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원중에 이연숙인가요? 이름도 기억이 안나네.....
모 방송에서 "군대 기것 땅덩어리 지키는 것뿐인데 군가산점은 왜 주냐?"
라는 망발을 했습니다.....
너무 기가막혀서......우리나라가 어떤 상황인지...헐.......
말하는것도 입이 아픕니다....이제는....
예전에 이대 학생들이 그러더니.....이제는 국회의원까지.....
뭐라 말이 안나옵니다....기것 땅덩어리 지키다가 간 우리 젊은이들의 경험을 옆에서 체험한 군의관의 수필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제2회한미수필문학상]
<장려상>유진아, 네가 태어나던 해에 아빠는 이런 젊은이를 보았단다
- 이봉기(32, 국군수도병원 내과 군의관) -
2002년 6월 29일 토요일. 나는 터키와의 월드컵 3, 4위전을 앞두고 축제 분위기 끝
물의 애틋함이 괜히 섭섭해서 이런저런 월드컵 이야기를 동료들과 노닥거리며 퇴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웬걸, 갑자기 구내방송이 나오고 어수선한 분위기….
이윽고, TV에서는 연평도 앞바다에서 양측 해군 간에 교전이 있었다는 보도가 흘
러나오고 있었다. 국군수도병원 전 군의관을 비롯한 장병들은 퇴근을 미루고 대기
상태로 남겨졌고, 그렇게 한 시간 정도를 보낸 후 헬기를 통해서 환자들을 후송 중
이라는 소식이 들리는 가운데 필요 인원만 남기고 나머지는 퇴근하라는 명이 떨어
졌다. 그날, 외과계 군의관들은 입대 이후 미증유의 수고를 했음은 물론이다. 내과
군의관들을 찾지 않음을 다행으로 여기며 귀가한 나를 아내와 뱃속의 아기가 반겼
다. 점심식사를 하며 흘깃거리던 TV화면에는 사망자를 비롯해서 많은 부상자들이
발생했다는 뉴스가 흐르고 있었다.
다음날인 일요일 아침. 만삭인 아내와 함께 아침식사를 하던 나는 병원에서 온 전
화를 받았다. 어쩐지 쉽게 퇴근할 수 있었던 것이 찜찜하더라니….
‘내과를 찾을 일이 뭘까?’
이유인즉, 경상자 중에서도 배의 화재로 인한 연기로 폐 손상을 입은 환자들이 있
어서 내과 군의관의 손길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출근한 뒤 들어선 중환자실의 분
주함은 수도병원 근무 후 처음 접하는 광경이었다. 응급수술을 마치고 누워있는 중
상자들이 즐비했고 팔다리를 잃은 장병들도 눈에 띈다. 콧등이 시큰거렸다. 평화로
운 대한민국에서 이게 웬 난리인가. 저 창창한 청춘들을 어찌 하라고….
화재에 의한 흡인손상이 의심되는 환자들을 봐주고 담당배정을 한 후 내 환자인 오
중사의 몸에 박혀 미처 제거되지 않은 파편과 총알조각들을 손닿는 대로 마저 빼냈
다. 14mm 기관총 탄두가 깨진 채로 등 뒤를 뚫고 들어가 방광을 찢고 사타구니 근
처의 피부 밑에 묻혀 있었다. 피부를 절개하고 탄두를 끄집어내니 반 동강이 난 것
이 어딘가에 부딪힌 후 튀어 들어간 듯 했다. 그나마 경상 축에 속하던 그에게서
들은 이야기는 사뭇 처절했다.
북방한계선을 넘어 남쪽으로 계속 내려오는 북쪽 배를 가로막고자 참수리 357호는
배의 옆구리로 적선의 진로를 막는 ‘차단기동’을 하고 있었다 한다. 차단기동이
무시무시한 이유는 서로 간에 배의 옆구리를 고스란히 노출시키게 된다는 점이다.
이건 피차간에 절대 공격하지 않으리라는 믿음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그게 아니
었으니….
