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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통문화 : 한국무용
한국무(韓國舞)는 우리나라 고유의 대한민국의 춤이다 한국의 전통 문화를 바탕으로 하여 만들어진 모든 종류의 무용을 말한다. 한국무는 크게 궁중무·민속무·가면무·의식무·창작무용 등으로 나눌 수 있다. 그리고 한국무용이라는 말 보다는 한국무 또는 한국춤으로 하는 것이 옳다. 무용이라는 단어는 20세기 이후에 쓰여졌다.
한국 가면무용중의 하나인 봉산탈춤
한국 민속무용의 하나인 진도북춤
특징
한국무용의 원초적 형태는 국가적 의식 끝에 있는 축제(祝祭)의 흥이 어깨에서 구체화되어, 장단가락과 박자에 맞추어 온몸으로 퍼지는 춤사위를 한국적인 멋으로 승화한 것으로 집약할 수 있다.
그러나 삼국시대를 거쳐 고려·조선시대로 내려오면서 이러한 한국무용의 특성은 변형되었다. 고려·조선시대의 윤리와 사상의 근저를 이루었던 불교와 유교의 가르침은 자연스럽게 발로되는 감각적 육체의 미를 부정하였고 그 때문에 육체의 노출은 금기(禁忌)로 되어 왔다. 이러한 영향 아래 한국무용의 특성이 변형·정형화(定型化)된 것이 궁정무용(宮廷舞踊)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궁정무용과 함께 한국무용의 양대산맥(兩大山脈)이라 할 민속무용은 한국무용의 고유의 원형(原型)을 살리고, 중국의 무용을 흡수·소화한 것으로 경쾌하고 장중하며, 우아하면서도 변화가 거침없는 무용으로 발전하였다.
궁중무
춤의 테마를 동작이 아니라 노래로써 설명한다는 점이 가장 큰 특성이 된다. 여기 사용되는 노래를 창사(唱詞)·치어(致語)·치사(致詞)·구어라고 하는데, 춤이 시작되자마자 제일 먼저 부르는 것을 선구호(先口號)라 하며, 춤이 끝날 무렵 퇴장하기 직전에 부르는 것을 후구호(後口號)라 부른다. 노래는 이 밖에 춤추는 중간에도 부르고 춤추면서도 부른다.
동작면으로 보면 춤의 가락이 우아하고, 선(線)이 고우며 몸가짐이 바르고, 동작의 변화가 적어 다양하지 못하다. 사용되는 장단(長短) 및 박자(拍子)은 매우 유장(悠長)하며, 급하고 촉박한 것은 금기로 되어 있다. 또한 의상(衣裳)이 현란하고 구성이 장대하며 의상의 색조(色調)에 있어서는 오행설(五行說)에 의하여 방위(方位)에 부합되는 것을 입었다.
반주에 사용되는 장단은 20박(拍)을 1장단으로 한 것, 16박을 1장단으로 한 것, 12박을 1장단으로 한 것, 10박을 1장단으로 한 것, 6박을 1장단으로 한 것, 4박을 1장단으로 한 것 등 6종이 있다.
민속무
제약을 많이 받아 단조로운 가락으로 고정된 궁정무용과는 달리 원초의 자연스런 가락이 잘 보전된 것이 민속무용이다. 한국의 민속무용은 원시 민간신앙의 잔재인 각종 제사와 서민대중이 즐겨하는 세시풍속(歲時風俗) 중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싹트고 움터서 그때부터 민중과 결부·밀착되어 민중과 호흡을 같이 하고, 서민대중의 생활환경 속에서 뿌리를 박고 오랫동안을 성장·발육되어 왔다. 민속무용은 어떠한 격식이나 일정한 법도(法度)가 필요치 않고 서민들의 정서와 소박한 감정을 적나라하게 표출한다는 데에 생명이 있다 하겠다.
