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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 눈 속의 시인학교>
윤후명
그녀를 보게 된 것은 뜻밖의 일이었다. 나이를 먹어'뜻밖의 일'은 이제 그리 '뜻밖의 일'로
서 받아들일 마음이 사그라들었지만 그래도 나는 저절로 발걸음이 멈추어졌다. 아 그리고 일단은 내 눈을 의심했다. 그녀가 맞을까. 그렇다해도 그녀가 어떻게 여기 왔을까.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어찌 여길 왔어?"
나는 평범함을 가장하며 물었다. 오래 전에, 아주 오래 전에 나는 그녀를 찾아 밤길을 걸
어가던 나를 떠올렸다. 어디선가 꽃향기가 풍겨나던 계절이었다. 꽃향기에 묻어 있던 긴장
감때문에 그날의 꽃향기는 내내 잊혀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 무렵 내 젊음의 특징은 긴장감
이 꽃처럼 피어난다는 것이었다.
꽃들이 한꺼번에 무섭게 펴. 무서워.
그러나 그녀는 만날 때마다 말했다. 그 말을 들으며 나는 무섭다는 것도 긴장감의 일종인
가 생각하곤 했었다. 아무튼 우리는 꽃들이 무섭게 핀 늦은 봄날부터 사랑하기 시작했고,
이듬해 헤어졌다. 거의 동거라고 해도 좋을 생활이었다.
"여기 동네에 살아. 여긴 문화센터였어. 전시회도 있어서 가끔 기웃거렸지."
나는 그녀의 생활을 염탐하는 듯해서 불편했다. 알고 싶지도 않고 알고 싶지 않지도 않은
심정이었다. 우리는 이미 60대의 나이에 이른 것이었다. 그녀와의 만남은 벌써 30년 전 과
거의 일이었다. 자세히 따져 30몇 년이라니, 이제는 그런 끔찍한 세월이 쉽게 거론되는 시
대인 것이다.
“여기가 문학관으로 문을 연다고 해서 구경 왔어. 전혀 감각이 없었는데, 들어오면서 혹시 올지도 모르겠다고······.”
“나도 오게 될 줄은 몰랐어.”
“넌 시인이잖아.”
“시인····.”
나는 시인이기보다 소설가라고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이었다. 나는
입구의 벽면에 크게 부조되어 있는 문학관의 주인공 시인을 바라보았다. 잘 알려진, 눈을
날카롭고 외롭게 뜬 사진도 붙어 있었다. 처음 보았을 때는 카뮈를 닮았다고 여겼던 사진이
었다. 나는 시인을 두세 번 만난 적도 있었다. 그 이야기는 어디에선가도 잠깐 한 적이 있
기에 여기에서는 생략해도 좋을 것이다. 다만 나는 남들은 입에 잘 올리지 않는 시「거위
소리」에 대해서 다시 환기하지 않을 수 있었다.
거위의 울음소리는
밤에도 여자의 호마색 원피스를 바람에 나부끼게 하고
강물이 흐르게 하고
꽃이 피게 하고
웃는 얼굴을 더 웃게 하고
죽은 사람을 되살아나게 한다
그녀에게 이 시를 이야기한 적도 있었다. 이 시를 처음 대하고 나서의 당혹스러움도 이야
기의 주제였다. 여자의 원피스를 바람에 나부끼게 하는 것은 바람인가 아니면 거위의 울음소리인가? 원피스가 바람에 나부낀다 해도 그것은 거위의 울음소리에 의한 것으로 되어 있
지 않은가? 게다가‘호마색’이 어떤 색깔인지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교묘한 역학의 문법
에 나는 그에게 빨려 들어갔다. 그 전까지만 해도 그는 내게는 멀리 있는 시인이었다. 어린
내게 그의 시는 거칠고 우왁스러웠다. 그런데 이 시를 읽고부터 그는 매우 섬세한 시인으
로 인식되었다. 지금도 그는 내게는 순수 시인으로 받아들여지다. ‘호마색’이 나왔으니
말이지 나는 드뷔시가 작곡한 <아마색 머리의 소녀>라는 작품을 연상했다. 어느 날 그녀의
머리카락이 약간의 갈색을 띠고 있어서 나는 그녀를 ‘아마색 머리의 소녀’로 부르기도 했
음을 이제야 추기한다. 처음 만났을 때, 우리는 30대였다.
시인을 만난 것은 신춘문예 당선을 축하하는 <신춘시> 동인의 모임에서였다. 당선작들을
낭송하는 순서가 있어서 읽은 뒤 자리에 앉자, 초청받아 와 있던 시인이 “어디 좀 보자”
고 팔을 뻗었다. 나는 시를 건넸다. 내가 긴장해 있는 것도 아랑곳없이 그는 겨우 몇 줄 훑
어보는 가 싶더니, 금세 돌려주었다. 두고두고 그 장면이 생각날 때마다 나는 끝까지 붙들
고 놓지 못할 시를 써야 한다고 되새기곤 했다.
