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략한 앞 이야기] 독일의 항복과 동시에 독일 대통령이 된 카를 되니츠는 한때 자신이 직접 이끌었던 유보트 함대에 싸움이 끝났다는 전문을 보낸다. 노르웨이 근해에 있던 U-977 또한 이 전문을 받게 되지만, 함장과 대원들은 과연 이것이 진정 자신들의 대장이 보낸 것인지, 아니면 적의 기만책인지 고민에 빠진다. 결국 함장은 총원 47명의 대원들 중 독일로 돌아가기를 원한 16명을 노르웨이에 상륙시키고, 남은 31명의 대원들을 이끌고서 영국의 봉쇄를 돌파해 아르헨티나로 향하려 하는데...!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아래부터 퍼온 내용
띠껍게 써서 죄송 ㅎㅎ
아래 내용은 종전 직후, 독일의 무조건 항복을 인정하지 않은 U-977이 대서양 전역에 깔린 연합군의 감시망을 뚫고 아르헨티나에 도달하기 위해 1945년 5월 10일부터 8월 17일까지, 장장 108일 간의 항해를 하는 동안의 이야기임. 이 과정에서 U-977은 영국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5월 10일 출발부터 적도 부근까지 오는 7월 14일까지, 자그마치 66일 동안 단 1회도 물 위로 올라오지 않고 스노클링만으로 항행했음.
아무리 인원의 1/3이 내려서 공간이 약간이나마 더 넓어졌더라도 2대전 병기들 중 거주성에 관해서는 나쁜 의미로 원탑을 달리는 7형 유보트에서, 2달이 넘도록 햇빛 한 번 보지 못한 채로 갇혀 있으면 어떻게 되는지, 실제 당시 U-977의 함장이었던 하인츠 셰퍼의 회고록으로 볼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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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는 높았습니다. 분명히 첫 난관을 넘겼으니까요. 스페인으로 가고 싶어 했던 2명 말고는 다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됬고 말이죠. 제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함께 고난을 감당하기로 자원했고, 그 투표 결과는 제 전쟁일지에 기록됬습니다. 민간선들을 털어먹으면서 함상 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지 않겠냐는 말도 나왔지만 저는 바로 거절했습니다.
"저희에게는 여전히 당신이 함장이십니다. 저희는 군기가 유지되길 바랍니다."
장교들은 이렇게 말했고, 다른 승조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 전우들의 인정 덕에 저는 계속 제 권한을 유지할 수 있었죠. 당연히도 매우 기뻤고, 절대 그들을 실망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숨을 가다듬을 시간은 끝났고, 이제 예정된 여정을 떠날 시간이었습니다. 노르웨이 해안에서 아르헨티나로 말이지요. 우리는 다시 모든 준비가 끝났는지 돌아보았습니다. 수평타를 상승각으로 올리고 밸러스트에서 물을 빼내 해저에서 떠오르려 했죠. 양 엔진이 전진 저속으로 돌아갔습니다...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를 않았습니다. 심도계도 그대로였고요.
"양 엔진 반속 전진!"
메데타시.
"양 엔진 전속 전진!"
메데타시 메데타시.
아니 뭐 바위에라도 깔려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더니 천천히 배가 움직여 떠오르기 시작하더군요. 그냥 우리를 놀래키고 싶었나 봅니다.
저희는 스코틀랜드, 웨일즈, 잉글랜드의 북쪽을 돌아가야 했고, 당연히 최고의 경계를 기울여야 했습니다. 영국은 독일의 주요 인사들이 탈출하는 것을 막기 위해 모든 해로를 꼼꼼히 감시하고 있었을 테니까요. 영국은 우리가 얼마나 용감하게, 또 끈질기게 싸우고 있는지 알고 있었고, 저희는 이 사투가 어떻게 될지 알고 있었습니다. 솔직히 저는 이 전쟁이 끝난 후에도 꽤 오랫동안은 영국 근해에 잠수함이 얼씬도 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1주일 이 지났고, 매일같이 같은 나날이 지나갔습니다. 끊이지 않는 긴장감과 불확실함이 정신을 마모시켜 갔죠. 그건 더 이상 해군 작전이 아니라, 우리의 자유를 위한 사투나 다름없었습니다.
