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마다 5월이 오면 광주에서는 ‘그날의 함성’이 높이 울려 퍼진다. ‘독재타도’를 외치는 구호는 사라졌지만 광주의 시대정신은 생생하게 살아있다. 민주화를 외치며 메아리쳤던 산자와 죽은 자들의 목 메인 함성은 노래로 승화돼 그날의 비장함을 되새기고 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임을 위한 행진곡은 이제 5월 광주의 상징이 됐다. 온 몸을 바쳤던 치열한 투쟁과 비극적 패배의 절망이 우러나온다. 이것을 딛고 나아가는 산자들의 비장한 의지와 용기, 결단이 잘 묻어 있다.
36년이 흘렀지만 5월 광주는 여전히 의문투성이다. 정부가 공식 인정한 사망자는 191명, 부상자는 852명이다. 여기까지다. 사망자 수에 대한 논란은 마침표를 찍지 못했다. 희생자 수를 정확하게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왜 쏘았지?” “왜 죽였지?” “얼마나 죽였지?” 우리는 이 물음표를 느낌표로 바꾸지 못했다.
그 날 시민들의 시위는 평화로웠고, 경찰은 시위대를 최대한 보호했다. 기록과 증언으로 보면 경찰과 시위대는 우호적인 분위기였다. 서로 손을 잡고 어깨를 두드렸다. 그런데 피에 굶주린 신군부는 경찰과 시민이 만든 평화시위를 무자비한 폭력으로 깨트렸다. 신군부의 공수부대들은 승냥이처럼 시위대에 달려들었다. 이들은 ‘째깍 째깍’ 준비된 ‘광란의 학살극’을 예고하고 있었다. 경찰을 ‘학살의 전위대’로 삼으려고 했다.
호시탐탐 방아쇠를 당길 기회를 엿보다 경찰에 발포 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총을 쏘지 않았다. 당시 전남지역 치안총수는 “시민들에게 총부리를 겨눌 수 없다”며 발포명령을 단호하게 거부했다. 이로써 많은 광주 시민들의 목숨을 살렸고, 경찰의 명예를 지켰다. 누가 목숨을 담보로 서슬퍼런 신군부의 불의에 맞섰을까. 그가 바로 안병하 전남경찰국장(경무관)이다.
@총경으로 경찰에 특채됐을 때의 고 안병하 경무관.
만약 그때 경찰이 시민들에게 총을 겨누고 발포 했다면 어땠을까? 광주의 역사는 세계 역사에 남는 ‘피의 학살극’으로 기록됐을 것이다. 수 천 명의 시민들이 금남로에 낙엽처럼 쓰러졌을 것이고, 아스팔트는 검붉은 핏빛으로 얼룩졌을 것이 뻔하다. 경찰에게는 ‘학살자들’이라는 올가미가 수갑처럼 채워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시민의 경찰’이라는 본분을 지켰다. 신군부가 그를 가만 두었을 리 만무하다. 어느 날 보안사 요원들이 안 국장이 근무하던 곳에 들이닥쳤다. 이들은 안 국장을 계엄사령부 합동조사본부로 끌고 가 8일 동안 모진 고문을 가했다.
시민들에게 총부리를 겨누지 않았다는 이유로, 시민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시민들을 죽이지 않았다는 이유로 죽음을 넘나드는 잔혹한 고문을 했다. 안 경무관은 그렇게 강제로 해직돼 경찰을 떠났다.
그가 가족 곁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만신창이가 돼 있었다. “죽고 싶다”는 말만 되풀이 할 뿐 눈의 초점도 잃었고 말문도 닫아버렸다. 신군부는 안 경무관의 자존감과 영혼까지 짓밟았다. 모든 것을 잃었다. 고문후유증으로 정상적인 생활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8년 동안을 병상에서 고통을 겪었다. 그리고 1988년 10월10일 쓸쓸히 세상과 등졌다.
우리는 그에게 너무 인색했다. 아무도 그를 기억하려고 하지 않았다. 국가도, 경찰도, 광주 시민도, 그의 존재를 애써 알리지 않았다. 그가 ‘광주민주화유공자’로 인정받은 것은 순직한 지 15년 만인 2003년인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국립현충원에 안장된 것은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지 25년 만인 2005년이다. 국가유공자 등록은 2006년에서야 됐다.