남하하던 북측 배가 방향을 틀며 옆으로 도는 순간 우리 장병들의 눈에는 포탑을
돌려 조준하고 있는 인민군들이 보였다. ‘어, 쟤네들 왜 저래?’하는 순간 적의 8
5mm포가 불을 뿜었고 무척이나 가까이 붙어 있던 우리배의 함교(조타실)가 명중당
했다. 이후 우리의 포탑들이 차례로 가격 당했다. 이때 함교와 포탑에 위치하던 장
병들이 전사했다. 우리와 같은 전자조준장비도 없이, 수동으로 조준하는 북쪽 함정
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는 우리를 노리고 미리 공격계획을 가진 상태에서만 가능
한 일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중앙 통제실인 함교가 무력화되고 대응 사격할 수 있
는 포탑들이 날아간 상황에서 어려운 전투를 벌이게 됐고, 유명한 이야기지만 권모
상병 같은 경우는 왼손이 날아간 상태에서 오른손만으로 M60 기관총을 발사하는 투
혼을 보였던 눈물나는 전투는 이렇게 시작됐다. 더욱 황당한 것은 피격당한 참수리
357호가 당하고 있는 동안 급히 접근한 참수리 358호에서 북측 경비정에 포탄을
퍼부어댔지만 그 상황에서도 북측 경비정은 오로지 357호만 공격했다는 것이다. 상
식적으로 더 위협적인 상대를 먼저 공격해야하는 것이거늘, 침몰시키겠다고 작정을
했던 모양인지 ‘난 한 놈만 패’식의 공격에 의해 357호는 결국 가라앉아 버린다
. 당연히 북측 경비정은 옆에 있던 358호에 의해 신나게 두들겨 맞아서, 침몰되는
것만 겨우 면하고 퇴각하게 됐고 이후 들리는 이야기로는 북측 사망자만 30명 이상
이라 한다. 같은 민족끼리 내가 더 많이 죽였네, 겨루는 것은 또 다른 비극이지만,
그래도….
그렇게 오전을 보낸 가운데 오중사의 맞은 편 침상에서 생존자중 가장 많이 다친
박 상병을 접하게 된다. 건장하고 준수한 청년이었는데 의식은 없었고 인공호흡기
가 달려 있었으며, 내가 군대온 이래로 목격한 가장 많은 기계와 약병들을 달고 있
는 환자였다. 파편이 배를 뚫고 들어가서 장을 찢었고, 등으로 파고 들어간 파편은
등의 근육과 척추에 박혀있었으며, 등과 옆구리는 3도 화상으로 익어 있었다. 오
른쪽 허벅지에도 길쭉한 파편이 박히고, 전신에 총상과 파편창이 즐비했다.
“쟤는…, 왜 저렇게 다쳤어요?”
옆 침상에 누워 있던 부정장 이중위가 입을 열었다. 그는 포탄에 맞아 왼쪽 발목이
부서져 절단술을 끝낸 상태였고 그 옆에는 한참을 울었는지 눈이 발그레 부어오른
젊은 아가씨가 앉아 있었다. 약혼자란다.
“우리배의 의무병 녀석인데 부상자들 처치한다고 몸을 아끼지 않고 뛰어다니다가
그랬습니다….”
참수리 357호의 의무병이었던 박상병은 첫 포탄에 조타실이 깨지면서 파편에 쓰러
진 정장 윤영하 대위를 몸으로 덮고 함교 계단 아래로 끌고 내려가 심폐소생술을
시도했으나, 방탄조끼 밑으로 줄줄 흐르는 핏물을 보며 소용없음을 깨닫고는 다시
나가 쓰러지는 전우들을 치료하기 위해 몸을 숨기지 않고 뛰어다녔다. 당연히, 총
을 쏘는 전투병은 엄폐물에 몸을 숨긴 채로 사격을 하게 마련이지만, 부상병을 찾
아 이동해야하는 의무병은 전투 시 가장 위험한 처지에 놓이는 것이다. 총탄에는
눈이 없다.
이야기를 듣자 울컥했다. 멋진 놈…. 그런데, 이게 뭐냐.
상태는 굉장히 안 좋았다. 출혈이 엄청나서 후송당시부터 쇼크 상태였고, 수술하는
동안에도 엄청난 양의 수혈이 필요했다. 정형외과와 외과 군의관들이 달려들어 가
능한 대로 파편과 총탄을 제거하고, 장루를 복벽으로 뽑고, 부서진 오른쪽 허벅지
의 혈관을 이어놓은 상태였다. 엄청난 외상으로 인한 전신성 염증반응 증후군(SIRS
)으로 인해 혈압이 쉽사리 오르지 않아 결국, 순환기내과 전공인 나도 박상병과 인
연을 맺게 된다. 스완갠쯔 도자를 삽입하고 수액과 승압제로 혈압을 힘겹게 유지해
나가는 가운데, 후송 시부터의 쇽에 의한 급성 신부전 때문에 신장내과 동료도 힘
을 합해 혈액투석을 지속했고, 외상성 ARDS가 속발해 호흡기내과 동료도 합류한다.
