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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들어선 것이 엊그제 같은데 두 달이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아직은 바람이 차지만 그래도 낮의 햇볕은 따사로워지고 있습니다. 나뭇가지에 조그맣게 움이 맺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르기는 해도 따뜻한 햇볕을 참을 수가 없나 봅니다. 조금만 기다리면 때가 올 거야, 그런 마음이 듭니다. 희망을 품고 시작한 새해인데 아직은 앞이 안 보입니다. 양당이 떠드는 공허한 소리들만 귓가를 쟁쟁거립니다. 우리는 왜 저들에게 그 엄청난 세비를 주면서 먹여 살려야 하는지 속이 뒤집어집니다. 저 늙은 닭들이 모두 지구를 떠나야 뭔가 희망이 살아나려나 싶기도 합니다. 시간은 앞으로 가는데 저들은 무슨 재주로 뒤를 향하고 있는지 답답합니다.
전쟁 1년, 그 속의 슬픈 얼굴들을 보며 그나마 위안이 되기는 합니다. 얼마나 힘들까, 문제는 그들에게도 보이지 않는 희망일 것입니다. UN이 무조건 즉시 물러가라고 의결했답니다. 참 딱하지요? 백 날 떠들어봐야 벽에다 소리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지진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는 나라와 백성도 있습니다. 거기나 저기나 모두가 정말 어려운 때를 버티고 있습니다. 어서 봄이 와야 할 텐데. 이 지구촌에 봄은 언제나 오려나 모르겠습니다. 우리도 하루가 멀다고 으르렁거리는 북쪽의 위협이 가까이 있습니다. 그런데 참 대단합니다. 말 그대로 개가 짖어대도 기차는 간다 식이지요. 예, 때가 되면 어차피 봄은 옵니다. 기다리며 됩니다. ㅎㅎ
그리고 우리는 그 때까지 건강하게 버티면 됩니다. 좋은 날을 보리라, 희망을 가지고. ㅋㅋ 주말은 즐겁게 지내야지요. ^)^
2023년 2월 25일 김종우 목사 드림
“그가 그곳 사람에게 물어 가로되 길 곁 에나임에 있던 창녀가 어디 있느냐 그들이 가로되 여기는 창녀가 없느니라 그가 유다에게로 돌아와 가로되 내가 그를 찾지 못하고 그곳 사람도 이르기를 여기는 창녀가 없다 하더라”
(창세기 38 : 21 - 22)
<성스러운 거미>
‘몸을 판다’면 대부분 여성입니다. 드물게 남성이 하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일단 여성이라고 지목됩니다. 지금도 인정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한 때는 직업으로 공인될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습니다. 어디서는 사회적으로 인정되고 있지만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아마도 사회적 공인보다는 음지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다지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라고 여겨집니다. 그 일을 하는 사람도, 그것을 찾는 사람도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니 주로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밤거리에서 이루어지고, 낮이라 하더라도 남모르게 은밀히 거래됩니다. 참으로 오래된 직업 아닌 직업이지만 어디에서나 으슥한 그늘에서 움직입니다.
왜 시작되었을까요? 일단 대부분 여성이라고 하였는데 처음 그 여성은 왜 이 일을 시작하게 되었을까요? 우선 수요가 있었기에 공급이 가능해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공급원은 욕망보다는 삶의 다급한 필요 때문에 지원(?)하였으리라 생각합니다. 뭔가 생활비를 벌려 하니 그 자금이 필요합니다. 소위 사업 자금인데 가지고 있는 것이 없습니다. 오로지 몸 하나뿐입니다. 그리고 그 몸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이지요. 그렇게 수요와 공급이 형성됩니다. 어느 쪽도 자랑스럽게 거래할 사업은 아닙니다. 그러나 서로 만족할 만한 조건이 형성되기에 거래는 성사됩니다. 한 쪽에서는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하여 그만한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고, 다른 쪽에서는 자신의 생활 유지를 위해 그 대가를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때로 부부 사이의 갈등 소재가 됩니다. 심하면 가정 파탄까지도 이를 수 있습니다. 사회적 문제를 야기시킬 수도 있습니다. 또한 사회 풍기를 문란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억제하고 제한하며 법적으로도 통제합니다. 형사적 벌칙을 정하여 시행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거래는 은밀하게 이루어집니다. 어떻게 보면 법이 있어도 크게 제한하지 않는 면도 있습니다. 어쩌다 단속하느라 요란을 떤다 해도 말 그대로 요란만 떠는 식이지요. 우리가 놀고 있지는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식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식으로 말해서 걸린다 해도 보통 ‘재수 없어서’ 정도로 치부하고 넘어갑니다. 단속을 하는 쪽이나 받는 쪽이나 아마도 의식에 큰 차이는 없을 듯합니다.
