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는 개혁자의 외침은 단순히 교회 제도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목회자라면, 자신에 대해서는 예민한 양심으로 하나님 앞에 서 있어야 하고, 교회 앞에서는 복음의 말씀을 바르게 선포해야 한다. 이를 위해 자기 자랑이나 만담, 예화 찾기는 자제하고, 그 시간에 기록된 말씀의 ‘그때 거기서’의 의미는 무엇인지, 오늘 우리의 눈물과 탄식이 무엇인지 냉철하게 볼 수 있도록 자신을 연마해야 한다.
특별히 유연한 사고와 엄밀한 언어 사용을 위해 인문학적 소양에도 관심 가져야한다. 왜냐하면 목사와 교회의 존재 이유는 우리끼리 잘먹고 잘사는 데 있지 않고 세상을 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교회는 세상 속에 있을 이유가 없다. 그냥 산속에 들어가 자기들끼리만 소통가능한 암호체계로 알콩달콩 사는 편이 훨씬 낫다.
‘수천 년간 내려온 은혜로운 용어와 개념이라고 해도 현대인이 알아듣지 못할 만큼 딱딱하게 굳은 말이라면 과감히 버리라’는 신학자(Paul Tillich)의 말이 있다. 뒤집어 말하면, 관습화된 용어를 ‘알아듣게 전하는 것’이 목회자와 신학자의 제1과제라는 뜻이다. 가만 살펴보면 생각 없이 사용하는 교회 용어가 꽤 많다. ‘성지순례’도 그렇고, ‘대예배’, ‘부목사’라는 말도 그렇다. 개신교 신학에 따르면, 거룩한 성지는 저 멀리 예루살렘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자리이다. 대예배는 또 무슨 말인가? 예배에 크고 작고가 있을 수 있나? 목사면 다 목사지 ‘부’목사는 또 무슨 말인가?
이런 예는 쌓여있다.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 예루살렘에서 열린 아이히만의 전범재판을 보고 ‘순전한 무사유’를 악마적인 것으로 정의했던 한나 아렌트의 예리한 눈은 전쟁 범죄자에게만 해당하지 않는다. ‘생각 없음’의 죄악은 오늘 우리의 교회 목사와 신학자들에게도 적용된다.
간혹 ‘성경만 가지면 된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한 꺼풀 벗겨보면, 성경은 세상 한 가운데 던져진 하나님의 말씀이란 사실이 자명해진다. 그렇다면 말씀이 던져진 세상은 어떤 세상이기에 폭탄처럼, 때로는 설탕처럼 던져졌는지도 알아야 할 것 아닌가? 성경을 백독 한들, 암송대회 1등 한들 무엇하랴? 제아무리 잘해도 우리 집 고물 카세트에서 흘러나오는 성경통독 테이프만도 못하다.
성경을 제대로 알려면 세상도 알아야 한다. 말씀이 던져졌던 그때 그 자리, 그리고 던져질 지금 이 자리를 분별하고 던지는 것이 설교자의 임무다. 그래서 고민해야 한다. 항상 정답만 가르치는 목사와 신학자가 아니라 과거의 말씀이 ‘지금 이 자리’에 건네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깊이 묵상하고 연구해야 한다.
성도들도 마찬가지다. 주일에만 예수 가면을 쓰고 살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신앙생활은 일주일 한 번 하는 가면무도회가 아니다.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 그 개혁은 주어진 일상에서 시작한다. 그리스도를 품고 삶의 자리를 돌아보며 하루하루 살자. 생각하며 사는 일상의 불씨가 큰불이 될 것이다. 그것이 개혁이다
첫댓글 주어진 일상에서 그리스도를 품고 삶의 자리를 돌아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