행사가 계속되는 내내 나는 그 첫 만남의 장면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는 내게 시를 계속
말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행사가 끝나고 바깥으로 나오자 눈이 내리고 있었다. 나는 눈을
맞으며 걸었다. 그녀가 어디로 갔는지는 몰라도 그만이었다. 어디 있겠거니, 했을 뿐이었
다. 하기야 30 몇 년 전에 이미 어디로 간 여자였다. 내가 소설가가 되어서 살아간다고 알
려주지 않아도 되는 여자였다. 아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가수의 노래를 듣고 시인들의
시 낭송을 듣고 전시물을 둘러보는 동안 우리는 헤어진 것이었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시멘트 아파트 사이로 내리는 그 눈은 그을음처럼 하늘을 맴돌다가 길에 쌓이고 있었다.
나는 어디론가 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눈은 내 어깨 위에도 내려 쌓이고 있었다. 30 몇
년 동안 내 어깨에 쌓이는 눈을 그대로 하고 걷기는 처음이었다. 눈이 내리면서 어둠을 이
끌고 있었다. 눈을 앞세운 어둠이 아마색을 띠고 있음을 나는 보았다. 오래 전에, 오래 전
에 그랬듯이 꽃향기를 맡으며 밤길을 걷고 싶었다. 그러나 꽃이 피는 계절은 아니었다.
눈이 내린다.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누군가의 말을 전하며 눈이 내린다.
그날 밤 어디론가 눈 속을 걷다가 집으로 돌아온 나는 혼수상태에 빠진 듯이 잠이 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자리에 누운 채 다음과 같은 인용 글을 읽었다. 창밖으로는 아직 눈발이 날
리고 있었다.
카뮈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는 1960년 1월 4일 파리로 가다가 자동차 사고로 그 자리에서
세상을 떴다고 했다. 그리고 루르마랭 마을의 묘지에 묻혔다. 그 전 해의 12월 28일 죽기
전 마지막 편지 글에 자동차를 타고 가던 얘기가 나온다.
“……며칠 전에 어떤 경관이 제 자동차를 세우더니 제게 무슨 글을 쓰냐고 묻더군요(제
직업이 운전면허증에 기록되어 있었으니까요). 전 ‘소설을 씁니다’라고 간단히 대답했지
요. 그랬더니 강조하듯 다시 묻는 거예요. ‘애정 소설입니까, 아니면 탐정 소설입니까’라
고요. 마치 그 둘 사이에 중간은 없다는 듯이! 그래서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반반이죠, 뭐.’”
―편지 234, 카뮈가 그르니에에게
저녁이 되어 기신기신 바깥으로 나온 나는 다시 눈길을 걸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의사들
도, 건강 관리자들도 늙어서는 그저 걷는 게 최고라고들 입을 모았다. 평소에 운동은 커녕
걷기조차 싫어하는 나는 아무 데도 갈 곳이 마땅히 없었다. 만나고 싶은 사람도 없을뿐더
러 있다고 해도 나는 혼자이고 싶었다. 그러나 오늘은 인왕산 아래 어디로든 모르는 길을
가고 싶었다. 언젠가 밤풍경을 사진 찍었는데, 카메라가 흔들려 먼 가로등 불빛이 백조처
럼 보였던 그 길이 있을 것이었다. 백조는 이제 거위가 되어도 좋을 것이었다. 눈이 하루
종일 끊겼다 이어졌다 하겠다고 일기예보는 말했지만 거의 멎어 있었다.
서울 성곽을 복원한다고 길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와본 지도 오래된 길이었다. 어둠이 깔
리는 눈길을 더듬거리며 서촌 쪽으로 방향을 잡는 수밖에 없었다. 아파트들 여러 동이 있었
으나 말끔히 정비된 동네였다. 눈이 한 송이 두 송이 날리고 있었다. 나뭇가지 위에 내렸던
눈이 뒤늦게 날리는지도 몰랐다. 어떤 눈송이는 불빛을 담아 꽃향기를 품어내려 하고 있었
다.
꽃은 절대 무서운 게 아냐.
나는 누구에겐가 속삭인다고 생각했다. 작은 공터에 누군가가 서 있는 모습이 보이는 듯했
다. 아마색 머리의 소녀가 틀림없다는 게 내 판단이었다. 꽃이 30년 전이든 50년 전이든 똑
같이 향기롭다면, 모든 게 틀림없다는 내 판단이었다. 나는 그곳 군인아파트 길 한 옆에 군
인처럼 서서 세상의 저녁이 아마색으로 어둠을 펴기 시작하는 걸 내려다보았다. 미풍이라도
일었는지 그녀의 원피스가 나부끼고 있었다.
무슨 소설을 주로 쓰지? 연애 소설? 이데올로기 소설?
물음이 들려왔다. 나는 내가 쓰는 소설이 무슨 소설인지 순간 아득해졌다. 나는 하나둘 날
리며 아마색 머리카락이 어둠에 적셔지는 걸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러다가 용기를 내어 들
려주었다.
