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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명의 사제
-전삼용신부-
오늘 한국에 도착했습니다. 3년 만에 한국에 오니 정말 좋았습니다. 우리나라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것이 한국말로 잘 통하고 시스템도 척척 잘 돌아가고 특히 인터넷이 빨라 좋습니다.
부모님과 식사를 하고 동기 신부가 차를 태워주어서 방학동안 머물 숙소로 오는 중에 감동적인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그 신부님은 통일과 북방선교에 관심이 있는 신부님이라 한 번은 탈북자들이 우리나라에 적응할 수 있도록 교육을 시키는 '하나원'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신부님께 한 봉사자가 고해성사를 보고 싶어 하는 분이 계시다고 하더랍니다. 보통은 봉사자 중에 가끔 고해를 보기도 해서, 봉사자가 원하는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탈북자 중 한 분이 고해를 보기를 원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조금 있다가 한 할머니께서 들어오셨습니다. 연세가 여든 내외가 되어 보이셨습니다. 그 할머니는 성호를 그으시면서 말씀도 못하시고 계속 우시더랍니다. 그도 그럴 것이 60년 만에 보는 고해성사였던 것입니다.
그 할머니는 유아세례를 받았지만 공산정권 하에서는 종교생활을 할 수도 없었습니다. 종교 생활뿐만이 아니라 자신이 가톨릭 신자라는 것을 철저히 숨겨야했습니다. 딸과 함께 탈북을 하였는데 그 숨 막히는 긴장을 뚫고 국경을 넘었을 때 할머니는 자신도 모르게 성호를 그으셨습니다. 딸은 어머니가 하는 것이 무슨 행동인지 몰랐습니다. 왜냐하면 60년이 넘게 힘든 일이 있으면 남이 못 보도록 이불을 뒤집어쓰고 성호를 긋고 주님의 기도를 바쳤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의 동기 신부님은 하염없이 흐느끼는 할머니에게 계속해서 "그건 할머니 잘못 아니에요, 그건 할머니 잘못 아니에요..."라고만 되풀이 해 주었다고 합니다. 평생 고해를 못하고 미사를 못 한 것이 어찌 할머니 탓이겠습니까?
그러면서도 평생 믿음을 지켜 오신 그 할머니 앞에 저를 비롯한 모든 현대의 신앙인들은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 할머니는 60년 만에 하는 첫 미사와 영성체의 행복감에 젖어 미사 참례하시는 내내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 신부님은, '우리는 왜 그런 첫 마음으로 미사에 참례할 수 없을까?'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맞습니다. 저도 오늘 한국에 들어오면서 공항 표지판이 한글로 되어있고 안내방송이 한국말로 나오는 것 하나에서도 너무 행복해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첫 마음이 얼마나 가겠습니까? 그렇게 먹고 싶은 음식도 한두 번 먹어보면 더 이상 땅기지가 않습니다.
저도 눈물을 흘려 본 경험을 생각해 보니 군대 들어갔을 때 몇 주 미사를 갈 수 없다가 가게 되어 눈물이 났던 적, 또 신학생 때 불만이 쌓여가서 한 이틀 굶어보고 영성체를 했더니 눈물이 났던 때가 생각이 났습니다. 그 땐 미사가 정말 은혜 자체였고 성체 하나로 온전히 만족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험들은 서서히 또 사라지게 됩니다. 그런 첫 마음으로 산다면 정말 행복할 수 있을 텐데요.
오늘은 우리나라에 첫 사제 순교자인 김대건 안드레아 대축일입니다. 저는 김대건 신부님의 대축일을 맞이해서 그 분을 빌미로 사제의 중요성에 대해 말하려고 합니다.
만약 북한에 단 한 명의 사제만 있다고 해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해를 보고 미사를 하며 소원을 풀 수 있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김대건 신부님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사제가 된 분입니다. 물론 그렇게 어렵사리 탄생한 첫 방인 사제이셨지만 채 1년도 활동하시지 못하고 잡히시어 순교하시게 됩니다. 그 때 어떤 신자들은 평생 단 한 번 한국어로 고해성사를 받고 강론을 들었을 것입니다. 한 번 미사를 하기 위해서 부산에서부터 옹기장이 행세를 하며 목숨을 걸고 경기도로 올라온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 일 년도 안 되는 시간동안이지만 한국에는 단 한명의 한국말을 쓰는 사제밖에 없었고 신자들에겐 그가 유일한 보물이었습니다. 그건 그분의 성품과는 별개였습니다. 한국말을 쓰는 사제라는 것 하나만으로 그분을 구하기 위해서 많은 신자들이 대신 목숨을 바치겠다고 달려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에게 그 할머니 이야기를 해 준 신부님은 사실 신자에게 멱살도 잡히며 모함도 당하는 등 여러 상처를 받은 분입니다. 물론 사제가 먼저 잘 해야 신자가 잘 해 줄 수 있다고 말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신자들이 그 나라에 마지막 남은 사제라고 생각하고 소중히 여겨준다면 신자들의 마음을 보고라도 더 달라지려하지 않을까요? 어떻게 사제에게 손을 댈 수 있는 정도로까지 사제라는 것이 하나의 보통직장인처럼 여겨지게 되었을까요?
아마 첫 사제를 대하던 마음이 사제가 둘이 생기고 셋이 생기고 더 많이 늘어났기 때문에 그 첫 사제를 대하던 마음이 무뎌져버린 것이 아닐까요? 사제도 물론 첫 모델인 김대건 신부님을 본받아야겠지만 신자들도 우리나라에 단 한 분밖에 없었던 사제를 대하듯이 지금의 신부들을 대하려는 마음을 다시 가져야하지 않을까요?
유럽 교회의 퇴락이 어쩌면 프랑스 혁명 이후 사제들을 하나의 공무원이나 직장인처럼 여겨지게 된 것으로부터 시작되지는 않았을까요? 사제를 존중하지 않으면 하느님은 사제를 보내주시지 않으십니다. 선물은 고맙게 받는 사람에게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제의 품위는 하느님께서 세워주시는 것이고 하느님께서 거룩하게 축성하시는 것입니다. 그 사제가 비록 부족한 점이 많다고 하더라도 미사 드리고 고해성사 드려주는 것만으로도 그런 사제를 보내주신 하느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사울은 하느님께서 사무엘을 시켜 기름을 부어 축성한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입니다. 기름을 부어 축성했던 직책은 사제와 왕과 예언자였습니다. 기름은 성령님을 나타내고 하느님께서는 성령님을 부어 특별한 직무를 세우셨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으로부터 축성된 사울은 하느님께 죄를 범하게 되고 자신이 받았던 성령님을 잃게 됩니다. 그렇게 되니 마음이 불안하게 되고 다윗을 시기하여 그를 죽이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다윗을 추격합니다. 그런데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다닐 때 한 번은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왔었습니다. 사울이 자고 있을 때 다윗이 부하들과 그의 막사에 들어갔던 것입니다. 그의 부하들은 사울을 죽이고 나라를 차지하라고 권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느님께서 성별하여 뽑으신 왕을 어찌 인간이 손을 댈 수 있느냐?”며 다만 겉옷자락을 자르고 그의 창과 물통만을 가지고 왔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시기하여 죽이려고 하는 사람이었고 이젠 하느님도 사실 그에게서 떠난 상태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 기름 부어 성별하신 왕이었기 때문에 옷자락을 자른 것만 가지고도 다윗은 큰 죄책감을 느꼈습니다.
나중에 사울의 군사 하나는 전쟁터에서 크게 상처를 입은 사울을 칼로 찔러 죽이게 됩니다. 사울이 상처를 크게 입어서 어차피 죽을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사울이 적군에게 죽기를 원치 않았고 그 신하에게 자신을 찔러 달라고 했기에 어쩔 수 없이 찌른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앞으로 왕이 될 다윗에게 조금은 아부하는 마음으로 이 일을 아뢰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반응은 예상외였습니다. 비록 자신을 죽이려는 원수였을지라도 하느님께서 성별하신 사람이었는데 그에게 함부로 칼을 대었던 그 군사를 나무라고 즉시 칼로 쳐 죽였습니다.
아무리 형편없다고 생각되는 사제더라도 하느님께서 거룩하게 축성한 몸이고 그 사제를 욕하거나 해를 가하는 일은 그 사람을 뽑아 거룩하게 축성하신 하느님께 대해 죄를 범하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죄를 우리는 ‘독성죄’라 부릅니다. 큰 죄 중에 큰 죄입니다.
사제는 김대건 신부님의 온전한 순교정신을 본받아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칠 줄 알아야합니다. 그러나 신자들 차원에서도 사제를 마치 이 나라에 있는 유일한 사제인 것처럼 대할 줄 아는 마음을 갖는 것 또한 적지 않게 중요하다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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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를 작정하고>
-양승국신부-
천주교 박해시대 당시 조선이란 땅은 동방 선교사들에게 있어서 "죽음의 땅"이었습니다. 일단 들어가면 100% 죽음이 확실한 사자굴과도 같은 선교지가 조선이었습니다.
따라서 조선에 선교를 지원했던 서방 선교사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조선으로 입국을 하셨지요. 조선으로 떠나기 직전 선교사들은 죽음 준비작업들을 하셨습니다. 부모님께 "천국에서 다시 만나자"는 눈물의 작별의 편지들을 쓰셨지요.
동료사제들, 자신의 주교님께 하직 인사를 올렸습니다. 마지막으로 장엄한 유서를 남기고 조선으로 건너오셨던 것입니다.
조선에 입국하셨던 선교사들의 발걸음은 그야말로 형극의 길이자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선교사들의 조선행(朝鮮行)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무죄한 어린양의 발걸음이었습니다.
조선 땅에 발을 들여놓으셨던 모든 선교사들의 길은 오직 처절한 십자가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음을 뻔히 알면서도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 예수님의 길이었습니다.
이런 선교사들로부터 사제수업을 받으셨던 김대건 신부님 역시 이런 숙연한 분위기를 어찌 파악하지 못하셨겠습니까?
김대건 신부님의 입국 역시 목숨을 건 길, 일단 들어오면 100% 죽음의 길이었습니다.
꿈결조차 그리웠던 고국의 산천, 입국을 위해 그 숱한 나날들을 기다려왔던 조국인데...이제 그 고향 땅에 들어가면 기다리고 있는 것은 처참한 죽음이라니...참으로 비극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박해가 가라앉을 때까지 좀 기다렸다가 천천히 입국할 수도 있었습니다. 박해의 세월이 지나가기를 기대하면서 다른 학문을 공부할 수도 있었습니다. 아쉽지만 입국을 뒤로 좀 미루고 중국에서 사목을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김대건 신부님의 뇌리 속에는 오직 목자 없이 길 잃고 방황하는 동포들의 고통만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목자 없어 서러운 민중들 한 가운데로 투신할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김대건 신부님의 길, 예정된 죽음의 길, 굶주림과 고문, 갖은 조롱과 처참함만이 기다리고 있는 십자가의 길을 묵상하면서 다시 한번 제가 가고 있는 길을 반성합니다.
죽기를 작정하고 시작한 사제의 길이었습니다. 양보하고 희생하는 일은 기본이라는 것을 알고 시작한 수도자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 작은 것 하나 양보하지 못하고 티격태격되는 제 모습이 부끄럽기만 합니다. 그 하찮은 고통 앞에서도 세상이 끝난 듯이 불평불만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 제 삶이 참으로 한심하기만 합니다.
오늘 하루 김대건 신부님처럼 죽기살기로 하느님께 봉헌된 삶을 살지는 못하더라고 평소보다 좀 더 희생하고 좀 더 자신 대해서 죽는 "작은 순교"를 실천하는 하루가 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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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자루 같은 사제>
-양승국신부-
후배 사제들의 첫 미사 참석 때문에 남도를 한바퀴 돌았습니다. 첫 미사 강론을 해주신 아버지 신부님들께서 얼마나 의미 있는 강론들을 잘 준비하셨던지...이틀동안 들은 강론들을 묵상하고 또 묵상하면서 피정하는 마음으로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아직도 제 귓가에 쟁쟁하게 남아있는 몇몇 말씀들을-새사제들에게 당부하신-잊을 수가 없어 소개합니다.
