聞新羅真平王第三公主善花(一作善化) 羙艶無雙, 剃髮來京師. 以薯蕷餉閭里羣童, 羣童親附之. 乃作謡誘羣童而唱之云.
문신라진평왕제삼공주선화(일작선화).미염무쌍.체발래경사.이서여향려리군동.군동친부지.내작요.유군동이창지운.
"善化公主主隠, 他密只嫁良置古, 薯童房乙夜矣卵乙抱遣去如."
선화공주주은타밀지가량치고서동방을야의묘을포견거여
童謡滿京逹扵宫禁, 百官極諌竄流公主扵逺方
동요만경.달어궁금.백관극간.찬류공주어원방.
신라 진평왕의 셋째공주 선화(善花, 혹은 善化)가 아름답기 짝이 없다는 말을 듣고 머리를 깎고 [신라의] 수도로 갔다. 마를 동네 아이들에게 먹이니 아이들이 친해져 그를 따르게 되었다. 이에 노래를 지어 여러 아이들을 꾀어서 부르게 하니 그것은 이러하다.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사귀어 두고 서동방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善化公主主隠, 他密只嫁良置古, 薯童房乙夜矣卵乙抱遣去如)"
동요가 도성에 가득 퍼져서 대궐 안에까지 들리자 백관(百官)들이 임금에게 극력 간하여 공주를 먼 곳으로 귀양보내게 했다.
삼국유사 권 제2 기이(紀異) 무왕(武王) 조
《삼국유사》에 전하는 신라 향가의 하나이다. 민간 설화가 향가로 승격된 예 중 하나이다.
훗날 백제 무왕(武王)이 되는 서동(薯童)이라는 인물이 신라 경주에 가서 꾀를 내어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와 결혼한 후 우연하게 얻은 금으로 사찰을 창건한다는 이야기가 서동 설화이며, 이 서동 설화에 등장하는 노래가 <서동요>다.
이 서동요의 내용은 한 마디로 선화공주가 방문을 열어놓으면 밤마다 맛동이 와서 자고 간다는 내용.
백제인인 가난한 서동은 마를 캐면서 살았기에 맛동이라고 불리었는데, 신라에 가서 아이들에게 마를 나누어주면서 이 불순한 노래(서동요)를 부르게 하여 스캔들급 루머(헛소문)를 퍼트린다. 루머를 들은 왕은 공주를 궁궐에서 쫓아낸다. 결국 서동은 자신이 퍼뜨린 소문대로 결혼에 성공했다고 한다. 선화공주는 쫒겨나올 때 가져온 금을 떼어서 그럭저럭 생계를 유지했고, 이를 안 서동은 마를 캘 때 나온 금이 산더미만큼 있다고 하고는 왕에게 인증까지 했다. 그리하여 서동은 어찌어찌 해서 금도 얻고 인심도 얻어 백제의 왕이 되고,[2]결국 선화공주와 함께 유명한 백제 사찰인 미륵사[3]를 창건했다는 내용이 설화의 전문이다. 이 때문에 백제 최대의 사찰이었던 미륵사와 서동 설화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고려사(高麗史)》[4]#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5]#에는 "말통(末通)대왕"이란 명칭으로도 나오는데, 이는 바로 "薯童"을 훈독한 "맛둥" 정도의 어휘를 적은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다만 선녀와 나무꾼처럼 현대의 시점으로 다시 본다면 문제가 있는 내용이다. 타국의 공주를 모해할 목적으로 노래를 지어서 퍼트린 것이 사실이라면, 현대 기준으로 명예훼손의 구성요건을 충족한다. 여성의 정절을 중요시하던 시대에 무고한 왕족 여성을 음란한 여자라 모함하여 비참한 처지로 만든 뒤 차지한 셈이다.
■ 서동요
-작자 : 서동(薯童)
-연대 신라 진평왕 때(599년 이전), 백제 무왕의 젊은 시절
-성격 참요[시대적 상황이나 정치적 징후 따위를 암시하는 민요. (신라의 멸망과 고려의 건국을 암시한 〈계림요〉, 조선의 건국을 암시한 〈목자요(木子謠)〉, 미나리와 장다리로 인현 왕후와 장 희빈을 관련지어 노래한 〈미나리요〉 따위가 여기에 속한다.)
