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래시장을 둘러보다.
동래 시장 (동萊市場)은 동래구에 있는 조선시대 부터 운영되어 온 역사적인 전통시장 이다 .
시장은 1930년에 목조 건물로 지어졌고 1937년 6월에 현재 위치로 다시 이전되었다.
목조 건물은 1968년 12월 22일에 화재로 소실되었고. 1970년 8월 6일에 철근 콘크리트 건물이 지어졌다.
1990년대에 여러 슈퍼마켓과 쇼핑몰이 이 지역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부산의 주요 상업 장소로 여겨졌다.
2002년에 리노베이션되었고, 시장에 에어컨, 난방 시설, 주차장이 설치되었다.
현재 2층 건물로 이루어져 있으며 면적은 3,666m 2 (39,460평방피트)이다.
346개의 매장이 있고 1층에서는 해산물, 야채, 과일 등 다양한 식품을 2층에는 생활용품을 판매한다,
시장의 모든 상인들은 시장 협동조합에 속해 있다
시장 2층
국수 오천원
붐비는 시장
상인들은 "김장 시기에 출하되는 고랭지 배추의 작황은 장마 뒤 폭염이 이어졌지만 우려와 달리 상태는 좋은 편이고 일부 밭에서 꿀통 현상(뿌리 부분이 물러지거나 배추 속잎이 썩는 현상)이 발견되기 시작한 것은 사실이지만 전체적으로 봤을 때 예년에 비해 그 피해가 심각한 수준은 아니다" 라고 한다.
김치 담그는 섬세한 여인의 손길이 아름답다.
송공단
이 단은 1742년(영조 18) 동래부사 김석일(金錫一)이 세운 추념 제단이다.
본래 임진왜란 때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이 순절한 정원루(靖遠樓) 터에 설치하였는데, 송상현을 비롯하여 동래성을 지키다
순절한 분들을 모셨다.
이 단이 세워지기 전에는 동래읍성의 남문 밖 농주산(弄珠山 : 동래경찰서 자리)에 임진왜란 때 순절한 분들의 전망제단(戰亡祭壇)을 세워 동래부사 송상현과 양산군수 조영규(趙英圭), 동래교수 노개방(盧蓋邦)을 비롯하여 동래성에서 순절한 분들을
모셨다.
1742년 송공단이 세워지자 그 곳으로 옮겼다.
송공단은 처음에는 동서남북의 4단으로 되어 있었다. 북단에는 송상현․조영규․노개방 등을, 동단에는 유생 문덕겸(文德謙) 등을, 서단에는 송상현의 첩 금섬(金蟾) 등을, 남단에는 향리 송백(宋伯) 등을 모시고 매년 음력 4월 15일 관에서 제사를 올렸다.
송공단이 세워진 정원루(靖遠樓)는 원래 동래동헌 객사에 딸린 누각이다.
정원루는 조선 세종 28년에 김시로 동래부사가 만들고, 신숙주가 일본 등 변방을 조용하게 한다는 뜻으로
정원(靖遠)으로 이름을 지었다.
일본인들은 사나워 의리로 굴복키 어렵다. 군사로 대비하지 않으면 안된다.
— 정원루 기문, 신숙주
1442년 조선 통신사 서장관으로 일본에 다녀온 실사학자 신숙주는 일본을 무시하는
깔본 다른 사신과 달리 일본이 앞으로 조선에 큰 우환이 될것으로 보았다.
당시 일본은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세운 무로마치 막부가 쇠퇴하고 일본 66주간의 전국시대가 시작되는 시기로
일본인의 호전적이고 조직적인 전투장면을 보고 그들은 타고난 싸움꾼으로 그 화가 조선에 미칠 것을 알았다.
동래독진대아문(東萊獨鎭大衛門) 편액과 홍살문
일제강점기, 일본이 우리 민족에 대해 저질렀던 만행은 끝이 없었다. 민족의 정기를 끊어 놓기 위해 산이나 바위에 쇠말뚝을 박는 것은 물론이고 주요 문화재나 유물들을 약탈해 갔는가 하면, 특정 장소의 구조물이나 건축물을 전혀 다른 용도로 사용하거나 사사로이 자신들의 정원을 꾸미는 치장물로 이용하기도 했다.
동래 금강공원 숲에 있었던 독진대아문(獨鎭大衙門)도 일제강점기, 일본이 행한 만행의 흔적 가운데 하나이다.
우리 민족정기 말살의 하나로 1930년께 아무런 연고도 없는 금강공원 숲 속에 버리다시피 했던 동래부 동헌 바깥 대문인 독진대아문이 80여 년 만에 제자리 인근에 제 모습을 되찾았다.
독진대아문은 현재 금강공원 입구에 있는 망미루(望美樓)와 함께 동래부 동헌 내(현재 농협 동래지점)에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지금의 금강공원 숲 속으로 옮겨졌다.
부산시 유형문화재 제5호인 독진대아문은 1636년 동래부사 정양필이 동헌 정당(正堂)인 충신당과 함께 지은 것으로 동래부 동헌의 바깥 대문이다.
1655년(효종 6) 동래부의 군사권이 경상좌병영 휘하 경주진영에서 독립해 동래독진(東萊獨鎭)이 되었음을 알리는 동래독진대아문(東萊獨鎭大衙門)이란 현판이 정면에 걸려 있다.
鎭邊兵馬節制營(진변병마절제영) 交隣宴餉宣慰司(교린연향선위사)라고 적힌 柱聯의 뜻
은 동래부가 진변의 병마절제사영이고 대일외교 떄 일본 사신을 접대하는 관아라는 뜻이다.
이 누각은 1742년(영조 18) 동래부사 김석일(金錫一)이 동래부 청사인 동헌(東軒) 앞에 세운 문루이다.
옛날 한양으로부터 부임해온 어느 동래부사가 임금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기 위해 이 누각을 망미루로 불렀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1919년 동래의 3․1운동은 이 누각에서의 만세 삼창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전면에는 동래도호아문(東萊都護衙門)라고 쓰여진 큰 편액이 걸려 있고, 후면에는 망미루(望美樓)라는 큰 편액이 걸려 있다.
1895년(고종 32) 동래도호부가 동래관찰사영(東萊觀察使營)으로 승격됨에 따라 일명 포정사(布政司)라고도 불렀다. 누각 위에는 동래성 4대문의 여는 시각과 정오를 알리기 위해 치는 큰 북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
이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높은 주초석(柱礎石) 위에 놓여 있다.
팔작(八作)지붕으로 된 2층 누각이며, 두공(枓栱) 양식은 2익공(二翼工)이다. 마루는 귀틀마루이며, 주위에는 계자난간(鷄子欄干)을 둘렀다. 처마는 부연(浮椽)이 붙은 겹처마이다. 이 누각은 조선후기의 전형적인 관아 문루로 부산지방의 대표적인 건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