어갔다.
교황의 눈에 각 기둥 꼭대기에 올려져 있는 12성인의 조각품이 들어왔다. 맑은 하늘은 고요했지만
은은하게 들려오던 소리는 점점 요상하게 들려왔다. 바닥에서 성당 꼭대기 십자가 상까지 높이가
자그마치 133미터에 달하는 모든 기독교인의 총 본산인 성베드로 대성당은 그 웅장함에서도
최고를 자랑했다. 너무 오랫동안 고개를 저치고 있어서 인지 교황은 목에 오른 손을 갖다 댔다.
“무슨 소리지. 환청인가 ? ”
궁금증이 발동한 교황은 성당 안으로 들어가려다 말고 분수대가 있는 광장으로 내려섰다.
그 자리에서 한 바퀴를 빙 돌며 하늘을 바라보던 교황은 뭔가를 찾으려 두리번 거렸다.
하지만 소리 이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점점 소리가 소음으로 다가와 새벽 광장을 시끄럽게
울려댔다. 성당 지붕 반대편에서 밝은 빛을 뿜으며 이상한 물체가 불쑥 솟아오른 것은 순간이었다.
불빛 몇 개가 교황을 비추자, 교황은 일순 눈앞이 멍해지며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었다.
사방에서 바람이 회오리치며 광장을 휘감아 돌아나갔다. 교황 일행 바로 위에서 굉음을 내며
정지한 물체에서 동아줄이 내려오더니, 대한제국 특수 부대원들이 광장으로 뛰어 내렸다.
“2소대는 왼쪽 건물을 확보한다. 옥상에 저격병 배치하고, 3소대는 광장에 저지선 깔아.”
교황은 간간이 들려오는 소리에 실눈을 떴다. 자신에게는 관심이 없다는 듯 비행체에서 내린 악마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까만 두건을 쓰고 두 눈만 반짝거리는 대한제국 전략 기동군 공수여단 병력들의
모습은 교황에게 악마 그 자체로 보여졌다.
“주여 ! 사탄아 물러가나 ! 어찌 저희에게 저런 악마를 보내셨나이까 ?
주여 ? 불쌍한 어린 양을 굽어 살펴 주시옵소서.”
“사탄아 물러가라 !”
묵주와 성경을 앞세우며 공수여단 3대대 2중대장에게 다가간 교황이 십자가를 들이 밀었다.
절대선의 상징인 십자가와 자신의 믿음이 악마를 물리칠 것이라 확신하는 듯 교황의 발걸음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이 노인네가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 이곳 사람들은 잠도 없나 ?
어이 소하리 병장, 이 사람들 한쪽으로 치워. 도망가지 못하게 하고.”
지금 자신 앞에 있는 사람이 교황이란 사실은 꿈에도 모른체 2중대장은 작전에 걸리적 거리는
노인네들을 한쪽으로 치워버리라고 명령하고 있었다. 2중대 병력을 내려 놓은 잠자리들은 대성당을
너머 왔던 곳으로 사라졌다. 이번 작전에는 크레타 기지에 주둔중인 전략 기동군이 보유하고 있는
모든 잠자리들이 동원되었지만, 여단 병력을 한번에 실어 나르기에는 60대의 잠자리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티레니아 바다에 떠있는 항모와 바티칸을 앞으로도 십여 번을 왕복해야만 했다.
“대대장이다. 2중대는 현지점을 3중대에게 넘기고 교황 신변을 확보하라.
교황은 아직 침실에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가급적 살상을 피하고 획득한 포로들은 광장으로
이송 시키도록”
12개 건물을 장악하는 것을 목표로 투입된 3대대 병력은 바티칸의 핵심 건물을 장악하고 내부를
수색해 나갔다. 광장은 추기경들과 주교들 그리고 하인들로 금세 가득 찼다. 건물 수색이 끝나 갈 무렵
여단장과 함께 1대대 병력이 바티칸으로 내려와 로마 시내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충성”
“고생했어. 차가운 바닥에 저렇게 내버려두면 병 생겨. 건물 안으로 수용하지 ?”
여단장은 광장에 무릎 꿇려져 있는 사람들을 보며 3 대대장의 경례를 받았다.
끌려 나오면서 병사들에게 구타를 당했는지 몇몇은 머리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고,
어떤 이는 속옷차림으로 오들 오들 떨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소낸스키 대위 ? 저 사람들 건물 안으로 들여보내고 잘 감시해.”