"고해소 안에서 절대로 화내지 마십시오. 한번 혼난 신자들이 다시 고백소를 찾겠습니까? 사제로서 가장 좋은 보속이려니 생각하시고 꾹꾹 눌러 참으십시오."
"혼배성사 때 절대로 화내지 마십시오. 가끔 신랑신부가 늦게 도착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긴장한 나머지 실수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당사자들에게는 일생에 한번 있는 축복의 순간이 아니겠습니까? 너그러운 마음으로 인내하십시오."
"사제는 빗자루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빗자루가 자신에게 주어진 몫(마당 쓰는 일)을 다한 후에 <내가 이만큼 열심히 일했는데!> 하면서 안방 한 가운데를 차지한 것을 보셨습니까? 빗자루는 빗자루일 뿐입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다했으면 다시 자신이 있을 자리인 구석에 가서 서있지 않겠습니까? 신부님, 부디 구석진 자리에 서있는 한 자루 빗자루가 되십시오."
"20년이 지나서야 느끼는 바입니다. 사제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하느님과의 끈을 놓지 않는 일입니다. 전기밥솥의 코드가 전원에서 뽑혀있는 상태에서 밥은 아무리 기다려도 지어지지 않습니다. 사제가 하느님과의 끈을 놓아버린다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과의 끈을 연결시키는 가장 강력한 수단은 기도입니다."
참으로 가슴을 파고드는 따끔한 말씀이었습니다. 새사제들을 향한 진심 어린 충고의 말씀을 듣고있노라니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신부님들 말씀의 요지는 결국 겸손한 사제, 예수님과 신자들을 위해 희생하고 목숨을 바치는 사제, 즉 김대건 신부님 같은 사제가 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첫미사를 끝내고 신자들에게 강복을 드리는 새사제들을 바라보며 김대건 신부님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새사제 신분으로 사제생활을 마감한 분이시지요. 사제생활 1년 1개월만에 순교하신 새사제셨습니다.
김대건 신부님과 관련된 성가를 부르거나 서한을 읽을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짠해오는 구절이 있습니다.
"동지사 오가던 길 삼천리 트였건만, 복음의 사도 앞에 닫혀진 조국의 문, 겨레의 잠 깨우려 애타신 그의 넋이, 이역의 별빛아래 외로이 슬펐어라."
사제가 되기 위해 마카오로 떠난 15세 어린 나이의 김대건 신학생에게 펼쳐졌던 상황은 장밋빛 탄탄대로가 절대로 아니었습니다.
용기가 가상했고, 꿈은 컸었지만 중학교 2학년 나이, 여리디 여린 소년의 눈앞에 비춰진 현실은 암담하기만 했습니다. 낯 설은 이국 땅에서의 기약도 없는 유학 생활, 생전 처음 들어보는 낯선 언어, 낯선 풍습 안에서 살아가던 어린 소년은 숱하게도 많은 밤들을 이역의 별빛 아래 눈물지으며 보냈겠지요.
그 숱한 슬픔의 나날을 잘 극복하고 서품된 김대건 신부님은 안타깝게도 입국하자마자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당국에 체포되고 맙니다.
순교 20일전에 주교님에게 쓰셨던 김대건 신부님의 옥중 서한에 소개된 어머님과 관련된 구절은 읽는 이의 마음을 안쓰럽게 합니다.
"저는 감히 주교님께 저의 어머니 울술라를 부탁드리옵니다. 저의 어머니는 10년 동안 못 본 아들을 불과 며칠 동안 만나 보았을 뿐 또 다시 홀연 잃고 말았으니, 주교님께 간절히 바라건데 슬픔에 잠긴 저의 어머니를 잘 위로하여 주십시오."
1년 1개월, 짧디 짧았던 김대건 신부님의 사제 생활은 그야말로 "환난과 역경, 박해와 굶주림, 헐벗음, 위험과 칼" 아래의 절박한 삶이었습니다.
관헌으로 압송되어온 김대건 신부님은 마치 수난 당하시는 예수님처럼 극도의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옷이 벗겨지는 치욕을 당하십니다. 수 천대의 매를 맞았고, 조롱을 당했으며, 짐승과도 같은 대우를 받았습니다.
그런 극도의 고통을 김대건 신부님은 얼마나 의연하게 잘 견뎌내셨는지 다음의 옥중서간문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제게 이런 형벌을 주신 관장께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관장께서 제게 내리시는 이 형벌을 통해서 저는 더욱 하느님 사랑을 느낍니다. 우리 하느님께서 관장 나리를 더 높은 관직에 올려 주시기를 빕니다.>
"저의 이 말을 들은 관장과 주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큰 소리로 저를 비웃었습니다.
그 후에 여덟 자나 되는 긴칼을 가져오기에 제가 즉시 그 칼을 잡아 제 손으로 제 목에 대니, 둘러섰던 모든 사람들이 또한 다 크게 웃었습니다."
죽음의 칼날 앞에서도 의연하셨던 김대건 신부님, 죽음의 칼날조차도 주님께서 주시는 것이려니 생각하고 기꺼이 수용하셨던 김대건 신부님이셨습니다.
죽음 앞에서도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던 김대건 신부님, 칼을 들이대는 사람에게조차 축복을 해주던 김대건 신부님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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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과 응천의 신앙을 배우자
-황인찬신부-
금세기 최고의 역사학자인 아놀드 토인비 박사는 그의 걸작 『역사의 연구』에서 인류의 역사를 ’도전과 응전의 법칙’으로 설명하고 있다. 인류사를 살펴보면 수많은 문명이 등장했었다. 그런데 잉카문명, 마야문명, 메소포타미아 문명 등은 그 흔적도 없이 사라진 반면, 중국을 중심으로 한 극동문명, 인도문명, 에집트 문명 등은 지금도 건재하다는 것을 연구한 결과 그는 자연재해나 외세의 침략 같은 도전을 받지 않은 문명은 스스로 멸망해 버렸지만, 오히려 심각할 정도로 도전을 받았던 문명 등은 지금까지 찬란하게 발전해오고 있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우리 나라와 이스라엘일 것이다. 두 국가는 공통적으로 대륙의 교두보, 즉 침략의 건널목 역할을 하는 지정학적 위치에 있는 작은 나라이다. 주위의 강대국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영토와 민족이지만 세계적으로 드문 단일 민족을 자랑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 남북으로 분단되어 민족적 시련을 혹독하게 치르고 있지만 이것이 오히려 더 위대한 민족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스라엘도 솔로몬의 통치 이후 약 350년간(BC 932-586년)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왕국으로 분열된 시기가 있었다. 이유야 어떻든 간에 우리민족의 분단현실(55년) 보다 다섯 배 이상 민족적 시련을 겪었던 이스라엘 민족은 로마제국의 등장으로 역사상에서 영원히 사라질 줄 알았는데 2,000년이 지난 다음 다시 지금의 이스라엘 국가를 재건하는 저력을 발휘하였다. 유대인들이 이렇게 강한 민족이 된 것은 그들이 겪었던 고난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는 분석이다.
나는 토인비 박사의 이론이 우리의 삶 속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믿는다. 언젠가 샘터라는 잡지에서 읽은 글이 생각난다. 젊었을 때 직장생활을 시작한 사람과, 자기의 사업을 시작한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흔히 안정된 직장을 갖는 것은 젊었을 때 성공의 기준이다. 그래서 예쁜 색시도 쉽게 얻을 수 있고 일상생활을 안정 속에서 시작할 수 있다. 그러나 중년이 넘어서도 직장생활은 여전히 계속된다. 여유없는 생활은 젊었을 때나 나이가 들었을 때나 항상 그 타령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사업을 위해서 밤잠을 못 자면서 노심초사 고생하는 사람들은 중년이 지나서는 직장생활한 사람과 비교할 수 없이 안정되고 풍족한 생활을 누린다는 내용이었다.
오늘 한국인 최초의 신부이신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을 기리는 대축일이다. 신부님은 25세의 꽃다운 나이로 군문효수의 형벌로 순교를 당한 분이다. 어린나이에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죽을 고비를 무릅쓰고 여행을 해서 마카오에서 신학공부를 하였다. 조선인으로 최초로 성직자가 되는 것은 큰 영예를 얻는 것이다. 외국에서 공부를 하였으니 마땅히 금의환향을 할 수 있는 조건을 다 갖추었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은 천주교를 사교(邪敎, 못된 종교)라 하여 박해의 시대였다. 조국에서 마음껏 사목 생활을 했어야 하는 신부님은 복음을 전하기도 전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버렸다.
그분은 25세 밖에 살지 않았고 서품받고 일년도 안되어서 죽었다. 그렇다면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졌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왜 지금까지 사람들은 신부님의 신앙과 행적을 그토록 높이 우러러보는 것일까? 가장 주된 이유는 그분이 단지 성직자였기 때문이 아니라 신부님의 짧은 생애가 고난과 시련으로 점철되었기 때문이다. 그분의 인생은 잠시도 편안할 겨를이 없었다. 마치 예수님 처럼 ’인자는 머리 누일 곳도 없다’는 말씀을 몸으로 살아가신 분이다. 죽음을 넘나드는 끊임없는 도전의 연속이었지만 그분은 이에 굴하지 않고 용감히 응전을 하였다. 그분이 당시 조선 교우들에게 남겨준 편지를 읽어보면 그분의 용감한 신앙을 엿볼 수 있다. 나는 그분이 성직자였기 때문에 그런 위대한 신앙을 갖게 된 것만은 아니라고 믿는다. 신부님의 편지가 25세 밖에 안된 젊은이가 쓴 글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놀랍다. 그것은 어떤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굽힐 줄 모르는 신앙을 갖게 된 것은 닥쳐오는 도전을 피하려고 하지 않고 응전을 하는 신부님의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왔다고 생각된다.
요새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힘든 일을 시키지 않는다. 이곳 농촌에서도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들에게 일을 시키는 부모가 거의 없다. ’우리 부모는 고생해도 너희들만은 편하게 살아야한다’는 생각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침에 자식들을 차로 등교시켜주는 광경은 흔한 일이 되었고, 무엇이든지 요구하는 대로 다 들어준다. 빚을 내어서라도 컴퓨터, 핸드폰을 사주고, 몸을 팔아서라도 과외공부를 시킨다. 집에 들어오면 자기방 걸레질 한 번 시키지 않고, 냉수 한 그릇까지 떠다 바친다. 그리고 공부만 열심히 하라는 주문을 한다.
이것은 미친 짓이다. 자식들을 망치는 것이다. 온상 속에서 키운 작물들은 조금만 비바람이 불면 금방 몸살 앓다가 죽어버린다. 우리 자녀들도 이렇게 키우니 조금만 어려운 시련이 닥치면 금방 가출을 하거나 자살을 택하는 것이다. 모두가 부모 탓이다. 그렇게 키운 자식들을 학교에 보내서 인성교육을 시켜달라고 하니 될 말인가? 엇그제 부산에서 학부모가 초등학교 여교사를 폭행한 사건이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그런 부모에게서 자란 자식이 잘될 일이 없을 것이다.
