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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와 축복에 대한 감사 (시65:1~13) 찬송 ; 404장.
본 시편 말씀은 온 우주의 창조주시오, 그 모든 질서를 홀로 주관하시는 통치자이신 하나님께 대한 찬양과 감사시입니다. 특별히 다윗은 본 시편을 통해 인간의 죄를 사하시고 그 모든 인간으로 당신의 거룩한 전에 거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을 찬양하고(1~5), 삼라만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초월한 권능을 노래하며(6~8), 이 땅의 풍부한 소출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찬미하고 있습니다(9~13).
1.사죄의 은총을 베푸셔서 자녀 삼으신 주님께 감사 찬양합니다(1~5).
다윗은 본문 4절 말씀에서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라고 말씀합니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20세 이상 되는 남자는 모두 유월절(무교절), 맥추절(칠칠절, 오순절), 장막절(초막절)에 각각 3번은 하나님의 성전에 나아가야 했습니다(출23:14~17). 그리고 거기서 주께 감사 찬양을 드리며 하나님 앞에 거룩한 교제를 나누어야 했습니다. 이런 신앙의 전통은 모세가 율법을 받은 이후 다윗시대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다윗은 이러한 절기 때마다 장막으로 나아가 기쁨과 감격을 가지고 예배드렸습니다.
특히, 택한 백성으로 부르시고 애굽에서 건져서 율법과 함께 제사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해 주신 그 은총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런 주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 다윗은 더 이상 아무것도 필요 없었습니다. 그저 주님이 임재해 계시는 성전이 가까이 있고, 또한 그것에 나아갈 수 있는 것만으로도 부족한 것이 없고 아쉬운 것이 없었습니다(4절). 그래서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이렇게 구원의 은총을 입은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주님이 우리의 구원자이신 것 하나만으로도 주님을 찬양할 수 있어야 합니다.
2.우주 만물을 다스리시고 주관하시는 주님께 감사 찬양합니다(6~9).
계속해서 다윗은 우주 만물에 나타난 하나님의 주권과 신성을 바라보며 감사 찬송을 하였습니다. 다윗은 멀리 우뚝 솟은 산을 바라보며 “주님의 권능으로 산을 세우시며”(6절)라고 찬양하였습니다. 또한 다윗은 바다에서 광풍이 일어나는 것도 물결이 요동치는 것도, 또 반대로 광풍과 물결을 잔잔케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라고 고백합니다(7절). 나아가 다윗은 “주께서 아침 되는 것과 저녁 되는 것을 즐거워하게 하시며”(8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 아침에 동녘에 붉게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보며 해를 창조하사 밝은 광명을 주시고 인생의 하루를 살게 하신 주님을 바라보고 기뻐하며 감사하였습니다. 또한 그 광명 아래서 우뚝 솟은 산과 물결치는 바다를 바라보면서 주의 위엄과 권능을 목격하고는 주의 능력에 감격하여 주의 신적 위엄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녁이면 어둠을 주사 만물이 휴식하게 하시고, 또한 그 고요함을 주사 그 속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다시 한 번 가슴에 새기고 신령한 대화와 교제를 나누게 하신 것에 감사하였습니다. 이렇게 되어 어두워지면 육신의 눈만 감고 대신 신령한 눈을 열어 하나님과 대화하며 주께 감사하였습니다.
사실 해가 뜨고 달이 뜨는 것이 무엇이 그리 대단한 일이겠습니까? 보통 사람 같으면 대수롭지 않은 일로 생각하고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일상사에서 지금까지 있어왔고 또 앞으로 있을 그런 평범한 것에서도 하나님의 능력을 발견하고 감사하며 찬양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3. 시절을 따라 풍성한 식량을 베푸시는 주님께 찬양합니다(10~13).
다윗은 땅이 풍성한 소출을 내고 초장에는 양떼가 무리를 이루고 있는 모습을 보며 주님께 감사 찬양하고 있습니다. 본문 9~11절 말씀에 보면 “땅을 권고하사 물을 대어 심히 윤택케 하시며 하나님의 강에 물이 가득하게 하시고 이같이 땅을 예비하신 후에 저희에게 곡식을 주시나이다 주께서 밭고랑에 물을 넉넉히 대사 그 이랑을 평평하게 하시며 또 단비로 부드럽게 하시고 그 싹에 복주시나이다 주의 은택으로 년사에 관 씌우시니 주의 길에는 기름이 떨어지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풍성한 소출과 식량을 허락하신 모든 것이 주의 은혜임을 분명히 깨닫고 감사하였습니다. 땅이 비옥하게 된 것도, 하나님이 윤택케 하셨기 때문임을 깨달았습니다. 또한 논과 밭에 물이 풍성한 것도 주께서 은혜를 베풀어 적당한 우로를 내려 주셨기 때문임을 알았습니다.