낮 동안 우리는 50m 심도에서 잠항했고, 야간에는 스노클 심도로 올라와 배터리를 충전했습니다. 잠망경이 없으니 얼마나 신경이 거슬리던지. 스노클 꼭대기에 레이더 경보기가 달려 있기는 했지만 그게 모든 파장을 포착할 수 있는지는 확실치 않았습니다. 전쟁 마지막 몇 달 동안 이어진 공습 때문에 개발이 덜 된 물건이었거든요. 그 사이 연합군이 새로운 장비를 장만했을지 누가 알겠습니까.
또 스노클링에 있어서 잠망경은 필수적인 장비였습니다. 아무리 기계가 발달한다 해도 육안을 완전히 대체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 이 고위도 지역에서는 밤이 그다지 어둡지 않은 점도 불안했습니다. 또 모터에서 매연이 나오고 있는지도 볼 수 없었죠. 야간이라면 몰라도 주간에는 몇 마일 떨어진 곳에서도 훤히 보이니까요. 당장 우리부터 그 방법으로 배들을 가라앉혀 왔는데 불안하지 않을 수가 없었죠. 잠망경이 없으니 적함이나 적기가 레이더를 켜지 않고 달려드는 것에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만약 적함이 스노클을 분지르기라도 한다면 저흰 그거로 끝장이었어요. 비참하기도 하지. 맹인이 맹수가 우글대는 곳을 더듬거리면서 나아가는 거랑 뭐가 다릅니까? 유일한 감각은 청각 뿐이었고, 차라리 적들이 좀 시끄럽게 달려들었으면 했어요.
무전실에서는 좀처럼 항공기나 수상함 발견 보고를 하지 않았지만, 갑자기 신호가 격해지더니 거의 고함치는 것 같은 소리가 되더군요.
"비상!!!"
순식간에 디젤 엔진을 정지하고 스노클 마스트를 내렸습니다. 더 깊이 들어가야 했죠. 수중 청음기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프로펠러 소음이 없는걸 보니 우리 직상공에 항공기가 떠 있는 모양이었습니다. 폭뢰는 투하되지 않았죠. 뭐 다음에도 이렇게 넘어갈 것 같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계속 스노클 심도에서 나아가는 수 밖에요. 배터리를 충전하려면 2시간 정도가 더 필요했고, 만약 그 사이에 발각당한다면 적들은 우리를 포위해서 자신들이 알고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우리를 박살낼 것이 분명했습니다. 우리가 마지막 남은 유보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더군요. 우리가 중요 인사를 데리고 있을 거라고 오해할 수도 있겠지만, 결국 우리가 박살난다는 결과는 변함이 없습니다. 이미 대원들 중 1/3이 부족했고, 경험 많은 부사관들의 빈 자리가 뼈아프게 다가왔습니다. 그들은 모든 군함들의 뼈대나 다름없으니까요.
다시 스노클을 물 위로 올렸습니다. 이전에는 한 번도 써본적 없는 탈출 기구도 착용하고요. 폭뢰를 맞아서 해저로 가라앉는다면 적어도 배 밖으로 탈출은 해 보고 싶었습니다. 눈먼채로 항해하는건 정말 불편했지만 목적지에 다다르려면 어쩔 수가 없었죠. 시간을 벌고 위험 지역에서 벗어나는게 급선무였습니다. 그나마 좀 안전한 구역으로 나가려면 적어도 몇 주는 더 이렇게 있어야 했어요.
그쯤 들어 저는 스노클링 도중 엔진실에서 담배를 피우는걸 허용했습니다. 환기는 잘 되고 있었으니 배터리 가스가 위험하지는 않을 것 같았어요. 애초에 엔진도 항상 스파크를 내고, 실린더 옆의 밸브를 열어 압력을 측정할 때는 긴 화염이 뿜어져 나오기도 하는데 담배라고 못필 이유가 뭐가 있습니까? 이런 스트레스 속에서 유일한 낙인데. 다만 심도 유지를 위해 트림을 조절해야 할 기관장이 빡치지 않도록 한 번에 함미로 갈 수 있는 인원은 2명으로 제한했습니다. 심도계는 항상 14m를 가리키고 있었죠.