살해당한 여인들의 대부분은 그 일이 경제적 궁핍함을 해결하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물론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자기 혼자 살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돌보아야 할 가족도 있습니다. 취재를 하려니 막무가내로 반대하고 쫓아내려 합니다. 그래도 가슴에 맺힌 아픔과 슬픔을 견디지 못하여 토로합니다. 사회적으로 비난을 받아야 하는 사람일지라도 그 가족에게는 삶의 버팀목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보다 더 먼저는 사랑하는 딸이고 외동딸입니다. 어느 날 살해되었는데 어디 하소연도 하지 못합니다. 슬픔조차 제대로 표현하지 못합니다. 주변 사람들의 비난의 눈총과 그 소리를 피하기에 급급합니다. 동네에서 쫓겨날 수는 없으니 말입니다.
불과 1년에 16명이 살해되었습니다. 법정에서 17명이라고 말하니 스스로 16명이라 정정해줍니다. 아주 당당하게. 경찰이 하지 못하는 일을 자신이 해결해주었으니 표창이라도 주어야 하지 않느냐 하는 식입니다. 그러나 누구도 그러한 태도에 항의하지 않습니다. 법정 밖에서는 오히려 구명운동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 무슨 해괴한 일인가 싶기도 하지요. 그 살인마의 가족마저 사회적 영웅시 합니다. 아내조차 잘 하였다고 추켜세워 줍니다. 십대 어린 아들에게조차 당당하게 이야기해줍니다. 딸은 아직 너무 어려서 분간을 하지 못합니다. ‘사이드’는 그저 평범한 가장입니다. 낮에는 남들처럼 일하고 때로 가족들과 단란한 시간을 보냅니다.
종교와 결합한 신념은 극단적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소위 광신이라고도 말하지요. 종단, 종파가 어디이든 광신자가 있을 수 있습니다. 자신은 믿음의 행위라고 말하지만 상식을 벗어난 행위는 마땅히 처벌을 받아야 합니다. 소위 ‘공동의 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아무리 ‘믿음’이 절대라고 하지만 범사회적으로 인정을 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신도 용서하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문제는 권력화 된 종교입니다. 세상 권력까지 쥐면 왕 이상의 절대권력을 행사할 것입니다. 그것이 오랜 시간을 지나면서 사회적 인식까지 점령합니다. 전통으로 굳어지고 사회일반의 사고가 되고 의식이 됩니다. 변하거나 조정되기도 어려워집니다. 우리는 그런 현실을 보고 있습니다.
21세기 최첨단 사회임에도 여전히 사람들의 의식이 굳어져 있습니다. 더 무서운 것은 그것이 그대로 대물림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언제까지 가야 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 그리고 두려워집니다. 겨우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로 보이는 아들이 어린 자기 여동생을 도구로 살해 연습을 하는 비디오를 보면 치가 떨립니다. 그 죄가 아무리 중하다 할지라도 살인을 금하는 것이 아니라 도모하는 종교가 종교인가 묻고 싶습니다. 영화 ‘성스러운 거미’(Holy Spider)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사자일지라도
오래 전 성탄절을 가지고 왈가왈부하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성탄절이 왜 12월 25일이어야 하느냐 하는 문제였습니다. 하기는 그 전에 이미 성탄절을 지낸 곳도 있다는 것을 어느 선교사님의 편지를 보고 알았습니다. 그런가 하면 러시아 정교회에서는 1월엔가 기념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 탄생일이 어느 날인지 딱 집어 알 수는 없습니다. 알 방법도 없을 것입니다. 그게 그렇게도 중요한 것이라면 하나님은 아마도 성경에 기록해놓지 않으셨을까 싶습니다. 날짜보다 중요한 것은 구세주가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입니다. 365일 중 한 날에 오신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러니 이 지구 빙 돌아가면서 각 나라와 민족이 자기 편한 날을 택하여 지키면 어떻겠습니까? 각각 자기네 환경과 여건에 맞게 정하여 지키는 것이지요. 전 인류가 공동으로 함께 즐거워하는 날로 하는 것이 좋겠다 싶으면 먼저 지키던 나라나 사람들을 따라가면 되는 겁니다. 누가 뭐라 하겠습니까? 우리 하나님이신들 그것 가지고 심판하시겠습니까? 골 2 : 16 - 17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아멘! 성경에 나온 절기도 우리가 매일 것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그것들은 다만 장래 일의 그림자라는 것이지요. 하물며 성경 뒤에 정해진 성탄절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따진다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과도 같습니다.
