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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1일의 밤 2부 3장~4장
3장. 제1차 세계대전 : 파국과 유토피아
(1915년 10월 블라디보스톡에서 민스크까지) 1915년 수백명의 조선인들을 태운 화물열차가 선금 10루블(1930년 대 소련 노동자 1개월 월급 350루블)과 겨울옷을 받기로 하고 블라디보스톡에서 민스크로 출발. 벨라루스 공화국의 수도인 민스크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러시아와 독일 사이 격전지로 100여만의 인도인, 20여만의 세네갈인, 10여만의 중국인, 약 5만의 베트남이 집결함.
1919년 10월 러시아 무르만스크에서 일하던 조선인 노동자들은 약 500명이었는데 그중 200명 가량이 영국으로 이송되고 총 35명이 한국(Coree) 국적으로 프랑스 이민을 허가 받음. 파리평화회의 영향인지 프랑스를 향하는 조선 젊은이가 많았을 때였음. 유학생들과 함께 유럽 최초의 한인단체 ‘재법한국민회’를 결성함.
만약 민스크의 조선인들이 무르만스크의 조선인들과 동일한 이들이라면 이들은 제1차 세계대전 중의 전 지구적 이동성을 보여주는 예일 것.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조선인들) 조선인 노동자들이 프랑스에 정착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 파리평화회의 때 조선공보국의 서기장 역할을 맡은 황기환. 1922년 워싱턴회의 때 이승만의 지원 요청에 따라 미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황기환은 사실상 홀로 유럽대륙에서 조선-한국의 대표로 활약함.
1917년 5월 추첨징병령이 발효된 후 미국 내 한인 젊은이들 사이에도 추첨 혹은 자원으로 전선으로 향하는 이들이 생기기 시작함. 1918년 7월 한인 인구가 많은 하와이에서 청년 30여명이 추첨징병 대상이 되어 전별회가 열렸다는 기사도 있었음.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 전선에 복무했던 미군 중 18%는 이민자 출신. 후에 참전 군인들에게 미국 국적을 부여하는 정책이 발표됐을 때 미국인이 된 사람은 30만명인데 46개국의 시민권자 후보 국적에서 식민지인 조선-한국은 빠져 있었음.
일본 외무성 자료에 따르면 러시아 백군에 속한 제34연대의 경우 총 600명의 부대원 가운데 19명이 조선인. 그들은 월 10루블에 고용됐던 용병들. 적군에 합류한 사람은 더 다수였을 것.
3.1운동 후 망명하여 러시아 적군 편에서 싸운 김경천은 ‘백마 탄 김장군’으로 불리며 혁혁한 무공을 쌓았으나 스탈린식 숙청이 한창이던 1936년, 약 2,500명의 재러시아 한인들이 처형당할 무렵 체포되어 1942년 수용소에서 사망함.
(일본의 시베리아 출병) 인도의 네루가 말한 대로 제1차 세계대전은 동양이 세계무대에 진입하게 된 사건. 전쟁중에 많은 아시아 아프리카인들이 전 지구적 이동성을 경험함. 식민지인들은 제국이 ‘피의 빚’을 갚아줄 것으로 기대하며 전장으로 나감. 세네갈에선 민족주의자 디아녜가 참전을 독려했고 인도의 간디 또한 남아프리카 거주 인도인들을 대상으로 지원병을 모집하는데 앞장섬.
일본은 새로운 제국주의 국가로 등장.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통해 성장해온 신흥 강국답게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에 적극 개입함. 1918년 8월 체코슬로바키아 부대 구출을 명분으로 시베리아에 군대를 파견함.
체코슬로바키아 부대란 오스트리아-헝가리 군대 포로중 체코-슬로바키아인 자원자로 구성된 부대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부터 동족을 독립시키겠다는 목적하에 러시아에서 활약하고 있었음. 3.1 운동중 다수의 참여자들이 지적한 “약소 민족 자결에 대한 성의를 표하여”, “체코슬로바키아 민족의 자유권 회복을 위해서 시베리아에 출병한” 일본에게 어찌 조선의 독립 요구를 외면하느냐며 힐난한 바로 그 지점임. 조선 독립군이 이 체코슬로바키아 부대로부터 무기를 인수받아 청산리전투 등 일본군과의 전면전을 벌일수 있었음.