그러나 고인의 명예회복을 위한 유족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우리는 ‘5월 광주의 영웅 안병하’를 기억해야 한다. 그의 위민정신을 드높여 후손들의 귀감으로 삼아야 한다. 이제 그의 진짜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한다.
한국전쟁의 영웅
고 안병하 경무관의 고향은 해오름으로 유명한 강원도 양양이다. 1928년 7월23일 평범한 가정에서 3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과정인 양양공립학교를 졸업하고는 중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홀연히 일본행을 결심한다.
당시 안 국장의 부모는 풍족하게 유학비를 대줄 형편이 안 됐다. 그 마음을 알았는지 “중학교 입학금만 주면 나머지는 알아서 하겠다”며 뱃삯만 들고 일본으로 넘어갔다. 도쿄 외곽인 시라오카현의 한 중학교에 입학해 일본 생활을 시작했다.
그곳에서 이를 악물고 악착같이 지냈다.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신문배달, 구두닦이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중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곧바로 귀국했다. 서울 관악구에 있는 광신상고(현 광신정보산업고)에 들어가 학업을 마쳤다.
일제강점기를 겪었던 그는 “다시는 나라 없는 설움을 겪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군인의 길을 택했다. 육군사관학교 8기로 군문에 들어섰다. 국군이 창설된 후 최초의 사관학교 입소자라는 의미가 있었다. 이전에는 일본군이나 중국군 출신들이 군 간부로 차출되던 때였다. 육사8기는 우리나라가 직접 육성한 장교들이라 자부심도 대단했다.
동기생으로는 김종필 전 국무총리,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 윤필용 전 수경사령관, 강창성 전 보안사령관, 윤흥정 전투병과교육기지 사령관(전라남북도 계엄분소장), 이희성 전 육군참모총장, 전두환 신군부에 참여했던 유학성 전 3군사령관 등이다.
육사 졸업 후 안 경무관의 첫 부임지는 육군 6사단(청성부대)이다. 사단사령부는 철원에 있었지만 안 경무관이 소속됐던 7연대 16포병 대대는 춘천에 주둔하고 있었다. 포병관측장교였던 안병하 중위는 한국전쟁(6.25전쟁)이 발발하자 용맹을 떨쳤다.
@초급 장교시절 (맨 오른쪽)
북한군의 주력부대가 춘천 사농동 인근 옥산포 방면으로 몰려오자 지도와 나침판을 소지한 채 무전병을 이끌고 적의 포화 속으로 뛰어들었다. 포연이 자욱한 곳에서 그는 빗발치는 총탄을 뚫고 적의 정확한 위치를 포대에 무전으로 알렸다. 16포병대대는 105mm 포문을 열고 무차별 포탄을 퍼부었다. 북한군은 주력부대가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이때의 무공으로 안병하 중위는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1950년 7월 5일 미국 지상군이 전투에 투입됐지만 전황은 호전되지 않았다. 당시 국군 6사단은 춘천 전투를 치르고 원주를 거쳐 충주로 후퇴하면서도 지연 전투를 계속하고 있었다. 7월7일 사단장인 김종오 대령은 북한군 15사단이 장호원을 점령했다는 소식을 듣고 7연대를 장호원에 급파했다. 충북 음성 동락리에서 방심한 북한군을 상대로 국군 7연대의 기습공격이 시작됐다.
이 전투는 7월8일 오전 8시에 종료됐는데, 북한군 전사자는 1천명에 달했다. 97명을 포로로 잡는 등 개전 이래 최대의 전과를 올렸다. 7연대 장병 전체가 1계급 특진을 하였는데, 안병하 중위도 이때 대위를 달았다. 6.25 전쟁 중 무공으로 화랑무공훈장 2개와 상이기장 등을 받았다.
안 대위는 한국전쟁 중에 속초 중학교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 전쟁중이었기 때문에 결혼식에는 일가친척도 없이 속초 근처 동네 사람들과 군인들이 참석한 자리에서 조촐하게 치렀다. 신혼여행은 커녕 결혼식 다음날 부터 전장에 나가야 했다.
@한국전쟁 중 속초중학교에서 결혼식을 올린 안병하 대위.
안병하 대위는 청렴하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당시만 해도 군대 내의 비리와 부패가 만연하던 때였다. 부대 보급품 등 군대 물자를 빼돌리는데 혈안이 돼 있었다. 군은 안 대위를 감찰관으로 보직을 변경시켜 군내 비리를 척결하도록 했다.
