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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서자료실 스크랩 염불 수행 / 불교수행의 길 2
subori1004 추천 0 조회 267 18.01.19 14:0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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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수행의 길 2



염불 수행



1. 불교를 배우고 익히는 의미


모든 의미는 자기 자신과 어떤 일과의 관계속에서 이루어 진다.

자신이 존재하는 의미, 가족과 친구, 연인과의 만남의 의미, 그리고 인간으로서 삶의 의미 등등 모든 것이 자기 자신이 무슨 일을 함으로부터 이루어 지는 것이다.

불법을 배우고 익히는 의미도 자기의 인격적인 모습을 스스로 정립하고 만들기 위한 것이다.

경전을 배우고 익히는 목적은 자기의 존재 의미를 구명함과 동시 자기의 사상과 인생관을 지혜롭게 확립하고 의미있고 보람있고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한 최선의 길을 만들기 위한 것이다.

인간으로 태어나 이 세상를 살면서 이러한 인생관과 종교관을 확립하지 못한 인간이야말로 가장 불쌍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집이 가난한 것은 정말 가난이라고 할 수 없지만, 도(道)가 가난한 사람이야말로 가장 불쌍한 사람인 것이다」 라는 말과 같이 인간으로 살면서 자기의 존재에 대한 참된 삶의 의미와 인간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를 확실히 확립하지 못한 사람이야말로 불쌍한 사람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불교의 경전은 인간으로서의 참된 존재 의미와 보람된 삶을 살 수 있는 성현들의 체험과 지혜의 말씀을 기록하여 전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경전을 읽고 배움은 각자의 인생을 올바르게 살 수 있는 바른 길과 이정표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길과 이정표를 자기의 인생의 길로 만들어 살아갈 때 자신은 새로운 지혜와 인격적인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경전을 통하여 성현들의 체험과 지혜를 배우고 익힘은 결국 자신의 인생과 삶을 바꾸는 계기를 마련함과 동시에 성현들과 똑같은 경지에서 지혜와 인격을 구비한 새로운 인생길을 향해 보람차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배움〔學問〕은 인간을 바꾼다. 또한 인간을 바꿀 수 있는 배움이 아니면 참된 배움이라고 할 수 없다. 그리고 인간이란 타인이 아닌 각자의 자기자신인 것이다. 타인의 마음을 바꾸려고 한다면 먼저 자기 자신을 바꾸지 않으면 안된다.

인간은 경전을 읽고 배움을 통해서 자신의 생각이 바뀐다.

생각이 바뀌면 마음이 바뀌고, 마음이 바뀌면 정신이 바뀌고, 정신이 바뀌면 얼굴이 바뀌고, 얼굴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삶이 바뀌고, 삶이 바뀌면 생활이 바뀌고, 생활이 바뀌면 인격이 바뀌고, 인격이 바뀌면 인생이 바뀐다.

바꿀 수 있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이며 자기 마음이다. 타인의 모습과 마음을 내가 바꿀 수 없다. 설령 자기 자식이라 할 지라도 불가능하다. 인간은 각자 자기 자신의 마음은 자기 마음대로 자유롭게 바꿀 수 있다. 이러한 자기 전환을 깨달음이라고 한다.

그런데 무턱대고 자기의 마음을 바꾸는 것이 아니다. 바꿀 수 있는 회전축이 있는 것이다. 지혜로 관철된 진실의 가르침과 윤리적인 가치 기준에 의한 확실한 정신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정신을 성현의 말씀인 경전을 통해서 철처히 배우고 익혀야 한다는 것이다.

각자의 좋은 삶과 인생을 위해 우선 배우고 익혀야 한다. 불교를 배우고 익히는 의미도 이와 같다. 특히 불교는 각자 스스로 자기의 마음을 깨닫고 지혜와 인격을 연마하는 종교이다. 결코 누구를 위한 것이 아니라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한 배움과 익힘이며 자신의 무한한 가능성을 스스로 개발하고 체험하고 지혜와 인격으로 전개하는 인생의 삶을 살아가도록 제시하고 있는 가르침인 것이다.



2. 불교의 실천적 구조


불교를 한마디로 말한다면 자각(自覺)의 종교라고 할 수있다. 그것은 즉 기독교나 이슬람교처럼 절대적인 존재자(存在者)로서 유일신(唯一神)을 믿는 일신교(一神敎)처럼 단순히 부처님을 신봉하는 믿음의 종교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이 직접 자각의 체험을 통해서 설하신 가르치신 일체의 모든 법(法)의 진실된 도리를 우리들 스스로 직접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각자가 직접 수행을 통해서 추체험(追體驗)하고 확인하여 각자 자아의 지혜와 인격으로 구현하도록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들 모두가 본래부터 지니고있는 각자의 성스러운 불성을 자각하고 개발하여 자기의 종교를 확립하여 각자가 스스로 진실되고 참된 자아완성의 인격과 행복된 삶을 이룩할 수있는 길을 제시하고 있는 가르침인 것이다.

이러한 불교의 실천적인 구조를 일반적으로 신(信) 해(解) 행(行) 증(證)이라는 네 가지로 요약하고 있는데, 이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각자가 확신하고, 이해하며 스스로 실천을 행하여 직접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의 세계를 자각〔證得〕하여 체득하게 하는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신의 대상은 불(佛)ㆍ법(法)ㆍ승(僧)의 삼보(三寶)이며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여기서 ‘신’이라는 말은 범어 sraddha로서 『구사론(俱舍論)』에서는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믿음〔信〕은 우리들의 마음을 정화시켜주는 힘을 가지고 있다. 부처님을 신봉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확신하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청정한 화합대중인 수행자들을 믿는 신심이 삼보가 가지고 있는 훌륭한 덕성을 자기의 마음속에 그리며, 삼보에 귀의하는 그 신심(信心)으로 인하여 우리들 마음이 삼보의 공덕에 동화(同化)되어 점차로 마음이 정화되어 가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실적에 유훈(遺訓)하신 말씀 가운데에 「각자가 스스로 자기를 등불로 삼고,진리의 가르침을 등불로 삼도록 하라(自燈明 法燈明)」이라는 말씀은 불교의 믿음〔信〕이 교주인 석가모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각자 자신과 진리의 가르침에 있음을 잘 말해 주고 있다.

『대지도론(大智度論)』에는 「불법의 대해(大海)인 진리의 세계에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은 신심을 가져야 하며, 깨달음의 지혜로서 무사히 고해(苦海)를 건너갈 수 있는 것이다」라고 설하고 있는 것처럼, 불교를 배우고 스스로 그러한 불법의 세계에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는 마음을 확고히 하지 않으면 안된다.

또한 『화엄경(華嚴經)』에서도 「믿음은 불도(佛道)의 근본이며, 모든 공덕을 낳는 어머니와 같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불교에서의 신심은 진리의 세계에 들어가는 출발이며 현관인 것이며, 불법을 이해하고 체득하는 통로로 직결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불법의 이해〔解〕와 실천〔行〕은 부처님께서 설하신 가르침〔法 - dharma〕을 올바르고 정확하게 이해하여 그 교리에 의거하여 각자가 직접 실천 수행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가르침이란 불교의 가르침 그 전부인데, 이를 부처님의 근본 교설인 원시불교에서 살펴볼 때, 불교의 존재론(存在論) 인식론(認識論) 실천론(實踐論)의 셋으로 요약할 수가 있다. 즉


1) 우리들은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가?〔존재론〕

2) 우리들의 존재가 남 혹은 다른 사물과의 어떤 관계에 있는가?

   (1) 다른 존재를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인식론〕

   (2) 다른 존재와 어떻게 관계하며 자신을 전개할 것인가?〔실천론〕

제행(諸行)이 무상(無常)이요 제법(諸法)은 무아(無我)이며, 일체가 괴로움〔불안〕이라는 삼법인설(三法印說)이며, 일체의 모든 법은 생멸(生滅)의 법이라고 하는 제법의 본질과 존재를 밝힌 연기(緣起 ; pratitya-samutpada)의 법칙 등인 존재론, 이러한 괴로움(duhkha)이 가득찬 사바세계에 존재하고 있는 우리들의 실상을 올바르게 인식하고 여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해탈(vimoksa)의 길을 체계있게 설하고 있는 것이 고(苦 ; duhkha) 집(集 ; samudaya) 멸(滅 ; nirodha) 도(道 ; marga)의 사성제(四聖諦)와 팔정도(八正道)의 실천덕목이다.

