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필리핀 납치단의 계속되는 범죄에 가려져 모두의 기억 속에 사라진 여자가 있다. 2007년 당시, 스물다섯의 나이에 최세용, 김종석, 김성곤에게 살해된 안양환전소 여직원.
납치단 막내인 김원빈의 5차 공판이 있었던 6월 4일, 나는 사건 관계자들과 인천지방법원 앞에 있었다.
모두의 생각이 같았다.
‘필리핀 납치 사건, 이대로 묻혀선 안 됩니다.’
사라진 윤철완, 홍석동 씨와의 끊어진 연결고리를 잇기 위해선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피해자와 만나야 했다. 하여 최세용 일당이 필리핀으로 도주한 계기가 된 ‘안양환전소 살인사건’의 피해자 가족을 찾기로 했다.
최세용 일당에게 피해를 당한 사람들이 한 명이라도 더 힘을 모은다면 한국 외교통상부와 필리핀 대사관이 잊어버렸던 의무를 기억해 낼 지도 모른다.
그 의무는 ‘외국에서의 자국민 보호’ 다.
2.
인천지방법원에서 김원빈의 5차 공판이 끝난 후, 홍석동 부모님과 안양동안경찰서 강력형사팀으로 향했다.
형사들은 당시의 사건을 기억하고 있었지만 담당형사가 타 부서로 이동한 상태라 다시 민원실로 가 도움을 청했다.
민원실 근무자 2명과 형사 한 명이 홍석동 부모님의 딱한 사정을 듣고 도움을 주기 위해 분주히 움직인다. 근무자인 김경자 씨가 연신 눈물을 훔치는 홍석동의 어머니를 위로한다.
1시간 가량 머물렀을까.
확인 결과, 사건자료는 이미 검찰 측으로 모두 넘어간 상태며 안양환전소 살인사건의 피해자 가족 전화번호는 개인신상정보이므로 알기 힘들다고 한다.
근무자인 김경자 씨는 수원지검 안양지청에 전화를 걸어 자세한 사정을 대신 설명해 주었다.
그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3.
수원지검 안양지청 관계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건 피해자가 전국에 걸쳐 있습니다. 이걸 다 취합해서 검사님이 범죄자 인도 요청을 해놓은 상태인데 살인사건 피해자 가족 연락처는 개인신상정보라 알기 힘들 겁니다. 중앙지검으로 찾아가 검사님께 직접 말씀을 해야 할 것 같아요.’
유독 더워진 날씨에 홍석동 부모님은 지쳐가고 진전은 보이지 않는다. 서울에서 인천, 인천에서 안양, 다시 서울의 중앙지검까지 갈 생각을 하니 다리가 불편한 홍석동 아버님이 걱정된다.
우여곡절 끝에 모든 사건을 취합해 담당한다는 부산지검 검사 측과 연락이 닿았다. 피해자 가족에게 전화를 걸어 확인한 다음, 다시 연락을 주기로 했다.
검사 측은 당시 사건자료에 남아있는 피해자 가족에게 전화를 걸어 확인해 보았지만 이미 번호가 바꼈다고 한다.
4.
밤낮을 가리지 않고 피해자들과 만났다. 최세용 일당의 아지트 중 한 곳을 정확하게 지도에서 짚어내는 사람도 많았다. 사건을 담당하면서 점점 더 의문이 쌓이는 인물은 납치단의 리더인 최세용이다.
최세용. 교묘하고 철저하다. 머리회전이 빠르며 인간의 심리를 조정하는데 능하다. 여러 분야에 일반적인 범죄자로 보기 힘든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증언도 있다. 피해자들을 되돌려 보내는 과정에서 인간적인 정을 쌓으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는데 개중에 심정적으로 최세용에게 기우는 사람도 있다.
피해자들의 증언을 종합해 볼 때, 지문을 지우는 철두철미함은 그가 지시했을 확률이 높다. 피해자와 대면하는 과정에서 전문적인 심리기술을 배우기라도 한 듯, 원하는 정보를 최소한의 언변으로 얻어내고 납치단의 일원으로 포섭하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필요 이상의 불필요한 짓은 하지 않는 편이다.
그는 피해자들을 상대로 자주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국가의 뒷일을 처리하던 사람이다. 국가로부터 버림 받았다.’
‘북한 공작원으로 활동했을 당시 여러 스파이 활동을 벌였다.
예전의 정보와 끈을 사용하면 지금 같은 일은 어렵지 않다.’
그 와중엔 실명으로 언급된 관계자나 기관명도 있다. 확인 결과, 국내의 일반인에겐 생소하지만 웹으로 조금만 품을 팔면 쉬이 찾을 수 있는 자료들이었다. 피해자 중에는 그의 말을 믿는 사람도 있다. 최세용의 행동, 지식, 언변, 몸의 단련 상태 등으로 보아 다른 납치단원과는 다른 인물이며 한눈에도 달라 보인다고 한다. 납치단원들은 그를 '사장'이라 칭한다.
피해자를 납치하여 범행을 저지르는 과정에서도 그는 아지트를 놔두고 홀로 호텔에서 잠을 자거나 다른 숙박시설을 이용하는 경우가 잦다. 그리고 외지에서도 인터넷을 활용할 수 있도록 장비를 챙겨 다니며 때때로 리더가 하지 않아도 될 일(처음부터 직접 납치 대상자를 만나거나 돌려보내는 일)을 처리한다.