5.16 군사쿠데타로 정국이 급변했다. 어느 날 군인의 소임을 다 하던 안병하 소령에게 5.16 국가재건위원회 소속 육사 8기 동기생들이 찾아왔다. 이들은 안 소령에게 “혁명대열에 함께하자”고 회유했다. 하지만 안 소령은 “군인은 정치를 해서는 안 된다”며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얼마 후 안 소령은 중령으로 진급했다.
총경으로 경찰에 투신
1962년 11월3일 정부는 군 간부 23명을 총경으로 특채했다. 안병하 중령도 그 중 한명이었다. 첫 부임지는 안 총경과 전혀 연고가 없는 부산 중부경찰서장이었다. 부산은 예나 지금이나 우리나라 제1의 항구도시로서 각종 물자의 수출입과 해외에서 들어오는 원조물자들의 교역량이 가장 많은 도시다.
그런 만큼 당시는 각종 범죄가 만연했고, 또 밀수꾼들과 공무원들이 먹이사슬을 형성하고 있었다. 안병하 서장은 우선 경찰서 내의 비리를 타파하려고 했다. 어느 날 불시에 경찰서의 사무실 집기와 장부들을 조사했다. 서랍 속에 꽁꽁 숨어 있던 비리 장부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로써 안 서장은 ‘부패 경찰관’들의 현황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비리와 연관돼 있던 경찰관들은 벌벌 떨고 있었다. 비리유형과 혐의에 따라 감찰이나 수사대상에 올라 처벌이 불가피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 서장은 뜻밖의 조치를 취했다. 비리와 연관돼 있는 것들을 한자리에 모아놓고 불에 태워버린 것이다.
@서울 서대문경찰서장 시절 시위 진압시 언제나 일선 현장에서 지휘했다.
안 서장은 당장의 처벌보다는 과거의 잘못을 용서하는 통합의 리더십을 보여줬다. 비리 경찰관들에게 이를 만회할 기회를 준 것이다. 재차 부정비리에 연관됐을 경우 엄벌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여준 것이기도 하다.
1960년대는 북한의 간첩들이 남한을 한창 넘나들 때였다. 해안에서도 간첩선들이 곧잘 출몰했다. 안병하 총경이 치안국 작전계장일 때인 1968년에는 60년대 최대 간첩선 사건이 일어난다. 일명 ‘서귀포 간첩선’ 사건이다. 이때 안 총경은 육상작전을 지휘해 혁혁한 공을 세웠다. 군‧경‧정 합동작전으로 북한군 12명 사살, 2명 생포와 함께 공작선을 나포하는 전과를 올렸다.
@간첩섬멸무공으로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에게 받은 표창장.
이 과정에서 자칫 목숨을 잃을 뻔 했다. 군경의 포위망이 좁혀지자 토굴에서 저항하던 무장공비가 안 총경을 향해 저격하려하자 옆에 있던 무전병이 무전기로 총격을 막아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간첩선 섬멸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당시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안 총경에게 표창장을 수여했다. 안 총경은 경찰 재직 중 녹조근조훈장을 3번이나 받았다.
운명의 전남 경찰국장
안 총경은 경찰 입문 9년 만인 1971년에 경무관으로 승진했다. 당시 그의 나이 43세였다. 그 뒤 치안국 소방과장, 방위과장을 거쳐 지금의 지방경찰청장인 강원도 경찰국장, 경기도 경찰국장을 거쳐 1979년 2월20일 운명의 전남 경찰국장으로 발령받았다.
당시는 정국이 급변하며 불안하던 시기였다. 안 경무관이 전남 경찰국장에 발령받은 지 8개월 뒤에 10.26 사태가 벌어진다.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에게 살해된 틈을 타 신군부 세력이 호시탐탐 정권탈취를 노리고 있었다.
@1979년 치안본부장이 전라남도 경찰국을 방문했을 때 직원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앞줄 맨 왼쪽에 앉아 있는 사람이 안병하 경무관이다.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가 중심이 된 신군부 세력은 12.12를 기점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휘어잡았다. 1980년 4월로 넘어서자 광주지역 대학가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전남대는 병영집체훈련 거부투쟁을 벌였고, 조선대는 비리사학 퇴출을 명분으로 산발적인 시위가 벌어졌다. 안병하 국장은 대학가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했다.