이제 우리의 신앙생활을 뒤돌아 보자. 요새 여름이 좀 덥다고 성당에 에어콘을 켜지 않으면미사참례자가 줄어든다고 한다. 도시에서는 옆 본당에서 에어콘을 시원하게 틀어주면 그리로 몰리는 일도 있단다. 겨울이면 성당에 온풍기를 켜놓지 않으면 춥다고 불평이다. 성당 건물도 잘 지어지고, 신부들이 많아지니 편리한 시간에 언제든지 미사참여할 수 있는 시대이다. 그런데 잊지 말아야 할 교훈이 있다. 외적인 생활이 편하면 편해질수록 내적인 힘이 약해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신앙생활을 하면서 편한 것만 추구하면 김신부님 같은 위대한 신앙에 결코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신부님의 신앙과 삶을 묵상하면서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가슴에 담아두자. "우리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기뻐해야 한다. 왜냐하면 고통은 이내를 낳고 인내는 시련을 이겨내는 끈기를 낳고 끈기는 희망을 낳기 때문이다"(로마 5,3-4). 이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신앙인들만이 마침내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받는 은총을 누릴 수 있고,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할 희망을 기다릴 수 있다는 바오로 사도의 축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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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들은 정장 차림으로 끌러지(clergy) 셔츠에 로만칼라를 합니다. 그런데 이 끌러지 셔츠의 색깔은 생각보다 다양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검은색을 많이 입지만, 때로는 흰색이나 회색 등의 색깔도 많이 입습니다. 저 역시 지금은 다양한 색깔의 끌러지 셔츠를 가지고 있지만, 한때 모든 끌러지 셔츠의 색깔이 검은색이었답니다. 그래서 환한 색깔인 흰색 끌러지 셔츠 한 벌을 맞추었습니다. 너무나 마음에 드는 색이었지요. 그러다보니 그냥 막 입기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선은 마음에 들지 않는 검은색 끌러지 셔츠를 입고, 특별한 날이나 의미 있는 날에 흰색 끌러지 셔츠를 입겠다는 생각으로 옷장에 넣어두었습니다.
갑곶성지에서 간석4동 성당으로 이동하는 날, 저는 옷장을 정리하다가 옛날에 특별한 날이나 의미 있는 날에 입으려고 구입했던 흰색 끌러지 셔츠를 발견했습니다. 아낀다고 한 번도 입지 않은 것이지요. 그래서 이동하는 날이 특별한 날이고 의미 있는 날이니까 한 번도 입지 않은 이 흰색 끌러지 셔츠를 꺼내 입었습니다. 하지만 곧바로 옷을 벗을 수밖에 없었지요. 왜 그랬을까요?
그 동안 살이 너무 찐 것입니다. 어깨도 좁게 느껴졌고, 목도 쪼여서 너무나 답답한 것이었지요. 비싼 돈 내고서 맞춘 끌러지 셔츠였는데, 특히 마음에 드는 끌러지 셔츠였는데……. 한 번도 입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입지 못하는 옷을 보면서, 지금 할 수 있는 좋은 것은 지금 당장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특별한 날, 의미 있는 날을 따지면서 뒤로 미루다보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이신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입니다. 김대건 신부님의 삶을 생각해보면 아쉬움이 많이 남는 정말로 짧은 삶입니다. 25세라는 젊은 나이, 사제서품을 받은 지 1년 만에 주님을 증거하다 순교를 하십니다.
사실 상해에서 사제서품을 받고서 종교의 자유가 없는 우리나라로 돌아간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해야만 가능했지요. 그렇지만 김대건 신부님께서는 주님께서 지금 당장 원하시는 일이 조선으로 돌아가 목자 없는 양들을 보살피는 것임을 알았던 것이고, 지금 당장 그 일을 실천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이라면 죽음의 위협도 두려워하지 않고 지금 당장 실천하는 김대건 신부님을 모습을 보면서, 우리도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지금 당장 해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좋은 말을 지금 당장 해야 하고, 좋은 행동을 지금 당장 실천해야 합니다. 이웃을 향한 사랑을 지금 당장 해야 하고, 이웃을 위한 기도를 지금 당장 바쳐야 할 것입니다. 미움보다는 사랑을 지금 당장 간직하고, 다툼보다는 용서를 지금 당장 행해야 합니다.
물론 세상의 모습이 아닌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기에 때로는 세상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바로 그때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힘차게 지금 당장 사랑을 실천했으면 합니다.
지금 당장 해야 할 사랑을 따져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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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에 계신 분의 말씀
-장경선 수사-
말로 남을 판단하기 쉬우나 남과 화해하고 사랑으로 감싸주는 것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양심을 깨우쳐주는 것 역시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남으로부터 오해, 미움 등을 받을 때
오히려 나 자신부터 공격적인 말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점점 대화가 단절되고 결국 서로의 관계가 껄끄러워져갑니다.
간음한 여인을 끌고 온 유다인들 앞에서 돌로 쳐라 또는 치지 말라는 두 가지 답변밖에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예수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땅에다 무언가 쓰고 계셨습니다. 그때 그분의 답변은 수많은 사람들이 익히
알고 배웠던 율법 조목이 아니었습니다. 내 안에 계신 분은 분명 다른 사람의 깊은 내면을 매만질 수 있는 분으로 그분에게서 나오는 지혜와 말씀은 색다릅니다. 우리 자신 안에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영이 계신다는 것을
모두가 깨닫게 해줍니다. 성령은 우리 안에서 선(善)을 이루게 합니다.
그래서 사랑과 용서를 통하여 하나가 되는 길에 필요한 것은 어떤 지식이나 옳고 그름에 대한 사실 확인이 아니라 깊은 내면의 소리, 그분의 말씀을 듣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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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부님의 열정과 철저한 투신
-홍금표 신부-
"주님께 모든 것을 맡겨라"
오늘은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축일입니다. 신부님은 충청도 솔뫼에서 1821년 출생하여, 15세가 되던 1836년 멀리 마카오로 유학해 1845년 8월 17일 서품 되어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사제가 되신 분입니다. 서품된 후 약 8개월 동안 활동하시다 체포되어 서품 된 지 1년 1개월이란 짧은 기간 동안 사제로 계시다가 만 25세의 짧은 생애를 사신 분입니다.
이러한 신부님의 생애를 생각할 때 필자의 머리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열정」과 「철저한 투신」이란 두 단어입니다.
물론 「열정」이라는 말과 「철저한 투신」이라는 말은 때로는 비인간적으로 들릴 수도 있고 항상 선일 수만은 없는 단어임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 단어들이 지향하는 바가 「공동선」이나 인류가 추구해야할 「보편선」 또는 「하느님」을 지향할 때 이러한 단어들은 참으로 가치있는 말이 됩니다.
그러면 왜 우리는 이러한 가치 있는 단어들을 살지 못할까요? 아마도 자신의 욕망과 게으름, 그리고 주위의 다른 사람들의 삶과 자신의 삶을 비교하고자 하는 마음과 내 안의 유혹과 타협하고자 하는 마음 때문일 것입니다.
김대건 신부님도 마지막까지 신부님이 선택한 길을 걷지 못하게 하는 많은 갈등들을 경험하였습니다.
혹독하게 가해지는 육체적 고문이 그것일 수 있고, 신부님에게 당근으로 주어지는 세상의 재물과 권력도 그것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생명이 있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본능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욕구가 그것이요,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떠오르는 의심과 갈등도 또 하나의 유혹이었을 것입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의 저자 신 영복씨도 이런 말을 합니다. 고문보다도 침묵과 내면의 갈등이 더 무서웠다고. 아마 신부님도 감옥 안에서 이러한 내면으로부터 틈새를 비집고 올라오는 인간적이고 본능적인 유혹은 쉽지만은 않은 이끌림이었을 것입니다.
이 모든 유혹들은 하나같이 견디기 힘든 유혹이었고, 조금만 한눈을 판다면 넘어질 수밖에 없었던 너무나 무거운 것들이었지만 신부님은 그 모든 것을 이겨냅니다.
그 힘은 신부님만이 가졌던 주님께 대한 열정과 철저하고도 타협 없는 투신의 정신, 그리고 오늘 복음 말씀처럼 걱정하거나 두려워함 없이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신앙의 힘이 적절히 조화된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유혹은 마성을 지니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무슨 의미인가 하면 유혹이라는 것은 참으로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유혹과 대화를 시작하면 이 유혹에서 당당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의미입니다. 때문에 우리가 유혹을 이기기 위해선 단호한 거절 이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고 어떤 식으로든 그 유혹과 대화를 시작하면 대부분은 유혹에 넘어 갈 수밖에 없는 것이 보통 평범한 인간들의 모습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유혹을 이겨 나가기 위해서 무엇보다 필요한 자세가 김 신부님과 같은 자세일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김 신부님처럼 자신의 길에 대해 열정을 가지고 타협 없는 신앙만이 유혹을 이겨 나갈 수 있는 방법입니다.
물론 이러한 삶은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삶이 결실을 맺기 위해서는 매일의 삶에서 연습과 실습 그리고 실패를 통한 자기반성에서 이루어지는 일이지만 말입니다.
김대건 신부님을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성인으로 모시는 것도 어쩌면 오늘날 이 땅의 사제들이 사제다운 삶을 살아가는데 가장 근본적인 것이 바로 신부님이 가졌던 이러한 정신이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사실 현대는 김대건 신부님이 사셨던 시대의 국가 권력처럼 직접적으로 하느님을 방해하는 방해물들은 없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아이러니 한 사실은 오늘날 하느님의 길을 방해하는 적들은 그 어느 시대보다 더 교묘해졌다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아름다움과 선의 모습을 띠기도 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인간적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기도 하고 때로는 과학과 학문의 이름을 통해 하느님의 길을 방해합니다. 그러기에 자칫하면 무엇이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인지 구분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시대가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입니다.
그러기에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김 신부님의 열정과 투신을 본받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하느님의 길을 방해하는 오늘의 장애물들을 구별할 수 있는 눈이 필요한 것이고 이와 더불어 자신이 선택한 가치에 대한 때로는 맹목적이다 할 만큼 철저한 투신이 우리가 가져야 할 신앙의 자세가 아니겠는가 생각해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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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 또 다른 순교
-양승국신부-
아버지와 사별, 어머니의 재가로 생이별 끝에 보호시설에 입소한 어린 형제가 있었습니다. 그나마 형제가 한 시설에 있다는 것이 큰 위안이었는데,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인해 형제는 또 다시 떨어져야만 했습니다. 산전수전 다 겪고, 우여곡절 끝에 저희 집에 온 동생은 눈만 떴다 하면 형 걱정이었습니다. 자신은 여기서 그럭저럭 지내는데, 형을 이리로 데리고 오면 안 되겠냐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동생의 간절한 기도 덕분인지 얼마 전 극적으로 소원이 이루어졌습니다. 동생 소원이 이루어진 날, '남북이산가족 상봉 저리 가라'였습니다. 동생은 얼마나 극진히 형을 챙기는지 모릅니다. 식사 시간에도 형을 자기 바로 옆자리에 앉게 하고는, 이것저것 반찬을 집어 형 밥숟가락에 얹어주며 "형, 천천히 꼭꼭 씹어서 먹어!"라고 말했습니다.
참으로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순간이었습니다. 형제가 다시 만나 혈육의 정을 나누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얼마나 마음이 짠해왔는지 모릅니다. 그 누군가가 아무리 극진한 사랑을 쏟아붓는다 하더라도 부모 사랑에 비할 수 있겠습니까? 저 어린 것들이 부모없이 한평생 고생고생하며 살아갈 것을 생각하니 한숨부터 나왔습니다.
그렇지만 애써 슬픔을 지우고, 눈물을 감추며, 활짝 웃으며 그렇게 세상을 견뎌나가는 아이들 모습을 보면서, 지나친 논리 비약일지 모르겠습니다만, 이 아이들이 저보다 훨씬 더 낫다는 생각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고달프고 우울한 현실과 잘 맞서고 있는 이 아이들은 이 시대, 또 다른 순교자라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렇게 열악한 상황에서도 아이들 얼굴을 해맑습니다. 얼마나 싹싹한지 모릅니다. 만나는 사람들을 얼마나 살갑게 대하는지, 그래서 어른들을 얼마나 기쁘게 해주는지 모릅니다.