무미건조한 18일이 지나갔습니다. 대원들은 조금씩 조금씩 신경질적으로 변해갔고요. 몇몇은 눈 아래에 짙은 다크서클이 생겼고, 햇빛과 신선한 공기를 보지 못한 얼굴은 창백하다 못해 거의 초록색으로 보일 지경이었습니다. 춥기도 더럽게 추웠고, 무엇보다 너무 습했어요. 벽에는 온통 곰팡이가 슬고, 음식물 쓰레기도 버릴 수가 없으니 여기저기에 방치되어 쌓여갔죠. 거기서 역한 냄새와 함께 파리며 구더기, 온갖 벌레들이 꼬이기 시작했습니다. 비록 16명의 대원들이 함을 떠났지만 여전히 공간은 좁아터졌죠. 부사관 선실은 3.6m x 2.2m x 2m 규격에 불과했지만 거기서 12명이 살아야 했어요. 비누는 금방 다 닳아버렸고, 씻는데도 바닷물밖에 못 쓰니 절대 마르지도 않았죠. 좁은 라커에서 터져나온 더러운 양말들이 온 사방에 걸려 있었어요.
한 대원이 당직에서 피곤에 쩔어 돌아와 자고 싶다고 하면 다른 이들은 카드놀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서로를 고려하며 생활해야 했어요. 항상, 주야 불문으로. 물론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도 알 수 없었지만...
계속 인공 조명만 보는 채로 혹시 트림을 흐트러뜨릴까봐 허가 없이는 맘대로 움직이지도 못했지만, 더 끔찍한건 꽤 긴 시간 동안 계속 이 꼬라지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저희는 자연과 문명으로부터 완전히 고립되어 있었고, 정신을 팔 거리나 사기를 북돋을 건덕지도 전혀 없었죠. 그저 이 끔찍하기 짝이 없는 곰팡이 악취만 가득할 뿐이었습니다. 저희는 항상 울분과 불만, 분노를 터뜨리고 싶었지만 이 여정이 어떻게 끝날지는 감히 생각할 엄두를 내지 못했습니다. 이 감옥에서는 철저한 자기통제가 필수적이었지만, 저희가 얼마나 스스로를 가다듬을 수 있는지 확신이 들지 않았거든요. 결국 저희도 그냥 인간이니까요. 솔직히 진짜 거의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다시 스노클 심도로 갈 시간이었습니다만, 갑자기 디젤 엔진이 뻗어버렸습니다. 뭐지 시X?? 엔진 하나가 꺼져버린거예요. 처음에는 기관장도 대체 뭐가 문제인지 알지를 못했습니다만, 곧 엔진축이 마찰열 때문에 과열됬다는게 드러났죠. 그 때 진짜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습니다. 지금 머리 위는 초계기와 적함이 가득한 위험해역인데 숙련 기술자들도 없고, 잠망경도 없고, 어두운 날도 아니니 말입니다. 디젤엔진 하나로 충전하려면 5시간은 걸리는데 말도 안되는 소리였죠. 결국 잡히고 말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다만 젊은 대원들은 훌륭하게 일을 해냈고 이틀만에 수리를 마쳤죠. 그런데도 이놈의 망할 운이 또 저희를 엿먹이더군요. 엔진 하나를 고치자마자 반대쪽 엔진이 똑같은 원인으로 뻗은겁니다. 당연히 똑같은 작업을 다시 한번 반복해야 했고요. 웃읍시다. 웃어야죠.
시간이 지나니까 이런 일에도 익숙해졌습니다. 진짜로요! 처음 엔진이 뻗은 그 날부터 단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매일 뭔가가 하나씩 뻗어버리더군요. 이전에 한 번 정도는 전체적으로 수리를 했어야 했는데 게으름을 피운 벌을 받았나 봅니다. 당장 그 때도 적이 저희 꽁무니를 졸졸 따라오고 있었어요. 스노클을 올리면 얼마 지나지 않아서 레이더 감지기에 항공기나 함선이 포착되고는 했죠. 쓸데없는 깜놀을 피하기 위해서 저희는 약 30분마다 가능한 빨리 엔진을 멈추고 더 깊이 들어가는 식으로 대처했습니다.
