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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Dream Phil 원문보기 글쓴이: Dream Phil
2016년 2월 27일 사순 제2주간 토요일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을 멀리서 본 아버지는
측은한 생각이 들어 달려가
아들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루카. 15,1-3.11ㄴ-32)
While he was still a long way off,
his father caught sight of him, and was filled with compassion.
He ran to his son, embraced him and kissed him.
말씀의 초대
미카 예언자는 어려움에 처해 있는 백성을 위하여 기도한다. 홀로 버려져 살아가는 백성이 의지할 곳은 하느님의 자비뿐이다. 하느님께서 자애를 베푸시고 우리의 허물들을 용서해 주지 않으신다면 우리에게는 희망이 없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세리들과 죄인들을 받아들이신다. 아버지의 곁을 떠나 방탕한 생활을 하던 아들이 돌아올 때 아버지가 기뻐하며 잔치를 벌이듯이, 하늘 나라에서는 죄인들이 회개하여 돌아오는 것을 더 크게 기뻐하기 때문이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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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우리 가정에도 복음에 나오는 작은아들 같은 아들이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머리를 절레절레 흔드시겠지요. 머리로는 이 복음을 이해하려고 애써 노력하지만, 끝까지 작은아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도 사실입니다.
작은 아들이 집을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을까요? 큰 아들 같이 마치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면서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적당히 사고도 저지르고 반항도 조금씩 해 가면서 그럭저럭 아버지를 모시고 살았더라면 어땠을까요? 아버지가 아직 살아 계신데 유산을 달라고 졸라 얻어 내어, 그것을 날려 버리기까지 해야 할 정도로 유산이 탐났을까요?
그러나 만일 작은 아들이 집을 나가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끝까지 아버지의 깊은 마음을 그는 알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복음의 거의 마지막 장면까지도, 그는 자기가 집에 돌아가면 아들이 아니라 품팔이꾼으로 살아야 하리라고 생각하고 굳게 다짐합니다. 아버지가 자기를 어떻게 맞아 줄 것인지를 올바로 예상하지 못하였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그는 아버지를 아직 모릅니다. 그가 집에 돌아왔을 때 아버지의 반응은 그가 예상한 것과 너무나도 달랐습니다. 그가 알고 있던 아버지의 모습은 그 순간에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부서지고 깨지고 잘못하고 죄를 짓고, 사순 시기마다 회개한다고 또 애를 쓰지만 매번 같은 죄를 반복하고, 후회하고 좌절하고 ……. 이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나약한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는 것은, 매번 똑같은 모습으로 당신을 찾아가는 우리를 기꺼이 맞아 주시는 아버지의 사랑을 발견하는 계기가 됩니다.
아버지 하느님께 돌아갑시다. 아버지의 품은 고향의 오솔길처럼 포근합니다. 아버지의 집은 우리가 돌아가야 할 영원한 마음의 고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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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결한 창녀 >
-전삼용신부-
양승훈 교수의 ‘물에 빠져 죽은 오리’에서 이렇게 자신의 경험을 적고 있습니다.
자동차 서비스 회사에 근무하는 동생이 오랫동안 서울 본사에서 근무하다가 일산에 있는 회사의 부품 창고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울적해진 동생은 기분도 달랠 겸 창고 옆에 오리를 키울 수 있는 작은 수영장을 만들었다. 수영장이래야 꼬마들이 물장구나 치며 놀 만한 크기의 널찍한 물통이 전부였다. 그러고 나서 퇴근하기 전에 오리 농장에 달려가 청둥오리 한 마리를 사서 물에 넣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밤새 안녕할 것을 기대하며 출근을 해 보니 오리가 물통 속에서 죽어 있는 게 아닌가! 깜짝 놀라 오리를 이리저리 뒤척여 봐도 짐승에게 물린 흔적은 없었다. 그렇다고 수영이 ‘전문’인 오리가 물통 턱을 기어 올라오지도 못하고 30cm 정도밖에 안 되는 얕은 물에 빠져 죽었을 리는 없지 않은가! 결국 오리 농장에 가서 주인에게 따져 물었다. 하지만 자초지종을 들은 농장 주인은 그것도 몰랐느냐는 듯이 말했다.
“이 오리는 오리 농장에서 부화하고 키운 오리입니다. 그래서 수영을 할 줄 모르지요. 게다가 이 오리는 어릴 때부터 물속에 집어넣지 않았기 때문에 깃털에 기름이 분비되지 않아 물에 잘 뜨지도 못합니다.”
