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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스덴 여행6 - 엘베강 건너 일본궁전에서 도자기와 애국가를 회상하다!
옛 동독 땅인 예술과 문화의 도시 드레스덴 의 구시가지에서 츠빙거 궁전 을 본
후에 젬퍼 오페라하우스 내부를 극장에 소속된 가이드 투어로 견학 합니다.
그러고는 오페라 하우스 를 나오면 극장 광장인데.... 오른편은 츠빙거 궁전 이고
맞은편에 보이는 건물은 드레스덴 성 이니 그 옆에 대성당 을 지나 강변으로 갑니다.
그러고는 엘베강 건너편에 있는 일본 궁전 을 보기 위해 걸어서 강변으로 가는데
마침 강변에는 유람선 이 도착하고 많은 관광객들이 내리는 모습을 봅니다.
유월 초순인데도 햇볕이 따가운데 강변을 걸어 다리에 올라서니 이편에
브륄의 테라스 Bruhlsche Terrasse 가 보이고.....
엘베강 Elbe 건너편 모래사장에는 드러누워 선탠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여기 강변에는 특별한 시설이 없이 그냥 자연 그대로 모래사장과 나무 에 뒤편에는
잔디 라...... 도심 한복판에서 원시의 자연 을 느낄수 있는게 신기합니다!
아우구스투스 다리 를 걸어서 엘베강 을 건너 왼쪽으로 길을 잡으니
특이하게 생긴 자전거 를 보는데 2명이 타는 자전거는 보았어도...
세상에나??? 이 자전거는 무려 "7명" 이나 동시에 타는 모양이네요? 자전거
옆에는 사진도 보이는데 어째 이런 발상 을 다할수 있는건지 모르겠습니다?
도로 건너편에 드레스덴 황금 기마상 Goldener Reiter 이 눈부시게 번쩍 거리는데
여기 황금 기마상의 모델 이 된 사람은..... 아우구스투스 2세 라고 합니다.
그 앞에는 분수가 있고 뒤쪽에 보이는 건물은 드레스덴 블록하우스 Blockhaus
라고 한다는데 처음에는 신시가지에 나무로 위병소 를 세웠다고 합니다.
1683년에 이르러 나무로 만든 위병소 를 대체하기 위해 건축이 계획되어 1747년에 완공
되었다는데 1994년까지 레스토랑으로 사용되다가 현재는 작센 주립 과학대학교 랍니다.
그러고는 10여분을 길따라 걷는데 도중에 우아하게 생긴 건물들은
모두 강변에 위치한 전망 좋은 호텔 들인 모양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분수가 있는 궁전 광장의 일본궁전 Japanishes Palais 에 도착했는데...
입구를 들어서니 왼쪽에는 맘모스 모형이 서있는걸로 보아 무슨 박물관 인 것 같네요?
오른쪽은 사진과 아랍 글씨 및 안내문으로 보건대 시리아 방 이라니 무슨 민족학
박물관 인 걸까요? 독일어로 무슨 설명이 붙어있기는 한데 오늘은 휴무인양
안내원이나 직원이 보이지 않으니 도대체 왜 일본 궁전 인지 이해가 가지를 않네요?
나중에 자료를 찾아보니 드레스덴의 일본 궁전 은 실제로는 일본과 특별한
관계가 없는데도... 이런 명칭 을 갖게된 이유는 지붕 형식 때문 이랍니다.
우아하게 생긴 건물의 중앙 부분은 신고전주의 양식이 보이지만.....
"양쪽 끝의 지붕은 일본 성의 지붕" 모습과 유사하기 때문이라나요?
1715년에 작센의 그라프왕 이 후기 바로크 양식과 고전주의 양식이 섞인 네덜란드식 궁전
으로 건축했으나 아우구스투스 대왕 이“도자기의 성” 으로 활용하기 위해 개축합니다.
1732년에 건물의 네 귀퉁이 "지붕을 일본식" 으로 바꾸면서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는데 도자기의 성 을 하필이면 일본식 으로
한 데에는 "일본 도자기" 컬렉션을 보관하기 위해서 였다고 합니다?
유럽에서 도자기 를 “차이나”라고 하는 것은 중국에서 수입했기 때문
인데 중국에서 유럽에 들어온 것은 도자기 말고도 여럿 있으니.....
나침반, 화약, 종이, 차와 활판 인쇄술에 비단 이 있고 그 외에도 지금 스파게티등
파스타라 불리는 국수 도 마르코폴로가 중국 에서 가져온 것이지요?
그런데 이 중국의 도자기 수입은 명나라가 만주족 청나라의 침입 으로
망하자 혼란스러운 세월로 인해 양자강의 도자기 생산지인 경덕진 이 그만 막힙니다.
그 대타로 네델란드인들에 의한 일본 도자기 가 유럽에 수출되는데
17 ~ 18세기에 규슈 아리타 북부 이마리(伊万里) 항 에서
아리타 등에서 생산된 1,000만개의 도자기 가 유럽으로 건너갔습니다.
당시 나무 밥그릇 에 의존하던 유럽의 서민 들은 물론이고 은쟁반 을 사용하던...
