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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근대의 중부유럽의 역사와 문화는 물론 서양사 전반을 이해하는 중요한 부분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시작에 대해서 찾아보았습니다.
합스부르그 왕조는 세계제국을 건설한것도 또한 해외 식민지를 건설한것도 아니다. 그들의 활동반경이나 의미는 유럽에 국한되어 있다.
하지만 합스부르그 왕조는 1278에서 1918까지 근 600년간 왕조사를 이끌어 오면서 유럽사에서 핵심적인 역활을 감당해 왔다.
스위스 한 '시골마을'에서 시작한 이 가문의 발전사는 실로 숨을 막히게 할 정도로 드라마틱하다.
1108년에 처음 '합스부르그 영주'라는 칭호가 문서상에 떠오른 이후, 1273년에 독일왕이 되더니 1282년에는 오스트리아의 지배자가 되어 1360년 부터는 오스트리아 대공을 배출한다. 급기야 1452년에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지위까지 취하게 된다. 이 지위는 1806년까지 지속된다.
그들의 지배영토는 단순히 현재의 오스트리아에만 국한된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현란한 결혼정책은 부루군드왕국, 스페인(1516-1700), 보헤미아와 헝가리까지 합스부르그가가 지배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1806년에서 1918년까지는 아예 오스트리아-헝가리 통합왕국을 이루기 까지 했다.
물론 그들의 역활은 항상 긍정적인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그들은 매우 길고도 또한 광대한 지역을 통치했다는 사실자체가 이미 유럽사에서 차지하는 그들의 의미의 폭을 짐작케 한다.
그들의 특징은 전쟁보다는 결혼정책을 통해서 영향력과 영토의 확장을 이루어 왔다는 점에 있고 종교적으로는 반 종교개혁적인 말하자면 친 카톨릭적인 입장을 견지해 왔고 정치적로는 혁명을 거부하고 왕권을 지키는 선봉에 서 왔다는 사실을 들수 있겠다. 한마디로 합스부르그 왕조는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전 근대적 가치를 대변하는 권력집단이었다고 평가할수 있다.
프랑스 혁명, 나폴레옹, 그리고 일차대전을 거치면서 이들의 영향력은 역사에서 이미 사라졌다. 하지만 유럽의 역사에서 다른 한 가치의 축을 지탱해온 합스부르그 왕조사를 이해하는것은 여전히 흥미스럽고 의미있다고 할수 있으리라. 유럽 역사를 그 절반이 아닌 전체로써 이해하기 위해서는 생략될수 없는 역사인것이다.
1) 도대체 합스부르그는 어떻게 시작했나? - 선조이야기.
합스부르그처럼 전후무후한 왕국을 이룬 가문도 시작은 미미했다. 그들의 출발점은 엘사스로부터 시작해서 스위스의 한 작은 마을에서 부터인것이다.
이들의 최초 선조로 여겨지는 군트람은 Guntram († ca. 950)는 현재 프랑스에 속해있는 엘사스 지방에서 온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이 이상의 추적은 전설의 세계에 발을 디디게 할뿐 큰 역사적 의미가 없다.
그가 엘사스를 떠나 정착한곳은 스위스 아라우 지방이었다. 지리적으로 보면 동남쪽으로 이주한것이다. 그와 그의 아들 칸첼린(Kanzelin)은 Altenberg성에 거주하면서 재산을 불려 나갔다. 재산증식 방법은 그렇게 명예로운것은 아니었던것 같다. 보호명목으로 지방귀족들로 부터 돈을 걷거나 농민들을 일정지역에서 추방하는등의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칸첼린의 두 아들중 하나인 Radbot는1026년에 뷜펠스베르그(Wülpelsberg)에 성을 짓게된다. 지금 스위스의 Brugg근처로서 이곳은 아르, 로이스, 리마의 3강이 합쳐 지는곳에 자리잡은 높은 언덕지역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잃어버린 사냥매를 찿아 헤메이다가 이곳에 이르러 위치에 반한 나머지 여기에 꼭 성을 짓고 싶다는 염원을 갖게 되었던것이다. 이곳에 지은 성은 Havichsberch (Habicbtsburg)라고 불리우게 되었다. 매의 성이라는 뜻이었다. 합스부르그라는 이름의 기원이 여기에 있는것이다. 이 성의 존재는 이미 1108년에 처음 문서상으로 등장하고 있다.