이러한 불교의 기본 교설을 먼저 올바르게 이해하지 않고선 바른 실천을 할 수가 없음은 당연한 일이다. 그것은 마치 지도나 나침판을 지니지 않고 바다를 건너는 것과 같이 무모한 짓과 같다고 하겠다. 그래서 불교의 가르침이나 진리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과 이를 사유하고 자기의 마음을 관찰하며 수행하는 실천행은 서로 의존하고 도우면서 이루어지는 상의상관의 관계에 있는 것이기에 보통 이를 행해상응(行解相應) 행해구족(行解具足)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대개 이러한 불교의 이해와 실행을 새의 두 날개와 마차의 두 수레바퀴에 비교하고 있는 것처럼 그 어느 하나라도 결여되어서는 안 될 것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불교의 실천행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깨달음에 이르는 가장 기본적인 교설이 앞에서 언급한 사성제와 팔정도, 그리고 육바라밀의 보살도라고 할 수 있다.

먼저 팔정도란 모든 존재와 진실을 올바르게 볼 줄 아는 안목〔正見〕을 가지고 올바른 생각〔正思〕과 바르고 부드러운 언어〔正語〕올바르고 점잖은 행동〔正業〕으로 올바르고 밝은 자기의 생활〔正命〕을 방일(放逸)하지 않고 부지런히 노력하며〔正精進〕건전한 사려(思慮)와 주의〔正念〕로서 언제나 선정을 통한 안정〔正定〕과 편안함으로 자기의 삶을 진실되고 행복되게 구현하는 실천덕목인 것이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견(正見)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의 정견은 사성제의 진리와 연기의 법칙에 의거하여 모든 존재의 참된 모습을 올바르게 볼 수 있는 지혜의 안목을 말하며, 이것은 대승불교의 실천덕목인 육바라밀의 지혜(智慧)에 해당된다.

  『불교유경(佛遺敎經)』에서는 「지혜는 생노병사(生老病死)의 고해〔사바세계〕를 건너갈 수 있는 배와 같고 무명을 비추는 밝은 등불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모든 환자의 병을 치유할 수있는 양약(良藥)이며, 번뇌의 나무를 찍어 버리는 도끼인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마땅히 법문을 듣고 사유하며, 스스로 지혜를 키워야 한다」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지혜는 제법의 실상을 올바르게 통찰할 수있는 직관적인 힘인 것이며,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올바르게 이해하여 위와같은 실천을 거듭 거듭 반복하여 스스로 체험하고 체득된 종교적인 통찰력인 것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곧 제법의 본래 모습을 올바르게 체득한 자각에 의한 지혜를 획득하는 것이며 이러한 자각적인 지혜로서 각자가 모든 사물〔法〕의 본질을 올바르게 파악하여 스스로의 자각적인 성스러운 인격을 일상의 생활에 편안하게 전개하는 것이다. 이를 생활의 지혜라고 한다.

또한 이렇게 불법의 참된 도리를 깨닫고 지혜를 체득한 사람은 自內證〔自覺〕의 세계에 머물어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일체의 중생을 구제하려는 자비심(慈悲心)과 서원(誓願)을 일으켜 지혜의 광명을 밝히어 사바세계의 고해에 허덕이는 몽매한 중생들이 모두 불법의 세계, 진리의 셰계로 나아갈 수 있도록 길을 안내하고 등불을 밝히는 끊임없는 보살행을 전개해야 한다.

불교에서 추구하는 인격의 구현은 이처럼 「각자의 자신의 향상을 위해서 보리심을 일으키고 일체중생을 위해서 보살도의 실천과 교화를 전개하는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의 자리이타(自利利他)의 보살정신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불ㆍ보살의 지혜의 광명이 중생구제의 자비로서 승화되는 것이기에 불교를 지혜와 자비의 종교라고 하는 것이다. 이상 불교의 실천적인 덕목인 팔정도와 삼학, 육바라밀의 관계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3. 불교의 수행은 삼업(三業)을 청정하게 하는 것


부처님의 가르침을 팔만사천법문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불법(佛法)은 너무나 다양하고 방대하여 전체를 한 번에 파악하기 어렵다. 팔만사천법문이란 중생의 번뇌가 이처럼 많다는 말이며, 중생 번뇌의 병을 치유하기 위해선 팔만사천법문이라는 방편의 약이 필요한 것임을 말한다. 그래서 불법은 중생의 번뇌〔病〕에 맞추어 진실된 가르침으로 처방하는 법문〔藥〕을 제시하고 있다는 방편법문이라고 하는데 이를 병에 알맞는 약을 부여해 주는 의미로 응병여약(應病與藥)이라고 한다.

번뇌는 결국 자신이 만들어서 자신을 괴롭히는 병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번뇌를 제거하는 진실된 가르침을 통해서 번뇌의 본질과 이를 제거할 수 있는 실천방법을 잘 알게 될 때 각자가 스스로 번뇌의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불법은 각자가 만법의 진실을 철저히 깨닫고, 괴로움(苦)의 번뇌를 벗어나 해탈하여 무한한 절대적인 자유와 지혜를 개발하는 자각의 종교, 생활상의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생활의 종교라고 할 수 있다.

중생의 번뇌를 없애는 불법의 수행은 자신을 불안에서 평안함으로 미혹에서 깨달음으로 무명의 어두움에서 지혜의 광명으로 전환하게 하는 것이며, 근원적인 본래심의 자각을 통한 지혜로운 삶을 가꿀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인격을 함양하는 구체적인 실천행이 되는 것이다.

즉 불법의 실천수행은 만법의 주체인 자아의 자각과, 지혜와 인격형성을 위한 것이라고 할수 있는데, 자신의 향상적인 삶의 좌표가 되는 계율, 자신을 되돌아 보고 언제나 자각적인 삶과 지혜를 창출하게 하는 선정, 그리고 인격적인 삶을 만들어 가는 지혜로운 생활이 실천덕목의 중심이 되고 있다.

이러한 삼학(三學) 팔정도 육파라밀은 대ㆍ소승불교를 통해서 불교 수행의 구체적인 실천덕목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모두 자신의 삼업청정의 구체적인 수행으로 집약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좌선 염불 주력(呪力) 기도 등의 수행도 다양하게 제시되고 있는데, 그것은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중생의 근기와 성향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어떤 수행방법을 선택하여 실천할 것인가는 자신이 지금 실천할 수 있는 입장과 상황에 맞추어 실천하면 되는 것이며, 불교에서 어떠한 수행을 실천한다고 할지라고 모두 신(身)ㆍ구(口)ㆍ의(意) 삼업(三業)을 청정히 하는 실천이다.


1) 불법(佛法)의 수행이 왜 삼업청정(三業淸淨)의 수행이 되는 것인가?


인간은 신(身)ㆍ구(口)ㆍ의(意), 이 세 가지의 작용과 행위로 일체의 생활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어떤 행동을 하려고 마음먹는 의지작용이 의업(意業)이며, 그것을 신체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신업(身業)이며, 언어로 표현하는 것을 구업(口業)이라고 한다. 몸과 마음과 입이 하나가 될 때 자신은 본래의 자신을 회복하여 살아가는 준비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율장(律藏)』에도 입을 잘 간수하고 뜻을 잘 수습하여 몸으로 나쁜 일을 범하지 않으면, 이와 같은 수행자는 깨달음〔열반〕의 경지를 체득하리라(守口攝意身莫犯 如是行者得度世)」라고 설하고 있다.

몸으로는 움직이지 않고 앉아 있을 지라도 마음으로는 온갖 사량분별로 번뇌를 일으켜 괴롭고 슬프고 기쁘고 울고 웃고 자신을 시끄럽고 산란스럽게 만들면 역시 불안하고 괴로움에 빠지는 것이다.