글쎄, 반반일 거야.
눈이 내린다. 30년 전의 내게도, 50년 전의 내게도, 아니, 태어나기 전의 내게도 눈이 내
린다. 나는 눈길에 서서 나에게 ‘너는 무슨 소설을 쓰지?’하고 묻고 있었다.
*
나는 문학관 벽면에 시인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풀」의 육필을 응용하여 만든 조각 작품
이 떠올랐다. 내가 시인의 시를 처음 본 것은 고등학교 3학년 때였다. 그 무렵 나는 이미
시를 쓴는 소년으로서 평생 시인의 삶을 살겠다고 맹세하고 있었다. 그런데 집에 세들어
사는 자매가 『사상계』라는 잡지를 보고 있어서 잠깐 빌려보다가 「만주의 여자」라는 시
를 맞닥뜨리게 된 것이었다. 나는 이런 시도 있구나 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길게 이
어지는 시의 첫 한 연은 다음과 같았다.
무식한 사랑이 여기 있구나
무식한 여자가 여기 있구나
평안도 기생이 여기 있구나
滿注에서 解放(해방)을 겪고
평양에 있다가 仁川에 와서
六. 二五때 남편을 잃고 큰아이는 죽고
남은 계집애 둘을 다리고
再轉落한 여자가 여기 있구나
時代의 여자가 여기 있구나
한 잔 데 주게 한 잔 더 주게
그런데 여자는 술을 안 따른다
건너편 친구가 내는 외상술이니까
도대체 나로서는 혼란이었다. 내 머릿속은 박목월, 박두진, 조지훈 선생이 모여서 엮은
『청록집』이 대부분 차지하고 있었고, 여기에 김춘수 선생의 「타령조」와 박남수 선생의
「새」등이 뒤따랐다. 「새」의 ‘포수는 한덩이 납으로/ 그 순수를 겨냥하지만,/ 매양 쏘
는 것은 / 피에 젖은 한 마리 상한 새에 지나지 않는다’는 구절은 얼마나 절대적인가. 이
렇듯 뭔가 그럴듯한 문학적 추구 같은 것에 나는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니 ‘무식한 여자를
앞세운 김수영의 ‛외상술’넋두리는 내게서 멀었다. 하물며 시의 본도가 아니라는 생각이
기도 했다.
그리고 외국, 가령 영국으로 눈을 돌리면 에즈라 파운드도 있었고 엘리엇도 있었고 예이츠
도 있었다. 소네트라는 영시 형식을 배운 다음부터 나는 난데없이 키츠를 들먹거렸다.
“영시에서 제일은 키츠의 시겠지요.”
언젠가 영문학자인 L교수에게 나는 말하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30년 전 그때 ‘아마색 머
리의 소녀’ 그녀에게도 그렇게 말했다는 기억이 났다. 소네트라는 시에 대해 처음 들은 건
역시 고등학교 때였다. 내가 학생잡지 『학원』에 내곤 했던 시는 공교롭게도 14행이었는
데, 그때 뽑은 이였던 박묵월 선생은 영시의 14행 형식 소네트와 비교해서 설명을 곁들여
써놓았던 것이다. 그리고 대학에서 영시를 청강하고 나서 나중에 나는 「채프먼이 번역한
호머(호메로스)를 읽고」를 최고의 소네트라고 기억하게 되었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그 신
는 대략 다음과 같이 전개 되었다.
채프먼이 번역한 호머를 읽었네.
이렇게 호머를 보여준 번역가가 있다니.
나는 얼마나 감동했는지 모른다네.
나는 그를 만나려고 밤새도록 말을 몰아 달려갔네.
여기까지 기억을 더듬어 옮겼으나 더 이상 이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책을 들추고 인터넷을 들여다보아도 어디에도 위와 같은 구절은 없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더 열심히 검색했으나 마찬가지였다. 내가 생각해왔던 그 시는 실제의 그 시가 아니었다. 아니, 내가 생각해왔던 시는 어디에도 없는 내 상상 속의 시였다. 키츠의 그 제목 시는 전혀 다른 시였다. 그럴 리가…. 그래도 사실이 그랬다. 나는 허구 속에서 나만의 키츠를 만들어 ‘제일은 키츠’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만의 세계에서 말을 몰아 가상의 키츠에게 달려갔던 것이다. 한국 시인들에 대해서도 나는 그랬을 것이었다. 엉뚱한 환상을 사실로 만들어 믿는 나라는 인간의 아만, 아집에 나는 한숨을 쉬었다. 다른 사람은 눈치채지 못했을지라도 나는 나의 나르시시즘에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종종 이와 같은 일을 겪는 것이 삶이라고 할 때, 나는 아무 것도 자신있게 말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 빠지고 만다.
*
그렇다고 시를 버리진 말어. 난 시를 쓰는 네가 좋아.