그는 학생 시위를 막는 기동대에게 특별지시를 내렸다. “공격 진압보다 방어진압을 우선하라” “시위진압 시 안전수칙을 잘 지켜라” “시위학생들에게 돌멩이를 던지지 말고 도망가는 학생들을 뒤쫓지 말라” “죄 없는 시민들이 다치지 않도록 각별히 유의하라” 안 국장은 언제나 시민의 안전을 최우선에 뒀다.
1980년 5월6일 박관현 전남대 총학생회장은 8일부터 14일까지 1주일간 ‘민족민주화 성회’를 개최한다고 선포했다. 시위가 점점 격화될 조짐을 보였다. 안 국장은 경찰과 학생의 피해가 심각해질 것을 우려했다. 뭔가 특단의 조치가 있어야 했다. 안 국장은 전남대 총학생회장과 ‘비밀협상’을 추진한다.
안 국장의 지시를 받은 광주 서부경찰서장이 전남대로 들어가 박관현 총학생회장을 만나 협상을 벌였다. 학생들은 과격시위를 자제하고 경찰은 학생들의 정당한 시위는 보장하고 안전한 귀가를 약속했다. 학생들은 돌과 화염병 대신 촛불과 횃불을 들었다. 학생들의 시위는 경찰과의 큰 충돌 없이 마무리됐다. 학생들의 시위는 질서와 안전을 유지했다. 학생들은 집회가 끝나자 쓰레기들을 자진 수거하는 등 평화로운 시위를 지켜갔다.
5.18 당시 전남대 앞에서 시위대와 대치하고 있는 경찰.
5월17일 신군부는 비상계엄 확대를 선포하고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설치했다. 대학 휴교령과 국회해산, 정치인 예비검속 등이 이어졌다. 광주에는 공수부대가 투입될 것이라는 얘기가 나돌았다. 시내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과격 진압할 것이라는 소문도 들리면서 광주시내는 폭풍전야와도 같았다.
안 국장의 불안감도 커져만 갔다. 5월18일 광주시내에는 공수부대가 투입됐고 전남대 등 주요 대학을 점령했다. 공수부대원들은 교내에 남아 있던 대학생들을 무조건 체포했다. 이에 항의하는 학생들에게는 곤봉으로 때리고 군화발로 짓밟으며 해산시켰다. 시위대를 대하는 경찰의 방식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뤘다.
“시민들에게 총부리를 겨눌 수 없다”
신군부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폭력에 맞서 항의하는 학생과 시민들의 숫자는 급증했다. 계엄이 확대되고 공수부대가 투입되면서 전남의 경찰권도 신군부의 통제에 들어가게 됐다. 속속 증강된 공수부대는 무차별적인 구타와 연행, 건물 난입이 계속 되면서 금남로 일대는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할 참상이 계속된다.
이런 상황에서도 경찰은 시위대의 과격한 행동에 대비하는 차원에서 질서 유지에 최선을 다했다. 안병하 국장은 늘 참모들에게 “시위대와 대처할 때는 절대 폭력을 행사하지 말고 평화적인 시위가 되도록 슬기롭게 대처하라”고 지시했다. 총기는 절대 사용하지 못하도록 했다.
경찰 지휘관들에게는 시위 진압 과정에서 결코 난폭한 언행을 삼갈 것과 뼈를 깎는 아픔도 참기 어려운 고통도 인내로서 극복할 것을 강조했다. 언제나 ‘시민의 경찰’이라는 것을 상기시켰다. 계엄군이 투입되기 전까지는 시위대와 경찰은 우호적인 분위기를 이어갔다. 시위대는 경찰들에게 고생한다고 얘기하며 서로 인사할 정도로 거리낌이 없었다.
경찰의 방침과는 달리 공수부대는 군중을 상대로 무차별 폭력을 전개한다. 시민들을 난타하고, 도망가는 사람은 골목길, 가정집, 셔터가 내려진 상점까지 쫓아가 진압봉으로 때리고 대검으로 찔렀다. 아침 출근시간 시내버스 안까지 뛰어 들어가 등교하는 학생들을 무차별 끌어내렸다. 경찰은 이에 동조하지 않고 질서유지를 위해 노력했다. 시민들은 경찰에 박수를 보내고 매우 우호적인 입장을 보였다.
