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손길에 이끌려 써지는 한 편의 작품이다. 다만 감사하게도 우리의 손길 역시 작품을 써 내려가는 펜의 한쪽을 붙들고 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뜻밖의 죽임을 당하는 것은 가슴 아픈 현실이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은 죽음을 ‘순간의 사건’이 아닌, 수일에서 수개월의 시간을 지나는 ‘과정의 사건’으로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죽음의 과정은 당사자는 물론 가족과 친구 같은 지인들에게도 죽음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준다. 어찌 보면 한평생의 삶이 결국 이 마지막 마무리를 위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 누구도 죽음 자체의 경험을 나눌 수 없다는 점에 죽음의 특수함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죽음의 과정을 거치는 사람-그 자신이거나 지인이거나 또는 전혀 모르는 타인-의 삶을 통해, 죽음을 간접 경험할 수 있다. 이러한 간접 경험이 우리에게 남기는 것은 죽음 자체에 대한 지식보다는, 그 과정을 통해 돌아보는 삶의 의미일 것이다.
생명의 하나님, 왜 제 몸에 암을 주시나요?
주로 말기 암 환자와 그 가족이 삶의 마지막 날들을 보내기 위해 찾는 호스피스 의료기관은 죽음의 과정을 함께 경험할 수 있는 소중한 장소이다. 나는 의료인으로 한동안 한 호스피스 병원에서 근무하였고, 이때의 경험으로 말미암아, 내 삶의 방향이 예기치 않던 방향으로 바뀌는 일이 있었다. 아직도 이 당시 만났던 여러 환자들이 마음에 남아 있지만, 한 젊은 여성과 그 가족들의 이야기는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의 나이는 30대 초반이었고, 지방의 한 도시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가정은 행복한 삶과는 동떨어져 있었다.
실직한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으로 술에 취하면 폭력을 휘두르곤 하였다. 어머니는 서서히 무너져 내렸고 자녀를 남겨둔 채 가출하고 말았다. 그에게 부모는 원수였다. 서울의 한 대학에 입학한 그는 미련 없이 지옥 같은 집을 떠나 서울에서 새로운 출발을 기대했다. 이때 그는 무엇보다도 여자를 때릴 것 같지 않은 한 남자 친구를 만났고, 단란한 가정을 이룰 꿈을 향해 삶을 살아갔다.
하지만, 삼십을 넘긴 그에게 자궁암이란 진단이 내려졌고, 항암 치료에도 불구하고 암세포는 허약해진 몸의 이곳저곳을 파고들었다. 어린 나이에 한 선교단체를 통해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한 그는, 그가 아는 바대로 전능하신 분에게 간절히 기도하였지만, 그분은 침묵할 뿐이었다.
아직 치료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도하던 그에게, 하나님은 원수였던 부모와 다름없는 배신자일 뿐이었다.
지금도 그의 눈물 섞인 질문이 마음을 맴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생명의 하나님이시라면서요. 그렇다면 여성의 몸에서 생명을 잉태하는 가장 소중한 자궁에 왜 하나님은 암을 주셔서, 아이를 낳고 싶은 제 소원을 그리도 매정하게 걷어차실까요?” 나는 마땅한 말을 찾을 수 없었고, 나 역시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참으로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마침내 모든 희망과 기대를 내려놓았다.
절망의 자리에서 들려온 주님의 음성
그러던 그가 절망으로 가득한 영혼을 부여안고 찾아든 호스피스 병원에서, 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주님을 만나게 되었다. 그곳에서 지금껏 그가 알았던 배신자 하나님은 사라졌다. 대신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라고 부르시는 참 신랑이신 예수님을 만났다. 자신은 이 세상에서 피해자일 뿐이며, 그런 자신이 타인을 미워하고 원망하는 것은 자신의 마땅한 권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확신이, 사실은 자신의 영혼을 병들게 하는 사탄의 유혹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는 이제 자신의 삶에서 일어났던 모든 일들이 하나님으로 이끄는 길이었음을, 자신의 모든 꿈이 사라짐으로써 오히려 모든 것이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죽음의 날이 자신의 삶에서 가장 기쁜 날이며, 가장 아름다운 날이며,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라고 부르시는 그분과 함께하는 날임을 고백하는 가운데 눈을 감았다.
눈을 감기 전 평생을 원수라고 여겼던 부모를 용서하고, 자신을 억누르는 무거운 짐이었던 동생을 보살피지 못하였음에 대한 용서를 구하였다. 그는 누이에게 버림받은 동생이 누이를 용서하고, 하나님 나라에서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하였다.
마지막 죽음의 시간을 지나는 그의 삶을 통해, 원수로 지냈던 가족들, 방황하던 주위의 사람들이 화해하고 서로를 용서하며, 삶의 방향을 바꾸었다. 이 젊은 여성의 원망과 희망, 절망과 용서의 삶을 통해 나 자신 역시, 나의 삶과 나의 신앙을 돌이켜보는 소중한 계기가 되었다.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에게 그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천사였다.
하지만, 인생의 마지막을 맞이했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다 이처럼 아름다운 마무리를 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환자는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여 자신을 돌보는 의료진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어떤 환자는 마지막까지 재산 문제로 번잡한 시간을 보내며, 어떤 환자는 우울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살을 거듭 시도하였다. 시한부 인생을 보낸다고 하여 모두가 삶을 돌이켜보고, 자신을 성찰하며, 신에게 귀의하는 것은 아니었다.
손님 맞듯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까?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 것일까? 길을 가다 강도 만나듯 죽음을 마주치는 것이 아니라, 손님 맞듯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까? 역시 호스피스 병원에서 만난 한 목회자가 생각난다. 이분은 열심히 교회를 개척해서 안정기에 접어들었으나, 뜻밖에도 말기 암 진단을 받고 호스피스에 입원했다. 그런데, 여러 날이 지나도록 방문객이 없어, 어찌 된 영문인지 물어보았다. 이분은 자신의 상태를 교회에 알리지 않았다고 했다. 왜 알리지 않았는지 물으니, 담임목사가 암에 걸려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 교인들에게 은혜가 안 되어 그리했다는 것이다.
우리 주님은 자신이 왕좌에 앉으리라 기대하던 제자들에게 오히려 능욕당하며 채찍에 맞으며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것을 반복해서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제자들은 놀라고 두려워하였으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제자들은 큰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죽음 자체는 저주도 복도 아니다.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 자체를 붙들고 씨름하기보다는,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는 은총을 구하여야 하지 않을까?
인생이라는 책의 마지막 장을 써 내려갈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넌지시 건네시는 펜을 잡은 우리는 어떻게 마무리를 할까? 누구는 평탄한 인생을, 누구는 험난한 인생을, 누구는 굴곡진 인생을 살아왔을 것이다. 각자가 어떤 인생길을 걸었든, 죽음을 강도당하듯 하지 않고 손님 맞이하듯 할 수 있기를 준비할 일이다. 하나님의 은총을 입어,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는 주님의 부르심을 우리 모두 들을 수 있기를 기도하며 글을 맺는다.
첫댓글 나는 어떻게 내 인생을 마무리 할 수 있을까?~ 손님 맞이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