이러는 이유는, 적도 이미 저희가 레이더 감지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레이더 하나만으로는 저희를 기습할 수 없었던 거죠. 그래서 유보트 사냥꾼들은 청음기도 함께 사용했습니다. 스노클하는 유보트의 디젤 엔진음은 멀리서도 잘 들렸으니까요. 분명 엔진음이 들리는데 그 방향에 아무런 함선이 없다면 거기에 유보트가 있다고 대충 확신할 수 있었죠. 만약 거기서 유보트가 엔진을 멈춘다면 적은 유보트가 스노클링을 멈추고 청음기를 돌리기 시작했다고 유추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그들을 속이기 위해 적함이 소리를 들으려고 자기 엔진을 끄기 전에 먼저 저희 엔진을 꺼버려서 적함의 위치를 파악했던 겁니다.
처음에는 우리 장교들은 스노클링을 하는 동안 카드놀이를 하곤 했지만, 이제는 그저 한 명씩 엔진실로 담배를 빨러 갈 뿐이었죠. 점점 자주. 우리는 가능한 인내심을 가지고 겉으로나마 평온한 척을 하려 했습니다. 모두가 언제 들려올지 모를 폭뢰 소리를 기다리고 있었죠. 얼마나 비극적이겠습니까? 전쟁 다 끝난 마당에 용궁 투어라니? 매일같이 상황이 악화되었습니다. 우리는 자주 8시간에 걸쳐 스노클링을 했지만 배터리는 항상 부족했습니다. 승조원들은 언제 뻗을지 모를 전기 모터를 애지중지 다뤘죠. 이 아가들이 얼마나 버텨줄지 확신이 들지 않았습니다. 가끔 모터 하나가 뻗고, 수리를 마치면 또 다른 하나가 뻗고는 햇죠. 수시로 기뢰나 폭뢰가 터지는 소리가 멀찍이서 들렸는데, 아마 다른 유보트를 쫓고 있는 소리가 아닐지 하고 넘겨버렸습니다.
7주일이 지났습니다. 이제 제 대원들은 정신이 붕괴되기 직전까지 몰렸죠. 쓰레기와 먼지가 산더미같이 쌓여갔고, 유일한 해결책은 어뢰관을 통해 이를 투기하는 것이었습니다. 제 의견은 어뢰 한 발을 함내로 들여서 빈 어뢰관을 쓰레기로 채우고 압축공기로 배출하자는 거였죠. 그리고 여기서 처음으로 반대 의견에 부딪혔습니다. 부장이 어차피 쓸 일도 없으니 어뢰들을 전부 다 쏴버리자고 주장한 거죠. 그러면 조금이라도 공간이 더 생길 테니까요. 솔직히 그 생각도 상당히 매력적이긴 했는데, 저는 어뢰를 전부 가지고 있어야 우리가 아무런 적대적 행위를 하지 않았음을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쓰레기를 버리려고 어뢰까지 버렸다는걸 누가 믿어주겠어요? 잠깐 토의를 거쳤지만 장교들이 제 말을 들으려 하는 것 같지 않았기에 결국 저는 좀 강하게 밀어붙여야 했습니다. 베르겐을 출발한 이후로 처음으로 '꼰대' 가 되어야 했던 순간이었죠. 그리고 나중에야 제 말이 옳았다는게 밝혀집니다.
이 망할 해저 2만리는 언제 끝날지 도통 알 수가 없었습니다. 벌써 50일이 지났어요. 우리는 영국 남해와 지브롤터 사이에 있었고, 저는 암벽에 세워진 요새의 보초가 된 느낌이었습니다. 여름이 오면서 점점 더워지는 것이 온 몸으로 느껴졌습니다. 곰팡이거 부쩍 늘어나 벽을 계속 긁어내지 않으면 몇 일만에 온통 초록색으로 덮여버렸고, 옷은 몸에 쫙 들러붙은데다 바닷물로만 씻으니 온 몸이 가려웠죠. 대원들이 발진과 종기를 호소했지만 아무 것도 해줄 수가 없었습니다. 이미 장장 50일을 잠수해 있었지만 적어도 지브롤터를 벗어나기 전에는 부상할 수 없었어요. 거기부터는 적어도 야간에는 수상에서 이동할 수 있었죠. 언젠가 별을 다시 볼 날을 목이 빠져라 기다렸습니다. 슬슬 밤 하늘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잊어버리기 시작했거든요.