성의 오늘의 모습
Radbot는 또한 그간의 잘못과 형제간의 불화를 속죄하기 위해 1027년에 무리(Muri) 수도원을 건축한다. 이로서 그는 교회의 지원도 획득하게된다.
이후 1100년 우리는 Radbot의 손자인Otto II에게서 처음으로 합스부르그의 영주(Graf) 라는 칭호를 듣는다. 합스부르가의 탄생이었다. 하지만 아직은 좁은 아라우 지방의 영주에 불과한 시절이었다. 그러나 후손들에 의한 지역확대는 계속되어 아라우, 알사스 지방이 이들에게 귀속되기에 이른다.
2) 루돌프 독일왕이 되다
지방을 뛰어넘는 역사적인 도약은 1273년에 Graf Rudolf von Habsburg가 독일왕에 선출됨으로써 이루어진다. 그 역시 왕으로 선출되기 전까지는 엘사스와 북부 스위스를 가진 지방영주에 불과했다. 왕이 되었을때 그의 나이는 이미 55세, 여하튼 왕이 될수 있었던것은 어머니의 가계덕이었다. 독일왕이 된 그에게 하지만 숙적이 버티고 있었다. 그것은 이미 300여년간 오스트리아 지역들 지배해온 바벤베르그 가문의 代가 1246년에 끊기게 되는데 이후 그들의 지역은 보헤미아 왕인 오토카르 2세에게 넘어가 있었다. 오스트리아를 잠식해 들어가던 루돌프에게 앉아서만 당할수 없었던 오토카르 2세는 드디어 도전장을 낸다. 각각 3만명으로 추정되는 군대사이에 혈전이 벌어진다. 1278년의 마르헨전투가 그것이었다. 이 전투에서 루돌프는 오토카르를 죽이고 승리하게 된다. 오스트리아 지역이 드디어 합스브르그가문의 손에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마르헨 전투)
3) 오스트리아를 차지하다
그는 1282년에 자신의 두 아들 알베르트와 루돌프에게 그 동안 오토카를 2세에게 속해있던 땅인 오스트리와 스트리아(Styria)를 넘겨준다. 이로써 오스트리아는 합스부르그 왕국의 공국이 되었다. 우리가 합스부르그하면 그 누구도 스위스나 독일이 아닌 오스트리아를 떠올리게 되는데 그 역사적 시작이 바로 여기에 있는곳이다. 이 모든 시작은 바로 루돌프1세로 부터인만큼 합스부르그 왕조사에서 루돌프가 차지하는 위치는 크다.
합스부르그 왕국의 첫 장을 화려하게 열은 루돌프는 1291년 독일 스파이어로 가는 도중 사망하게 된다.
그는 황제(Kaiser)가 되려는 야망은 이루지 못한채였다. 그런데 그의 죽음으로 인해 생긴 혼란과 공백기간중에 세계사에서 그 의미가 결코 작지않은 사건하나가 발생한다. 바로 빌헬름 텔 이야기로 유명해진 스위스의 탄생이다.
사실 스위스의 탄생도 합스부르그에 대한 저항에서 시작했지만 이후 역사과정에서 스위스는 합스부르그에 줄곧 “가시” 로 존재했다. 지배를 확대하고 확고히 하려는 합스부르그, 이를 저지하고 자유를 지키려는 스위스..양자간의 밀고 당기는 모든 전투에서 스위스는 합스부르그를 막아냈고 승리했다. 1315년의 모르가르텐, 1386의 셈파하 전투, 1388의 네펠전투...합스부르그로서는 스위스 연방같이 작은 공동체에 대한 패배가 치욕이었지만 스위스로써는 대단히 긍지높은 역사를 이룬셈이다. 스위스의 이러한 용맹성은 이후 유럽각지에서 비싼 용병으로 상품화되는 '비극적'계기가 되기도 했지만 또 나폴레옹을 위시하여 그 어떤 강대국도 쉽게 넘보지못하게 하여 중립국의 기틀을 닦게 해주었다.
합스부르그와 스위스- 양자의 견원지간같은 역사는 합스부르그의 시작이 애당초 스위스였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대단히 아이러니하지 않을수 없다. 여하튼 스위스같이 작은 연방 공동체가 바로 이웃이었던 거대한 합스부르그에 병합되지 않고 버텨냈다는것은 실로 대단한 일이 아닐수 없다.