예언, 암시하는 노래], 동요
-종류 4구체(전래되어 온 민요가 정착됨) -제재 선화 공주의 사랑
-주제 선화 공주에 대한 연정(戀情), 선화 공주의 은밀한 사랑, 선화 공주의 비행 풍자, 결혼 계략
-의의 ① 현전하는 가장 오래 된 향가 작품이다.
② 민요가 4구체 향가로 정착한 유일한 노래이다.
③ 향가 중 유일한 동요(童謠)이다.
④ 서동 설화가 노래의 배경 설화가 되고 있다.
-출전 삼국유사(三國遺事)
4) 관련 설화
제 30대 무왕의 이름은 장이다. 어머니가 홀로 되어 집을 서울 남쪽 못가에 짓고 살았는데 못에 있는 용과 교통하여 그를 낳았다. 어릴 때 이름은 서동이며, 도량이 한없이 넓었다. 항상 마를 캐고 팔아서 생업으로 삼았으므로 사람들이 그런 이름을 지은 것이다. 신라 진평왕의 셋째 공주 선화가 아름답기 짝이 없다는 말을 듣고 머리를 깎고 서울로 왔다. 마를 동네 아이들에게 주자 여러 아이들이 가까이 따랐다. 이내 노래를 지어 여러 아이들에게 부르게 하였다.
동요가 장안에 퍼져 궁중까지 알려지니 모든 신하들이 간청하여 공주를 먼 곳에 귀양 보내게 되었다. 공주가 떠나려할 때 왕후가 순금 한 말을 주어 보냈다. 공주가 귀양 가는 길에 서동이 나와서 절을 하고 모시고 가겠다고 하였더니, 공주는 그가 어디에서 온 사람인지 알지는 못하지만 공연히 미덥고 즐거웠다. 그래서 따라가다가 상통하게 되었다. 그런 뒤에 서동의 이름을 알고 동요가 맞는다 하여 함께 백제로 가서 어머니가 준 금을 내놓으며 이것으로 생활을 영위하자 하였다. 서동이 크게 웃으며 “이것이 무엇이냐?”하니 공주는 “황금인데 백 년 동안 부자로 살 수 있을 것입니다.”하였다. 서동은 그 말을 듣고 “내가 어려서 마를 캐던 곳에는 이것이 진흙처럼 쌓였었다.”하였다. 공주가 듣고 깜짝 놀라 “이것은 천하의 보배인데 당신이 금이 있는 곳을 알았으니 이 보배를 우리 부모의 궁전으로 보내는 것이 어떠합니까?”하였다. 서동이 “좋다.” 하고 금을 모았는데 그것이 구릉처럼 쌓였다. 용화산 사자사 지명법사가 머무는 곳에 가서 금을 보낼 계책을 물으니 “금만 가져오라”고 하여 공주는 편지를 쓰고 금을 법사에게 가져다주었다. 법사는 신통한 힘으로 하룻밤에 신라 궁중으로 실어다 놓았다. 진평왕이 그 신통한 변화를 이상히 여겨 더욱 존경하고 항상 서신으로 안부를 물었고, 서동은 이로 인해서 인심을 얻어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하루는 무왕이 부인과 사자사에 가려고 용화산 밑 큰 못가에 이르자 미륵삼존이 못에서 나타나 수레를 멈추고 경의를 표하였다. 부인이 왕에게 “이곳에 큰 절을 세우는 것이 소원입니다.” 하니, 왕이 허락하였다. 지명법사에게 나아가 못을 메울 일을 묻자 법사는 신통한 힘으로 산을 무너뜨려 하룻밤 사이에 못을 메워 평지를 만들었다. 이에 미륵삼회를 법상으로 하여 전, 탑, 낭, 무를 각각 세 곳에 세우고 절 간판을 미륵사(국사에는 왕흥사라 했다)라 하였는데, 진평왕은 많은 공인들을 보내어 도왔다. 지금도 그 절이 있다. (삼국사에는 법왕의 아들이라 하고 여서는 과부의 아들이라 하니 확실치 않다.)