일본군의 제1차 세계대전 참전 및 시베리아 출병은 일본군과 조선인 부대 사이 정면충돌을 빚어냄. 중국과 러시아에 최대 7만 규모로 파견돼 있던 일본군은 소비에트 적군에 가담한 한인 빨치산부대와 충돌했고 3.1운동 이후 본격 무장을 시작한 다종의 독립군들과 대결함.
(전쟁의 위생학, 죽음이라는 대가) 유럽의 젊은 아방가르드 예술가 사이에서 “전쟁이야말로 최고의 위생학”이란 표현마저 등장. 조선 청년들 사이에선 이 전쟁이 독일의 군국주의 전제주의에 맞선 평화주의의 전쟁이라는 영국발 선전이 수긍되는 듯 보임. 그러나 폭력의 규모는 압도적. 전사자 약 1,000만명에 부상자 약 2,000만 그중 상당수가 어떤 전과도 거두지 못한 대치전에서의 희생이었다는 점에서 파괴는 더욱 부조리함.
(전쟁의 도덕화, ‘폐허 이후’의 기대) 조선의 젊은 세대는 제1차 세계대전을 통해 ‘죽음’에 민감하게 반응한 반면 전쟁의 정치 경제적 영향에 응대하는 데는 비교적 더뎠음. 1917년 발표된 서춘의 <구주전란에 대한 삼대의문>이 잘 표현하듯 평화주의를 내세운 채 전쟁을 계속하고, 자유주의를 표방하면서 국가주의적 정책을 채용하며, 영국 프랑스 러시아에 미국을 망라한 위력으로서 독일 한 나라를 꺾지 못하는 원인이란 도통 불가사의하다.
자유주의 대 파시즘 사이 충돌인 제2차 세계대전과 달리 제1차 세계대전은 선발 제국주의 국가 대 후발 제국주의 국가 사이 식민지 쟁탈 전쟁의 성격으로 세계 역사상 최초로 ‘전쟁 범죄’와 ‘전쟁 책임’ 개념을 낳은 전쟁. 이때 독일을 단죄하는 주된 심리적 동기는 전쟁 초기 중립국 벨기에가 침공당한 사건. <매일신보>는 여러 차례 벨기에 민간인들이 학살당하고 문화유산이 파괴당했다는 사실을 보도함.
3.1 운동 몇 년 후 <개벽>에서는 약 1,000만명이 죽어간 제1차 세계대전은 ‘이토록 많은 피를 무위로 돌릴 수는 없다’는 절박한 실감과 “세상과 우리 자신에 대해 이 모든 일을 저질러 놓았으니 반드시 더 나은 세계를 건설해야 한다”는 폐허이후의 유토피아적 사명의식을 표현함.
일종의 유토피아니즘을 낳은 이 새로운 국면을 선도한 사람은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우드로우 윌슨. 그러나 막상 윌슨 자신은 인종주의자였고 식민지 문제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으나 “다수 민중이 소수 자본가계급의 유린하는 노예인 것을 분명히 자각하고 이것을 도괴하자는 결심과 맹서를 한 것은 구주대전의 결과중 하나이다. 인류의 모든 불행이 군국주의와 자본주의에서 오는 것임과 인류의 행복이 정치적 경제적으로 자유와 평등의 신사회를 건설함에 있음을 자각한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은 실로 크나큰 변화를 불러옴. 8시간 노동제와 여성참정권이 정착하기 시작했고 민족국가 체제가 전 지구적 현실로 발돋음했으며 계급투쟁과 화해가 재조형되면서 유럽내 지각변동이 잇따름. 식민지 조선 또한 3.1 운동 이후 9시간 30분 노동제를 맞이했고 여성의 계몽과 해방을 논했으며 반제국주의 정서를 선명히 하면서 개조주의, 사회주의, 무정부주의를 받아들임.
4장. 혁명 : 신생하는 세계
(메이지대 학생 양주흡, “민중이 회집하여 혁명을”) 메이지대 법대 재학생인 양주흡. 2.8 독립선언에 대해 조선인 유학생들 사이 공개적으로 논의가 시작된 것은 1월 6일쯤. 일본에 대한 시위운동을 벌이기 위해 다음 날 ‘독립운동 혁명회’가 열리고 도쿄에 유학하는 학생 중 절반이 넘는 400여 명이 회의에 참석. 회의가 끝난 후 대표 20여명이 경시청을 방문. 양주흡은 일기에 “이 민족을 구제할 자는 우리 동경의 유학생이므로 비록 산이 움직이더라도 나는 움직이지 않겠다”고 다짐함.