번뇌가 일어나는 것을 생(生)이라 하고, 번뇌가 없어지는 것을 사(死)라고 한다. 이렇게 인간은 끊임없이 번뇌가 일어나고 없어지는 연속 속에 살고 있기에 생사의 苦海〔번뇌〕속에서 부침(浮沈)한다고 말하며 이것을 선에서는 생사윤회(生死輪廻)한다고 말한다.

불법은 심법(心法)이기 때문에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는 중생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온갖 번뇌에서 생사윤회하는 것을 말한다. 생사윤회를 벗어나는 것이 번뇌가 없는 근원적인 본래심을 깨닫고, 신ㆍ구ㆍ의 삼업을 청정하게 하는 수행과 깨달음을 체득하는 것이다.

삼업청정이란 신업 구업 의업을 맑고 깨끗하게 한다는 말인데, 청정은 자신의 몸과 마음을 하나로 하여 깨끗하게 하여 공(空)으로 하고 텅 비운다는 의미이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를 불교의 대표적인 수행을 통해서 살펴보자.


먼저 신업청정의 수행으로는 불교인으로서 계율을 수지하고 청정한 지계(持戒) 생활을 하는 것에서 목욕재계하고 지심으로 합장 예불(禮佛)을 하며, 일체중생을 공경하는 마음과 자세를 들 수 있겠다. 그리고 몸을 바르게 하고 단정히 앉아 좌선과 염불수행을 하는 구체적인 자기의 수행은 물론 온화한 얼굴과 밝은 미소 상냥하고 부드러운 말로 중생을 인도하는 보살의 자비화신(慈悲化身)이 되는 것이나, 생산노동을 통한 자급자족의 경제생활을 영위하는 작무(作務)의 수행 등이 있다.

다음 구업청정의 수행은 경전을 독송하며 불법의 참된 정신을 자각하며, 또한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 「석가모니불」의 성호(聖號)을 입으로 외우면서 염불하는 구체적인 수행을 통해서 자신의 구업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구업청정은 단순히 입으로만 행하는 행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입으로 행동하는 구업도 포함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마음의 구업을 청정하게 하는 수행은 마음의 입을 통해서 염불하는 관념염불과 좌선 등을 통해서 실천하는 수식관(數息觀) 등이 있다. 관념염불은 마음의 입으로 「관세음보살」이나 「나무아미타불」 등의 성호을 부르면서 염불하는 수행이며, 수식관은 자신의 호흡을 잘 조절하고 관찰하면서 호흡을 마음속으로 세어가는 수행이다.

그리고 의업청정의 수행은 번뇌의 마음, 즉 망심(妄心)을 일으키지 않고 언제나 청정하고 깨끗한 본래심으로 자신의 일상생활을 만들어 가는 수행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각자의 근원적인 본래심의 자각을 통해서 가능한 일이다.

합장하여 염불을 할 때는 자신의 입으로 외우는 부처님이나 보살님의 성호의 목소리를 또렷하게 듣고 자각할 때 자신의 신업과 구업과 의업이 혼연일체가 되어 삼매의 경지를 이룰 수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비로소 삼업청정한 수행을 할 수 있게 된다.

만약 몸은 바르게 앉아 합장하고, 입으로는 열심히 성호를 외우는 염불을 하고 있을 지라도 마음이 다른 분별심 차별심에 떨어져 번뇌를 일으키면, 몸과 마음은 두 가지 작용을 하게 되므로 몸과 마음이 따로따로 두 살림을 하게 된다. 삼업이 일치하지 않게 되므로 삼업청정의 수행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되며 삼업이 청정한 수행이 되지 않은 수행은 올바른 수행과 기도라고 할 수가 없다.

삼업을 청정하게 함은 자신의 존재를 의식하는 아상(我相) 인상(人相)은 물론 아공(我空) 법공(法空)으로 하여 자신을 텅 비우고 공(空) 무아(無我)로 하여 지금 여기서 실행하는 수행에 일념(一念)을 이루게 하는 것이다. 『금강경(金剛經)』에서 말하는 사상(四相)이 비워지고, 아공 법공이 되었을 때 자신의 진정한 본래심의 지혜가 무애자재하게 작용되는 것이다.

또한 좌선의 수행을 통해서 살펴볼 때, 몸을 정돈하고 잘 조절하는 정신단좌(正身端坐)의 조신(調身)은 신업청정의 수행이며, 마음의 입을 통해서 자신의 호흡을 세어가는 수식관은 구업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고, 그리고 마음의 입을 통해서 세어보는 마음의 목소리를 마음의 귀로 또렷하게 듣는 자각은 의업청정의 수행이 되는 것이다.

염불이나 좌선의 수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합장하는 모습이나, 단정하고 바르게 앉아 신체를 바르게 하는 자세가 마음을 바르게 수행하는 기본적인 자세라는 점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외형상에 보이는 신체적인 자세가 아니라, 마음을 생사의 망념과 번뇌로부터 벗어나 의업을 청정하게 하는 실천에 있는 것이다.

좌선과 염불 등의 수행을 통해서 의업을 청정하게 하는 구체적인 실천은 오직 지금 여기서 행하고 있는 자신의 행위를 자각하는 일밖에 다른 방법이 없는 것이다. 지금이라는 시간은 지극히 중요하다. 인간은 지금이라는 시간 위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며, 지금을 떠나서 자신의 존재가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의 염불이나 지금의 좌선에서 자신의 몸과 입의 행위를 자각하는 것이 삼업청정의 실천수행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불교에서 삼학과 팔정도 육바라밀을 비롯하여 참선 염불 주력 등 여러 가지 수행방법과 실천덕목이 있지만, 이것을 모두 한꺼번에 실행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동시에 두 가지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불교의 다양한 실천덕목을 하나로 실천할수 있도록 하는 것이 『문수설반야경(文殊說般若經)』의 일행삼매(一行三昧)의 주장인데, 선이나 염불 한 가지 수행으로 삼매의 경지를 이루는 것이다. 따라서 실천은 반드시 참선이나 염불 중에서 한 가지를 자신의 근기에 맞는 것을 선택하여 선지식의 인도와 지도에 따라서 오로지 삼매의 수행으로 닦아나가야 한다.

그리고 삼학과 팔정도 육바라밀을 하나로 통합하여 실천할 수 있도록 제시하고 있는 것이 선불교에서 주장하는 삼학일치(三學一致)의 정신이다. 남종선에서 불성의 자각으로 삼학일치의 수행을 이루는 것이다.


2) 합장(合掌)하여 각자 맑고 향기로운 연꽃을 피우자


합장과 예배는 불교의 기본적인 예절임과 동시에 흩어러진 자기의 모습을 바르게 하고 겸손과 미덕을 나투는 인격적인 수행이다. 뿐만 아니라 성심 성의의 지극한 합장과 예배는 번뇌와 망상으로 고뇌에 빠진 우리들의 마음을 근원적인 본래심의 고향으로 되돌아 가게 하며 자기를 되돌아보게 하는 지혜의 거울이 되고 있다.

지극한 마음으로 두 손을 모아 합장 예배하는 불교인의 자비스러운 모습은 단순히 자기 자신의 지혜와 인격을 만드는 기본적인 수행이 됨은 물론 이웃과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기쁨과 온화함의 자비로움을 나투는 보살의 화신이 되는 것이다.

불교인들은 합장을 하고 예배〔인사〕를 할 때는 반드시 다음과 같은 합장의 게송(合掌偈)을 잘 알고 합장 예배의 의미를 마음깊이 새기면서 자기를 불교적인 인격을 만드는 수행으로 해야 한다.


合掌以爲花 두 손 모아 합장하여 한 송이의 연꽃을 만들어

身爲供養具 청정한 이 몸이 供養具가 되고

誠心眞實相 성심을 다하는 지극한 마음으로

讚嘆香煙覆 찬탄의 향기를 가득 채우리


두 손을 모아 합장을 하는 모습은 자기 자신을 한 송이의 연꽃을 만들고, 청정한 몸과 마음이 되어 시방 제불에게 공양을 올리는 보살의 공야구(供養具)가 되는 것이다. 두 손을 모아 합장하는 모습은 각자가 그대로 한 송이의 청정한 연꽃이다.