방광손상이 발견돼 비뇨기과 동료도 합세하고, 부비동에 문제가 생겨 이비인후과
군의관도 손을 더했다. 건장했던 박상병은 다행히도 질긴 생명력을 보여주었고, 그
가운데, 나는 테니스 친구, 술친구들에 다름 아니었던 동료군의관들이 실은 대단
한 의사들이었음에 새삼스러워했다.
‘너는 반드시 살려낸다!’
박상병의 숭고했던 행동을 여러모로 전해들은 우리 군의관들은 암묵적으로 동감하
고 있었다. 이기심으로 질펀한 세월을 뚫고 오면서 형편없이 메말라 버린 내 선량
함에 박상병의 회생은 한통의 생수가 되어 줄 것만 같았다. 뭔가 해줄 수 있다는
것…. 레지던트 기간 동안 수없이 지새워냈던 하얀 밤들과 바꿔낸 중환자관리의 기
술이 너무나도 기꺼웠다. 하지만, 감염부위에서 녹농균과 메치실린 내성 포도상 구
균이 배양되면서 소위 항생제의 마지막 보루라 일컬어지는 이미페넴, 반코마이신,
아미카신으로 배수진을 치게 됐다. 오르내리는 체온에 일희일비하는 가운데 전신상
태는 조금씩 호전되고 있었지만 오른쪽 다리가 서서히 차가와지며 색이 죽기 시작
했다. 부서졌던 혈관에 문제가 생긴 모양이었다. 결국, 고관절부위에서 절단이 이
뤄졌고, 사타구니 아래쪽 오른다리는 그렇게 사라졌다. 사지 손실이 감정적 아쉬움
에 그치는 사건은 아님을 누구나가 알고 있었지만, 다른 길이 없었다. 아픈 마음과
괜스런 죄책감을 그나마 생명이 지속된다는 사실로 슬그머니 달래 버렸다. 그렇게
, 3주를 지내며 더 이상의 발열도 없었고 등과 옆구리 화상부위 및 관통창에는 발
간 육아조직이 자라고 있었다. 수술부위의 상처들도 자리가 잡혔다. 인공호흡기도
멈췄고, 기도절개를 미루며 버텨오던 기도관도 제거했다. 박상병이 말을 할 수 있
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사이 바싹 말라버린 박상병은 정신을 차리면서 오히려 군
의관들을 힘들게 했다. 현실을 서서히 깨닫게 되면서 차오르는 불안과 공포와 절망
감을 입으로 표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주렁주렁 매달린 약병 사이에서
부서진 육체로 꼼짝 못하고 누워 흐느끼는 젊은 장정을 바라보는 일은 너무나도 불
편했다. 정신과 군의관이 나서서 도움을 주었지만, 그 역시 박상병의 망가진 육체
와 앞으로 닥치게 될 고난을 대신해 줄 수 없음은 그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어쨌
든 박상병은 그렇게 회복돼 갔다. 그사이 오중사는 방광수술을 위해 비뇨기과로 옮
겨지고, 부정장 이중위도 정형외과 일반병실로 옮겨졌다. 박상병이 서해교전 환자
들 중 가장 늦게 중환자실을 빠져나와 외과병동으로 옮겨지게 됐다. 가장 위중했던
그의 회복으로 서해교전으로 인한 전투 시의 사망자 외 추가 사망자는 단 한명도
나오지 않았고, 이에 고무된 병원 측은 수고한 군의관들에게 포상으로 위로휴가를
주었다. 많은 젊은이들에게 고통스러운 사건에서 파생된 개인적 호사여서 마음이
불편했지만, 내가 어쩔 수 있는 일도 아니라며 자위를 했다. 따지자면, 6.25 동란,
경술국치까지도 거슬러 올라가야 할 일이라고…. 그렇게 얻어진 휴가로 나는 아내
의 출산을 옆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내 딸의 첫 모습을
대한 순간만큼은 광막한 우주 속에 나와 아이, 단 둘만 존재하는 감격이었다. 그
때까지 내 삶이 순전히 그 순간을 위한 것이라 해도 아깝지 않을 것 같았다. 다시
금 현실로 돌아와서도, 배냇짓을 하는 딸아이에게 풍덩 빠져 한참을 허우적거리는
사이에 또 한달 정도가 흘렀다.