오늘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대축일입니다. 신부님께서 직접 쓰셨던 서한집을 영적독서로 읽으면서 그분 생애가 인간적 눈으로 볼 때 얼마나 신산(辛酸)했는지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 오랜 사제 양성기간을 마치고 그토록 학수고대했던 사제의 꿈을 이룬 김대건 신부님의 귀향길은 금의환향의 꽃길이 아니라, 끔찍한 옥살이와 서슬 퍼런 칼날만이 기다리고 있는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혹독한 추위, 거센 풍랑, 탈진과 굶주림을 겨우 겨우 이겨내며 김대건 신부님은 몇번이나 조선 입국을 위한 탐색여행을 시도했습니다. 각고의 노력 끝에 조선에 입국한 신부님께 어찌 부모님 소식이 궁금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들려오는 소식은 정녕 안타까워 발을 동동 구르게 할 소식이었습니다. 이미 부친은 참수당하셨고, 모친은 의탁할 곳조차 없어 이곳저곳 떠도는 부랑인 신세가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눈앞이 캄캄해지는 소식, 가슴 미어지는 소식 앞에 김대건 신부님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큰 뜻을 품은 신부님이셨기에 목자 없이 방황하는 조선의 양떼들을 위해 다시금 훌훌 털고 일어서십니다. 다가오는 죽음과도 같은 현실을 기꺼이 직면하십니다.
이 세상에 두발을 딛고 서 있었지만, 이미 하느님 나라를 살고 계셨던 분, 죽음 그 너머에 있는 부활을 미리 내다보셨던 분, 절망 가운데서도 환한 얼굴로 희망을 바라보고 계셨던 분, 그래서 죽음과도 같은 암담한 현실 앞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기쁘게 자신의 길을 걸어갔던 김대건 신부님이셨습니다.
매일 다가오는 암담한 현실과 끝도 없는 시련을 참아내는 일, 나 자신의 비참함을 기꺼이 견뎌내는 일, 신앙의 눈으로 그 열악한 현실과 똑바로 직면하는 일, 아무리 주어진 상황이 어려워도 긍정적으로 마음먹는 일, 고통 가운데서도 기뻐하는 일은 이 시대 또 다른 순교의 얼굴입니다.
처형당하기 직전 쓰신 유언과도 같은 옥중 서한의 말미 부분이 이번 한 주간 우리들 삶의 양식이 되면 좋겠습니다.
"공경하올 신부님들, 안녕히 계십시오. 머지않아 천국에서 영원하신 아버지 하느님 대전에서 다시 만나 뵙기를 바랍니다. 저는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분의 이름 때문에 묶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형벌을 끝까지 이겨낼 힘을 저에게 주실 것을 기대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묶인 조선의 교황 파견 선교사 김 안드레아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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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자의 피는 그리스도인의 씨앗
-배광하신부-
사제의 길
일전에 모 방송국에서 제작한 <차마고도>라는 특집 방송을 시청한 적이 있었습니다. 차와 말을 바꾸기 위한 상인들의 고단하고 위험한 여행은 실로 감동 이상이었습니다.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죽음을 무릅쓴 여행은 인간 의지의 장한 승리를 보는 듯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172년 전인 1836년 조선의 세 소년(김대건 안드레아, 최양업 토마스, 최방제 프란치스코 사베리오)이 살을 에는 듯한 추위 속에 변문을 넘어 중국 대륙을 횡단합니다. 약 6개월에 걸친 대장정의 길을 15세의 어린 소년들이 걸어간 것입니다. 가족의 부양이 아닌 사제의 길을 걷기 위하여 그 모진 여행을 감행한 것입니다.
1836년 12월 겨울에 출발하여 이듬해 1837년 6월 초여름에 도착하는 죽음을 무릅 쓴 사제가 되기 위한 길, 순교의 길을 걸어간 것입니다. 중국 마카오 신학교에 도착하여서도 사제의 길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음식과 언어, 기후와 풍습 등이 낯선 곳에서 신학 수업을 받아야 했고, 그토록 사랑했던 동료 최방제의 죽음을 지켜보아야 했던 슬픔이 있었고, 마카오 민란으로, 필리핀의 마닐라로 피신하여 그곳에서 공부를 계속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모든 시간과 세월은 그냥 흘러간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조국의 교우들을 위한 피나는 노력의 세월이었던 것입니다.
이승의 시간으로는 너무도 짧았던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사제생활, 1845년 8월 17일 사제수품, 이듬해 1846년 9월 16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시기까지 1년 1개월간의 짧은 사제생활을 위하여 바치신 10년의 세월은 가슴 절절한 아픔이 있는 세월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교우들의 신앙을 위해 선교사 영입 운동, 스승 신부님과 주교님들께 조선 천주교회를 위하여 보낸 많은 서신들 속에 담긴 복음선포의 노력, 후배 신학생들을 위한 애정과 헌신 등, 그리고 많은 순교자들을 위한 조사와 보고는 이 땅에 신앙의 초석을 쌓기 위한 황금 같은 세월이었습니다.
단 하루를 살아도 그리스도 예수님을 닮은 사제, 희생 제사의 제물이 될 사제의 삶을 택하신 거룩한 삶이었던 것입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주님 사랑과 교우들 사랑은 마치 아가서의 말씀을 꼭 빼어 닮았습니다.
“사랑은 죽음처럼 강하고 정열은 저승처럼 억센 것, 그 열기는 불의 열기 더할 나위 없이 격렬한 불길이랍니다. 큰 물도 사랑을 끌 수 없고 강물도 휩쓸어 가지 못한답니다”(아가 8, 6~7).
순교의 길
1984년 5월 6일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을 비롯한 이 땅의 103위 시성식 강론에서 이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치명자들의 죽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닮은 것은, 그들의 죽음도 새 생명의 시초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또 이 새 생명은 그리스도를 위해 죽음을 당한 그들에게서만 나타난 것이 아니라 남에게까지 전해졌습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와 증인들의 산 공동체로서의 교회 안에 누룩이 된 것입니다. ‘치명자의 피는 그리스도인의 씨앗’이라는 초창기 그리스도인들의 격언이 우리 눈앞에서 확인된 것입니다.”
제3대 조선 대목구장을 지낸 페레올 주교님의 서한에는 마지막 순교 장면이 생생하게 나옵니다. 새남터의 군문효수 형장에서 김대건 신부님은 큰 소리로 외치십니다.
“‘나는 이제 마지막 시간을 맞이하였으니 여러분은 내 말을 똑똑히 들으십시오. 내가 외국인들과 교섭을 한 것은 내 종교를 위해서였고 내 천주를 위해서였습니다. 나는 천주를 위하여 죽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내게 시작되려고 합니다. 여러분이 죽은 뒤에 행복하기를 원하면 천주교를 믿으십시오. 천주께서는 당신을 무시한 자들에게는 영원한 벌을 주시는 까닭입니다.’
이런 말을 한 후 옷을 반쯤 벗기었다. 관례에 따라 그의 양쪽 귀를 화살로 뚫고 화살을 그대로 매달아 두고 얼굴에 물을 뿌리고 그 위에다 회를 한줌 뿌렸다. 그런 다음 두 사람이 그의 겨드랑이에 몽둥이들을 꿰고 그를 어깨에 맨 채 그 원 둘레로 빨리 세 번을 돌았다.
그런 다음 그의 무릎을 꿇리고 머리채를 새끼로 매어 말뚝 대신 꽃아 놓은 창 자루에 뚫린 구멍에 꿰어 반대쪽에서 그 끝을 잡아당겨 머리를 쳐들게 하였다. 칼을 든 군사 12명이 싸움하는 흉내를 내면서 김대건 안드레아의 주위를 빙빙 돌며 제각기 순교자의 목을 쳤다. 머리가 여덟 번째 칼을 맞고야 떨어졌다.”
김대건 신부님은 1846년 6월 5일 체포되시고도 순교 때까지 40여 차례에 걸쳐 문초를 받으셨습니다. 그럼에도 신앙을 지키기 위한 순교의 길을 용감히 걸으셨습니다. 그분 순교의 피가 이 땅에 흘러 소중한 신앙의 꽃이 피어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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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풀밭은 여전히 푸릅니까?
-김영진신부-
시카고대학 총장이었던 하퍼 박사가 1903년 입학생들에게 행한 연설은, 가장 짧은 명연설로 유명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은 지금부터 어른의 길로 출발합니다. 인간은 25세가 되면 무엇이 정말 중요한지를 깨달아야 하며, 30세에는 자기 자신의 인생철학이 확립되어야 합니다. 성서에 나오는 사도 바오로는 20대 초반에 무엇이 중요한지를 깨달아, 자신을 살아있는 제물로 바치기로 결정했고, 자신의 철학대로 일생을 살았습니다." 이 짧은 연설이, 젊은 학생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하퍼 박사의 말을 성 김대건 신부께서 들으셨다면 “인생은 한 순간이 소중한 것인데, 어찌 중요한 것을 깨닫는데 25년이나 걸려야 하고, 자기 인생철학에 대한 확립을 30세까지 기다려야 한단 말이오"하고 한 말씀 하셨을 것이다.
왜냐하면 김대건 신부는 15세 나이에 무엇이 중요한지를 깨달아 신학공부를 하러 만주와 중국 대륙을 거쳐 마카오, 필리핀 등에서 수학하였으며, 25세의 나이에 자기 인생철학의 결론을 순교라는 죽음으로써 맺으신 분이기 때문이다.
나는 10대 후반 아니 20대까지만 해도 나이 사십을 넘고, 오십, 육십이 된 이들을 보면, ‘저분들은 저 나이가 들도록 무엇을 했나? 아무것도 이룬 것 없이 어찌 세월들을 마냥 흘려 보냈나!'하는 생각에, ‘나는 그러지 말아야지, 잘못하면 나도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저렇게 될지도 몰라'하며, 새 결심을 하곤 했다.
그리고 40세가 되기 전까지는 어디 가서 강론할 기회가 되면 ‘인생 나이 40이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한다'는 링컨 대통령의 말을 되새기며, 잘난 척 떠들어대기도 수없이 했다. 그러나 이제 젊은 시절 내가 손가락질하던 나이에 들고 보니 ‘아! 이래서 인생이 어려운 것이구나'하는 것을 느끼고 배운다.
정말 무엇이 중요한지 깨달을 때
젊은 시절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배웠고, 생각했고, 결심했으면서도 세파에 시달리며 생활하다보니, 그 옛날 생각했고 결심했던 고귀한 목적과 굵은 인생관은 차차 가늘어져, 이런저런 일에 빠져나가고, 그럴싸한 변명으로 현실과 타협하며, 어느덧 입에 풀칠이나 하면서 그럭저럭 적당히 살아가는 인생으로 변해가고 있음을 발견한다.
소신학교 시절, 손과 발은 물론 귀에까지 동상이 걸려 진물이 흐를 때도, 눈을 지그시 감고 성인 신부가 되어 보자고 마음먹었던 결심들이, 이제는 나의 우스꽝스러운 추억의 멜로디로만 남아 있음을 발견하면서도 놀라워하지 않는다.
성인이 되어 보겠다는 생각, 용감한 순교자의 삶을 살아 보겠다는 결심이 참으로 많이 무디어졌으며 , 찾아볼 수 얼을 만큼 가늘어져 있는데도, 느헤미야 예언자처럼 시시해지고 무뎌진 영혼을 일으켜 세우려 하지 않는다.
이 고민이 촌구석에서 배운지도 듣지도 못하는 부족한 나 하나만의 고민일까?
신앙을 손가락에 끼우는 반지처럼, 눈에 붙이는 닭털이나 귓불에 매달은 굴렁쇠처럼, 액세서리 취급하여 마음대로 끼웠다 뺏다 해도 되는 듯 착각하는 신앙인이, 어찌 나 하나 뿐이겠느냐는 것이다. 우리 교구 사제연수회 때, 가톨릭 신앙생활연구소에서 발표한 통계를 보니, 신자들의 주일미사 참례율이 전체 교우 숫자의 30% 전후이고, 냉담자 및 행방불명된 이들이 30전후이며, 교적은 성당에 두고 간신히 냉담자, 행불자 신세를 면하고 있는 이가 30% 전후라 한다.
