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외경
차성기
순백색의 가녀린 꽃봉오리 두 개가 가지 끝 꽃대에 힘겨운 듯 달려있다. 솜털 하나 없는 하얗게 질린 얼굴에서 마지막 생을 절규하며 버티는 모습이 역력하다. 가지 양쪽에 간신히 붙어있던 손바닥같이 넓은 잎새는 하나둘 인연을 끊듯 떠나고 푸르던 대궁은 갈색으로 선연한 빛을 잃은 지 오래다. 그래도 대궁 끝 꽃대 가지만은 푸르니 저 아래 먼 뿌리 끝에서 물을 빨아올리려 안간힘을 쓴 덕분이리라.
얼마 전 아내가 호접란 두 송이를 맞아들였다. 아버지 장례식에 함께 하지 못한 친구가 성의를 담은 선물로 보내왔다. 양란은 처음이어서 손님 같아 어렵다. 예쁜 백자 화분 선물 받은 그대로 따듯한 거실 티브이 옆에 모시듯 두었다. 비록 향기는 없어도 뽐내는 화려한 모양새에 거실이 금세 화사해졌다. 반대쪽 왼편에 있는 붉은 달리아 조화와 대비되어 새하얀 생화의 싱그러움이 물씬 가득했다.
언제부터인가 잎새가 시나브로 쳐지며 꽃이 윤기를 잃어 살피니 화분 바닥에 물이 가득 찬 게 아닌가. 놀라서 난을 빼보니 냄새가 코끝을 찌르며 뿌리가 상한 채 하얀 실타래 같은 가는 뿌리가 못이기 듯 올라온다. 물이 많아 과습 상태였다. 화분 위를 마른 바크(나무껍질)가 덮고 있어 미처 뿌리 상태를 알 수 없던 때문이다. 난 기르기는 물주기라 했는데 그간 접한 한란은 세월만큼이나 익숙했지만 처음 맞이한 양란꽃에 취해 실수하였다.
그동안 산천보세, 황용관, 철골소심 등 한란이 발코니 한가운데를 차지해 왔다. 눈부신 꽃 뭉치를 자랑하는 양란보다 가녀린 푸른 잎새 사이로 수줍은 듯 봉긋 솟아오르는 한란꽃이 내뿜는 그윽한 향기가 좋았던 때문이다. 풍요보다는 절제가 화려함보다는 소박함으로 한란은 한때 세간에 풍미했었던 유행의 중심이었다. 호접란은 원산지가 대만이라니 무더운 기후로 보아 가정에서 키우기 쉽지는 않다고 보았다. 그래도 인연이라 한 식구가 되어 더없이 흔쾌히 마음을 열었다.
주인을 잘못 만난 탓에 나날이 윤기를 잃어가는 호접란꽃과 대궁을 안타깝게 살펴보는 게 요즘 코로나로 이른 귀가 뒤 얻은 일과다. 아내도 부쩍 인터넷을 검색하며 뒤늦은 호접란 공부를 하고 있다. 지난주, 마치 회심의 기법인 양 수경재배가 있다며 열심히 재생을 시도해 보는 중이지만 아직 눈에 띄는 차도가 없다. 한 생명을 살려내기가 너무도 어렵다. 수억 광년 떨어진 우주를 살피는 과학기술 시대에 소위 과학기술인을 자처하면서도 한 어린 생명도 지켜내지 못하는가? 자괴감이 앞선다.
그래선지 벌써 보름여를 관찰하며 경과를 살펴보던 중 놀라운 신의 섭리를 나름 찾아냈다. 어째서 대궁은 빛을 잃어 서서히 갈색으로 죽어 가는데 삶을 희구하는 듯 끝에는 여전히 창백한 꽃을 피우고 있을까? 대궁 안에서는 저 아래 하얀 실뿌리 끝에서 악착같이 물과 양분을 뽑아 올려 꼭대기에 있는 꽃으로 보내고 있다. 장렬한 생의 찬가일까 처절한 기사회생의 몸부림일까? 마지막 생의 마감을 앞두고 뿌리에서 물과 양분을 힘겹게 들어 올려 꽃피우려 안간힘을 쓰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와 생명의 신비에 감탄한다.
이른바 ‘생식성장’이다. 영양이 풍부하지 않고 기온 차가 극심하면 생존의 위기를 알아채고 필사적으로 다음 세대 번식을 위해 꽃을 피운다. 자연의 섭리다. 난초 농장의 꽃 피우기 기술은 이를 이용하여 대량 생산한다. 드넓은 공장에서 보일러 훈풍에 푸르른 생장을 재촉하면 어느새 불어닥친 에어컨 냉기에 난은 늦을세라 서로 경쟁하듯 커다란 꽃 뭉치를 내민다. 더하여 꽃 주위 영롱한 꿀샘까지 내면서 벌과 나비를 유혹하려나 보다. 모든 생명의 근본원리다. 사람도 생존이 위태하면 마지막 정열을 불사른다는 얘기가 떠오른다. 오직 위기에서 생존의 유전자 시스템이 강렬하게 작동한다. 저 거실 호접란도 나름 조직안에서는 치열한 생존시스템이 작동하고 있으리라.
오늘도 어린 새움이 돋으려나 하염없는 기대 속에 돌아오니 아내 얼굴에 화색이 만면하다. 웬일인가 싶어 의아한 가운데 엉겁결에 호접란을 새로 맞이하게 되었다. 발렌티노, 아마빌리스 등 무려 여섯 수를 발코니에 펼쳐놓아 놀랐다. 난 공장에서 아예 건강한 촉수를 가진 화사한 새 호접란을 들였다. 아내는 거실에서 남은 생명을 간신히 이어가는 안타까움을 새 생명으로 대신하려는 속셈이다. 아내의 손쉬운 대응을 나무랄 수는 없다. 매일 귀가 뒤 바라보는 안쓰러움을 나름 덜어주려는 배려다. 하지만 꺼져가는 생명을 살리고픈 아쉬움이 움 솟듯 더한다. 생명은 나름대로 존재 이유가 있으리라. 생명은 생각만큼 간단한 게 아니라는 확신이 기사회생의 기대를 키운다.
슈바이처는 ‘생명외경 사상’을 외치면서 모든 생명은 그 자체로도 선(善)이고 내재적인 가치가 있으며 신성하다고 설파했다. 도덕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까지 했다. 그래서인지 나이 들면서 생명에 대한 경외심이 커진다. 이웃 사는 아들네 어린 아가를 보면 고사리손에 초롱초롱한 눈망울은 바로 생의 신비를 느낀다. 아장아장 넘어질 듯 걸음짓을 하며 나날이 성장하는 모습에서 한없는 삶의 행복을 온몸으로 받아들인다. 몇 년 전부터 손주들 유치원과 초등학교의 등·하교 돌봄은 또 다른 소일거리이면서 기쁨도 주고 있다. 손주의 해맑은 웃음과 함께 오늘도 거실 난의 생식 성장을 보며 다시금 생명의 소중함을 보고 있다.
생명은 유한하다. 유한하니 더욱 소중하다. 유한한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번식을 위한 꽃피우기를 신은 생명 설계도에 입력한 게 아닐까. 이러한 생식 성장이 종의 번식과 다양성을 함께 보증하리라. 우리 인류도 번성하여 문화의 꽃을 피운 이유일지도 모른다. 난에서 아지랑이처럼 생명 세계의 모습을 본다. 부디 건강한 뿌리에서 새순이 돋아 오르기를 생식성장 시스템에 실낱같이 기대하며.
기술사
스카이엔지니어링(주) 대표이사
한국과학기술정보협동조합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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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한국산문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