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에 물고 질겅질겅 씹고 다닐 수 있었던 내 앞머리는 한 두 번 쓸어 보아야 잡힐 듯 말 듯 짧아져 버렸습니다. 너무도 짧은 머리 때문에 저는 거울도 보지 않고 머리가 자라길 17개월 동안이나 기다렸지만, 여전히 예전처럼 입에 물고 질겅질겅 씹을 수 있을 정도로 머리는 자라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런 대로 앞머리는 내 이마에서 바늘처럼 치켜세워져 있었습니다.
제가 이 푸른색 환자복이라도 입고 있지 않았다면, 선생님은 아마 내 모습을 보고 요즘 가수들이나 무슨 춤추는 사람이라고 불렀을 겁니다.
아무튼 그곳은 참으로 신기한 곳이었습니다. 24년 동안 몸에 배어 있던 습관을 딱 일 주일만에 입에 물고 질겅질겅 씹고 다녔던 머리카락을 자르듯 싹뚝 잘라 버렸으니깐요. 사실 딱 일 주일이란 수치도 기억에 기억을 더듬어 보아서 대충 뽑아낸 날짜이지 정확히 언제부터 이 신기한 곳에 적응해 버렸는지 기억조차 안 납니다. 그보다 짧은 시간이었거나 그보다 긴 시간이 없었다 해도 나는 굳이 일 주일이라고 표현했을 것입니다.
그곳에 들어가기 전 난 그곳을 군대라고 불렀습니다.
'아하!'하고 계시는군요, 선생님. 그렇게 고개를 끄덕거리는 건 긍정이십니까, 부정이십니까? 아! 좋아요. 제가 혼자 말하기로 되어 있는 거지요.
막상 그곳에 들어가서 보니 저는 그곳을 표현할 마땅한 호칭을 찾지 못했습니다. 며칠 동안 나는 그곳을 '무어라고 불러야 좋을까?'라고 돌머리를 굴렸지만 그걸 지을 시간조차 그곳은 주지 않더군요. 이후 나도 내가 부를 수 있는 그곳의 이름을 짓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사실 그게 어떤 의미를 주고 있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그래서 난 그곳을 그저 신기한 곳이라고 부르기로 한 거죠. 그 신기한 곳의 특징은 참 많은 것이 있지만 그 많은 특징 중에서도 특히 신기한 것은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대충 어제는 몇 번 세차를 했고, 몇 대를 맞았고, 몇 번 고참 대신 새벽 보초를 섰는지.... 뭐, 시간을 내어 생각해 보면 생각이 나겠지만 굳이 어제 일 따위를 생각할 필요도, 겨를도 없었습니다. 사실 그때 나는 내게 일어나는 일들 중 이런 것들을 세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1989년 6월 12일부터 17개월이 지난1990년 11월 오늘까지 그러니까 논산 입소대, 훈련소, 대기 보충소의 기간을 뺀 약14개월 동안 1만2천여 개비인가 1만3천5백여 개비의 담배를 태웠습니다. 하루에 한 갑 반씩 10개월, 그리고 그 후로 오늘까지는 담배를 어떻게 태웠는지 그 방법을 잊어버려 태워보지 못했으니1만2천여 개비인가, 1만3천5백여 개비의 담배를 태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지난 14개월 동안 6백여 잔인가, 7백3십여 잔의 커피를 마셨습니다. 정확히 계산하면 지난 14개월 동안 고작 4개월 전에서부터 7백3십여잔의 커피를 마신 것입니다. 아니 더 정확히 표현하면 꿈같던 단 한 번 열흘 휴가 기간에도 난 한 방울의 커피도 마시지 않았습니다. 또한 신기한 일들을 많이 겪었던 4개월 전 10개월 동안에도 나는 한 방울의 커피도 마시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체질적으로 커피를 흡수하면 잠을 못 이뤄 멀리했던 옛 습관이 남아 있던 것이 하나의 이유이고, 나머지 하나의 이유는 자기가 먹은 짠밥 수가 곧 법으로 통용되는 이곳에서는 10개월 동안 내가 먹은 9백 번의 짠밥으로는 커피 자판기 근처도 얼씬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10개월이 지난 시간부터는 잠을 잘 필요도 그 법을 두려워 할 필요도 없게 되어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하루에 여섯 잔씩 꼬박 4개월 동안 7백3십여잔의 커피를 마실 수 있었습니다. 그것도 하얀 옷을 입은 선생님의 여자 친구가 직접 배달까지 해주는 황홀한 커피를.....