자신이 열심히 땀을 흘렸기에, 아니면 자신이 부지런 했기에, 아니면 자신이 토양과 곡물을 잘 관리하였기에 농사에 성공하고 큰 소출을 내었다고 자만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주님께서 택한 백성들에게 농사지을 땅을 기억해 주시고, 또 필요한 때에 필요한 양의 비를 적당히 주시니 아름답고 풍성한 실과와 곡식을 얻게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어찌 다윗의 입에서 감사 찬송이 흘러나오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현실을 어떻게 바라보느냐? 에 따라서 감사도 할 수 있고, 반대로 불평과 원망도 할 수 있는 것임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신앙의 안목으로 올바른 역사관과 우주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항상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풍성한 소출을 허락하신 주님께 감사하며 즐거이 외치고 노래하리라(13절)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
다윗은 사죄의 은총을 베풀어 자신을 주의 거룩하신 자녀로 삼으신 것에 감사하였습니다. 또한 우주 만물을 다스리시고 주관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감사 찬송하였습니다. 그리고 시절을 따라 풍성한 과실을 주시며 식량을 베풀어 주신 주님께 감사 찬양하였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범사에 감사하는 우리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민족의 구원을 감사함(시66:1~20) 찬송 ; 367장.
본 시편 말씀은 작시자가 누구인지에 관해서 여러 가지 설이 많이 있으나 분명한 자료는 없고 다만 유다의 한 왕으로 알려져 있을 뿐입니다. 다윗이나 여호사밧, 히스기야 중의 한 사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본 시편 말씀은 민족적인 차원에서 만민들에게 하나님을 찬양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로서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구원하신 사실을 노래하며(1~12), 또 개인적인 차원에서 자신의 기도가 용납된 사실을 기뻐하며 그 서원한 바를 갚는 감사의 노래가 소개되고 있습니다(13~20).
1. 민족적인 구원을 노래하고 있습니다(1~12).
시인은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 사건을 노래하기에 앞서 온 세상을 이스라엘의 기쁨에 초대하고 있습니다(1절). 그리고 온 세상을 향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송축하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5절). 그리고나서 시인은 하나님께서 출애굽할 때에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 홍해를 가르시고 요단강을 마르게 한 사건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이 아니고서는 어찌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출하셨을 뿐만 아니라 택한 백성을 약속의 땅(풍부한 곳, 12절)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택한 백성을 구원하시고 지속적으로 보호하십니다. 그러므로 이후에라도 택한 백성을 괴롭히거나 핍박하는 자는 결코 안전하지 못할 것입니다. 시인이 이스라엘의 구원을 만방에 알게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기까지 이 땅에는 악한 세력이 흉용하겠지만 택한 백성, 하나님의 자녀들은 장차 온 땅이 하나님의 권능으로, 하나님의 의로운 통치로 충만한 때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께서는 바로 우리 자신을 구원하실 구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의 비전을 가지고 하나님의 구원을 감사하고, 노래하기를 쉬지 않아야 합니다.
2. 자신의 구원을 노래하라고 권면합니다(13~20).
시인은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로 인도함을 받은 사실에 대하여 노래하고 있습니다. 특히 시인은 자신의 구원에 대해 서원형식을 빌어 노래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곧 시인은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으로 구원받은 체험을 서원의 이행이라는 구원받은 자의 의무 이행으로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여러분들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은 경험을 이 시인처럼 말할 수 있습니까? 그리스도를 믿게 된 사실, 그리스도의 피 공로로 구원받을 수 있었던 사실, 이 모든 일이 얼마나 큰 은총입니까? 실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인하여 무서운 과거를 지나올 수 있었습니다. 이를 생각할 때에 우리는 주 앞에서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백성 된 의무를 게을리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보잘 것 없는 나를 구원해 주신 은총을 감사하며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향한 찬양을 공동체적으로도 또 개인적으로도 끊이지 말아야 합니다.