어느 날은 한 기관병이 손이 왕창 부푼 채로 저를 찾아왔습니다. 손목에 커다란 종양이 생겨 있더군요. 그것만으로도 꽤나 심각한 상태였는데, 몇일 후에는 어깨까지 팔 전체가 부어올랐습니다. 체액저류의 전형적 증상이었죠. 결국 시술을 해야 했지만 우리 함에는 군의관이 없었습니다. 스노클이 달린 배들은 더 이상 항공기랑 싸울 일이 없으니 군의관이 승함하지 않았거든요. 선실에서 기다리던 환자는 온 몸이 창백해진 채로 샛노란 얼굴에 깊은 다크서클을 드리우고 있었습니다. 긴 수염이 그 몰골을 더욱 보기 힘들게 만들었죠. 우리 모두가 면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추위와 습기, 그리고 온통 튀어대는 디젤 연료로부터 훌륭히 우리를 보호해 줬으니까요. 80m 심도로 들어갔습니다. 우리 머리 위에서는 환한 햇살이 비치고 있을 텐데. 적어도 우리는 그렇게 상상했어요. 수술 도구를 준비하고서 슈냅스 -최고의 마취제- 병 하나를 땄습니다. 수술 부위를 냉각시키고서 절개를 시작하자 엄청난 양의 고름과 체액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끝이 없이 흘러나오는 내용물들 때문에 매 시간 붕대를 갈아주어야 했지만 적어도 수술은 성공적이었고, 몇일 후에는 고비를 넘길 수 있었습니다. 오랫만에 큰 부담 하나를 덜어낸 거죠. 솔직히 가까운 항구나 지나가는 여객선에게 환자를 인도할까 생각도 했지만 그랬다가는 아르헨티나에 다다르지도 못할게 뻔했습니다.
혼자 있을 때마다 과연 이게 잘하는 짓인지 곰곰히 생각했습니다. 저는 31명의 목숨을 책임지고 있었고, 그들 모두가 이 여정에 자원했더라도 대부분 너무 젊은 사람들이었으니까요.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고된 행군이었고, 대원들 사이에서도 불만이 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당장 돌아가야 해. 먼저 내린 16명은 지금쯤 안전히 집에 돌아갔을 거고, 우리도 이 개같은 짓을 당장 때려쳐야 한다고. 다시는 햇빛을 보지 못할 지도 몰라." 한 대원은 아예 직접 제게 와서 스페인으로 가자고 청하기까지 했지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던 겁니다. 저는 그에게 원래 계획을 계속한다고 대답했습니다. "우리 목적지는 아르헨티나다!"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습니다. 군기도 점점 해이해졌고요. 간혹 떠들던 한 무리의 대원들이 제가 지나가면 쥐죽은 듯 조용해지고는 했습니다. 꽤나 수상한 모습이었죠. 대원들은 극히 신경질적이었고 탈진 직전에 이르러 있었습니다. 매일 스노클을 올릴 때마다 비상이 울렸고, 엔진축은 더 이상 제 자리에서 버티지를 못해서 억지로 쐐기를 박아 고정해야 했습니다. 간혹 엔진 매연이 함내로 들어와 폐와 눈이 불타는 것처럼 아프기도 했고요. 큰 파도가 치면 흡기구가 막혀 함내 기압을 떨어뜨렸고 (역자주: 스노클 중 흡기구가 막히면 엔진은 외부 공기 대신 함내 공기를 빨아들이게 됨. 당연히 함내 기압은 급격히 하락하고 승조원들의 고막에 상당한 악영향을 줌.) 다시 흡기구가 열리면 공기가 도로 들어오면서 수시로 기압이 바뀌어 저희를 너덜너덜하게 만들었죠. 쓰레기를 버릴 때마다 어뢰를 어뢰관에서 빼냈다가 다시 장전하기도 해야 했고요. 그 때는 진짜 그냥 다 버려버릴까...하기도 했습니다.
