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30일(성 안드레아 사도 축일) 부끄럽지 않게 우리 그리스도인은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과 계약을 맺은 백성이다. 말이 좋아 계약이지 사실은 하느님이 하신 약속을 믿고 있는 거다. 당신이 먼저 우리를 부르셔서 하신 말씀을 믿고 있다. 어부 안드레아와 베드로는 예수님이 그들에게 다가가 하신 말씀을 믿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마태 4,19).” 당신과 함께 십자가형을 받던 이는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라고 하신 말씀을 믿었다(루카 23,43). 당신의 은인이자 친구인 오빠 라자로의 죽음 앞에서 슬퍼하던 마르타와 마리아는 예수님이 하신 이 말씀을 믿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4,25-26).” 과연 믿는 대로 됐다. 그리고 그대로 된다.
바오로 사도는 이사야 예언서를 인용해서 이렇게 말한다. “그를 믿는 이는 누구나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겁니다(로마 10,11).” 바위 위에 집을 짓고 사는 사람처럼 그 바위인 예수님 말씀에 희망을 걸고 살았던 이들은 모두 구원받는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그분을 따라 산 이들은 예외없이 그분이 겪으셨던 일을 그대로 겪는다. 그것은 내가 뭘 잘못하거나 운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니다. 예수님 말씀을 믿었기 때문이고, 다른 구원의 길은 없기 때문이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요한 15,18).” 그것은 ‘우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우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는 것이다(요한 15,19).’ 예수님은 죄는커녕 좋은 일만 하셨는데, 미움을 받으셨다. 우리가 그들을 미워하고 욕하고 해치기 때문에 미움을 받는 게 아니다. 시편에 기록된 대로 까닭없이 그냥 미워하는 거다(요한 15,25; 시편 35,19; 69,5). 혹시 그들 마음을 불편하게 할는지는 모르겠다. 우리는 그들에게 미움 무시 무관심 모욕을 받을지언정 부끄럽게 되지는 않는다.
너무 부끄러울 때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다고 말한다. 그만큼 부끄러움은 괴로운 것이다. 시간을 되돌리지 않는 한 그 부끄러움에서 벗어날 길은 없다. 무시와 모욕받음이 고통스럽기는 하지만 내가 잘못해서 그런 게 아니니 걱정할 필요 없다. 십자가 위에서 당신을 조롱하는 이들을 두고 하신 예수님 말씀처럼 그들이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몰라서 그러는 것이니(루카 23,34), 참으로 넓은 마음, 아버지 어머니 마음으로 이해해야 한다. 나중에 그들이 부끄러워 괴로워할 걸 생각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예수님이 그러셨던 거처럼 말이다.
하느님이 우리 선조들에게 하신 약속과 그 약속이 사람이 되신 예수님 말씀을 믿고 그분을 따른다. 우리는 결코 부끄럽게 되지 않는다. 그분은 영원하시고 이랬다저랬다 하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마태 24,35; 마르 13,31; 루카 21,33).” 문제는 아침 이슬 같은 나의 믿음이다. 내 양심은 천번 만번 생각해도 예수님 말씀이 옳다고 말하는데, 그 말씀대로 하면 불편한 일이 생겨나고 사람들에게 따돌림당할 거 같아 망설인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된다. 그래도 나중에 되돌릴 수 없는 때 부끄러워질 걸 생각하면 지금 그런 일을 겪는 게 내 영혼에는 이롭다. ‘기회가 그렇게 많았는데 내가 왜 안 했을까’ 하며 괴로워하지 말아야겠다. 그때라도 부끄러운 줄 알면 그나마 다행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마태 25,12).”라고 하시면 어쩔 건가.
예수님, 신랑을 기다리는 슬기로운 처녀들처럼 제 믿음의 등불이 꺼지지 않게 기름도 담아 놓습니다. 오늘도 십자가의 길에서 뵙겠습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어머니 이름을 부르는 걸 그치지 않으면 부끄럽게 되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