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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절 어린양
출 12: 21-28
한 부인이 결혼식 하객으로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녀는 옷을 곱게 차려 입었다. 그 동안 끼지 않고 장농 깊숙한 곳에 감추어 두었던 예물 반지를 꺼내어 끼었습니다. 다이아몬드가 박혀있는 반지였습니다. 그런데 결혼식을 마치고 집에 와서 보니 다이아몬드가 없어졌습니다. 반지의 알이 빠져버린 것입니다. 핸드백을 뒤져보고 생각을 더듬어 보았지만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 아깝지만 포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알 빠진 반지는 아무렇게나 방치되었습니다. 다이아몬드가 빠져버린 반지는 더 이상 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의 반지로 비유한다면,“복음”은 다이아몬드입니다. 모든 하나님의 말씀이 귀하고 일점일획도 변경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중에 한 구절이라도 함부로 뺄 수가 없습니다. 모든 하나님의 말씀이 귀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은 가장 귀합니다. 만약 복음이 없다면 알 빠진 반지와 같습니다. 신랑 신부가 빠져버린 결혼식과 같습니다. 복음이 없는 교인은 쭉정이이며, 껍데기 신자이며, 지옥의 자식입니다.
본문은 마지막 열번째 재앙으로 애굽의 장자와 생축의 초태생을 치는 대재앙입니다. 여기에 복음의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유월절 어린 양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예표하는 가장 대표적인 것입니다.
■ 열번째 재앙과 유월절 어린 양
하나님이 애굽 전역을 큰 재앙으로 치셨습니다. 바로의 장자로부터 옥에 갇힌 죄수의 장자, 그리고 맷돌 위에 앉은 여인의 장자까지 빠짐없이 치셨습니다. 생축의 처음 난 것도 치셨습니다. 애굽 전역에 사망이 왕노릇하였습니다.
성경은 세상이 사망의 권세 아래 있다고 선언하였습니다. 로마서 5장 12절에,“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 아담 안에 있는 인류가 죄인이며, 죄인된 인류는 사망의 권세 아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선택이 아닙니다. 아담의 선택입니다. 그러나 그의 선택이 전 인류에 미치는 것입니다.
바로 한 사람이 강팍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대항했습니다. 그 결과 재앙의 고통이 임했는데, 그것이 애굽 전역에 임했습니다. 바로의 선택이었지만 애굽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미쳤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선악과 열매를 따먹은 것은 어디까지나 아담의 결정과 선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영향력이 전 인류에 미쳤습니다. 아담 한 사람으로 인하여 온 인류가 사망의 권세 아래 갇히게 되었습니다.
가끔 십대들의 광란의 질주가 보도되곤 합니다. 언제나 대형사고입니다. 한 사람이 핸들을 잡았지만 동승한 모든 사람에게 영향이 미칩니다. 애굽은 바로가 운전하는 차에 탔습니다. 인류는 아담이 운전하는 차에 탔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따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는 표지판을 무시하고 달리다가 사망의 낭떠러지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온 인류가 사망의 권세 아래 갇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우릴 구원하실까요? 하나님은 모세에게“구원의 방법”을 지시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어린 양을 잡으라!”고 지시하셨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모든 장로를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가서 너희 가족대로 어린 양을 택하여 유월절 양으로 잡고”(21절). 이스라엘의 원로들을 불러다 놓고 어린 양을 잡으라고 지시했습니다. 또한 양의 피를 바르라고 지시했습니다. “너희는 우슬초 묶음을 취하여 그릇에 담은 피에 적시어서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뿌리고 아침까지 한 사람도 자기 집 문 밖에 나가지 말라”(22절). 우술초 묶음으로 양의 피를 찍어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바르라 했습니다. 또 아침에 되기까지 문 밖으로 나가지 말라 했습니다. 그리고 구원을 선포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러 두루 다니실 때에 문 인방과 좌우 설주의 피를 보시면 그 문을 넘으시고 멸하는 자로 너희 집에 들어가서 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실 것임이니라”(23절).
유월절 어린 양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고린도전서 5장 7절에서 예수님을 유월절 어린 양이라 증거 했습니다. 침례 요한은“보라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고 증거했습니다. 하나님이 제시하신 구원의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십니다. 예수님은 갈보리산 십자가 위에서 피흘려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보혈이 우리 죄를 정결케 하십니다. 예수님의 피묻은 복음이 있는 심령은 죄사함을 받습니다. 피묻은 복음이 있으면 사망의 권세 아래 있지 않습니다.