그리고 나는 10개월 동안 하루에 다섯 번, 1천2백 번인가 1천5백여 번 죽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눈이 반짝거리시는군요. 사실 선생님께서는 제가 그런 생각을 아직도 갖고 있다는 것에 흥미를 느끼시는 거지요? 아! 질문은 안 된다고 했는데...
죄송합니다.
자살이란 한 인간이 전혀 경험해 보지 못했던 세상에 무릎을 꿇고 어쩔 수 없이 적응되어 가는 과정에서 느끼는 공허한 울림일 수도 있겠지만, 매우 더러운 꼴을 당하거나 삶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날이면 하루에 일곱 번까지 죽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기상구호를 외치는 마지막 불침번의 '기상하십시오'가 '자살하십시오'로 들리기까지 했으니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아직까지 숨을 쉬고 있는 이유가 궁금하시겠죠?
아! 이건 질문이 아닙니다. 그렇게 인상을 찌푸리지 마세요. 정말 중요한 이야기를 드리려고 합니다. 이제까지 했던 말들 중에서 말입니다.
죽고 싶다던 그 순간마다 참 예쁜 우리 채연이가 입대 전 건네준 야광시계의 뚜껑을 열어 5백 원짜리 동전보다 조금 큰 우리의 다정한 사진 속에 아주 아주 작은 글씨로 적어 놓은 '사랑해요. 당신이 나를 생각하지 않은 시간에도'라는 그 마음을 읽으며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습니다.
세어보지 않았지만 대충 계산해 보면 나는 10개월 동안 하루에 두 번씩 3백5십여 번인가 5백여 번인가의 세차를 했습니다. 처음 신병대기 기간과 가끔 눈이 많이 오는 날을 거르고 669호의 주인인 많이 배운 노병헌 병장, 아! 노병헌 병장이 많이 배웠다고 부르는 것은 그가 나보고 적게 배웠다고 부를 때의 상대적인 뜻으로 내가 표현한 것입니다. 노병헌 병장이 휴가나 포상 특박을 나갈 때 하루에 한 번 했으니 3백5십여 번에서 5백여 번했다면 맞을 겁니다.
많이 배운 노병헌 병장은 결벽증을 넘어서 정신병적인 청결벽을 가진 인간이었습니다. 그는 아침에 운행 전에 먼지를 닦아냈고 저녁 운행 후엔 꼭 물세차를 하는 것을 원했기 때문에 지난 겨울 내내 내 손은 감각을 잃고 살아야 했습니다. 그는 특히 나를 싫어했습니다.
"못 배운 놈은 어디 가서나 몸으로 때우는 걸 배워야 해."
라고 그 나름대로의 싦의 방식을 주려 했습니다. 유난히 학벌이 좋은 우리 중대원들 틈에 지방전문대를 졸업한 열등감을 그나마도 못 다닌 내게 풀어보려 하루도 빠짐 없이 나를 볶아댔으니까요.
언젠가 그는 참 예쁜 채연이가 입대 전 건네준 뚜껑이 열리는 야광시계를 본 적이 있었습니다. 5백 원짜리 동전보다 조금 큰 우리의 다정한 사진을 보며 그는 특유의 큰 눈을 내 눈 가까이 대며,
"너 같이 못 배운 새끼가 이런 애를 다 닦고 다니니까 내가 닦을 여자가 없지. 어디 그렇게 차를 잘 닦아봐라, 이 무식한 새끼야."