“근데 교황은 어디 있나 ?”
대대장은 여단장의 물음에 머뭇거렸다. 이번 작전의 목적은 교황을 사로잡는 데 있었지만,
아직까지 교황을 잡기 못 했기 때문이다.
“아직 찾지 못 했습니다. 침실에는 없었습니다. 지금 수색 중이니 조만간 찾아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외부로 빠져나간 흔적은 없습니다.”
“그래 ? 해뜨기 전에 꼭 찾아내게. 이곳은 오랜 역사가 깃든 도시야. 비상통로 하나쯤은
다 있을 거라고. 지하실을 다시 한번 수색해 보도록. 어디 포로들 심문이나 한 번 해볼까 ?”
여단장의 말투에서 오랜만에 소풍 나온 어린아이의 들뜬 기분이 느껴졌다.
바티칸의 경비는 의외로 허술해서 지금껏 총소리 한방 나지 않고 있었다.
성당 안으로 들어선 여단장은 사람들이 모두 십자가를 향해 기도를 올리고 있는 모습에 눈살을
찌뿌렸다. 어색한 분위기를 깨기위해 헛기침을 했지만 고개를 돌리는 사람은 단 하나도 없었다.
“대단하군.”
여단장은 성당 내부의 화려한 조각에 감탄사를 연신 내 뱉었다. 원형 천정과 벽화들을 둘러보던
여단장은 무리 중에 확연히 눈에 띄는 사람을 발견하고 그에게 관심을 가졌다.
“그나 저나 저기 저 사람은 누구야 ?”
“네. 가장 먼저 붙잡힌 포로입니다. 신분은 파악하지 않았습니다.”
“그래 ? 먼저 저 사람부터 심문할 테니 대려오게”
“알겠습니다.”
부관이 경비병에게 손짓을 하자, 병사 둘이 여단장이 지목한 노인에게 다가갔다.
병사들이 노인에게 다가가자 빨간 옷을 입은 사람들이 병사들을 가로막으며 노인을 둘러쌓다.
“형제들이여 성하를 보호하라.”
“물러가라 악마의 자식들아 ? 하나님의 노여움이 두렵지 않느냐 ?”
기도에 열중하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노인을 가운데에 두고 병사들의 접근을 방해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병사들이 총을 고쳐 들자 여단장이 급히 소리쳤다.
“총은 쏘지마. 새벽부터 피보기 싫으니까 ?”
부관이 라틴어를 여단장에게 번역하며 성하라는 말을 강하게 발음하자, 여단장의 얼굴이 몰라보게
환해졌다. 그 범상치 않은 노인네가 교황인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심문을 해봐야 하겠지만,
그 노인을 성하라고 지칭했다면 거의 틀림 없었다. 부관은 그 중 유독 온몸을 오들오들 떨고 있는
사람에게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누가 교황인지를 물었고, 겁에 질려 오줌을 질질 싸고 있던 사람은
여단장이 지목한 노인을 손가락으로 가르켰다.
“항모 전단장에게 지급으로 연락하도록 내용은 일단계 임무완료. 이단계로 돌입한다.
확보한 물건을 인수해 가라.”
“일이 너무 쉽게 끝나버렸네. 소풍치고는 밋밋해.
나머지는 3대대에게 맡기고 옥상으로 한번 올라가 볼까 ?”
일차 목표는 싱겁게 끝났지만 정작 지금 부터 시작이었다. 아침이 밝아오고 바티칸이 대한제국에게
넘어갔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주위에서 이곳을 구원하기위해 벌떼처럼 달려들 것이 분명했다.
성베드로 대성당 옥상 위에 올라간 여단장은 탁 트인 사방을 둘러보았다.
1200년의 고도 로마는 아직도 깨어나지 않고 있었다.
“서쪽 통로만 열어두고 나머지 도로는 주변 건물을 폭파해서라도 다 막아.
이곳 성당에 여단 지휘부를 설치하고 해뜨기 전에 옥상에 잠자리 착륙장을 하나 만들어.
대충 정리가 끝나면 병사들에게 휴식을 취하게 하도록. 이제부터 시작이야.
적 심장부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나 한번 보자고.”
여단장은 나침반을 들어 동쪽이 어딘가를 찾았다.
아직 해가 뜰 시간이 아닌지, 동쪽하늘은 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들어올린 여단장이 난데없이 고함을 질러댔다.
‘아아아아’
여단장의 고함소리가 로마 구석구석까지 퍼져나가며 아침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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