농악무
농악무는 원시인들의 군중무용이 조선 시대에 이르는 사이에 점차로 발달한 것으로, 삼한 시대에는 집단무용으로서의 궤도에 올랐다. 이때에 벌써 수십명이 다체가 되어 몸을 움직이고 발을 딛는 것이 다르고 손짓·발짓도 박자에 맞추었다는 것을 <위지동이전>에서 볼 수 있다. 그 뒤 고려 예종과 공민왕 때 농악용에 적당한 태평소·징·꽹과리 등이 수입됨으로써 순수한 향토악기인 소고와 합세하여 더 한층 활발하여졌다. 이로써 고려 중엽 이후로 더욱 진전을 보게 되어 단체무용으로서의 형식을 갖추게 되었다.
그 노는 방법은 여러 형태가 있으니, 6진(六陣)·수진(水陣)과 8진법(八陣法) 등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이 법은 농악무로서, 고도로 발달되어 있는 남한지방에서 성행한다. 이 춤의 연희하는 순서는 진풀이·느진 풍류(風流)·교환(交換)·영산(靈山)·송진(送陣)·가적(歌的)·극적(劇的)·무용적(舞踊的)·해산(解散)굿 등 10여 과장(科場)으로 변화되어 있다.
농악무에 사용되는 악기는 꽹과리·징·북·장고·소고·호적 등이고, 이 춤의 진행은 상쇠(上釗)가 전담하고 소고와 북·장고 등이 보조역할을 한다. 한국의 궁중무용이나 궁중악이 과거 봉건시대에는 왕공가(王公家)에 예속되어 일부 특권계급의 완상용(玩賞用)에 소용되었으나, 이 농악무만은 발생한 뒤부터 농민 대중들이 키워오고 이끌어 내려온 것으로, 장구한 역사를 가진 호화 발랄한 민속무용이다. 농악무는 전국에 산재해 있어 지방에 따라 약간의 차이점이 있으나 대동소이하고, 농어촌에서 유일한 오락물일 뿐 아니라 또한 민속적인 세시풍속의 행사에는 반드시 참가하는 것이다.
승무
승무(僧舞, 문화어: 중춤)는 승려들이 추는 속칭 '중춤'이라 하지만 불교의식에서 승려가 추는 춤이 아니고 흰 장삼에 붉은 가사를 어깨에 매고 흰 고깔을 쓰고 추는 민속춤이다. 춤의 구성은 체계적일 뿐 아니라 춤사위가 다양하고 춤의 기법 또한 독특하다. 6박자인 염불·도드리와 4박자인 타령·굿거리 장단에 맞추어 춤을 춘다. 또 장단의 변화는 7차례나 있어 춤사위가 각각 다르게 구분, 정립되지만 무리 없이 조화를 이룬다.
불교가 한국에 수입됨과 동시에 전래된 무용으로서, 재(齋)와 같은 큰 불교의식에는 승려들이 법고(法鼓)춤·바라춤·나비춤〔着服〕등을 추는데 이러한 불교의식무용을 작법(作法) 또는 법무(法舞)라 하며, 승무(僧舞)라 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연희하는 승무의 법고 치는 순위를 볼 때 승무가 불교의식무용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민간으로 전파되어서 오랜 세월을 전해오는 동안에 점점 발전·향상되어, 지금은 민속무용의 정수가 된 민속무용의 대표격인 무용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이것을 체득하면 한국민속무용의 기법 전반을 대강 짐작할 수 있을만큼 중요한 예술성을 가진 춤이다.
승무는 1900년대 초 협률사(協律社)에서 연희되기 시작하여 광무대(光武臺)ㆍ단성사(團成社)를 거쳐서 1908년 원각사(圓覺社)에서 한성준(韓成俊)이 이 춤을 지도했다고 한다. 그 뒤 1934년 한성준이 조선음악무용연구소를 개소하고 무용지도를 본격화하면서 정리했으며, 1936년 한성준의 제1회 무용발표회를 계기로 이 춤이 예술무용으로 승화된 것이다. 한성준의 직계 후손인 한영숙(韓英淑)이 이 춤을 계승하였으며, 그녀가 작고한 뒤 이애주 등으로 이어졌다. 한 때 불교의 존엄성과 위신을 해하는 것이라 하여 승무 폐지론이 나오기도 했다.