어느 날, 박상병이 다시 중환자실로 내려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의식이 나빠져 C
T를 찍어보니 뇌실질 전반에 걸친 세균감염이 의심된다는 것이었다. 예의 배수진용
항생제들은 계속 사용되던 중이었고, 중환자실에서 다시 만난 박상병은 완연히 수
척해진 모습으로 인공호흡기와 약병들에 또다시 생명을 매달고 있었다. 새로 개발
된 항생제들을 민간에서 구매해서 사용하기도 해봤지만 패혈성 쇼크가 이어지며 걷
잡을 수 없이 무너져, 결국 9월 20일 금요일 새벽에 젊은 심장은 마지막 박동을 끝
냈다. 이틀 뒤, 가족들의 오열 속에 우리병원에서 영결식이 거행되고 박병장(진급
했다)은 대전국립묘지에 묻혔다. 충무무공훈장도 수여됐다. 하지만 그는 꿈꿔왔을
나머지 인생을 하늘로 가져가야 했고, 그의 부모님은 아들을 잃었다. 그를 만났던
군의관들의 가슴에도 구멍이 났다.
옴짝달싹 못하는 역사의 틀 속에서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노릇이고, 인류사에 전쟁
이 없어지는 일은 아마도 없겠지만, 한 선량한 젊은이의 아까운 죽음을 옆에서 지
켜봐야 했던 일은 말할 수 없는 무력감을 안겨줬다. 나도, 내 주위의 사람들도 남
이 일으키는 전쟁에 인생을 맡겨야 할 수도 있는 초라한 존재일 뿐이었다. 군의관
생활을 하면서 바라본 전쟁은 더욱 두려운 모습으로 저 멀리 서있다. 아득하게 멀
지만 언제 달려들지 모르는 그의 섬뜩한 실루엣을 본다. 갖가지 대의명분으로 치장
해도 전쟁은 부서지는 육체와 영혼을 제물로 삼아야 한다. 전장에서 맞닥뜨려야
할 맹목적인 폭력들. 그리고 잇따르는 수많은 이의 비극들. 이를 막기 위한 소위
‘전쟁억지력’을 키우기 위해 수많은 젊은이들을 군인으로 만들고, 더 많은 무기
를 갖춰야 하는 또 다른 아이러니….
그렇게 가을을 보내던 중 병원 앞 산책로에서 이중위와 그의 휠체어를 밀고 있는
약혼녀를 만났다. 처음 중환자실에서 대하던 날의 우울했던 첫인상이 무색하게도
그들은 밝은 모습이었다. 이중위는 의족보행 연습을 시작한 뒤였고, 퇴원후 다시
해군으로 복귀해 사무직에서 복무할 예정이었다. 그들의 결혼도 예정대로 이뤄질
거란다.
국회의원이 그런 말을 하다니..정말인지...나라생각 하나도 안하는 사람입니다. 시민들이 낸 세금을 빼돌리는것도 모잘라...그런 말하고...요즘 국회의원들은 왜 국회의원이 됐는지 모르나봐요...(아님 국회의원이 어떤 일하느지 모르나?) 시민들의 안전한 생활을 위해..법을 만드는 사람들이..이거 너무 하는구만...
글 보니까 눈물 밖에 안나네요... 쩝... 전 부사관으로 갈라고 하고는 있지만.. '기껏 땅덩어리나 지키러 가는 짓'이라서 정말 한심하게 느껴야 되는건지.. 배위에서 온몸이 부셔지며 죽어간 사람들 앞과 그 유가족 앞에서도 '그깟 땅덩어리나 지키다가 죽었으면서'라고 한번 해보라 그래야 됍니다..