구세주가 세상에 오셨다는 이 사실이 중요합니다. 죄 가운데 살던 인생들에게 이처럼 기쁜 소식은 없습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의 길이 열리는 시작입니다. 오셨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지 언제 오셨는가 하는 것은 문제도 아닙니다. 사실 이 사건을 이해하고 나서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 중요성을 깨닫고 한 날로 정해서 기념하자고 우리들이 만든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하라 말라 하신 적도 없습니다. 정작 주님이 오셔서 당신이 직접 하라고 하신 것은 하나입니다. 눅 22 : 19 “또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즉 성찬식입니다. 그것도 제한적임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전 11 : 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그렇지요. ‘오실 때까지’입니다. 즉 다시 오시면 그 기념행사도 끝나는 일입니다. 날을 정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행사입니다. 어느 날을 정하여 하는 것은 우리에게 맡기신 일입니다. 우리의 편의를 고려하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구약의 절기처럼 정하여 주셨으리라 믿습니다. 그 모든 것이 다 그림자요 모형일 뿐입니다(히 10 : 1, 골 2 : 17). 시한부라는 것이지요. 어느 때가 되면 끝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주님 오시는 길을 예비한 사람이 있습니다. 세례 요한입니다. 세례 요한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과 우리가 이해하는 것 사이에 거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때로 앞 사람이 주는 대로 그렇게 배웠고 그러려니 생각하고 막연히 믿고 신앙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대로 ‘하나님 뜻대로’ 되기를 원한다면 먼저 하나님 뜻대로 알고 믿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선 세례 요한에 대해서 바르게 알고 그 다음 예수님이 오셔서 무엇을 하셨는가,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그 주님이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명하시는가 하는 것을 바르게 깨닫고 알아야 ‘주님 뜻대로’ 행할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에 대해서 예언한 말씀이 있습니다. 말 3 : 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예비할 것이요또 너희의 구하는 바 주가 홀연히 그 전에 임하리니 곧 너희의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할 것이라” 이 말씀에 보면 두 사자가 나타납니다. 하나는 길을 예비하는 사자요 다음에는 언약의 사자입니다. 당시 하나님 백성이 사모하는 언약의 사자는 바로 그리스도, 메시야입니다. 그런데 그 앞에 길 예비사자가 먼저 나타납니다. 누가 그렇게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마 11 : 9 - 10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려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네 앞에 예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이 사람이 누굽니까? 세례 요한을 두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 직전에 활동한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입니다. 그는 예수님 앞에서 그 길을 예비한 자입니다. 드디어 메시야가 나타날 때 그 바로 앞에서 길을 예비했던 사자입니다. 얼마나 영광스런 자리였습니까?
소위 신앙을 가지고 있던 백성은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살아생전 메시야를 본다는 것은 말 그대로 영광 중의 영광 아닙니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있습니다. 마 13 : 16 - 17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하나님이 약속하고 예언하셨지만 언제 오실지는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자들 앞에 계신 것입니다. 그 사실을 제자들이 믿었는지 못 믿었는지는 다른 문제입니다. 그에 앞서 세례 요한은자기 눈으로 메시야를 보았고 더더구나 그 메시야에게 세례를 주는 영광까지 누립니다. 구약의 모든 선지자들이 바라고 소망했던 자리 아닙니까? 세례 요한이 그 영광을 누렸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이가 일어남이 없도다”(마 11 : 11). 그는 아브라함보다, 모세보다, 다윗보다 위대한 자였습니다.