강강술래
강강술래는 전라도 지방에서 전하는 민속놀이다. 강강술래는 국가무형문화재 제 8호이며, 2009년 9월에는 유네스코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선정되었다.[1] 주로 해남·무안·진도·완도 등지에서 음력 8월 15일 밤에 예쁘게 차려입은 부녀자들이 공터에 모여 손에 손을 잡고 둥근 원을 만들어, '강강술래'라는 후렴이 붙은 노래를 부르며 빙글빙글 돌면서 뛰는 놀이이다. 밤새도록 춤을 추며 계속되는 원무를 도는 도중에 민속놀이를 곁들인다.[2]
전라남도의 해안지대와 도서지방에 전파되어 있는 춤으로, 처음에는 긴중모리 장단으로 시작하여 굿거리로, 끝에 가서는 자진모리로 빨라지면서 춤은 고조되어 뛰면서 돌아간다.
강강술래는 노래와 춤이 하나로 어우러진 부녀자들의 집단놀이로 주로 전라남도 해안지방에서 추석을 전후하여 달밤에 행해졌다.
한량무
한량무(閑良舞)는 관아의 행사 때 여흥으로 추어진 것으로 일종의 풍자 춤극이다. 한량(閑良)이란 벼슬 못한 호반(虎班)의 이름으로, 풍류를 알고 호협한 사나이의 별명이다. 춤의 내용은 한량과 별감(別監)이 기생(妓生)을 데리고 즐겁게 노는 자리에 승려가 나타나 이를 보고 기생에게 혹하여 멋진 춤으로 기생의 환심을 사니, 기생은 마침내 한량과 별감을 배반하고 승려에게로 가는 남녀의 관계를 그린 춤이다. 그 뒤 한량무는 광무대(光武臺)·연흥사(延興社)와 가설무대에서 연출하여 성행했었다.
남무
남무(男舞)는 한국의 사교무(社交舞)라고 말할 수 있는 춤이다. 일반 대중화하지는 않았고, 다만 기생들에 의하여 유행되었다. 춤의 내용은 두 사람이 서로 상대하고 상배(相背)하되 포옹도 하며 교태를 부리는 것이 이 춤의 표현이다. 반주음악은 삼현영산회상(三絃靈山會相) 전곡이 소용된다.
살풀이춤
살풀이춤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해의 나쁜 운을 풀기 위해 벌였던 굿판에서 무당이 나쁜기운을 풀기 위해 추는 즉흥적인 춤을 말하며, ‘도살풀이춤’ 또는 ‘허튼춤’이라고도 한다. 원래는 수건춤, 산조춤, 즉흥춤이라는 이름의 수건춤이었으나 춤꾼 한성준이 1903년에 극장공연에서 살풀이란 말을 쓴 데서부터 살풀이라는 이름이 비롯되었다.
춤꾼은 고운 쪽머리에 비녀를 꽂고 백색의 치마 저고리를 입으며, 멋스러움과 감정을 한껏 나타내기 위해 하얀 수건을 들고 살풀이 곡에 맞추어 춤을 춘다. 지금의 살풀이춤은 경기지방과 호남지방에서 계승된 춤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조선 중기 이후 나라가 안정되고 서민문화가 활발히 전개되면서부터 광대들의 춤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때 굿이 금지되자, 무당들 중 일부가 집단을 만들어 춤을 다듬으면서 점차 예술적 형태를 갖추게 되어 오늘날 한국춤의 대표로 정착하였다.