라고 하더군요. 후훗, 그 후 699호 차의 세차는 아예 내게 떠맡겨 졌습니다.
그래도 비가 오는 저녁이면 비누칠이 잘 먹기 때문에 한참을 걸어가야 하는 물탱크를 두어 번 덜 다녀와도 괜찮아 비가 오는 저녁은 그나마 재수가 좋았죠. 물론 아침이면 밤새 빗물 얼룩을 닦아내야 했기 때문에 팔이 많이 저리기는 했지만 말입니다. 선생님도 비 오는 날 세차를 하시는가요? 아주 잘 닦이잖습니까?
저는 지난 10개월 동안 센텔라 아시아티카 연고를 두 달에 한 통씩 대여섯 통의 연고를 오른 팔뚝에 발랐습니다. 한 달에 한 번씩 똥 푸는 작업 때문이었습니다. 똥을 퍼낼 때마다 오른쪽 팔뚝은 똥독으로 부스럼이 생겼는데, 매달 똥을 푸니, 오른 팔뚝에 생길 부스럼이 사라질 만하면 다시 부스럼이 났죠. 하여튼 센텔라 아시아티카 연고를 피부 질환 전문 치료제로써, 습진, 무좀, 종창, 수축성 반흔, 육창, 나병의 궤양성에 군용약 치고는 효과가 뛰어나 도움을 주었습니다. 다만 약이 다소 독해 팔뚝에 허물이 조금 벗겨져 처음이자 마지막 휴가 때 참 예쁜 우리 채연이에게 거짓말을 해야 했다는게 그 흠이라면 흠일 수도 있겠지만 말입니다.
참 예쁜 우리 채연이는 지난 10개월 동안 일주일에 세 통씩 97통의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이곳 특성상 주말에는 편지를 받을 수 없기에 우리 채연이는 목요일에 편지를 보내 월요일에 두 통을 받게 해주었고, 화요일에 보내 금요일에 한 통을 받을 수 있는 행복을 주었습니다.
꼭 97통의 편지는 거의 비슷비슷한 내용이었는데, 뭐가 그리 미안한 건지 이해해 드릴 것도 없으신 엄마를 이해해 달라 할 때마다, 내가 가진 상황들이 얼마나 우리 채연이를 힘들게 하는지 다시 한 번 생각게 해 어느 새 눈썹이 젖어 있고는 했습니다.
17통의 편지를 받을 때까지 그 짠밥이라는 법을 앞세워 우리 채연이의 편지를 보며 히히덕거리는 고참들 때문에 고통스러웠지만, 18통째의 편지를 보며 역시 편지는 기집년들 꽃펴지라느니 내용이 야해서 읽을 만하다느니 따위의 더러운 표현을 쓰며 팬티 속에 들어 있는 손을 조물딱거리는 노병헌의 목에 내 허벅다리를 이미 그은 피 묻은 대검을 가리키며,
"다음은 네 모가지야"
라고 한 후, 그러니까 19통째의 편지부터는 나 혼자만의 우리 채연이 편지를 음미할 수 있었습니다. 그 날 밤 많이 배운 고참들에게 무척이나 많이 짓밟혔지만 그런 매질 따위는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터라 별 상관은 없었습니다.
참 예쁜 채연이는 지난 10개월 동안 네 번의 면회를 왔습니다. 우리 부대는 강원도 오지에서도 한참 들어와야 하는 탄약창이었기 때문에 하루코스로 오기는 불가능한 곳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채연이의 마음은 매일 내게 와 있지만 그 몸은 두달에 한 번 과 MT나 교수 세미나 준비로 밤을 세워야 한다는 따위의 거짓말을 하고 나서야 내 얼굴을 보러 버스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우리 채연이가 세 번째 면회를 왔을 때, 난 정말로 목숨을 걸고 외박을 시도 했었습니다. 이번에도 우리 채연이를 이상야릇한 은성 여관에 혼자 재울 수는 없었습니다.