도쿄에 유학하던 젊은이들이 대개 그러했듯 양주흡도 ‘혁명’을 꿈꾸었듯. ‘구세계의 장례식’으로 인식되던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이 쇠퇴하고 약육강식의 질서가 몰락하고 제국주의적 세계질서가 종막을 맞게 되리라 생각함. 1년여 전의 러시아혁명처럼 조선도 바야흐로 혁명을 바라보고 있는 듯 보임.
(1911년 신해혁명, 중화체제의 종말) 1910년대는 혁명의 시대였다. 1910년 멕시코 혁명, 1911년 중국 신해혁명, 1917년 러시아혁명, 1918년 2월 핀란드혁명 12월 독일의 스파르타쿠스혁명, 1918년 11월과 1919년 3월 헝가리의 두차례 혁명 등 유럽 대륙의 혁명소식은 대부분 조선에까지 와 닿았다.
한반도에 ‘혁명’이라는 어휘가 쓰이기 시작한 것은 1890년대 후반부터이나 정치 사상적 의미와 현실적 충격이 결합된 혁명에의 실감은 채 형성되지 않다가 청조를 무너뜨린 신해혁명으로 상황이 바뀜. ‘혁명’은 그야말로 가까운 현실이 되었다. 특히 공화혁명을 성공시킨 쑨원의 활약상이 청년층의 비상한 관심을 모음.
수십년가 베이징 거점의 독립운동을 키워낸 인물이자 3.1 운동 직후 무장투쟁단체 북로군정서 군사부장이며 후일 광복군의 조직가이자 안창호와 매우 친밀한 조성환은 “신해혁명은 4,000년 노 대제국의 부패한 전제를 타파하고 대륙에 영예로운 공화정체를 건설”한 경축할 만한 사건이라고 평함. 신해혁명이후 중국 망명을 선택한 이들이 급증함.
(동아시아 진보 연대) 한.중.일 삼국 사상 운동가들 교류는 신해혁명 후 1910년대를 통해 급진전 됨. 1916년 도쿄에 신아동맹단이라는 단체가 결성됐는데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새 아시아를 세우는 것”을 목표로 이 단체에는 한국과 중국 일본을 비롯해 타이완 인도 베트남 등의 유학생들이 두루 망라됨.
1914년 난징으로 유학을 떠난 여운형의 경우 중국 신문화운동의 근거지였던 잡지 <신청년>을 통해 젊은 혁명파에 접근함.
신해혁명을 통해 동시대 사건으로 다가온 혁명은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환경 속에서 임박한 현실인 된듯 했으나 식민지 조선에선 정치적 삶은 금기시됐고 신해혁명 후 중국에서는 시기 상조론이 위세를 떨쳤으며 경제 성장과 정치적 금압이 혼합된 일본의 상황은 공적영역에서의 혁명적 활동을 위축시킴.
l 다이쇼 데모크라시 : 신해혁명에서 치안유지법 시행까지(1911~1925) 일본에서 정치, 사회, 문화 각 방면에서 일어난 민주주의, 자유주의적인 운동, 풍조, 사조의 총칭
(<학지광>의 혁명) 1910년대 중후반 혁명이 재부상한 흔적이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 도쿄 유학생들의 잡지 <학지광>. 최승구의 <너를 혁명하라!>에서 전제가 입헌으로, 입헌이 공화로 변화하는 것이 혁명인 것과 마찬가지로 부속국이 독립국이 되고 식민지가 자립하게 되는 것도 혁명이다. 심지어 인상주의에 대한 사실주의의 반기, 유물론에 대한 이상주의의 비판도 혁명이라고 통칭할 수 있다. 여기서 혁명은 막스 레닌주의적 함의와는 무관하게 일체의 본능 및 욕망의 해방을 가리킴, 사회혁명이 곧 자아혁명이라고 봄.
<문단의 혁명아야>를 쓴 백일생은, 무릇 변화란 동등하게 혁명이다. 늙은 세포가 죽고 새 세포가 나는 생리적 작용, 낡은 옷 대신 새옷을 걸치는 의복교체까지 다 혁명이다.