우리가 죄를 피한다고만 해서 진정으로 경건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죄를 허락하셨다면 다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가 작은 아들에게 죄를 지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자신의 유산을 내어주었다면 그 죄를 통해 무언가를 깨닫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죄는 그래서 유용합니다. 유용하기 때문에 인간 주위에 있기 하신 것입니다. 마치 오리도 물이 없는 곳에서만 살면 더 이상 물을 이길 수 있는 힘을 가지지 못하는 것처럼 인간도 죄와 끊임없이 싸워보지 않고서는 죄를 이길 수도, 죄 때문에 겸손해 질 수도 없습니다. 아기들이 엄어지지 않고는 걷는 법을 배울 수 없는 것처럼 하느님도 우리가 죄 짓는 것을 결코 두려워하시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통해 어떤 유혹이 닥치더라도 다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지니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트럭 뒤에 이렇게 써 놓고 다니는 것을 누군가가 보았다고 합니다. 한 쪽에는 “나는 예수님을 믿습니다”라고 써 놓았고, 다른 쪽에는 “내 차를 건드리는 놈은 박살을 내 놓겠다”라고 써 놓았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이 참으로 경건한 사람이라 말할 수 있을까요?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사람은 이미 부정한 사람입니다. 사람과 접촉하지 않으면 죄를 짓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순결해지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참으로 순결한 사람이 하는 기도가 나옵니다. 그 순결한 사람은 단 두 가지만을 청합니다.
하나는 ‘죄의 용서’입니다. 자신이 죄인인 줄 모르면 교만하여 순결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분은 분노를 영원히 품지 않으시고, 오히려 기꺼이 자애를 베푸시는 분이시다. 그분께서는 다시 우리를 가엾이 여기시고, 우리의 허물들을 모르는 체해 주시리라. 당신께서 저희의 모든 죄악을 바다 깊은 곳으로 던져 주십시오.”
우리 죄를 잊어달라고 기도하면서 다른 사람 허물을 들추어내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남을 판단하는 데에는 자신은 이미 정의로운 사람이라는 교만이 깔려있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자신의 나약함을 알아서 하느님의 도우심을 청하는 것입니다.
“과수원 한가운데, 숲 속에 홀로 살아가는 당신 백성을, 당신 소유의 양 떼를 당신의 지팡이로 보살펴 주십시오. 옛날처럼 바산과 길앗에서 그들을 보살펴 주십시오. 당신께서 이집트 땅에서 나오실 때처럼, 저희에게 놀라운 일들을 보여 주십시오.”
나의 힘으로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죄가 없다고 말하는 이는 다 거짓말쟁이인 것입니다. 죄와 싸워 본 사람은 죄를 이길 수 없음을 압니다. 그래서 겸손하게 주님의 도우심을 청합니다. 이런 사람이 순결한 사람인 것입니다.
믿으면 순결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믿으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성령의 열매인데 성령은 교만한 자 안에는 사시지 않기에 사람을 판단하는 자가 믿는다는 것은 거짓과 위선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 딸을 고쳐달라고 청하는 가나안 여인을 사람들 앞에서 개 취급을 하십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자존심도 없이 “저, 개 맞습니다. 그렇지만 자녀들이 먹는 빵 부스러기는 먹을 수 있지 않습니까?”라고 말합니다. 당신 앞에서 자신을 완전히 낮춘 그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믿음이 장하다.”
순결한 사람은 오늘 독서에서처럼 자기 죄에 대해 용서를 청하고 또 자신의 약함을 알기 때문에 하느님의 도우심만을 바라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믿음의 사람입니다.
우리는 간음하다 잡힌 여인입니까, 아니면 그 여인을 향해 돌을 들고 있는 사람들입니까? 그 날 그 간음하다 잡힌 여인만이 그리스도께 심판받지 않고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구성원은 모두 창녀들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힘으로는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 약한 존재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순결합니다. 왜냐하면 그 겸손함이 바로 더러움 자체인 뱀을 몰아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부들은 언제나 교회를 부를 때 ‘순결한 창녀’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우리는 순결합니까, 부정합니까? 부정한 것은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자비하신 아버지
-이수철신부-
오늘 복음의 소제목은 '되찾은 아들의 비유'지만
이보다 '자비하신 아버지의 비유'라함이 더 적절합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추상적이자 철학적인 초월자, 막연한 하느님이 아니라
자비하신 인격적 아버지임을 깨닫습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6,36).
바로 이 복음 말씀에 대한 해설이 오늘 복음의 '자비하신 아버지의 비유'입니다.
이 말씀이 진정 복음이며 우리의 자랑스런 하느님 상입니다.
도대체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친교를 깊이할 수 있는 종교가 세상 어디에 있겠는지요.
안식년을 맞아 잠시 '아버지의 집'인 수도원을 떠났던 제 경우를
복음의 작은아들과 견주는 것은 말그대로 어불성설(語不成說)이지만
그래도 저는 제 처지를 통해 오늘 복음을 잘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1년여의 안식년이 끝나고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아버지의 집에 귀가 했지만
작은아들은 거의 행려자 수준의 거지가 되어 돌아왔으니 얼마나 감개무량했겠는지요.
저의 귀가는 말그대로 금의환향이었습니다.
비단옷을 입고 온 것이 아니라
수도형제들의 따뜻하고 열렬한 환대가 그대로 비단옷이었습니다.