어디선가 아마색 머리의 소녀는 속삭인다. 나는 그녀와 어울렸던 오래 전 시간을 기억해내
려 애썼다. 그러나 시간이라기보다 어떤 공간이 머릿속에 어른거렸다. 나는 내 공간 속으로
나를 숨기기도 무엇인가 내 안의 길로 찾아들어가기를 원했다. 나는 여러 곳에 나만의 공간
을 만들고자 했다. 나만의 공간을 갖고 싶은 열망은 결코 사그라들지않는다. 고등학교 졸업
을 앞둔 어느 날, 집을 나와 독립을 꿈꾸며 길에서 멀리 떨어진 들판 한가운데 얻었던 방.
시멘트 불록의 가건물에는 바람이 슝슝 들어오고 있었다. 눈이 가득한 겨울의 일이었다. 나
는 새로운 인생을 인생을 시작하기로 하고 눈길을 걸어 그집을 갔었지. 사람이 살지 않은
채 비워둔 집을 지키리로 한 것과 다름없었다. 한눈에 보아도 날림으로 지은 방 한 칸짜리
집. 눈 덮인 들판이 아득히 펼쳐지는 한가운데 오똑 서있는 집. 그 눈 속의 빈 방 한 칸.
슝슝슝, 바람 소리. 그러나 나는 꿈꾸는 소년이었다. 시를 꿈꾸었으므로 모든 걸 견딜 수
있었다. 그 꿈은 나만의 공간에서야 이뤄질 수 있었다. 오래도록 이어진 그 꿈은 여러 개
의 공간을 가진 지금도 여전하다. 나는 그 열망에 시달린다. 병적이라고 할 수 밖에 없을
지경이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나만의 공간’이라는 곳은 내가 바라고 있는
그런 곳이 아니란 말인가. 그럴지도 모른다는 결론에 이르면 자못 어려워진다. 특별히 까다
롭게 구는 것 같지도 않은데 나는 여전히 어떤 공간을 염원한다. 넓고 번듯한 곳이 아니어
도 상관없다. 아니, 오히려 내가 충분히 관장할 수 있을 정도의 규모만 되면 충분하다. 물
론 나는 내가 글 쓰고 웬만한 그림까지 그릴 수 있는 공간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도 나는
어디 다른데 또 무엇이 있다면 마음이 쏠리고 있다.
무슨 결핍증이 나를 놓아주지 않는 것인가. 나는 지난 세월을 곰곰 돌아보지 않을 수 없
다. 10대의 어린 사춘기 시절부터 나는 무엇인가 쓰지 않으면 못 배기는 오랜 시간을 지나
왔다. 가슴께에 베개를 괴고 엎드려 공책에 쓰기도 했고, 앉은뱅이책상에 조아리고 쓰기도
했다. 어딘가에도 밝혔듯이 마차를 끌던 말이 차지하고 있던 마굿간에 들인 방, 어느 셋집
부엌 부뚜막에 이어진 자투리에 엎드려 있기도 했다.‘앉은 자리가 꽃자리’라는 말대로 모
두 행복한 내 꽃자리였다. 그러나 나만의 방을 향한 내 탐욕은 만족을 몰라, 이제는 여러
곳에 되기에 이르렀다.
더 좋은 글은 더 좋은 장소에서 가능하다고 믿는 것일까. 그렇다면 ‘좋다’는 척도는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일까. 그 ‘좋다’라는 게 끊임없이 더욱 나아가 이룩하려는 탐구욕의 다른 표현을 감추고 있는 데에 문제가 있는지도 모른다. 다른 알맞춤한 곳만 찾으면 용약 명작을 쓸 것만 같은 착각이 도사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얼마 전 인천 아트플랫홈의 행사로 백령도의 옛 면장님 집에서 하루를 묵은 적이 있었다. 작업실로 사용하도록 용도가 변경되어 있는 집이었다. 새벽 일찍 일어난 나는 느닷없이 시를 쓰고 있었다. 컴퓨터는 물론 마땅한 종이도 없어서 행사 팸플릿을 펼쳐놓고서였다. 그러고 보니 여행지에서 맞이하는 새벽이면 몇 줄의 글을 써온 것이 언제부터인가 새로 익힌 버릇이었다. 그 가운데 가장 뚜렷한 기억은 터키의 이즈미르에서 맞은 새벽 호텔 방이었다. 나는 마치 그 고장 출신 호메로스의 영감에라도 들씌운 것처럼 깨알 같은 글자를 노트에 적어나갔다. 이 또한 키츠의 소네트에 대한 망령의 그림자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문학을 놓치지나 않을까 하는 마음. 아니, 내가 평생 찾아 헤매던 문학이 구체적 형상으로 옆에 다가와 앉아 있기라도 한 마음. 나는 제법 영어 문장까지 동원하며 그 호텔 방을 자축했다. ‘It's a mir.' 이즈미르는 내 메모에 이렇게 표현되기도 했다.