■ 복음이 있습니까?
한 청년이 갈급한 심정으로 교회를 찾아 나왔습니다. 가정의 어려움으로 하루하루 사는 것이 힘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나오는 것이 힘이 되지 아니했습니다. 여전히 힘이 들었습니다. 그는 교회에서 도덕적인 가르침에 눌려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선한 일을 해야 하며 남을 돕는 유익한 사람이 되어야 함을 배웠습니다. 그는 이런 가르침 앞에 늘 초라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해야만 했습니다. 이렇게 3년을 다녔습니다. 기쁨이 없이 도덕적 부담감을 느끼며 교회에 다녔습니다. 그는 기독교는 “도덕종교”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오스왈드 스미스 목사님이 쓴 「구원의 길」이라는 책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는지..왜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셨고, 예수님은 우리의 죗짐을 짊어지고 피흘려 죽으셨음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기독교를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기독교는 “구원의 종교”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고되기만 했던 삶에 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어느 날 청중 앞에서 간증을 했습니다. 간증이 끝난 뒤에 사람들이 찾아와 말했습니다. “형제, 형제의 간증에는 이상한 감동이 있어. 만약 형제가 주님께 헌신한다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을거야!” 그는 하나님께 자신을 헌신했습니다. 이 청년은 목회자가 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뜨거운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이동원 목사님(지구촌교회)의 간증이었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교회에 나오면서“착하게 살아야지..”“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지..”라고 생각하면서 유월절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지 않는다면 참 믿음이 아닙니다. 성서의 가르침 속에는 높은 차원의 도덕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도덕적 종교는 아닙니다. 성서의 진리는 구원의 진리입니다. 성경을 주신 목적은 죄인된 인류의 구원을 위한 것입니다. 구원을 가능케 하는 것이 복음이며 복음의 핵심은 유월절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 안에 유월절 어린 양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린 알 빠진 반지와 같습니다. 여러분 안에 유월절 어린 양이신 예수가 계십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믿음으로 체험하여 죄사함을 받은 사람이 유월절 어린 양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당신의 가정에 유월절의 복을
12: 21-28
이 세상에서 여러 가지 공동체 중에 가정이 중요합니다.
가정은 세상이나 인간에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가정이 귀합니다. [창2:18]“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천국을 체험할 수 있는 두 기관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교회이고 또 하나는 가정입니다.
교회는 영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체험할 수 있고 가정은 육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가정은 귀합니다. 그래서 어둠의 세력인 사탄 마귀는 오늘날 가정을 사정없이 공격하여 가정을 파탄시키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회의 문제는 다 가정을 지키지 못하는데서 오게 됩니다.
[딤전5:8]“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그러므로 가정은 세상의 힘이나 권력, 물질의 힘으로만 지켜지지 않습니다. 가정은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인 힘, 생명의 힘, 은혜의 힘, 사랑의 힘으로 지켜집니다. [행10:2]“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오늘 본문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최초의 유월절 예식을 명령합니다.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게 하는 예식입니다. 이것은 애굽 사람들에게 엄청난 심판이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유월(PASSOVER)의 복(건너가는, 뛰어넘는 복)이 있는 것입니다. 상징적 사건으로는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이고 영적으로는 사탄과 사망과 죄의 저주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로 우리가 죄악의 저주에서 해방되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래야 사탄과 세상과 육신의 정욕에서 자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약의 유월절 복입니다. 그래야 우리 가정이 안전하고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롬3:25]“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행16:31]“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1)애굽을 벗어나게 됩니다.
애굽은 세상을 상징합니다. 애굽은 죄악과 유혹의 땅입니다. 그래서 애굽은 언제든지 심판의 땅입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아무리 출세하고 잘나도 그들은 애굽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늘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세상풍속에 젖어 사는 자들입니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2:2-3) 그래서 아무리 세상에서 잘나간다 해도 애굽이 삶의 근거지인 자는 늘 세상의 유혹에 끌려 죄짓고 하나님 앞에 본질상 진노의 자식인 것입니다. 그들은 언제 하나님의 진노가 임할지 조마조마 한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보혈을 믿는 자는 성령의 역사로 하나님의 생명을 얻은 자로 그런 것에 끌리지 않습니다.