[삼국유사 권2 기이. 무왕]
武王(古本作武康.非也.百濟無武康)
第三十,武王名璋.母寡居.築室於京師南池邊.池龍交通而生.小名薯童.器量難測.常掘薯蕷.賣爲活業.國人因以爲名.
聞新羅眞平王第三公主善花(一作善化).美艶無雙.剃髮來京師.以薯蕷餉閭里羣童.羣童親附之.乃作謠.誘群童而唱之云.善化公主主隱他密只嫁良置古薯童房乙夜矣卯乙抱遣去如.
東謠滿京.達於宮禁.百官極諫.竄流公主於遠方.將行.王后以純金一斗贈行.公主將至竄所.薯童出拜途中.將欲侍衛而行.公主雖不識其從來.偶爾信悅.因此隨行.潛通焉.然後知薯童名.乃信童謠之驗.同至百濟.出母后所贈金.將謀計活.薯童大笑曰.此何物也.主曰.此是黃金.可致百年之富.薯童曰.吾自小掘薯之地.委積如泥土.主聞大驚曰.此是天下至寶.君今知金之所在.則此寶輸送父母宮殿何如.薯童曰可.於是聚金.積如丘陵.詣龍華山師子寺知命法師所.問輸金之計.師曰.吾以神力可輸.將金來矣.主作書,幷金置於師子前.師以神力.一夜輸置新羅宮中.眞平王異其神變.尊敬尤甚.常馳書問安否.薯童由此得人心,卽王位.一日.王與夫人.欲幸師子寺.至龍華山下大池邊.爾勒三尊出現池中.留駕致敬.夫人謂王曰.須創大伽籃於此地.固所願也.王許之.詣知命所.問塡池事.以神力一夜頹山塡池爲平地.乃法像彌勒三,會殿塔廊廡各三所創之.額日彌勒寺.(國事云王興寺).眞平王遣百工助之.至今存其寺(三國史云是法王之子.而此傳之獨女之子.未詳).
무왕(고본작무강.비야.백제무무강)
제삼십,무왕명장.모과거.축실어경사남지변.지용교통이생.소명서동.기양난측.상굴서여.매위활업.국인인이위명.
문신라진평왕제삼공주선화(일작선화).미염무쌍.체발래경사.이서여향려리군동.군동친부지.내작요.유군동이창지운.선화공주주은타밀지가량치고서동방을야의묘을포견거여.
동요만경.달어궁금.백관극간.찬류공주어원방.장행.왕후이순금일두증행.공주장지찬소.서동출배도중.장욕시위이행.공주수불식기종래.우이신열.인차수행.잠통언.연후지서동명.내신동요지험.동지백제.출모후소증금.장모계활.서동대소왈.차하물야.주왈.차시황금.가치백년지부.서동왈.오자소굴서지지.위적여니토.주문대경왈.차시천하지보.군금지금지소재.칙차보수송부모궁전하여.서동왈가.어시취금.적여구릉.예용화산사자사지명법사소.문수금지계.사왈.오이신력가수.장금래의.주작서,병금치어사자전.사이신력.일야수치신라궁중.진평왕이기신변.존경우심.상치서문안부.서동유차득인심,즉왕위.일일.왕여부인.욕행사자사.지용화산하대지변.이륵삼존출현지중.유가치경.부인위왕왈.수창대가람어차지.고소원야.왕허지.예지명소.문전지사.이신력일야퇴산전지위평지.내법상미륵삼,회전탑랑무각삼소창지.액일미륵사.(국사운왕흥사).진평왕견백공조지.지금존기사(삼국사운시법왕지자.이차전지독여지자.미상).
5) 시어 ․ 시구 연구 및 분석
․ 善化公主니믄 - 선화 공주님은 (선화 공주는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 ․ 그지 - 남 모르게
․ 얼어 두고 - 정을 통하고, 정을 맺고, 시집가 놓고. ‘얼다’는 ‘시집가다, 혼인하다, 정을 통하다’의 뜻임.
․ 맛둥바 - 맛둥 도련님을, 서동이를. ‘마’는 ‘감자’, ‘둥’은 ‘아이’로 ‘맛둥’은 ‘서동(薯童)’이다(마를 파는 아이).