면회가도 되냐는 편지를 받은 순간부터 9일 동안 3교대 보초를 매일 대신 서주는 조건으로 외박을 나올 수 있었습니다. 하루에 세시간 반 수면 시간으로는 이틀도 버티기 힘들었지만 눈꺼풀이 저절로 내려올 때마다 입대 전 우리 채연이가 건내준 뚜껑이 열리는 야광시계의 뚜껑을 열어보며 밀려오는 잠을 쫓아버렸습니다.
그 맑은 미소를 볼 수 있는데 이까짓 눈까풀을 못 이기는 게 말이 되느냐는 생각으로 계속계속 뚜껑을 열어 보았습니다. 채연이의 서른두 번째 편지에는
"정말 난 괜찮아요. 바보도 아닌데 혼자 못 자겠어요? 그 한 밤 동안 내가 견딜 수 없는 건 여기서 내가 혼자 자는 걸 알면서도 못 나오는 그 마음을 알기 때문이에요. 그러니까 정말 괜찮아요, 저는....."
이었....습....니....다. 이런 주책없이!
아! 눈물을 보니 한 가지 더 생각나는 일이 있습니다.
참 예쁜 채연이는 지난 10개월 동안 꼭 한 번 내게 눈물을 보여 주었습니다. 뒤돌아서 눈물을 보일망정 정말 내 앞에서는 단 한 번도 눈물을 보이지 않던 채연이었는데, 논산 연병장에서는 예외를 보여 주었습니다. 나처럼 짧아진 머리로 어색한 표정을 보이는 아들의 손을 잡고 그렁그렁 맺힌 눈물을 참고 계시는 부모님들과 계속 머리를 긁적이던 나를 번갈아 쳐다보며,
바보처럼, 그렇게 바보처럼 잡고 있는 소매 끝도 못 놓고 있으면서 어서 들어가라고, 다른 사람보다 빨리 들어가야 혼나지 않을 거라고, 자기는 눈물 닦을 손도 없이 한 손으로는 내 소매 끝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내 눈썹을 닦아주며 그렇게 내게 처음 눈물을 보였습니다.
참 예쁜 우리 채연이가 내 얼굴을 보러 여섯 번째 양양행 고속버스를 탔을 때 우리 채연이 과교수는 다른 조교를 구해야 했고, 우리 채연이가 자주 들르던 카페 '오르골' 사장은 매우 많은 커피를 더 부탁하는 한 여자 손님에게 더 이상 서비스 커피를 주지 않아도 됐고, 우리 채연이에게 언제나 똑같은 파란색 편지 봉투와 똑같은 무늬의 편지지를 주문 받았던 문구점 주인은 더 이상 잘 팔리지도 않던 파란색 편지 봉투와 똑같은 무늬의 편지지를 주문하지 않아도 되었고, 어머님만큼이나 나를 싫어했던 둘째 세연이는
"언니, 정말 미친 건 아냐?"
라고 대답 없는 언니에게 더 이상의 질문을 할 필요가 없어졌고, 날 만나는 일 외에 단 한 번도 딸에게 실망한 적이 없으셨던 어머님은 날 만나는 것보다 더 큰 충격을 받으셔야 했습니다.
사고가 아주 컸었는데 선생님은 기억 안 나시나요, 원통 이목다리에서 버스 전복된 사건, 여러 사람 피눈물 흘렸을 겁니다.
면회 준비를 마치고 우리 채연이를 기다리던 나는 TV에서 자막으로 나오는 사망자 명단을 보고 하늘이 정말로 무너질 수도 있다는 걸 알았고, 너무도 당연한 연쇄 효과로 노병헌의 전역이후 699호와 나를 함께 건네 받았던 황수헌 병장은 다른 세차맨을 구해야 했습니다.