5월20일 금남로 1가에서 공수부대가 경찰 간부를 폭행하는 사건이 터졌다. 시위대에 적극 대처하지 않는다며 나주경찰서장을 질질 끌고 가기도 했다. 한 전남도경 과장은 공수부대의 과격한 시위 진압에 항의하다 무차별 폭행을 당해 머리가 터지는 일도 있었다.
@12.12 군사반란이 성공하고 군 수뇌부 인사가 발표된 뒤인 1979년 12월 14일, 쿠데타 지휘부와 행동대장들이 국군보안사령부 건물 앞에서 찍은 기념사진. (맨 앞줄 왼쪽에서 다섯번째가 전두환이다)
전남도청이 시민군에 장악당한 후인 5월25일 오후 5시30분쯤 전투교육사령부에 최규하 대통령이 방문했다. 여기에는 이희성 계엄사령관, 김종환 내무부장관, 소준열 전교사령관, 안병하 국장 등이 함께 했다.
최 대통령 앞에서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안하무인처럼 행동했다. 당시 참석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희성은 대통령 면전에서 “경찰이 무장하고 도청을 접수하라”며 안병하 국장에게 버럭 소리를 지른다. 사실상 경찰이 총을 들고 나서서 시민군들에게 발포까지 불사하라는 명령이었다.
안 국장은 “경찰은 시민군에 형제, 가족도 있을 테고 이웃도 있는데 경찰이 무기를 사용하면서까지 할 수 없다”고 무장을 거부했다. 그러자 이희성은 “저런 사람이 전남 치안을 맡고 있는 경찰인가?”라며 면박을 줬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이희성 계엄사령관과 안병하 국장은 육사8기 동기생이었다. 안 국장은 이렇게 대통령 앞에서까지 경찰의 무기 사용을 극구 반대했다.
8일 간의 혹독한 고문
얼마 후 안병하 국장이 머물고 있던 경찰항공대 임시 막사에 낯선 남자들이 찾아왔다. 보안사 요원들이었는데, 이들은 다짜고자 안 국장을 계엄사령부가 있는 서울 동빙고동 보안사령부로 연행했다. 동시에 안 국장은 전남도경국장에서 직위 해제됐다. 당시 그의 나이 52세로, 치안감 승진대상 1순위였다.
계엄사는 6월2일까지 8일간 안 경무관을 불법 구금하며 혹독한 고문을 가했다. 잠을 재우지 않고, 전깃불을 이마에 비추는 등의 방법으로 육체와 정신을 짓밟았다. 처음에는 ‘부정축재 비리자’로 엮으려고 했으나 탈탈 털어도 먼지 하나 없었다는 후문이다.
고문을 가한 보안사 요원들은 새까만 군 후배들이었다. 안 경무관은 강압에 의해 사표를 제출한 뒤 석방된다. 안 경무관은 자신을 믿고 따라준 부하들을 끝까지 지켰다. 셋째 아들인 호재씨에 따르면 “아버님은 혹독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부하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사표를 제출했다”고 말했다.
계엄사에서 풀려난 뒤에도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치안본부에 대기했다. 신군부의 눈치를 살피던 경찰 수뇌부 누구도 안 경무관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오히려 안 경무관을 비판하고 무능한 경찰로 낙인찍었을 뿐이다.
안 경무관은 6월 13일에나 귀가할 수 있었다. 집에 돌아온 안 경무관은 예전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만신창이 상태였다. 정신적인 충격 때문인지 말문도 닫아버렸다. 고문을 당한 후에는 단지 “죽고 싶다”는 말만 되풀이 할 뿐이었다. 그가 계엄사에서 있었던 8일 동안 어떤 치욕을 당했는지는 짐작이 가능하다.
미망인 전임순 여사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너무 힘들어했다.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된 남편은 그날 오후 가슴이 결리고 아파해서 오후부터는 바로 병원을 찾았다. 이후 3개월간 침을 맞고 뜸을 뜨러 다녔다”고 전했다.
8년간의 투병생활 후 순직
안병하 경무관은 평소에 감기 한 번 걸리지 않았을 정도로 건강한 체력을 자랑했다. 그런 그가 정신적 충격과 고문 후유증으로 담낭염, 고혈압, 당뇨, 신부전증까지 앓았다. 하루건너 피를 걸러내야 하는 중병에 시달렸다.