하나님은 구약성경을 마치면서 예언하십니다. 말 4 : 5 - 6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아멘! 이 예언은 예수님 오시기 4백 년 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 선지 엘리야가 세례 요한임을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마 11 : 14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이 사람 즉 세례 요한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길 예비사자로 와서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돌이키게 하는 것입니다.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 자녀의 마음을 아비에게로 돌이키는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 돌이켜야 합니까? 잘못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백성이 하나님 말씀대로 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 생각대로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길 예비사자는 그들의 마음을 돌이켜 언약의 사자에게로 나아가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길 예비사자로써 할 일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엘리야의 영이 함께 한 하나님의 사자였습니다. 참으로 중요한 임무를 가지고 세상에 왔습니다. 바로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일입니다. 주님이 오실 때 백성을 이끌어 주님께로 인도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 하는 유대인들은 어둠에 갇혀 있었습니다. 어둠은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시대를 말합니다. 도대체 성경을 가지고 있던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니 이상하지요. 그러나 그 성경을 하나님 뜻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뜻대로 보면 하나님 말씀은 없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성경을 가지고 가르친다는 사람들 - 서기관 바리새인들, 율법사와 제사장들, 장로들까지 백성의 어른들이라 하는 사람들, 지도자들은 자기네 생각에 빠져있었습니다. 마 15 : 1 - 2 “그 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것은 장로들의 유전입니다. 그 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3절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 그리고 이미 예언된 말씀으로 깨우치십니다. 7 - 9절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게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그렇습니다.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치면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하는 것이 됩니다.
세례 요한은 그런 시대 그런 세대에 왔습니다. 잘못 가고 있는 백성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사명을 가지고 온 것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요 1 : 29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에게 세례를 줍니다. 그리고 놀라운 광경을 봅니다. 마 3 : 16 - 17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세례 요한은 이러한 사실을 증거합니다. 요 1 : 32 - 34 “요한이 또 증거하여 가로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하니라” 아멘! 그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하였고 증거하였습니다. 이제 그는 모든 백성을 예수님에게로 가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이 그의 사명입니다.
그 후 세례 요한은 헤롯에게 잡혀 옥에 갇힙니다. 그의 제자들은 여전히 요한에게 딸려 있었습니다. 진작 예수님께로 가야만 할 사람들 아니겠습니까? 왜 여전히 세례 요한에게 붙어있습니까? 마 11 : 2 - 3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이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증거할 때는 언제이고 이제는 당신이 누구냐? 하는 식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에게 임했던 엘리야의 영이 떠났던 것입니다. 그가 자기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니 그럴 수밖에 없지요. 하나님은 당신의 뜻에 순종치 아니하면 함께 하시다가도 떠나십니다. 삼손에게서 떠나셨고 사울 왕에게서 떠나셨습니다. 물론 솔로몬 왕에게서도 떠나셨습니다. 계 2 : 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그것이 하나님이 하셨던 일이고 또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떠나시면 그의 사명도 끝난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자가 됩니다. 겔 33 : 13 “가령 내가 의인에게 말하기를 너는 살리라 하였다 하자 그가 그 의를 스스로 믿고 죄악을 행하면 그 모든 의로운 행위가 하나도 기억되지 아니하리니그가 그 지은 죄악 중 곧 그 중에서 죽으리라” 아멘! 중요한 것은 그것입니다. 이전의 의로운 일이 하나도 기억됨이 없다는 사실이지요. 그러므로 과거에 매여서는 안 됩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서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솔로몬 왕을 지혜의 왕이라 하여 추앙합니다. 그러나 그의 인생 끝은 하나님을 떠난 자였습니다. 그러면 그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의 업적이 대단하였다 할지라도 결과는 하나님의 떠난 삶으로 끝났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실 세례 요한은 등불에 불과합니다. 이제 등불이 필요 없는 시대가 왔습니다. 왜요? 해가 떴기 때문입니다. 메시야가 온 것입니다. 등불은 밤에 길 밝히기 위해서 필요합니다. 이제 해가 떠있는 대낮인데 등불이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요 5 : 35 “요한은 켜서 비취는 등불이라너희가 일시 그 빛에 즐거이 있기를 원하였거니와” 그렇지요. 세례 요한은 잠시 필요했습니다. 이제 그 사명을 다했음을 알면 빛이신 예수님께로 가야 합니다. 그리고 제자들도 ‘해’이신 예수님께로 다 인도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을 증거하다가 잡혀서 옥에 들어갔습니까? 그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로 잡혔습니다. 율법 붙잡고 남의 집 가정사를 들먹이다가 잡힌 것입니다. 마 14 : 3 - 4 “전에 헤롯이 그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로 요한을 잡아결박하여 옥에 가두었으니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당신이 그 여자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우리 생각은 필요 없습니다. 나타난 현실을 보아야 합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나 복음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로 잡혀 들어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미 그를 떠나셨습니다. 그러니 감옥에서 엉뚱한 소리를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거하던 사람이 어떻게 ‘당신이 그입니까?’하고 묻겠습니까? 그는 이미 어둠의 세력에 묻혔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떠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마 11 : 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한 마디로 세상에서는 가장 큰 자였을지라도 ‘천국에는 없다,’라는 뜻입니다. 이해가 됩니까?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혹시 순교자로? 과연 하나님이 인정해주실까요?