덕분에 우리 병동 선생님의 여자 친구 간호 장교는 팔자에도 없는 차배달을 해야 됐지요. 그녀는 내 증상을 시간마다 체크해 2시간 30분마다 커피를 들여보내 주었습니다. 친절하게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선생님의 여자 친구에게도 또 다른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니까. 선생님은 저에 대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하여튼 나는 하루에 여섯 잔씩 지난 4개월 동안 6백여 잔인가 7백3십여 잔인가 하는 커피를 마실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시간은 유일하게 우리 채연이의 냄새를 직접 맡을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나는 지난 4개월 동안 참 예쁜 채연이가 보낸 97통의 편지 중에서 네 개의 오자와 두 개의 틀린 표현을 발견했습니다. 오자야 모르고 그런 것도 아니고 간혹 실수로 자음이나 모음을 하나 빼거나 더하는 경우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정말로 이건 실수다 할 수 있습니다.
'미안해요. 어제 편지를 못 보냈어요. 조심한다고 했는데 엄마가 갑자기 들어오셔서 빼앗아 갔어요.'
갸우뚱거리시는군요, 선생님. 저도 물론 그 편지를 처음 읽었을 때는 생각도 못했는데 곰곰이 음미하며 읽어보니 우리 채연이는 어른에게 '가셨어요'가 아닌 '갔어요'라고 쓸 만큼 예의 없는 애가 아닙니다. 아무튼 채연이에게 괴로운 일들이 많다고 생각됩니다.
또 하나의 실수는 사실 실수라기보다는 계산을 잘못한 것입니다.
'이게 7개월 지났으니 9백4십 일 남았어요. 앞으로 9백4십 밤만 자면 우린 평생 마주할 수 있는 거지요.'
그러나 우리는 475일이 지난, 그러니까 정확히 오늘을 빼면 675일을 못보지 않고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원래 475일만 지나도 되는 건데 오늘은 유난히 준비할 게 많아서.....
아까 오전에 이빨을 닦다 너무 힘을 주었는지 칫솔이 뚝하고 부러지더군요. 그 바람에 잇몸에서 피가 멈추질 않고 있습니다. 혀를 밀어 넣어보니 틈새가 조금 벌어진 것 같습니다. 지혈도 할 수 없으니 걱정이 태산입니다. 선생님, 뭐 좋은 약 없을까요?
"어떻게 그렇게 이가 예뻐요. 치약 선전 나가도 되겠네. 언제나 이가 먼저 보이는 거 있죠. 아, 이뻐. 이~~해봐요, 이...."
참 예쁜 우리 채연이는 언제나 이를 먼저 보는 습관이 있는데..... 보자마자 또 한 걱정을 하지 싶습니다. 그나마 앞머리라도 우리 채연이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길어져 다행입니다. 머리가 조금만 빨리 자라줬어도 빨리 볼 수 있었을 텐데....., 아무튼 저는 이제 행복합니다.
선생님, 이제 그만 하죠. 이 정도면 오늘은 많은 얘기를 한 것 같군요. 녹음기는 이제 끄셔도 될 것 같습니다. 저는 충분히 다 말씀드렸으니까요......
"김 중령님, 302호실 그 사람 유품이에요. 이 사진 좀 보세요. 둘이 너무나 다정하게 찍혔어요. 어머, 어떡해......, 이렇게 다정했던 사람들이!"
"어디, 어 그 친구 사진이구만. 왜 이걸 이 소위가? 어, 이 친구 원래 앞머리가 길었군. 그렇게도 머릴 자르면 죽어버리겠다고 하더니만......"
"그 사람 죽기 전날 밤에 저에게 주더군요. 이러이러한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사랑만 하다 간다는 걸 한 사람이라도 알고 살았으면 한다고. 그땐 얼떨결에 받아서 그게 무슨 얘긴지 잘 몰랐거든요. 미리 알았더라면...."
"이 밑에 뭐라고 써진 거 아냐? 글씬 거 같은데. 이렇게 작게도 쓸 수 있나? 뭐라고 쓴 거야, 이거. 사.....랑해요, 당신이......나를 생....각하지 않는.....시간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