불교의 상징인 연꽃은 어디에서 피는가?

맑고 깨끗하게 흐르는 물이 아닌 더러운 진흙탕 속에서 향기로운 꽃을 피운다. 그러나 연꽃의 잎이나 꽃에는 결코 진흙탕의 더러움이 물들지 않는 고결함을 지니고 있기에 더욱 불교적인 정신을 상징한다.

즉 연꽃이 피고 있는 이 진흙탕은 탐(貪)ㆍ진(瞋)ㆍ치(痴) 삼독(三毒)과 시기 질투로 들끓는 중생계의 사바세계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한 송이의 청정한 연꽃은 사바세계에 살고 있으면서도 탐진치 삼독의 중생심과 번뇌에 물들지 않고, 언제나 일체 중생에게 맑고 깨끗한 한 송이의 꽃이 되어 번뇌를 씻어주고 기쁨과 환희와 용기를 주고 있는 불교의 보살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사바(saha)세계란 중생들이 살고 있는 세계로서, 시기와 질투 번뇌와 괴로움을 느끼면서 살아가지 않을 수 없는 세계라는 의미이다. 우리들은 이 진흙탕과 같은 사바세계를 떠나서 살아갈 수가 없다. 그러나 이 사바세계를 각자가 성심으로 합장하며 번뇌를 떨치고 각자의 본래심으로 되돌아 간다면 스스로 자기의 아름다운 연꽃을 피우게 되는 것이다.

사실 진흙탕이 없다면 연꽃이 자랄 수도 없고, 맑고 향기로운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도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 사바세계가 없다면 중생을 위한 부처님도 보살님도 출현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세계가 모두 극락세계라면 불교 또한 존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중생들의 번뇌와 고뇌가 있는 사바세계이기 때문에 중생을 구제할 보살과 부처가 출현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불교인들은 이 사바세계의 중생들을 위해 언제나 합장하여 한송이의 맑고 청정한 연꽃을 피워 성심을 다하는 진실한 마음으로 일체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도를 실천해야 한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는 속담이 있다. 즉 혼자서는 싸움을 할 수가 없다는 말인데, 두 손을 모아 합장하는 모습은 흩어러진 자기를 화합(和合)하여 마음을 하나로 가다듬는 자세이기도 하다.

합장하는 손으로는 싸움을 할 수도 시기하고 질투하는 마음의 번뇌가 생길 수도 없다. 따라서 합장은 다툼이 없는 무쟁삼매(無諍三昧)와 중생 구제의 자비스러운 각자의 인격적인 모습인 것이다.

합장은 자기를 낮추고 겸손을 실천하는 아름다운 불교인의 기본 수행이다.

『법화경(法華經)』상불경보살품에는 합장 예배로 보살도의 수행을 실천한 상불경 보살의 수행모습을 전하고 있다. 언제나 남을 가벼이 여기지 않고 보살과 부처님으로 공경하는 마음으로 수행한 보살이란 의미로 「불상경보살(常不輕菩薩)」이라고 부르고 있다. 상불경보살은 부처님이 입적한 뒤에 불법이 멸진(滅盡)하려 할 때에 태어났다.

 그는 언제나 사람들을 만나면 「나는 당신을 공경합니다. 절대로 당신을 가벼이 여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반드시 부처님이 되실 분이기 때문입니다.」라고 하면서 합장 예배 찬탄하였다.

사람들은 도리어 이러한 상불경보살의 모습을 보고 미치광이로 취급하고 온갖 욕설을 다 퍼부어 지팡이로 후리치고 돌맹이질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그래도 상불경보살은 이를 피하면서 「나는 절대로 당신을 공경하며 가벼이 여기지 않습니다. 당신은 반드시 부처님이 되실 분이기 때문입니다.」라고 하며 합장 예경하는 보살도 수행을 계속하여 깨닫고 부처님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합장의 게송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이제부터 불교인들은 합장과 예배하는 의미를 잘 알고, 상불경보살처럼 남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자기를 낮추며, 일체의 번뇌를 끊고 각자의 근원적인 본래심으로 되돌아가 마음을 편안하게하고 온화한 마음으로 아름다운 각자의 연꽃을 피워야 한다. 온화한 마음으로 합장하여 예배를 올리는 우리들의 지극한 모습은 사바세계에 한송이의 고결한 보살의 연꽃을 피우는 일이다.

의미(意味)란 어떤 관계 속에서 생긴다. 합장하는 의미 수행하는 의미 불교를 배우는 의미 삶의 의미나 만남의 의미도 마찬가지이다. 의미없는 만남과 행동 의미없는 인생의 삶을 살 수는 없다. 합장의 의미를 새기며 자각할 때 자기의 모습은 새롭게 만들어 지는 것이다.

이러한 합장의 의미를 가지고 보살도의 정신을 실천할 때 우리는 지금 여기의 사바세계를 곧바로 청정한 극락국토로 바꿀 수 있는 것이며, 번뇌와 삼독에 물든 자기를 청정한 연꽃으로 피어나게 할 수 있다.

사바세계를 살아가는 이 시대에 진정한 보살도의 실천이란 합장의 의미를 자각하며, 지극 성심으로 합장 예배하여 일체의 중생을 공경하는 자기를 낮추는 자세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⑴ 인간의 손은 창조하는 힘과 중생구제의 자비


인간의 두 손은 창조하는 힘이며, 자비로운 자기의 인격을 베푸는 중생교화의 손이다. 인간은 지혜로 기술을 개발하고 도구를 손에 쥐고 자연을 개발하였으며, 무기를 손에 쥐고 자연을 정복하였다.

주먹을 쥔 손으로는 일을 할 수가 없다. 주먹을 쥔 손은 싸움을 하는 손이다. 손을 펴서 일을 하는 손으로 자기를 창조하며 자기를 다듬고 인류를 보살필 수가 있다.

합장은 자기의 모습을 재정돈하는 일이며 중생교화의 손길은 자비 보살의 화신인 것이다. 자비는 사바의 고뇌를 이긴 시련이며, 사랑은 고뇌를 겪고 이긴 시련의 힘에서 더욱 깊어 질 수 있다. 이러한 자비와 사랑의 힘이 없는 사람은 진정한 자비와 사랑을 베풀 수가 없다.


⑵ 원력(願力)과 사명감(使命感)


대승불교는 구도자인 보살이 자신의 무한한 가능성과 깨달음을 추구하며〔上求菩提〕또한 이러한 깨달음으로 체득한 지혜를 중생구제의 이타행(利他行)으로 회향하는 숭고한 보살도를 실천하는 자비구현〔下化衆生〕의 종교이다.

따라서 보살은 먼저 큰 원력을 세우고 이 원력을 성취하기 위해 사명감을 가지고 끊임없이 노력하고 정진하는 구도자인 것이다. 보살의 원력은 수 없이 많지만, 그 가운데서도 일반적으로 잘알려진 네가지 큰 서원(四弘誓願)이 있다. 보살도를 닦아 자아완성을 위해 번뇌를 끊고, 일체중생을 구제하며, 지혜와 인격의 완성하는 불도(佛道)을 이루겠다는 원력과 사명감이다.

법장보살은 48원을 성취하여 아미타불이 되어 서방 극락정토를 이루웠으며, 일찍이 약사여래(藥師如來)도 12원을 세워 원력을 성취하여 부처님이 되신 것처럼, 보살은 모두 각자 위대한 원력을 세우고 이를 성취하기 위한 사명감을 가지고 정진하였다.

또한 우리들은 각자 자기의 인생과 삶에서 이루고자 하는 원력은 무수히 많으리라.