2)바로의 권세에서 해방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발라 살아남아 그들은 홍해를 건너 출애굽하여 바로의 손에서 자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보혈을 믿어 새생명, 즉 피 속에 있는 주님의 생명을 받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마귀의 세력에서 자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로는 세상의 애굽의 왕인 마귀를 나타냅니다. 분명히 성경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말합니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요일3:8-10)
3)죄악의 저주에서 영원히 해방됩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영접하면 하나님의 은사로 사망에서 벗어나 영생 천국에 이르게 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6:23) 십자가에 달린 강도도 예수를 영접하니 예수님께서 너도 오늘 나와 같이 낙원에 있으리라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주님의 보혈을 믿어 성령 받으면 하나님이 지금 역사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천군 천사가 당신을 돕는 것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지금 응답하십니다. 이것이 당신이 바로 죄의 저주인 사망의 권세에서 벗어난 증거입니다. 여러분 개인과 가정에 유월절이 복이 임하시기 바랍니다.
가족 구원
출 12: 21-28
구원은 하나입니다. 구원받는 방법도 하나밖에 없습니다. 구원이란 예수 믿고 죄사
함 받고 하나님의 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4:12을 보면 "천하 인간에 구원
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 뜻은 예수 믿어
야 구원받고 그 구운은 하나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구원은 그 범위가 넓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개인이 예수 믿
고 구원받은 경우도 있고 가족이 구원받은 경우도 있고 민족이 구원받은 경우도 있습
니다. 오늘은 가정의 달인 5월이 시작되는 첫 주일이기 때문에 가족구원을 중심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옛날 어느 임금이 현상금을 내걸고 그림그리기 대회를 열었습니다. 그림의 제목
은 "가정화목"이었습니다. 경향각지에서 화가들이 모여들어 그림그리기 대회에 참가했
습니다. 임금의 깊은 뜻은 모든 백성들의 가정이 화목하고 화락해야 된다는 것을 그림
을 통해 계몽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최종심사 끝에 일등으로 뽑힌 그림은 깨끗한 초가
집 마루아래 댓돌에 신발 두 켤레가 나란히 놓여 있는 그림이었습니다.
부부가 싸웠거나 뜻이 맞지 않는다면 댓돌에 두 사람의 신발이 나란히 놓여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라는 말 역시 가족의 화목이 얼마나 중요한
가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밀레가 그린 「만종」은 값을 정할 수 없는 명작입니다. 그 그림이 주는 교훈 역시
부부의 화목입니다. 함께 일하는 부부, 함께 기도하는 부부야말로 행복한 부부라는 것
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1. 가족관계에서 문제되는 것들
1) 신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서로 믿지 못하고 의심하고 신뢰하지 못하면 가족관계가 깨지고 맙니다. 결혼이란
전혀 모르는 남남끼리 만나서 부부의 인연을 맺고 길고 먼 일생을 살아가는 것입니
다. 두 사람 사이에 사랑과 신뢰가 성립되지 못 하면 함께 살기가 어렵습니다.
밤이 되면 부부가 잠자리에 듭니다. 그것도 불까지 꺼버립니다. 옆에 누워있는 사람
을 믿지 못 한다면 어떻게 눈을 감고 잠을 청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잠든 사이 무슨
짓을 할지 모릅니다. 아내가 남편을 위해 음식을 만들어 줍니다. 믿지 못한다면 어떻
게 그 음식을 먹을 수 있겠습니까?
사랑과 신뢰의 기둥이 무너져 버린다면 부부도 가족도 원수나 마찬가지가 되고 말
것입니다.
서세원씨가 진행하는 노인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텔레비젼 프로에 출연한 노인부부
끼리 낱말 알아맞추기 게임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거기 출연하는 노인들은 대개 70
이 지난 분들입니다. 남편이 부인에게 낱말의 뜻을 말로 설명하면 부인이 낱말을 맞춰
야 합니다. 남편에게 주어진 낱말은 「천생연분」이었습니다. 천생연분이란 형이상학
적 용어이기 때문에 결코 설명이 쉽지 않습니다. 이말 저말, 이소리 저소리 다 끌어
다 설명해도 할머니가 맞추질 못 합니다. 다급해진 할아버지가 "이봐 그거 있잖어"
"뭐 말인데유" "아이 그거, 당신하고 나 사이말여"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할머니
가 진리를 깨달았다는 듯이 "응 그거 원수"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아
니 네 글자여"라고 말하자 할머니는 "평생원수"라고 대답해 웃음판을 벌린 일이 있었
습니다.