열망하면 그 모습이 나타난다는 것은 삶의 기쁨이기도 할 것이다. 나는 그 모습이 나타나는 방을 기웃거리는 것은 지금까지의 내 문학에서 또다른 차원의 글을 향한 염원에 다름아니라고 나는 믿고 싶은 것이다.
예전 마굿간의 추억은 『모든 별들은 음악소리를 낸다』라는 소설에 자세히 그려져 있다. 그 시절이 그립다. 내게 문학이 태동하여 형체를 이루어가던 시절이 그 행간에 스며있다. 그 방에 와서 밤새 문학을 이야기하던 문우들이 그립다. 그러나 나는 늘 다른 방으로 전전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하지만 내가 비록 또 다른 방을 기웃거린다 하더라도 나는 지금 내가 글을 쓰는 ‘이’방을 나중에 가장 그리워 할 곳으로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그만큼의 문학만이 담보할 몫이기도 하다. 내게 모든 것은 문학으로 통하기 때문이다 . 예전의 어느 곳보다 많은 글을 쓴 이 방이야말로 눈주고 있음이라고 깨달아야 할 듯싶기도 하다.
나는 나만의 공간에서 오로지 시에 모든 것을 바쳐 시인이 되고 싶었다. 시인이 무엇이길래 나만의 공간이 필요했을까. 나는 오로지 은밀하게 집중하여 나 자신을 탐구하며 모든 시의 진수를 내게 담고 싶었다. 그런 다음 나만의 발걸음으로 내 앞길을 걷고 싶었다. 시인이란 이세상의 모든 존재의 핵심으로 다가갈 자격, 그때 내게는 그랬다.
눈 속의 빈 집에 우선 이불을 구해 들여놓고, 며칠 비상식량으로 먹을 만큼의 누룽지도 챙겨놓고 문득 펼쳐든 게 김수영의 시 구절이었다.
‘눈은 살아있다.’
이것이 무슨 뜻일까. 더군다나 그는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고 강조한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있다’고.
나는 작은 슬레이트집 앞마당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 집에 이르는 밭과 둔덕 모두가 마당이었다. 그러면서 ‘살아 있는 눈’을 내게 받아들이고자 했다. 눈은 하늘에서 그냥 떨어져 덮여 있는 무생물이 아니었다. 내게 무슨 말인가를 전하려 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것이었다. 그 눈의 말을 들을 수만 있다면 누구든 진정한 시인일 것이었다. 그런 어느 날 ‘일 년 중 가장 어두운 저녁’이면 또 다른 눈이 내게 프로스트의 시를 들려주기도 했다.
농가 하나 없는 곳에 이렇게 멈춰 서있는 나
말은 방울을 흔든다.
무슨 잘못이라도 있느냐는 듯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과
솜처럼 부드럽게 내리는 눈 소리뿐
숲은 아름답고, 어둡고, 깊다.
그러나 나는 지켜야 할 약속이 있어
잠들기 전에 가야 할 길이 있다.
잠들기 전에 가야 할 길이 있다.
물론 내게 조랑말 한 마리 있을 까닭이 없었다. 집에 폐마를 들여 먹이며 돼지를 키웠던 일은 『모든 별들은 음악소리를 낸다』에 써놓았다고 밝혔지만, 내가 타고 갈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내게는 ‘지켜야 할 약속’이 늘 있었다. 그래서 ‘잠들기 전에 가야 할 길’이 있었다. 흰 눈 덮인 벌판 한가운데 집으로 어서 가서 한 줄의 시를 써야 했다.
그러나 어쩌랴. 그 집 향한 내 길은 얼마 안 가 속절없이 끊기고 말았다. 어느 저녁 조랑말을 앞세워 돌아온 나를 맞이한 것은 아무 것도 없는 썰렁한 빈 방이었다. 어쩐 일일까 따질 것도 없었다. 알량한 이부자리는 물론 몇 조각 남지않은 누룽지 부대자루마저 깨끗이 없어져버린 빈 방이었다. 세상에 좀도둑 얘기는 숱해 들었지만 그런 도둑이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노엽다 못해 허망했다. 나는 다시 어찌해볼 엄두를 못 내고 내 젊은 한 시절을 접었다. 그리하여 눈 덮인 벌판의 빈 집, 내 작은 오막살이 궁전은 영영 사라져버렸다.
오늘도 눈이 내린다. 나는 하늘과 땅을 가득 채우는 눈을 바라본다. 오래 전에 그 빈 집은 사라졌어도 그 시절 내 꿈은 그대로 살아 있음을 느낀다. 아름다워서 눈물겨운 삶이다. 그래서 나는 시 한 구절의 깨달음을 다시 읊을 수밖에 없다.
‘눈은 살아 있다’고.
그리고 이어서 눈이 ‘푹푹’내리는 밤을 맞이하며 백석 시인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생각한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사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순서대로 시를 모두 다 욀 재간은 없었다. 그러나 그것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마가리’가 오막살이의 평안도 사투리라는 사실을 안 뒤로 나는 나만의 공간을 찾는 내 성향을 그 구절에 옮겨놓을 수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옛 시간 속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내가 예전 내 ‘오막살이 궁전’에서 꿈꾸고 싶었던 시의 세계를 맞이하는 듯한 때문이었다.