기관 요원들은 항상 기름과 땀에 절어서 온갖 위생 문제에 시달렸습니다. 비누는 하나밖에 남지 않았죠. 기관장에게 허가를 받지 않으면 함내를 맘대로 움직일 수도 없으니 무슨 짐승이나 노예가 된 느낌이엇습니다. 어느날은 한 대원이 초콜렛을 훔쳤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초콜렛 하나가 뭔 대수냐 할 수도 있지만 유보트 안에서는 상당히 심각한 일입니다. 물자들이 온 사방에 널부러져 있으니 누가 멋대로 식량을 집어먹어도 그걸 바로 알아채기가 힘들고, 이는 남은 식량 계산에 오류를 만들어 함 전체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행위입니다. 그것과는 별개로, 그는 자기 전우들한테 도둑질을 한 겁니다. 이전까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은 일이었기에 모두가 그 심각성을 알아차렸죠. 저도 그냥 넘기지는 않을 생각이었습니다. 도둑질하는 분충은 용서치 않아요. 나는 그것과 관련해서 더 이상 이야기를 듣지 않고 석식 전에 대원들을 함수에 집합시키도록 했습니다. 부장이 집합 완료를 보고하자 저는 오랫동안 관물함에 처박아 두었던 흰 정모와 휘장이 달린 제복을 입고서 선실에 들어섰습니다.
"주목!" "전우들이여! 내가 귀관들을 집합시킨 이유를, 여러분이 더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굳이 더 이상 여러분을 가르치고 훈계할 생각도 없다. 귀관들은 모두 옳고 그른 것을 분간할 수 있을 만큼 나이를 먹었다. 우리는 국방군에서 가장 영예로운 전력의 일원이 아니었던가? 우리는 역사가 영원히 기억할 가장 힘든 시기를 거쳐왔다. '회색 늑대' 라는 별명이 거저 주어진 것은 아니지 않은가? 지금 와서 그걸 모두 물거품으로 만들고 싶은가? 무엇이 문제인지는 명확하다. 귀관들은 의지를 잃었다. 패배주의에 찌들어서, 지금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고, 햇빛을 보지 못하고 이 안에 처박혀 지낸다고, 불확실한 미래가 두렵다고, 자유를 위한 사투를 포기해버렸다! 요즘 자주 '차라리 이랬으면, 저랬으면' 하는 이야기들이 들린다. 연료가, 식량이 부족할 거라든지, 다 병들어 죽을 거라든지. 내가 얼간이인줄 아나? 내가 사리분별도 못하고 그것들을 숙고해보지 않았으리라 생각하나? 그럼 애초에 왜 나를 믿고 이 여정을 시작했는가? 전우들이여! 이제 너무 늦었다. 나는 포기할 생각이 없다. 귀관들이 아무런 이견 없이 내 지시를 이행하기를 요구한다. 더 이상 강압적인 방법이라도 서슴치 않겠다. 내 목적은 귀관들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다. 과연 이 여정이 잘 풀릴지는 나도 확신할 수 없지만, 귀관들이 지금처럼 무너져 간다면 실패가 확실하다는 것은 단언할 수 있다. 도둑질이 시작되면 곧 살인과 학살로 이어질 것이다. 쿠데타가 있을 지도 모르지. 그러면 우리는 쥐새끼들처럼 익사할 테고. 적어도 유보트 대원으로서 가치있는 최후를 선택해야 하지 않겠는가? 더구나, 내가 방금 말한 '도둑질' 은 가정이 아니라 실제로 오늘 아침에 일어난 일이다. 여러분의 전우로부터 무언가를 훔치는 것 만큼 가증스러운 일도 없다.. 곧 우리는 서로 신뢰를 잃고 관물함에 자물쇠를 달기 시작할 거다. 서로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무슨 범죄자마냥 주위를 살피면서 누가 등에 칼을 꽂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겠지. 그러나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귀관들이 모두 바르고 훌륭한 사람들임을 알고 있다. 나는 귀관들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았다. 정신 차려라! 이 거대한 전쟁에 뛰어든 사람답게 행동해라."
그러고서 전 선실을 나섰습니다.