나의 신앙은 어디에 서 있는가
나는 어느 부류에 속하는가 하는 것을 따져보는 소극적인 생각을 갖기 이전에, 가져야 될 자세가 하나 있다. 신앙은 무서운 파도에 자신을 내던지고 사나운 맹수의 이빨 앞에 자신의 몸뚱이를 내놓으며, 모진 박해의 칼날 아래 자신의 목을 들이대는 강인하고 끈질긴 결단을 요구하는 것인데, 지금 그대와 나의 신앙은 어디에서 있는가 하는 것을 보는 것이다,
박해가 많았던 아프리카에서는, 교우들 사이에 사용되던 암호 하나가 있었는데 그것은 ‘당신의 풀밭은 여전히 푸릅니까?’ 하는 것이었다 한다. 이 말은 교우들이 박해 때문에 숲 속에 숨어서 기도를 드리곤 하였는데 '당신은 박해 속에서도 꿋꿋하게 숲 속에 숨어서 하는 기도회에 열심히 다니고 있습니까? 하는 뜻이란다. 이 암호인사에서, 우리는 귀중한 신앙생활의 뜻을 배울 수 있지 않겠는가! '당신의 풀밭은 여전히 푸릅니까?’ 하는 질문을 매순간 자신에게 던지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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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는 사랑의 증거이다.
-유영봉 몬시뇰-
묵상 : "세상에 한번 나서 우리를 내신 임자를 알지 못하면 태어난 보람이 무엇인가?" 신부님의 말씀이다. ‘순교'의 본 의미는 ’증거'이다. 성인은 하느님을 우리의 임자로, 주님으로 믿었기에 그분께 대한 믿음과 사랑, 생명을 바쳐 증거하였다.
순교, 바보들의 행진인가?
어떤 본당에서 순교자 성월을 맞아 중?고등부 학생들을 위한 순교 성인들에 대한 특별강론이 있었다, 본당신부님은 김대건 성인의 생애를 설명해 갔다. '1821.8.21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에서 출생, 1836 마카오로 유학, 1845.8.17 한국 최초의 사제로 서품, 선교사 입국의 길을 트려다 1846,6.5 순위도에서 체포, 서양학문을 익힌 최초의 한국인, 외국어(라틴어, 불어, 영어, 중국어)에 능통, 조정에서는 그 재주와 인품이 아까워 죽이지 않으려고 회유도 했으나, 끝내 신앙을 지킴, 1846.9.16 서품된 지 1년 1개월만에 25세의 젊은 나이로 새남터에서, 칼 아래 순교' 강론은 차츰 열기를 더해갔다.
그런데 갑자기 고1 학생이 손을 번쩍 돌고는, "신부님, 저는 솔직히 김대건 신부님 말씀을 들을 때마다 속이 답답합니다, 참으로 어렵게 사제가 되어가지고, 사목자라고는 아무도 없는데 신부된 지 1년만에 꼭 그렇게 순교를 해야 했는지? 배교(背敎)하는 척하고 교회를 위해 열심히 오랫동안 일하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요?" 하였다, 이러다 보니 '순교자 현양이 아니라, '순교자 규탄대회' 같은 분위기가 되었다고 한다.
X(신)세대다운 약삭빠르고 영악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모르긴 해도, 많은 사람들의 순교자에 대한 생각이 이 학생들의 태도와 큰 차이가 없을지도 모른다, 요즘 여자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신랑감은 ‘돈 많고 명(命) 짧은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철저하게 이해 타산적이고 현실주의적인 사람들에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하느님을 위해 생명을 바친 순교자들의 무리야말로 ’바보들의 행진'일 수도 있을 것이다,
김대건 신부님은 참 믿음의 소유자였다.
신부님은 “세상에 한번 나서 우리를 내신 임자를 알지 못하면 태어난 보람이 무엇인가? 그를 알아보았으되 배신하면 차라리 이 세상에 아니 난 것만 못하다"하였다, ‘임자'라는 신부님의 표현은, 우리 조상들이 하느님을 ’대군대부(大君大父)'라고 불렀던 것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임자'란 '주님'과 같은 뜻으로, 하느님은 인간과 세상만물을 창조하시고 절대권을 가지고 계시므로 만물의 주인이며, 아버지라는 신앙의 고백이다."
“하느님이 우리의 '임자요, 주인'임을 알았다면 그분을 배반할 수 없다"는 것이 김대건 신부님의 움직일 수 없는 믿음이었다. 이 믿음이 바로 25세의 젊은 사제 김대건을 순교의 길로 용감히 나아가게 하였던 것이다.
김대건 신부님은 참 희망과 사랑의 소유자였다
김대건 신부님은 1846년 6월5일 체포된 후 6월21일 서울 포도청에 갇힌 후, 7월19일까지 40여 차례의 심문을 받았다. 신부님은 새남터에서 참수되기 전, 8월29일 페레올 주교와 신자들에게 하직편지를 썼다. "나는 하느님을 위하여 죽으니, 내 앞에는 영원한 생명이 시작될 것입니다. 여러분도 사후(死後)에 영원한 복락을 얻으려면 반드시 그리스도교인이 되십시오."
이 마지막 편지를 보면
김 신부님은 하느님께 대한 확고한 믿음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굳은 희망을 지닌 분이셨음을 알 수 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즈가리야는 죽으면서 "주께서 굽어보시고 갚으시리라"(2역대 24,22)고 외친다. 김 신부님은 이 지상의 삶이 끝나는 그 시점에서 '임자'이신 하느님께서 당신을 믿고 따르기 위한 모든 고통을 갚아주실 것을 확신하셨고, 그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으로 꽉 차있었다. 죽음 앞에서도 흔들림이 없는 믿음과 희망이 아닐 수 없다.
신부님의 '임자'께 대한 믿음은 신자들에게 대한 완전한 헌신과 사랑으로 나타났다,
1844떤 부제품을 받기 전 조선 입국의 길을 뚫기 위해 두만강을 건너고 장백산을 넘으면서 2000리가 넘는 길을 혹한 속에서 헤매야 했다. 그리고 1845떤 항해 경험이 전혀 없는 11명의 신자와 함께 손수 만든 작은 배를 타고, 신부와 주교를 모셔오기 위해 4월30일 제물포를 떠나 6월4일 상해에 도착하기까지 죽음과 맞선 항해를 하셨다. 김 신부님은 참으로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어낸다'는 것을 온 생애를 통해 보여주셨다,
16세에 부모를 떠나 10년 만에 사제가 되셨고, 1년 남짓 사제로 살다가 25세의 젊은 생명을 산 제물로 바치신 김대건 신부님은, 한국 교회의 꽃이며 영광이 아닐 수 없다. 한국의 모든 사제들의 주보인 김 신부님은 사제들을 끊임없이 회개에로 부르시는 은총의 샘이라 할 수 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님, 저희 사제들을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묵상 : 선조들은 스스로 복음의 진리를 깨달아 신앙의 길을 찾았다. 그리고 평신도들의 힘으로 교회를 세우고 키우며 지켰다. 자신의 인생을 걸만한 확신이 없는 우리의 신앙생활은 신앙생활이라기보다 취미생활이 아닌가? 반성해 볼 일이다.
스스로 깨달은 진리
18세기 주자학(朱子學)에 젖어 있던 조선사회는 갖가지 병폐와 한계에 봉착하고 있었다. 새로운 학문과 사조를 갈망하던 학자들은 중국으로부터 들어오는 천주실의(天主實義), 칠극(七克) 등의 서적들을 통해 신앙에 눈뜨게 되었고, 단순히 학문의 차원에서 끝나지 않고 그 가르침을 따라 살기 시작했던 것이다. 초이레, 열 나흘, 스무-하루 등 날짜를 정해놓고, 그 날은 육신 일을 파(罷)하고. 상제(上帝)이신 하느님을 섬기며 기도하고, 이웃에 봉사하며 나름대로 주일을 지키며 살았다, 그들은 교회의 계명을 지키며, 수계생활(守誡生活)에 전념하였다.
'하느님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교회의 가르침은 반상(班常)의 신분 차이가 뚜렷하던 당시의 상황에서는 가슴 벅찬 깨달음이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1784떤 이승훈이 영세하고, 1836떤 프랑스 선교사들이 입국할 때까지 50여년을 중국인 사제 두분이 잠시 사목했을 뿐, 평신도들이 스스로 교회를 일으키고 박해 중에도 신앙을 지켜나갔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순교는 믿음의 증거다
'순교자(martyr)'는 원래 '증거자'란 뜻이다. 자신의 생명을 바쳐 하느님을 증거하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100여년 동안 1만여명의 순교자들이 신앙을 위해 생명을 바쳤다,
우리나라의 두번째 사제인 최양업(토마스)신부의 부친 최영환(프란치스코)은 1839년 7월 아들을 유학시킨 사학죄인으로 체포되어 배교를 강요당하며, 100대가 넘는 곤장을 두번 이상 맞고, 고문을 당한 끝에 장독(丈毒)으로 9윌12일 돌아가셨다. 그 어머니 이성례(마리아)는 최 신부의 동생들인 5명의 자녀들과 함께 옥에 갇혔다.
12세인 둘째 최희정(야고보), 셋째 최선정(안드레아), 넷째 최우정(바실리오), 다섯째 최신정(델네시포로)은 나이가 어려 석방되었고, 세 살짜리 젖먹이(최 스테파노)만 옥에 남았다. 그런데 굶주림과 고문으로 몸이 쇠약해지자 유도(乳道)가 막혀 젖이 나지 않아, 젖먹이가 어머니 무릎에서 굶어죽기에 이르렀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자기 자녀가 무릎 위에서 굶어죽자, 이 마리아는 한때 관장에게 배교한다는 말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수감중인 여러 교우들의 위로와 격려로 다시금 순교의 뜻을 굳힐 수 있었다,
옥에서 풀려 나온 둘째 ‘최 야고보'는 동생들과 함께 푼푼이 동냥한 돈으로 음식을 마련하여 옥중의 어머니를 면회하고, 동생들을 잘 돌볼 것을 약속하며 격려하였다. 순교의 때가 가까이 오자, 어머니 목을 벨 희광이를 찾아가 구걸한 돈을 건네고, 어머니의 모습을 상세히 일러주면서 ’칼을 잘 갈아 어머니가 고통을 많이 받지 않고 죽을 수 있도록' 한칼에 목을 베어주도록 부탁하였다.
이렇게 순교자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혹독한 고통 가운데서도 자신들이 믿는 하느님을 배반하지 않기 위해 생명을 바쳤던 것이다.
취미생활인가? 신앙생활인가?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내놓을 각오로 신앙생활을 하였던 선조들에 비하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신앙생활이라기보다 차라리 취미생활이라고 하는 것이 더 알맞은 표현일 것이다. 우리 시대엔 똑똑한 사람은 많지만,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위해 생명을 바칠 수 있는, 자기 진리나 신념을 지닌 사람을 보기는 힘들다. 우리 사회는 어떤가? 이권에 눈먼 철새 정치인, 정권이 바뀔 때마다 권력자를 찬양하기에 바쁜 매스컴, 실직한 남편과 자녀들을 미련 없이 버리고 자기 행복을 찾아 떠나는 여자들이 보여주는 세태는, 신앙을 위해 칼 앞에 목을 내민 순교자들의 대열을 '바보들의 행진'으로 비웃기에 충분하다.
만일 우리나라에 ‘천주교 신자는 자녀를 대학에 보낼 수 없다'든가, ’국가 공무원이 될 수 없다'는 법이라도 있다면, 그래도 성당에 나올 신자가 몇 명이나 될까?
우리와 순교선열들과의 근본 차이는 무엇인가?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살아 계심을 믿는 믿음이 없고, 부활한 예수가 들어간 그 세계, 즉 죽음 후의 영원한 생명을 믿는 믿음도 없다.
이 세상이 전부인 이들이 어떻게 생명을 바칠 수 있겠는가? 구제금융 시기를 맞아 빈부격차가 점점 극심해지고 있는 현실이다,
신앙의 선조들이 순교자들의 자녀들을 자기 친자식처럼 돌보며 어려움을 함께 나누었듯이, 실직과 굶주림으로 고통받는 이웃의 아픔을, 내일처럼 지극 정성으로 함께 나누어보자. 그 안에서 하느님 현존을 체험토록 하자, 그리하여 죽음도 두렵지 않는 참 믿음을 가꾸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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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끊임없이 파견되어야 한다.