서로 숨겨 놓은 죄, 의심, 부정은 가족관계를 깨트립니다.
2) 다른 신앙입니다
종교가 다르고 신앙이 다르면 가정화목도 어렵고 신앙생활도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남편은 기독교, 부인은 불교일 경우 서로의 신앙이 다르고 방법이 다르기 때문에 화
평을 이루는 것이 어렵습니다.
남편은 이 교회, 부인은 저 교회, 아이들은 그 교회로 헤어져 나가는 것도 바람직
한 일이 아닙니다. 가족이 함께 나와 한 교회를 섬기고 같은 말씀으로 은혜를 받고 가
족이 둘러앉으면 같은 교회이야기며 받은 은혜를 주고받아야 합니다.
3) 편애하는 것입니다
이삭은 에서를 사랑하고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편애가 결국은 형제사이를 갈라놓은 불행의 원인이 된 것입니
다. 가족간의 시기, 질투, 분쟁은 가정을 파괴합니다. 그리고 가족관계를 깨트려 버립
니다.
2. 건전한 가정, 행복한 가정이 되려면
1) 건전한 사고, 건전한 직업, 건전한 생활을 해야합니다
법학강의총서 가운데 형사정책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 책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미국 어느 교도소에 1874년 쥬크가의 가족 6명이 죄를 범하고 동시에 수감되어 있었
는데 그 후손 709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실시했습니다. 알콜중독자 131명(18.5%), 매춘
부 174명(24.5%), 정신병자 64명(8.6%), 중범죄자 77명(10.8%)으로 드러났습니다.
다른 연구조사 결과도 있습니다. 미국 남북전쟁 당시 「마아틴칼리마크」라는 병사
가 전쟁중 정신박약 여자와 성관계를 맺고 사생자 아들 하나를 낳았습니다. 그 후 제
대하고 독실한 청교도신자인 기독교인과 정식결혼하여 여러 자녀를 낳았습니다. 문제
는 그 후손을 상대로 실시한 조사 결과입니다. 이 조사는 지능측정학파의 개척자인
「곳다드」에 의한 것입니다. 사생자의 자손 488명 가운데 정박아 143명, 사생아 36
명, 알콜중독자 24명, 간질병자 3명, 매춘업경영자 8명, 중범죄자 3명 등으로 드러났
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과 결혼해 낳은 자손 496명 가운데 정신이상자 1명, 알콜중독자 2명
이 있을뿐 모두가 정상인이었고, 의사, 변호사, 법관, 교육자 등으로 활동했다는 것입
니다.
건전하고 행복한 가정이 되려면 생각도, 생활도, 직업도 건전하고 건강해야 합니
다. 당대를 위해서도 그렇고 후손을 위해서도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사울왕과 다윗왕은 그런 면에서 차별화 됩니다.
사울왕조는 당대로 끝나 버렸습니다. 그 아들이 왕 된 것도 아니고 그 후손이 성공
하거나 출세한 일도 없습니다.
그러나 다윗왕은 존경과 사랑을 받으며 40년을 통치했고 그 후손이 대를 이어 이스
라엘의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후손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했습니
다.
범죄학에서는 멘델의 유전법칙을 따라 범죄가 유전된다고 보고 있습니다. 우리 자녀
들과 후손들에게 나쁜 것을 물려주지 맙시다. 죄를 물려주지 맙시다.
2)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시어머니가 새며느리에게 밥솥에 불을 때라고 했습니다. 밥 해본 일이 없는 새며느
리는 밥물이 넘치는 것도 모르고 계속 불을 때다가 밥은 다 타버리고 솥은 금이가 깨
져버렸습니다. 놀라 어쩔 줄 모르고 주저앉아있는 며느리를 시어머니가 위로합니
다. "아가야 내가 물을 너무 적게 부어서 그렇게 됐구나 걱정마라. 솥은 다시 사면되
고 밥은 새로 하면 된다." 시아버지가 거듭니다. "내가 부엌에 나무를 너무 많이 들여
놔서 네가 마음놓고 불을 땠구나 네 탓이 아니다 걱정마라." 새신랑이 한마디합니
다. "다 제 탓입니다. 제가 너무 물을 적게 길어와 물이 모자랐습니다. 이 담엔 물을
넉넉하게 길어다 놓겠습니다."