"필승!"
마치 옛날처럼 대원들이 제가 나가는걸 보면서 경례를 하더군요. 그 초콜렛 도둑에게는 응당한 처벌을 내렸습니다. 몇 일간 묵언령을 내린 거죠. 이게 또 뭔 대수냐 싶어도 이 좁아터진 잠수함에 갇힌 이들에게는 가혹하기 짝이 없는 형벌입니다. 이 중압감과 스트레스를 떨쳐내려면 누군가와 대화라도 해야 하는데 그걸 못하게 되니까요.
어쨌든 그 때부터 대원들이 좀 달라졌습니다. 마치 신병 시절 처럼 바짝 군기가 들었죠. 8일 후 우리는 파티를 열어 다시 전우애를 다졌습니다. 그제서야 어느 정도 안심이 되더군요. 이 여정을 시작할 때의 분위기로 마음과 정신이 돌아간 것 같았습니다. 아무도 불평 불만이나 '스페인' 따위를 이야기하지 않았고, 대원들은 마음을 쇄신했으며 그 초콜렛 도둑도 제게 와서 사죄했습니다. 이후 그는 누구보다 열심히 작업에 임했죠. 그렇지만 아무리 사기가 올라갔다고 해도 가혹한 현실이 바뀌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60일이 지났습니다. 이제 벽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곰팡이가 슬고 있는 느낌이 들었죠. 얼굴에서는 색이 완전히 사라지고, 눈에서는 생명의 빛이 사라져 갔으며 창백하고 여윈 얼굴을 검은 수염이 뒤덮었습니다. 더 이상 식욕도 없었고, 끊임없이 기침이 터져나왔습니다. 대화도 사라져 침묵만 감돌았고, 모두가 기운이나 의지라고는 눈꼽만큼도 없이 마치 기계처럼 묵묵히 임무를 수행할 뿐이었습니다.
2달간 빛과 신선한 공기를 맞지도 못하자 마치 시체가 된 것 같았습니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을 때면 우리는 산소통에 매달리고는 했지만 그것조차 이제 거의 텅 비어버린 상태였습니다. 함내의 목재들도 썩기 시작했습니다. 격벽에 맺힌 습기가 계속 뚝뚝 떨어졌고, 모든 옷이 젖어버렸죠. 대원들은 자유시간이면 침소에서 웅크린 채로 잘 뿐이었습니다. 매일매일 디젤 엔진이 함내로 뿜어내는 매연에 선실들이 온통 검은 검댕에 덮여버렸고요. 배기구의 수압이 높으면 불가피한 상황이었습니다. 엔진은 지난 몇 주간 극심한 과로에 시달려 너덜너덜해졌고, 더 이상 저속으로는 시동조차 걸리지 않아서 항상 최고 출력을 유지해야 했지만 당연히도 엔진에 가해지는 부하도 심해졌습니다. 습도가 너무 높아서 전자장비들도 하나씩 뻗어버렸지만 이 전기기술 분야의 썩은물인 상급사관 한 명이 남아 있던게 정말 다행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저는 이제 부상을 해도 괜찮겠다고 판단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이제 시험삼아 수상항해를 해볼 만큼 비교적 안전한 위치에 도달한 것으로 보였거든요. 그 날이 바로 66일째 날이었습니다
"일몰 후 부상한다."
그 말에 모두가 감전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드디어 이 짓거리도 끝이구나! 모두가 그게 뭘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다시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바람과 바다를 느끼며 별빛을 볼 수 있다는 겁니다. 조금만 있으면 이 지옥을 나설 수 있다는 소식에 대원들의 얼굴이 밝아지고, 대화도 다시 시작됬습니다. 준비 끝! 우리의 계산에 따르면 바로 그 때가 해가 질 무렵이었습니다. 모두가 함교 위로 올라가고 싶어했지만 그럴 수는 없었죠. 아직 지브롤터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못했으니까요. 함이 점점 위로 솟아올랐고, 저는 사다리 위에 선 채로 녹슨 핸들을 잡고서 해치를 열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음탐사가 청음기로 주변을 살폈지만 근처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우리는 20m 심도로 올라왔습니다.
"부상하라!"