-허영엽신부-
오늘은 최초의 한국인 사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를 경축하는 날이다. 김대건 신부는 1821년 8월 21일 충청도 솔뫼에서 태어나 1836년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중국 마카오로 건너가게 된다. 드디어 1845년 8월 17일에 사제로 서품되어 그 이듬해 6월 귀국하여 사목 활동을 하다가 관가에 잡혀 1846년 10월 16일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김대건 신부는 짧은 인생 동안 하느님께 대한 전적인 봉헌으로 민족의 구원을 위해 자신의 삶을 불태웠다. 김대건 신부는 파견된 사목자 그리고 예언자였다. 복음의 불모지에서 스승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전생애를 송두리째 바쳤던 것이다.
교회의 존재 목적인 선교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이(마태 28,19) 바로 교회의 사명이다. 따라서 교회는 끊임없이 파견되어야 한다.
마태오 복음의 이른바 선교적 담화문은 이렇듯 ‘말씀’과 ‘행위’로 드러난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한 권위가 완성되는 것으로 소개된다. 예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실제적으로 다가온 하느님 나라의 실재(實在)인 것이다. 여기서(마태오 복음에서) ‘기적’은 인간 역사 안에서 끊임없이 역사(役事)하시는 예수님과 모든 삶을 투신하는 신앙의 행위 속에서 주님을 맞아들이고 예수님을 주님으로서 인식하는 인간의 만남이다.
따라서 기적이 표명하고자 하는 것은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증거가 아니라. 사도 바오로가 기술하듯, 그것을 통해 나타나는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디도 3,4 참조)이다. 그리스도에 의한 파견, 나아가 ‘선교’는 목자 없는 양들처럼 지쳐서 풀이 죽어 있는 군중을 보시고 측은히 여기신(마태 9,36 참조) 그리스도의 마음에서 출발된다.
마태오 복음에서 제자들의 파견 이야기는 매우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제자들의 사명을 보여 주는 동시에 무엇보다도 우선 예수님의 사명을 강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마르코(6,12-13 참조)나 루가(9,6; 10,1 참조)와는 달리 마태오에서는 선교 사명을 받은 제자들이 선교를 위해 떠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여기서 선교를 위해 떠나는 것은 제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이시다(11,1 참조).
세례를 받고 성체성사에 참여하는 모든 신앙인은 모두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약속한 사람들이다. 따라서 그 옛날 열두 제자에게 부여되었던 예언자적 사명은 현대의 신앙인인 우리에게도 똑같이 부여된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께 예언직의 사명을 받은 것이다. 이에 따라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능력에 따라 복음을 전하고, 복음의 빛으로 자신의 주위를 밝히며 증거자의 생활을 해야 한다. 이러한 예언자적 임무가 바로 교회가 그 본질로 삼는 ‘선교’의 임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 하나가 있다.
복음적 생활의 증거만으로 그리스도인의 예언자적 임무는 완성될 수 없다. 아무리 훌륭한 증거라 하더라도 다른 이들에게 설명되고 납득되지 못하면 온전한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 “여러분이 간직하고 있는 희망에 대해서 설명을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라도 답변할 수 있도록 준비해 두십시오.”(1베드 3,15)라고 하는 사도 베드로의 말처럼 생활의 증거로써 선포된 ‘기쁜 소식’은 생명의 말씀이 주는 빛으로 그 의미가 설명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 말씀은 매순간 예수님의 뜻을 선택해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행위와 결단을 필요로 한다. 말씀의 선포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부분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교 신자는 선교를 위해서도 성서 말씀에 친숙해야 한다. 선교는 행동뿐 아니라 말로도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예언자적 임무는 충실한 그리스도인이 시대의 징표를 분별하고 해석하며, 공동체의 참된 평화를 위해 모험을 무릅쓰고 결단을 내리게 한다. 예언자의 삶을 살아야 하는 그리스도인은 비겁하고 불의한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스승 예수님과 같이 바로 오늘의 역사적, 정치적, 종교적 일상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모든 불의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는 예언자의 눈으로 오늘의 불의와 부정을 비판하고 고발하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이 ‘공허하고 타협적인’ 현상 유지의 평화를 권유하고 확산시킨다면 그는 거짓 예언자일 것이다(예레 6,13-14 참조).
예언자의 메시지는 심판이고 고발인 동시에 희망이고 약속이다. 그리스도인은 현실이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울지라도 좌절하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며 이웃에게 그것을 전하는 사람이다.
김대건 신부의 축일을 보내면서 우리의 예언자적 소명을 다시 한번 묵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과연 예언자로서의 길을 충실히 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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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미리내
-이기양신부-
1845년 8월 17일, 상하이해 근교에 있는 교우촌 진쨔샹에서 마침내 신자들이 기도와 눈물로 고대하던 한국인 최초 사제가 탄생했습니다. 바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입니다.
1846년 9월 16일, 한강변 백사장 새남터에서 한국인 최초 사제는 수품된 지 1년여 만에 대역 죄인이 되어 처형됩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 대신 눈에 보이는 사목자에게 희망을 가졌던 박해 시대 신자들에게 이 사건은 얼마나 큰 시련이었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살아 계시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는가.' 많은 사람들이 통곡하며 원망했을 것이고, 세상 사람들의 눈에 김대건 신부의 죽음은 그들이 믿는 하느님이란 것이 헛것이었음을 드러내는 표지처럼 보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렇게 큰 비극적 시련 앞에서도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크게 동요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극한 시련 중에도 김대건 신부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관원들에게 술을 사주고 잠들게 한 뒤에 시신을 파내어 등에 업고 150리 험한 산길만을 통과하며 자기 고향인 미리내에 안장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이민식 빈첸시오 형제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이치가 그렇듯이 이렇게 헌신적인 신자들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잘 아는 서울의 '삼성산 성지'는 앵베르 범 주교님과 모방 나 신부님, 샤스탕 정 신부님의 유해가 묻혔던 곳입니다. 우리나라 초대교회에 없어서는 안 되었던 이 분들은 김순성 요한이라는 한 신자의 밀고로 붙잡혀서 모진 박해 끝에 처형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김순성 요한은 그밖에도 200여 명이나 되는 신자들을 밀고하여 순교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을 증언하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대다수 신자들 사이에도 밀고자들이 끼어 있어서 더욱 혼란과 불신으로 한치 앞을 예측 할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되지만 그 모진 박해 속에서도 훌륭한 사목자와 헌신적인 신자들이 있었기에 신자들은 늘어나고 교회는 발전을 거듭했습니다.
한국인 최초의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는 10년 공부의 꿈도 피워보지 못하고 안타깝게 26살의 젊은 나이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태어나신 솔뫼, 그분이 돌아가신 새남터, 그분이 묻히신 미리내는 모두 거룩한 성지가 되었고, 지금도 그분의 신앙을 본받기 위해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고 있습니다. 김대건 신부는 1925년 7월 5일 복자 반열에 올랐고, 1949년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로 선포됐으며,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됐습니다.
한국천주교회는 100여 년의 박해시기를 은총과 성숙의 시기로 승화 시켰고, 선조들이 보였던 신앙의 모범은 신자들의 마음 안에 영원히 지속될 것입니다.
한 본당의 사목자로 있으면 장맛비를 두드려 맞는 벌판의 나무처럼 은총과 시련의 시기를 고스란히 맞게 됩니다. 오래 전에 보좌신부로 있었던 본당에서의 경험을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신자들 간에 주임신부에 대한 여러 말들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제가 옆에서 지켜봐도 너무 심하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말하기 좋아하는 신자들의 체감이야 훨씬 컸을 것입니다. '신부님께 따지자, 교구청에 투서를 하자' 등등 불만의 목소리가 가라앉지를 않았습니다.
몇몇 사람이 신자들 간에 영향력이 있는 전임 회장에게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앞장서 주길 요청했습니다.
전임 회장께서는 "사제에게 무슨 짓이냐! 우리가 할 일은 신부님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다"고 야단치시며 그들을 돌려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신부님께서 등산을 좋아하시는 것을 아시는 회장님께서는 함께 등산을 하시며 그분과 많은 대화를 하셨습니다. 물론 신부님께서는 많은 아쉬움을 남겼지만 무사히 임기를 마치시고 그 본당을 떠나 다른 본당으로 가셨습니다.
신자들은 사제를 존경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야 신심이 자라고 깊어지며, 사제 역시 하느님의 사람으로 나날이 성화될 것입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이 목숨 바쳐 사제를 지키고 사랑했듯이 우리 역시 그리합시다. 사제들에게는 하느님과 신자들이 생의 모든 것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모든 사제들이 김대건 신부님처럼 하느님과 신자들만을 위해 살아가도록 더욱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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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를 나누다
-박문식신부-
초등학교 3학년과 6학년 두 아들을 둔 아버지가 있었는데 큰아들이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했다. 피를 너무 흘려 살기가 어렵다는 의사의 말에 아버지는 자신의 피를 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아들의 피가 ‘RH-’라는 흔하지 않은 피여서 아버지나 어머니와는 맞지 않았으며 병원에서도 쉽게 구할 수 없었다. 마침 동생의 피가 형과 같아서 어린 동생의 몸에서 피를 뽑아야 할 상황이 되었다. 아버지는 어렵게 말을 꺼냈다. “준식아, 네 형이 죽어간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단다. 내 피를 주고 싶어도 줄 수 없어 안타깝구나. 네가 형에게 피를 좀 줄 수 있겠니? 그러면 형이 살아날 수 있단다.” 한참을 생각하고 아버지와 형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던 준식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침대에 누워 있는 아이에게서 간호사는 피를 뽑았다. “이제 됐다. 일어나거라!” 안쓰럽게 바라보던 아버지의 말에도 가만히 누워만 있었다. “일어나라니까!” “아빠, 나 언제 죽어?”, “뭐야? 네 피를 형에게 주면 너는 죽고 형은 살아나는 줄 알았어?” “응.” 그 대답에 기가 막힌 아버지는 아들을 끌어안고 한참이나 울었다.
“친구들(벗)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사랑은 없다”(요한 15,13).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피를 흘리셨고 순교자들은 주님을 위해 피를 흘렸다. 사랑과 믿음을 증거하기 위해 피를 흘려 죽는 것을 순교(殉敎)라고 한다. 옛 교우들은 치명(致命)이라고도 했는데 하느님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뜻이다.
목숨을 바친다는 것은 모두를 바치는 것이다. 몸과 맘, 재산과 명예, 자신의 재능과 장래의 멋진 계획까지도 사랑하는 사람들과 아끼는 것들, 그리고 자신의 삶과 활동을 기쁘게 바치는 것이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고 주님의 뜻을 따라 살겠다는 약속이며 각오다. 그래서 순교는 사랑의 극치이며 가장 큰 삶의 표현이다. 순교는 신앙행위의 가장 높은 단계이고, 신앙을 증거하는 일 가운데 이만큼 크고 완벽한 것은 없다. 그래서 순교자들을 믿음의 증인들이라고 말한다.
순교는 가장 큰 은혜이다. 하느님의 은총이 모여 무서운 힘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 순교다. 마치 햇빛이 한 곳으로 모이면 뜨거운 열이 생기는 것처럼, 은총의 초점으로 이루어지는 순교는 언제나 장렬하고 우리에게 열렬한 신심을 일깨워 준다.
“이런 군란도 역시 천주의 허락하신 바니 너희 감수 인내하여 위주하고 주께 슬피 빌어 빨리 평안함을 주시기를 기다리라. 나는 하느님을 위해 죽으니 내 앞에는 영원한 생명이 시작할 것이다”(성 김대건 안드레아의 ‘옥중서한’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성인을 기리며 이런 말씀을 하셨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의 순교 신앙을 본받아 이 땅에 정의와 평화가 넘쳐나게 기도하여, 이웃에게 봉사하는 것이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들은 성인의 말씀처럼 피를 나누지는 못하지만, 신앙의 결단에 따라 땀을 흘리는 인내로 이웃과 생명을 나누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생명을 나누는 사람에게 언약하셨다.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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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강지숙-
제자들은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전하기 위해 파견되었습니다(7절). 사람들을 가르치고 그들의 아픔을 치유할(8절) 소명을 받은 제자들입니다. 그들은 목자 없는 양들처럼 이리 떼 가운데 보내집니다(16절). 오늘 복음은 제자들이 장차 당하게 될 고통과 그 고통에 어떻게 맞서야 하는지를 비장한 어조로 당부합니다.