건너 집은 술집이었습니다. 시어머니가 새댁더러 밥솥에 불을 때라고 했습니다. 마
음놓고 때다보니 밥은 다 타버리고 솥은 깨졌습니다. 화가 난 시어머니가 소리를 지르
며 야단을 쳤습니다. 참다못한 며느리가 "제가 일부러 태웠습니까"라고 한마디하자 곁
에 있던 시아버지가 "어디서 배운 버르장머리냐 어디라고 어른한테 턱 치켜들고 덤비
느냐"고 호통을 칩니다. "왜 저만 야단치느냐"고 며느리가 한마디하자 신랑이 나서더
니 "어디서 시부모에게 말대꾸냐"며 귓방맹이를 쳤습니다. 얻어맞은 신부는 "죽여라
살려라"며 악을 쓰고 덤빕니다.
뭐가 다릅니까? 무엇이 이토록 전혀 다른 결과를 만들어 냅니까?
그것은 이해와 사랑의 방정식 때문입니다. 사랑의 눈으로 보면 남편도 아내도 사랑
스럽고 며느리도 사위도 예뻐보입니다. 그러나 미움의 안경을 끼면 모두가 다 원수로
보입니다.
얼마 전 제 아내가 미국에 있는 며느리하고 전화통화를 한 일이 있었습니다. 저는
아이들과 전화할 일이 있으면 용건은 간단히 끝내고 기도를 해 주곤 합니다. 시어머니
와 며느리 사이에 통화가 끝나고 전화를 끊으며 시어머니가 며느리더러 이렇게 얘기했
습니다. "아가야 사랑한다" 모두 일곱 글자입니다. 나중에 안 일입니다만 그렇게 기뻐
하고 좋아했다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글자수로 네 글자가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킵니다. 가정을 낙
원으로 만듭니다.
그러나 다듬지 않은 말한마디가 가족의 마음에 비수를 꽂고 형제의 가슴을 쓰라리
게 만들고 가정과 교회를 파괴합니다.
요한1서 3:11에서 사도요한은 "서로 사랑하라"고 했고, 15절에서는 "형제를 미워하
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
가 아는바라"고 했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가정을 만들고 교회를 만듭시다.
3) 구원받아야 합니다
출애굽기 12장은 유월절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이 애굽을 탈출하던 날 밤 애굽전역에 장자 죽이는 재앙이 임했습니다. 장자를 죽이
는 사자가 집집마다 찾아가 장자는 무조건 죽였습니다. 그런데 양을 잡고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 문설주에 바르고 뿌린 집은 천사가 그냥 넘어갔습니다.
중요한 것은 12;21입니다. "너희는 나가서 너희 가족대로 어린 양을 택하여 유월절
양으로 잡으라"고 했습니다. "가족대로"라는 말을 주목해야 합니다. 가족대로 믿고 순
종해야 구원 받는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믿지 않고 어머니 혼자 믿는다고 가족이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복음 16:28을 보면 지옥간 부자의 호소가 나옵니다. "내 형제 다섯이 있사오
니... 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그는 지옥 불 속에서 가족구원을 하소
연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거절당했습니다. 이유는 살아서 믿어야 하고 전도자의 전
도를 받고 믿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0:2을 보면 고넬료라는 로마군 장교는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
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가족을 구원해야 합니다. 함께 예수 믿고 함께 교회나오고 함께 기도하고 교
회봉사해야 합니다. 그래야 당대도 후대도, 그리고 오늘도 내일도 행복하게 되는 것입
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 아멘
어린 양의 피와 모세의 손을 보시고
12: 21-28
오늘 아침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라는 주제로 19 번째 설교를 합니다. 성경에 하나님의 사랑이 최고로 나타난 사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신약에 나타난 십자가의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구약에 나타난 출애굽의 사건입니다. 두 가지 사건은 모두 저주 받을 인간들을 죽음에서 구원하신 구원 사건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성도들은 출애굽의 사건을 항상 기억하며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찬양했고 신약의 성도들은 십자가의 사건을 항상 기억하며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찬양했습니다. 이 두 가지 사건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사건입니다. 출애굽 사건은 십자가 사건을 예표하는 사건이었고 십자가 사건은 출애굽 사건을 완성한 사건이었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구약에 하나님의 사랑이 최고로 나타난 출애굽의 사건에 대해서 설교를 합니다. 출애굽의 사건은 히브리 노예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 오셔서 저들을 바로의 학정에서 해방하신 구원의 사건이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히브리 노예들을 구원하신 구원의 이유와 방식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보겠습니다. 무슨 이유와 근거로 히브리 노예들을 구원하셨습니까? 무슨 방식과 방법으로 저들을 구원하셨습니까?