원력과 사명감은 불굴의 구도적인 삶을 지향할 수 있는 초석이 되고 지주가 되며 목표가 되고 있다. 또한 각자의 지혜와 인격형성을 확립하는 방향설정이기도 한 것이다. 원력을 세우지 않은 사람은 자기 향상을 위한 의지력이 없는 사람이며, 따라서 자신의 창의적인 인생과 삶을 발전 시킬 수가 없다. 따라서 원력과 사명감은 각자 자기 발전을 위한 삶의 정신적인 활력소인 것이다.

우리들 인간은 짧은 생명으로 한정된 공간속에 무상의 인생행로에 살아가고 있다. 다행히 불법의 인연을 만나게 되어 보살정신의 원력을 세우고 사명감을 갖을 때 불퇴전(不退轉)의 확고한 삶을 마련할 수 있으며 보람있는 구도자의 길을 용기있고 힘차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원력과 사명감은 우리들 인생의 생명과 삶에 뜨거운 열이 되고 힘을 솟게 하는 정열이 되며 생명력을 얻게하며 창조적인 삶의 원천이 되는 것이다.

원력은 무기력하고 불가능하며 나약한 우리들의 삶을 활기있는 삶으로 활성화 시켜 줌과 동시에 무한한 가능성을 일깨워 주는 창조적인 삶으로 전환시키고, 언제나 활기 넘치고 생동감 넘치는 젊은 삶으로 만들어 준다.

따라서 원력과 사명감은 우리들의 생명력 그 자체인 것이며 순간적인 평범한 삶에서 비범하고 진실된 자기의 존귀한 인생의 삶으로, 또한 범속한 자신을 성스러운 자기로 전향시키는 힘인 것이며,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고 개발하게 하며, 불가능에서 가능으로 자신을 구현케 하는 妙藥인 것이다.

이러한 원력은 불법의 철저한 신심과 확고한 신념으로 자기향상을 위한 구도적인 보살도의 자각에서 이루어 질 수 있으며, 원력을 성취하기 위한 자신과의 다짐으로 사명감을 가지고 끊임없이 실천할 때 자기 향상의 구도적인 삶이 이루어 지는 것이다.

원력과 사명감은 각자의 직업과 일에서 자신과의 고독한 투쟁으로 승화되어야 하며, 자기자신만을 위한 소승적인 삶이 아니라 이웃과 인류를 위한 대승적인 회향으로 꽃 피워야 한다.


자기 자신이 주체가 되어 원력을 세우고 각자 스스로 하고 싶은 일 좋아하는 일에 몰두하고 매진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일에 무엇보다도 흔들리지 않는 긍지와 자부심 그리고 사명감이 있어야 한다. 세계의 역사속에서 이름을 남긴 종교가나 사상가들이 모두 한결같이 자신의 일에 몰두하고 정진하기 위해 결혼도 하지 않았고, 또 그들 생애를 통해 볼 때 거의 모든 시간을 대인관계도 없이 홀로 연구실에서 고독한 생활을 보낸 사람들이다.

붓다를 비롯한 수많은 보살과 조사 고승들 신부들 종교인들 칸트나 니체 키에르케골 쇼펜하우어스피노자 등

그들이 홀로 자기 자신의 일에 침잠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세운 원력과 이를 성취하기 위해 자기 자신의 하는 일, 해야 할 일에 대한 불같은 자부심과 사명감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결혼을 했던 안했던 외부적인 곤란이나 고난 압력으로부터 일체 탈피하여 자기만의 고독하고도 또 스스로 자신이 하는 일에 열광하여 깊이 빠질 수 있는 세계를 혼자서도 용기있게 개척하고 지킬수 있는 강인함이 있지 않고서는 불멸의 업적을 남긴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법구경』에도 「현자(賢者)는 자기를 잘 정돈하며, 현자는 고독한 경지에서 더욱 힘을 낸다」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고독하고 외로운 환경을 자기 창조의 가장 멋지고 행복한 삶으로 만들며, 자신의 값진 살림살이로 가꾼다.


3) 예배〔절〕의 실천수행


합장과 예배〔절〕는 불교 수행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다. 합장의 의미에 대해서는 앞에서 살펴 본 것처럼 각자 아름답고 향기로운 연꽃과 같은 자신의 인격을 만드는 실천수행인 것이다. 합장과 예배는 분리할 수 없는 실천행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서는 예배를 통한 불교의 실천수행을 살펴 보자. 불교의 예배게(禮拜偈)는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釋禮三拜 불가의 예배인 삼배는

表三業致敬 신구의 삼업을 지극히 공경히 하여

而歸依三寶 불법승 삼보에 귀의 함으로써

得離三毒也 탐진치 삼독을 여의도록 함일세


불교에서 예배를 올리는 것은 삼배가 기본이 되고 있다.

삼배는 불법승의 삼보에 대한 귀의(歸依)인 것이다. 뿐만아니라 더욱 중요한 것은 예배게송에서 처럼 자신을 위한 삼업청정의 수행임과 동시에 탐진치 삼독을 여의는 구체적인 실천행이라는 점이다.

불교의 예배는 단순히 삼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삼보에 귀의하고 삼독을 여의며, 삼업을 청정하게 하는 실천으로 9배가 있다. 또한 53배는 참회(懺悔)를 관장하는 53부처님에 대한 경의의 마음을 가지고, 많은 세월동안에 지은 죄업을 참회하는 실천수행이 있고, 108배는 우리들이 무심결에 일어나는 108번뇌를 소멸하는 예배도 있다.

현겁일천(賢劫一千) 부처님께 공경심을 표하는 1000배, 과거 현재 미래의 삼대겁(三大劫)에 출현하는 부처님께 올리는 삼천배의 수행도 있다. 특히 하루에 삼천배를 올리는 예배는 자신을 낮추고 자신을 무아(無我)로 무상(無相)으로 무심(無心)의 실천으로 진정한 수행자로 만들 수 있는 구체적인 실천 수행이 되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많은 사람에게 권장하고 있다.


단순히 부처님을 향해 절을 하는 것이 어떤 수행이 되는 것일까?


첫째로 아만(我慢)과 아상(我相)을 꺽고 각자의 무한한 복전을 이루기 위한 실천 수행이다.

인간은 자아의 입장을 강조하고 내세우려는 아상때문에 불화가 조성되고 화합이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금강경』을 비롯한 반야부 경전에서 한결같이 자신을 비우고 무아 무심으로 어디에도 집착없이 살도록 하는 무주(無住)의 실천행을 강조하고 있다.

자신의 존재와 입장을 텅 비운다는 것은 반야경전에서 강조하는 공의 실천인데, 각자가 직접 예배와 절을 통해서 이러한 경전의 정신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도록 하는 것이다. 자신의 존재를 의식하는 사람은 주위를 의식하고 체면과 자존심과 교만심에 빠지기 쉽다. 자신의 무한한 가능성을 개발하고 지혜와 인격적인 성장을 추구하는 사람은 한푼어치도 되지 않는 자존심과 교만심의 사슬을 끊어버려야 앞으로 나아갈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상대방를 공경하고 자신을 낮추는 하심(下心)의 구체적인 실천을 절을 통해서 익혀야 하는 것이다. 진정한 자신의 아름다운 인격은 자신의 존재를 내세우는 자존심과 교만심이 없어진 겸손과 공경심의 미덕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이 맑고 향기로운 연꽃과 같은 사람이며 주위를 포근하게 감싸주는 보살의 자비인 것이다.

『선가구감(禪家龜鑑)』에서 「예배는 공경이요 굴복(屈伏)이다. 진성(眞性)의 공경이요 무명을 굴복시키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특히 『법화경(法華經)』에 전하는 상불경보살은 언제나 합장과 공경심으로 일체중생에게 예배를 올린 수행자였고, 『금강경』에도 일찍이 부처님이 수행할 때에 가리왕(歌利王)에게 육신의 몸을 베이고 끊임을 당하였지만, 아상 인상 등의 사상(四相)이 없었기 때문에 성내고 원망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았다고 전하고 있다.