살풀이춤은 살풀이 가락에 맞춰 슬픔을 환희의 세계로 승화시키는 인간의 감정을 아름다운 춤사위로 표현하는 춤으로서 예술적 가치가 큰 고전무용이다.
무당춤
무무(巫舞) 또는 무속무용(巫俗舞踊)은 무당이 굿에서 추는 무용을 통틀어 말한다. 무속무용은 지방마다 춤사위가 다르고 반주음악도 다르다. 한강 이북의 무속무용은 상하로 뛰는 격렬한 도무(跳舞)가 많다. 반주는 도드리·굿거리·타령·당악(자진타령) 장단이 쓰이고, 반주음악으로 반염불·허튼타령·굿거리·당악이 쓰인다. 경기도 및 충청도의 무속무용은 오금을 밭고, 허리를 굽혀 어깨를 세워 손을 수평으로 뻗고 몸과 팔이 좌우로 도는 진중한 춤이 많다. 장단은 도살풀이·굿거리·진쇠·푸살·오림채 등이 쓰인다. 전라도는 춤사위가 충청도와 같으나 살풀이·자진살풀이·굿거리장단이 많이 쓰이고, 반주음악은 도살풀이·굿거리·자진굿거리가 쓰인다. 전라도는 춤사위가 충청도와 같으나 살풀이·자진살풀이·남도굿거리가 쓰인다. 경상도와 강원도의 동해안 지방은 팔을 머리 위로 쭉 뻗고 좌우로 흔드는 춤이 많으며, 장단은 '도장' 장단과 '동살풀이' 장단이 많이 쓰인다. 무무에서 직접 영향을 받은 춤은 무당춤·살풀이춤·시녑춤이 있고, 간접적인 영향을 받은 춤은 부채춤·장구춤·태평무(太平舞) 등이 있다.
장고춤
장고춤(杖鼓舞)은 타악기의 하나인 장고를 비스듬히 어깨에다 둘러메고 여러 가지 장단에 따라 변화시키며 추는 춤이다. 원래는 풍물놀이 등 개인놀이로서, 혼자 또는 두 사람(때에 따라 많을 수도 있음)이 추는 것인데, 요즈음에는 새로운 형태로 안무하여, 농악이 아닌 완전한 무용으로 발전, 독특하고 장쾌한 멋을 풍기고 있다.
소고춤
소고춤(小鼓舞)은 농악에서 12차 장단에 맞추어 소고를 두드리면서 춤을 추는 것으로, 황홀한 체기와 멋이 깃든 춤이다.
농악은 원래 풍물이라 했는데, 조선 후기에 와서 농악이라 일컬었다. 이 춤의 모습은 농사행위와 수렵행위나 전쟁행위로부터 생성된 돌격무진(突擊舞進)의 동작과 포위하는 동작 등이 있고, 때로는 길군악(軍樂)으로도 쓰였던 것 같다. 소고잽이를 일명 법고잽이·벗구잽이라고도 하는데, 전립대(戰笠帶)와 화관대(花冠帶)의 두 차림이 있어, 전복(戰服)에다 상모가 달린 전립을 쓰고, 자루가 달린 소고를 두드리면서 상모를 돌리는 모습은 더욱 장관이라 할 것이다.
가면무
가면무용은 원시적인 신앙행사나 세시풍속의 행위에서 발생되었다고 할지라도 특정된 지역에 기반을 두고 그 지방에 뿌리를 박고 토착화되어서, 오랫동안 그 지역의 범위 안에서만 성행하고 성장되어 현재까지 전해진 춤을 말하는 것이다. 현재 각 지방에 남아 있는 탈춤(가면무용)들은 전체적으로 내용에 있어서는 대동소이하지만, 노는 형태에 있어서나 춤가락면에 있어서는 각각 그 지방대로의 특징이 있다. 멀리 삼국시대에서 근세에 이르는 동안 궁정무인 정재(呈才)에서 서민들의 놀이인 산대춤에 이르기까지 민속예술의 뼈대를 이루어 온 것이 바로 가면무용이다.