미국 LA까지 가서 신병 치료를 했으나 진전이 없자 4개월 만에 귀국하기도 했다. 결국 1988년 10월 10일 한 내과의원에서 혈액투석을 받다가 순직했다. 계엄사에서 풀려난 후 순직하기까지 8년 동안 병원 생활만 하다 운명한 것이다.
전문의들의 의학적 소견에 따르면 “심한 정신적, 육체적 스트레스로 인해 당뇨와 고혈압을 얻게 되고 이로 인해 만성신부전증으로 결국 사망에 이르렀다”고 밝혔다.
안 경무관의 강제해직으로 인해 가족들은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다. 당시 경찰 고위간부 정도 되면 얼마든지 치부가 가능했지만 그는 청렴을 지켰다. 국가에서 월급 받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하고 더 이상의 욕심도 내지 않았다. 살고 있던 집이 유일한 재산목록 1호였다.
8년 동안의 투병생활동안 가정은 풍비박산이 됐다. 현충원에 안장되지 못해 충북 충주시 양성면 소재 공원묘지에 안장됐다.
@1980년에 촬영한 가족사진. 가운데 안병하 고 경무관을 사이로 왼쪽 미망인 전임순 여사, 오른쪽 큰 며느리.뒷줄 왼쪽부터 아들 삼형제. 맨 왼쪽부터 셋째 호재, 둘째 춘재, 첫째 영재씨.
가장인 안 경무관의 죽음은 유족들에게 또 다른 고통의 시작이었다. 막대한 병원비로 강제해직 후 받은 퇴직금이 모두 들어갔다. 그가 사망한 뒤 남은 것은 빚뿐이었다. 유족들은 안 경무관이 생전에 살던 집도 눈물을 머금고 팔아야 했다. 최악의 상황에 내몰렸지만 어느 곳, 누구 하나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았다.
유족들이 안 경무관의 명예회복을 위해 여기저기 찾아다닐 때 어느 기관 한 군데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다. 그건 치안본부도 마찬가지였다.
안호재씨는 “1989년 종합청사에 민원을 제기하니까 치안본부로 넘겼다. 치안본부는 다시 보훈처로 가라고 했고, 보훈처는 공무원연금으로 가라고 했다. 그래서 공무원연금으로 갔더니 다시 치안본부로 가라며 뺑뺑이를 돌렸다. 서로 미루기에만 급급했다”라며 “치안본부는 경찰의 본분과 소임을 다한 경찰관을 도와주기는커녕 귀찮은 사안으로 여겼을 뿐이다”며 울분을 토했다.
험난한 명예회복, 아직 끝나지 않았다
1992년 광주에서 민주화운동 관련 희생자 신청접수를 받을 때 안 경무관 유족들도 신청했으나 “안병하는 광주민주화운동과 직접 관계가 없다”며 거절당했다. 안 경무관은 이렇게 광주시청에서도 버림받았다.
유족들은 “우리가 광주시로부터도 버림을 받으면 우리는 어디로 가야할까”라며 깊은 자괴감이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국가기관, 치안본부 등의 배신감에 치를 떨어야 했다. 이 당시 안 경무관의 큰 아들은 “이 나라에 더 이상 못 살겠다”며 미국으로 떠났다.
@2015년 8월의 호국인물로 선정된 고 안병하 경무관.
1994년에서야 행정재판을 통해 8일간 고문 받은 것이 ‘불법 구금’으로 인정돼 800만원을 받은 것이 전부였다.
같은 해 유족들은 광주지역 법조인들과 언론인들의 도움을 받아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2년 후인 97년 대법원은 “안병하 경무관이 광주사태로 사망하게 되고, 강제 해직당했다”며 유족들에게 사망자의 보상생활지원금, 위로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들어서면서 5‧18에 대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이 추진됐다. 안 경무관이 ‘광주민주화유공자’로 인정받은 것은 순직한 지 15년 만인 2003년이다. 2005년이 돼서야 언론 등을 통해 안 경무관에 대한 재조명이 시작됐다.
당시 허준영 경찰청장은 안 경무관 유족의 사연을 듣고는 보훈처에 항의해 처음으로 순직판정을 받았다. 강제해직 된 지 25년, 순직한 지 17년 만이다. 이때가 돼서야 비로소 국립 서울현충원 경찰묘역에 안장될 수 있었다.
