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어진 법칙을 넘어 새로운 법칙을 세우다 - 마르크스와 쇤베르크
외부로부터 주어진 어떤 전제도 거부하다
이른바 무조음악의 시대를 연 쇤베르크(Arnold Schönberg, 1874~1951)의 〈세 개의 피아노 소곡 op.11〉을 들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매우 혼란스러운 인상을 받게 된다. 제대로 된 멜로디도 없으며 화음이나 일정한 규칙을 찾아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무조음악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조성(tonality)’이 없다는 뜻이다. 조성음악의 경우 다장조, 사장조, 내림마장조 등의 조성이 정해져 있으며 이 조성의 기준에 따라서 음계(scale)가 형성된다.
가령 다장조(C major)의 음계는 올림표(#)나 내림표(♭)가 전혀 없다. 피아노로 설명하자면 검은건반을 누르지 않고 흰건반만 낮은 도에서부터 높은 도까지 치면 다장조가 된다. 멜로디에 반음이 들어갈 경우 조가 바뀌거나 일시적인 일탈, 음악용어를 빌리자면 경과음(passing note)으로 기능할 뿐이다. 만약 조성을 무시하고 흰건반이나 검은건반 상관없이 마음대로 건반을 두들긴다면 다장조라는 음계는 무의미할뿐더러 혼란스러워질 것이다. 무조음악은 조성에 얽매이지 않으므로 매우 혼란스럽고 어떤 규칙도 없는 무정부적인 음악으로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무조음악에 대한 완전한 오해다. 쇤베르크가 추구한 것은 어떠한 법칙도 존재하지 않는 완전한 무정부 상태가 아니다. 그는 조성음악과 다른 전적으로 새로운 법칙과 질서를 발견하고자 하였다. 그것은 조성음악이 따르는 법칙의 강제적이고도 폭력적인 특성 때문이다. 쇤베르크의 말에 따르면 전통적인 조성음악에서 조성과 화음의 법칙은 그것이 자연의 법칙인 양 의심의 여지 없이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마치 왕과 귀족, 평민과 노예의 신분이 하늘에서 정해진 법칙으로 간주하는 것과도 같다. 어떤 법칙이든 외부에서 미리 주어지는 것이 아닌 내적인 필연성에 의해서 만들어져야 한다. 이것이 쇤베르크의 생각이다.
어떠한 법칙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쇤베르크의 〈세 개의 피아노 소곡 op.11〉을 보면 실제로는 매우 엄격한 법칙에 의해서 구성되어 있다. 그는 외부로부터 절대적으로 주어진 것으로 간주하는 전통적인 조성음악의 법칙과 다른 새로운 법칙을 발견하고자 하였다. 이 곡의 첫 세 마디만 보더라도 이러한 특성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멜로디의 첫 세 음은 단3도와 반음으로, 그다음의 세 음은 장3도와 반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러한 형태가 곡 전체를 일관하여 반복되고 있다.
더군다나 더 놀라운 사실은 단3도와 반음의 형태가 멜로디의 수평관계뿐만 아니라 세 번째 마디에 표시한 첫 번째 세 음이 수직적으로 단3도와 반음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쇤베르크는 보통의 선입견과 완전히 상반되지만 매우 치밀한 방식으로 이 곡을 구성하고 있다. 그가 거부한 것은 법칙 일반이 아니라 마치 자연법칙처럼 외부로부터 주어진 전통음악의 법칙이다.
쇤베르크, 〈세 개의 피아노 소곡 op.11〉 Drei Klavierstücke, op.11, 1909
무조음악인 이 곡은 얼핏 듣기에는 아무 법칙이 없는 것 같지만 쇤베르크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자연법칙만을 무시하여 작곡한 것이다. 이는 자본주의 사회의 법칙을 마치 자연법칙으로 여기는 기존의 사상을 전복한 마르크스 사상의 출발점과 닮아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zYaWND9n9h0
쇤베르크의 무조음악 악보
카를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 1818~1883)가 주장한 마르크주의의 출발 또한 쇤베르크와 다르지 않다.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모든 이론적 전거를 마련한 마르크스주의의 핵심 역시 자본주의 사회의 법칙을 마치 자연법칙으로 간주하는 일련의 부르주아지 사상을 겨냥하고 있다. 마르크스가 배격하는 것은 특정한 역사적 시기나 사회의 법칙을 넘어서 초역사적이고 자연적인 법칙으로 간주하는 자본주의의 법칙이다. 그는 자본주의 사회의 법칙이 필연적으로 착취를 은폐하거나 정당화하는 법칙이라고 믿었으며, 부르주아지 사상가들은 이러한 착취를 교묘하게 은폐하거나 정당화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외부로부터 주어진 어떤 전제도 거부하다 (보고 듣고 만지는 현대사상, 2015. 08. 25., 박영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