귀족 들도 이 화려하고 섬세한 일본 도자기 는 경탄과 놀라움의 대상이었습니다.
100여년후 유럽인들이 일본 도자기 를 모방하여 여기 드레스덴의 마이센 자기 등 유럽
도자기를 자체 생산할 때 까지 일본 예술품인 도자기의 명성 을 드높였던 것입니다!
도자기 는 원래 중국이 차(茶) 를 수출할 때에 배의 홀수선을 낮추기 위해 실었다면...
일본에서는 도자기 포장재로 우키요에 그림이 찍힌 종이를 사용했는데 이 그림이
또 유럽의 인상파 화가 들을 사로잡았던 것이니 우키요에 (浮世畵 부세화) 란 14세기
무로마치 부터 19세기 에도시대 까지 후지산과 서민의 애환을 그려 찍어낸 목판화 입니다.
모네 는 부인 카미유를 모델로 “일본옷을 입은 여인”을 그렸으며 또
우키요에 그림 “오하시 아타케의 소나기”를 모방해
“ Bridge in the Rain" 을 그리는 등 그 수가 무려 수십편에 이릅니다!
고흐 는 자기 방을 우키요에 그림으로 장식했으며..... 귀를 자른후 그린 “자화상”
에도 배경은 우키요에 그림 이 덮고 있는등 수백편에 이른다고 하네요?
마네, 고갱, 드가 등 수십명의 인상파 화가들이 우키요에 그림에 열광했던 것이니
유럽은“일본 도자기와 우키요에 그림” 으로“자포니즘”의 광풍에 휩싸였던 것이지요!
유럽에 수출된 일본 도자기들은 “古伊万里 고이만리“ 라고 하는데 임진왜란때
남원에서 시마즈씨에게 끌려간 이들은 남부 사쓰마에 심수관가 를
이루었고, 나베시마씨에게 끌려간 이들은 북부 아리타(有田) 에
마을을 이루어 도조(陶祖) 이삼평 의 지도하에 도예촌 으로 명성을 날리게 됩니다!
후쿠오카 아리타(有田) 에 가면“고이마리”, “카키에몽”, “이로나베시마”등 도자기를
감상할수 있는데 직경 60cm 의 접시에는 에도시대의 생활 을 유추할수 있으며
“닛코나 노리다케 상표의 엔티크”는 경매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가격으로 거래되니,
세계적 명성인 아리타 도자기는 원래 "조선이 도자기 주인(원조)" 이라는걸 누가 알아준담?
왜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청자 가 맥을 잇지 못하고 사라져 버렸으며 그후 어렵게
익힌 이조백자 도 대가 끊어졌을까요? 일본이나 조선이나 “士農工商
사농공상”의 신분제 사회였으니 도공들은 신분이 낮았는데 특히 조선에서는
“정도전", "징비록" 에서 보듯이 도공들은 사람 축에도 들지 못하는 "천민" 이었습니다!
일본은 제도가 너무나도 엄격하여 신분을 바꿀수 없는 데다가 기술을 우대하는 사회 이니
기술자들은 자손대대로 숙련을 거듭하여 "그 분야에서 1인자" 가 되어 익힌 기술을
자손대대로 물려 주었던 것이니 중국을 능가하는 세계적인 도자기 로 발전했던 것이고....
조선에서는 신분제도가 다소 물러서 상인이나 도공이라 하더라도 돈을 벌어서는
논을 사서 지주 가 되고 노비 들을 다수 거느리며 돈을 주고 족보 를
사서 양반행세 를 할수 있었으니... 조선초 전국민의 불과 3~4% 였던 양반
(이때 노비등 천민은 30~ 40%) 이 조선이 망할 때는 무려 90% 로 둔갑했던 것입니다!
하여 조선의 상인이나 기술자 들은 자식에게는 이런 천한 신분 을 물려주지 않기
위해 자식 들에게 자신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을 꺼려 하고는 하루빨리
큰 돈을 벌어 부를 이루어 상인이나 도공의 신분에서 벗어나 양반 이 되어야
하니... 남을 속여서라도 급히 떼돈 을 벌려는 생각으로 상도가 타락 했던 것입니다!
자연히 조선이 망할 무렵에는 도자기 제조 기술도 사라져 버리고... 일본의
양은 남비를 수입 해서 썼으니 그런 기술이 모두 없어졌을 수 밖에?
오늘날 이천등 전국의 도자기는 수십년전 초창기에는 일본의 기술을 역도입
해 시작한 후에 지금은 스스로 새로운 기술을 익혀 전성기를 구가하는 듯 합니다!!!
천년이 넘는 기업 이 수십곳에, 4~500년 된 기업이 수백곳이 넘는 일본에 비해 한국은
백년이 된 기업이 두산과 동화약품 2개에 불과하며, 구한말 남의 성씨를 도용해
양반 비율이 90% 가 넘어선 한국의 성씨는 280개 정도인데 비해 일본의 성씨는
108,000개 인 것은 일본에서는 메이지유신후 친족들이 모여 성씨를 만들었기 때문 입니다.