그리고 예수님은 진작 말씀하셨습니다. 마 11 : 12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천국이 침노를 당한답니다. 천국이 침노를 당한다면 누구에게 침노를 당하겠습니까? 그야 사단 마귀에게 당하는 것이지요. 아니 천국 백성이 자기 나라를 침노하겠습니까? 자기 나라에는 그냥 들어가는 것이지 ‘침노한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침노한다는 것은 적군이 들어온다는 말입니다. 천국의 대적이 누구입니까? 마귀 사단이지요. 세례 요한과 예수님 당시 마귀 세력이 누구였습니까? 요 8 : 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여기 ‘너희’가 누구입니까? 서기관 바리새인들을 비롯하여 당시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입니다. 그들의 아비가 마귀랍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에게는 마귀의 영이 함께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 15장에서 본바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계명과 장로들의 유전으로 백성에게 짐을 지웠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들을 저주하셨습니다. 마 23 : 1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천국에 자기들 못 들어가는 것은 둘째 치고 백성도 들어가지 못하게 막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이 마치 그와 같은 일을 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순교자라 하는 것이 옳습니까?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다른 처사입니다. 이것이 옛날이야기에 그친다면 다행입니다. 예수님이 걱정하셨습니다. 눅 18 : 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인자가 올 때에’ 곧 재림 때를 말씀하시는 거지요. 주님 다시 오실 때도 세상에는 믿음이 없을 것이고 마찬가지로 그 오신 주님께 가는 길을 막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이 빛으로 오셨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언약의 사자’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였습니다. 드디어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지상에서의 당신의 사역을 시작하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하나님과 예수님은 하나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것은 육신을 가진 예수이고 그 안에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이 함께 계신 것입니다. 그것을 말해주었더니 유대인들이 들고 일어났습니다. 요 10 : 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이게 믿어집니까? 31절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하거늘” 그렇지요? 예수님은 그 앞에서도 비슷하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요 5 : 17 - 18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유대인들이 이를 인하여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그들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만 보였을 뿐입니다.
사실 앞에서 보았듯이 그들은 마귀의 자녀들이니 마귀의 영이 함께 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과 마귀의 전쟁이기도 합니다. 그 영적인 전쟁이 여기 사람들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이 함께 하는 자들과 마귀의 영 즉 악령이 함께 하는 자들의 전쟁입니다. 이 영적인 사건을 하나님을 믿는 올바른 신앙인이라면 이해합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듣고 예수님에게로 오는 백성에게는 하늘의 복과 영생의 소망을 주십니다. 요 5 :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중요한 것은 제일 먼저 주님의 말씀을 듣는 일입니다. 믿음은 그 다음의 일이지요. 무조건 믿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는 먼저 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말씀합니다. 롬 10 : 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아멘! 무엇을 들어야 합니까?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지요. 요 5 : 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주님은 마귀의 영에 사로잡힌 자들의 그늘에서 수고하는 자들을 불쌍히 보시고 부르십니다. 마 11 :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거짓과 싸운다는 것은 그 무엇보다도 힘든 일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사람의 계명으로 바꾸어 백성에게 짐을 지웠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어떠합니까? 엉뚱한 해석으로 백성을 미혹합니다. 쉬운 길만 가르쳐줍니다. 편한 길만 이야기해줍니다. 복 받는 이야기만 해줍니다. 초림 때 채찍으로 실패하더니 이제 재림 때는 당근으로 유혹합니다. 딤후 4 : 3 - 4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그렇게 되고 있지 않습니까? 교회는 뭐 하러 갑니까? 하나님 나라 가는 길을 알고자 가는 것 아닙니까? 영생을 얻고자 알려고 가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지금 무엇을 이야기하고들 있습니까?
촛대는 옮겨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떠나실 수 있습니다.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은 지금 우리와 말씀으로 함께 하십니다. 말씀을 가지고 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깨달아야 합니다. 알고 신앙해야 합니다. 자칫 세례 요한을 따라가는 꼴이 됩니다. 진리 안에 거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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