관계자 및 피해자의 증언을 종합해 추론해 볼 때, 최세용은 함께 움직이는 납치단을 신뢰하지 않으며 의심이 가거나 문제가 생길 소지가 발생하면 작은 일까지 직접 챙기는 주도면밀한 성격의 소유자다. 이미 체포된 막내 김원빈에게 감금된 납치 피해자를 공항까지 따라가 돌려 보내는 일을 시킨 것은, 그를 신뢰한다기보다 언제든 잘라도 될 꼬리이며 만에 하나라도 쉬이 도망가지 못할 거라는 확실한 근거(김원빈의 가족관계, 주소, 사진 등 모든 신상정보 보유)가 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필리핀 현지에서도 아직 도주 중인 김종석과 현재 총상을 입고 체포되어 있는 김성곤이 번화가를 돌아다닌 제보는 많았다. 하지만 최세용에 대한 제보는 매우 적었고 그것도 착각한 경우가 많다. 김종석, 김성곤은 필요 이상의 신분을 노출하여 검문에 걸리거나 현지경찰을 매수하여 다시 도망가는 등의 위험에 처하기도 하지만 최세용은 철저히 자신의 행적을 지워 추적을 따돌린다. 그의 교묘함을 나타내는 특징이다.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거나 위험한 일이 생기면 행적을 감추고 어디로든 자취를 감출 수 있는 인물. 그리고 한국에서 여러 정보를 캐취할 수 있는 연결고리를 아직 확보하고 있는 인물.
특정 인물이나 조직이 도와주지 않는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5.
필리핀 내의 조직관계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과도 접촉했지만 이렇다 할 정보는 얻지 못했다.
‘우리들이 뭐 양아치도 아니고 그런 놈들 만나면 우리가 직접 족칩니다.’
진실은 알 수 없다.
최세용의 현지어 능력을 볼 때, 직접 현지 조직과 연을 맺고 있다기 보다는 국내에 적을 둔 조직의 도움을 받고 있을 확률이 높다. 하지만 필리핀에 진출해 있는 한국 조직의 수는 쉬이 파악할 수 있을 만한 숫자가 아니므로 한두 명의 관계자를 만난다고 해서 풀릴 일이 아니다. 필리핀에 진출해 있는 조직관계자를 모두 만나보는 것도 불가능 하거니와 설령 안다 해도 그들의 말을 신뢰하기 힘들다.
그나마 신빙성 있는 정보라고 생각된 것은 최세용이 이미 오래전에 필리핀을 떠났고 위조여권을 사용해 자유자재로 왕래하던 동남아를 떠나 러시아 근방의 나라로 자취를 감췄다는 것과 2007년 이전에도 많은 전과가 있었다는 사실 정도다.
조직관계자를 수소문해 만나는 것은 감수하는 위험에 비해 소득이 적었다. 다만 대부분의 관계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돈 천만 원, 이천만 원 걸면 필리핀 경찰들이 금방 잡습니다.
걔네들, 자기 손에 피 안 묻혀요.
돈 몇 푼이면 필리피노 애들이 감쪽같이 죽여주는데 뭐.’
얼마 전, 김원태 PD (2011 년 10월에 방영된 ‘그것이 알고 싶다-필리핀 납치 사건'의 담당PD) 와 만났을 때도 같은 이야기가 오갔다. 못 잡는 게 아니라 안 잡는다는 뜻이다.
서로의 생각은 같았다.
‘리더인 최세용을 잡지 않으면 사건은 해결되지 않는다.
그러기 위해선 외교통상부가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수 밖에 없다.’
지금까지 체포된 납치단원들은 결정적 증거가 나오지 않는 이상, 아직 잡히지 않는 이들에게 책임을 돌린다. 김종석이 체포된다 해도 최세용에게 책임을 돌릴 것이다. 정확한 피해자 수는 제대로 집계조차 되지 않는다.
6.
사건과 관련해 만난 MBC 배주환 기자 역시 답답하기는 매한가지다. 그는 필리핀 현지까지 직접 건너가 관련 촬영을 끝내고 뉴스로 사건을 공론화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MBC 파업과 시기가 겹쳐 방송을 내보내지 못하고 있다.
고민했다.
‘필리핀 현지로 가서 체포된 김성곤과 직접 대면한다면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7.
지난 6월 8일, 고민 끝에 편집장님과 필리핀행에 관련된 사항을 의논했고 신중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조언을 얻었다. 주말 동안 많은 생각이 머리에 떠올랐다. 내가 해야 할 일의 선은 어디까지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어디까지인가.
그리고 6월 11일.
‘안 가면 제가 후회할 것 같습니다.’
편집장님이 마지막으로 말했다.
‘가서 무슨 일 생기면 나한테 죄 짓는 거다.’
필리핀행에 관련된 사항은 철저히 보안에 부쳤다. 우회적으로 외교통상부 측에 알아본 결과, 언론사는 김성곤과 접촉할 수 없다고 한다. 관계자들과 필리핀 지인들의 도움을 얻어 그와 만날 수 있는 루트를 따로 찾아 놓았다.
필리핀행 표 예약을 마치고, 체포된 김성곤을 만나러 갈 준비를 했다. 그리고 현지로 들어가기 이틀 전, 경찰청으로부터 이상한 소식을 접한다.
체포된 김성곤이 본지의 납치사건 관련기사를 읽고 있다는 것이다.
추신 : 구체적인 사항은 다음 기사에 적도록 하겠습니다. 많은 분들의 관심이 필요한 사건입니다.
취재팀장 죽지 않는 돌고래
@kimchangkyu