국가유공자 등록은 2006년에서야 됐다. 경찰은 2009년 충남 아산 경찰교육원에 안 경무관을 기념하는 ‘안병하 홀’을 건립했으나, 경찰청 내에 추모비와 흉상 제막식을 한다고 해 놓고는 하루 전에 취소했다.
우리는 '안병하'에게 너무 인색했다. 아무도 그를 기억하려고 하지 않았다. 국가도, 경찰도, 광주 시민도, 그의 존재를 애써 알리지 않았다. 유족들은 특히 광주시에 서운함과 배신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고 말한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안병하 경무관은 시위대에게 발포해 시위를 무력 진압하라는 신군부의 명령을 거부했다. 만약 안 경무관이 신군부의 명령에 따라 발포하고 무력진압을 했다면 걷잡을 수 없는 유혈사태가 벌어졌을 것이다. 이로 인해 안 경무관은 보안사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하고 강제해직됐다. 이것만 봐도 광주는 안 경무관에게 큰 마음의 빚을 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광주시는 한 번도 안 경무관을 찾지 않았다. 안호재씨는 “광주시는 아버님과 유족을 어떻게 대했는가? 5.18관련 행사에 한 번도 부르지 않았다. 아버님이 투병생활을 할 때 병문안 한 번 오지 않았다. 국립묘지 이장 행사에 불참한 유일한 곳이 광주시청이다”라고 말했다.
@지난해 6월 안병하홀이 있는 경찰교육원 충혼탑 앞에서 미망인 전임순 여사와 가족, 경찰관계자 등이 기념 촬영하고 있다.
이 뿐 만이 아니다. 안병하 경무관은 2015년 호국인물로 선정돼 전쟁기념관에서 헌정식을 가졌다. 이때 광주시청과 광주지방경찰청에 공식 초청장을 보냈으나 불참했다.
5월 광주의 숨은 영웅, 기억해야
고인의 명예회복을 위한 유족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5.18이 일어난 지 37년째인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정부는 안 경무관을 ‘광주5.18국가유공자’로 인정한 후 다시 ‘순직경찰 국가유공자’로 인정했다. 그런데 이것을 이중보상이라며 97년에 지급한 5.18 위로금을 반환하라고 독촉했다. 유족들의 차량에 ‘압류’ 딱지까지 붙였다.
유족들은 이에 부당하다며 소송을 제기했고, 재판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유족들은 “보상금은 치료비, 투병생활로 인한 병원비에 턱없이 모자란다. 국가에서는 민주화를 위해 희생하신 분의 유족에게 책임지지 않는다”라며 씁쓸해 했다.
@국립 서울현충원 경찰 묘역에 안장된 고 안병하 경무관 묘소.
'시민의 경찰'이라는 본분을 끝까지 지킨 안병하 경무관. 그러나 그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고통스럽다. 그의 명예는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고, 유족들의 고통은 대물림되고 있다. 5.18 광주의 영웅 안병하 경무관, 우리는 언제까지 그를 외면하고 홀대해야 할까?
SNS시민동맹 주최
고 안병하 경무관 추모식 개최
SNS시민동맹은 지난 1월7일 국립 서울현충원 경찰묘역 고 안병하 경무관 묘소에서 민간 차원의 첫 추모식을 개최했다. 이 자리에는 시민동맹 회원들을 비롯해 고 안병하 경무관 미망인인 전임순 여사와 아들 호재씨(시민동맹 고문) 등 유족들이 참석했다.
전임순 여사는 "그동안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웠다"며 "이제라도 알아줘서 고맙다. 이런 자리를 만들어 줘서 너무 감사하다"며 눈시울을 적셨다.
이번 추모식에는 이철성 경찰청장, 차명석 5.18기념재단 이사장, 이혜숙 전국군폭력희생자 유가족협회 회장 등이 조화를 보내 고인을 추모했다. 관할 동작경찰서에서는 담당 직원을 보내 추모의 마음을 전했다.
SNS시민동맹은 향후 매년 ‘고 안병하 경무관 추모식’을 주관하기로 했으며, 올 5월부터는 서울 한강고수부지에서 ‘안병하 시민학교’를 개최할 예정이다.
@고 안병하 경무관 묘소 앞에서 유족과 SNS시민동맹 회원들이 기념촬영을 했다. 묘비 오른쪽이 미망인 전임순 여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