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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교회(숨 이병창)】 "49일 동학수련(2024, 11,23-24) 도반과의 진달래 예배"
죽은 자는 죽은 자들로 장사 지내게 하고
마태 8:21. 눅 9:60
숨 이병창
그동안 윤중 황선진님의 발의와 안내로 이어왔던 49일 동학수련을 마치기 전에 온라인에서 모여왔던 수련의 아쉬움을 보완하기 위해 불재 진달래 동산에 모이게 되었다. 오늘 예배가 한국 역사 속에서 천도교에 큰 빚을 진 한국교회를 대신해서 작은 정화수 한 그릇이라도 될 수 있기를 소원한다.
1919년 삼일 독립만세 운동을 하기 위해 33인이 모였을 때 천도교 남강 이승훈은 손병히 선생에게 참여한 분들의 옥바라지와 거사를 위해 자금이 필요하다고 지원 요청을 했다. 그 때 3천원을 말한 이승훈에게 손병희선생은 이완용은 조선을 3천원에 팔았는 데 어찌 똑 같이 3천원일 수 있겠는냐 하시고 5천원을 건네 주셨다고 한다.
과거에 손병희선생은 어려운 현실에 처한 나라와 민족의 기운을 다잡기 위해 49일 결사 기도와 수련을 동지들과 함께 하신 바 있다. 이번 수련은 그 전통을 다시 생각하고 되살려 각자 개인은 물론 나라와 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우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시작되었다. 종교와 이념을 초월해서 마음을 모아주신 분들에게 감사한다. 기도의 전 과정과 예배의 마무리 기도까지 참여하신 윤정현 신부님께도 감사를 전한다.
두 가지 물음
나에게는 상담하는 분들마다 물어보는 물음이 있다. 무엇을 좋아하는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이다. 나에게 가장 인상 깊은 대답을 한 사람은 일본인이었는데 ‘저는 하나의 점이 되고 싶어요’라고 대답하였다. 그와의 인연으로 시집 ‘하마터면’의 표지에 점이 하나 찍혀지게 되었다.
내가 발견한 사실은 자신이 좋아하고 원하는 것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은 남들이 볼 때 고생스럽게 보일 수도 있지만 삶의 태도가 분명하고 행복지수가 높았다. 그들은 주어진대로 살려하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나의 물음에 3초 이내에 대답하는 사람은 매우 희귀했다.
내가 이 질문을 하게 된 동기의 출발점은 석양의 산책길에 사람들이 밀려오는 시장통에서 얻은 생각 때문이었다. 20대 후반 시절의 그 때, 도로에 꽉 차게 밀려오는 사람들의 중심을 뚫고 나가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났고 나는 길 한복판을 걸어갔다. 나의 앞길을 막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이 날까지.
그동안 수 많은 사람들을 보아오면서 세상은 무의식이 지배하고 있고 기계적으로 반응하는 사람들의 세상임을 알게 되었다. 나는 무의식이 지배하는 사람들과 깨어난 사람들의 에너지 패턴인 데카그램 도형(I,II)을 그려내었다.
의도를 세우라
지금 이 순간 나에게 무엇이 가장 중요한 것일까? 그것은 지금 이 순간 내가 어떤 의도를 세우고 있는가를 알아차리는 일이다. 내가 동쪽으로 가고자 하는 의도를 세우면 그에 따라 동쪽으로 가는 행동이 뒤따르게 된다. 마음에 의도가 세워지면 자연스럽게 그에 대한 말이 나오게 되고 말을 하면서 그 의도는 현실을 창조하게 된다. 말이 씨가 되게 하는 의도를 산스크리트어로 업(kamma)이라고 한다. 여기에서 나온 카르마는 선택이라는 뜻이 있다. 무수히 많은 선택 가운데서 자신의 존재 근원을 알고자 하는 의도를 세운 사람은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만나게 될 것이고 마침내 존귀한 자기 자신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컬러상담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언어가 ‘에너지는 의도를 따른다’이다. 이 말은 삶을 좌우하고 인생을 끌고 가는 바탕은 의도에 있음을 말해 준다. 조용히 자신에게 물어보자. 자신이 어떤 의도를 지금 간절히 가지고 있는가를-. 그 의도가 자신의 중심이 되고 자신의 하늘을 날아오르게 하는 날개가 되고 때로는 추락하는 날개가 되기도 한다. 자신의 삶을 바꾸고 자신의 하늘을 날아오르는 자유혼의 삶을 사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자신을 둘러싼 상황만 탓하지 말고 먼저 자신의 내적 의도부터 알아차려야 한다.