*
해마다 여름이면 나라 안 여러 해수욕장을 옮기며 ‘여름시인학교’라는 행사가 열리던 시절이 있었다. 현대그룹의 정주영 회장이 참석하기도 했다는 기록과 사진도 남아 있었다. 강릉에서의 행사에는 나도 얼굴을 디밀었다. 그러나 나를 강릉과 연결시키는 것이 언제나 불f편하기만 했다. 아무에게도 말하기 싫은 비밀과도 같았다. 어머니와 나, 초등학교를 들어가야 할 나이가 되었으나 전쟁이 끝나지 않아 애늙은이처럼 홀로 동네를 맴돌기만 한 나, 아는 얼굴들은 아직 피난지에서 돌아오지 않았는데 미쳤다고 손가락질 받던 여자와 그 옆을 따르던 비쩍 마른 개……. 암호 같던 일의 실루엣이 비밀 속을 강시 혹은 좀비처럼 우줄거렸다. 강릉의 시인학교는 그 강시들과 좀비들의 축제였다.
그런데 나는 겨울 눈 속에서 여름의 시인학교에 다시 와 있었다. 고향 땅에 오막살이 한 칸이라도 마련하려고 연곡면 일대의 변두리 땅을 보러 다니던 일을 포기하고 다만 나그네로서 서 있는 나일뿐이었다. 나는 비밀을 들춰내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의 묘지를 답사하여 보내준 여동생의 이메일도 오fot동안 그저 보관만 되어 있었다.
1. 산족 하천 옆에 산소 둘이 있지요? 그 산소 같아요. 인공위성 사진이라 100%확신할 수는 없지만 99%는 확실함.
2. 성산약국과 성산면사무소 사이로 올라가면 갈 수 있습니다.
3. 성산면사무소 맞은편에 성산초등학교가 있고 그 뒷산에 산소가 일직선상에 있습니다.
(인터넷으로 다음 지도에 들어가서 강원도 강릉시 구산리 성산면사무소를 치면 지도와 인공위성으로 사진을 볼 수 있습니다.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강릉 들어가기 전에 바로 성산으로 빠지는 길이 있습니다. 이삼 분이면 성산에 도착합니다. 두 갈래 길이 나오는데 좌측으로 성산면사무소, 초등학교, 경찰서가 나오고 우측으로 조금 가면 오른쪽에 산소가 있는 산이 있습니다.)
성산이라면 신소설 시대의 『은세계』의 무대이기도 했다. 나는 경포바닷가에서 눈에 덮인 마을 ‘은세계’가 어디쯤일까 가늠했다. 대관령 아래 성산은 멀리 흐릿한 곳 어디쯤일 것이었다. 경포대에 새로 짓는 호텔은 이름을 어떻게 지을까 결정하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뭐였더라? ‘경포대’도 후보로 등장하고 있었다. 호안재라든가 하는 이름도 등장했다. 파도를 머리에 떠올리고 포르투갈의 ‘파두’까지 생각이 미쳤다. 진또배기의 솟대가 개울을 건너 있으니 그 지역으로 호텔을 연결시키면 얼마나 좋겠느냐고 누군가 의견을 내놓았었다. 아무려면 어떠랴 싶었다. 그곳 일대는 벌서 여러 날째 눈이 퍼부어 ‘멋진 은세계’가 아니라 도무지 갈피를 잡기도 힘든 판국이었다.
난 언젠가 돈 많은 늙은이와 한 일 년은 살아봤으면 하고 꿈꿨었지.
눈 속에서 아마색 머리의 소녀는 속삭인다.
돈 때문에?
나는 속절없이 그 옆을 걷고 있는 내가 고달프다.
아냐. 돈이 아냐. 그건 어떤 여유 때문이야. 나무 밑에 앉았어도 나뭇잎을 못 보고 살아가는 게 아닐까…….
이 여자의 어디에 이런 구석이 있었을까, 나는 옆얼굴을 슬쩍 훔쳐보앗다. 그렇게 여러 번 본 옆얼굴일 텐데 내가 처음 본 옆얼굴이어서 나는 놀랐다. ‘사랑’이라고 한 말도 그냥 상투어였던가. 나무 아래서 잎사귀를 못 본 나날들만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나는 그렇게 말하는 아마색 머리의 소녀와 함께 머나먼 강원도 길을 가고 있다.
최준집이 집 알지요?
어? 최준집이 집?
예. 그 동네에 오막살이를 얻을까 하고요.
나는 알고 있다. 강릉 사람치고 그 전설적인 부잣집을 누가 모르랴. 그 집이 떠오르면 어머니가 ‘최준집이 집 앞마당에 잠자리꽃이 가득 피었더라’고 이야기해주던 어린 날이 함께 붙어 온다. 부잣집 옆에 오막살이라도 얻어 나하고 한 일 년 살아보자고 나는 소녀를 붙잡는다.