특히 찬양과 경배를 하되 15절에서는 제사를 통하여 영광돌리기를 원했습니다. 이런 제사는 신약의 십자가 제사를 연상시키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사는 십자가 앞에서 찬양입니다. 결코 불결한 몸이나 입술로 드려서는 열납 되지 않는 제사입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일차적으로 선민을 통해 구원의 사역을 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신약의 그리스도는 만민 중에서 구원의 사역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본문 16절 말씀에 보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너희들아 다 와서 들으라 하나님이 내 영혼을 위하여 행하신 일을 내가 선포하리로다.”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전도의 사명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새롭게 변화된 수가 성 여인은 물동이를 버리고 동네에 들어가 온 동네 사람들에게 전도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은 바로 이 전도의 사명을 심어주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전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보다 더 큰 은혜를 베푸시는 시약시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행하신 크신 일들을 깨닫고, 그것을 나아가 증거하는 전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리스도 안으로 부르시고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이름을 주셨으며 신령한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은혜에 보답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아멘.
주의 구원을 열방에 전하자 (시67:1~7) 찬송 ; 268장.
본 시편의 배경에 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전통적으로 이스라엘의 가을 추수 감사절기인 장막절(초막절)에 부른 감사의 찬송으로 여겨집니다. 장막절이란? 다른 말로는 초막절, 수장절이라고도 부릅니다. 이스라엘은 장막절이 되면 광야에 나가 1주일 동안 초막을 짓고 그곳에 거하면서 축제를 벌였습니다(레23:33~43). 본 시편은 이렇게 장막절에 주의 구원의 은총을 기억하고 또한 1년 동안 풍성한 수확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기 위해 지어진 시입니다. 다시 말해서 신앙의 추수를 비유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1. 긍휼히 복 주실 것을 구하고 있습니다(1절).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축복의 근거입니다. 그러므로 풍성한 소출과 수확할 수 있는 놀라운 축복은 전부 하나님의 긍휼 때문인 것입니다. 도무지 우리가 이러한 축복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모두 죄와 허물로 죽었던 자였습니다(엡2:1). 그러므로 축복은 고사하고 본질상 진노의 자녀(엡2:3)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은혜를 주신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2. 이 놀라운 구원이 이스라엘 뿐 만 아니라 모든 민족과 열방까지 미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2~6)
시인이 처음 축복은 이스라엘에게 한정하여 구하고 있으나(1절) 후에 그 영광은 모든 민족에게 돌아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본문 2절 말씀에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만방 중에 알리소서.”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모든 민족이 주님으로부터 큰 은혜를 힘입어 풍성한 수확을 나누며 함께 즐거움에 참예하기를 소원한 것입니다. 그러기위해 시인은 먼저 이스라엘이 구원의 도를 널리 만방 중에 널리 선포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생각을 가진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먼저 부르신 것이 바로 이 하나님의 구원을 위한 제사장 나라로 부르신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먼저 부르시고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자신들의 구원을 자랑하도록 이스라엘을 부르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구원의 은혜를 천하 만민에게 전하기 위한 도구로서 이스라엘을 부르신 것입니다. 지금 시인은 풍성한 가을 수확을 하면서 바로 이런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와 세계선교계획을 보았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놀라운 사실에 만민들이 찬양할 것을 소원하고 있는 것입니다(3, 5절).
3. 땅 끝까지 복음화 될 것을 소원하고 있습니다(7절).
천하 만민 가운데서 하나님의 권세가 드러나기를 간구하고, 온 세상 끝까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로 넘쳐나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소원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입니다. 행1:8절 말씀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복음화의 지상명령이 이 세상의 최대의 명령입니다. 역사가 이것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마24:14절 말씀에 보면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고 하였습니다. 복음이 땅 끝까지 증거되지 않으면 이 세상은 계속 돌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이 다 증거되고 나면 이 세상 역사는 종말을 고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지금 시간이 흐리고 있는 유일한 이유는 이 복음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명과 사업과 직장과 삶을 바로 여기에 맞추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마6:33절 말씀에 보면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복음이 이 땅에 끝까지 증거되어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마6:10절 말씀은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희어져 추수할 때가 된 저 방황하고 갈급하여 있는 심령들을 삶의 현장에서 보아야 합니다. 눈이 열려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길과 진리와 생명을 찾지 못하여 방황하고 있는 수많은 무리들을 보시고는 희어져 추수할 때가 된 곡식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냥 생존경쟁에 치열한 삭막한 세파에 반질반질 닳은 사람들로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영안을 열고 바로 실상을 보아야 합니다. 영적으로 죽어가고 있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강도의 칼에 맞아 신음하고 죽어가는 강도만난 자들이 바로 우리 주변에 있는 불신자들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 강도요 도적인 사탄의 죄와 저주와 죽음의 칼에 맞아 방황하는 저 영혼들을 누가 살려 낼 것입니까? 오직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우리가 복음을 들고 현장으로 가서 살려내기를 주님은 원하십니다. 마28:19~20절 말씀에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복음증거, 하나님 나라 건설, 이 일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금 이 땅에 두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일을 등한히 하는 사람은 구속사적인 측면에서 말한다면 이 세상에 있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주의 일에 헌신하는 우리의 남은 삶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승리
(시68:1~35) 찬송 ; 384장.