『예기(禮記)』에도 「무불경(毋不敬)」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일체의 모든 것을 공경심으로 대하는 인격적인 삶의 정신을 제시하고 있다. 『육조단경(六祖壇經)』에도 「무상(無上)의 불도를 이루기를 서원하는 자는 항상 자기를 낮추는 하심(下心)의 수행을 하며 일체중생을 공경해야 한다. 그리고 미혹함과 집착을 여의고 반야의 지혜를 깨달아서 미망을 제거하고 깨달아 불도를 이루도록 해야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삼보를 공경함은 존경하는 대상에 대한 예배이다. 부처님을 향해 합장하고 예배를 올리는 것은 자신의 자존심인 아상과 교만심을 꺽고 본래의 순진하고 청정한 참된 자아을 회복하는 수행임과 동시에 자신의 겸양과 인격의 복전을 만드는 실천인 것이다.

부질없는 자존심과 교만심은 자신을 초라하고 불행하게 만들지만 자신을 낮추는 하심과 공경심(恭敬心)은 자신의 마음도 평안하게 할 뿐만 아니라 주위까지 편안케 한다. 그래서 하심과 공경심으로 절을 하는 수행은 자신과 이웃을 편안하게 만드는 복전을 만들고 대공덕(大功德)을 이루는 것이 된다.


두 번째는 업장(業障)을 소멸하고 탐진치 삼독을 여의는 실천수행이다.

우리들은 잠시라도 쉬지 않고 몸과 입과 마음으로 업장을 짓고 있다. 사실 불교의 수행은 이러한 신구의 삼업을 청정하게 만드는 구체적인 실천 수행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서는 예배를 통해서 생각해 보자.

절을 한다고 해서 그냥 허리를 굽혔다 펴서 일어나는 육체적인 행위만을 중요시하고 천 배 이 천배 삼 천배를 했다고 주장하는 일은 잘못된 예배의 수행인 것이다.

천 배나 삼 천배를 한다고 예배의 숫자를 정해 놓고 절을 하는 것은 절을 통해서 자신을 그렇게 수행하도록 하기 위한 자신의 원력인 것이며, 자기 자신과의 서원인 것이다. 숫자를 강조하는 것은 자신을 아상에 집착하고 자만심 교만심에 떨어뜨리는 행위가 될 뿐이지 수행에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절을 하면서 언제나 아상과 교만심을 없애고 무심하게 자신을 비우며, 일체중생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만드는 실천행을 해야 한다.

몸은 절을 하면서도 마음은 쓸데없는 망상과 번뇌로 시간을 보낸다면 몸과 마음은 두 가지 행위로 이중적인 자신을 만들기 때문에 하나도 제대로 이루어진 것은 없게 된다. 몸과 마음이 혼연일체가 되어 삼매의 경지에서 예배를 올릴 때 신ㆍ구ㆍ의 삼업이 청정한 수행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몸으로 절을 하면서 입으로는 관세음보살」이나 「석가모니불」이라고 부처님의 명호(名號)를 외우며, 마음으로는 오로지 자신이 외우는 부처님의 명호 소리만을 듣고, 일체의 잡념을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 염주를 돌리며 숫자를 계산하면서 절을 할 경우에는 자신의 마음으로 세는 숫자의 목소리를 자신의 마음의 귀로 또렷하게 들어가면서 다른 잡념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신ㆍ구ㆍ의 삼업이 하나가 되는 것을 삼매(三昧)라고 하는데, 이 경지에서는 나쁜 업장이 만들어지지 않고, 언제나 청정한 행위가 이루어지게 된다. 그래서 이러한 경지에서 절하는 것을 삼업청정의 실천수행이라고 한다. 삼업이 청정한 수행은 우리들이 지금까지 쌓아온 수많은 나쁜 업장을 녹이고 정화하는 힘을 갖게 되기 때문에 업장을 소멸하는 수행이 되는 것이다.


4) 염불(念佛)수행과 기도


삼업청정의 염불수행은 자신의 법신불을 이루며 제불보살의 감응을 받도록 하는 기도이다. 염불은 정토계 경전의 선구가 되고 있는 『반주삼매경(般舟三昧經)』 『아미타경(阿彌陀經)』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등에서 설하고 있는 것처럼, 원래 부처님의 원만하고 자비스러운 모습을 마음속에 상념(想念)하여 자신과 부처님과 하나가 되는 관상염불(觀想念佛)의 실천수행인 것이다. 즉 염불삼매는 관불(觀佛)의 수행이다.

일상생활에서 잡다한 일에 시달리고 잡념으로 산란스럽고 불안하여 괴로우며, 삼독으로 치달리는 사바세계의 삶을 부처님의 원만한 지혜와 자비스러운 인격을 마음속에 상념함으로써 자신도 일체의 분별심과 괴로움의 번뇌에서 벗어나 일념 청정한 부처님의 마음으로 평안하고 안정된 삶을 만들기 위한 실천 수행인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불교에서 염불이라고 하면 경전에서 주장하는 관상염불이 아니라 「나무아미타불」이나 「관세음보살」이라고 입으로 부처님이나 보살의 명호를 소리내는 칭명염불(稱名念佛)이 중심이 되고 있다.

관상염불을 칭명염불로 바꾸어 실천하도록 주장한 것은 중국 정토교의 선구자인 담란(曇鸞 ; 476~542?)인데, 그는 정토에 왕생하기 위한 방법으로 아미타불의 명호를 입으로 소리내어 외우도록 권하였다. 또 중국 정토교의 대성자인 선도(善導 ; 613~681)는 경전 중에서 주장한 염불과는 관계없이 『관무량수경』에서 「일심으로 오로지 아미타 부처님의 명호를 염(一心專念彌陀名號)」하는 새로운 염불관을 확립하여, 칭명을 염불과 동일시한 실천으로 중국 정토교의 새로운 실천방법을 개척한 것이다.

염불은 본래 부처님을 상념하고 그것에 정신을 집중하여 삼매〔통일〕를 이루도록 하는 정신적인 실천수행이다. 염불과 같이 염법(念法) 염승(念僧)은 각기 부처님의 가르침과 교단을 상념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중국 정토교에서는 염불에 한정하는 정신적인 작용보다도 발성행위를 가리키는 것으로 바꾸어 칭명(稱名) 구칭염불(口稱念佛)로 실천하도록 한 것이다. 원래 염(念)의 원어 anusmrti에는 발성(發聲)이라는 의미는 없지만, 한자음인 염은 상념이라는 의미 이외에도 경전을 소리내어 읽는 풍송(諷誦)의 의미로도 사용하고 있다.

예를 들면 염경(念經)이라면 경전을 독송하는 것을 말하기에 염불은 부처님의 명호를 소리내어 외우는 것이라고 사용하여도 중국어의 감각으로는 이상할 것이 전혀 없다. 현재 정토교에서 사용하는 칭명염불은 이렇게 중국불교에서 실천수행의 용법(用法)으로 채용한 것이다.

?선가구감?에도 「입으로 외우는 것은 송(誦)이요 마음으로 하는 것이 염불이다. 입으로만 명호를 외우고 마음으로 자각하지 않으면 불도를 닦는데 아무런 이익이 없다」라고 하였다.

서산대사는 「나무아미타불의 육자(六字)법문은 바로 윤회를 벗어나는 지름길이다. 마음으로는 부처의 경계를 생각〔자각〕하여 잊지 말고, 입으로는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되 분명하고 일심불란(一心不亂)해야 하니, 이와 같이 마음과 입이 상응하는 것이 염불이다」라고 염불하는 올바른 실천법을 설하고 있다.

선가구감에서도 「신ㆍ구ㆍ의 삼업이 청정하면 부처가 출세(出世)한다」라고 설하고 있는 것처럼 나무아미타불의 육자염불은 삼업청정의 수행으로 각자의 법신불을 구현하게 하는 실천인 것이다. 이렇게 단순한 염불 수행이 어떻게 삼업청정의 수행으로 자신의 법신불을 구현할 수가 있을까?