“사람들을 조심하여라.”(17ㄱ절) 세상은 하느님의 계획대로 돌아가 주지 않습니다. 온갖 차원의 불평등과 불의가 주변에 도사리고 있어, 예수님의 일과 제자들의 실천은 저항에 부딪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의 선포는 세상에 엄청난 충격을 불러올 만합니다. 부조리한 세상이 정의와 진리 앞에 발버둥치고 반발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기존 질서를 무너뜨리려 한다고 제자들을 몰아세울 것입니다. 제자들은 공격과 저항을 받습니다. 어디에도 황홀한 환상 같은 것은 없습니다. 제자들은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16절) 이 상황에 맞서야 합니다. 맑은 시야와 깨어 있는 정신으로 자신들의 소명을 인식해야 합니다. 적대자들의 논리에 혹하여 넘어갈 수도 강압에 못 이겨 끌려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의와 진리를 지키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완전한 가르침에 충실히 머무는 길뿐입니다.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17ㄴ절) 예수님이 범죄자로 고발당해 그분을 박해하는 사람들에게 넘겨진 것처럼, 제자들도 똑같은 일을 당할 것입니다. 스물세 명의 유지로 구성된 지방의회에 끌려가 유죄 판결을 받으면 회당에서 매질을 당하게 됩니다. 신명 25,13에 따르면 마흔 번까지 매질할 수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는 서른아홉 대까지만 때립니다. 바오로 사도는 유다인 회당에서 다섯 차례나 서른아홉 대 매질을 당했습니다(2코린 11,24-25). 앞서 예수님께서 참행복을 선언하시면서 암시하신 박해입니다. 그들의 활동이 사람들한테는 범법 행위로 비쳐 죄인들처럼 법정에 끌려가 처벌받을 상황이 올 것입니다.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18절) 제자들은 이러한 박해를 통해 예수님의 운명에 동참하게 됩니다. 유다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불려가 예수님을 증거해야 합니다.
복음을 선포하느라 받는 박해는 복음 선포를 위한 또 하나의 기회입니다. 그들의 ‘죄’는 법정에서 해명되어 모든 사람에게 알려집니다. 벌을 받아 고통을 당하는 것 역시 자신들의 확신을 증언하는 일입니다. 박해는 오히려 주님의 증인으로 서는 길이고 주님과 일치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증언해야 할지 걱정이 앞섭니다. 아무것도 미리 알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19ㄱ절) 주님이 무력해서 박해를 겪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때문에 고난도 겪지만 예수님께 도움도 받습니다.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19ㄴ-20절) 일찍이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비슷한 약속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 이제 가거라. 네가 말할 때 내가 너를 도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가르쳐 주겠다.”(탈출 4,12) 그들은 자기 이름으로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으로 선포하는 것이니, 사람들 앞에 홀로 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영’을 협조자로 약속하셨으므로 그들이 용기를 내기만 한다면 그리스도를 당당히 증언할 수 있습니다. “내 도움과 내 영광이 하느님께 있으며 내 견고한 바위와 피신처가 하느님 안에 있네.”(시편 62,8) 주님은 우리를 위험에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안팎에서 박해의 그림자가 밀려듭니다. 최악의 상황입니다.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21절) 본성적으로 사랑으로 묶여 있어야 할 가정에 파괴와 미움이 자리한다면 이것만큼 가혹한 고통은 없을 것입니다. 이 지경에 이르면 혹시 내가 틀린 것이 아닐까, 이런 바보짓을 그만두고 다른 사람들처럼 살아야 하지 않을까,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을까 등 온갖 상념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결단을 내리기 어렵습니다. 예수님도 혼란과 고독 속에서 죽음 앞에 섰습니다.
평화롭고 조화로운 삶을 포기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22ㄱ절) 그 ‘이름’은 제자들이 입에 달고 다닐 이름이고 그들의 삶에 영감을 불러일으킬 이름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그분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가족들에게 버림받는 고독과 사람들의 증오심까지도 견뎌야 합니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22ㄴ절) 예수님께 대한 충실함으로 미혹되지 않고 끝까지 견뎌야 합니다. 그분께 대한 충실은 그들에게 많은 어려움을 안겨주는 동시에 구원을 보증합니다.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미움을 받지만 그 ‘이름’이 끝까지 그들을 지켜줄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그분처럼 살아갑니다. 그분의 고난에 연대하지 않는 삶은 제자의 삶이 아닙니다. 제자가 되는 것도 교회가 되는 것도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때문에 겪는 시련이 나를 반대한 가족과 이웃을 구원합니다. 꿋꿋이 지킨 의로움은 하늘나라를 앞당깁니다. 예수님이 그 모범이십니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5,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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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나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참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송봉모신부-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기 직전 그들을 준비시키고자 들려 주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이 인간적으로는 너무 어둡고 힘겹게 들립니다. 제자들은 세상을 위해서 생명의 복음을 전할 것인데 정작 세상은 그들을 거부하고 고문하고 죽일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왜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실까요? 오늘 복음 바로 직전에 그 대답이 나옵니다. “이제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은 마치 양을 이리 떼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다”(마태 10,16). 세상은 이리떼가 모여 있는 곳이며 세상은 빛보다는 어둠을 더 사랑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특별히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미사를 봉헌하면서 듣게 되는 복음입니다. 이 복음이 채택된 것은 김대건 성인께서 이 복음의 정신을 그대로 살아가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성인의 다음 편지를 통해서 이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에 내려오사 스스로 헤아릴 수 없는 고난을 참아 받으셨습니다. 그 고난으로써 성교회가 세워졌고, 이 성교회도 십자가와 많은 고난 속에서 발전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박해는 천주께서 주시는 시련입니다. 세속과 마귀를 쳐 이기면 덕과 공적을 쌓을 수 있습니다. 재앙에 겁내지 말고, 용기를 잃지 말고, 천주를 섬기는 데서 물러나지 말고, 오로지 성인들의 자취를 밟아서 성교회의 영광을 늘이고, 주의 충실한 병사이며 참된 시민임을 증명하여 주시오…. 다시 한 마디 하고자 합니다…. 박해는 천주의 허락하심이 없이는 일어나는 게 아닙니다. 하오니 마땅히 천주를 위하여 힘차게 참아 주십시오.”
이 편지를 통해서 우리는 성인께서 온전한 순교의 신앙을 갖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실제적인 질문을 해 보십시다. 요즘 세상에도 예수님의 제자라 해서 박해를 받는 일이 있을까요? 김대건 성인 시절에는 신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엄청난 박해를 받았는데 오늘날도 그러한가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정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닌 주님께 속한 자로서 행위한다면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게 될 것입니다. 주말에 가까운 친구들끼리 모여서 놀러 가는데 성당에 가기 위해서 그 모임에 빠진다면 우리는 즉시 답답하고 분위기 깨는 사람으로 취급을 받을 것입니다. 같은 직종에 종사하는 상인들이 모두 다 저울을 속이는데 우리만 주님의 제자답게 정직하게 장사하려한다면 미움과 박해를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조금만 이 세상의 행동양식이 아니라 주님의 행동양식으로 살려 하면 세상으로부터 미움받을 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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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의 사상
-조욱현 신부-
김대건 신부님의 서간을 보면 하느님을 “임자”로 표현하며, 임자사상을 볼 수 있다.
1. 임자사상
이것은 창조주를 임자라 하였고 이 임자에 대하여 孝愛(효애)를 다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
“세상에 태어나 그 임자를 알아보지 못하면, 이 세상에 난 보람이 없고,
한 번 알아본 후 그를 배신하면 차라리 이 세상에 아니 난 것만 못하다.”
김대건 신부님은 孝愛의 모범을 보이신 분이시며, 끊임없이 하느님 임자에 대한 효애를 가르치셨다.
신부님은 교회의 장 상들에게, 하느님을 대리하는 장상들에게 죽기까지 순명하셨고,
부모에게도 효성을 드렸다.
그래 서 주교님과 친구에게 어머니 우르술라를 부탁하시고 순교의 길을 가셨다.
또한 나라에는 종교의 자유 를 허락할 것과 외국에 대해 문호를 개방하라고 촉구하심으로써
선각자의 구실도 하셨다.
임자사 상은 박해시대의 大君大父思想, 愛主萬有至上的 (대군대부사상, 애주만유지상적) 신심을
대표하며 孝愛 (효애)를 다하라고 강조하셨다.
2. 우리 자신의 임자를 제대로 알고 공경하자
1. 창조주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하셨다.
또한 하느님의 속 성은 사랑이시며, 인간도 하느님의 모상으로서 사랑의 모습으로 창조되었다.
인간은 이제 사랑을 통해 서만이 자신의 새로운 모습, 즉 자신의 본 모습을 되찾고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임자를 잘 알고 제대로 공경하는 것은 창조주의 뜻을 따라 새로운 창조 사업을 하는 것으로써
임자의 말씀을 잘 들으며, 그 말씀 을 실천에 옮기는 것이다.
효도를 드린다는 것은 여러 가지 표현이 있겠으나, 부모님의 마음을 편하고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며,
자식들이 아름답게 사는 모습을 보여드리는 것이다.
2. 영원으로 부터 우리를 초대하시는 분이시다.
예비자 교리 때에 입교의 동기를 물어보면,
1) 종교를 갖는 것 이 갖지 않는 것보다 낳을 것 같고 무엇이나 하나는 믿어야 하겠기에;
2) 죽어서 좋은데 가려고;
3) 집안에 우환이 많아서 이것 좀 고쳐보려고;
4) 신자들의 봉사하는 모습에 감동하여 자신도 그 런 삶으로(상가 돌봄, 환자 방문,
어려운 사람 돌봄 등) 기쁨을 갖기 위하여;
5) 신앙을 갖고 착하 게 살며, 보람 있는 인생을 살려고 입교했다는 동기를 말하고 있다.
이러한 동기는 이제 참된 신앙 으로 바뀌어야 한다.
즉 인간의 근본이 무엇이며, 어떻게 태어났으며, 어디로 가야하며, 어떻게 살아야 할 지
신앙생활을 통해 알게 될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부르신 분이시다.
이제는 우리의 응답만 남아있다.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예정해 놓으시고 인간 의 응답을 기다리시는 분이시다.
그리고 “우리의 아버지”하며 하느님 당신의 가족이 되기를 원하신다.
이 가족에서 영원한 생명을 간직하도록 항상 당신께 돌아오기를, 회개하기를 기다리시고,
여러 가 지 모습으로 당신의 사랑을 드러내신다.
3. 임자께서는 외아들을 주셨다.
인간이 합당한 응 답을 드리지 못하여 당신의 뜻을 거스르고 범한 죄 때문에,
구원을 받지 못하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당 신의 외아들을 보내주신 분이시다.
그래서 십자가와 부활 사건으로 인간에게 구원을 주신 분이시다.
여기서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십자가와 부활 사건으로 구원을 주신 분이시다.
여기에 당신의 외아 들을 제물로 봉헌토록 하신 분이시다.
성자를 통해 하느님 당신의 뜻을 알려주시고, 그 모든 것이 사랑임을,
사랑으로 완성되어 나가는 것임을 알려주셨다. 사랑의 극치인 아들의 죽음을 통해서이다.
오늘 전례의 말씀은 진리와 신앙을 위해 박해와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이 다.
열두 제자들의 파견(마태 10,11-16)에 이어 나오는 이 말씀은 당신을 증언하게 될 사람들이 받을
여러 가지 고통과 역경을 설명하신다.
그러나 그런 박해에 제자들을 그대로 버려두지 않으시고 성령의 도움을 약속하신다.
제1독서의 즈가리야가 우상을 섬기는 왕의 잘못을 지적하고 하느님께 로 회개할 것을 요구하고
하느님의 징벌을 이야기하여 죽임을 당했던 것과 같이, 김대건 신부님은 같은 동족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젊음과 생명을 바친 분이시다.