또 일본 궁전 Japanisches Palais 이라고 명명된 건물을 보다 보니 이 도시
드레스덴 예술학교 를 졸업한 작곡가 "프란츠 에케르트" 가 생각나는데
그는 일본의 국가인 “기미가요”와 대한제국의 최초 국가 인 “애국가”
를 작곡한 사람으로 1852년 드레스덴 왕국에 속한 슐레지엔에서 태어났습니다.
조선말에 의병들이 부르던 애국가는 여러개 가 있는데 우리가 지금 부르는
애국가는 안익태 선생이 1,936년에 작곡해 1,948년 대한민국
건국후 공식적으로 불려지고 있는데.... 그의 사후 50년이 되는
2,015년 까지는 "애국가 저작권은 그의 부인인 스페인 여인" 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니 한국인이 국내에서 공식행사에서 애국가를 부르면 로열티 를 지불해야하는 상황
이었으니, 우리나라에서는 로열티 지불 없이 부르다 보니 저작권 문제가 발생했는데
다행히 부인인 스페인 여인 로리타 안 여사가 2,005년에 무상으로 기증(?) 해 해결됩니다.
그런데 애국가 작사자 는 안창호 선생이었으면 좋겠지만 실제는 윤치호 가 1,907년 작사해
스코틀랜드 가곡 올드랭 사인을 붙여 찬미가에 14번째 곡 으로 넣어 불렀는데 후일
윤치호가 친일파 로 변절하는 바람에 지금 공식적으로 인정하기가 껄끄러운 상황이라?
안익태도 해방후 한국환상곡 이 일본의 괴뢰인 만주국의 자기표절 이고 천황(일왕)을
찬양하는 "에텐라쿠" 를 작곡했으며 베를린 일본영사관과 일독회 경제 지원 을 받았으니...
고종 이 대한제국 을 수립해 중국의 속국에서 벗어난후 국가(國歌) 의 필요성을 깨닫고
1,901년 독일 작센왕국의 프란츠 에케르트 를 초청해 왕실의 궁정악대 를 맡기면서
국가 작곡을 부탁하니 에케르트가 작곡한 애국가 는 1,902년 고종 생신때 불렸으며
1,910년 한일 합방후 금지되었지만 후일 상해 임시정부에서도 이를 애국가 로 불렀습니다.
그 22년 전인 1,879년 프란츠 에케르트 는 일본에 도착해 일본 해군 악대 에서
근무하면서 소학교 어린이들을 위한 곡까지 작곡하던 중....
1,888년 황궁 고전음악부에 근무하게된 것을 계기로 1,890년에 일본 국가 인
기미가요 를 작곡해 천황 생일에 불렀다니 이후 대한제국 애국가 로 이어진 것입니다.
이후 에케르트 는 일본에서 신병으로 1,899년에 독일로 귀국하는데 조선주재
독일공사의 요청 으로 1,901년 조선에 와서는 작곡과 서양악기를
전파하다가 1,916년 위암으로 죽은후 양화진 외국인 묘지 에 묻혔습니다.
1904년 5월 6일 창덕궁 주합루 마당에서 트럼펫과 바순 등 서양악기 소리가 울려퍼졌으니
대한제국기와 일장기 가 걸린 가운데 고종과 이완용을 비롯한 내각대신들
그리고 수백명의 일본군 장교들 까지 모여“러일전쟁 전승 기념식”을 거행했던 것이라?
이날 음악을 연주한 사람들은 군복 차림의 대한제국 군인들로 에케르트가 조직한
군악대 였으니... 당시 영국 언론에서는 대한제국의 군악대를 두고
"조선인은 음악천재" 라고 불렀는데... 군악대는 시위연대 산하에
51명으로 초기 군악대를 이끈 사람은 시위연대 참위 김학수와 백우용 이었습니다.
대한제국 군악대 는 1902년 7월 15일 한국과 러시아 사이에 맺은 정미수호통상조약
체결 때 기념 연주를 한걸 시초로 개천기원절, 만수성절에 축하 음악을 연주했습니다.
1905년 5월 26일 비원에서 외국인 원유회 때 연주했으니 하야시 일본 공사 가 조선인과
일본인중 누가 음악에 소질이 있느냐고 묻자 바울 러시아공사 는 하야시 공사
에게 음악에서는 "조선 사람은 동양 제일 이라 일본 사람과 비교할수 없다" 고 답합니다.
즐거운 유럽여행! 함께 나누는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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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낭길잡이★유럽 배낭여행
(http://cafe.daum.net/bpgui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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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드레스덴과 일본과는
인연이 컷나봐요.
참 멋진 도시네요.
드레스덴은 독일에서도 큰 나라인 작센왕국의 수도이자
또 바그너등이 체류했던 유럽의 문화 수도 였자요?
그런데 이 도시 출신의 작곡가 프란츠 에케르트가
1888년 일본의 국가 기미가요를 작곡하고......
14년 후인 1902년에는 대한제국 최초의 애국가를 작곡했는데
1916년에 만리타향 동방의 조선에서 죽었으니...
그의 무덤이 서울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있다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