지난 겨울 그 고장에는 1미터가 넘는 눈이 내려쌓였다고, 눈은 또 올거라고 연일 뉴스에서 말하고 있었다. 지겨운 눈이로군. 쌓이고 그 위에 또 쌓이는 눈을 치우는 사람들과 차량들을 보며 나는 눈 속으로 길을 뚫고 나온 옛 일을 연상했다. 말이 좋아 ‘은세계’지 정말 막막한 나날이었다. 이웃집으로 줄을 매어 잡아당겨서 길을 뚫는 것도 어느 정도까지의 일이었다. 지붕 위가지 덮인 눈더미는 불가능이라는 말을 새삼 떠오르게 했다.
간신ㄴ히 열린 눈길을 나는 소녀와 함RP 걷는다. 옛 피난길과 다를 바 없는 길이다. 대관령에서 내려오는 호랑잇길은 아버지가 묻혀 있는 성산을 지나고 외할아버지가 일했다는 옥계탄광에서 묵호 바닷가로 향한다. 헌화로라는 새 이름이 붙은 바닷가 벼랑길이다. 헌화로란 『삼국유사』에 나오는 옛 설화에서 따온 이름이라고, 강릉에서 배달되어오는 작은 책자인 『제일 강릉』에 설명되어 있었다. 신라 시대에 벼슬을 살러 오던 순정공의 아내 수로 부인이 이 길에 이르러, 벼랑 위에 핀 꽃을 꺽어다줄 사람 누구 없느냐고 돌아본다. 그때 암소를 끌고 가던 노인이 자기가 꺾어오겠다며 노래하는데, 그 노래가 「헌화가」였다. 나는 소녀에게 눈 속의 꽃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느덧 나는 노인이 되어 그게 바로 내 노래가 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어디 마가리라도 찾아봐야겠어.
나는 뜻하고 있었다는 듯이 말한다.
어디? 마가…….
오막살이 집 한 채.
30 몇 년 전 소녀와 처음 만나서도 나는 똑같은 말을 했었다. 고향에 방 한 칸이라도 마련하고 소녀와 살림을 차릴 수 있다면, 하고 나는 꿈꾸었다. 그러니까 백석의 시에 맞춘다면, 나타샤가 옆에 있는 상황에서 같이 산다는 상황으로 발전해간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삶이 외로운 삶이리라 미리 짐작되었다. 웬일인지 나는 소녀에게서 내 외로움을 발견하는 삶을 살고 싶었다. 외로움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만남은 진정한 만남이 아니라는 게 그때의 깨달음이었다. 사랑의 실루엣은 기쁨이 아니라 외로움이었다. 그래야만 형태가 갖추어진다고 나는 믿었다. 그것이 삶의 온 모습이라고 나는 믿었다. 사랑에 빠져서 나는 그때는 거위를 키우려는 계획은 미처 하지 못했던 것 같다.
함께 걷는 우리의 어깨 위에 눈이 한 송이 두 송이 날린다.
저녁 어스름이 다가오고 있지만 어디에도 화톳불 하나 없다. 아니, 화톳불이라니? 언제 그런 불도 다 있었나? 그런 게 있다는 건 박목월 선생의 「도마뱀 삼형제」든가 하는 동시에서였을 뿐이다. 처음에는 화톳불이 아니라 화롯불이 아닐까도 했었다.
저 검은 바다 파도에 어머니가 묻혀 있지.
나는 손가락으로 바다를 가리킨다. 어머니의 뼛가루룰 고향 바닷가에 뿌리던 기억이 살아난다.
알고 있어요.
소녀는 며느리처럼 다소곳하다. 소녀는 말없이 나를 따른다. 그러나 이쯤해서 나는 밝히지 않으면 안 된다. 소녀는 소녀가 아니라 소녀의 머리통이라고 해야 한다. ‘소녀와 함께’가 아니라 정확하게 말하면 ‘소녀의 머리통과 함께’로 바꿔 밝혀야 한다. 소녀도 처녀라고 해야 한다. 무슨 소린가 할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한 번 말한 대로 따르고 있다. 소녀는 오래 전에 호랑이에게 물려간 몸이었다. 그리고 이제 몸뚱이도 없이 머리통만 남아 있다. 나는 소녀의 머리통에 팔을 둘러 받들고 어디론가 가고 있다. 마지막 남아 있는 고향길이다. 그게 고향으로 가는 뜻이었다. 아주 옛날 어느 저녁답에 소녀는 뒤란에서호랑이에게 물려가서 머리통만 바위 위에 남겨져잇더란 그 소녀였다. 나는 소녀의 머리통을 팔에 안고 마가리를 찾아가고 있다. 그러므로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나타샤는 이미 내 팔에 안겨 있는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다시 만났지요?
소녀의 혀가 움직이는 소리를 나는 듣는다.
