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니 신차발표회(1974) 현대자동차에서 출시한 한국 최초의 고유 모델 포니
포니가 나오기까지 한국 자동차공업은 도전의 연속이었다. 1955년 왕십리에서 자동차 정비공장을 하던 최무성이 미군부대에서 불하받은 윌리스 ?차를 개조하여 시발을 출시한 것이 효시다.
망치로 두들겨서 만들어야 하는 수제작업이라 생산량이 공급에 미치지 못하는 차를 구입하기 위하여 '빽'을 써야 했고 '시발계'까지 등장했다.
시발자동차(1955) 최무성이 산업박람회에 출품한 시발1호 이 때는 백미러 개념이 아예 없었다.
1907년 미국에서 발명된 깜박이(방향지시등)도 뷰익이 1938년 장착했으나 널리 보급되지 못하고 한국에는 아직 도입되지 않았다. 방향을 전환하려면 창 밖으로 손을 내밀어 수신호했다.
복원한 시발 ㅅ ㅣ- ㅂ ㅏ ㄹ 이라는 로고가 이색적이다.
새나라자동차(1962) 제일교포 박노정이 일본 닛산에서 부품을 들여와 조립생산한 한국 최초의 자동차공장 제품 백미러가 앞쪽 휀다 위에 장착됐다.
신성호(1963) 신성호를 조립생산하던 신진공업사는 새나라 자동차공업사가 정치적인 격랑을 피하지 못하고 휘청거리자 새나라를 인수하며 신진자동차공업사로 사명을 바꾸고 자동차 산업에 본격 뛰어들었다.
퍼블리카 신진이 일본에서 들여와 조립 생산
코로나 1600
코로나1800
포니 포니는 명실공히 우리나라 최초의 고유 모델이었다. 디자인은 세계적인 자동차 디자이너 이탈리아 조르제토 쥬지아로 였다.
포니 택시
포드 부품을 들여와 코티나와 포드20M을 생산하던 현대는 일본차(코로나)의 경제적인 연비에 밀려 고전을 면치못했으나 포니 출시로 역전의 발판을 마련했다. 포니 역시 엔진과 밋션은 일본 미쓰비시였다.
뉴코티나
포드20M
포니의 여세를 몰아 포니2를 생산했고 비로소 백미러가 운전자 가까이 장착됐다.
포니엑셀을 출시했다.
이에 멈추지 않고 프레스토까지 생산했다. 신진은 자중지란을 겪으며 퇴장했고 현대가 한국자동차 시장을 평정했다.
k-360 삼천리 자전거를 만들던 기아산업은 일본 마쓰다에서 기술을 들여와 2기통 공냉식 360cc 엔진을 탑재한 k-360을 조립 생산하여 자동차 산업에 뛰어들었다.(1962) (일명 딸딸이)
T-1500 산악지형이 많고 고개가 많은 한국의 지리적 특성때문에 엔진 출력이 작은 k-360와 T-1500은 빛을 보지 못했다.(1963)
T-2000 배기량 2000cc 수냉식 엔진을 탑재한 T-2000 비로소 한국에 적응하기 시작했다.(1967)
삼륜차의 대명사가 된 T-2000
T-600 k-360에서 좌절을 맛본 기아는 T-600을 출시하여 용달계를 평정했다.(1969) 헌데, 성질 급한 한국사람들에게 약점도 있었다. 코너에서 급하게 핸들을 꺾으면 잘 넘어졌다. 그리고 겨울에 추웠다. 에어컨은커녕 히타도 없었다.
운행중이던 T-600. 뒤쪽에 포브리카 우측에 검정차는 코티나
브리사(1974) 소형 화물차에서 자신감을 얻은 기아는 석유파동으로 고공행진하던 연료비가 적게드는 브리사를 생산하여 대박을 쳤다. 당시 배기량 155cc가 대종을 이루던 승용차 시장에서 1300cc 브리사는 획기적인 기름값 절감 상품이었다.
봉고마스타 브리사의 여세를 몰아 봉고9를 출시하여 우리나라 소형 승합차 시장을 열었다.
새마을 픽업 이에 뒤질세라 대우도 새마을 픽업을 출시했으나 실패했다.
하동환 픽업 트럭 역시 빛을 보지못했다.
청와대 박정희 대통령 전용차와 경호실 차(1970.3)
기아에서 조립생산한 피아트124 서울에서 부산까지 논스톱으로 달릴 수 있다해서 서울-부산 미사일 택시로 인기를 끌었다. 다른 차들은 열을 식히기 위하여 추풍령에서 쉬어가야 했다.
피아트132 보안사령관 전용차 육군소장 전두환이 즐겨 이용했던 승용차
한국 최초의 고속버스
고속도로 통행량 조사
서울-인천 경인고속도로에 이어 경부고속도로 최초구간 서울-수원 고속도로가 뚫리자 고속버스가 운행에 나섰다. 인천 노선은 서울역 봉래동에서 삼화고속, 수원 노선은 초동에 있던 유신고속이 독점했다.
고속도로가 천안을 찍고 대전까지 연결되어 시장이 커지자 대기업이 달려들었다. 한진고속, 동양고속, 광주고속, 천일고속, 한일고속, 속리산 고속, 그레이하운드 등등이다.
그레이하운드(1970) 외국계 자본이 운영하던 그레이하운드는 차내에 화장실이 있어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토종 버스업체에 밀려 철수했다.
경부고속도로 개통으로 1일 생활권 시대를 열었다.(1970)
한진고속(1970) 서울-부산 고속도로 개통은 재벌계열 운송업체들의 각축장이 되었다.
광주고속(1970)
신촌 로타리 차량이 제법 많아졌다. 하지만 자가용 승용차는 서민들에게 그림의 떡이었고 기차와 버스가 교통수단의 대종을 이루었다.
신촌역 일산과 문산을 오가는 사람들이 기차를 타려고 줄지어 서있다.
버스 차장 시내버스는 콩나물 시루라는 별명을 얻었다.
버스 차장 안내양이라는 이름도 붙여주지 않았던 그 시절이니까 그렇지 지금 이런 탑승이라면 당장 성추행 깜.
명절 때 벽제 용미리 공동묘지를 오가는 화물차에 승객 탑승을 눈감아 주었다. 운송수단이 절대 부족했던 시절이다.
서울역 급격한 이농은 귀성전쟁을 불러왔다. 특히 설과 추석 등 명절이면 살인적인 전쟁이었다. 먼저 타려고 뛰다 넘어지면 압사사건을 일으켰다.
승차하려는 귀성객들이 서울역 지하도를 점령했다.
귀성전쟁 경찰 저지선을 뚫고 뛰어가는 귀성객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아무리 빨리 뛰어가도 좌석은 이미 만원, 귀신이 곡할 노릇있었다. 부적절한 방법으로 먼저 티켓을 손에 쥔 자들이 먼저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허탈하게 통로를 걸어가는 부부 아기 업은 주부에게도 양보란 없었다.
아수라장
짐 얹는 선반까지 올라갔다.
객차에 오르지 못한 귀성객들은 기관차에라도 올랐다. 기관사가 남감한 표정을 짓고있다.
버스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
출처: 삿가스 칼럼 원문보기 글쓴이: 삿가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