내적 의도라는 말은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이번 49일 동학 수련과정을 통해 천도교 경전을 새롭게 만나는 축복이 있었다. 수심정기 편에 이런 말씀이 있었다. “이 마음 보호하기를 갓난 아이 보호하는 것 같이 하며, 늘 조용하여 성내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게 하고 늘 깨어 혼미한 마음이 없게 함이 옳으니라”
수심정기의 말씀은 “무릇 네 마음을 지키는 것이 생명을 지키는 것이다.” (잠언서 4:23)는 성서의 말씀을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도록 깨우쳐 주는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골키퍼가 공을 지키려면 공이 어디에 있는가를 확실히 알아야 한다. 마음 또한 그런 것이 아닌가. 자신의 내적 의도를 알아차리는 자는 깨어있는 자이다. 그는 탐구자이며 발견하는 자이며 아름다운 세상의 주인공이다. 그는 보이는 세계의 배경에 있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통찰하는 지혜를 얻게 된다. 또한 이 유한한 세상에서 ‘죽음을 맛보지 않는 사람’이다. 그의 삶은 기적과 즐거움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모든 존재의 왕이다.
인간에게는 영원한 생명의 길과 죽음의 길이 동시에 주어져 있다. 생명을 맛보는 길과 죽음을 맛보는 두 갈래 길에서 나는 어떤 길을 선택할 것인가? 바로 이에 대한 의도를 먼저 세워보면 어떨까.
예수는 한 젊은이에게 ‘죽은 자는 죽은 자들로 장사 지내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했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어떤 길로 가고 있는지?에 대한 아무런 자각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죽은 자이다. 얼빠진 인생이다. 예수는 하느님은 살아있는 자의 하느님이라고 말씀했다. 죽은 자들이 입으로 주여 주여 한다고 해서 하느님 나라에 가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였다.
자기 보존 본능
인간의 육적 본성에는 자기보존 본능, 사회적 본능, 성적 본능이 있다. 자기보존 본능은 자신의 생명과 안위를 지키기 위한 강력한 끌어당김의 에너지이다. 자기보존이란 남보다 더 힘이 있고 더 크고 안전할 수 있는 조건을 갖고자 하는 에너지이다. 이 욕망이 있기에 벌과 나비가 꿀을 얻기 위해 꽃을 찾아가듯이 노력을 하게 된다. 그러나 자기보존 본능에만 매이게 되면 두 가지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그것은 인간의 에너지 시스템에 교란이 발생하게 되고 삶을 창조적으로 살아가는 데 실패하게 된다는 것이다.
에너지는 회전력에서 나오고 회전력은 원심력과 구심력이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원자의 세계에서부터 천체의 움직임에 이르기까지 원심력과 구심력이 작용하고 있다. 별들이 균형을 잡고 유지되는 것은 서로 끌어당기는 힘과 끌려가지 않으려는 힘의 균형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기보존의 사람들은 끌어당기는 힘만 사용하기 때문에 원심력도 작용할 수 없고 결국 에너지의 중심이 무너질 수밖에 없다. 중심이 무너진 끌어당김의 사람들은 창조의 재료가 생각이 아니라 돈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무엇인가 이루지 못하는 것은 돈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존엄을 무시하는 생각이다.
경각산 패러 글라이딩장에서 패러 타는 분들을 볼 때마다 나는 감동한다. 그들은 앞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맞서 앞을 향해 나아간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뒤에서 바람이 불어야 앞으로 나갈 수 있으리라 믿고 있다. 인간의 불행은 바로 이 착각에 있다. 그들은 자신이 잘 나가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뒤에서 밀어주고 받쳐 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탄한다. 돈 많은 부모를 만나지 못한 것을 원망한다. 과연 그런 것인가?