이어 아름답고 아기자기하게 준비된 제가 집무할 사무실도 저를 환대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도 공동체의 수도형제들도 저를 환대한 경우와는 달리
복음의 집에 있던 큰아들은 아버지의 작은 아들의 환대에
노골적으로 화를 내며 적의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
전혀 틀린말이 아닙니다.
큰아들의 입장에서보면 공감이 갑니다.
이또한 우리의 보편적 모습입니다.
다 맞는 말같은데 자비심이, 연민의 사랑이 통째로 빠져있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큰아들로 상징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겨냥하고 있습니다.
큰 아들과 같은 종교지도자들이나 성직자, 수도자들은 아닌지
우리 모두의 회개해야할 모습을 보여줍니다.
제 경우 아버지의 집인 수도원에 돌아오니 말그대로 살 것 같았습니다.
불암산과 하늘을 보니,
또 거룩한 성전, 큰 밥상 같은 제대를 중심으로
형제들과 미사를 드리고 성무일도를 바치니 살 것 같았습니다.
26년간 살던 제 '잘곳'의 방이, '먹을곳'의 식당이, '기도할 곳'의 성전이 있으니 살 것 같았습니다.
귀가후 처음으로 계속 숙면하니 또한 살 것 같았습니다.
아버지와 수도형제들만 아니라 무수한 형제자매들이 저를 환대했습니다.
제 귀가(歸家) 소식을 접한 허엘리야 수녀님의 환영 메시지 입니다.
"환영합니다. 어서 오셔요. 신부님! 기다렸습니다. 돌아와 주셔서 감사하여요. 신부님!“
하여 안식년동안 알게모르게 저를 보살펴주신 형제자매들에게 귀원 5일째
카톡으로 사진과 함께 감사메시를 발송했습니다.
"무사귀원 5일째! 감사합니다.“
이 카톡에 대한 허엘리야 수녀님이 진정성 가득 담긴 두 번째 다음 답글에 감동했습니다.
"프란치스코 신부님! 고맙습니다.
살아, 오셔서요.
새롭게, 하느님과 고운 추억 엮어가시는 걸음 되소서!“
살아오셔서 감사하다니요.
그러니 복음의 아버지는 살아돌아온 작은아들이 얼마나 고맙고 기뻤을까요.
조마조마한,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으로 귀가하는 아들을 멀리서 본 아버지는
가엾은 마음에 달려가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춥니다.
아버지의 자비심이 그대로 드러나는 참 감동적인 장면입니다.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아, 작은아들의 진정성 넘치는 회개의 고백성사입니다.
어제 귀원후 고백성사받을 때의 신선한 충격을 잊지 못합니다.
생전 처음으로 만난 오창선 신부님입니다.
고백성사후 별다른 훈계말씀도 없이 보속으로 '주의 기도 1회'을 받았을 때
순간 아버지의 자비와 더불어 마음 가벼워짐을 느꼈습니다.
아, 보속은 무거운 짐이 아니라 가벼운 선물같아야 함을 깨닫습니다.
돌아가신 우리 민신부님도 보속은 '성모송 3회'였다 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십시오.
아버지는 회개의 고백성사를 본 작은아들에게
훈계도 책임추궁도 보속도 없이 곧장 환대의 비단 금의를 입혀주십니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라.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즐거운 잔치를 벌이기 시작합니다.
회개를 통해 완전히 아버지의 아들로 복권된 작은아들이요
바로 이 거룩한 미사잔치를 상징합니다.
자비와 겸손은 함께 갑니다.
자비하신 아버지는 겸손한 아버지입니다.
최고로 자비하시며 겸손하신 하느님이십니다.
어제 고백성사후 은총처럼 떠오른 생각에 신부님 앞에 무릎을 꿇고 강복을 청했습니다.
"저에게도 강복을 주십시오.“
즉시 제 앞에 무릎을 꿇는 오창선 고백신부님의 겸손에 감동했습니다.
이미 피정중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라는 제 책을 읽고 감동을 받았다 하시기에
다른 2권의 제 책을 선물로 드리니 참 행복했습니다.
오늘 복음의 아버지는 또 얼마나 겸손하신지요.
큰아들을 조용히 타이르며 설득하는 겸손하신 아버지의 모습이 잔잔한 감동입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것이다.
너의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
자기를 완전히 비운 겸손하신 아버지이심이 단박 느껴집니다.
큰아들은 물론 우리 모두의 회개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큰아들의 반응은 독자들의 상상에 맡기지만 아마 회개하여 기쁨의 잔치에 참여했으리라 생각됩니다.
오늘 미카 예언자가 고백을 통해 이런 자비하신 아버지의 정체를 잘 밝혀 줍니다.
"그분은 분노를 영원히 품지 않으시고, 오히려 기꺼이 자애를 베푸시는 분이시다.
그분께서는 다시 우리를 가엾이 여기시고, 우리의 허물들을 모르는 체 해주시리라.“
주님의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잔치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환대의 비단 옷을 입혀주시고 우리의 모든 죄악을 바다 깊은 곳으로 던져주시며,
우리를 성실히 대하시고 자애를 베풀어 주십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