그야 김수영문학관에서 만났지만 그건 그리 중요한 게 아냐. 만나게끔 돼 있었으니까.
하기야 저 역시 예전에도 헤어질 생각은 별로 없었어요.
그렇겠지. 인생이란 살아보면…….
‘살아보면’뭐가 어떻다는 것인지 이어야 할 말은 아예 흔적조차 없다.
그래요.
소녀의 혀가 강릉관노가면놀이의 탈 속에서 달그락거리는 것만 같다.
그러면 머리만으로 살아 있었단 말인가?
나는 바위 위에 얹혀 있는 머리통을 보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나는 지금 그 머리통을 팔에 안고 눈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바위 위에 올라 기다리기만 했어요.
뭘?
사랑을요.
나는 알고 있다. 강릉단오제는 머리 감는 여자를 물어가서 장가를 든 호랑이가 산신이 되어 해마다 한 번씩 찾아오는 행사가 아니던가. 그런데 호랑이의 아내가 된 소녀가 내 팔에 안겨 ‘아마색 머리의 소녀’로 둔갑을 한다. ‘둔갑’이라면 소녀는 섭섭해 할지 모른다. 본래 그대로라고 그녀는 말한다. 저는 예전과 똑같아도. 천 년 만 년 변하지않아요. 내가 꼭 끌어안을수록 머리통은 따뜻해지며 내 몸까지 녹여준다. 눈을 깜박이는 그녀에게 나는 얼마 전에 쓴 시 한 편을 들려주겠다고 제안한다.
어려서부터 거위를 키우고 싶었다
시골장에서 거위병아리를
멀거니 쳐다보다가 돌아온 날
거위가 비워놓은 거위우리에 들어가
날갯짓하는 꿈을 꾼다
왜 내가 하필이면 거위를
날지 못하는 거위를
날갯짓 우스운 거위를
꿈꾸는지 모르겠다고 투덜대다가
잠에서 갠 새벽녘
시는 미완성으로 멈춘 듯하다. 그러므로 제목은 「날개 달기」라고 붙여져 있다. 나는 평생을 ‘날갯짓하는 꿈’속에서, 미완성일 수밖에 없는 숙명 속에서 오늘까지 살아왔다는 이야기에 다름 아니다. 누구는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꿈을 꾸지만 나는 ‘날지 못하는’꿈에서 깨어나 투덜댈 뿐이다. 나는 거기서 멈춘다. 어떤 결론도 없다. 나는 눈길을 걸으며 결론 따위는 일찍부터 내게 없었다고, 그래서 다행이라고 나를 위로한다. 단지 ‘아마색 머리의 소녀’이며 또한 ‘나타샤’인 여자와 함께 있으면 되는 것이다.
우리 집에 거위도 키우기로 해요.
내 미완성의 소박한 꿈은 아울러 그녀의 꿈이 된다. 우리가 나란히 누워 거위를 꿈꿀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서 내 삶은 완성이 되리라. 나는 결단코 투덜거리지 않으리라.
눈이 내린다. 30년 전의 내게도, 50년 전의 내게도, 아니, 그보다 더 예전 태어나기 전의 내게도 눈이 내린다. 우리가 가고 있는 길 위에 눈은 흰 빌로드처럼 깔린다. 거위와 조랑말과 당나귀가 있는 시인학교 쪽으로 나는 한 여자의 머리통을 안고 밤길을 하염없이 걷는다. 눈도 하염없이 내리는 강릉 가까운 어느 골짜기에서의 일이다.
첫댓글 중학교... 형과 누나의 '책'들 속으로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릴케, 키이츠, 바이런들에 쏘옥 파묻히던 때, 상상 속의 소녀를 사랑하였는데 그것이 ''이레느 깡 단베르 양의 초상화' 라는 르노아르 그림 속의 소녀죠. 그리고 누구의 시였는지 딱 한 구절이 불 같이 떠올라요. 그렇게 '아마색 머리의 소녀'를 검색하다 윤후명님의 소설을 만났죠. 소설 속의 주인공이 옛 학생잡지 '학원'에 기고한 것도 있는데 화자의 나이 '60이 넘은' 것과 '학원'의 타이밍이 잘 맞거든요.^^ 중 3때던가 내가 보낸 '나의 찰수'라는 수필??이 잡지에 실려 얼매나 놀랐는지 모른답니다.
'그 눈은 그을음처럼 하늘을 맴돌다가 길에 쌓이고 있었다. 나는 어디론가 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눈은 내 어깨 위에도 내려 쌓이고 있었다. 30 몇년 동안 내 어깨에 쌓이는 눈을 그대로 하고 걷기는 처음이었다. 눈이 내리면서 어둠을 이끌고 있었다. 눈을 앞세운 어둠이 아마색을 띠고 있음을 나는 보았다. 오래 전에, 오래 전에 그랬듯이 꽃향기를 맡으며 밤길을 걷고 싶었다.'
- 아, 사십 년 전의 한 소녀를 우연히 길에서 만나고 싶은 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