대원들의 귀에는 마치 마법 주문처럼 들렸을 겁니다. 전율이 다 들더군요. 다시 생기라는게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압축공기가 굉음을 내며 탱크를 채우고, 심도게가 빠르게 움직였습니다. 마치 엘리베이터에 탄 것처럼 우리는 솟아올랐습니다.
"해치 개방 가능합니다."
기압을 동화시킨 기관장이 보고하자 저는 해치를 열고 함교 위로 올라서 부장과 함께 재빨리 주위를 살폈습니다. 아무 것도 없이 텅 빈 바다 뿐이었죠. 제 머리 위에는 금강석처럼 반짝이는 별들이 있는 끝없는 하늘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저는 그들의 소리에 귀기울이며 감사를 올렸죠. 저 좁아터진 강철 관에서 무슨 꼴을 겪었던지! 달이 은은히 빛을 내리고, 나는 한참 동안 깊숙히 숨을 들이마시며 몸 안에 가득한 연료 증기로 오염된 공기를 게워냈습니다. 진짜 그 바닷공기는...달콤했어요. 함교에 견시들이 세워지고, 지휘실에서는 모두가 모여 위쪽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한 명만 올라가도 됩니까?"
이 말이 계속 울리더군요. 모두 올라오고 싶었던 겁니다. 규칙상으로는 함교에 견시 외에 2명 이상이 있으면 안되지만, 지금 이 상황에 어떻게 그걸 안된다고 하겠습니까. 결국 음탐사와 기관 요원들을 제외하고 거의 모두가 함 위로 올라왔습니다. 비록 최근 몇일간은 상당히 잠잠했지면 아직 여기도 적의 입김이 닿는 곳이었으니까요. 모두가 그 순간의 기쁨에 젖어 있었습니다. 각자 알고 있는 별자리들을 찾아봤죠. 마지막으로 본 것이 너무 오래 되었던 겁니다. 얼마나 행복하던지! 우리는 서로 낄낄거리며 농담을 던졌습니다.
"그래, 이게 바로 사는거지."
대원들 중 가장 어린 친구가 말했습니다.
"다시는 저 관짝 안으로 들어가지 않을 거야. 중세시대 고문도구들 중에서도 저만큼 악랄한 건 없었을 거라고." "그럼 여기 남아 있어. 고무보트라도 태워줄까?"
그 '초콜렛 도둑' 도 함께였습니다. 아무도 그 사건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고, 그는 다시 전우의 한 사람으로서 인정받아 모두와 어울리고 있었습니다. 밤은 빠르게 지나갔고, 아무도 잠들지 못했습니다. 파도, 흰 물거품, 우리를 따라오는 돌고래들...모두가 우리를 위한 축복 같았어요. 감히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죠. 생존욕구가 지금까지의 고난을 덮어버렸습니다. 처음에는 날이 밝기 전에 잠수할 생각이었지만, 기왕 올라온 김에 일출까지 보고 잠수하기로 생각을 바꿨습니다. 동쪽 수평선에서 새빨간 태양이 나타나 맑은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모두가 침묵한 채로 그 장관을 바라보았고, 나는 천천히 주변의 얼굴들을 둘러보았습니다. 초췌하고, 주름지고, 푹 꺼진 눈에 황록색이 감도는 잿빛 피부, 색을 잃은 입술에다가 괴물같은 수염까지...그 싱싱한 얼굴들이 어쩌다 이런 시체같은 몰골이 됬는지. 거의 몇 년이나 나이를 먹은 것 같더군요. 날이 밝자 우리는 "비상!" 없이 평온하게 다시 바다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저때 함장 트라우마가 얼마나 깊었는지 이 책 챕터 하나 거의 전체가 부상한 후에 시발 공기야 바다야 고래야 너무 고마워 엉엉 ㅠㅠ 이런 내용임.
-읽는 내가 다 끔찍할 지경이었다. 솔직히 7형 유보트를 직접 관람해본 입장에서 저기서 66일을 산다는 것 부터가 나는 도저히 상상이 안됨.
첫댓글 그야말로....생존을 위한 마루타(?)였네여.....ㄷㄷ
생존 뿐만 아니라 전쟁사에 배울 내용이 참 많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