중부형 탈춤
중부형은 서울을 중심으로 한 그 근교와 경기도 일원에서 추었던 것이다. 지금은 경기도의 양주산대(楊州山臺)놀이와 송파(松坡)의 산대놀이에만 보존되어 있다. 이 놀이들은 동일한 계통의 것이지만 아주 근소한 차이점이 있다.
경남형 탈춤
경남형은 경상남도 합천군 초계(草溪)의 밤마리라는 포구에서 발생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는 탈춤이다. 이를 오광대(五廣大)라고 한다. 오광대란 이름은 5행설(五行說)에 의거한 것이고, 이 놀이의 구성에 있어서도 다섯 과장으로 되어 있어, 5방신장(五方神將)·5문둥이·5양반(五兩班) 등이 등장하여 연희한다. 오광대는 경남 일대의 여러 곳에 전파되어 있었다가 거의 소멸해 없어지고, 지금에는 통영시와 고성군의 두 곳에 남아 있고, 이 춤들이 약화되고 변질되어 놀이화하여, 부산 동래구와 수영(水營)에 들놀이(野遊)로 남아있다.
해서형 탈춤
해서형은 황해도 봉산군을 주축으로 삼고, 근접한 해안선 지역과 내륙지방을 포함하여 여러 곳에 산재해 있던 탈춤이다. 봉산탈춤과 강령탈춤이 그 대표적인 탈춤으로, 같은 계통의 춤이지만 독특한 점을 지니고 있다.
의식무
의식무용은 불교의 재의식(齋儀式)과 문묘·종묘의 제사에서 추는 춤이다. 이외에도 과거에는 원구단, 사직단(社稷壇-地神) 제사에서도 노래와 춤이 있었으나, 오늘날은 제사마저 폐지되었기 때문에 춤은 소멸되었다. 먼저 불교계통의 무용은 5종이 있는데 불교 재의식 절차 중에는 '식당작법(食堂作法)'이라고 하는 순서가 있어서, 반드시 상기 5종의 춤을 추는 대목이 있다. 5종의 춤은 불경의 범음(梵音)과 북·징·장고·호적 등이 반주로 사용된다.
나비춤
바라춤
법고춤
부채춤
부채는 단순한 춤의 소도구나 장식품이 아닌 춤의 주제이고 모든 춤사위를 유도해 내는 기동인起動因이다. 부채춤 동작은 크게 보편화된 전래의 한국춤사위인 무태사위와 주제성에 입각하여 표현 내용을 담은 상징사위로 나뉜다. 양손의 부채로 대칭과 비대칭의 조화를 이루며 펴고 접고, 감고 펴 올리는 다양한 형태의 춤사위를 구사할 때는 직선이나 직각 대신 태극선 형태의 완곡선형을 지향하고 매 순간 정교함과 치밀함으로 완성된다. 신체는 고고하면서도 반듯한 자태가 중요한 기법이자 원리로 적용되며 모든 춤사위는 무대라는 연희 공간과 관객이라는 대상을 철저하게 전제로 하기에 부채와 신체의 조화로운 움직임은 전면에서 보았을 때 가장 이상적인 미를 표출할 수 있도록 조형된다.
부채춤이 표현하고 추구하는 미의식은 우리 춤의 전통적 깊이와 현대적 미의 오묘한 조화, 정재무용적인 것과 민속무용적인 것의 조화이며 형태적 특징은 중후함, 유연함, 탄력성을 들 수 있다.
부채춤은 한국 전통연희와 의례에서 활용되는 부채 이미지를 재해석하고 신체적 기법과 무용예술적 미에 부합되도록 승화시켰다. 이것은 한국 20세기 근대 무대 형식의 무대예술 정착과 무용예술의 본보기적 역할을 하는 것으로 한국무용의 폭넓은 수용과 창안 그리고 전통의 계승과 맞물려 있다는 데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