첫댓글 세상에~~기껏땅덩어리지키는군인??!! 말도안돼는헛소리~멍멍이소리내요...군대와군사력의힘에대한 지식도없으면서 함부러 나재끼는말투라니~ 우린꼭북한이아니더라도 군대를 갖고발전시킬필요가있다고생각합니다..군인과군대는 한나라에꼭필요한요소이고 강대국에 들어가는 요건중하나입니다..
우리역시평화를 사랑하지만 평화와안정은 누가보장해주는게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만들고 지켜야하는건데~ 열심히 복무하신 예비역분들과 복무중이신 현역분들~~ 용감하고 열심히 최선을 다해주신 서해교전참가군인여러분 감사합니다 __;꾸벅
그 국회의원은 국회의원이라는 칭호가 사치입니다.C8년!
우리가 열심히 살아야 할 이유가 되는글입니다. 희생하신 분들의 명복을 빕니다. 이제 이일이 이런일들의 마지막이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국회의원이 그런 말을 하다니..정말인지...나라생각 하나도 안하는 사람입니다. 시민들이 낸 세금을 빼돌리는것도 모잘라...그런 말하고...요즘 국회의원들은 왜 국회의원이 됐는지 모르나봐요...(아님 국회의원이 어떤 일하느지 모르나?) 시민들의 안전한 생활을 위해..법을 만드는 사람들이..이거 너무 하는구만...
매가 평화를 외치면 그말은 힘이되지만 비둘기가 평화를 외치면 그말은 비아냥이 되어 돌아온다지요. 평화를 외치려면은 김구선생이 말씀하신대로 무력은 이웃이 감히 범접치 못할 수준은 되어야겠지요. 그깟 땅덩어리라니 그 국회의원은 그럼 하늘에서 정치한답니까?
누가 군가산점 달라고 했습니까?...군가산점 적용되는 직장이 얼마나된다구요...이렇게 상처주는 이야기하지말고 그냥 군가산점 없애는게 덜욕먹을 일일것 같습니다...진짜.c8같은 나라입니다. 내가 원해서 군에 간것도아니고....
글 보니까 눈물 밖에 안나네요... 쩝... 전 부사관으로 갈라고 하고는 있지만.. '기껏 땅덩어리나 지키러 가는 짓'이라서 정말 한심하게 느껴야 되는건지.. 배위에서 온몸이 부셔지며 죽어간 사람들 앞과 그 유가족 앞에서도 '그깟 땅덩어리나 지키다가 죽었으면서'라고 한번 해보라 그래야 됍니다..
그리고 중요한건 그들의 죽음으로 지켜낸 '그깟 땅덩어리'에서 그 땅덩어리인 대한민국에서 우리는 발붙이고 살아가고 있다는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우울해지네요.. ㅠ_ㅠ..
당신 아들이 총알 맞아 가면서 지킨 나라라면 당신이 그런 막말을 할수 있었을까? 아마 당신은 아들에게 그리 말하겠지... 기껏땅덩어리 지킬러고 죽었냐?
앞뒤생각없는 국회의원의 발언이 이 나라 국민을 지키는 장병들의 사기를 저하시키다니 사기를 북 돋아 주지는 못 할망정 오히려 찬물을 뿌리는 국회의원은 국회의원할 자격도 없습니다
저 아줌마 아들 둘은 면제 랍니다... 조기흥분증후군이라나 뭐라나??? 암튼 에혀 한숨만 나옵니다...
진짜 개같은년이네.....시발...
남녀평등을 부르짓는 저X이 그갓 땅덩어리라니....정말 화난다....동짓달에 gop로보내서 하루만있어도 차라리 감방이좋다고 험악한 감방으로 보내달라고할 X이지....지X끼는 면제라는데....미X년~~~~~~~
홈피가 있으려나.......아시는분 리플좀 달아주세요.....
홈피있읍니다. 국회 국방위원회 소속이랍니다. 홈피자료실에 국감자료 있읍니다. 보안인지는 모르나 우리나라 장교의 수, 전투기 보유대수 다 나왔읍니다.
이글을 볼때마다 눈물이 날라고 하는군요. 저두 군대에 갔다왔지만 예전에 연평도 해전때 비상이 걸려서 실탄 지급받고(전방이였거든요) 이동준비(진지이탈)했던때가 생각이 나네요. 그날 점심은 넘어가지도 않더라구요. 긴장되서... 어쨌든 서해교전때 용맹하게 싸우다 가신분들 정말 자랑스럽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