당시 사실 스위스는 그 동안 합스부르그에 속한 영주나 귀족들에 의해 땅과 권력을 점령당한채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은 요소요소에 “포그트(Vogt)”라고 불리우는 점령 공무원들을 배치한다. 그들의 임무는 세금을 징수하고 행정을 관리하는것이었다.. 그들의 스위스 통제는 영토확장과 더불어 더욱 견고해져갔다. 루돌프1세는 루체른을 사들였다.
이러한 팽창정책의 한 복판에서 루돌프가 죽은것이다. 그의 죽음은 스위스인들에게 자유의 기회로 인식되었다. 루돌프 1세의 죽음을 들은 스위스인들은 1291년 8월에 일종의 쿠테타를 감행한다. 그 동안의 착취와 억압에 반기를 든것이다.
사건의 도화선은 뷰르글렌(Buerglen)에 사는 농부이자 사냥꾼이었던 빌헬름 텔의 행동이었다.
( 알트도르프에 있는 텔과 아들의 동상)
합스부르그 소속 영주였던 포그트 게슬러(Gessler)는 알트도르프(Altdorf)에 합스부르그 문장이 새겨진 모자를 세워놓는다. 지나가는 사람마다 모두 여기에 경의를 표해야 했다. 그러나 텔은 경의를 표하기를 거부한다. 그러자 게슬러는 텔을 체포한다. 텔에게 내려진 형벌은 자기 아들 Walter의 머리에 올려진 사과를 향해 화살을 쏘아야 하는것이었다. 텔은 화살을 날려 사과를 맞추었다, 그러나 게슬러는 텔의 발목에 또 하나의 화살이 있음을 발견하고 추궁한다. 왜 또 하나의 화살이 숨겨져 있느냐 하는것이었다. 게슬러의 억지추궁에 화가 난 텔은 서슴없이 대답한다. 첫 화살이 안 맞았다면 두번째 화살로 당신을 쏘았을것이라고... 이 대답에 화가 나기는 게슬러도 마찬가지..게슬러는 텔을 배에 태워 큐스나흐트로 데려가 감옥에 가두려한다. 하지만 배에서 탈출한 텔은 큐스나흐트에서 잠복했다가 돌아오는 게슬러를 죽인다...
그것은 곧 자유운동의 시작이었다. 이 사건이후 우리, 쉬비츠, 운터발덴 세 칸톤의 지도자들이 1291년 8월 현재 스위스의 심장부라 할수 있는 류틀리(Rütli)에 모여 자신들의 영토와 자유를 사수하기로 서약을 한다. 이것이 연방국가 형태로서 스위스의 시작인것이다.
(류틀리의 서약)
텔의 이야기가 역사적으로 사실인지는 알수 없다. 오늘날에 전설적 부분과 사실적 부분을 확실하게 분리할수는 없다. 하지만 텔이라는 인물이 실제로 존재했고 당시 그 역사적 테두리안에서 일정한 역활이 있었다는것은 부인되지 않는다. 텔의 이야기는 문서상으로는 이미 1477년의 사르넌 백서(Weissen Buch von Sarnen)및 루체른의 멜쉬오르 루스(Melchior Russ von Luzern)의 연대기서(1482)등에 언급되어 있다
텔의 전설적 이야기의 진위와는 별도로 더욱 중요한것은 당시 스위스인들의 자유를 위한 투쟁은 역사적 사실이라는것이다. 1291년의 서약 편지문은 문서상으로 존재하고 있다.
오늘날 텔은 스위스 최고의 영웅으로 추앙되고 있으며 쉴러는 그의 자유정신에 감화받아 죽기 불과 일년전 희곡 '빌헬름 텔'(1802-1804)을 쓰기도 했다.( 이 인연으로 루체른의 피어발트쉬테테 호수 한쪽에는 쉴러의 기념비가 서 있다). 로씨니(Rossini)는 1829년에 이 이야기로부터 파리에서 오페라를 썼다
(쉴러)
다시 합스부르그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이미 1281년 아버지 루돌프1세로부터 오스트리아와 스타이어막을 받는 알브레흐트는 1세는 자기 지역에서 일어나는 이러저러한 반란들을 진압해야 했다. 그는 자신의 형제인 루돌트 2세를 1283년의Rheinfelden조약을 통해 권력에서 배제하고(그는 나중에 약속된 부분을 할당받지 못했다) 결국은 자신의 아들 루돌프 3세를 보헤미아 왕으로 세운다.