돈은 말 그대로 돌고 도는 것이다. 빨아들이고 움켜잡으려고만 하는 집착은 돈에 눈멀고 돈에 웃고 우는 인생이 되게 한다. 그것은 흐르는 물에 점을 찍다가 인생을 마감하는 착각이다. 인생은 무한하지 않다. 돈이 영원히 자신을 지켜줄 것이라고 믿고 살아온 사람들은 인생 말년에 가서 후회하게 된다. 요양병원에서 하염없이 죽음을 기다리는 몇 분과 대화를 나누어 보라. 그들이 무엇을 후회하고 있는지 확인하게 될 것이다. 성현의 모든 가르침은 유한한 것에만 온 정력을 바치지 말고 자기 자신과 지고한 의식을 찾는데도 관심을 가지라는 지혜일 것이다. 이 지혜가 있을 때 삶을 풍성하게 누리고 나누고 살 줄 아는 멋진 사람이 된다는 가르침일 것이다.
지구학교의 교훈(校訓)
계절의 얼굴이 달라질 때면 자연의 변화가 실감이 난다. 오늘도 우주는 낙엽이 떨어지는 모습으로 나를 찾아오고 있다. 거울을 보면 어린아이가 어느새 백발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어느 때는 거울 속 나의 얼굴 위에 아버지의 얼굴이 보이기도 한다. 거울을 볼 때마다 내 모습은 달라진다. 어린 왕자에는 이런 말이 있다. “나는 나의 어린 시절로부터 왔단다”
어떤 이는 계절의 변화 속에서 외로워하고 슬퍼하기도 하고 두려워하기도 한다. 그들에게 자연의 변화는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할 뿐 기쁨의 대상일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지구는 변화를 경험하고 공부하는 현상계라는 사실이다. 영원의 세월을 두고 변화하고 있는 이 세상을 향한 집착을 내려놓는 수업을 하는 곳이다. 인생 수업을 하는 지구학교의 교훈은 무엇일까?
나에게는 空手來 空手去이다. 이 말은 人生無常의 교훈이 아니다. 기왕 사는 것 제대로 한 번 살다 가라는 격려이다. 삶을 허무와 감상으로 바라보라는 것이 아니라 기쁨의 전율로 보라는 뜻이다. 설령 내가 미친짓을 하고 바보짓을 하더라도 그 또한 크게 웃을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하고 살아보라는 뜻이다.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가는 데 잃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사실을 죽을 때 가서야 겨우 깨닫는 사람은 그나마 다행이겠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인생 로또를 확인조차 못 하고 떠나게 될 것이다.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는 사람은 해와 달과 별도 자신의 것임을 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자기 자신임을 안다. 이 광막한 우주 앞에서 나는 나이며 일체가 나 없이 없다는 것을 안다.
믿음의 길
어린 시절 어머니 따라 예배당에 가면 어머니와 다른 어머니들이 애절하게 기도하는 소리를 듣곤 했다. 그때는 배고픈 시절이었고 말도 아닌 가부장적 권위와 폭력으로 고통받는 어머니들의 한이 하늘을 찌르던 시절이었다. 한겨울 삐걱거리는 마룻바닥에서 눈물 흘리는 어머니의 기도 소리를 들으면서 ‘이렇게 구하는 것들이 많으면 하느님이 얼마나 힘드실까’ 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내가 무엇인가 달라는 기도를 하지 않는 것은 어쩌면 나만이라도 하느님의 짐을 덜어드려야 되지 않나 하던 어린 마음이 내 무의식 속에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할까? 바로 이런 물음이 나에게 찾아왔고 나의 인생은 이 화두 같은 물음과 함께해 왔다. 그러다가 알게 된 것은, 신앙은 그 무엇들을 얻기 위해 하느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얻는 길을 가는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하느님을 얻은 자는 자신은 물론 모든 것을 얻게 된다. 하느님을 얻은 자는 얻을 것이 없는 사람이다. 순간순간 찾아오는 숨의 기쁨을 우주의 주인에게 바치는 사람이다.
“모임이 끝나고 진달래교회에서 숨님의 예배에 참여했다.
동학과 천주교와 성공회와 기독교의 같은 하느님을 만나는 순간.
어린시절 안방에서 예배보던 순간에 경탄했던 이모의 아름다운 묵주와 미사포가 떠올랐다. 우리는 일상처럼 아름다운 예배를 보았고 소박하고 기품있는 음식을 나누어 먹었다.
새벽 수련을 하던 진달래 교회 지붕위로 맑고 밝은 별들이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 -야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