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공간/이승훈
블랑쇼에게 공간은 죽음의 공간이다 언어는 죽음을 운반한다 언어라는 배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으므로 부재의 배이고 부재는 현존이 아니다. 현존 너머 현존 너머 죽음이 흐른다 내가 당신이라고 부를 때 당신은 이미 당신이 아니고 당신은 다른 곳에 있고 당신이라는 낱말만 종이 위에 뒹군다 당신은 어디 있는가
나는 염소라고 쓴다 이 염소는 어디서 오고 어디서 온 것도 아니다 갑자기 염소 생각이 나고 염소라고 쓰면 염소는 있지만 염소는 없고 봄날 저녁 염소 한 마리 운다 그러나 우는 소리 들리지 않고 염소는 보이지 않고 염소는 없다 없기 때문에 이 없음을 위해 부재를 위해 당신을 위해 우리는 글을 쓴다 염소가 나를 잡아먹으리라
<시 읽기> 문학의 공간/이승훈
프랑스 작가 모리스 블랑쇼의 저작 제목을 이 시는 그대로 제목으로 삼고 있다. 블랑쇼는 ‘근대 너머’를 사유하려는 일군의 유럽 철학자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고 알려져 있다.
“내가 당신이라고 부를 때 당신은 이미 당신이 아니고 당신은 다른 곳에 있고 당신이라는 낱말만 종이 위에 뒹군다”는 것. “갑자기 염소 생각이 나고 염소라고 쓰면 염소는 있지만 염소는 없”다는 것, 모든 문학적 글쓰기의 궁극적 절망이 여기에 있을 것이다. 실페와 언어 기호 사이의, 대상과 호명 간의 이 메울 길 없는 시공간적 어긋남. 그러나 우리의 육신이 한계이자 가능성이듯이, 그 어긋남 또한 문학의 절망인 동시에 존재 근거인 것은 아닐까.
때로 거침없이 쓰이는 관념어들조차 싱싱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 오랜 물음에 관한 시인의 참구參究가 그만큼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김사인, 『시를 어루만지다』, 도서출판b, 2013.
첫댓글 문학의 시공간의 간극에 그다지 절망하지 않습니다. 마치 우리가 그렇게나 좋아하고 열광하는 밤하늘의 별도 실체는 과거의 모습이니까요.
이승훈 시의 특성이 나타나 있는 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