<학지광>을 통해 보면 1910년대 중반에 혁명은 이미 의심할 바 없는 권위다. ‘혁명=왕조교체’라는 오랜 해석을 벗어버리고 ‘혁명=구세계의 파괴’라는 한결 보편적인 연상의 회로를 개척하게 된 것도 당시부터다. 실제로 <학지광>에사 가장 빈번하게 출현하고 있는 혁명의 용례는 정치 사회적 혁명이 아니라 산업혁명.
종교개혁과 프랑스혁명과 산업혁명은 서로를 지지 보충하면서 혁명의 정당성을 강화한다. 종교개혁이 혁명의 정당성을 보증한다면 프랑스혁명은 그 위력을 증명하고 산업혁명은 그것이 문명화에의 길임을 약속한다.
(러시아혁명이라는 새로운 의제) 1911년 중국 신해혁명에 이어 1917년에 러시아혁명이 일어남. 당시 조선인 유학생들의 사회주의에 대한 이해는 ‘빈부 귀천 상하 계급의 차별이 없는 것’ 정도의 소박한 접근. “세계 각국 중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발달시킨 것은 로서아”라는 믿음 속에 “로국은 세계 각국중 사상상에 있어서 선도자”라는 견해가 있었음. 그러나 막스 레닌주의 노선보다는 크로포트킨 류의 이상이 힘을 얻음.
극단적 전제에서 노동자 농민의 사회주의로-러시아의 극적 전환은 전세계 ‘후진’의 인민을 고무함. 혁명이 아나키즘과 사회주의와 급진적 민주주의까지 포괄하고 크로포트킨이 가장 인기 높은 사상가였음. 박은식은 러시아혁명을 “정의와 인도를 표방하는 자들이 마침내 드높은 승리를” 기록한 사건으로 “극단적인 침략주의자였던 러시아가 일변하여 극단적인 공화주의가 된 것”으로 평가함.
(3.1 운동과 ‘혁명’) 3.1 운동 직전 광무황제의 국상을 참관하러 상경한 군중을 두고 “민중이 회집하여 혁명을” 할 기회라고 판단했던 양주흡의 감각, 전 황제의 죽음을 전해 듣고 “혁명! 혁명! 새 생명의 혁명!”을 노래했던 김우진의 감각은 당시 일반 대중의 속내와 얼마나 가까운 것이었을까.
1915년 상하이에서는 신한혁명당이 결성됨. 산한혁명당은 입헌군주제 노선을 선택했지만 한편 ‘한국 혁명’을 목표로 천명하고 비슷한 시기에 국내의 비밀 결사 대한광복회 또한 세계사의 여러 혁명을 상기시키며 봉기를 격려함. 3.1 운동도 해외에서는 주로 ‘3.1 혁명’으로 불림. 김구 역시 해방 후 3.1 운동 기념식 즈음에도 ‘3.1 혁명’이라는 용어를 포기하지 않음.
조소앙(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무총장)은 1930년대 이르러 ‘독립’만으로 운동가의 목표를 다 표현할 수 없다고 설파함. 서양어에서 유래한 ‘혁명’은 폭력으로써 통치계급의 모든 기관을 여지없이 전복하고 즉각에 그들이 표방하는 주의로서 새로 통치기관을 시설하는 정치운동으로 정리한 후 ‘독립’보다는 ‘혁명’이 자기 활동을 명명하는 데 적당하다는 의견을 시사함.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3.1 운동’이라는 명칭은 다분히 해방 이후의 산물이다. ‘3.1 운동’은 국내에서 쓰인 ‘기미운동’ ‘만세사건’ ‘만세운동’ 등의 이름과 국외에서 ‘3.1혁명’이라는 용어가 합성된 결과이다.
결과적으로 3.1 운동은 많은 변화를 일구어 냈으나 청년들이 기대했던 정치조직 사회조직의 근본적 변혁과 유토피아적 신세계의 실현에는 현저히 미달함. 신해혁명과 러시아혁명을 보면서 기대한 것과 같은 ‘혁명’이 이룩되지 못했을 뿐더러 정치와 경제를 평화적으로 갱신하자는 ‘개조’도 추진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