‘방’은 접미사로 오늘날 ‘-뱅이’(주정뱅이, 게으름뱅이 등)의 ‘뱅’과 같은 것이다. ‘방’은 ‘사람(남자)에 쓰이던 말.
․ 바[夜矣] - 밤에. ․ 몰[卯乙] - 몰래.
․ 안고 가다[抱遺去如] - 안고 가다.
6) 요점 정리
-현전하는 최고의 향가로 민요가 4구체 향가로 정착된 것이다.
-일종의 참요(讖謠)로 주객(主客)이 전도되어 있다.
-소박하고 꾸밈이 없는 애정관과 신분의 제약을 뛰어넘는 사랑의 세계가 담겨 있다.
-4구체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는 점에서 고대 가요의 형식을 계승하고 있다.
7) 생각해 봅시다
-이 작품의 배경 설화는 "서동의 출생담, 서동의 결연담, 서동의 등극담, 사찰 연기담"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와 관련하여 이 작품의 성격을 생각해 보자.
▶ 구애의 노래. 민요로서의 집단성과 보편성을 가짐. 서사적 사건을 구성하는 영웅의 일화. 전승 민요를 서동이 개작한 것으로 볼 수 있음.
-이 작품에 나타난 애정관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 소박하고 낙천적이며 꾸밈이 없고 적극적이다. 낭만적 성격을 갖고 있으며 신분적 제약을 뛰어 넘고 있다.
- 이 작품은 고대 가요의 형식을 계승하는 측면이 있다. 어떤 점에서 그런지 살펴보자.
▶ 공무도하가, 구지가, 황조가 등이 그러하듯이 4구체로 되어 있다.
8) 이것만은 알아야
-이 작품의 표현상 특징을 살펴보자.
▶ 참요(讖謠) - 서동요는 민요 중에서도 동요(童謠)이며, 선화 공주와 서동의 결합을 암시하므로 의도적인 측면에서 참요로 분류된다.
8) 참고 사항
<서동요에 대한 이설(異說)>
-이 노래에 대한 사연으로 보아 이는 무왕 시대의 것이라는 설[이병도]과 백제가 망할 무렵에 신라 군졸로부터 사찰을 보호하기 위하여 퍼뜨린 연기설화(緣起說話)라는 설[황수영] 등이 있다.
-참요(讖謠)
+시대적 상황이나 정치적 징후 따위를 예언하거나 암시하는 민요로, 신라의 멸망과 고려의 건국을 암시한 「계림요(鷄林謠)」, 조선의 건국을 암시한 「목자득국요(木子得國謠)」, 미나리와 장다리로 인현 왕후와 장희빈을 관련지어 노래한 「미나리요」 따위가 여기에 속한다.
․「계림요」 - 『삼국사기』
鷄林黃葉(계림황엽) / 鵠嶺靑松(곡령청송)
계림에는 단풍 들고 / 송악산에 솔 푸르다
→계림은 신라이고, 곡령(송악)은 고려이다. 신라 왕조는 망하고 고려 왕조가 새로 일어날 것을 예언한 노래이다.
․「목자득국」 - 『고려사』
木子得國(목자득국)
나무 아들 나라 얻다. 또는 이씨가 나라를 얻는다.
→木에다 子를 더하면 李가 되니 이성계가 조선조를 세워서 나라의 왕이 된다는 사실을 예언한 노래라는 것이다. 이성계가 왕위에 오를 야심에서 이 노래를 만들어 군사들에게 부르도록 하였다고 한다.
-서동(書童)(600~641)
+백제 제30대 무왕. 휘는 장(璋). 아명이 서동(書童). 신라 서쪽 국경을 여러 번 침공하였고, 수․당에 조공을 하며 고구려를 토벌하기 위해 여러 차례 원병을 청하였다. 수가 망하고 당이 서자 624년에 당에 조공을 하여 당고조로부터 ‘대방군왕 백제왕’에 책봉되었다. 사비궁을 중수하고 왕흥사와 미륵사를 창건하였으며, 관륵 등을 일본에 보내어 천문, 지리 등의 서적과 불교를 전하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