본 시편의 배경은 다윗이 이스라엘 왕으로 등극한 이후 암몬 족속과의 전쟁에서 대승한 이후(삼하10~11장), 혹은 다윗이 오벳에돔의 집에 안치되어 있던 언약궤를 시온으로 옮겨올 때(삼하6:2~18) 등 두 가지가 있습니다. 일종의 개선가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노래한 찬양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1. 원수를 멸하시고 흩으시는 하나님(1~6, 11~18).
흔히 세상을 일컬어 고해라고 합니다. 인생의 험난한 여정을 무서운 광풍이 몰아치고 거센 풍랑이 쉬지 않고 일어나는 바다에 빗대어 한 말입니다. 이처럼 인생은 잠시도 평탄한 날이 없습니다. 거센 파도가 지나가는가 싶더니 이제는 산더미와 같은 광풍이 온 천지를 뒤덮는 것이 바로 인생입니다.
왜 인생은 이렇게 끊임없이 크고 작은 풍랑과 물결에 휩싸여야 할까요? 그것은, 첫째, 인생이 죄 가운데 타락했기 때문이요, 둘째, 이 타락한 세상에 공중 권세 잡은 마귀가 삼킬 자를 찾아 울부짖기 때문입니다. 이런 시련은 구약 성도들로부터 오랫동안 많이 겪어 왔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본문 1절 말씀에서 “하나님은 일어나사 원수를 흩으시며 주를 미워하는 자로 주의 앞에서 도망하게 하소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어려울 때마다 도우셔서 대적을 물리쳐 주셨습니다. 과거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가나안 7족속들을 물리치게 하사 마침내 가나안을 차지하게 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다윗은 회상하고 있습니다(7~27절).
하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시는 분이십니다. 오늘날은 우리 속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통하여 사탄을 결박하여 우리로 하여금 승리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과 권세를 찬양해야 합니다.
2. 광야 같은 세상에서 먹이시고, 입히시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7~10).
본 시편 저자는 당시 광야 40년을 회상하고 있습니다. 본문 9절 말씀에 “하나님이여 흡족한 비를 보내사 주의 산업이 곤핍할 때에 견고케 하셨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이스라엘이 광야생활을 하는 동안에 때를 따라 적절하게 먹고 마시고, 입은 것이 모두 하나님의 은혜임을 분명하게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치 가뭄에 해갈을 주듯이 논과 밭에 풍성한 비를 내리듯 오랫동안 끊임없이 먹이시고 입히시며 기르셨습니다.
200만 명이 넘는 이스라엘 군중들을 광야에서 먹이시고 입히시고 보호하셔서 가나안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것도 40년 동안이나 그렇게 하셨습니다. 지금도 광야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을 먹이시고 입히시며 보호하시는 분은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바로 이 은혜를 구하며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3. 영광 가운데 하늘 보좌에 좌정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24~27).
본문 24절 말씀에 보면 “하나님이여 저희가 주의 행차하심을 보았으니 곧 나의 하나님 나의 왕이 성소에 행차하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시인은 이스라엘 군대가 이방 대적을 물리치고 영광스런 모습으로 개선하는 것을 보고는 마치 하나님께서 성소에 좌정하시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습니다.
마귀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영원한 승리를 하신 그리스도는 만왕의 왕이십니다. 우리가 유일하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이며, 승리의 근거입니다. 그러므로 시험과 환난이 많은 이 세상에서 날마다 승리를 주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딤후4:7~8절 말씀에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고 했습니다.
고전9:24~27절 말씀에서는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 하였습니다.
빌3:14절 말씀에서도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고 했습니다. 또 빌3:20절 말씀에서는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소망이시며 예수 그리스도는 그것을 우리에게 확증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가운데 늘 승리하는 삶이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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