합장하여 한 송이 연꽃이 된 자신의 몸이 바로 신체적인 안정과 평안으로 신업이 청정한 것이 되고, 오로지 한결같이 「나무아미타불」이라고 부처님의 성호(聖號)를 외우는 칭명염불은 구업 청정이 되며, 자신의 입으로 칭명한 「나무아미타불」이라는 성호의 그 소리인 법신불의 목소리를 자신의 마음의 귀로 또렷하게 듣고 자각하는 것이 의업이 청정하게 되는 것이다.

나무아미타불은 무량수불에게 귀의한다는 의미로 아미타부처님께 귀의하고 의지하여 부처님의 가피를 입고 서방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도록 하는 원력과 실천수행인 것이다. 나무아미타불이라고 하는 칭명염불로 극락정토에 왕생하는 실천수행인데, 왕생은 모두 법신불인 부처님의 가피〔힘〕에 의한 것이다.

지금 여기서 내가 「나무아미타불」이라고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며 염불하지만 그 염불소리를 나의 목소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나라는 생각, 나의 목소리라고 하는 자아의식이 남아 있는 것은 올바른 염불삼매가 되지 못한 것이며, 진정한 염불수행이라고 할 수 없다. 나무아미타불이라고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고 있지만, 그것은 나의 입으로 부르〔稱名〕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본래 청정한 법신불이 되어 부처의 입으로 칭명하는 것을 듣는 것이다. 적어도 칭명염불이 올바른 염불수행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 본래 부처가 각자 자신에게 들려주는 칭명이 되어야 한다.

말하자면 부처가 부처를 염불하는 것이 염불이며, 일념으로 부르는 「나무아미타불」이라는 칭명은 내가 염불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법신불이 염불하고 그것을 자기 법신불이 또렷하게 듣고 자각하고 있는 것이 된다.

염불수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염불하는 중에 조금이라도 자기 자신이라는 의식이 남아 있으면 올바른 염불이 될 수가 없다. 부처와 자기와 하나〔一如〕가 되어 부처도 자기도 없어진 경지에서 실천하는 염불이 진정한 염불수행이 되는 것이다.

염불을 할 때는 흩어진 몸과 마음으로 할 것이 아니라 두 손을 모우고 합장하여 몸을 단정히 하고 지극한 마음으로 성심성의를 다하여 염불 기도하면 이 몸이 그대로 삼업이 청정하게 되어 자기 자신이 그대로 부처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정토교에서는 이것을 범부의 몸 그대로 성불하는 범부성불(凡夫成佛)의 염불수행이라고 하는 것이다. 단순히 입으로 외우고 부르는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라는 한마디의 염불이 지금 여기 자신의 범부 몸 그대로를 삼업청정의 염불수행으로 하여 법신불로 전향하도록 하고 있다. 합장하는 자신의 모습은 이미 자기라는 의식이 없어진 사바세계의 한송이의 연꽃으로 자신을 그대로 법신불로 승화한 청정한 부처의 몸인 것이다.

나무(南無)는 아미타부처님의 본원력에 사바세계를 벗어나 청정한 극락세계에 왕생하여 깨달음을 이루고자 하는 원력과 보리심으로 자기 향상의 구도적인 의지라고 하겠다.

그리고 자신의 입으로 칭명하는 「나무아미타불」이라는 명호 소리를 자신의 귀로 또렷하게 듣고 자각하는 염불수행은 그대로 법신불과 법신불과의 자각적인 대화로 이어지는 일념상응(一念相應)의 염불삼매가 되는 것이다. 즉 자신이 삼업청정한 수행으로 실천하는 「나무아미타불」이라는 칭명의 염불 소리는 이미 자기라는 자아의식이 없어진 삼업청정한 염불수행이기에 자기의 목소리가 아니라 자기 법신불의 법음(法音)인 것이다.

마음에서 추구하는 부처〔覺者〕는 어디에 있는가? 부처는 멀고 먼 피안(彼岸)이나 서방 극락정토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밖을 향해서 부처나 진리나 도를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참된 부처는 어디에 있을까? 참된 부처를 그리워하고 추구하는 마음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이러한 의문과 질문을 갖지 않고서는 부처나 극락정토 깨달음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고, 의미없는 것이 되고 만다. 부처는 이러한 의문과 질문을 벗어난 멀고 먼 저쪽 서방정토나 피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지금 이 질문 가운데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질문을 하지 않는 자에게는 이 신비하고 비밀스러운 의미는 통하지 않는다.

우리들이 지금 여기서 부처님, 「나무아미타불」 이라고 부를 때 부처라고 말하는 자신의 마음의 목소리 그 가운데에 부처가 있는 것이다. 아니 부처님이라는 그 목소리가 이미 나의 목소리가 아닌 것이다. 부처님이라고 부르는 그 소리와 부처님이라고 듣는 그 소리와는 둘이지만 이미 둘이 아닌 것이다. 여기에는 질문하는 것과 대답하는 것이 둘이지만 이미 둘이 아닌 것이다. 어떤 사람이 「부처님!」 이라고하는 목소리는 「부처님은 여기 있다」라고하는 부처의 목소리인 것이다.

부대사(傅大士)의 게송에 「부처가 어디 있는지 알고자 하는가, 바로 이 말을 하는 그 목소리가 부처인 것이다(欲知佛何在 只這語聲是)」라고 읊고 있으며, 고려시대의 나옹(懶翁)화상도 누이에게 다음과 같은 게송을 설하여 염불 수행의 바른 실천법을 제시하고 있다.


阿彌陀佛在何方 아미타 부처님 어디에 계신가

着得心頭切莫忘 철저히 마음으로 잘 챙겨 잊어버리지 않도록 하라

念到念窮無念處 일체 망념이 없어진 무념처에 이르면

六門常放紫金光 이몸이 법신불 되어 금색 광명을 발하리라


아미타불은 각자의 근원적인 마음에 있는 것이다. 아니 본래청정한 그 마음이 바로아미타불인 것이다. 극락정토도 각자의 마음자리〔본래고향〕에 있는 것이다. 극락정토에 왕생한다고 함은 결국 각자의 본래심으로 되돌아간 그 자리를 말한다.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 아미타불을 염불하는 자신의 마음이 일념으로 아미타불을 잊지 않고 자각하며, 일체의 번뇌와 망념이 없어진 무념처(無念處)에 도달하면, 자신은 범부의 몸 그대로 자기 법신불을 구현할 수가 있는 것이다. 삼업이 청정한 자기 법신불에서 안ㆍ의ㆍ비ㆍ설ㆍ신ㆍ의(眼耳鼻舌身意) 여섯 창문에서는 저절로 자금색의 법신불 광명이 발하게 된다는 게송이다.

말하자면 우리들의 안ㆍ이ㆍ비ㆍ설ㆍ신의 육근이 각기 그 대상에 대한 집착이 끊어져 없어져 버릴 때 청정하게 된 것을 육근청정(六根淸淨)이라고 한다. 육근이 청정하게 될 때 금색의 광명이 발하게 되는 것을 나옹화상은 염불의 수행의 실천을 통해서 구현하도록 게송으로 요약해서 설하고 있는 것이다.

일체의 사량분별이 없어진 무아의 염불은 삼업청정의 수행이 되며 결국 자신이 범부의 몸 그대로 청정한 자기 법신불을 구현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나무아미타불」이라는 똑같은 칭명염불로 끊임없이 반복하는 염불의 실천수행은 인간 각자가 지닌 재능이나 능력, 근기의 차이를 소멸하게 된다. 인간의 재능이나 능력, 근기는 사실 세속적인 가치관에 입각한 사량 분별심 차별심으로 구분한 것인데, 일체중생이 구족하고 있는 청정한 불성〔본래심〕으로 닦는 염불 수행이기 때문에 그러한 구분과 차별은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만다.

훌륭한 사람이나 병든 사람이나 늙은이 구분 할 것없이 누구나 합장하여 청정한 본래심으로 「나무아미타불」이라는 염불을 통해서 각자의 본래심을 자각할때 자각적인 법신불을 구현할 수가 있는 것이다.

자신이 삼업청정의 수행을 통해서 자신의 법신불을 구현함은 자신과 일체 만법과 하나가 되는 만법일여의 자신을 만드는 것이며, 따라서 시방삼세에 가득한 제불 법신불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기도를 통해서 제불 보살의 가피와 감응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이러한 제불 법신불과 하나가 된 경지에서 이루어 지는 것이다.