첫째 하나님께서 히브리 노예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내려와서 구원하셨습니다.
죄인들의 고통 소리는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구원의 이유와 근거입니다. 이미 두 주 전에 “고통 소리를 들으시는 하나님”이란 제목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죄인들의 고통 소리와 탄식 소리와 신음 소리가 하나님의 인류 구원의 이유와 근거입니다.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더라”(출2:23-25). 하나님은 고통 중에 있는 우리 죄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내려오셔서 우리들을 구원하시는 은혜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들 속에는 구원을 받을만한 아무런 이유도 근거도 없습니다. 우리들 속에는 선함도 착함도 아름다움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들 속에 구원을 얻을만한 한 가지 이유와 근거가 있다면 그것은 우리들의 고통 소리와 탄식 소리와 신음 소리입니다. 하나님은 아무 가치 없는 우리들의 고통 소리와 탄식 소리와 신음 소리를 들으시는 자비의 하나님이십니다. 강도 만나 매 맞아 쓰러져 죽어가던 한 사람이 도움을 얻은 이유와 근거는 그의 고통 소리와 신음 소리였을 것입니다. 예수님 옆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던 한 강도가 도움을 얻은 이유와 근거도 죽어가면서 지른 조그마한 고통 소리와 신음 소리였을 것입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는 생각하소서”(눅23:42). 예수님은 그 신음 소리를 들으시고 강도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하나님은 히브리 노예들과 우리 죄인들이 지르는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히브리 노예들과 우리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은혜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은 고통 소리와 탄식 소리를 내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어린양의 피를 보시고 히브리 노예들을 구원하셨습니다.
“너희는 우슬초 묶음을 취하여 그릇에 담은 피에 적시어서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뿌리고 아침까지 한 사람도 자기 집 문밖에 나가지 말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러 두루 다니실 때에 문 인방과 좌우 설주의 피를 보시면 그 문을 넘으시고 멸하는 자로 너희 집에 들어가서 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실 것임이니라”(출12:22,23). 히브리 노예들 속에는 그들을 구원할만한 선함도 착함도 보배로움도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온 우주 안에도 그들을 구원할만한 보배로운 것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실 만한 보배로운 재료를 하나 발견하셨습니다. 그것은 어린양의 피였습니다. 물론 그것을 발견하신 때는 에덴 동산이었습니다. 출애굽 전날 밤 하나님께서 모세와 이스라엘 장로들에게 이렇게 명하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어린양의 피를 자기 집 문에 바르라고 명하셨습니다. 문 위와 문 양 옆에 바르라고 명하셨습니다. 모세를 통해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러 두루 다니실 때에 문 인방과 좌우 설주의 피를 보시면 그 문을 넘으시고 (he will pass over) 멸하는 자로 너희 집에 들어가서 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실 것임이니라”(출12:23). 그날 밤 하나님께서 문에 바른 어린양의 피를 보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집을 멸망에서 구원하셨다고 했습니다. 피를 보시고 이스라엘 사람들의 집을 넘어가서 (pass over) 애굽 사람들의 집만을 치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날 밤의 사건을 유월절 (pass over) 사건이라고 합니다. 넘어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린양의 피를 보시고 히브리 노예들을 구원하신 일은 전적으로 은혜와 사랑의 사건이었습니다. 어린양의 피는 양의 피일뿐 아무런 가치가 없는 물건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린양의 피 속에는 고상한 인격도 고상한 윤리도 고상한 선함도 보배로운 가치도 마술적인 힘도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상하게도 혐오스럽게 보이는 어린양의 피를 보시고 히브리 노예들을 구원하셨습니다. 거기에는 신비로운 뜻이 숨겨져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보시면서 앞으로 십자가 위에서 흘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피를 미리 보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흘릴 피를 보시고 하나님께서 히브리 노예들을 구원하신 것이었습니다. 우리들도 히브리 노예들처럼 모두 하나님의 저주와 심판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죄인들이지만 우리들이 우리들의 마음에 예수님의 피를 바르면 하나님께서 최후 심판의 날 그 피를 보시고 우리들을 넘어가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미신 같은 처사였고 무식한 처사였고 저급한 처사였고 비 윤리적인 처사였습니다. 그래서 상당수의 철학자들과 상당수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이 피의 의식과 피의 종교를 보고 조소하고 무시했습니다. 지금도 상당수의 현대 지성인들이 어린양의 피와 예수님의 피를 보고 조소하고 무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류 구원의 방식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어린양의 피와 예수님의 피를 믿고 의지하면서 그 피를 우리 마음에 바르면 구원을 얻고 그 피를 조소하고 무시하면서 마음에 바르지 않으면 영원한 저주와 심판을 받게 됩니다.