알브레흐트 자신은 루돌프를 이어 독일왕으로 선출되지 못했다. 선출된 사람은 나사우의 아돌프(Adolf)였다. 그러나 아돌프는 1298년에 퇴위를 강요당하게 되고 알브레흐트가 왕으로 선출된다. 아돌프는 수수방관만 하지는 않았다. 드딩러 퇴위된 옛왕과 새로 선출된 왕 사이에 벌어진 일전.. 1298년 7월 2일 보름스 근처에서 전투는 벌어지고 아돌프는 전사한다. 이로써 알브레흐트는 아버지 루돌프 1세 사후 7년만에 다시 독일왕의 지위를 확고히 탈환하게 되는것이다
그는 세습왕조를 세우려 프랑스와도 손잡았으나1308년에 그는 브루그 근처에서 루돌프2세의 아들이자 자신의 조카인 요한 파르시다에게 살해된다. 당시 18세의 조카가 53세의 백부를 죽인것이다. 이것은 자신의 가족이 권력분배에서 철저하게 소외된 분노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이후 합스부르그왕이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가 되는 1452년까지 합스브르그가는 가문간의 내분과 지배지역의 반란에 시달렸다. 특히 스위스 지역에서의 반란은 집요했고 성공적이었다. 알브레흐트1세의 사후 독일왕이 된것은 다시 합스부르가 아니었다. 룩셈부르그의 하인리히 7세였다. 알브레흐트1세의 아들 프리드리히는 1314년에야 소수의 독일귀족에 의해 독일왕으로 선출되기는 했으나 그의 경쟁자 바이에른의 루드비그에게 1322년에 패했을뿐만 아니라 3년간을 포로로 잡혀 있어야 했다. 겨우 공동통치의 합의를 받아내긴 했으나 결국 이는 명목상으로 머물렀을뿐 실제적으로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스위스는 또 합스부르그의 비위를 거슬러 놓고 있었다. 스위스는 루드비그를 지지했던것이다. 이에 프리드리히는 자신의 형제인 레오폴드에게 전투를 맡겼으나 패배하고 말았다. 1315년의 11월 14일 모르가르텐 전투가 바로 이것이다.
이후에도 스위스에서의 지배권을 탈환하려는 모든 시도는 좌절되었다. 1386년의 스위스의 셈파하 전투에서는 레오폴드3세가 전사하기까지 했다. 합스부르그는 1388년의 네펠전투에서도 또한 패배한다. 이로써 합스부르그는 더 이상 스위스땅에는 발을 붙이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스위스를 상실하는 대신 보헤미아와 헝가리 지역(1438부터)과 티롤지방(1363)이나, 독일 쉬바벤, 보덴 호수지역등을 확보하는 성과(1368부터)도 있었다. 이 동안에 문화적으로 괄목할 만한 성과도 있었다. 1365에 빈(Wien)대학이 루돌프 4세의 치하에서 설립된것이 그것이다.
여러 패배와 내분을 거치면서 그러나 1438년에 알브레흐트5세가 알브레흐트3세로 독일왕이 됨으로써 내리막길은 정지되고 100년만에 다시 합스부르그에 왕가의 영예가 찿아온다. 가문의 영예와 본인의 운명은 별개인것인지 하지만 알브레흐트는 왕이 된지 일년만에 죽게된다.
1452년에는 합스부르그가의 프리드리히가 프리드리히 3세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까지 등극하게된다. 그는 자기 형제와의 불화속에서 가족과 함께 빈의 성에서 포위되는 일도 있었으나 결국 오스트리의 대공의 지위를 인정받게 되고1440에는 독일왕, 1452에는 로마에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등극한다. 1459년에는 헝가리 왕도 겸한다.
이로써 합스부르그가의 본격적인 전성기는 시작되는 것이다
첫댓글 합스부르크 왕가에 대한 글이 몇개 있지만 제가 찾은 것과는 다른 글이기에 올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