『관무량수경』에도 「제불 여래는 바로 법계이며, 일체 중생의 심상(心想) 가운데 든다」라고 하며, ?증도가(證道歌)』에도 「모든 부처님의 법신이 나의 성품에 들어오고, 나의 성품이 다시 함께 여래와 합치도다(諸佛法身人我性 我性還共如來合)」이라고 설하고 있는 말은 이를 두고 한 것이다.

또 『화엄경(華嚴經)』노사나품에 「부처님의 법신은 법계에 충만하여 온갖 중생들 앞에 두루 나타나신다. 인연에 따라 나타나서 응하지 않는 곳이 없지만, 항상 이 깨달음의 자리〔菩提座〕를 여의지 않는다」 하고 있다.

우주 법계에 가득한 제불 법신불과의 만남과 나와 하나가 되고 감응을 이루는 것은 자신이 법신불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법신불과 법신불과의 상응과 감응은 이렇게 이루어 지는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합장하고 「나무아미타불」이라는 여섯 글자인 아미타불의 명호를 외우는 단순한 일행삼매의 자각적인 염불 수행을 통해서 자신을 그대로 일체 사량분별과 번뇌 망상, 근심 걱정의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할 수가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한마디의 염불은 고에서 해탈하는 구체적인 실천인 것이며, 지금 여기서 곧바로 해탈열반의 경지를 구현하고 자신이 평안하고 즐겁게 안락한 극락정토에서 살 수 있는 전환을 만든다. 소위 말하는 왕생극락이나 범부가 그대로 성불을 이루는 염불 수행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신체적으로 약하고 병든 사람이나 노약자라도 언제 어디서나 간단히 「나무아미타불」 혹은 「나무관세음보살」이라고 입으로 소리 내어 칭명염불할 수 있는 것이다. 의지나 근기가 약한 사람도 언제 어디서나 쉽게 실천할 수 있는 수행이기에 이행문(易行門)이라고 한다.

이처럼 삼업청정의 염불수행의 실천방법은 지극히 간단하고 단순하다. 누구나 언제 어디서나 실천할 수 있다. 자세를 바르게 하여 단정히 앉아 합장하여 몸을 청정하게 하고 「나무아미타불」 혹은 「관세음보살」이라고 성호를 외우면서 자신이 입으로 외우는 그 성호의 소리를 본래심이 자각하여 일념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음성은 너무 크게도 하지 말고, 너무 적게도 하지 말며, 자신의 기운에 맞추어 자신의 귀에 또렷하게 들리도록 하면된다. 정신은 오로지 자신이 외우는 지금의 염불소리를 또렷이 듣고, 자기 법신불의 소리에 집중하여 염불구절에 따라 일념이 되도록 하며, 음성의 자각과 일념이 되도록 하여 계속하면 된다.

언제 어디서나 자신이 외우는 「나무아미타불」이라는 지금의 염불소리를 또렷하게 듣는다면 잡다한 생각이나 일체의 망념은 저절로 모두 없어지게 되므로 애써서 망념을 없애려고 하지 말라.

아미타불의 모습이나 관세음보살의 모습을 상상하거나 극락정토의 장엄된 모습을 상상하는 것도 모두 망상이며, 염불 중에 기쁜 마음이나 슬픈 마음이 일어나는 것도 모두 마구니에 끄달리는 망상이니 그러한 감상에 떨어지지 않도록 일념으로 염불해야 한다.

염주를 세고 돌리면서 염불을 하거나 목탁에 맞추어 염불을 할지라도 염주나 목탁소리에 끄달리지 말고 지금의 염불에 일념이 되도록 해야 한다. 염불은 반드시 법당이나 부처님을 모신 성스러운 장소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다. 길을 걸어 가거나 전차를 타고 갈 때나 식사할 때나, 다른 일에 집중하지 않을 때는 언제 어디서라도 자신을 번뇌망상과 迷妄의 구렁텅이에 떨어지지 않도록 염불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일상생활 가운데 남에게 모욕을 당하거나 남의 괴롭힘을 당했을 때라도 그 경계에 끄달리지 말고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이라고 염불하여 자신의 본래부처를 친견하고 스스로 자신을 일체의 분노심과 망상 분별을 떨쳐버리고 마음을 안정시키고 평안하게 하여 너그럽고 자비스럽고 관대하게 하여야 한다.

?관무량수경?에도 「온화한 얼굴과 상냥한 말씨(和顔愛語)」라는 실천덕목을 설하고 있는 것처럼, 일체의 분노와 분별 망상을 여의고, 염불수행으로 본래심의 자각에서 자신이 이러한 자신의 인격을 만들 수가 있는 것이다.


한번 외우는 「나무아미타불」의 염불이 자기 법신불을 구현하는 수행이 되며, 삼독심을 떨쳐 버리고 자신을 평안하고 여유있는 삶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처럼 염불 기도는 탐진치 삼독으로 뭉쳐진 자신의 묵은 죄업의 짐을 벗어 버리는 수행인 것이다. 신구의 삼업청정의 염불 수행은 삼독의 무겁고 고통스러운 짐을 벗어버리고 깨끗하고 가벼운 자신의 청정한 법신불을 구현하도록 하는 수행인 것이다.

삼업을 청정하게 하는 염불수행의 기도는 자기자신의 평안이 저절로 이루어 지도록 하는 수행인 것이며, 자신을 텅 비워버린 무소유가 되고 무소구가 되는 청정한 삶을 만드는 것이다. 번뇌나 고정관념 편견 단견 차별심 등 일체 모든 괴로움의 속박에서 벗어나 지금 여기서 자신의 염불과 기도로 삼업을 청정히 하여 자신을 평안하게 하고, 반야의 지혜로 창조적이고 진실된 삶으로 만들어 가도록 하는 것이다.


염불수행의 공덕은 한량없지만 옛부터 염불수행의 열가지 공덕을 다음과 같이 제기하고 있다.


⑴ 졸음을 없애주는 공덕

⑵ 마구니가 놀라서 도망가는 공덕

⑶ 염불소리가 시방에 두루 퍼지는 공덕

⑷ 지옥 아귀 축생의 삼악도(三惡道) 고통을 쉬는 공덕

⑸ 다른 음성의 장애를 받지 않는 공덕

⑹ 염불하는 마음이 흩어지지 않는 공덕

⑺ 용맹스러운 정진을 성취하는 공덕

⑻ 제불이 기쁘하시는 공덕

⑼ 또렷하게 지혜로 현전하는 공덕

⑽ 극락정토에 왕생하는 공덕


염불 수행의 대표적인 공덕은 극락정토에 왕생하는 공덕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 뿐만이 아니라, 염불하는 손에는 염주, 얼굴은 자비스럽고 온화한 웃음, 마음의 평안에서 일체의 두려움과 공포, 병고(病苦)나 고해를 벗어나 언제나 지금 여기에서 자신의 무궁무진한 행복한 삶을 이룰 수가 있는 공덕이 있다.




염불수행 뒷표지 삽입문구


「집이 가난한 것은 정말 가난이라고 할 수 없지만, 도(道)가 가난한 사람이야말로 가장 불쌍한 사람이다」라는 말과 같이 인간으로 살면서 자기의 존재에 대한 참된 삶의 의미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확립하지 못한 사람이야말로 불쌍한 사람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이라는 시간은 지극히 중요하다. 인간은 지금이라는 시간 위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며, 지금을 떠나서 자신의 존재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의 염불이나 지금의 좌선에서 자신의 몸과 입의 행위를 자각하는 것이 삼업청정의 실천수행이 되는 것이다.


불법은 심법(心法)이기 때문에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는 중생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온갖 번뇌에서 생사윤회하는 것을 말한다. 생사윤회를 벗어나는 것이 번뇌가 없는 근원적인 본래심을 깨닫고, 신․구․의 삼업을 청정하게 하는 수행과 깨달음을 체득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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