강도 만나 매 맞아 쓰러져 죽어가던 한 사람이 구원을 얻은 방식은 그의 몸에 포도주와 기름을 부음 받은 방식이었습니다. 포도주는 예수님의 피를 가리키고 기름은 성령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 옆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던 한 강도가 구원을 얻은 방식도 예수님의 머리와 손과 발과 허리에서 흐르는 피를 바라보고 의지한 방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과 요한은 각각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엡1:7).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1:7). 찬송가 184장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 밖에 없네 다시 성케 하기도 예수의 피 밖에 없네 나를 정케 하기는 예수의 피 밖에 없네 사죄하는 증거도 예수의 피 밖에 없네” 사실 우리를 보시지 않고 피를 보시고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것은 가장 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입니다. 선하지도 않고 착하지도 않고 진실하지도 않고 솔직하지도 않고 겸손하지도 온유하지도 않은 우리들을 보시지 않고 우리들이 믿고 의지하는 예수님의 피를 보시고 우리들을 지옥의 저주와 사망에서 구원하시는 일은 가장 큰 은혜와 사랑입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이 너무나도 귀중한 사실을 꿈에서라도 잊어버려서는 안될 것입니다. 다른 것을 바라보고 의지하면 안됩니다. 다른 것을 마음과 몸에 바르면 안됩니다. 오직 예수님의 피를 바라보고 예수님의 피를 우리 마음과 우리 몸과 우리 집과 우리 일터에 발라야 합니다. 그러면 저주와 심판을 넘어가게 되고 하나님의 무한하신 구원의 은혜와 사랑을 받게 됩니다.
방지일 목사님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마음에 새기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피를 내 마음의 문에 바르는 것이 피의 복음입니다. 이 피를 바르는 것이 사는 길이고 하나님의 심판을 넘어가는 길입니다. 이 피의 표적이 없이 심판을 면할 길이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그 피를 볼 때에’ 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보시지 않고 그 피를 보신다는 말씀입니다. 내 열심, 내 재능을 보시지 않고 그 피를 보신다는 말씀입니다. 내 허물을 보시지 않고 그 피를 보신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잘 한 것 보시지 않고 그 피를 보신다는 말씀입니다. 만일 그 피는 없고 다른 모든 것이 있다고 해도 심판을 면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게 다 부족해도 하나님께서 그 피만 보시면 심판은 면해집니다. 이것이 기독교이고 이것이 피의 복음입니다.” 참으로 정확하고 귀한 지적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와 사랑입니다. 피만 바르면 됩니다. 그 다음에 다른 것도 필요하지만 우선 가장 기본적으로 피만 바르면 심판은 면제됩니다. 피를 여러분들 마음에 바르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하나님께서 모세의 손을 보시고 히브리 노예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의 라암셋을 떠나 숙곳을 지나 홍해 바다에 이르러 그곳에 진을 쳤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바로가 말들과 병거들과 마병과 군대를 거느리고 히브리인들을 잡으려고 추격해오고 있었습니다. 앞에는 홍해 바다가 가로 놓여 있었고 뒤에는 바로의 군대가 추격해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심히 두려워하며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으므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뇨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내어 이같이 우리에게 하느뇨”(출14:11). 두려워하며 원망 불평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다시 한번 구원의 손길을 펴셨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구원의 손길을 펴셨습니까? 이번에는 모세의 손을 사용하셨습니다. 모세의 손을 보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습니다.