이것은 바로 그분의 신앙이 었다.
이 신앙은 제2독서에서 보듯이 믿음이 우리의 구원을 보증하는 것이기 때문에
고통을 당하 면서도 기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순교자란 하늘의 가치, 진리를 위하여 현실을 뛰어넘어 자신을 던진 사람들을 말한다.
진실만이 참 평화를 가져온다.
예수님과 같이, 순교자들처럼 죽어가면서도 진실과 이웃을 위한 희생의 삶을 보여줄 때
비로소 평화가 실현되는 것이다.
김대건 신부님 은 인간의 본 모습을 잘 깨닫고, 알고 사랑한 분이시며, 자신의 목숨을 바쳐 사랑한
죽기까지 효애를 드 린 분이시다.
이제 우리는 지혜를 구하도록 하자.
체면 때문에, 손해 보는 것 같아서 못하는 경우 도 많다. 믿음과 열렬한 마음을 구하도록 하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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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건 신부의 믿음과 희망
-최기산 주교-
희광이가 휘두른 칼날 아래로 선혈이 치솟더니 젊은이의 목이 떨어졌다.
한강 새남터 백사장은 어느새 피로 물들고 피를 본 희광이의 눈은 미친 사람처럼 광기가 가득 한 채,
막걸리를 사발로 들이켰다.
목이 떨어진 젊은이의 이름은 김대건이었다.
그의 죄목 은 국법을 어기고 국교인 유교가 아닌 서양종교를 신봉했다는 것이었다.
가여운 젊은이 !
그가 이 시대에 태어났던들 그렇게 참혹하게 세상을 등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세월을 잘못 만난 탓일까 ? 그것 은 아니다.
그는 얼마든지 호의호식할 수도 있었다. 말 한마디만 하면 되었다.
' 나는 하느님을 배 반하오' 이 한마디를 할 수 없었기에 그는 군문효수형을 받았다.
< 생 애 (生涯) >
김대건 신부는 1821년 8월21일 충청도 내포지방 솔뫼에서 태어 났다.
그의 증조부는 김진후였는데 그 지방의 관료로서 남부럽지 않게 살아가고 있었다.
김진후 는 50세에 세례를 받고 열심한 신자가 되고자 관직에서 물러나 오직 신앙생활에만 전념하였다.
그러던 중 1814년 2월20일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될 성싶은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데 이미 할아버지부터 순교자가 되었던 것이다.
김대건 신부의 아버지인 김제준(이냐시오)은 고 우술라와 결혼하여 솔뫼에서 살다가
1839년 9월26일 체포되어 순교했다.
할아버지가 순교하였으니 경제적으로도 가난하 게 살았을 것은 뻔한 일이다.
남편을 잃은 우술라는 아이 김대건을 데리고 경기도 용인의 골배마실이라 는 동네로 이사갔다.
이사라기보다는 친척집에 가서 더부살이를 한 셈인데 천주학쟁이 과부를 누가 좋아 했겠는가 ?
천덕꾸러기로 살아갔을 것이다.
골배마실을 방문한 모방 신부는 15세의 소년 김대건 의 영특함을 알아보고
그를 신학생으로 선택하기로 마음먹었다.
그후 김대건 신부는 최방 제, 최양업과 함께 1837년 6월7일 마카오에 도착하였다.
산설고 물설은 이국 땅에서 어린 학생들은 얼마 나 고향생각을 했을까 ? 음식도 맞지 않았을 것이다.
다음해, 사랑하는 친구 최방제는 병마와 싸우다 먼 저 하늘나라에 들어갔다.
최양업과 김대건이 얼마나 친구를 얼싸안고 울었을까 ?
1844년 오랜 각고 끝에 부제품을 받은 그는 9년의 외국생활의 지친 삶을 잠시 접고
조선으로 돌아와 국내 상황 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국내에 돌아온 기간동안 김대건 신부는 어머니를 만나고자 했으나 그의 어머니 는 거지처럼
떠돌이 생활을 했기에 만날 수가 없었다.
그는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 다음해인 1845년 8월17일 상해 김가항 성당에서 사제로 서품 되었다.
사제가 된 뒤 서둘러 조선에 들어와서 전도 하기 시작했으나, 이 시기에 천주교에 대해
박해가 너무 심했다.
그는 혼자 몸으로는 도저히 성무 집행을 다할 수 없어 중국교회에 선교사 파견을 청하러 가다가
1846년 6월5일 순위도 앞에서 그만 체포 되고 말았다.
그는 여러 외국어와 지리에 대해서도 능통하여 감옥에 있으면서도 지도를 그려주었 다.
이러한 그의 능력을 아까워한 정부는 좋은 집을 주겠다, 높은 지위를 주겠다,
예쁜 부인을 맞 게 하겠다 등등의 회유를 해보았으나 도저히 그의 마음을 바꿀 수 없음을 알고
처형하기로 결심하였다.
김 신부는 그해 9월16일 한강 백사장 지금의 새남터 상당터에서 군문효수라는 형을 받아 처형되 었다.
군문효수란 목을 쳐서 장대 높이 달아놓는 것으로 그것을 보는 이들에게
다시는 천주학을 하 지 못하도록 하는, 소위 본때를 보이는 형 집행이었다.
< 사상(思想) >
그는 죽기 전에 '나의 영원한 생명을 이제 시작합니 다'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그에게는 바오로 사도의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 부입니다'(필립비 1,21)라는 말씀이
언제나 가슴깊이 새겨져 있었다.
그는 주님을 이 세상의 그 무 엇보다도 사랑했다. 그는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주님을 위해 내놓았다.
그가 우리에게 주고 간 교훈은 이 세상은 잠시 지나가지만 하느님 나라는 영원하기에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 있 는 힘을 다하라는 것이다.
< 복음의 메시지 >
오늘 우리 신자들은 김대건 신부를 닮는 사제를 원한다.
세속적인 것에 가치를 두 지 않고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며 주님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제를 원한다.
그런 사제가 나오기 위해 서는 가문의 분위기가 중요하다.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 아버지도 순교하였고 자식을 위해서 거지처럼 살아갔지만
언제나 기도해주었을 어머니의 굳은 믿음이 김대건 신부를 꿋꿋하게 살아갈 수 있게 했 다.
죽어서 백사장에 아무렇게나 묻혀있었을 그를 신도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경비병에게 술을 사주고 잠이 든 뒤 시신을 파내어 미리내까지 메고 갔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믿음이다.
그런 신도 들이 있었기에 김대건 신부같은 훌륭한 사제가 있었을 것이다.
오늘 우리는 교회 안에 많은 문제들이 있음을 직시하고 있다.
신도들은 영적으로 꽉 찬 신부를 원하고 신부들은 그야말로 순종 잘하고 열심한 신자,
헌 신적인 신자를 찾고 있다.
과연 내가 이 시대에 한강 백사장에 묻힌다면 그 누가 썩은 내 육체를 거두어
등에 메고 150리 길을 달려갈 수 있을까 ?
김대건 신부보다 곱절의 인 생을 살았으면서도 그가 깨달았던 심오한 신앙의 의미를
아직도 도반으로서 깨달아 가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울 따름이다.
안도현 시인의 시 중 이런 구절이 있다.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
김대건 신부는 주님께 뜨거운 사랑을 드린 사람이 다.
나는 어떤가 ? 뜨거운 사람인가 ? ♡
![](https://t1.daumcdn.net/cfile/blog/1376D0355009A8941D)
순교자의 마지막 반려자(伴侶者)
-박상대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산상설교(5-7장)와 기적사화(8-9장)에 이어 기록된 파견설교(10장)의 한 부분이다. 예수께서는 먼저 12제자를 선발하시고(2-4절), 그들을 파견하시면서 선교수행지침(5-15절)을 하달하신다. 스승인 예수께서 제자들의 파견을 마치 양들을 이리들 가운데로 보내는 것에 비유하시는 것을 보면(16절), 장차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는 뻔한 일이다. 그렇다고 예수께서 살아 계시는 동안에 일이 나는 것은 아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죽음 이후에 복음 선포자와 신자들이 당하게 될 박해를 미리 예고하시는 것이다. 오늘 복음은 두 가지의 박해예고와 두 가지의 위로약속으로 구성되어 있다. ① 유다인들과 로마제국으로부터의 박해예고(17-18절) - 성령에 의한 증거보장 약속(20절)과, ② 가족의 고발과 세상의 미움예고(21-22절) - 종말론적 구원보장 약속(23절)이 그것이다.
예수님의 죽음을 포함하여 초기 교회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교 신앙은 끊임없이 박해를 받아왔다. 그러나 그 모든 박해의 순간에 신자들은 예수님의 약속에 따라 성령으로 충만하여 복음을 증거 하였으며, 끝까지 참고 견디어 냄으로써 순교의 월계관을 받았다. 2000년 그리스도교회의 역사는 바로 이러한 순교의 역사이다. 그 역사 속에 오늘 우리 한국교회가 머리 숙여 깊이 경축하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이 서 계신다. 그분은 우리 한국교회의 첫 사제이시고 한국의 모든 성직자들의 수호자이시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1846년(병오박해) 9월 16일 새남터 백사장에서 군문 효수형으로 순교하셨다. 김대건 신부님은 1821년 8월 21일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 산 45의 1번지에서 아버지 김이냐시오와 어머니 고울술라의 아들로 태어나 1836년 15세의 나이에 당시 프랑스 선교사 모방 신부님에 의해 안드레아로 세례를 받고, 즉시 최방제, 최양업과 함께 중국 마카오로 비밀리에 유학을 떠났다. 성품이 바르고 재능이 출중했던 김대건은 5년간 유학생활 중에 라틴어, 불어, 영어, 중국어 등 5개 국어에 능통한 학생이었다. 당시 마카오 반란으로 인해 두 차례나 필리핀의 마닐라로 피난을 가서 롤룸부이에서 지내시기도 했다. 롤룸부이의 맨도사 가정은 아직도 찾아오는 한국인들에게 김대건 안드레아 신학생의 이야기를 들려준다.(본인은 1990년 7월에 그곳을 순례하였다.)
1844년 23세에 만주에서 부제품을 받고 한국에 잠시 입국하였다가, 다시 배를 타고 상하이로 가서 1845년 8월 17일 금가항 성당에서 한국교회의 최초 신부로 성품에 오르게 된다. 8월 31일 라파엘 호를 타고 페레올 고주교님과 다블리 안신부님을 모시고 상하이를 출발하여 9월 28일에 제주도에 도착하고, 그후 42일 만에 충청도 강경리 나바위 교우촌에 도착한다. 신부님은 쉴 틈 없이 사목 하면서 다른 신부님들의 영입을 위해 노력한다. 1846년 6월 5일 또 다른 신부님들 영입을 위해 황해도의 순위도 근처에서 배를 띄우다 적발되어 체포, 서울로 압송되어 갖은 문초와 형고를 받으시고 9월 16일 사형장인 새남터로 끌려가셨다. 신부가 된지 1년 30일, 향년 26세의 꽃다운 나이에 순교하신 것이다. 신부님은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께서 한국의 다른 순교자 78위와 함께 복자품에 오르셨고, 현 요한바오로 2세 교황께서 한국선교 200주년 기념 행사를 위해 방한하신 중 1984년 5월 6일 다른 복자 102위와 함께 성인품에 올려주셨다.
우리는 한국교회의 오늘을 있게 만든 어제의 주역들 가운데 죽음으로써 한국교회의 초석을 놓았던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성인을 기념하고, 그 천상탄일을 경축한다. 성인의 죽음은 불의의 사고도, 자신의 실수도, 강요당한 죽음도 아니었다. 신부님의 죽음은 "오직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1고린 10,31) 증거의 죽음이었고, 자신을 포기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을 비운" 선택의 죽음이었으며, "스승을 닮고자 하는" 적극적 죽음이었다. 모든 순교자의 죽음 곁에는 마지막 반려자(伴侶者)가 있었으니 이는 곧 "누구든지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면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 것이다"(마태 10,39)는 예수님의 말씀이었다.
첫댓글 감사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