모세의 손은 본래 애굽의 모든 보화와 권력을 장악했던 탐욕의 손이었고 애굽 사람을 쳐 죽인 범죄한 손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손을 순종의 손으로 성결의 손으로 능력의 손으로 기도의 손으로 만들어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어 그 꼬리를 잡으라 그가 손을 내밀어 잡으니 그 손에서 지팡이가 된지라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네 손을 품에 넣으라 하시매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보니 그 손에 문둥병이 발하여 눈 같이 흰지라 가라사대 네 손을 다시 품에 넣으라 하시매 그가 다시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보니 손이 여상하더라”(출4:4-7). 모세의 손을 순종의 손으로 성결의 손으로 만들어주셨습니다. 나중에는 기도의 손으로 만들어주셨습니다.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출17:11).
바로의 군대와 홍해의 위기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의 손을 사용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바다 위로 내어 밀어 물이 애굽 사람들과 그 병거들과 마병들 위에 다시 흐르게 하라 하시니 모세가 곧 손을 바다 위로 내어 밀매 새벽에 미쳐 바다의 그 세력이 회복된지라 애굽 사람들이 물을 거스려 도망하나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을 바다 가운데 엎으시니 물이 다시 흘러 병거들과 기병들을 덮되 그들의 뒤를 쫓아 바다에 들어간 바로의 군대를 다 덮고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였더라 그 날에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스라엘을 애굽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시매 이스라엘이 바닷가의 애굽 사람의 시체를 보았더라”(출14:26-31). 하나님께서 모세의 손을 사용해서 히브리 노예들을 바로의 군대와 홍해의 위험에서 구원하신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와 사랑의 표시였습니다. 사실 모세의 손은 허물 많은 한 사람의 손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아마 하나님께서 모세의 손을 보시면서 앞으로 십자가에 높이 달려 양 손에 못을 박으시고 피를 흘리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손을 미리 바라보셨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하늘과 별들을 펴신 창조의 손으로 죄인들의 상처를 어루만져주셨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고 어린 아이들을 안아주셨고 마지막에서 그 손에 못을 박으시고 피를 흘리시므로 우리들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의심하는 도마에게 이렇게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내 손을 보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20:27).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된 사도 요한에게 손을 얹고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하시기도 했습니다. 강도 만나 죽어가던 사람이 도움을 얻게 된 것도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가까이 와서 손으로 상처를 싸매주었기 때문이고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던 강도가 구원을 받은 것도 양 손을 펴시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손으로 그를 품어주시고 안아주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손은 순종과 행동의 표시입니다. 믿음과 사랑 실천의 표시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의 순종과 믿음과 사랑의 손을 보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셨고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순종과 믿음과 사랑의 손을 보시고 우리들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셨습니다. 우리가 의지할 것은 예수님의 손입니다. 우리의 시대가 주님의 손 안에 있고 우리의 운명이 주님의 손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의 친절한 팔에 안기세 우리 맘이 평안하리니 항상 기쁘고 복이 되겠네 영원하신 팔에 안기세 주의 팔에 그 크신 팔에 안기세 주의 팔에 영원하신 팔에 안기세”(458).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아무 가치 없는 히브리 노예들을 저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그리고 어린양의 피와 모세의 순종의 손을 보시고 구원하셨습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 가치 없는 우리 죄인들을 우리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그리고 우리들이 믿고 의지하는 예수님의 피와 손을 보시고 우리들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십니다. 우리들이 평생토록 잊지 말고 힘써 하여야 할 일은 하늘을 향해서 고통 소리와 신음 소리를 내는 일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피를 우리 마음과 몸에 항상 바르는 일과 주님의 손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일입니다. 그러면 구원의 은혜와 축복을 영원토록 받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하여야 할 일이 하나 더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저들의 고통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 피의 복음과 사랑을 전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순종과 사랑의 손길을 저들에게 펴야 합니다. 그러면 저들도 구원의 은혜와 축복을 받을 것입니다. 어린양의 피와 모세의 손을 보시고 히브리 노예들을 구원하신 사랑의 하나님께서 여러분들과 여러분들의 가족과 여러분들의 이웃과 여러분들의 동포들을 모두 구원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